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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 전남, 전북, 경남, 우리나라, 아리랑
삼도봉 (1,177 m)
한수 이남에서 삼도봉 지명은 지리산을 포함해 3군데.
충북(영동) 경북(김천) 전북(무주) 경계인 민주지산의 삼도봉(1,177m)
경북(김천) 전북(무주) 경남(거창) 경계인 대덕산의 삼도봉(1,249m)
전남, 전북, 경남 3도의 경계선에 위치한 지리산의 삼도봉(1,499m)
지리산 삼도봉 위치도
민주지산과 대덕산의
삼도봉 위치도
삼도가 한 점에서 만나는 봉우리라 하여 삼도봉.
지리산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 3도의 경계선에 위치.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 화개장터 같은 곳.
삼남지방 내륙 중심이자 삼면 바다로부터 중심.
화개재는 화개장터 뱀사골 남원을 잇는 고개마루.
삼도봉은 화개재에서 불과 2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지리산 주능선 서쪽 삼도봉은, 천연 전망대.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반야봉 경관이 아름다운 곳.
멀리 천왕봉 연하봉, 촛대봉을 잇는 절경의 파노라마
지리산 종주를 하는 등산객들에게는, 전망 좋은 휴식처.
아기자기한 남부능선이 아스라히 다가오는 듯.
그리고 임걸령과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지리산 종주를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봉우리이다.
삼도봉은 화개재에서 2km 거리.
또한 반야봉까지도 2km의 거리.
노고단까지 8.5km 남짓한 거리
삼도봉은 옛부터 전략적 요충지.
섬진강으로 뻗어내린 불무장등 시발점.
불무장등은 경남 연동골과 화개골을 빚고
전남 피아골을 빚고 섬진강에서 모두 하나
피아골을 거쳐 용수바위를 지나 오르면 삼도봉.
삼도봉-불무장등 등산로는 연동골 목통마을이 깃점.
전남 전북 경남 3도가 한 곳에서 만나는 '무욕의 산'.
산 아래에는 사시사철 맑고 찬물이 흐르는 물한계곡.
민족화합을 상징하는 삼도봉은 민주지산의 한 봉우리.
이조 태종 14년(1414)에 조선팔도 분할 후 삼도의 분기점.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가 격전을 치르며 세력균형을 유지.
다양한 수종의 원시림 지대이자 희귀동물들 서식처.
신갈나무 들메나무 서어나무 군락과 울창한 잣나무숲.
고라니, 오소리, 고슴도치. 살쾡이, 붉은배새매, 청호반새.
<각호봉.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이 물한계곡을 감싼 곳.
삼도봉은 섬진강으로 뻗어내린 불무장등 능선의 시발점이다.
경남과 전남을 구분지으며 황장산 지나 촛대봉에서 솟았다가..
화개장터 부근의 산자락을 끝으로 섬진강으로 서서히 잠겨든다.
불무장등은 경남 쪽으로는 연동골과 화개골을 빚어내고
전남 쪽으로는 피아골을 만들어 섬진강에서 하나가 된다.
삼도봉은 연동골이나 뱀사골을 거쳐 화개재에서 오른다.
또는 반야봉에 오른 뒤 하산 때 삼도봉을 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연곡사에서 피아골 따라 오른 뒤 피아골 산장
그곳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길과 불무장등 따라 오르는 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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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 정상은 넓고 평평한 낫날 형태의 마당바위.
낫날 절벽 아래로 섬진강을 향해 흘러내린 불무장등.
탁 트인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전망대 겸 좋은 휴식장소.
삼도봉의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아 낫날봉.
그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 또는'늴리리봉'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명명한 새 이름이 삼도봉.
'날라리봉은 낫날봉에서 비롯된 지명이라는 주장.'
마당바위가 '낫날 모양 같아 '낫날봉'에서 와전 설.
'날라리는 남의 이목을 무시하고 까불대는 사람.'
날라리봉은 약간 천박한 느낌을 주는 듯한 지명.
원래, 날라리는 태평소 또는 호적(胡笛)이란 악기.
피리보다 혀(舌)가 작은 깔때기 모양 놋쇠 악기.
작지만, 음이 강하고 높아 군중(軍中)에서 쓰였다.
충무공 시조 중에서 "일성 '호가'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서
호가(胡笳)가 날라리.
북소리 징소리에 비해 경박한듯한, 날라리 곡조.
발정난 개가 이목을 무시하고 아무데서나 교미하듯.
다소 천박한 느낌을 주는 악기라 하여 날나리라 명명.
군중(軍中) 신호가 필요할 경우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날라리.
날라리 소리는 고음이라 그 파장이 멀리 간다.
군중 신호를 위해 날라리를 불던 곳이 삼도봉.
옛부터 고대국가 간 영역 경계선이었던 삼도봉.
옛부터 접경 지역이라 영역 다툼이 많았던 곳.
하여, 전쟁 중 날라리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고지.
자연 발생적으로 접경지역 간 지역감정이 많던 곳.
삼도봉 점령군 날라리 소리는 신바람 났겠지만
고지를 빼앗긴 패전군에겐 애닯았을 날라리 곡조.
전쟁 때마다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했던 삼도봉 고지.
하여, 날라리봉은 날라리 악기에서 비롯된 지명.
삼도봉은 날라리봉이라 부를 만큼 삼국시대 격전지.
한반도 역사 상 수많은 고대국가들의 흥망성쇄 현장.
삼한시대를 비롯 삼국시대 격전 흔적을 느낄 만한 곳.
'삼도봉의 별칭이 다양한 이유는 무엇일까?'
3도의 경계선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인듯 싶다.
옛부터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른 3도의 문화 풍습.
각 지역마다의 전통적 고유 특성에 따라 이름 붙인듯.
삼도봉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소국들의 경계선.
현재,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 삼도의 경계선.
삼도봉 정상 마당바위 가운데., 창끝 같은 청동조각.
'청동기시대부터의 격전지 임을 상징하듯.'
전남 나주목은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고려 거점
전북 전주부(비사벌)는 후백제 견훤 세력 중심
경남 진주목은 옛 가야 세력과 신라 세력 중심.
삼도봉은 삼도가 합쳐지는 지점이지만
지리산 5개 시 군 중에서 3개 군은 경남.
사실 상 지리산은 경남의 비중이 더 큰 산.
경남은 산청군·함양군·하동군 3개군이 있고
전북은 남원시, 전남은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
그리고, 15개 면 행정단위로 지리산은 형성된다.
경남은 삼도봉-불무장등-통족봉-촛대봉-섬진강 경계선.
전남과 구분되며 전북은 삼도봉-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
그곳에서 영원령-삼정산을 연결하는 능선을 경계로 한다.
전남과 전북 경계는 삼도봉-반야봉-도계삼거리-만목대
지리산의 계곡과 산등성이를 경계로 형성된 마을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서로 다른 풍습과 전통을 형성.
자연스럽게 타 지역과 서로 경쟁의식을 갖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신라는 경남 경북 일대 영토에서 유래.
백제는 전북 전주(비사벌) 마한 영역에서부터 유래.
고려는 전남(나주목)을 발판으로., 해상왕국을 건설.
삼도봉에 오르면 사투리가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3도에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만나기 때문
매년 10 월10 일에는 삼도 화합을 기원하는 삼도제 행사.
삼도봉은., 삼도 화합의 상징.
전라남도, 전라복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삼도봉 서남쪽 전라남도.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
농업 인구의 비율이 높은 편.
광양제철소·여천공업단지·순천공업단지로 이루어진
광양만 공업지대가 한국의 새로운 임해공업지대로 성장
광양-순천-여천-여수를 잇는 지역은 도시화 공업화가 진전
중국과의 국교수립으로 목포항은 국제 무역항으로서 큰 역할
행정구역은 5개시 17개군 30개읍 199개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청소재지는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남북간 거리는 188.5km,
동서간 313km(면적 1만 1,901㎢= 남한의 11.96%)
인구 2,024,422(2003), 인구밀도 168.1명/㎢(2003).
[연혁]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
백제가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에 멸망 후
당나라(중국)의 관할에 있다가 신라에 귀속되었다.
685년(신문왕 5) 지방행정 9주 5소경 제도에 따라
전라남도 지역에 무진주(武珍州:光州)가 설치되고,
반남군·양무군 등 14개 속군과 44개 속현권에 포함.
757년(경덕왕 16) 행정제도 개편 때 무주(武州)로 개칭.
995년(성종 14) 전라남도 지역을 해양도(海陽道)라 했다.
1018년(현종 9) 전북 지역 강남도와 합해 전라주도)라 개칭.
전주와 나주의 첫글자를 딴 전라도 지명
이조 시대에 들어와서도 전라도라 불렸다.
1895년 23부(府) 체제로 바뀌어
전라남도는 나주부와 남원부 관할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라 하고
광주군 광주로 도청 소재지를 이전했다.
1896년에 도서 지방에 3군을 신설해 행정구역을 편제.
영암군·강진군·해남군·장흥군 소속 도서를 완도군에,
흥양군·낙안군·순천군·광양군 소속 도서를 돌산군에,
나주군·영광군·부안군·만경군·무안군 도서를 지도군.
1897년 순천군으로부터 여수군을 분리해 신설,
무장군·흥덕군·고창군을 전라북도로 이관했다.
1908년 옥과군을 폐지 담양군 일부와 함께 창평군에 합속
화순군을 폐지해 능주군에 병합했다. 또 낙안군을 폐지해
행정구역을 각각 순천군과 보성군에 분할하여 편입시켰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지도군·남평군·동복군·
능주군·창평군·돌산군·정의군·대정군을 폐지
행정 구역을 목포부와 22개군으로 통합하였다.
1935년 광주읍이 부로 승격되고,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개칭했다.
946년 제주군이 제주도로 승격
전라남도에서 행정구역을 분리.
1949년에 여수읍·순천읍이 부로 승격되었고,
여수군을 여천군으로, 순천군을 승주군으로 개칭
광양군 광양면을 읍으로 승격했다.
또 광주부·목포부·여수부·순천부를 시로 개칭.
1955년에 영광군 영광면, 해남군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
1957년에 광산군과 담양군의 일부가 광주시로 편입했다.
1963년에는 영광군 위도면을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편입하고,
광주시의 일부가 광산군에 편입되어 서창면·대촌면을 설치했다.
구례군의 구례면, 화순군의 화순면, 함평군의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
1969년에 무안군을 나누어 신안군을 신설하고,
1973년에 고흥군 도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에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를 설치했다.
1979년 곡성군 곡성면, 고흥군의 고흥면,영암군 영암면,
무안군 무안면, 진도군의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 여천군 돌산면·삼일면, 장흥군 관산면 대덕면,
무안군 일로면, 영광군 백수면, 완도군 노화면·금일면,
신안군 지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나주군 나주읍 일원과
영산포읍 일원을 통합 금성시 설치,
1986년에 전라남도 여천지구 출장소를 여천시로,
금성시를 나주시로 행정구역 명칭을 바꾸었으며,
전남 광양지구 출장소와 광주직할시 및 송정시 설치.
1988년에 송정시 및 광산군을 광주직할시에 편입,
1989년에 광양지구출장소를 동광양시로 승격했다.
1995년 순천시와 승주군, 나주시와 나주군,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
각각 순천시, 나주시, 광양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1998년 여천시와 여천군을 통합하여 도농통합형태의 통합 여수시가 출범.
[자연환경]
월출산 천황봉, 전남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 경계.
지리산 변성복합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소백산변성복합체이며,
노령산맥 서쪽과 소백산맥에 해당하는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신안군·함평군·무안군·해남군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층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
화순군 강진군에는 고생대 석탄기 및 페름기 암층이 두껍다.
이들 암질은 중생대 쥐라기에 일어난 대보조산운동의 지각변동
또한 백악기말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화산암류가 관입된 지역이다.
전라북도 군산에서 완도까지 이어진 서쪽 해안과 다도해의 섬,
광주에서 해남까지는 유천층군 안산암과 응회암 등 화산성 물질.
광양시·순천시 주변과 목포시 북쪽에는 신생대 제3기층 분포,
장흥군과 섬진강·영산강 일대는 신생대 제4기층이 분포한다.
자형은 북쪽으로 노령산맥, 동쪽으로 소백산맥이 뻗어 있어
북쪽과 동쪽이 높지만 대체로 소백산맥이 노령산맥보다 높다.
