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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본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과 동쪽은 스페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과 접해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840km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온화한 날씨이지만 북부와 남부, 해안과 대륙 간의 기후는 큰 차이를 보인다. 북부는 강수량이 많고 연평균 기온이 낮으나, 내륙은 연교차가 매우 크다. 또한 지중해의 영향을 받는 떼쥬 강 남쪽은 뜨거운 여름과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겨울이 계속된다. 봄과 가을에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며, 비가 오지 않는 뜨겁고 건조한 여름에는 모두들 바다로 향한다. 우기인 겨울철에도 비가 오지 않아 해마다 가뭄이 드는 남부와는 달리, 북부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궂은 날씨가 계속된다. 포르투갈에서는 눈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내륙의 쎄라 다 이스트렐라(Serra da Estrela)에는 가끔 눈이 내리기도 한다. 총인구는 990만 명(1995년 기준)이고, 총면적은 9만 1831km2이다. 본토는 8만 8797km2이며, 아소레스(A res) 군도는 2329km2이며, 마데이라(Madeira) 군도는 778km2이다. 주요 강으로는 도루(Douro:322km), 떼쥬(Tejo:275km), 과디아나(Guadiana:260km), 몬데구(Mondego:260km) 강 등이 있다. 좁은 국토인데도 포르투갈 본토는 지리적 다양함을 갖는다. 떼쥬 강은 국토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데, 이 경계선을 축으로 하여 기후, 풍경, 거주 양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II. 역사 1. 기원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을 일컫는 루지타니아(Lusitania) 지역이 포르투갈의 근간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 가장 먼저 거주한 민족은 이베로인이며,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7세기~B.C. 6세기에 카르타고인과 그리스인이 반도에 나타났으며, 특히 그리스인은 반도의 남동부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소개하였다. B.C. 8세기~B.C. 6세기에 켈트족이 침입하였고, B.C. 218년에는 로마인이 침입해 왔다. 루지타니아인들의 강력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B.C. 193~B.C. 25년까지 약 150년 동안 루지타니아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 로마화 과정 속에서 루지타니아인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 관습 대신 새로운 생활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때 로마인들에 의하여 전해진 라틴어는 포르투갈어의 기원이 되었고, 이후 기독교도 전파되었다. 409년부터 게르만족이 침입하여 711년 이슬람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지배하며 영향을 끼쳤다. 711년 북아프리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하여 무어인이라 불리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1249년에야 비로소 축출되었다. 5세기에 걸친 무어인의 지배 동안 아랍 문화의 영향은 매우 컸다. 쌀, 면화, 사탕수수, 레몬 등 새로운 경작법이 유입되었고, 저수지, 수로 등이 축조되어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 성에서 이슬람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며, 약 700여 개의 아랍어가 포르투갈어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무어인의 영향이 미치기는 했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북부 산악 지대로 들어가서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 저항하였다. 2. 나라의 형성과 독립(11세기 중반∼1385)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7세기로 거슬러올라가 도루 강의 북쪽에 위치한 포르투칼렌스(Portucalense) 백작령에서 나왔다. 십자군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11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인과 무어인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런 가운데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수호 정책은 미뉴 강과 떼쥬 강 사이에 위치한 포르투칼렌스 백작령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 백작령은 레온 왕국의 서녀 테레사(Teresa)와 결혼한 프랑스의 동 엔리케가 통치하였다. 1128년 동 엔리케가 죽은 뒤 동 엔리케와 테레사의 아들 아퐁수 엔리케(Afonso Henrique)는 어머니 테레사의 섭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무어인을 반도에서 축출하였으며, 영토를 팽창시키고, 카스티야 왕국에 대항해 싸우기도 하였다. 1140년 아퐁수 엔리케는 스스로 왕의 지위에 올라 포르투갈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고, 1179년에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교황에 의하여 독립 왕국의 왕으로 선언되었다. 1249년 아퐁수 3세는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의 남부 알가르브 지방을 무어인에게서 다시 정복함으로써 이슬람과의 투쟁에 막을 내렸다. 13세기 중엽은 농업과 무역, 조선업의 발전을 가져온 평화의 시기였으며, 1290년에는 동 디니스(D. Dinis)가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과 장인들의 위상이 높아졌고, 1254년에는 일종의 의회 제도인 궁전 회의에 최초로 시민 대표가 참여하게 되었다. 14세기 중엽, 포르투갈은 인구의 현격한 감소를 가져온 흑사병에 타격을 받아 포르투갈 전역에 사회·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왕위를 계승할 자식없이 동 페루난두가 죽자 포르투갈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졌다. 동 페르난두의 외동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한 카스티야의 왕이 포르투갈에 대한 지배를 주장하였으나 아비스 기사단의 동 주앙이 시민 세력을 등에 업고 카스티야를 물리침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제2왕조인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3. 영토 확장에서 독립의 단절까지 (15∼17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은 지리적 조건, 해양 문화의 전통,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요인 등에서 비롯하였다. 즉 경제적으로 점점 위축되고 있던 귀족 계급과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상인을 통해 들여오던 비싼 향료를 직접 수입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찾으려 했으며 (나침반의 사용으로 항해술이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포교를 위해서도 (교황청의 지원과 승인 아래 원정대에 항상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해외 영토의 확장을 필요로 했다. 