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26.04.29.(수)
봄 날씨가 춤을 춘다. 어제까지 따뜻하더니 오늘은 쌀쌀하다. 하빈 큰집 강의 날이다. 달성군은 시골이라 공기가 더 맑고 차다. 11시에 강의를 마치고 종합민원실에서 잠시 휴식 중 갑자기 ‘육신사’에 가고 싶었다. 하빈에서 강의하면서 매년 봄, 가을, 두 번쯤 방문한다. 11시 20분쯤 교도소 앞 정류소에서 육신사행 버스가 있다는 것도 검색했다. 버스를 타면 10분 거리로 가깝다. 11시 30분. 육신사 종점에 도착했다. 다음 문양 행 출발 버스 시각은 13시 5분이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다. ‘육신사’와 ‘삼가헌’ 탐방 시간으로 충분하다.
‘육신사’!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손자 박비가 이곳 묘골에 터를 잡고 살았다. 어느 날 박팽년의 현손이 제삿날 꿈에 사육신이 사당 문밖에 서성이는 것을 보고, 나머지 다섯 분의 제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묘골마을은 순천 박씨 집성촌으로 마을 입구부터 고풍스러운 한옥이 줄지어 있다. 멋진 솟을대문을 지닌 고가는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는 집이 많다. 몇몇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다. 기와를 이고 있는 흙돌담 길을 걸으면 옻골마을이나 남평문씨세거지 담길도 떠오른다. 담 아래 미소짓는 낮 달맞이꽃도 반갑고 붉은 꽃잎이 바닥에 흐드러진 작약도 황홀하다. 형형색색 봄꽃이 정원마다 눈부시다.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경건해진다. 평일이라 방문객은 아무도 없다. 집주인도 보이지 않아 고요의 숲에 들어온 듯 적막한 느낌도 든다. 몇 번 와본 곳이기에 천천히 걸음과 눈을 옮긴다. 길 양쪽의 한옥을 둘러보며 100여m 걸어가면 붉은색 기둥과 대문으로 우뚝 선 ‘육신사’ 정문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붉은 정려문을 지나 오른쪽 언덕에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을 만난다.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성종 때 건립한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아담한 규모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태고정(太古亭)’과 ‘일시루(一是樓)’라는 해서로 된 현판이 아름답다. 예스러운 품격이 물씬 풍긴다. 대청 입구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눈에 거슬린다. 대청 앞에 서서 앞을 내려다보았다. 묵은 골기와를 인 한옥들과 멀리 녹음의 산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에는 건물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없고 조용하니 좋은 점도 있지만, 속인의 답사 재미는 적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함의 조화가 좋다. 세월의 무상함이랄까 허허한 마음만 든다. 홀로 사색하고 걸으면 좋다고들 하지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색은 아무나 할까? 보통 사람에게는 정신적 사치가 아닐까?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절당’과 ‘도곡재’ 주위를 그냥 그냥 돌아보았다. 올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단종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이기에 주말에는 이곳도 좀 붐비지 않을까 생각된다.
‘삼가헌(三可軒)’을 찾아갔다. 주차장에서 차도로 걸어가면 2km 거리지만, 논 옆으로 난 산길로 넘어가면 600m 거리이다. 몇 해 전 ‘대구문인협회’ 행사 때 걸어간 기억이 있기에 추억을 더듬어 산길로 갔다. 짧은 거리지만, 아무도 없는 컴컴한 산길 중턱에는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오르막 산길은 예전보다 잘 다듬어졌기에 쉽게 넘어갔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광석이 건립한 주택이다. 작년에 왔을 때는 대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했다. 다행 오늘은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근데 ‘개조심’이란 팻말에 살짝 겁이 난다. 대문 왼쪽 기둥에 양 손바닥만 한 검은 쇠판으로 된 문패가 인상적이다. ‘도덕과 평화’이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예전 ‘대구문인협회’ 행사 때 주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세상에나! 지금 살고 있는 부부의 이름이란다. 그때 느낀 산뜻하고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전해와 미소를 짓고 살며시 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개가 요란스럽게 짖는다. 깜짝 놀라 주춤했지만, 다행 목줄로 매여 있어 “안녕” 눈인사하고 지나쳤다. 나그네만 보면 본능적으로 짖는 모양이다. 대청 아래 섬돌에 주인의 흰 고무신이 얌전히 놓여있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마당에서 슬쩍 돌아보고 ‘삼가헌’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당인 ‘하엽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자 앞에 ‘파란 연잎이 떠 있는 연못’이란 뜻의 ‘하엽정(荷葉亭)’. 샛문 사이로 보이는 배롱나무와 연못이 환상적이다. 지금은 연꽃도 배롱나무꽃도 피지 않아 적적하지만, 오히려 화려하지 않아서 더 몽환적이다. 절정에 이른 수국이 푸른 녹음과 어울려 정자를 감싸고 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에는 수련과 형형색색의 낙엽이 세월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적막과 아득함만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정자 툇마루에 앉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연못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냥 좋다. 사색도 필요 없고 멍때리듯 있어도 신선이 부럽지 않을 듯 멋진 곳이다. 연못 위에 길게 걸쳐놓은 통나무 위에 올라갔다. 멀리 보이는 정자와 나무, 물, 하늘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 속의 그림이 된다. 여기서는 아무도 없으니 더 운치가 있고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된다.
문양 행 버스 출발시간까지 30분 여유가 있다. 육신사 입구의 한옥 감성 카페 ‘묘운’(竗雲)에 들어갔다. 박팽년 선생의 22세 손 박상혁 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시간의 오묘함과 공간의 절묘함을 살린 곳이다. 긴 돌담과 풀밭 정원이 고궁 같은 카페이다. 명경지담(明鏡之潭)이란 아담한 연못에는 20여 마리의 붉고 노란 잉어가 세월을 즐긴다. 겉모습만 한옥 구조를 따른 것이 아니라 전통을 보존하며 현대식 가치를 추구하는 곳으로 지었다고 한다. 통유리창과 감각적인 조명이 멋진 갤러리에 온 느낌이다. 가구와 소품은 전통공예 작품으로 전시 중이란다. 오늘 비로소 관광객 10여명을 만났다. ‘육신사’와 ‘삼가헌’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홀로 다녔는데? 좀 아이러니하다. 카페라테 한잔을 앞에 놓고 지친 마음을 내려놓았다. 하트가 그려진 라테아트를 보며 홀짝홀짝 커피 향을 음미한다. 느림과 여유가 공존하는 곳이다. 카페라테와 함께 받은 종이를 읽어본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고요히 앉은 이곳, 차는 반은 줄어도 향은 처음과 같네- 라는 황정견의 『산곡문집』에 있는 글귀이다. 비록 전통차가 아니라도 차향의 품격을 높인다. 친구와 연인들로 보이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13시 5분. 문양 행 버스에 홀로 앉아 출발했다. 14시 50분 매호동 도착. 몸과 마음이 나른하다. 계획하지 않은 멋진 시간이 잘 흘러갔다. 고마움의 정신이 흐릿해지는 나를 일깨우는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