동부는 소백산맥의 지리산(智異山:1,915m)을 중심으로
토끼봉(1,534m)·노고단(老古檀:1,507m)·반야봉(1,732m)
고봉들이 이어져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고산지대를 이룬다.
이곳에서 크게 동부지맥·중부지맥·서부지맥으로 갈라지는데
동부는 왕시리봉(1,243m)·백운산(1,218m)·영취산(510m) 등으로,
중부는 조계산(曹溪山:884m)·팔영산(609m) 등으로 각각 이어진다.
서부는 월출산(月出山:809m)·대둔산(大屯山:672m)·두륜산(703m) 등
한반도의 최남단인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토말에서 바다와 연결.
노령산맥이 전라남북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추월산(秋月山:731m)·병풍산(屛風山:822m)·
백암산(白巖山:722m)·입암산(笠巖山:626m)·방장산(方丈山:734m) 등.
팔공산의 북쪽 1,080m 지점 서쪽 계곡에서 발원한 섬진강
전라남도에 이르러 동부산지를 흐르면서 오수천·심추천·
경천·옥과천과 합류, 섬진강 유역에 넓은 평야는 없으나
침식분지가 발달, 곡성군 구례군은 침식분지가 발달한 곳.
보성강은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 북동쪽으로 흐른다.
장평천·노동천을 합류해 보성저수지를 이루고
북쪽으로 유로를 바꾼 다음 율어천·동복천을 합류
곡성군 죽곡면과 오곡면 경계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특히, 이 강 유역의 산록은 차나무 재배의 최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원이 조성되어 있다.
1935, 1990년 건설된 보성강 댐, 주암 댐은 농업용수원
영산강은 담양군 월산면 병풍산 북쪽계곡에서 발원해 장성호
남서쪽 극락강·지석천과 합류하고 영산호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영산강은 감조하천으로 조수의 영향이 나주에까지 미쳤으나
1976년 담양 댐, 장성 댐, 나주 댐, 1981년 영산강 하구둑 건설
영산강 따라 나주평야·서석평야·학교평야 등의 충적평야가 발달.
장흥군 강진군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드는 탐진강
탐진강은 군동평야와 장흥평야 젖줄이 되고 있다.
해안은 전국에서 가장 심한 지절률(支節率)을 보여
직선거리에 비해 무려 8.5배나 되며 리아스식 해안.
유인도 273개, 무인도 1,694개로 총 1,967개 섬이 분포
전남 해안은 섬으로 둘러싸인 세계적인 다도해.
여수·고흥·장흥·해남 4대 반도가 남해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수심이 얕은 광양만·순천만·보성만·강진만 등
또한 북서부에는 무안반도와 해제반도가 서해로 돌출해 있고,
그 주변에 신안군에 속한, 유서 깊은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기후
서해와 남해에 면해 있어 전체적으로 온난
해안지방과 내륙지방 간의 기후차가 나타난다.
목포·함평 등 서해안일대와 나주평야를 중심으로
연평균 12~14℃ 내외이며, 1월평균기온은 -0.2~2.0℃
연평균강수량은 1,100~1,300㎜ 정도이며,
강설일이 30~40일에 북서계절풍이 강하다.
순천·곡성·담양 등 영산강·섬진강 중상류는
북서계절풍이 불지만, 바람은 비교적 약한 편.
여름 최고기온이 30℃ 이상, 겨울엔 -4~-7℃
특히 섬진강 유역은 연강수량이 1,500㎜ 다우지역
완도·장흥·해남·고흥은 1,300~1,500㎜에 달하고
기온이 높아 연평균 13~14℃, 1월평균기온이 0~2℃.
예로부터 강수량이 많아 홍수피해가 큰 지역,
특히 태풍내습기에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인구·도시]
1925년에 215만 8,351명이던 인구가
1935년에는 250만 8,346명을 기록했으며,
1944년에는 274만 9,949명으로 늘어났다.
1935~44년에는 9.6%의 인구증가율을 나타냈으나,
전국 평균 인구증가율 17.5%에 비하면 매우 낮다.
1949년에는 약 304만 2,000명으로 인구가 급증했다.
6·25전쟁으로 줄어들었으나 1960년대 꾸준한 인구성장
1968년 최고 413만 8,366명 이후 대도시로 향한 이농현상
1970년 400만 5,735명, 1975년 398만 4,849명,
1980년 377만 9,475명, 1985년 374만 8,484명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분리되며 인구가 감소,
인구밀도는 183명/㎢로 전국평균 460명/㎢에 못 미친다.
목포는 5,204명/㎢로 가장 높고, 완도군이 192명/㎢로 높다.
곡성군·구례군·장흥군·화순군 등 동부산간지역은
100명/㎢ 미만이며, 곡성군이 76명/㎢으로 가장 낮다.
[산업·교통]
1970년대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1976년 담양 댐, 장성 댐, 광주 댐, 나주 댐의 건설,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의 완공 등으로 홍수 피해 해소.
쌀 생산량은 86만 7,529t으로 전국 쌀생산의 18.5%
쌀보리는 6만 4,771t 전국 생산량(9만 9,300t)의 65%
배의 주산지로 전국 생산량의 24.3%를, 감은 28.4% 생산
서해와 남해에 면해 있어 수산업이 활발하다.
특히 남해는 연중 수온이 높고 어종이 다양하다.
어업 인구는 총 13만 1,219명으로 전국의 36.9%,
김은 완도군·해남군·고흥군·신안군,
미역은 완도군·고흥군 중심으로 생산,
김은 전국 생산량의 70%, 미역은 91%
목포·여수·녹동·완도·진도·마량항 등이 주요어항
영광군의 법성포는 이조시대 조창과 조운의 역할까지 맡아
번성했던 항구였으나,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
전국 20개 국립공원 가운데 지리산·월출산·내장산·
한려해상국립공원·다도해해상 국립공원 등의 전지구
또는 일부 지구를 보유해 전체 국립공원 면적의 39.2%
도립공원으로 무등산·조계산·두륜산이 지정되어 있다.
노고단·반야봉·피아골·불일폭포 등 높은 산과 계곡들.
화엄사·송광사·선암사·백양사·연곡사·천은사 등 사찰
내장산 일대의 단풍과 월출산의 기암괴석을 비롯해
홍도·거문도·백도·오동도·돌산도·소록도·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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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羅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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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마한 54국 중 임소반국 신운신국
나주지역에, 불미지국이 반남 지역에 비정.
삼국시대 백제 발라군(發羅郡)에서 죽군성(竹軍城)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
지류 군나 도산 반나 죽군 포현 등의 영현을 두었는데,
죽군현(竹軍縣) 포현현(布賢縣)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
통일신라에 들어 686년에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 금산군으로 고쳐 무주(武州:광주)에 예속
영현은 회진현(會津縣) 여황현(艅縣) 철야현(鐵冶縣)
진성왕 대에 견훤의 후백제에 속했으나,
왕건이 점령한 후 나주의 세력이 커졌다.
왕건이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과 결혼
제2대 혜종이 되자 나주 위치가 확고해졌다.
983년 광주를 대신해 전라도 계수관이 되었다.
995년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
1018년 5개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
11개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
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이조시대 나주목으로 전라도 남부의 행정문화 중심
선조 때 기축옥사를 비롯해 영조 때 유림들이 처벌.
1657년(효종 3) 나주는 전라 우영(右營)으로서 개편.
1895년 16개 군을 관할했다가 이듬해 전남 1등군
................서남해 해양세력과 왕건.................
전남 해안은 9세기 장보고 청해진 체제의 중심
그 이전부터 고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
하여, 이 지역은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
장보고가 암살당하고 청해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서남해 일대에는 해양 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서남해 지역의 해양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섬 지역 중심의 '도서 세력’
연안 지역 중심의 '해양 세력’
이들은 후백제 견훤의 침략 위협에 처하자
혼연일체가 되어 이에 저항했던 듯 보인다.
견훤의 공격이 장기화하고 강도도 거세지자,
이에 대한 이들의 대응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
'도서 세력'은 끝까지 비타협적 저항의 노선
'연안 해양세력'은 점차 실리적 타협을 모색
전자의 중심에는 압해도 능창(能昌)
후자의 중심에는 나주 호족., 오다련(吳多憐)
오다련은 견훤과는 타협할 수 없었던지,
새로운 타협의 파트너로서 왕건을 선택.
왕건 역시 오다련 세력을 서남해 발판으로 생각
왕건이 오씨 딸과 혼인해 타협의 증표로 삼았다.
반면, 능창은 왕건과도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여, 왕건은 연안 세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견훤과 '도서 세력'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추진.
903년 3월 왕권은 주사(舟師 : 해군)를 이끌고
광주 해안상륙 후 금성군(현재, 나주)을 접수하고
10여 군현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돌아갔다.
견훤의 집요한 공략에도 요지부동이던 나주 세력
왕건의 한차례 공격에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안 세력'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점령이었던듯.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들.
왕건과 나주호족 오다련의 딸과의 결혼 동맹.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제2대 혜종
나주의 위치는 고려시대 내내 확고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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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全羅北道]
동쪽은 경상남북도, 남쪽은 전라남도,
북쪽은 충청남북도, 서쪽은 서해 이다.
과거 국내 최대의 농업 생산력을 가졌으나
공업화정책의 혜택을 크게 입지 못해 낙후
행정구역은 6개시 8개군 14개읍 145개면,
도청소재지는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이다.
남북간 약 70㎞, 동서간의 거리는 약 120㎞.
총면적은 8,058.03㎢로 남한 면적의 8.1%.
인구 1,962,867(2003), 인구밀도 243.8명/㎢(2003).
[연혁]
삼한시대 마한 땅이었으며, 삼국시대 백제 영역.
660년(의자왕 20) 당의 관할에 있다가 신라에 귀속.
685년(신문왕 5) 9주 5소경 제도에 의해 완산주가 설치
고부군·김제군 10개 속군과 31개의 속현, 소경으로 남원경
757년(경덕왕 16) 완산주는 전주(全州)로 개칭되었다.
진성왕대 원종 애노의 난을 계기로 각 지방에서 호족세력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후백제를 주창한 견훤 영향권에 들었다.
고려시대 995년(성종 14) 강남도(江南道)가 설치되었다가,
1018년(현종 9)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주도(全羅州道)라 개칭.
전주는 이성계의 관향지로서
전라도의 중심지역 지위를 확고
그러나 때로 전주와 나주의 품계가 강등되고
이름이 바뀜에 따라 남원과 광주의 이름을 결합
전남도·광남도·전광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호남(湖南)'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전라북도는 갑오농민전쟁 발상지로 주목을 받았다.
1895년 전주부와 20개군, 남원부와 15개군으로 편제.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전라북도로서 개칭
전주부의 흥덕군·장성군·고창군·무장군·영광군과
남원부의 곡성군·순천군·광양군·담양군·옥과군·창평군
전라남도로 편입되고, 충남 금산군·진산군이 전라북도로 편입
1897년 구례군이 전라남도로,
전남 무장군·흥덕군·고창군이
전라북도로 행정소속이 바뀌었다.
[자연환경]
소백산맥 일대에는 편마암을 기반으로
선캄브리아기에 관입한 화강암이 분포,
서부 평야지대와 노령산맥의 접경지대에는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조산운동 때에 화강암.
중생대 백악기에 단층활동으로 골짜기 형성
이때 진안군 마령면 일대에도 퇴적암층이 형성
마이산은 이때 형성된 역암이 쌓여 이루어진 것.
고창군 대산면·성송면·무장면 일대는
중생대 말 분출한 화산쇄설물로 덮여 있다.
신생대 제4기 기후변화로 화강암 풍화작용이 활발
서부 평야와 내륙 분지는 화강암 침식작용으로 발달
한편 마이산 남쪽 비탈의 큰 구멍과 지리산의 세석평전
한랭한 기후하에서 바람과 얼음의 쐐기작용으로 이뤄졌고
후빙기 후 해수면 상승으로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퇴적평야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노령산맥을 경계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산악지대로 구분
동부 산악지대는 노령산맥에서 소백산맥에 이르는 지역으로
노령산맥을 형성하는 대둔산(878m)·명도봉(863m)·운장산(1,126m)·
내장산(763m)·만덕산(762m)·모악산(794m)·방장산(734m) 등과
소백산맥을 형성하는 안성고원, 진안 고원, 장계·장수 분지,
남원·오수 분지를 비롯 천왕봉(1,915m)·덕유산(1,614m) 등
주요 하천으로는 금강·만경강·동진강·섬진강 등이 있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해로 유입한다.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에서 발원한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지나 서해로 유입된다.