항해 왕으로 불리는 동 엔리케는 15세기 초에 포르투갈의 남쪽인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사그레스(Sagres)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해상 활동을 시작하여, 마데이라와 아소레스 군도를 발견하였고 1460년 기네아 만에 도착한 후 앙골라에 닿았다. 1498년 인도로 길을 찾아가면서 모잠비크에 도착했고, 1488년 인도의 희망 봉에 도착하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na)의 인도 항로 발견으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은 절정에 이르렀다. 1493년 콜럼버스의 인도 발견 소식으로 그 곳에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스페인과의 갈등이 있었으나, 교황의 개입으로 1494년 토르데실랴(Tordesilha) 조약이 체결된 후 해결되었다. 즉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카부 베르드(Cabo Verde) 제도의 서쪽 370레구아(당시 거리의 단위)에 그어진 자오선을 통하여 서반구는 스페인, 동반구는 포르투갈에 권리가 인정되어 포르투갈은 동양으로 가는 아프리카 남쪽의 우회 항로를 보장받음으로써 남대서양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은 인도에서 포르투갈의 패권을 잡기 위해 인도로 가던중 브라질을 발견했다. 아시아에 대한 포르투갈의 팽창도 계속되었는데 말래카, 중국 등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에는 조총과 화약을 전달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 전역을 답사하기도 했으며, 마카오를 획득하였다. 이 같은 영토 확장은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유럽에 경제·사회적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진귀하고 비싼 물품이었던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포르투갈인들은 마데이라와 대서양의 다른 섬들에 설탕 공장을 세우고 생산을 증가시켜 전 유럽인들이 설탕을 소비하게 하였고, 브라질에서 유입된 사탕수수 경작은 브라질을 설탕의 생산국으로 만들어 유럽 시장을 장악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세금의 징수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또한 인도 항로는 동양과의 교역 중심지를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 이탈리아 도시들을 제치고 리스본이 동양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16세기에는 `마누엘 양식'이라 불리는 독창적인 건축술이 성행했으며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성당과 벨렝 탑 등이 마누엘 양식이다) 문학 역시 황금기를 맞았다. 1578년 알카세르 키비르(Alc er Quibir) 전투에서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다시 한 번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이 생겼다. 왕위 계승의 지원자 가운데서 가장 세력 있는 사람은 스페인 왕국의 펠리페 2세(Filipe II)였고 1581년 포르투갈의 궁정 회의에서 펠리페 1세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되었다. 그후 60년 동안 펠리페 왕조가 포르투갈을 지배하며 포르투갈을 좌지우지하였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앙골라, 브라질 등 포르투갈 식민지가 스페인과 전쟁중이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의 통치가 강화되면서 포르투갈인의 대규모 저항이 시작되었다. 저항자들은 국내 상황과 유럽의 정치적 특성을 이용하여 스페인의 대표자를 전복시키고, 동 주앙 4세를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언함으로써 스페인과의 투쟁을 시작했다. 이 독립 전쟁은 20년 이상 계속되었고, 포르투갈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1668년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이 완전히 인정되었고 단지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만이 스페인의 소유로 되었다. 그후 18세기 중엽까지 포르투갈은 평화롭고 풍요로웠다. 브라질에서 들어오는 많은 양의 금과 다이아몬드는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여 국방 정책이나 중요한 문화 유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재생산을 위한 건강한 경제로 이끌지 못하고, 지나치게 수입에 의존하여 도리어 경제를 고갈시켰다. 브라질에서 금이 가장 많이 유입되던 동 주앙 5세 때는 엄청난 수입의 대부분을 왕실 치장에 소비하였고, 모든 자재를 수입하여 당시까지는 제일 큰 마프라(Mafra) 수도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755년에 리스본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퐁발(M. Pombal) 재상의 뛰어난 복구 정책으로 새로운 리스본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절대 왕정과 귀족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는 동안, 왕정을 무너뜨린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실려 오는 혁명의 바람은 포르투갈에도 불어왔다. 이에 포르투갈은 영국,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군에 대항하였다(1794). 1807년, 주앙 6세와 왕실은 브라질로 이주했고, 포르투갈은 세 차례 프랑스 군대의 침입을 받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오늘날 프랑스의 박물관과 도서관에서는 볼 수 있는 많은 예술품들을 약탈당했다. 한편 포르투갈 왕조에 의해 포르투갈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한 브라질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부재, 브라질 항구의 개방, 영국과의 상업 협정으로 포르투갈의 경제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포르투갈 군대에 대한 영국의 간섭은 국민들에게 반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프랑스 이념을 바탕으로 한 1820년의 혁명은 포르투갈 왕정을 무너뜨렸다. 4. 입헌 왕조로부터 공화정 선포까지(1822∼1910) 혁명은 브라질에 있던 왕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했고, 1822년 입법·사법·행정을 분리하는 자유주의 헌법을 선포하게 했다. 입헌 왕조의 성립은 평화롭지 못했는데, 주앙 6세의 또 다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826년 왕의 죽음은 왕위 계승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며 절대주의로의 복귀로 이끌었고 브라질의 전 황제인 동 페드루(D. Pedro)가 이끈 자유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야기시켰다. 