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BC 성서연구 - 제16강 사사기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 -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사기 2:6-10
오늘부터는 ‘사사기’입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의 기록’이라는 뜻인데, 정확하게 사사시대를 언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다윗이전 3~4代의 시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잠깐 족보를 떠올려볼까요? 여리고성의 라합이 출애굽 2세대 살몬을 만나서 보아스를 낳지요? 보아스와 룻이 만나 오벳을, 오벳이 이새를, 이새가 다윗을 낳으니, 거꾸로 올라가면, 이새의 시대, 오벳의 시대, 그리고 룻의 시대, 그리고 그 이전,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시대 정도까지가 오늘 사사시대에 속한 시간들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다음 17강 룻기의 배경이 바로 사사시대의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대략 언제쯤일까요? 오늘 교재(121쪽)에 나온 연대표를 참고하면, 출애굽이 BC1290년, 광야생활이 40년이니, BC1250년이지요.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으니 BC1220년쯤 그리고 여호수아를 알던 사람들이 죽고 세겜언약을 맺었던 후손들이 주축이 되기 시작했을, 약 BC1200년부터, 사울이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시기,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기 BC1000년까지 약 200년의 시간을 사사시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 그 시대가 도대체 어떤 시대이길래, ‘사사들이 통치하는 시대’가 되어야 했을까요? 그 사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게다가 오늘 16강의 제목은 어찌 이리도 심상치 않은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일까요? 오늘 교재에 기록한 간략한 사사기에 대한 소개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교재 119쪽 “사사기는~” 시작!
“사사기는 인간의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뜻에 순종했지만, 점점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뜻과 생각을 고집하여 제 멋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범죄가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범죄하며 사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판하십니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은 주로 이방 족속과의 전쟁이지만,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회개하게 되었고, 이 회개를 보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역사가 바로 사사기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전쟁이나 환란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일컬어 ‘사사’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정제도가 세워질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사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 사사들이 누군지 설명을 하면, 왜 사사들이 통치를 하게 되었는지, 왜 그 시대의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사사기에 등장하는 이 사사(士師)들,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말 사전에는 ‘선비 사(士)’자와 ‘스승 사(師)’자가 조합되어 있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이 단어는 중국어 성경에 번역된 ‘사사’(士師) 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을 하면서 수입된 것으로 옛날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을 맡아보던 관리를 ‘사사’(士師)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물론 중국 사람들도 영어성경을 번역하면서 당시 자기네 형편에 맞는 단어를 찾아낸 것이 아마 ‘사사’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영어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길래요? 잘 아시는 대로 “judges”(판사들)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구요. 1968년에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기로 하고 만든 공동번역 성경에는 중국어 차용이 걸렸던지 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있었던 우리 나라 벼슬을 차용해, “판관”(判官)으로 그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동번역 성경에는 ‘사사기’ 대신, ‘판관기’ 라고 되어 있습니다. ‘판관’이라고 하면 우리도 조금은 알고 있지요? 판관 포청천, 그 죄인에게 내려진 형량에 따라 ‘개작두를 대령하라!’ 아니면 ‘용작두를 대령하라!’ 했던 그 수염 긴 아저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사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판관, 판사, 저 오래전에 있었던 관리들과 꼭 일치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사사들이 판관의 역할, 판사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도 맞지만, 아뇨, 사사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감당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되어, 심판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교재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주로, 이방 족속과의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었기에, ‘사사’들은 이 전쟁의 영웅으로, 그리고 용맹한 전사로 승리를 이끌어내는, 그렇게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주고 건져주는, 그래서 그 노역과 고생에서 자유하게 하는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한 판사, 그저 법대로 형벌을 내리는 판관의 역할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리더십이었던 것이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사’라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어떤 시대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하고 특별한 리더십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에만, 그것도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던 초창기 약 200년 동안에만 등장하는 아주 독특한 리더십입니다.