까치봉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호남평야 남부로 흐른다.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의 만경·김제평야는 백제시대에
벽골제 같은 관개시설이 구축되었을 정도로 쌀 생산지역.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1,151m)에서 발원해
남해로 유입하는 섬진강에는 유로변경식 댐을 건설해
부안·김제 부근의 농업용수로 이용됨은 물론 발전 및
홍수방지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안은 진봉반도 일대와 변산반도의 암석해안과
부안군·고창군 일대의 사질해안으로 구분된다.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의 채석강은 해식애,
고창군에는 해안사구와 석호가 형성되었다.
금강·만경강·동진강 하구와 곰소만 일대 넓은 간석지
김제시 진봉면·광활면 일대, 부안군 계화도 등은 간척.
283.1㎞ 해안선을 끼고 유인도 26개,무인도 83개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은 면적이 11.73㎢에 이르는 위도,
그밖에 야미도·신시도·무녀도·선유도를 비롯해 여러 섬
그외 고군산군도와 개야도·비응도·어청도 등이 산재해 있다.
[산업·교통]
농가수는 16만 4,722가구, 농가인구는 54만 5,179명.
총경지면적 2,337.45㎢ (논 1,815.48㎢, 밭이 521.97㎢)
간척 사업으로 경지면적은 늘어났으나 농가인구는 감소
임야면적은 4,536.61㎢로서(1994) 한국 전체임야의 7%
1994년 어선수는 4,242척, 어업인구는 2만 6,205명
서해안은 간만 차가 크며 수심이 낮고 일조량이 많아
군산시·고창군·부안군을 중심으로 천일제염이 발달.
서부의 익산·김제·전주를 중심으로 교통이 발달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찬란한 백제문화를 이룩했던 곳
백제문화 유적관광지와 수려한 자연관광지가 많이 있다.
지리산·덕유산·내장산·변산반도 국립공원
대둔산·모악산·마이산·선운산 도립공원,
그밖에 강천산·장안산 등의 군립공원.
전주시의 부채와 한지, 고창군의 도자기,
장수군의 곱돌그릇, 남원시 운봉읍의 목기,
군산시의 숫돌·돗자리 등의 전통특산물과
전주시의 비빔밥·콩나물밥, 순창군의 고추장,
익산시의 찹쌀엿, 고창군 선운사의 작설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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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全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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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완주군은 옛 전주부(全州府)와 고산현(高山縣)
옛 전주부는 백제의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
555년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다가 565년에 폐지
통일신라 685년(신문왕 5) 다시 완산주(完山州) 설치.
757년 전주로 개칭, 1소경(小京) 10군 31현 행정 중심
900년 견훤이 무주(광주)로부터 후백제 도읍을 이전
936년 후백제 패망 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설치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
993년 승화(承化)로 개칭,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
995년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 순의군 절도사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 1 속군, 11 속현을 포함하는., 전주목.
1310년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 부곡으로 강등
1392년 이조를 개국한 이성계, 전주 이씨 본향
완산부유수, 1403년(태종 3)에 전주부로 개칭
경상남도[慶尙南道]
북쪽은 경상북도, 서쪽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동쪽은 울산광역시, 남쪽은 부산광역시와 남해
소백산맥 서부와 태백산맥 동부 및 낙동강 연안.
예로부터 부산과 더불어 남쪽의 관문 구실을 했으며,
울산·부산·창원·마산을 연결하는 남동연안공업지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중화학 공업지대 밀집지역.
남북간 거리가 약 194㎞, 동서간 거리가 약 173㎞.
행정구역은 10개시 10개군 22개읍 177개면 128개 동리
로 되어 있으며, 도청소재지는 창원시 사림동이다.
면적은 1만 511㎢로 남한 면적의 10.6%
경상북도·강원도·전라남도 다음 넓다.
인구 3,162,190(2003), 인구밀도 300.6명/㎢
[연혁]
삼한시대에 북동부는 진한, 남서부는 변한에 속했으며,
그후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6가야가 할거한 가야문화권
삼국시대에는 532년(진흥왕 24) 신라에 합병되었고,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 양주와 강주가 속했다.
고려시대 955년(성종 14) 전국을 10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주 관할의 영동도(嶺東道)와 진주 관할의 산남도(山南道)
1106년(예종 1) 경주·상주·진주 관할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1171년(명종 1)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
1186년(명종 16) 2도가 합쳐지면서 경상진주도로 다시 개칭
몇 차례 개편을 거쳐 1314년(충숙왕 1)에 경상도 지명이 확정.
이조시대 경상도는 1413년(태종 13)에 8도의 하나
초기에는 삼포(三浦)를 중심으로 일본과 잦은 접촉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7년 동안 특히 많은 피해.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당시
경상도 대구·안동·진주·동래 4곳에 관찰부
오늘날 경남 진주부와 동래부 외 대구부 일부 포함.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상남도를 진주에 관찰사를 두고 29개군을 관할
1914년 경남은 부산·마산의 2개부와 19개군으로 개편
1925년에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졌다.
1931년에 진주 김해·울산·진해·통영(충무)·삼천포,
1936년 장승포, 1937년 거창, 1938년 고성이 읍으로 승격.
1939년 진주와 하동이 각각 부와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42년에는 진영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1949년에는 종래의 부가 시로 개칭되었고,
1955년에는 진해와 충무가 시로 승격되었으며,
1956년에는 삼천포와 사천이 각각 시와 읍으로
1960년에는 창녕이 읍으로,
1962년에는 울산이 시로,
1963년에는 남지와 삼랑진이 읍으로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73년에는 동래군과 양산군이 합쳐지는 한편 하남이 읍으로,
1979년에는 의령·가야·양산·신현·남해·산청·합천이,
1980년에는 기장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신도시로 건설된 창원은 1980년에 시가 되었으며
이때 창원군이 의창군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에는 김해가 시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도청이 부산에서 창원으로 옮겨졌다.
1985년에는 장안이 읍으로,
1989년에는 밀양과 장승포가 시로 승격,
1991년에는 의창군이 다시 창원군으로 개칭.
1995년 울산시·울산군, 진주시·진양군, 충무시·통영군,
장승포시·거제군, 밀양시·밀양군, 창원시·창원군 일부,
마산시·창원군 일부, 김해시·김해군, 삼천포시·사천군 통합
울산시·진주시·통영시·거제시·밀양시·
창원시·마산시·김해시·사천시가 되었다.
1996년 양산군이 도농복합형태 양산시로 승격.
1997년 울산시는 광역시로 승격·분리되었다.
[자연환경]
약 80%가 중생대 후기 퇴적된 경상계(慶尙系) 지층으로 덮여 있다.
경상계는 하부의 낙동통(洛東統)과 상부의 신라통(新羅統)으로 구분.
낙동통은 셰일·사암·역암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진주에서 산청을 거쳐 합천까지 북북동방향으로 띠 모양
진주지방에서는 낙동통의 두께가 1,000m에 이르기도 한다.
신라통은 이암·사암·역암·분암·응회암 등으로
낙동통 동쪽의 대부분을 덮고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화산활동에 의한 안산암·유문암·응회암 화산암이 분포
한편 서쪽 지리산 일대 편마암복합체 변성암류과 화강암
중생대말 불국사 화강암이 곳곳에 소규모로 노출되어 있다.
이 암석은 건축재·비석재, 석영맥에서는 납·아연·구리 금
소백산맥이 서쪽에 우뚝 솟아 전북 및 전남 도계
이 산맥을 따라 지리산(智異山 : 1,915m)을 비롯
덕유산(德裕山 : 1,614m)·남덕유산(南德裕山 : 1,508m)·
대덕산(大德山 : 1,290m)·백운산(白雲山 : 1,279m) 등 고봉
대덕산에서 동남쪽으로 갈라져나온 소백산맥의 지맥에는
가야산(伽倻山 : 1,430m)과 수도산(修道山 : 1,317m) 등.
육십령과 팔량치는 옛부터 영 호남을 이어주는 주요 고개.
태백산맥은 경상남도에 이르러 현저히 낮아지지만
밀양의 천황산과 양산의 원효산을 중심으로 동부고지
소백산맥 중심으로 서부산지와 동부고지 사이에
낙동강(洛東江) 연안의 중앙 저지대가 펼쳐진다.
낙동강은 경남에 이르러 황강(黃江)·남강(南江)·
밀양강(密陽江)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하는데,
매년 홍수피해를 크게 일으켜왔으나
1969년 남강 댐, 1976년 안동 댐 건설로 완화.
서부산지의 남강 상류지역은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 하류의 저지대에 상습적으로 심한 홍수
진주의 남강 댐은 홍수시에 남강 상류를 유역 변경
남해안의 사천만으로 직접 방류하도록 건설되었다.
낙동강 연안에는 곳곳에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며,
낙동강 양안의 하남평야(河南平野)와 대산평야(大山平野),
그리고 낙동강 하구의 김해평야(金海平野)가 가장 넓다.
김해평야는 낙동강 삼각주 충적평야로서
지금은 거의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낙동강은 조석(潮汐) 영향이 삼랑진까지 미쳤으나
1987년 낙동강 하구둑 건설 후 그 영향이 사라졌다.
이밖의 하천으로 전라남도와 도계를 이루면서
남해안의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이 있다.
남해안은 해안 출입이 심하고 섬이 많다.
해안선의 총길이는 2,166.9㎞이다.
유인도 78개, 무인도가 349개
거제도는 우리나라 제2위
남해도는 우리나라 제4위 섬.
[산업·교통]
남해는 수온이 높아 어종이 다양
각종 패류와 해조류가 풍부하다.
1995년 46만 7,053t이 잡혀 전국어획고의 13.4%
통영·삼천포·진해·장승포 등의 어항을 중심으로
멸치·고등어·갈치·쥐치·도미·정어리·가자미 등
난류성 어류가 주로 잡히며, 멸치는 남해어장의 대표 어종
한편 거제·통영·한산도 일대의 해역은 청정수역
수산양식이 활발하며 전국 굴양식 어획고의 77.8%
그러나 진해만은 오염이 심해 연안 어업도 큰 타격
철·중석·금·은·납석·고령토 산지이나
고령토를 제외하면 생산량이 보잘 것 없다.
도자기 원료 고령토는 산청·하동뿐만 아니라
밀양·양산·고성·함양·합천에서 고르게 생산.
제조업의 부가가치는 전국의 16.8%
경기도·서울특별시·부산광역시 다음.
창원의 기계, 온산의 유정제·비철금속제련,
진해의 비료, 진주의 농기계 등 경남공업을 대표
마산과 김해는 섬유공업, 통영과 사천은 수산가공업.
통영의 나전칠기, 의령·진주의 한지공업이 유명.
삼랑진양수(60만kW)·남강(1만 3,000kW) 등의 수력
영남(40만kW)·사천(112만kW) 화력 및 고리 원자력
총 527만kW의 발전설비는 전국의 33.7%에 해당한다.
문화재는 1997년 현재 국보 9점, 보물 93점, 사적 42개소,
천연기념물 30종, 중요무형문화재 17점, 중요민속자료 12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286점, 무형문화재 18점,
기념물 147점, 민속자료 18점 도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230점
문화행사로는 진주의 개천예술제, 밀양의 아랑제, 진해의 군항제,
통영 한산대첩기념제, 거제 옥포대첩기념제, 산청의 지리산평화제.
각종 관광자원 또한 풍부하여, 한려해상·지리산·가야산·덕유산 등
국립공원 외에 유서깊은 명승고적으로 김해의 김수로왕릉, 통영 충렬사,
진주의 촉석루, 합천의 해인사, 양산의 통도사, 밀양의 표충사 등이 유명.
남해 상주해수욕장은 부산에서도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곳
금산(錦山 : 701m)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경치가 수려하다.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거제 해금강도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이 도의 최대 관광자원은 창녕의 부곡온천(釜谷溫泉).
1960년대의 울산공업단지, 남강다목적댐 건설에 이어
1970년대초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마산수출자유지역 조성
이를 바탕으로 10년 동안의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기간(1972~81)
울산·마산의 임해공업단지가 확대·개발되고
창원·온산·거제·양산·진주 등지의 대규모 공단
한편 공업이 확장되며 남동임해공업지대 골격이 형성.