1832년과 1834년의 시민 전쟁에서 자유주의자가 승리하였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고, 자유주의자들과 절대주의자들의 대립은 오랫동안 전국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19세기 중엽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은 산업 혁명으로 생겨난 농업 기술과 새로운 산업의 도입과 더불어 경제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에서의 지배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탐험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미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탐내고 있었고, 1890년 영국은 포르투갈에게 아프리카 탐험 계획을 포기하라는 최후 통첩을 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저항하였지만 결국 굴복하였다. 지식인과 정치가들 사이에 공화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그 이념은 군대에까지 파급되었다. 그후 공화주의자들은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1891).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왕정은 독재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왕이 암살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5. 제1공화정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1910년 혁명이 발발하여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고 1916년 앙골라, 모잠비크 등 식민지를 수호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다. 그후 1924년 다시 혁명이 일어나 의회를 해산하고 3권 가운데 입법과 행정권이 동일한 정부 기구에 의하여 운영되는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32년 안토니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 io Oliveira Salazar)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36년 동안의 1인 독재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회주의 독재는 마르셀루 카에타누(Marcelo Caetano)에 의해 이어졌지만 1974년 4월 25일 기나긴 아프리카 식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군부 혁명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5년 앙골라가 독립함으로써 수세기에 걸친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 끝나고 1975년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안토니우 이아네스(Ant io Eanes)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0년에 마리우 소아레스(M io Soares)가 수상으로 임명된 후, 카바쿠 실바(Cavaco Silva)에 이르기까지 유럽 통합과 함께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해 나갔고, 1996년에 안토니우 구테레스(Ant io Guterres)가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되었으며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III. 정치 포르투갈은 대통령제 공화국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일 뿐 정부는 수상이 이끌어 나간다. 1995년까지는 사회당의 마리우 소아레스가 대통령으로, 사회 민주당의 카바쿠 실바가 수상으로서, 서로의 당을 견제하며 포르투갈을 이끌어 나갔다. 취임 기간 동안 카바쿠 실바는 EC(유럽 공동체) 연합국의 극빈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하여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도로 건설 등을 통한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다. 그러나 점점 늘어가는 실업과 계속되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남부 농업 경제의 파탄, 게다가 거세게 몰려오는 수입 농산물의 개방 압력은 농민들의 원성을 샀고,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어 사회 민주당이 페르난두 노게이라(Fernando Nogueira)를 새 당수로 하여 수상 자리를 노렸으나 1996년 사회당의 안토니우 구테레스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안토니우 구테레스 역시 경제 발전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으며, 자국 내 해외 산업의 유치를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사회당에서 대통령, 사회 민주당에서는 수상을 당선시켜 양 당이 균형을 이루던 정계가 대통령과 수상 모두 사회당에서 나온 후 어떤 변화를 겪을지 미지수다. 포르투갈의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 민주당(PSD), 사회당(PS), 단일 민주 연합(CDU) 등이 있다. IV. 경제 국내 총생산:780억 달러(1995년 기준) 1인당 GNP(국민 총생산):8618달러(1993년 기준) 통화 단위:에스쿠두(ESCUDO), 1달러=150.3에스쿠두(1996년 12월 기준) 국가 재정:수입=317억 달러, 지출=342억 달러(1993년 기준) 주요 자원:석탄, 다이아몬드, 동, 은, 망간, 석회석 주요 공산품:섬유, 의류, 종이 제품, 코르크, 목재 주요 농산물:밀, 옥수수, 감자, 올리브, 포도 무역:수출=220억 700만 달러, 수입=290억 500만 달러(1995년 기준) 실업률:7.2%(1995년 기준) V. 문화와 생활상 1. 언어 포르투갈어는 로마인들의 점령을 받은 지역에서 파생된 라틴어 가운데 하나인데, 포르투갈의 민족 시인인 카몽이스(Cam s)는 그의 저서 『우스 루지아다스 Os Lusiadas』에서 그들의 모국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통하여 그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루는 비너스가 올림푸스 신전에서 제우스 신에게 말하기를, 포르투갈 뱃사람들이 행하는 것 가운데 가장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그들의 언어라고 했다. 비너스 여신은 그들의 말하는 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을 사랑했고, 작은 배에 그들의 언어를 담아 파도를 이용해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인도네시아의 티모르까지 흘러가게 하였다. 위의 전설에서 말해 주듯이 포르투갈어는 독특한 비모음으로 매우 달콤한 느낌을 주는데, 14세기 포르투갈의 지리상의 대발견과 팽창 사업과 함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오늘날 포르투갈어는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마카오, 아프리카의 몇몇 섬에서 모두 1억 9000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2. 인종 원주민인 이베로족과 켈트계의 혼혈은 `루지타누'라 불리는 포르투갈인의 근간이 된다.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이슬람인과의 혼혈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게르만의 침입에 의한 혼혈로 파란 눈, 금발의 북유럽인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포르투갈인도 간혹 볼 수 있으나, 대부분의 포르투갈인은 작은 키에 갈색 피부, 갈색 눈,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지중해인의 육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종교 인구의 95%가 카톨릭 신자이나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실천하지 않는 크리스찬'들이 대부분이고, 성당을 찾아 미사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년층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서양인에게 기독교가 생활의 일부이듯이 포르투갈인들의 최대 명절은 파스코아(Pascoa)라 불리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이다. 4. 