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4대 미녀(美女)
(2) 양귀비 일가의 득세와 안녹산(安祿山)의 등장
양귀비는 자신이 귀비의 자리에 오르자 사촌오빠 양검(陽劍)을 불러들이는데 현종의 총애를 받은 양검은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된다.
양국충에게 모든 정사를 맡긴 현종은 오직 양귀비만을 데리고 시안(西安)의 여산(驪山) 아래 온천지(溫泉池)에 화청궁(華淸宮)이라는 궁궐을 짓는데 온천목욕시설과 연못을 조성하여 화청지(華淸池)라 하고 여기에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곳 온천은 진시황 때부터 유명한 곳이었는데 현종은 이곳을 보수ㆍ확장하여 새 건물을 짓고 모든 국사(國事)를 팽개치고 이곳에서 양귀비와 사랑을 속삭였던 모양이다.
황제의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과 양귀비의 욕탕인 해당탕(海棠湯), 또 양귀비가 올라 머리를 말렸다는 누각 등이 남아있는데 뒤에 있는 여산(驪山)과 어울려 풍광이 너무나 수려하다.
한편, 변방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인 이민족으로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하는데 장안으로 들어오자 젊고 우람한 체격의 안녹산에게 마음을 뺏긴 양귀비는 양자로 맞아들이고 총애하는데(나이는 안녹산이 16세 연상) 두 사람 사이가 연인(戀人) 사이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총애를 받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양귀비의 사촌오빠로 권력을 잡고 있던 양국충과 부딪치게 되는데 양국충이 현종에게 안녹산을 모함하면 양귀비가 나서서 옹호하여 세 사람의 관계가 차츰 미묘하게 흘러간 듯하다.
(3) 안사(安史)의 난(亂)과 양귀비의 죽음
안녹산(安祿山)과 그의 휘하였던 사사명(史思明)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 고력사의 전횡(專橫)과 부패에 대항하여 그들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AD 756년 낙양에서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안녹산은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장안으로 군사를 몰아 쳐들어온다. 9년간 지속된 이 난은 안녹산의 안(安)과 사사명의 사(史)를 따서 ‘안사(安史)의 난’, 혹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 불린다.
안녹산이 장안의 동관(潼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양국충은 현종을 쓰촨성(四川省) 지난(濟南)으로 피난할 것을 상소하여 도피하던 중 산시성(陝西省) 싱핑(興平)에 이르렀을 때 부하 진현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잡아 처형하는데 양귀비의 복수가 두려워진 이들은 다시 현종을 협박하여 양귀비가 살아 있는 한 안녹산이 추격하는 빌미가 될 것이고, 양국충을 살해한 장병들이 불안해하여 현종의 신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며 양귀비를 처단할 것을 종용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현종은 결국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비단 끈을 내려 양귀비가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하고, 양귀비는 기꺼이 그 비단 끈으로 마외역(馬嵬驛) 앞 배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다.
이때가 AD 756년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는데 이 양귀비의 죽음을 마외병변(馬嵬兵變)이라 일컫게 되는데 이곳의 지명이 싱핑(興平)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이기 때문이다. 이 양귀비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루머가 나돌았는데 양귀비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묘를 파보니 유골이 없었다, 죽을 때 대신 용모가 비슷한 궁녀로 바꿔치기했다, 살아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도교사원에 들어가 다시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숨어버렸다... 등이다.
안사의 난은 양귀비가 죽고 한 달 후 장안을 점령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이듬해(AD 757) 안녹산은 자신의 맏아들 안경서(安慶緖)에 의해 살해당하고, 2년 후(AD 759)에는 사사명에 의해 안경서마저 살해당한다. 이어 AD 761년에는 사사명(史思明)마저 자신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하고, AD 763년 사조의가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9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본처는 고구려 유민으로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편 현종은 난(亂) 중에 아들 이형(李亨)에게 강제로 황제 자리를 양위(讓位)하고 태상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장안의 감로전(甘露殿)에 갇힌 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지난날 영화에 대한 허무함 속에 쓸쓸히 칩거하다가 AD 762년, 생을 마감하고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 백거이(白居易)는 杜甫(두보), 李白(이백)과 함께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3대 시인으로,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 자는 낙천(樂天), 시호는 문(文)이다.
허난성(河南省) 낙양 부근 신정현(新鄭縣)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인 낙양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왼쪽 건너편 향산(香山) 기슭에 잠들었는데 그 묘원(廟院)은 백원(白園)이라 불린다. 나는 이 모든 곳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으니 복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