마산·진해·창원·함안·창녕·의령 등
3개시와 3개군 행정·경제·사회의 중심지
김해시·양산시·밀양시를 포함한 부산 배후권은
부산의 위성도시로 육성, 대도시로 농산물을 공급,
부산으로부터 분산되는 공업 유치, 관광지로서 개발
통영시·거제시로 구성된 거제권은
공업기지·관광위락지·수산물공급지
통영시는 교육·문화의 중심지로 육성하며,
진주권은 문화·예술, 내륙지방의 성장거점,
사천권은 수산물의 집산지 및 가공지, 공업지역,
거창·합천·함양·산청의 4개군으로 편성된 거창권은
자연보전과 아울러 관광개발과 농산물집산기능의 강화
.......
진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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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소국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이곳에 비정
이어 가야 영역이었다가 신라 거타주(居陀州) 설치
신라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 청주(菁州)로 개칭
757년(경덕왕 16) 9주 중 하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
1주, 11군, 31현을 관할한 대읍에서 혜공왕 때 다시 청주
고려초 강주,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
995년 정해군(定海軍) 절도사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
1012년(현종 3) 안무사로 고쳤다가 1018년 진주목으로 복구
1310년(충선왕 2) 진주로 강등 1356년(공민왕 5) 다시 진주목
1392년(태조 1)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
1402년(태종 2)부터 이조시대 진주목으로 유지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
1895년 진주부 진주군, 1896년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파지산면 등 6개면을 산청군,
북평면 등 7개면을 하동군, 문선면 등 5개면을 고성군,
양전면을 진해군, 상봉면 등을 함안군, 적량면 등 남해군
삼천포를 사천에 이관함으로써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진주에서 방사상으로 하동·창원·산청·
사천·합천·고성·거창 등을 잇는 국도
....................
경상북도[慶尙北道]
.....................
삼도봉은 전남 전북 경남 3도의 행정구역 경계선.
실질적으로 삼도봉은 경북까지 포함한 4도의 경계
경상북도 북쪽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서쪽은 충청북도와 전라북도에 접했고
동쪽은 동해 태백산맥, 북서쪽은 소백산맥
경상북도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분지 모양을 이룬다.
김천-구미-대구-영천-포항을 잇는 지역은 도시화·공업화
특히 포항광역시는 철강을 비롯한 한국 중공업의 핵심지이다.
행정구역은 10개시 13개군 32개읍 206개면
도청소재지는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이다.
남북 175㎞, 동서 162㎞. 총면적 1만 9,021㎢
남한의 도 중에서 가장 넓고, 남한 면적의 19.6%
인구 2,742,123(2003), 인구밀도 144.1명/㎢(2003).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영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757년(경덕왕 16)에
9주 중 상주(尙州)와 양주(良州)가 경북.
그후 고려 태조 때에 동남도(東南道)로 되었다가
995년(성종 14) 영남도·영동도 산남도로 나뉘었고
1106년(예종 1)에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로 통합 후
1314년(충숙왕 1) 경주와 상주의 지명을 합친 '경상도'
이조시대 1407년(태종 7) 낙동강을 경계로 좌도와 우도
1594년(선조 26)에 다시 합쳐 성주 팔거현( 칠곡)에 감영
감영은 그후 달성(대구)과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1601년(선조 34)에 오늘날의 대구에 자리잡았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당시
경상도에는 대구·안동·진주·동래의 4관찰부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북을 떼어 대구에 관찰사를 두고 41개군을 관할
1914년 군면 폐합시에 대구는 1부와 22군으로 개편
1931년 김천·포항·경주·상주·안동,
1937년 영천·예천·감포, 1940년 영주 의성,
1942년에는 구룡포가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에는 대구 이외에 포항·김천이 시로,
안강·왜관·청도가 읍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포항군이 영일군으로, 김천군이 금릉군으로 개칭
한편 울릉도가 군으로 독립했다.
1955년 경주가 시로 승격
경주군이 월성군으로 개칭,
1963년 강원도 울진군이 편입되고 안동이 시로 승격.
1978년 구미시가 신설되고, 1980년 영주가 시로 승격
1981년 대구가 인접지역을 흡수하며 직할시로 승격 분리
1986년에는 상주와 점촌이 시로 승격되었고
1991년에는 월성군이 다시 경주군으로 개칭.
1995년 포항시·영일군이 포항시, 경주시·
경주군이 경주시, 안동시·안동군이 안동시, 영주시·
영풍군이 영주시, 김천시·금릉군이 김천시, 경산시·
경산군이 경산시, 영천시·영천군이 영천시, 점촌시·
문경군이 문경시, 구미시·선산군이 구미시, 상주시·
상주군이 상주시로 각각 통합되었다.
백악기말 불국사화강암이 곳곳에 불규칙하게 소규모로 노출
이 화강암 석영맥에서는 납·아연·동 등이 금과 함께 산출
태백산맥이 동해안 따라 남북방향으로 달리는 지형.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이
강원도·충청북도·전라북도와의 도 경계선을 이룬다.
낙동강 지류들이 이들 산맥 사이의 지역을 관류
하여, 전체적인 모양이 하나의 큰 분지를 이룬다.
북쪽 태백산에서 시작해 구운산·국망봉·소백산
두솔봉·문수봉·속리산·황학산 등이 솟아 있다.
전북 도계 부근 동남방 대덕산·수도산·가야산 등
소백산맥은 역사적으로 중부지방과의 교통상 큰 장벽.
풍기와 단양 간의 죽령,
문경과 충주 간의 조령,
김천과 영동 간의 추풍령
소백산맥 양쪽을 잇는 고개
태백산맥은 경북에 이르러 고도가 낮아지며
낙동강 동쪽의 넓은 산악지방으로 나타난다.
태백산맥 주능선 따라 북쪽에서부터
삿갓재·통고산·일월산·백암산·대행산
주왕산·향로봉·가지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서쪽으로 대구 북쪽 팔공산, 남쪽 비슬산
낙동강은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계곡에서 발원
안동 서쪽으로 유로를 바꿔 반변천을 합류하고
상주 북쪽 내성천을 합류하며 남쪽으로 흐른다.
하류로 가며 위천 감천 금호강(琴湖江) 등과 합류.
낙동강 곳곳에 침식분지가 발달하여 농업의 중심지
영주·안동·예천·상주·의성·구미·김천·영천 등
이러한 침식분지를 배경으로 성장한 농공 도시들이다.
태백산맥의 동쪽으로는 북쪽에서부터
왕피천·소대천·송천 곡강천 등의 지류.
큰 하천으로 형산강(兄山江)이 흘러내린다.
이들 하천은 하류에 좁은 충적평야가 발달되고
경북 대부분의 해안이 암석 해안으로 되어 있다.
시급 도시 중에서는 신흥공업도시로 급성장한 포항
구미만이 인구가 30만 명을 넘으며, 경주시와 안동시
영주·영천·상주·문경은 도시성장이 극히 저조한 편.
포도는 전국 생산량의 30% 김천지방이 주산지이다.
청송·안동·영양·예천 등지의 담배, 풍기의 인삼
예천·상주·문경·김천·안동 산간지방에서는 양잠
1994년 현재 어업인구는 2만 4,431명으로 전국의 4.3%
울릉도의 오징어를 제외하고는 쥐치·노가리 등의 잡어
동해 어업전진기지 울릉도 저동을 비롯하여
포항·구룡포·감포·죽변·후포·대진·강구 등
무연탄 석회석 납·아연·납석·흑연·장석 등 지하자원
강원도 남부의 대광업지역의 연장인 북부산악지방에 집중
또한 봉화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이 있어
납과 아연의 생산량이 각각 2,930t, 1만 5,371t이 생산
1993년을 고비로 생산량이 급감하는 추세에 있다.
이밖에 포항과 경주의 불석,
경주·울진·고령·청송·의성의 고령토,
청송·청도·경주·봉화의 납석이 중요하다.
1970년대 포항제철소와 구미수출공업단지가 조성
논공·김천·왜관·경주 등의 공단이 계속 새로 조성
공업은 조립금속·제1차금속·섬유 공업을 중심으로 발달.
섬유공업은 대구에서 발달, 구미·경산로 확산되었고,
조립금속공업은 구미를 정점으로 포항·경주 등지로 확산
제1차금속공업은 포항에 집중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포항에 포항종합제철소가 건설된 이후
국제화물과 연안화물을 취급하게 되어
부산·인천·울산 다음의 주요항구로 발전.
문화재 총수는 전국의 18.5%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문화의 중심지인 경주지방은 국보·보물·사적이,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역사와 전통이 오랜 안동지방은
유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울릉도는 천연기념물이 많다.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경주·주왕산 국립공원과
속리산·가야산 국립공원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도립공원은 금오산·팔공산·문경새재·청량산 4곳
경주시와 그 주변 지역은 국제적인 관광단지로 발전.
동해안은 울진군의 불영계곡(佛影溪谷)·성류굴(聖留窟)·
망양정(望洋亭)·월송정(越松亭) 등의 경승지와 백암온천
북쪽에서부터 부구·양정·망양·평해·구산·어경·장사·
화진·월포·칠포·송도 등의 해수욕장이 하나의 관광권역.
안동시를 중심으로 안동호·도산서원·하회마을·부석사·
소수서원·희방사를 잇는 지역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다. 1
1977년부터 쾌속여객선이 포항과 울릉도 사이에 운항
울릉도는 여름철의 인기있는 관광지로 각광 받고있다.
[지역개발]
낙동강 연안 중심 서남부평야지대는 대구시와 연계개발.
구미·김천·논공 지역의 전자·섬유 공업을 육성하고,
특히 구미는 기존의 전자·섬유공업을 기반으로 삼아
대구-김천 간을 개발축으로 하는, 지역 중심도시로 발전
구미의 배후도시인 김천은 내륙지방 교통·유통의 중심지
경산은 학원 도시로 발전시키고, 영천은 대구의 배후 도시
북부 산악지방은 안동을 거점도시 중심축으로 개발할 계획
우리나라.
1,고대국가.
2, 대한민국
..............
1. 고대 국가.
...............
한반도 주변 3면의 바다는 빙하기에 드넓은 육지.
지구온난화로 인해 차츰 바다 속으로 잠기어 갔다.
그로 인해 저지대 민족들은 고지대로 민족 대이동
고대사회 한반도는 수많은 민족들의 피난처.
전세계 70%에 달하는 고인돌 유적이 그 흔적.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 간 피할 수 없는 전쟁.
한편, 만년설이 녹아버린 히말라야 대평원.
식수마저 구할 수 없을 만큼 사막화된 초원.
그곳 유목민들은 살길을 찾아 한반도로 남하.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들 간에 치열한 전쟁.
일진일퇴 전란 속 무수한 군소 국가들이 탄생
결국, 사냥으로 단련된 유목민족이 한반도 장악
무수한 고대국가들의 흥망성쇄 현장인 우리나라.
지금부터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기록 속 고대국가들의 발자취.
<고구려>
373년 소수림왕이 율령 반포후 엄격했던 형벌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는 고구려인
그러므로. 고구려는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다
당시 고조선에도 8 조로 된 금법이 있었는데,
후기에 지켜야 할 법 내용이 많아져 60 항목
옛날 중국에서는 속고 속이는 범죄가 많았다.
고구려에서는 소와 말도 함부로 죽이면, 노비
나라와 왕을 배반하면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의 전 재산을 빼앗을 만큼 고구려 법은 엄격했다.
도둑질한 사람은 그 물건의 10 배를 갚도록 했다.
그것을 갚지 못하면 그 가족까지 노비로 삼아 보상
고구려 초기 범죄자는 부족 지도자 회의를 통해 사형
국가의 관청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고,
물건 크기를 재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지방별로 집행되던 법의 집행을 통일
아울러 국가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일을 시키는 요역(徭役)도 보다 체계적으로 집행
그리고 각 관리들의 높고 낮음과 봉급을 주는 것,
각자 맡은 업무도 명확하게 규정되어 보다 책임분담.
국가행사 절차와 의미 등도 기준을 통일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들었다.
소수림왕 조카 광개토대왕 무덤 비문의 법규정
비문 1/3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법 규정
한인과 예인 220 호로 자신의 무덤을 지키라고 명령
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제사 등 절차와 격식을 규정
법령을 위반할 경우 형벌을 내리겠다는 것까지 기록
이러한 고구려의 법 규정은 신라에도 큰 영향을 줬다.
신라 단양적성비, 울진봉평비 등 법령이 그 사례.