음식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포르투갈인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고 풍성한 식탁을 가진 민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5세기와 16세기의 지리상의 대발견과 함께 포르투갈은 일련의 식품들을 유럽에 소개했다. 그 가운데서 향료(후추, 생강 등), 차, 쌀, 파인애플 등은 많이 애용되었다. 포르투갈 해안에서 잡은 가자미, 연어, 고등어, 갈치 등의 다양한 생선과 문어, 오징어, 새우, 조개 등의 해산물을 비롯하여,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물론 양고기, 염소고기, 토끼고기 등이 그들의 식탁을 장식하는 요리의 주된 재료이며 리스본을 비롯한 남부 지방에는 간혹 말고기를 즐기는 미식가들도 있다. 또한 닭고기, 칠면조, 오리 고기 등도 그들의 식탁에 자주 오른다. 위의 재료를 이용한 음식과 함께 먹는 것이 바로 쌀과 감자인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유럽의 중국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쌀을 즐겨 먹는다. 감자는 주식으로 사용되는 만큼 가격이 아주 싼 편인데 대개 1kg에 45∼100에스쿠두스(약 250∼500원)이다. 포르투갈 요리에 기본으로 사용되는 양념은 올리브 기름과 토마토, 양파이다. 물론 육류의 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올리브 기름과 양파, 토마토는 물기가 있는 거의 모든 요리에 사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은 삶거나 굽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만든 담백한 맛의 요리를 즐기기도 한다. 대부분의 라틴계가 그러하듯이 포르투갈인 역시 마요네즈보다는 올리브 기름과 식초, 소금을 이용한 샐러드를 주로 먹는다. 소의 내장과 콩, 토마토 소스를 이용해 만든 `트리파스(Tripas:소의 내장이라는 포르투갈어)' 요리는 겨울에 뜨겁게 먹는 맛이 일품인데, 특히 포르투 지방이 유명하다. 포르투갈인이 일요일 점심에 즐겨 먹는 요리 가운데 하나인 `코지두 아 포르투게자(Cozido Portuguesa)'는 쇠고기, 돼지고기, 여러 가지 소시지, 훈제된 돼지 귀 등을 삶아, 삶은 양배추와 무, 홍당무, 감자 등과 함께 먹는 요리인데, 고기의 기름기가 제거돼 담백한 맛을 내는 음식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요리는 `바칼랴우(Bacalhau)'이다. 이 요리는 거대한 대구를 소금에 절여서 2~3일 동안 물에 담가 소금기를 뺀 후 요리한다. 이 바칼랴우를 사용해서 1000가지 이상의 요리를 만들 뿐 아니라,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등 명절 때 새끼양 요리와 함께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리스본을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칠면조 고기를 먹지만, 북부 포르투갈인들은 이 바칼랴우를 주로 먹는다는 점이다. 바칼랴우는 구이, 또는 삶아서 식초와 올리브 기름을 쳐서 먹기도 하고 달걀, 크림 등 여러 가지 재료와 함께 먹기도 한다. 해물 요리 역시 포르투갈의 유명한 요리이다. 오징어, 문어 등을 거의 먹지 않는 북유럽인들과는 달리 포르투갈에서는 이런 음식들을 매우 즐겨 먹는데, 우리 나라의 오징어 튀김과 비슷한 `룰라스 아 세르빌랴나(Lulas Servilhana)'와 문어와 쌀을 이용해 만든 `아로스 드 폴부(Arroz de Polvo)'는 대중적인 요리이다. 새우 요리 역시 빠질 수 없는 요리인데, `감바(Gamba)'라고 불리는 왕새우를 소금과 고춧가루 물에 데친 요리는 조금 비싸긴 하지만, 새우를 좋아하거나 새우 본래의 맛을 즐기기 원하는 사람이면 꼭 먹어 볼 만하다. 여러 종류의 조개, 새우, 가재 등과 쌀을 토마토와 함께 넣어 만든 `아로스 드 마리스쿠(Arroz de Marisco)'는 해물의 모든 맛을 함께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요리이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맛있는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서슴없이 `빵'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빵 맛은 정말 일품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빵이라는 말이 포르투갈어의 `빵(P )'임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포르투갈에서 `빵'을 말할 때는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순수한 빵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케이크 등과 같이 단 종류의 빵은 `볼루(Bolo)'라고 부른다. 이 빵은 밀가루뿐만 아니라, 보리, 옥수수, 호밀 등 다양한 곡물로 만들며, 재료에 따라 빵의 맛과 질감이 틀려지는데, 잼이나 버터 등과 곁들여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정말 맛있다. 브라질의 빵도 포르투갈의 빵만큼 맛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많은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브라질로 이주해 주로 빵집을 열었고 그들의 제빵 기술을 그 곳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요리는 아니지만 포르투갈의 과일 역시 언급하고 지나갈 만한 가치가 있다. 겨울의 오렌지, 3,4월의 체리, 한여름에 차갑게 먹는 멜론과 가을날의 소금에 구운 밤은 꼭 먹어 볼 만하다. 포도주 포도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포르투갈은 오래된 포도주 양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포도주 생산은 자연적인 요소와 인적 요소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화되는데, 기후, 토양, 포도 종류, 포도 재배와 양조 공정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포도주로 생산된다. 또 이 포도주들은 각 지역의 이름에 따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 포도주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비뉴스 드 콘수무(Vinhos de Consumo:알코올 도수가 낮고 주로 식사와 함께 마시는 소비 포도주)와 비뉴스 제네로주스(Vinhos Generosos:독한 포도주)이다. 비뉴스 드 콘수무는 다시 `비뉴 베르드(Vinho Verde:숙성되지 않은 포도주)'와 `비뉴 마두루(Vinho Maduro:숙성시킨 포도주)'로 나뉜다. 비뉴 베르드는 적포주이건 백포도주이건 도루 강과 미뉴 사이의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포도주는 가스가 있고, 알코올 도수가 낮으며, 오래 숙성을 시키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가 비교적 높은 비뉴 마두루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며 전국에 걸쳐서 생산된다. 알렌테쥬(Alentejo) 지방과 비제우(Vis ) 지방의 `다웅(D )'이라고 이름 붙여진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는 `로제(Ros '라고 불리는 포도주처럼 세계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데, 트라스우스몬트스(Tr osMontes), 리바테쥬(Ribatejo), 알가르브 지방에서 생산되는 붉은빛이 도는 백포도주를 생산할 때와 유사한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비뉴스 제네로주스는 너무도 유명한 `포르투 와인'을 생산하는 도루 지역이 유명하다. 