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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삼일절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보니, 올해 3월은 더 뜻깊은 시간이겠지요?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께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공교롭게 이번에 '행주산성'을 답사하게 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과 백성이 하나되던 426년전 그날을 생각하며, 그분들이 지키려 했던 끝내 지켜주신 호국 정신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삼가 호국영령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덤으로 '형재 이직' 선생 묘도 답사하기에 학창시절 배웠던 시조 두편.
오로시(烏鷺詩)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또한, 백로가-포은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奸臣) ·역신(逆臣)의 무리와 어울리지 말도록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풍유시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고,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때의 가객(歌客) 김정구(金鼎九)의 작품이라 하여 그 한역시(漢譯詩)가 실려 있는 것이 발견되어 작자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다. (출처-두산백과)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역사와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답사일 : 2019년 3월 10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행주산성(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5번길 89 덕양산 내)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강안(江岸)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고 있는 형태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같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와 회청색 경질토기 등의 조각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 수지문(手指文)이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북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확인할 수 없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특히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 장군이 대승을 이룬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구축하였다. [출처 고양시청]
[행주대첩 전투상황]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불과 두 달 만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일본군의 강한 기세에 곧 조선이 패망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진격은 주춤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593년 2월에는 평양성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조선군과 명군의 반격을 받아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내려왔다. 이에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은 한양의 일본군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행주 산성에 진을 쳤다. 일본군은 자신들을 추격하던 명군을 벽제관에서 크게 격파한 다음, 뒤에서 자신들을 공격할 지도 모를 행주 산성의 조선군까지 물리치려고 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 지휘하에 금천(衿川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태세를 갖췄다. 적장들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비롯해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의 세 봉행(奉行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騎)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성(城) 공격에 앞장섰다.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깃카와(吉川廣家)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矢石)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級)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권율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심봉원 · 심건 · 심희수 선생 묘(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50-4)
본관은 청송(靑松). 심홍부(沈洪孚)-심연(沈淵)-심용(沈龍)-심덕부(沈德符)-심온(沈溫)-심회(沈澮)-심원(沈湲)-심순문(沈順門)-심봉원(沈夆源)-심건(沈鍵)-심희수(沈喜壽)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심희수는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였다. 안으로는 사명(辭命: 왕명의 전달)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외국 사신의 접대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옥산군 이제 · 칠성수 이화 선생 묘(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1)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제(李躋), 자는 경보(敬甫)이다. 1429년(세종 11년) 태종의 4번째 아들인 근녕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 하양 허씨(河陽許氏)이다.
1442년(세종 24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윤(元尹)에 봉해졌고 1444년(세종 26년) 명선대부(明善大夫) 저천정(紵川正)에 올랐다. 1469년(예종 1년)에는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오르고 곧 정1품 군(君)이 되었다.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함안 윤씨(咸安尹氏)이며 슬하에 8남 3녀를 두었다. 1490년(성종 21년) 7월에 죽었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칠성수 이화는 증조 근령군 조부 옥산순 아버지 시안군으로 이어지는 가계. 신인(愼人)은 정3품 당하관(堂下官) 및 종3품인 종친의 처에게 주던 작호(爵號)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4) 고양향교(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6)
조선 숙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으며, 명륜당(明倫堂)·전사청(典祀廳)·외삼문(外三門)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80년대 복원되었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직 선생 묘(경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51-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증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인민(李仁敏)이다.
1377년(우왕 3년)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되고, 그 뒤 사헌지평·성균사예·전교부령(典校副令)·종부영(宗簿令)·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을 도와 1401년(태종 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4년 우의정에 되었으나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세종 4년)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올랐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실장 하 태현 (010 - 9239 - 2139)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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