이스라엘의 한정판 리더십, 이 톡특한 리더십을 히브리어 성경은 “쇼페팀”(shophetim)이라는 단어로 기록해두었습니다. 이 단어는 ‘판단하다’ 또는 ‘다스리다’는 뜻의 ‘샤파트’(shaphat) 동사에서 파생된 복수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쇼페팀’이라고 불리운 이 사람들은 ‘판단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특별한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리에서 앉아서 가만히 판단하고 다스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에 ‘쇼페팀’은 왕이 없어 정규군이 편성되지 못한 이스라엘에 외적의 침입했다든지,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등 큰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없던 군대를 소집해서 일으키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전쟁을 치르는 군사 지도자의 역할 감당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잘 마친 후에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중요한 문제들이 생기면 그에 대해서 판단을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 ‘쇼페팀’이 주변 나라들의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 ‘리더십’이 아들로 손자로 이어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쇼페팀’의 리더십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딱 그 사사 오직 당대에만 한정되는 리더십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딱 한 세대 쓰임받고 사명을 마치는 존재가 이 ‘쇼페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활약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각 지역별 통치자, 그중의 몇몇은 한두 개 정도 지파의 지도자였을 것이라고도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꾸준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잠깐 잠깐 선택하여 사용하신 맞춤형 지도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사사기에는 사사가 총 12명이 나옵니다. 잘 알려진, 옷니엘(삿3:7-11), 에훗(3:12-30), 드보라(4-5장), 기드온(6-8장), 입다(10:6-12:7), 삼손(13-16장) 같은 사사를 대사사라고 부르고, 분량이 적고 덜 알려진, 삼갈(삿3:31), 돌라(10:1-2), 야일(10:3-5), 입산, 엘론, 압돈(12:8-15)같은 소사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사사들은 성경에 기록한 순서대로 활동한 계보를 이어가는 사사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200년의 시대 중에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용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활약한 지역은 보시는 지도와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지요? 왜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야 했을까요? 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어 살아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이 세겜언약을 통해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했던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의 신들을 치워버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이 여호수아와 당대의 사람들이 다 죽어 사라지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갱신이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전수가 이어지질 않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오늘 교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뜻에 순종했지만, 점점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사기의 요약과도 같은 말씀들, 여러 구절이지만,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사사기 2장 6-7절입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삿2:6-7)
그랬는데 어떻게 되었다구요? 8-10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8-10)
여호수아와 동시대 사람들 사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도 모르는 세대가 일어나요. 왜 몰랐을까요? 가르쳐주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의 전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지요?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요? 11-12절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삿2:11-12)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실까요? 14~15절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2:14-15)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 사사를 세우셨던 것이죠.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삿2:16)
그렇게 구원함을 입었으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신 것을 감사하며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으나 어떻게 했다구요?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삿2:17) 19절, 한 절 더 읽겠습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삿2:19)
안타깝지요? 이스라엘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하나님 앞에 범죄해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다구요? 여호수아와 동시대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여호수아 사후에 흩어진 이스라엘 공동체 구석구석에 거대한 신앙적인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공식적인 후계자입니다. 출애굽세대로서 광야세대와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온 단 두 명의 생존자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분배하고 정복하는 일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헌신했던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영적인 지도자가 죽자마자, 그와 함께 하나님을 순종했던 세대가 이 땅에서 사라지자, 다음 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애굽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사시대의 그 많은 실패와 비참한 삶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민족 저 민족에게 노략을 당할 뿐 아니라, 이방 왕을 위해 부역을 해야하고 이방왕에게 조공을 바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고통에 고됨에 울부짖어야하는 처지 말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비단 3000년전 사사시대의 이야기일까요? 여러분 오늘 우리와 우리세대가 다 죽고 나면,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을까요? 우리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 있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순종하여 회복하고 차지한 이 아름다운 땅에서, 또 다시 노략당하고, 또다시 식민지가 되고 또다시 부역과 조공을 바치며 고생하는 백성들이 되어 있지는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게 된 이유를 한 절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네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신앙의 전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자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함께 확인해보시지요.
사사기 17장 6절, 18장 1절, 19장 1절, 그리고 21장 25절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세 판 이야기하고 한 번 더 확인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다스려야 할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왕이 없는 백성’은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계약 백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People did whatever they felt like doing.”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는 겁니다.
아니, 목사님 이거 좋은 거 아닙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삶이 진정한 자유요, 행복한 삶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으니 북극 빙하가 녹고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과가 기온이 15-18도로 내려가야 붉어진다는데, 앞으로 몇 년 뒤면 온도가 높아서 붉은 사과를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으니 오늘도 쓰레기 산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뭐라고 해도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고 있으니 코로나가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문 닫아 놓고 룸살롱에는 600만 명이 다녀간 것입니다. 제주도는 올 추석에 빈 숙박시설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특별히 거듭난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한 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께 적합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렇게 살았어도,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은 방종하며 나태하게 또한 욕망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계약 백성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마귀에게 절을 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두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을 에발산에서, 그것을 세겜에서 다시 확인해주셨습니다. 결단하고 다짐했습니다. 고백한 대로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야 ‘계약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삽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짐승들의 세상이 됩니다. 약하면 고기가 되고 강하면 집어삼키는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 세상의 마지막 종착역은, 아니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더더욱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입맛에 맞고 내 뜻을 인정해주고 내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신, 없는 신, 가짜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나무를 깎아 돌을 깎아 흙을 주물러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절하고 거기에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일은 사사시대에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시대마다 이 이야기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니, 오늘 우리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거의 확실시 되는 문제입니다.