백포도주이건 적포도주이건 알코올 도수가 19~22% 사이인데 참나무로 만든 통이나 병 안에서 숙성되며, 오래될수록 높은 가치를 지닌다. 또 다른 포도주 유명 지역으로는 마데이라, 아소레스, 세투발(Set al) 등이 있다. 포도주를 어떻게 보관해서 어떻게 따라서 어떤 음식과 먹느냐의 문제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포도주는 우선 빛이 없고 흔들림이 없으면서 약 70%의 습도가 유지되는 선선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에 보관한다. 백포도주나 비뉴 베르드의 경우에는 약 10℃가 가장 알맞은 보관 온도이며 적포도주의 경우는 약 16℃인데 식사와 곁들이는 적포도주는 눕혀서, 독한 적포도주는 세워서 보관한다.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준비에서는 시음을 위한 컵, 온도계, 포도주 따는 기구 등 다양한 종류의 도구들이 사용되는데 특히 포도주를 딸 때 코르크 마개를 심하게 손상시키지 않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포도주 병을 흔들지 말고 부드럽게 코르크 마개를 열어야 하며, 대접하기 전에 항상 먼저 시음을 해 보아야 한다. 레스토랑 등에서는 포도주를 주문하면 시중드는 사람이 포도주를 딴 후 손님 가운데서 한 사람이 시음한 후, 좋다는 사인이 있은 다음에야 포도주가 서빙된다. 적포도주는 마시기 두 시간 전에 뚜껑을 열어 `보관된 냄새'를 없애야 하며 14~18℃를 유지시켜 마셔야 한다. 백포도주는 마시는 날 차게 해야 하며 마실 때의 적정 온도는 8~10℃ 사이이다. 어떤 요리와 함께 무슨 포도주를 마시느냐는 문제에 엄격한 규칙은 없지만, 개인의 기호와 함께 생선과 조개 요리에는 일반적으로 비뉴 베르드, 비뉴 마두루 백포도주를 곁들이고, 고기 요리에는 적포도주를 곁들인다. 비뉴스 제네로주스인 포르투 와인이나 마데이라 포도주는 각 지역의 단 후식과 곁들이면 일품이며, 좋은 질의 치즈와도 잘 어울린다. 5. 도시간의 비교(지방색) 지방 자치제가 발달한 포르투갈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큰 차이는 볼 수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떠나는 농촌 젊은이들의 숫자가 갈수록 증가해 북쪽의 트라스우스몬트스 지역이나 남부의 베자(Beja) 지역에는 갈수록 빈집이 늘어가고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특히 계속되는 남부 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전통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베자 지방의 인구는 점점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르투갈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커다란 도시들은 모두 항구를 끼고 발달했다는 것이다. 수도인 리스본이 그렇고 포르투갈의 제2도시인 포르투 역시 항구 도시이다. 리스본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이며, 포르투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코임브라(Coimbra)는 가장 전통적인 대학 도시로 교육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포르투갈에도 지방 감정이 존재하는데 리스본과 포르투는 오랜 라이벌 의식으로 서로를 깎아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포르투 사람들은 리스본 사람들을 `알파시냐(Alfacinha)'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파시냐는 포르투갈어로 상추라는 뜻인데, 아마도 상추만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 리스본 사람들을 빗대어 말하는 듯싶다. 또한 포르투 사람들은 리스본 사람들을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심지어 “포르투가 돈을 벌면, 리스본은 쓰기만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리스본 사람들은 포르투 사람들을 `트리페이루(Tripeiro:트리파스 요리를 먹는 사람들―내장 요리를 먹는 사람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경제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공업의 중심지인 포르투나 수도로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리스본이나 모두 그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6. 결혼관 점점 늘어가고 있는 이혼율과 더불어 동거의 증가도 간과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이기도 하다. 고학력·고소득층일수록 결혼을 늦게 하며,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만 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7. 여성 포르투갈의 지극히 평범한 20대, 30대, 40대, 50대의 여성 한 명씩의 프로필을 보면 그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20대 이름:파티마, 나이:21세, 직업:코임브라 대학교 법학과 3학년 재학. 파티마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머니는 우체국 직원이다. 여동생이 한 명 있다. 그녀는 명문인 코임브라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그로 인해 자부심도 느낀다. 대학 입학 후에도 꾸준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 과목도 낙제하지 않고 3학년까지 무사히 진급하였다(포르투갈은 유급 제도가 있어서 5년제 대학을 7∼8년 이상 다니는 학생들이 많을 정도로 졸업이 어렵다). 수업이 있는 목요일까지만 학교 근처의 세 들어 있는 아파트에서 같은 또래의 7명의 여학생들과 자취를 하고, 수업이 끝나는 목요일 오후에는 기차로 1시간쯤 걸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남자 친구가 애인이며, 장래 희망은 변호사이다. 그러나 리스본 같은 도시로 갈 생각은 없으며, 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살기를 원한다. 30대 이름:콘세이사웅, 나이:31세, 학력:중졸, 직업:전자회사 인사부 근무.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으며, 그녀의 남편은 자동차 페인트공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에 공원으로 들어가 5년간 근무한 후에 `Job Opportunity'라는 기회를 통하여 사무실 근무자로 뽑힌 행운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집으로 주택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녀의 최대 두려움은 실업인데 왜냐하면 그녀가 다니는 회사가 최근 몇 년 동안 리엔지니어링으로 인해 감원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취미는 없으나, 저녁식사 후 집 근처의 카페에서 남편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40대 이름:아들라이드, 나이:43세, 학력:전문대졸(비서 과정), 직업:전자회사 인사부에서 직원들의 의료 보험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음. 그녀는 이 회사의 비서로 입사해 사장 비서까지 지낸 베테랑이다. 결혼과 동시에 지금의 부서로 옮겼다.