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7. 주일예배 설교(부활주일)
요한일서 3장 11-18절(요한일서 강해 8)
미움은 살인이고, 사랑은 생명입니다.
■ 하나님이 설교 제목으로 이렇게 주셨을 때 너무도 섬뜩했습니다. ‘미움은 살인(殺人)이다.’ 이 얼마나 섬뜩합니까? 살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너무도 섬뜩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이다.’는 말씀을 듣자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살인이라는 단어를 만나고 난 직후라 더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사랑과 생명이라는 각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함께 있으니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리던지요!
사도 요한은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었지만 이 메시지만큼은 부드럽게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격하고 못된 자신을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이 메시지를 과격하게라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5절)
우리는 사도 요한이 이 15절을 전후의 말씀과 연관해서 어떻게 풀어 가는지, 15절은 전후의 말씀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고 보겠습니다.
■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미워하지 마라.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마지막 시간에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메시지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15절은 12절 사건에 의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과 아우 아벨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을 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 구약의 예배인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가인은 농산물로, 아벨은 동물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형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가인은 그 분풀이를 아벨에게 쏟았습니다. 그 분풀이는 살인이었습니다.
이 살인 사건을 사도 요한은 ‘미움’으로 읽은 것입니다. 살인을 낳은 원인을 미움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15절)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물론 가인의 미움은 이유 없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거절된데 따른 분노로서의 미움이었습니다. 혹시 아벨의 빈정거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움은 정당하지 않은 미움, 바르지 않은 미움이었습니다. 살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낳지 않은 미움은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사도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당한 미움도 안 된다.’
미움에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끝자락인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까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싫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면 상대방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기’를 바랄뿐입니다. 미움은 점점 지독한 악으로 발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에 미움은 살인을 저지릅니다.
혹시 육체적인 살인만을 두고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정신적인 살인도 같은 살인의 범주로 넣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도 엄격히 다루십니다.
현대 심리학의 쾌거는 ‘인격 살인’이라는 말을 찾아낸 것입니다. 개인의 인격이 다치는 것도 육체가 다치는 것 못지않게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으로 현대 법(法)은 ‘정신적 피해’를 중요하게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소장에서 ‘정신적 피해’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는 말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육체와 정신/마음이 별개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움으로 일어나는 살인은 육체적 살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격적 살인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어투는 매우 강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이다.’
■ 그렇다면 미움이 아닌 사랑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14절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4절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을 생명과 사망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사망과 생명 사이를 오고 가게 됩니다. 사랑을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고,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사망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14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은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삶의 상태가 바뀌게 됩니다.
1. 사랑하는 사람은 삶이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2.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게 됩니다.
1. 사랑받는 사람은 삶이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2.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이해되는 생명의 의미와 사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삶의 의욕과 용기와 소망이 생기는 생명입니다. 반대로 의욕도 용기도 소망도 상실된 것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17절의 재물이 궁핍(窮乏)한 사람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 궁핍할 경우, 사람들은 재물의 필요나 긴급의 정도에 따라 죽음의 길을 들락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을 때 종종 ‘죽을 맛이야’ ‘죽을 것 같아’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죽음을 느끼는 것은 길이 안 보이고 절망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점점 포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물질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반면 재물이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경우, 그가 물질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볼 때 내가 구원받은 것처럼 기쁘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의 충만한 경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18절은 이러한 현실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러므로 실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의 필요를 채워줘야 합니다. 물질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혹시 물질의 문제를 정신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18절의 지침을 이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8절의 지침이 16절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16절에 있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궁핍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말이 아닌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죽어야 해결되는 문제이기에 대신 죽어주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이 결정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식입니다.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매우 과격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목숨 거는 것은 물건너 가 있고, 말과 혀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해 줄께’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궁핍의 문제, 물질의 문제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지만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것을 내 놓아야 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할 때 그들을 도우라고 내게 맡기신 것을 내놓아야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16절과 18절을 상관적으로 읽고 이해한 후 읽는 17절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은 행동으로 사랑은 표현하셨습니다. 말과 혀가 아니셨습니다. 그 행동은 과격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에서 구원을 얻어 생명을 얻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에 근거하여 지침을 내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라. 재물에 궁핍한 형제를 말이 아닌 재물로 도움을 주라. 그를 재물로 구원시켜라! 이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꼰대스러울 뿐입니다. 기도로 돕는다는 말은 허울 좋은 빈 강정에 불과합니다. 마치 이러한 태도를 경건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 뒤로 숨고,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가지 마십시오.
우리 비전교회가 점점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자꾸 기도 뒤로 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여러분의 십일조를 내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물질을 내놓으십시오. 나도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 뒤로 도망가지 마십시오.
너무 격정적으로 설명하는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제 표현보다 백만 배는 더 격정적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15절)
사랑하지 않으면 사망(死亡)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미워하면 살인(殺人)하는 것입니다. 영생(永生)이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과격하고 격정적입니까? 그러니 제발 기도와 은혜 뒤로 숨거나 도망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십시오. 교회와 함께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물질을 내 놓고 표현하십시오.
■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내놓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내게 맡기신 물질로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 드리는 것을, 십일조 드리는 것을 인색하게 굴지 마십시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 모든 것, 생명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16-17절)
부활절은 ‘너’를 위해 생명을 내놓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영광’을 얻은 날입니다. 참으로 부활절은 ‘너’를 위해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