이처럼 고구려는 법치국가라 국력도 크게 성장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가 고구려 발전의 큰 계기
<고구려> 행정제도는 5부 연합체
각각 부의 독립성이 부여되었고
대가라는 강력한 지배자가 있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를 실시하였고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5부를 새롭게 개편(동, 서, 남, 북, 중앙)
<신라>
법흥왕 7년(520 ) 근대적 법률형태를 갖추고 반포,
진덕왕 5년(651) 좌리방부(佐理方府) 사법기관 설치
형벌로는 삼족을 멸하는 족형(族刑), 차열형(車裂刑),
사지해형(四肢解刑), 엽시형(葉市刑), 참형(斬刑), 자결
자진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 등 잔인했던 형행 제도
신라는 지리적 특성과 토착부족 중심 보수성으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고유풍습을 오래 견지해 부족간 친화력이 높았다.
법흥왕 율령반포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
고구려나 당제를 모방해 독자적 고유성과의 조화
10대 내해왕 때 심한 한해를 당했을 때 죄수들을 석방
3대 유리왕 2년에 시조의 묘에 참배 시에 수인 대사령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 수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린 것 등.
고구려보다 완화되고 백제에 가까운 형태의 형벌.
삼국시대 이전 천신과 조상에 대한 숭배와 제사가 성행.
조상에 대한 제사 습속은 사회 질서유지에 중요한 기능
삼한 중 마한에서는 천신을 제사하기 위한 제관이 천군
제국에는 각각 소도라는 별읍을 설치해 천신에게 제사.
소도에 선악을 구별하는 행위규범을 설정하는 부도 설치.
천신 또는 조상제사의 사상은 당시 사회생활의 지도원리
원시인들은 자기 집단의 동물 혹은 자연물을 특정
자신들의 집단에 대한 수호신으로서 숭배하고 제사
물길국과 말갈에서는 태백산에 있는 호표웅랑을 외경
통일신라 중앙정부는 지방행정조직을 정비.
9주 5소경이 신라 지방조직의 기본적인 체제.
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 조직기본은 주, 군, 현.
주는 통일 이전 지증왕대부터 설치되기 시작.
통일 이후 중앙정부는 지방을 9주로 개편했다.
9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영역에 각 3주씩 설치.
<백제>
백제의 형사 제도는 당률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와 비슷.
모반, 퇴군 및 살인자는 참형했고, 사면제도가 있었던듯.
형벌로는 참형, 유형, 재산형, 족형, 노비형, 종신금고형
행정제도는 16 관등으로 옷차림으로 신분을 제한.
크게 내관과 외관으로 나뉘어 도합 22부의 관서명.
수도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의 5부로 구분
다시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의 오방으로 분류.
각 방에는 방령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이를 통솔
방 밑에 10 군을 두고, 군에 3인 장을 파견해 수비
전국 22개처(제주도와 일본 열도 포함)의 주요 성읍
왕족을 보내 이에 분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담로.
<옥저>
옥저는 임둔(臨屯)의 옛 땅인 낙랑동부도위) 소관
부조현(夫租縣)의 후신으로 지금의 함흥 일대 중심
30년 낙랑동부도위 철폐후 56년 고구려에 신속(臣屬)
정치 형태는 왕이 없고 총 5,000에 이르는 호(戶)
여러 읍락 마다 삼로(三老) 거수(渠帥)가 다스렸고
각 삼로 위에는 맹주(盟主)인 현후(縣侯)가 군림했다.
고구려가 옥저를 복속시킨 다음 토착대인(두목)을 두고
사자로 삼아 주관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책임을 맡겼다.
따라서 옥저인들은 조세와 초포(담비 가죽) 어염(魚鹽),
기타 해산물을 멀리 운반해 고구려까지 수송해 공급했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되어 오곡이 풍부하고
어염 해산물이 많았지만 고구려에 많이 수탈 당했다.
옥저인은 강직하고 용맹하여 보전(步戰)에 능하였고
음식 옷 집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 혼인풍속은 반대
고구려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얼마동안 동거
옥저에서는 여자 나이 10세에 약혼하여 시가에 민며느리
성인이 된뒤 친정으로 보내면, 친정에서 전폐(錢幣)를 요구
이를 요구대로 보내면 여자도 시집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옥저는 10 장 길이 목곽을 만들어 문을 달아 놓고,
시신을 다른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육탈(肉脫)이 되면
그 뼈를 거두어 목곽에 안치해 가족 공동묘지로서 사용.
목곽에는 죽은 사람의 수대로 그 사람의 형상을 목각
안치하고, 토기(土器)에 쌀을 담아 문 입구에 매달았다.
<부여>
BC 1세기경 30년 동안 퉁구스계(系) 부여족이 세운 나라.
부여는 지금의 북만주 눙안[農安]·창춘[長春] 일대에서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이다.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지배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
구가(狗加)와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또 전국을 사출도(四出道) 혹은 사가도(四街道)로 나눠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그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
피지배 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
산업은 농경을 주로 하였고, 명마(名馬)·적옥(赤玉)·
미주(美珠)·돈피(皮) 등이 산출, <영고>란 제천대회
법률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간음(姦淫)에 엄벌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鮮卑)·오환(烏桓),
동쪽에 읍루(婁), 남쪽에 고구려와 한(漢)의 현도군
해부루왕(解夫婁王) 때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섭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뒤부터는 동부여
가섭원은 지금 강원 강릉시 일대, 훗날 고구려 영토
<동예>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하였다.
옷만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비슷
3세기에도 읍락(邑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
읍락 간에 함부로 다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침범하면 노예 또는 소 말을 물리는 책화(責禍)
동예 지역은 강력한 대군장(大君長)이 출현 못하고,
후(侯) 읍군(邑君) 삼노(三老)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일찌기 낙랑군은 옥저와 동예에 7개현 설치해 간접 통치
이들 명칭은 그들이 각 읍락의 거수(渠帥)에게 하사한 것.
2세기 후반 동예는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245년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 공격을 받고 다시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고구려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대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농업을 주로 하였으며, 마포와 양잠 기술이 발달하였고,
풀솜(명주)을 생산, 별자리를 관찰해 농사 풍흉을 예고
매년 10월 밤낮으로 음식 술 노래 춤을 즐기는., 제천행사
특산물로는 반어피(班魚皮) ·표범가죽 ·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이 알려졌다.
<진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
대구 경주 지역 12개 소국
맹주(盟主)인 경주 사로국(斯盧國)
기저국(己國) 불사국(不斯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 염해국(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우유국(優由國)
큰 나라는 4,000∼5,000가(家), 작은 나라는 600∼700
진나라 유민들이 노역을 피해 한나라로 이주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받아 진한을 형성했다.
이들 소국들은 3세기 후반에 신라의 기본세력
그 중 일부는 가야(伽倻)의 소국(小國)으로 발전.
<마한>
BC 1세기~AD 3세기 경기·충청·전라도 지방 54 소국.
큰 나라는 1만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 합 10만 호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정착
선주(先住) 토착집단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삼한이 형성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 유민과 부여계 집단의 정착 등
철기세력이 형성되 청동기문화 단계의 마한은 점차 위축
2세기 이후 백제에 통합 전까지는 목지국(目支國)과 병존
마한 54국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감해국(感奚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건마국(乾馬國)
고랍국(古臘國) 고리국(古離國) 고비리국(古卑離國)
고원국(古爰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포국(古蒲國)
구로국(狗盧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구소국(狗素國)
구해국(狗奚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노람국(怒藍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막로국(莫盧國) 만로국(萬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수국(牟水國)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벽비리국(卑離國) 불미국(不彌國)
불사분사국(不斯邪國) 불운국(不雲國) 비리국(卑離國)
비미국(卑彌國) 사로국(駟盧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소위건국(素謂乾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신분활국(臣活國) 신소도국(臣蘇塗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신흔국(臣國) 아림국(兒林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염로국(路國) 우휴모탁국(優休牟國) 원양국(爰襄國)
원지국(爰池國) 일난국(一難國) 일리국(一離國)
일화국(日華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지반국(支半國) 지침국(支侵國) 첩로국(捷盧國)
초리국(楚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치리국국(致利鞠國).
<변한>
변진(弁辰)이라고도 하는데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까지
지금의 김해 마산 지역에 분포한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
진한과 잡거, 말 법 의식주가 같고 귀신 섬김이 다르다.
변진은 경상도 정치집단 중 진한이 아닌 가야연맹체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고 문신(文身) 풍속.
............
2. 대한민국.
............
현재, 지리산 일대는 대한민국 남한의 중심.
한수 이남 삼면의 바다 중심인 곳도 지리산.
우리나라에 관해서 폭 넓게 알아보기로 하자.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인구 : 48,199,000
면적 : 99,900 ㎢
수도 : 서울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한국어
독립년월일 : 1948. 8. 15
화폐단위 : 원(won/₩)
국가(國歌) :애국가
목차
개요 | 자연환경 | 국민 | 인구·취락 | 경제 | 정치
| 사회 | 언론·출판 | 교육 | 과학·기술 | 교통·통신
| 국토개발·환경보전 | 문화 |
개요.
1948년. 8월 15일 아시아 한반도 민주공화국.
한국(韓國:Korea) 또는 남한(South Korea)
코리아(Corea, Korea)는 고려에 대한 표기
그밖에도 예로부터 동국(東國)·진국(震國)·
진역(震域)·해동(海東)·청구(靑丘) 등
무궁화와 관련해 근화지역(槿花地域)
또는 근역(槿域)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있으므로
대륙의 각종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키워왔으며,
일본에 문물을 전수해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익을 담당.
지리적 조건상 대륙과 바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과 압력
19세기 말경 일본과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각축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방 형식으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38°선으로 국토 분단
1950년 6·25전쟁 동족상쟁을 경험하기도 했다.
1953년 휴전후 통치영역이 휴전선 이남으로 한정
자연환경.
아시아 동쪽 끝에서 남쪽으로 뻗은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한국의 영토는 9만 9,221㎢로 오스트리아·헝가리·아이슬란드·
불가리아·포르투갈·리베리아·쿠바·과테말라·온두라스와 비슷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할 때 남한의 면적만도 그렇게 좁지만은 않다.
영해(領海) 범위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해안으로부터 12해리
섬이 많은 서해와 남해에서는 가장 바깥 섬에서부터 12해리까지
울릉도와 독도에서는 이들 섬의 해안으로부터 12해리,
대한해협에서는 가장 바깥 섬에서 3해리의 수역이 영해
영해 바깥 대륙붕의 광구설정에서는 서해 경우 동경 124°
지질.
지질은 변성암이 국토의 40%, 화강암이 30%를 덮고 있다.
동해·단양·영월·문경 시멘트 공업은 조선누층군 석회암
삼척, 영월·문경 등지의 탄전은 중생기 중기 이후 퇴적암
경상도 대부분 경상분지는 중생대 말기 거대한 호수,
신생대 제3기층은 포항·동해·서귀포 등지에 소규모.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친 기간에는 화산 활동이 활발
제주도·울릉도·철원 등지에 화산 지형이 형성되었다.
국토의 70%가 산지이지만 해발 1,000m 이상은 극히 한정
동해 사면은 좁고 급한 반면에 서해 사면은 넓고 완만하다.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경동운동으로 형성된 산맥이다.
소백산맥도 높고 맥이 뚜렷하여 융기와 관련되어 형성.
영서와 영동을 잇는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부, 호남과 영남을 잇는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하천과 평야
하천은 서해와 남해로 유입하며, 과거 수운에 널리 이용
오늘날에는 국토종합개발과 관련된 용수원(用水源)으로 중요
김포평야·평택평야·논산평야·김제평야·나주평야·김해평야 등
춘천·원주·충주·대구 등은 하천 중상류의 넓은 침식분지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는 화강암의 차별 침식으로 형성
해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이 국토면적에 비해 매우 길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만 반도 섬이 많고 해안선의 출입이 극심
동해안은 융기해안이라 단조로운데 서해안은 침강해안이라 복잡.
남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의 세계적인 본보기.
동물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는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
범세계적으로 해수면이 100m 이상 여러 번 오르내렸는데,
해면이 낮았을 때는 황해가 육지로 드러나는 한편
황허·양쯔 강과 한반도 여러 하천들은 하나의 수계
규슈[九州]와 혼슈[本州]도 아시아와 이어져 있었다.