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하고 현재는 12세 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전남편 역시 그녀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매달 아들의 양육비를 지불한다. 20년 근속 상장을 받기도 하였다. 5년 전에 재혼할 뻔했으나, 지금은 돈이 많고 안정된 남자가 아니라면 굳이 재혼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주중엔 회사가 끝난 후 아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에 텔레비전을 보거나, 아주 가끔 남자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전남편이 아들을 데리러 오고, 주말을 아버지의 집에서 보내고 돌아온다. 그녀는 아들이 없는 동안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 50대 이름:미모자, 나이:52세, 학력:국졸, 직업:가정 주부. 그녀는 옷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였으나, 회사가 파산하면서 직업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남편은 우체국 직원이었으나, 정년 퇴직 후 매달 12만 에스쿠두스(약 60만 원)의 연금을 받고 있고, 그녀 역시 매달 2만 5000에스쿠두스(약 12만 5000원)의 연금을 받고 있으나, 생활에 보태기 위해 남의 옷을 수선하거나 간단한 옷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미혼의 아들은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녀는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녀의 최대 걱정거리는 아들이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이고, 최대 소망은 집을 사는 것이다. 8. 교육 기본 교육(6세∼15세):의무 교육 기초 교육(1∼4학년), 예비 교육(5∼6학년), 중등 교육(7∼9학년) 고등 교육(10학년∼12학년) A분야:기초 과학, B분야:기술 과학, C분야:사회 경제, D분야:인문 지리, E분야:예술 대학 교육 대학(5년), 기술 학교, 전문 대학(3년) 9. 스포츠 포도주 없는 포르투갈을 상상할 수 없듯이 축구 없는 포르투갈 역시 상상할 수 없다. 모든 유럽인들이 그러하듯이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는 축구다. 그래서 그들은 에우제비우(Eus io) 같은 축구 영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포르투갈인이 즐기는 축구 경기는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들이 펼치는 국내 리그인데, 그 가운데 해마다 1,2,3위를 다투는 라이벌팀들이 있고, 많은 스타를 가지고 있는 팀답게 가장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 리스본의 벵피카(Benfica)와 스포르팅(Sporting), 포르투의 F. C. 포르투(F. C. Porto)가 그런 팀인데, 특히 이들의 경기는 리스본과 포르투의 지역 감정과 연관되어 더 많은 흥미를 자아낸다. 축구 다음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는 하키인데, 포르투갈이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몇 안 되는 운동 경기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로자 모타(Rosa Mota)라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마라톤 스타를 배출한 육상도 포르투갈인들이 관심 있게 바라보는 스포츠이며,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하여 선수 층도 얇고 기술도 부족하지만 페드루 레미(Pedro Rammy)라는 자동차 레이서에 열광할 정도로 자동차 레이스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스포츠를 몸소 하기보다는 보는 것을 더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10. 전통 문화 파도 파도(Fado)는 포르투갈의 민족 음악이라고 여겨지는데 기본적으로 리스본과 코임브라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파도의 기원에 대해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데, 단지 10세기부터 시작된 리스본의 파도는 아마도 브라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고, 항구 도시이면서 수도인 리스본의 독특한 환경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알려진다. 코임브라 파도는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것처럼, 오랜 대학 도시인 코임브라에서 태어났다. 검은색 망토를 두른 코임브라 대학의 학생들은 가사뿐만이 아니라 멜로디까지도 리스본의 파도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파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리스본의 파도이건 코임브라의 파도이건, 파도는 이루지 못하는 사랑과 그리움에 대해 말하는 슬픈 노래인데, 불이 반쯤 켜져 있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항상 기타, 비올라와 함께 불려진다. 아줄레쥬 포르투갈을 여행하다 보면 성당이나, 기차역 또는 오래된 집의 건물 벽을 장식하고 있는 푸른빛의 타일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줄레쥬(Azulejo)라고 부른다. `작은 돌'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에서 파생된 단어 `아줄레쥬' 예술은 기독교인의 재정복 이후에 이베리아 반도의 민족에게 남겨진 이슬람 문화 가운데 하나이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지리상 발견과 팽창의 결과로 커다란 경제적 혜택 속에 살았고, 교회와 궁전의 대건축 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스페인에서 수입하는 아줄레쥬로는 더 이상 그 양을 충당하지 못했고 결국은 포르투갈 국내에서 생산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이미 존재했던 모델을 베끼기 시작했다가 점차 아줄레쥬의 매끄러운 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기술로 발전하였다. 아줄레쥬는 이렇게 장식적인 면을 위하여 발전해 왔는데, 건물 내부의 벽 전체를 덮게 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흰색과 푸른색의 아줄레쥬가 유행했는데, 그 위에는 종교적 내용이나 독립 전쟁 등의 역사적인 내용을 그렸다. 18세기에는 역사적 내용을 담은 아줄레쥬가 유행했는데, 예술가들의 질 높은 기술은 미세한 묘사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온 심각한 경제적 혼란은 아줄레쥬 예술의 쇠퇴를 가져왔다. 실제로 생산이 거의 멈추었고,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상업 협정이 서명된 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아줄레쥬가 사용되었는데, 그들은 어두운 거리에 색깔을 주기 위해 집 밖의 벽을 아줄레쥬로 덮었다. 이런 경향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강화되었고 교회나 내부 장식을 위해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어쨌든 건물의 내부와 외부 장식에 모두 사용되었다. 20세기에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 기차역, 시장, 상점 등 공공 건물에 아줄레쥬를 사용하였다. 11. 축제 지방 자치제가 발달한 포르투갈에는 각 지방의 놀이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각 지역의 수호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마을 축제이다. 