그럼 이건 우리 자녀들이 문제이지, 우리는 아직 괜찮지요?
아뇨, 우리들도 이미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하게’ 가 아닙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예배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청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방법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만큼만 헌신하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그러고는 만족합니다. 잘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여러분,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날까요?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 소견만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생각과 자기 개인의 감정만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 마음은 이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해놓고 살아가는 그런 ‘왕이 없는 백성’들이 오늘날 교회마다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또 다른 사사시대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단과 교파와 개교회가 성도 각자가 전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합니다. 그러니 어느 교회는 광복절에도, 개천절에도 광화문에 가야 하고, 어느 교회는 몇 백 억을 받아내겠다고 알박기를 하고, 어느 교회는 교회가 잘못했다고 현수막을 걸고, 어느 교회는 동성애를 찬성하여 결혼 주례를 서고, 어느 교회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어보면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각자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내 입에 말씀을 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들이 하는 생각과 판단이 나아가는 길이 옳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나마 스스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판단마저도 내리지 못하는 작고 연약한 사람들은 이쪽이 옳다고 하면 우르르 이쪽으로 가고, 저쪽이 옳다고 하면 우르르 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몇 분입니까? 며칠 전에 광고를 보니, 각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달라, 자기네 회사는 사람 수만큼 보험프로그램이 있다고 각자에게 맞는 보험을 만들어주겠고 하던데, 하나님도 그런 분입니까? 도대체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사사기가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꼭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모여있질 못합니다. 형제됨을 지체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떤데요?
곧 살펴보시겠지만,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가, 다른 지파가 곤경에 처해 도움을 청하지만, 도와주러 오지 않습니다. 150킬로를 밤새도록 달려갔던 지파가, 못 들은 척합니다. ‘너네의 일은 너네가 알아서 해결해’, 그래놓고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영광을 받는 일에는, 왜 자기들을 빼놓았냐면서 여기 저기 시비를 겁니다.
곧 살펴보시겠지만, 한 지파가 범죄하고 다른 지파들의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하겠노라고 덤벼듭니다. 한 지파가 사라질 지경에 이르도록,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네 사람들을 편들고 지키느라고 다른 지파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성읍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온 여인들을 납치합니다.
곧 살펴보시겠지만, 가장 거룩하고 하나님의 뜻에 서 있어야할 레위인이 타락하고 범죄합니다. 돈을 보고 움직이고 힘 있는 편에 붙습니다. 첩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사사가 기생을 찾아다닙니다.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내를 수십 명씩 두고 사치스러운 삶을 자자 손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 자녀들이 벌써 이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한 모습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내려지는 판결들이 합리적이지 않고 다 굽어 있지 않습니까? 사치스러운 욕망을 좇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룩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죽이고 해하는 일에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오늘 교재, 생각을 여는 주제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120쪽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처음 두 질문 함께 읽어볼까요?
“이스라엘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해 볼 때 우리에게 그들보다 나은 모습이 있습니까? 그들을 비웃으며, 참된 신앙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라고 내어 보이며 자랑할 만한 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대답할 것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부터 한동안 사사기를 공부해가시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삭, 우리의 다음 세대를 더욱 돌아보고 염려하며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더욱 진실하게 서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우리 자녀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시고 가슴을 찢고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근심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저 이스라엘처럼 못살겠다고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힘들다고 울부짖는 것 회개 아닙니다. 심판이 지나가기를 잠시 숨 고르고 있는 것 회개 아닙니다. 온전히 돌이켜 고쳐내야 회개입니다. 회개를 온전히 이루어, 오늘 우리에게 임한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바른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시어 앞으로 임할 모든 어려움들을 사전에 차단해 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일하여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와 우리 자녀 중에 이 민족을 구원할 사사가 세워지길, 그렇게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바른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출되길 더욱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대대손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시길 다시 한번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시간 예습
성경 사사기 1~21장
교재 119~12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