민족
국민은 거의 모두가 한민족(韓民族) 또는 한족(韓族)
2000년 현재 한민족을 구성하는 인구는 약 7,482만 명
이들 한민족은 세계 각 지역의 여러 나라에 널리 분포
남한에 4,700만 명, 북한에 2,217만 명, 중국에 204만 명,
미국과 캐나다 북아메리카에 206만 명, 일본에 66만 명,
러시아 49만 명, 라틴아메리카·유럽·중동·동남아 39만 명
한민족은 신화·역사·체질·문화, 특히 언어의 공통된 특성.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믿는 것은 〈단군신화〉에서 연유
그러나 한민족의 형성시기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
한민족은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고,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몽골 인종
몽골인종은 '고시베리아족, 신시베리아족'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언어의 특성에 따른 알타이어족과 우랄어족
한민족은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과 더불어 알타이어족
알타이어족은 제4빙하기까지 알타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
그후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자 신석기시대 때 남으로 이동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외몽골을 거쳐 장성 및 만주까지,
퉁구스족은 중국 흑룡강 유역까지,
한민족은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 등
특히 랴오닝 지방의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농경, 청동기 문화를 발전.
고조선은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 부족연맹체를 통합
언어
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현재 남한과 북한, 해외 동포들은 한글을 쓰고 있다.
전세계 3,000 언어 중에서 한글은 20위에 속하는 언어
한글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어 및 일본어와 함께 3대 언어
한국어는 터키어·몽골어·퉁구스어와 친족관계의 말이다.
알타이어족은 전치사를 쓰지 않고 후치사인 조사를 쓰며,
성과 수를 표시하는 규칙이 없고, 모음조화의 현상이 뚜렷
품사 배열에서 동사가 마지막에 오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 중에서도
한국어는 퉁구스어와 가까운 친족관계.
퉁구스·만주 여러 민족들이 흑룡강 유역을 비롯
만주지방에 살았다는 지리적 인접성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음운·문법·어휘에 있어서 유사성을 많기 때문
시베리아 동부, 사할린, 중국의 동북부 만주지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몽골 인민공화국의 일부지역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언어도 퉁구스계의 언어
만주어는 청(淸)나라의 공용어로 사용.
한국어의 경어는 알타이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차이점
한국어에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특수한 어휘가 많다.
한국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부여계
진한·변한·마한을 포함한 삼한의 한계(韓系)
북쪽 갈래의 부여계 언어는 고구려어로 이어지고,
남쪽 한계 언어는 신라와 백제의 언어로 이어진다.
하나의 공동 조어에서 분화된 2갈래의 언어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다시 하나로 통일
당시 도읍이었던 경주 경상도 방언이 표준어
그뒤 고려의 건국에 따라 개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방언이 고려의 표준어로 바뀌었으며,
그것은 이조에 이어 오늘날 표준어로서 정착.
그러나 제주도는 육지와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에
육지의 방언과는 다른 옛 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각도의 방언이 약간씩 다르지만 함경도와 경상도는 유사
고려시대 이후 영남에서 함경도로 많이 이주한 때문.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한글 고유한 문자를 사용.
임진왜란을 전후로 사라진 몇 글자 (ㆆ, ㅸ, △, ㆁ, ㆍ)
종교
불교(23.1%), 개신교(19.66%), 천주교(6.62%).
고조선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신(天神)을 믿고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며 무속 등 토탬신앙
단군신화의 환인은 고대 한민족의 신앙 대상인 천제.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I天)
모두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천신에게 제사 드리는 의식.
이러한 제의(祭儀)에는 집단적인 가무와 음주가 행해졌다.
고대 원시신앙은 지금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져온다.
삼국시대 불교를 수용하고 도교를 받아들였다.
태학과 국학을 세우고 태학박사 오경박사·의(醫)·역(易)
등의 박사제도를 두어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특히 신라에서는 유교·불교·도교의 원리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단체정신이 강한 화랑도 청소년 집단을 만들어
교육·군사·사교 단체의 기능을 강화하며 인재들을 배출
통일신라는 사찰·불상·탑 등의 불교문화를 이룩
그 유물이 전해져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많다.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거란·여진·몽고 침입에 대한 호국불교로 발전
〈팔만대장경〉은 호국불교의 염원에서 착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유교와 한문학의 교양을 지닌 사람을 등용
과거제를 실시, 승려에게 승과 국가시험제도를 두었고,
사원에 토지와 노비를 주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을 베풀어
사원경제가 팽창했으며, 승려들은 귀족 신분을 갖게 되었다.
고려 때 신라 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 사상이 유행
그 영향으로 과거제도에 지리과(地理科)가 생기기도 했다.
이조 왕조는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압
유교의 원리에 따라 문물제도를 갖추고 성균관을 설치하고
지방에 향교와 서원을 세워 인재양성, 한편 제사를 행했다.
유교는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실천의 2가지 측면
유교의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천지의 교사(郊社)에 대한 제사
조상의 조묘(祖廟)에 대한 제사 및
성현들의 문묘에 대한 제사로 집약.
이러한 제사 의례는 형식을 매우 중요시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윤리적 실천 강령을
행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실행에 옮긴 것
민중들은 전통의 관행에 따라 천신을 섬기고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고 무속을 행했다.
유학자는 옥황상제 칠성 염라대왕·사해용신 신당을 신봉
민간에서는 물론 왕실에서조차도 도교의 신봉이 여전했다.
이조 후기에는 관념적·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
경세제민·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
실학파가 나오고, 천주교도 온갖 박해와 순교 끝에 수용된다.
이어 기독교 여러 교파의 개신교들이 들어와
서양교육과 의술을 전파시키는 데 크게 공헌.
천주교 전래는 북경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간접 전파
17세기초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면서 천주교 전파가 본격화되었다.
개신교도 K. F. A. 귀츨라프, A. 윌리엄슨, R. J. 토머스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성서를 번역하고 배포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의 전복음셔언〉
H. G. 언더우드와 H. G. 아펜젤러가 입국하며 선교활동.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교육·의료 사업과 농촌운동을 실시
이조 봉건사회를 개화시키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선사회 전통과의 이질감 때문에
초기에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정착된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과 함께 교파가 분열되고,
이에 반한 소종파운동 이후 교회일치 연합운동이 전개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는 양적 성장
[인구·취락]
인구의 국외 이동은 이조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 간도 및 연해주 지방으로 상당한 이민이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하와이로 가는 계약 이민까지 많이 있었다.
그후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해외 이민 급등.
8·15해방 직전까지 만주와 중국에 220만 명,
소련의 연해주, 사할린, 중앙아시아에 30만 명,
일본에 200만 명의 동포가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현재 중국에 150만 명, 일본에 60만 명,
소련에 약 3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후 100만 교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이 그 예.
8·15해방과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을 초래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서 약 180만 명의 인구가 월남,
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약 160만 명의 동포가 귀국,
모두 350만 명에 가까운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6·25전쟁중에 다시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월남.
[경제]
한국경제는 지난 30~40년 동안 크게 성장했다.
1962년 이후 GNP가 해마다 실질적으로 8% 성장
한국 경제가 고소득국에 크게 뒤지지 않게 되었다.
산업구조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한 1962년 1인당 GNP도 87달러
1970년 252달러, 1980년 1,592달러, 1990년 5,569달러,
1997년 1만 550달러로 우리나라 소득은 비약적인 증가
질적으로도 농업 중심의 국가에서 신흥 공업국가로 변모.
1970년 GNP의 26.5% 농림어업은 1990년 9.1%, 2000년 4.7%
반면, 제조업은 1970년 21.1% 1988년에 32.5%로 높아졌다.
1990년에는 29.2%로 약간 낮아졌다가 2000년에는 31.3%로.
선진국이 200~300년에 걸쳐 이룬 성장을 20~30년에 이룬 것.
농업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농업을 위기상황으로 진단한다.
즉 1인당 경지면적이 세계에서 최하위수준에 있으면서도
상당한 농경지가 놀고있고 식량자급률은 40% 이하의 수준
농민들은 기회만 있으면 농촌을 떠나려 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및 생활격차
그 주요 원인으로는 정부의 투자가 도시에 비해 미흡
경제외교
냉전시대 한국외교의 제1차적 목표는 안보외교였으나
경제성장과 냉전 해체로 외교 중점이 경제외교로 이동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원조외교',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차관 및 투자유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는 국내시장 보호
1990년대 중반후 세계화 시대가 도래하며 시장개방과 투자유치
도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는 이조 중엽 황토현 광장
(광화문-동대문 간과 광교-남대문 간+자형 도로)
해방 이후 기존도로의 포장과 확장에 치중하다가
1960년대는 고속도로를 중점 건설하여 고도경제성장
1970년대는 국도포장사업을 본격화하여 지방균형개발
1980년대는 주요 국도 및 지방도 포장을 거의 마무리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고속도로망 확충과 국도 확장
1998년말 총도로연장은 8만 6,989km로 전국 일일생활권
자동차
1962년 3만 814대에서 1997년 1,000만 대를 돌파
1998년말 현재 1,046만 9,599대를 기록하고 있다.
철도 및 지하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간의 32.2km 최초 개통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
6·25전쟁으로 철도설비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나
전후복구와 재건노력으로 1960년대 이후 국내 기간수송수단
현재 서울-부산 간 426km를 최고시속 300km 경부 고속철도.
한편 지하철은 1974년 서울에서 1호선을 개통
전국 6대 도시에서 운영 또는 건설 중에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인천·광주·대전.
해운
근대 항만사업은 1876년의 부산항 개항,
1880년의 원산항 및 1883년의 인천항 개항
수송실적의 추이를 보면 여객수송은 1962년 436만 명
1996년 934만 명으로 늘다가 연육교 건설로 증가량 감소
많은 교통수요가 육상교통으로 전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항공
1969년 대한항공(KAL)이 민영화된 이후 수출지향적 경제정책
1989년에는 국제수송 면에서도 세계 10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8년에는 제2 항공사업이 허가되며 복수 사업자 경쟁 체제
항공협정이 체결된 75개국, 국제항공노선을 주 518회
국내노선에도 33개 노선에 주 1,418회 운항하고 있다.
운송용 항공기는 1999년 3월 현재 총 156대를 보유중이며
KAL 112대, 아시아나 44대로 대형기종인 보잉 747기를 46대
우편
신라시대에 역(驛) 제도가 있어 우편업무를 취급했다.
이 제도는 이후 고려·이조 시대에도 이어져 왔으나
개인간의 통신을 위한 우편제도는 1884년부터 시작
서울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창설하고
인천에 분국을 개설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편제도는 중지된다.
1895년 우편제도가 부활되어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되고
중앙에는 통신원 설립. 1900년에 국제우편도 시작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합동규약 체결로 우편기관은 일본이 운영.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이 기관들은 미군정에 의해 운영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체신부가 설치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74년부터는 공산국가와의 우편물 교환제도도 시행했다.
1990년과 1996년에 서울에 2개의 우편집중국을 건설했고
1996년에는 우정사업의 경영효율화를 위한 법률근거를 마련
1998년 최초로 우편사업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전기통신
처음 도입된 1894년 한성전보총국에서 최초 전화시험
1896년 10월에 개통된 궁내부 행정전화가 효시가 된다.
일반공중용 전화는 서울-인천 간의 시외전화가 1902년 개통
같은 해 여름에는 서울에서 시내전화 교환업무도 개시.
1905년 을사조약 6개월전 통신주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1945년 8.15까지 전기통신은 일본의 식민지통치책의 일환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행정 전화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용된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체신부가 발족되었다.
195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해
통신분야의 국제협력활동이 시작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전화교환설비 80%가 파괴
1957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965년에 텔렉스 자동교환망이 설치되어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
1967년에는 마이크로웨이브 전국통신망 개통
1970년 위성지구국 구축으로 전세계와 통신 가능
1971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자동전화가 개통된다.
1987년에는 1,000만 회선이 달성되는 눈부신 발전
1991년 10만 회선 용량급의 TDX-10형 교환기가 개발.
1994년 정보통신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집중 육성
1999년 서울 S/W타운 조성과 정보통신(IP)산업 활성화
국토개발·환경보전]
1968년 경인고속도로 건설 시작으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호남고속도로, 1975년 영동고속도로 등이 건설된다.
1997년 현재 전국의 도시화 비율이 86.8%에 이르게 되었다.
1982~1989년 간척 및 해면매립을 통한 241㎢ 국토확장
[문화]
최초 무속은 음주가무를 통해 무아지경의 교령(交靈)
신의 영력을 빌어서 재액을 없애며 축복된 삶을 창조
'신바람 예술'이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라고 보여진다.