이 수호 성인 축제는 전국에서 거행되는데, 포르투갈인이 수세기 동안 지켜 온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도 리스본에서 6월 12일 밤과 13일에 걸쳐 폭죽을 터뜨리며 시작하는 성 안토니우(S Ant io) 축제이다.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로 이루어진 구시가지에서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바치려고 사고 파는 만즈리쿠(Manjerico:박하과의 풀로서 매우 강한 향기가 난다)와 함께, 적포도주와 1년 중 이 기간이 제일 맛있다는 정어리 소금구이, 구운 피망을 먹는다. 포르투갈의 제2대 도시인 포르투에서는 6월 23일 밤과 24일에 걸쳐 성 주앙(S Jo ) 축제를 펼친다. 도시 전역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노래를 부르고 밤새 춤을 춘다. 특이한 것은 포르투 사람들은 밤새 플라스틱 망치와 마늘대를 가지고 걸으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서로 때리고 장난을 치면서 포스(Foz) 등의 바닷가나 시내 중심으로 향한다. 새벽까지 플라스틱 망치 하나만 가지고 바닷가 근처에서 그렇게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이 축제만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이날 이 곳 사람들은 전통적인 비뉴 베르드로 재운 염소구이를 먹는다. 광활한 알렌테쥬 지방의 도시 에보라( ora)에서는 성 페드루(S Pedro) 축제가 6월 28일과 29일에 걸쳐 거행된다. 이 축제에 맞춰 `장'이 서는데 이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토속 상품과 전통 춤이 판매, 전시되고 행해진다. 12. 교통 기차 포르투갈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기차와 이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외로 연결되는 기차가 있다. 리스본코임브라포르투브라가를 잇는 열차는 완행, 알파(Alfa), 인테르 시다드(Inter Cidade)가 있는데 알파와 인테르 시다드는 비교적 쾌적하다. 리스본포르투행 인테르 시다드는 3시간 30분 가량 소요되며, 가격은 편도 1900에스쿠두스(약 9500원, 1995년 기준)이다. 고속 버스 로도비아리아(Rodovi ia)라고 불리는 국영 고속 버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요금은 기차와 거의 비슷하다. 여러 회사에서 운영되는 고속 버스는 회사들간의 경쟁 때문에 요금이 조금 싸고, 밤늦게까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내 교통 도시 구석구석을 운행하는 시내 버스의 요금은 140에스쿠두스(1995년 기준)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리스본에는 짧은 노선이긴 하지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비행기 알가르브 지방의 파루, 리스본, 포르투에는 공항이 있는데, 국내 비행 요금이 꽤 비싼 편이다. 리스본포르투간의 비행 시간이 40분 정도인데 반해 비행기 요금은 왕복 15만 원 정도이다. 13. 관광지 수도인 리스본은 떼쥬 강변의 벨렝 탑을 비롯해서 비교적 우리 나라에 잘 알려져 있으므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고 그 밖에 방문할 만한 관광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알가르브(Algarve) 포르투갈의 이 남해안 지방은 세계적인 여름 휴양지로 유명해서, 유럽 다른 국가들의 왕이나 공주 또는 수상의 피서지로 선택되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볼 수 있을 정도다. 이슬람의 오랜 지배로 인한 영향과 자취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뜨거운 태양과 따뜻한 바닷물을 찾으러 온 외국인들로 가득 찬 한여름의 알가르브도 멋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가지고 있는 3,4월의 알가르브는 더욱 아름답다. 알가르브가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 한 아랍왕의 왕비는 북유럽 출신이었고, 고향의 흰 눈을 그리워하다 못해 병이 났는데, 왕은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온 지역에 아몬드 나무를 심도록 명령했다. 아몬드 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의 알가르브는 온통 흰눈에 덮여 있는 듯한데 여유로운 해변과 더불어 참으로 아름답다. 이스피뉴(Espinho)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니스 해변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포르투갈 북부의 해안이다. 한여름에도 바닷물이 차가워서 수영을 즐기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피게이라 다 포스(Figueira da Foz) 1km가 넘는 폭과 3km에 달하는 백사장이 있는 거대한 해수욕장인데, 포르투갈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지만 카지노 등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에게는 권할 만하다. 나자레(Nazar 조그마한 해안 마을이지만 여름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휴양지이다. 그러나 이 곳 주민들은 오랜 그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특히 그들의 복장에서 알 수 있다. 거세게 밀려오는 상업적 관광업에도 불구하고 지켜가고 있는 그들 특유의 전통을 알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포르투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는 아랍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들과는 달리 가장 유럽적인 포르투갈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중심에 있는 건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건축물들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유명한 포르투 와인을 숙성시키는 포도주 창고를 비롯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등은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1834년에 세워진 볼사(Pal io da Bolsa) 궁전은 현재 증권 거래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모방해서 만든 아랍 홀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성 프란시스쿠(S Francisco) 교회에서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정교한 도금목 실내 장식을 볼 수 있다. 포르투갈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포르투갈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주제 사라마구(Jos Saramago)가 쓴 수필과 그 밖의 잡지, 신문 등에 나온 기사들을 소개하겠다. 최근 우리 포르투갈 사람들의 집에 전설적인 발명품인 토톨로투(Totoloto:포르투갈의 대중적인 복권 이름)가 떨어졌다. 수학을 싫어하고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우리 포르투갈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 짜서 숫자를 고르는 데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포르투갈의 복권은 0~49까지의 숫자에서 여섯 개 숫자를 골라 그 여섯 개의 숫자가 모두 맞으면 1등이 되는데 보통 선택한 숫자 위에 X 표시를 한다). `X' 자도 잘 알지 못하는 알렌테쥬 지방의 목동들에게까지 복권이 맞는 행운이 떨어져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각 가정의 저녁 시간은 전에 없이 즐거워졌다. 