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5월 2일 〈일기〉에는 김교신이 시내에서 정릉으로 귀가하다가 ‘창경원’ 앞을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일제는 1909년 조선 시대 궁궐 중 하나인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만들어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궁궐을 격하시켜 민족의 얼을 짓밟으려는 획책으로 평가된다.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동·식물원을 1983년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 서울대공원으로 개장할 때까지 ‘창경원’은 유지되었다.
해마다 봄이면 창경원 벚꽃놀이가 성황을 이루었다. 그날(5월 2일)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밤 벚꽃놀이 구경꾼들 때문에 시내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인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어린아이들의 비명, 젊은 남자들이 질러대는 호령 소리, 폭력배들의 시비 거는 소리로 가득했다. 간신히 창경원 앞 인파를 헤치고 빠져나온 김교신은 마치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는 위험한 곳(死地)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느낌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휩쓸리는 동포에 대한 동정심을 품게 된다. 그는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를 되뇌인다. 『논어』 「태백(泰伯)」편의 한 구절로 '백성을 이치에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 이치를 다 이해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1940년 8월 1일 〈일기〉에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간 제자가 편지를 보내 김교신과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치는 대목이 나온다. 중학생(오늘날의 고교생)이 쓴 편지에서 당시 학생들의 독서 수준과 격조가 느껴진다. 그 선생에 그 제자인가.
〈일기〉 1940년 8월 1일. 귀성 학생의 소식. “그러나 방학에 귀성하여 이 시골 촌락에 와보면 어떠합니까?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 그대로입니다. … 이것을 타개하는 방법은 이 땅의 백성이 각성하는 것밖에 없는 줄로 압니다. 오호 이 땅에 르네상스가 오는 날은 언제일까요.”
공자(기원전 551-479)는 도덕(道德)과 명령(命令)과 정교(政敎)로 백성을 인솔할 수는 있어도 백성에게 일일이 이유를 알리기 어렵다는 현실 상황을 말한다.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공자가 우민정치(愚民政治)를 지지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자구(字句) 풀이에서 벗어나 세계사를 바라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공자는 기원전 5세기 사람이다. 인쇄술 혁명이 15세기에 있었으니, 공자는 그보다 무려 2천 년 전 사람이다. 인구 대부분이 문맹자였던 시대다. 활자 미디어를 통한 지식 확산이 전혀 불가능한 역사적 조건이다. 공자도 시대의 아들이다. 제아무리 공자라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다. 공자는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음을 고심 끝에 털어놓은 것 아닐까. 이끌고 갈 수는 있어도 일일이 이해시킬 수는 없는 공자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칼라일도 ‘문인으로서의 영웅’은 인쇄술 발명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전제로 하여 등장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역사가들은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적 개인의 등장도 불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성현이나 지도자의 의도를 일일이 설득하고 이해시켜가면서 민중을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다. 공자 이후 천년도 훨씬 넘게 흐른 중세 유럽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중은 ‘입석 관객’으로 예배와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그저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예배도 미사도 모두 라틴어도 진행되었지만, 민중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편지를 보낸 학생은 공자가 처한 시대적 한계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것을 타개하는 방법은 이 땅의 백성이 각성하는 것밖에 없는 줄로 압니다. 오호 이 땅에 르네상스가 오는 날은 언제일까요.” 15세기의 인쇄술 혁명, 그리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백성의 각성’이 시작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독립된 인격으로 개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한국인의 출현을 갈망한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통해 이루고자 한 목표도 ‘백성의 각성’이었다. 함석헌의 『조선역사』을 김교신이 격찬한 이유도 그것이 ‘백성의 각성’에 이바지하는 진리의 열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