불교가 유입되면서 샤머니즘과 불교가 창조적으로 혼합
통일신라시대 '힘의 예술'이 국가권력과 신의 위력이 합일
권력을 과장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 창작 의욕이 발현된다.
석굴암의 조각 등에서 그 전형이 발견되는데,
고대 그리스 예술과도 상통한 특징을 드러낸다
우리나라는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좀더 강했던 편.
다음 단계는 유교주의를 표방한 이조왕조는 '멋의 예술'
'무기교의 기교'가 특징인 자연주의는 서양과 마찬가지
자본주의와 기계문명, 그리고 관료체제의 도전을 받는다.
1884년 〈한성순보〉 해외문화 소개기사
음악·미술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출현했고,
1898년 고종과 황태자의 등신대 초상화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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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국토 지리적 산세에서의 중심은 백두산.
고조선 시대에 이르러 단군신화의 성역은 묘향산.
이조 단군신화의 성역은 강화도 마니산과 태백산.
'우리나라 민족사상의 중심은 지리산.'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역사의 중심 또한 지리산.
역사는 현실을 토대로 세워야 국제사회에 설득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리산에 관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백두산에서 천왕봉까지 뻗은 백두대간.
해가 떠오르는 곳에 위치한 동방의 나라.
타골이 '동방의 빛'이라 표현한 우리나라.
태평양 북서풍 모진 풍파를 견딘 우리나라.
30억년 전 지축이동으로 바다에서 솟은 산세.
히말라야 산맥은 5~6억년 전 태평양 바다 속.
그곳 암모나이트 자갈 속 물고기와 조개의 화석.
그것은 히말라야 산맥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입증.
백두대간 산맥 역시 해마다 그 높이가 치솟고 있다.
백두대간은 지질학적으로 6천 5백만년 전 화산 폭팔.
지리산 일대는 3천만년 동안 용암이 뒤끓었던 용광로.
화산폭팔 이전까지 지리산 일대는 공룡의 천국이었다.
공룡은 9천만년 전 지구 상에서 짧은 동안에 멸종됐다.
한반도에서 사라진 공룡은 약 2천 5백만년간 지구를 방황.
공룡이 어떤 이유로 멸종되었는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중동지역 유전으로 보아 그곳 일대에서 멸종된 듯 보인다.
유전은 중생대 백악기 지질층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석유는 쥬라기시대 공룡과 식물들 화석의 잔존 퇴적물.
지하 3000 ~ 4000m 또는 5000 m에서 쏟아져 나오는 석유.
지구상의 자동차를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석유 매장량.
공룡시대와 빙하시대가 끝난 후 지구의 주인은 인류가 된다.
바다가 육지로 변하고, 육지가 바다로 뒤바뀐 장구한 세월.
열대지역이 온대지역으로 변하고, 한대 지역으로 순환 변화.
화산 폭팔로 용광로 같던 지구 표면이 빙하로 덮이기를 반복.
한반도에서 인류의 기원은 6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46억년 지구 역사에 비하면 인류의 역사는 짧은 셈.
구석기시대 중국(북경)의 유물과 제주도 유물은 유사.
구석기시대, 빙하시대를 거쳐 대홍수 이후 신석기 시대.
현재 한반도 해안 형태는 7천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약 1만 8천년전 빙하지대였던 한반도.
오늘날, 남북극 만큼 빙하가 덮혔을듯.
지구 온난화로 인해 7천년 전까지 빙하가 녹아 흘렀다.
현재, 한반도 해안선은 빙하가 녹아 형성된 7천년전 모습.
한반도의 해안, 산, 강의 모습은 7천년전에 갖춰진 형태이다.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진 후 들이닥친 대홍수.
대홍수가 일어나자 지구상의 동물들은 산으로 피난.
당시 인류는 휴화산에서 불씨를 얻고 수렵, 농사로 연명.
대홍수가 끝난 후에야, 점점 강쪽으로 생활터전을 옮긴 듯.
높은 산에서 다시 강가나 바닷가 쪽으로 이주를 한 것 같다.
구석기시대 유물들은 대부분 빙하가 흘러내리며 사라진듯.
수천 미터 두터운 빙하 층이 녹아 흘러 골짜기를 깎은 흔적.
한반도 지표면은 빙하시대 이후 수백 m 이상 깍인 흔적이 있다.
'한반도에서 흔적 조차 사라진 화산의 분화구들.'
현재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제주도.
제주도는 화산 분화구의 형태가 대부분 원형대로 유지된 상태.
빙하가 녹아 지표면이 깍여나간 흔적이 크게 없음을 알 수 있다.
동해는 동북아시아 빙하가 흘러내리며 패인 물골.
남해는 진도 서쪽과 제주도 서쪽까지 평균수심 101m.
서해는 아시아 대륙을 덮었던 빙하에 훓고 지나간 흔적.
불과 만년전부터 7천년전 사이 빙하시대 이후 형성된 바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해수면 아래로 잠기기 전까지는 육지.
특히, 서해는 빙하가 녹기 전까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저지대가 서해 속으로 잠긴듯.'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서해가 저지대 육지였음을 알수 있다.
그당시 서해 지역은 바다 속으로 해마다 수십리씩 사라져간다.
하여, 서해 저지대로부터 고지대로 차츰 민족 이동이 시작된다.
저지대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고지대 유목민과 벌어진 영역다툼.
고대 국가가 형성되고 전쟁이 벌어지며 흥망성쇄의 역사가 시작.
한반도 역시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맛물려 고대국가가 형성된다.
삼한시대(마한 변한 진한) 형성 전, 역사의 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존재는 물에서 비롯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비와 눈의 근원도 바다.
바다는 원초적인 공포감을 일게 하는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
바다에 얽힌 전설이 많은 이유는 한없는 넓이와 깊이 탓.
사나운 폭풍우, 짙은 안개 그리고 배를 삼키는 바다의 괴물.
바다는 옛날부터 신비한 베일에 싸인 지하세계로 통하는 관문.
바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지구 상 가장 높은 히말라야 최고봉보다 깊은 바다속 신비.
한반도는 삼면의 바다가 대륙붕으로 둘러 싸인 특수한 지형.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같은 안전지대.'
......................노아의 방주................................
7000년전 40일 간 비가 내렸던 대홍수 기록(구약성서 창세기)
하느님으로부터 방주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
노아가 고른 동물 만이 피난할 수 있었다는 전설 속의 방주이다..
빙하가 녹아 흐르고 대홍수에 패인 자국이 그랜드 캐년.
지구 온난화로 빙하시대가 막을 내리며 해수면의 급상승.
그당시 지구는 높은 산봉우리 말고는 거의 물에 잠긴 듯.
...................................................................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역사에도 대홍수 기록이 있다.
기원전 1660년에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대홍수 기록이 있다.
단군도 아사달(평양) 도읍지에서 묘향산으로 대피했던 역사기록.
....................역사기록..................................
단군은 기원전 3,898 년에 배달국을 개천(開天).
고구려 고주몽에게 양위한 때가 기원전 58 년이다.
기원전 1661년(15대 단군 51년) 은나라가 화친을 구했다.
기원전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피혜 입었다.
이에 단군은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BC 1660년 양운국과 수밀이국이 조공을 바쳤다.
(수밀이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양운국 인근.)
.....................................................................
'단기 역사로 보아 대홍수 시기는 약 4천년 전.'
빙하시대후 대홍수는 지구 곳곳에서 여러 차례.
대홍수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곳은 화산지대 뿐.
구약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은 화산폭팔 흔적.
그후 대홍수에 사해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잠긴 도시.
'노아의 방주'는 배 형태의 분화구였을 듯.'
대홍수의 재앙으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했을.. 화산 분화구.
용암이 끓고 뜨거운 온천이 솟는 휴화산은 생명체들의 피난처.
인류는 그곳에서 악펀후를 피하고 불씨를 얻고 수렵을 했을 듯.
우리나라에서 '노아의 방주'같은 곳은 창녕의 화왕산.
화왕산 분화구 역시 '노아의 방주' 같은 피난처였을 듯.
창녕은 '비야 가야' 도읍지이자
우포늪 공룡발자국 화석 유적지.
화왕산은 휴화산이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곳.
제주도의 한라산 및 백두산 개마고원 역시 같은 맥락.
서해안 일대는 밀물 썰물에 의해 해마다 침하작용.
남해안 리아시스식 해안은 빙하시대에 패여나간 흔적.
한반도는 해마다 북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남극과 북극은 빙하 지대이고,
남극점은 위치가 매일 변한다.
남극점 탐험가들은 그탓에 방황.
햇볕을 가장 적게 받는 지구의 양극
남북극은 지구 중력의 축이기도 한 곳.
그 중심축은 46억년간 조금씩 꾸준히 이동.
'이런 지각변동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햇볕에 의해 지구는 온대 열대 한대가 형성된다.
달의 인력에 의해 밀물과 썰물의 조류가 형성된다.
무거운 물질은 북쪽으로 몰리게 하는 태양계 원심력.
북극 빙하지대에 막혀 위로 솟구친 히말라야 산맥.
혹한에 팽창된 북극의 빙하와 지구 원심력의 조화.
지구의 육지는 북반구 북극 방향으로 점점 몰려간다.
남극 방향으로는 점점 더 넓은 바다가 형성된다.
호주가 한반도 방향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생긴 틈을 비집고 용암이 분출된다.
화산폭팔로 지구 무계의 불균형을 46억년간 잡아준 용암.
지구가 태양계 궤도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하는 화산폭팔.
우주 궤도에서 벗어난 별은 유성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삼면 바다 속에 대륙붕 몸집을 숨긴 한반도.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진 한반도의 골격.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을 중심 축으로 하는 지형.
옛부터 신이 살고 있다는.. 성스러운 삼신산.
백두산 영주, 금강산 봉래, 지리산 방장, 3신.
백두대간은 3면의 바다에서 솟은 '天神의 남근'.
백두대간의 머리를 다스리는 백두산 산신령은.. 영주
백두대간의 뿌리를 보호하는 지리산 산신령은.. 방장.
백두대간의 허리 지킴이 황홀경 금강산 산신령.. 봉래.
백두산은 정상 주위가 흰눈에 덮여 있어 명명된 백두.
천신의 정기가 백두를 통해 분출된 산정호수가 천지(天地)
'영주'라는 산신령은 백두대간 천신의 정기를 지키는 지킴이.
금강산 수호신 '봉래'는 무릉도원 황홀경 지키는 산신령.
지리산 수호신 '방장'은 그곳의 불로초를 지키는 산신령.
'천신의 정기'가 지리산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으로도 해석.
'우리나라 영역을 상징하는 백두대간.'
동해 남해 서해 3면의 바다까지 우리나라 영역.
백두대간 뿌리는 백두산이 아니고 지리산인 셈.
따라서, 백두대간 제 1구간은 지리산에서 시작.
지리산 우리 말 이름은 ..달룰뫼.
'위에서 내리 누른다.'는 뜻이다.
天神의 정기가 天王聖母 몸속으로 들어감을 상징하는 이름.
천왕성모는 '천신의 정기를 이어 받은 거룩한 어머니'란 뜻.
즉, 사람이지만 천신의 정기를 받은 '지리산 토속신앙의 대상.
'두류산(頭流山)·방장산(方丈山)·지리산(地理山) '
현재 지리산의 옛 이름 3개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두류산> 이름 속에는 음양오행설 숨은 뜻을 담고 있다.
두류산은 백두산 '머리 頭'를 향해 흐르는 발원지를 의미.
'즉, 두류산은 천신의 정기 백두대간에서 뿌리.'
백두산과 별개가 아닌 한 줄기로 해석하여 두류산.
<방장산>은 3 신이 살며 지킬 만큼, 불로초 많은 곳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삼천 동자를 보냈던 명산.
'진시황의 조상은 서해 저지대에 거주했던 민족.'
저지대가 서해에 잠기자 민족 대이동을 거쳐 중국 중원을 점령.
대홍수에서 물을 잘 다스린 우씨 가문이 중국 최초 하나라 창건.
하 은 주를 고대국가를 거쳐 진나라가 중국을 천하통일하게 된다.
중국 역사는 저지대 어,농업 민족과
고지대 유목민간 영역 다툼으로 점철.
한반도 역시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까지
저지대 민족과 유목민 민족과의 영역 다툼.