가장 어린 아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가르치기 전에 `X 하나', `X 둘'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미 많은 단어를 잊어버린 노할아버지에게도 기억 속에 있는 그 기적적인 단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대화에 끼워 준다. 이런 방법으로, 이 부유함의 열쇠는 어린이에게, 노인에게, 무식함에 친근하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위임했다. 아니, 모든 것을 위임했다. 접시 위에 있는 세 조각의 감자 튀김과 일요일에 방송되는 축구, 그리고 어쩌다가 주중에 끼여 있는 휴일에 우리 포르투갈인들은 행복해 한다. 우리는 단순한 기호를 가진 점잖고, 누군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친구의 친구에게조차 친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만족할 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가질 수 있는 재주가 있다. 우리는 착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인류에게 결코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좋은 일도 하지 않겠지만. 우리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렇다. 많은 것을 위임했다. 우리가 아직 동 세바스티앙(D. Sebasti )의 복귀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안개낀 아침에 떼쥬 강변을 바라보며 스페인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희망으로 날들을 보냈다. 우리가 더 이상 동 세바스티앙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참을성 있게 말했던 지난날에도 우리는 기적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100년이 지나기 전에 왕이 떠났던 모습대로 그렇게 젊은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리고 그 왕은 우리가 둘러앉아서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식탁을 가지고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항의하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호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결점이 되었다. ―주제 사라마구(Jos Saramago)의 수필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우리는 세계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항상 우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대해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포르투갈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항상 공통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는 가난한가? 부자인가? 애국자인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이다. 우리는 항상 사실의 진실을 기다린다. 사실은 이렇다. 38%의 포르투갈인이 안경을 사용하고, 2%가 채식주의자이다. 24%는 규칙적으로 담배를 피운다. 53%가 수표책을 가지고 있으며, 7%는 신용 카드를 가지고 있다. 단지 16%만이 매일 신문을 읽는다(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치이다). `Eurodata'라고 명시된 이 연구에는 12개의 EC 국가와 그 외 다섯 개 유럽 국가가 포함되어 있어서 1990년대의 포르투갈인과 보통 유럽 사람을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66%가 결혼을 했고, 38%만이 이혼·별거를 하고 있으며, 34%의 가정이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며, 43%의 가정이 쇼핑을 하는 사람은 주부이다. 일반적인 문화면에서 보면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민족이다. 우리는 쉽게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데 30%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알고, 25%가 영어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어에는 약해서 100명 가운데서 3명만이 독일어를 할 줄 안다. 우리는 라틴계이다. 심지어 위장까지도. 단지 62%만이 차를 마시며, 13%만이 설탕없이 차를 마신다. 우리는 인스턴트 수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단지 3%만이 이것을 맛보는데 성공했다). 피자나 다른 냉동 식품의 소비율도 유럽에서는 최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본 적도 없으니까. 유럽 내 여행에 대한 면을 보면 우리는 유럽에서 순위 안에 든다. 세계의 절반을 발견한 우리, 그러나 우리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장 적게 떠나는 민족이다. 단지 10%만이 외국 여행을 한다. 유럽 외에 여행을 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욱 적은데 단지 2%만이 여행을 한다. 포르투갈 남자는 말쑥하다. 다른 나라 남자들보다 훨씬 많이 `악취 제거제'를 사용한다. 덴마크 남자의 44%만이 그것을 사용하는 반면에 포르투갈 남자의 63%가 그것을 매일 사용한다고 말한다. 39%가 향수를 사용한다고 대답해, 유럽 평균인 37%를 앞지르고 있다. 포르투갈 여자들은 단지 33%만이 메니큐어를 사용하며, 24%만이 눈화장을 하고, 39%만이 립스틱을 바른다.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취미나 기호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포르투갈 사람들은 매우 독특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다. 거의 포르투갈인들의 반이(44.5%) 직불 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단지 10%만이 신용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로 미루어 포르투갈인이 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외형적으로는 포르투갈인이 돈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77.3%가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면 포르투갈인은 어떻게 그들의 돈을 사용할까? 96.9%의 학생들이 공립 학교에 다니고, 18.1%만이 국제 전화를 하며, 12.4%만이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56.4%가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며, 61.4%의 가정에 전화가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사실인 듯싶다. 그러나 48.2%가 우유를 마시며, 26.9%는 차를, 10.8%는 위스키, 3.6%는 포르투 와인을 21.8%는 포도주를 마신다. 1992년 통계에 따르면 포르투갈인은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아침식사를 하며 8시 30분에 일을 시작한다. 점심을 1시에 먹고, 8시에는 저녁식사를 한다. 그리고 11시 30분에는 대개 잠자리에 든다. 라틴 민족이 게으르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하루에 8시간 20분을 일해 단지 6시간 15분을 일하는 영국인에 비하여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