삼신산(지리산) 지명은 진시황에게도 알려진 이름.
서해 저지대가 물에 잠기며 중국으로 이동한 민족들.
진나라 조상도 지리산은 옛날부터 삼신산으로 여긴 곳.
즉, 우리나라로 이주한 민족과
진나라를 이룬 민족은 이웃사촌.
한반도에서 단군신화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시대.
구석기시대 말에서 신석기시대 초기 사이의 어느 한 시점.
즉, 빙하기 후 대홍수로 서해가 바다에 잠길 무렵 민족 이동.
서해지역에서 피난 온 민족에겐 지리산 일대가 정착지였을 듯.
하여, 그당시 모계사회에서 천왕봉의 천왕성모는 숭배의 대상.
삼한시대 이전부터 거주했던 토박이들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후 가락국을 창건한 김수로왕이 불교문화를 도입한 듯.
변한 영역이 가락국을 거쳐 신라에 합병되며 불교가 번창.
반야봉은 한반도 불교문화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꽃핀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신라에서 해상왕국을 이룬 시기.
가락국 불교는 인도에서 들어왔고 신라 불교는 당나라에서 유입.
'이조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
그는 평생 지리산을 떠나지 않고
지리산에서 살다가 뼈를 묻은 인물.
'看山看水 看人看世' - 남명.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
그에게 지리산은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자 표상.
지리산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축소판인 곳.
한반도 사상의 산실이고, 선도성모를 섬긴 성역.
지리산은 민족 정기와 불교가 합쳐진, 문화의 산실
<통일신라 선종불교인.. 실상산문>
<고려의 천태종과 조계종..종파 본산>
모두 지리산에서 싹텄고 이조 후반 유교와 합쳐진다.
임진왜란 당시 지리산은 우리나라 의병활동의 중심지.
동학혁명, 일제시대 형평사 운동 등의 거점은 지리산.
한반도 조상은 바이칼 호 설원에 살던 백의민족.
생명의 근원은 백색에서 태어나 백색으로 돌아간다는 토탬.
한반도 상복이 전통적으로 백색인 사실은 그 사실을 뒷받침.
낙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다양한 유물들.
낙동강 유역과 중국 북경 유물은 거의 비슷하다.
고대사회에서부터 뿌리가 같은 문화를 공유한 때문.
고대국가가 형성 되기까지 성씨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이름의 첫째 글자(돌림 자)는 그곳 씨족사회의 혈연관계
이름의 끝 글자는 자기 존재를 타인에게 알리는 고유명사.
'배달민족의 민족 정기를 담고 있는..백두대간'
지형으로는 백두산이 머리 이지만 뿌리는 '지리산'이다.
'백두대간 1 구역'은 천신으로부터 물려받은 민족 정기.
불교 관점에서 보면, 백두대간 민족정기의 뿌리는 지리산.
한반도는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군림했다.
고려시대에는 세계적인 해상 무역왕국.
오늘날까지 '코레아'로서 불리울 정도.
이조시대 해금 정책때문에 해상무역 쇠퇴.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이조의 공도 정책.
해상무역 패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만다.
현재, 38선에 가로 막힌 동아시아 실크로드.
'막힌 실크로드 육로가 다시 열리면,
한반도는 타고르 시처럼 '동방의 등불.'
동방의 등불 ( 타고르 詩 )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없고,
이상은 하늘 높이 솟는 나라.
...........................
아리랑.
우리나라 선진문명은 어디에서 싹텄을까?
한수 이북에서부터 한수 이남으로 남하 설.
삼남 지방에서부터 한수 이북으로.,북상 설
'아리랑은 그 경로를 알려주는 전통 민요.'
우리나라 민족을 하나로 이어주는 노래 아리랑.
분열된 지역감정 및 남북 분단을 해소할 돌파구.
우리 민족의 멋과 얼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어휘.
이렇게 오랜 세월 구전된 아리랑의 뜻은 무엇일까?
그 뜻조차 알지 못해 '아리랑'은 매혹적인 연구 대상.
1930년대부터 미미하게 연구되기 시작한 아리랑의 뜻
최근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 한 접근을 시도해왔다.
고어(古語)에 의한 유추 방법,
고대 전설에서부터의 유추 방법,
옛 문헌을 근거로 한 유추 방법 등
온갖 노력을 하며 아리랑의 뜻을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정설(定說)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히려 아리랑의 뜻에 너무 집착을 하다보니
아리랑과 비슷한 어휘들을 아리랑에 결부시켜
구구한 설만 난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아리랑’은 뜻을 나타낸다고 하기보다는
음악적 리듬을 이루고 흥을 돋궈주는 사설.
지금까지 연구된 아리랑 어원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알영정과 알영천에서 유래된 박혁거세 비(妃) '알영'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말이 와전되어 변해 아리랑 설.
밀양 아리랑 전설의 주인공 '아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영서 영동지방 민요 정선(旌善) 아리랑은 일명 아라리
고려를 섬긴 선비들 가운데 지난날 모시던 임금을 사모
충절을 맹세하는 심정을 한시로 읊은 것이 정선 아리랑.
그후 각종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
전란과 폭정에 고달픈 민초의 노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며 발행한 원납전(願納錢)
백성들은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고 원성.
차라리 귀머거리면 좋겠다는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 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혹사당하자
자탄조 '魚河 我多苦(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
그 '아난이'가 그후에 '아라리'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한일 합방 후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맞서지 말고 못본척하란 '아이롱'에서 유래 설 등.
역사적으로 낙랑에서 남하하는 교통로 관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며 넘던 고개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
낙랑-자비령-아리령에서 유래 설.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 아리랑.
여진족 언어 '아린'(고향)에서 유래 설,
'아리고 쓰리다'라는 말에서의 유래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
우리나라에 들어와 아리랑 쓰리랑 설.
..................................
..................................
아리랑은‘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뜻하는 노래.
‘아리랑’의‘아리’는‘고운’...‘랑’은 님’.
‘아리’는‘곱다'‘아름다운'‘아름답다’의 뜻
'아리따운’은(아리 + 다운)에서 유래된 우리 말.
몽골어‘아리’는 '고운'‘곱다’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아리랑’의 첫째 뜻은‘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아리다’는 상사병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표현.
............................................
............................................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우리나라 민족의 노래.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도.. 아리랑.
옛날부터 아리랑은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
아리랑은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문헌에 등장한 시기는 이조시대 후기에 들어서부터다.
아리랑이 처음 기록된 당시 문헌을 살펴보면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이 아리랑이 불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성들은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밤낮으로 부역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라고 하자 불만이 커갔다.
얼마나 힘든지 “차라리 귀먹었으면 좋겠다”고 탄식
그 탄식을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확산.
이때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
아리랑을 처음으로 악보로 기록한 것은 1896년
당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1863~1949)박사.
그는 아리랑을『Korea Repository』 잡지에 소개.
‘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 영문가사
이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고
그는 “아리랑은 쌀이다”란 의미있는 해설을 덧붙였다.
황현(黃玹)이 1900년에 펴낸 『매천야록(梅泉野錄)』
아리랑이 궁궐 안에서까지 불려졌다는 재미있는 기록.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을 부르게 했다.
민영주는 배우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 만 전담
우열을 가려 상을 주었는데 일본군이 경복궁 침범후 중단.
일본공사가 대궐을 침범한 때는 갑오개혁 바로 전인 1893년.
이 사실에 비춰볼 때 아리랑은 헐버트의 기록에 따라
1883년부터 1894년까지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요.
1960년대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시위가요 성격
1980년대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져가면서
아리랑은 체념과 한의 노래에서 벗어나 민족 행진곡.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공식 음악으로 선정
구한말에서 일제치하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아리랑
중국 동북삼성, 러시아 연해주와 사할린, 중앙아시아,
일본, 하와이, 미주, 멕시코, 쿠바 등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 종류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이랑,
경기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
정선(旌善)아리랑
...................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온 민요.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부터 약 600년 전 이조시대 초기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그 중 7명이 정선으로 은둔
지금 정선 남면 거칠현동에서 충절을 지키며 생활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노래.
그후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민요로 발전.
정선아리랑은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고단함,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 등등..
이렇게 구전되어 온 정선아리랑
19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우리나라 아리랑 중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
.............
밀양 아리랑.
..............
경상도의 대표적 민요 중의 하나..밀양 아리랑
밀양 영남루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이 담긴 민요.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
옛날 밀양 부사에게 아랑이란 예쁜 딸이 있었는데
젊은 관노가 아랑을 사모해 아랑의 유모를 매수한 뒤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해 아랑에게 사랑을 호소했지만
아랑이 꾸짖으며 거절하자 관노는 칼로 아랑을 죽였다.
밀양의 부녀자들은 아랑의 정절을 흠모하며 찬미
세마치 장단에 맞춰 빠르게 부르는 활달한 느낌 민요.
'라도레미솔'의 5음음계이고 '라'로 시작해 '라'로 끝맺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후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진도 아리랑
.............
전남 진도 지방에서 부르는 대표적인 민요.
진도에서는 〈아리랑타령〉이라고 부르는데
진도를 비롯 전라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가 눈물이고나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선창자가 부르면 그 소리를 받아 여럿이 후렴을 부르고
다시 선창자가 메기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선후창 형식.
주로 여성들이 일할 때나 놀 때 부르는 노래
특히 노래판을 벌여서 놀 때 가장 많이 부른다.
혼자 일하며 부를 때 후렴까지 독창으로 하는데
이때 주로 자탄적인 사설을 느리고 슬프게 부른다.
일판에서는 흥겹고 빠르게 불러 일의 고됨을 덜고
놀 때는 한껏 신명나게 불러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다.
〈진도아리랑〉은 여성 민요이기 때문에
사설의 화자도 내용도 여성들의 삶을 반영
특히 섬지방 여성들의 구김살없는 신명이 풍부
후렴에서 콧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진도 대금 명인 박종기가 만들었다는 유래 설
음악적으로 진도의 전통민요 같은 성격을 지닌다.
...............
경기 아리랑.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
강원도 아리랑
.................
〈정선아리랑〉과 더불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민요.
강원도의 대표적 통속 민요로 5박 엇모리 장단으로
5음 음계 계면조의 곡이나 제2음은 사용하지 않는다.
5음음계 중 가장 높은 음으로 시작
차차 낮아지며 느리고 구슬픈 느낌.
산간지방의 생활을 소재로 하며
내용은 산골처녀의 사랑의 하소연
"동백(冬柏)아/열지 마라
누구를 꾀자고머리에 기름……"
후렴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얼씨고 놀다가세"
..........................
..........................
이외 <해주아리랑>, <고성아리랑>, <함경도아리랑>,
<단청아리랑>, <긴아리랑>,<영천아리랑>,, <삼아리랑>.
우리나라 전역에서
우리 민족 모두에게
사랑받는 민요 아리랑.
................
지리산 아리랑.
.................
타리 타리 미타리꽃
노란 미타리 꽃
어깨너머 너머 미역취
하얀 구름 꽃님 그리워
울고 넘는 지리산 자락
눈물을 쏟아 놓고가는 여우비야
행여 보일레나 서글픈 내 웃음
행여 보실래나 풀잎아래 지는 눈물
그리워 발돋음 하면 나풀나풀 가는 호랑나비
길 잃은 숲 물안개 심신 계곡
울다가 홀로 울다 누워나 볼까
칡꽃 가슴을 얽어매고 보랏꽃 피면
지리산 산자락 품안 안고 훨훨 재 넘어 볼까
간다 간다 님 찾아간다
산 너머 물 건너 가도
우리 님 보이지 않으니
가을 산 저리 불 타나
머루랑 다래랑 따먹어도
둘이서 함께 산다면
단풍은 왜 물드는 겨
타리타리 미나리 꽃 부여 안고
뒹굴면 부러질까, 휘어질까
하얀 하얀 곰취 꽃에 벌 나비떼 찿아드는데
꽃다운 내 청춘 품에 안기는 임은 어디 있다냐
아서라, 마서라
노을 붉어 붉어 가슴 데이면
깜깜한 저녁 하늘별
함께 올지 몰라 몰라
손꼽아 헤아리다 잠이 들꺼나 푸른 꿈 한자락
손톱달로 베어임의 새 하얀 젖무덤에 묻으려 했더니
별밤에 풀벌레 울음배갯 닢만 흠뻑 적시니 아서라 마서라
기나긴 가을 밤 임 그립기는
지리산 구불구불 산 능선
그 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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