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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출가하려는 10살인 아들인 난다에게 설한 설법》
"내 말이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마음을 모아서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라. 우선 이세상에 차음부터 영원한 있슴(有)이 없고 없음
(無)도 없도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면 있는 것이 발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텅 빈 상태(空, Sunya)라 하지만 그 수냐(空)속에는 무수한 인자(원소)들이 있어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을 때 생기게 되는데
이를 색(色,Rupa)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색(色,루파)으로 불려지는 물상들은 예외없이 운동하는 속성을 지녀 그 인자들
의 인연(結合)이 흩어지면 물상도 흩어지며 다시 수냐(空)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 민족이나 한 인간의
흥망성쇠가 일어나는 것이다.
색(色)의 탄생으로 생명을 얻고 삶을 영위하다가 색이 인연을 다하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만남도,헤어짐도, 또는 허공을 맴도는 모든 형체까지도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모태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
한 바위덩어리가 깨어져 조각들로, 그리고 모래로 변하다가 흙이되고 먼지가 되고 다시 먼지가 부서져 인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븟다는 곧 부왕께 하직인사를 하고 카필라바투스를 떠나 기원정사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붓다를 전송하며 안타까움에 몸부림
치는 여인들이 있었다. 마하파자파티는 붓다의 출가에 이어 친자식 난다의 출가를 안타까워했다. 태자비 야소다라는 어린 라
훌라를 눈물로 전송하고 있었고, 붓다의 제2부인 고파(Gopa)와 제3부인 마노다라(Manodara)는 붓다와의 두 번째 이별을 슬
퍼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아버님! 아니 붓다의 말씀이 그대로 사실이라면 결국 하늘의 신(神)들도 없다는 뜻 아니옵니까. 모든 것이 다 수냐(空)로부터
잉태한 루파(色)라 하면 결국 우리들이 죽은 후에도 갈곳은 수냐(空)뿐이니 죽은 후에 갈곳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살아생전
공덕을 쌓으라 하십니까. 또 신들의 세계가 전재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남도 없고 삶(生)도 없다
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옵니까? "
"네가 아직 어린 나이에 그와같은 질문을 던질수 있는 사고력이 있었던가. 기특하고 기특하다.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이니 그 생각하는 경지가 깊고 높은 차원에 도달해 있으므로 이제 곧 나를 따라 출가해도 좋을 것이다. 네가 알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앞으로 출가수행을 통하여 하나하나 깨달음을 얻을수 있을 것인 즉, 나의 가름침에 따라 수행에 열중하도록 하라."
"아버님께서…아니 붓다께서 제 나이에 겨우 열살에 출가를 허락하오시니, 소자 더 할수 없는 무상의 영광이옵니다 ..."
<서로 견해를 나누다>
[△△△] [◎◎◎] [♧♧] [◈◈] [※※※] [□□□]
[△△△]
부처님의 명상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구사론을 보면 물질을 나눌 때 유표색과 무표색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위 구절 수냐의 상태가 극미립자를 거론하는데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그 것은 오늘 날 원자를 말한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한대로 더 이상 나뉠수 없는 무표색에 속하는 기초물질을 일컬은 것일 것입니다. 균열이 없는 물질 이 것은 절대로
쪼개지지 않으나 아직은 우리가 이 것을 일반 원자나 분자처럼 인식한다는 것에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인식기구가
너무 성겨서 그런 물질이 있다고 해도 잡아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 기초물질을 명상해 보면 부증불감의 상태가 됩니다. 즉 에너지란 상태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압박감이나 팽창감이나
뜨거움 차가움 등의 느낌을 제공하는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것은 무엇인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에 상대적 존재로서
느낌을 갖는 것이지요. 뜨거움이란 것은 에너지로 볼 때 그 뜨거움은 어떤 느낌이고 이 느낌은 이 느낌을 현상해 주는 시스템
에 의해 그렇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불꽃이 뜨거움이 아니라 불꽃이 갖는 어떤 특성이 우리의 신경구조 속에서 뜨거움이란
느낌을 만들어 주지요. 보편적 느낌입니다. 물질에 따라서는 뜨거움이란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이 흔하잖습니까 ? 그러므로
뜨거움이란 느낌은 인식의 연기적 현상임을 뜻합니다. 심소의 연기적 현상이란 말로도 가능하지요. 에너지란 것이 우리가 그
실체를 잡아내기에 어렵지만 물질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고 중력이나 인력 등도 물질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고 자기장 역시 물
질의 어떤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장을 일으키지 않는 어떤
상태는 자기장을 일으키는 어떤 상태와 대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에 이런 논리적 관찰을 이미 해내셨다고 보입니다.
그 시대가 그런 인식을 할 수 없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부처님의 능력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
조론은 부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간은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의 특성은 창조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없는데서 있는데로의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창조란 말은 연기의 일부현상을 떼어다 놓고 전체를 바라보려
는 데서 나온 착각입니다.
물질 역시 그 기초가 되는 물질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 기초물질은 특징이 서로 분리될 수 없
는 상태에 있기 때문인데 크기만 따로 분리되지 않고 질량만 따로 불리되지 않고 결합성만 따로 분리되지도 않고 그 기초물질
이 가지고 있는 본유적 특징들은 무시이래로 분리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것을 분리시킨다고 해도 결국 더 분리
되지 않는 상태의 어떤 것 즉 물질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논의 진행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소멸이 없는 물질은 과거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것은 물질이 창조될 수 없는 우주
의 기초적 존재상 태임을 뜻하고 부처님은 이 것을 수냐 속 무수한 인자 공간 속 무수한 인자 즉 기초물질로 보았다는 것을 뜻
합니다. 그리고 그 것이 상호 반응에서 오는 이합집산을 통해 무수한 영향을 발생하고 이 영향의 발생과 동시에 연기가 일어나
오늘날 우주란 현상을 있게 한 것이라 보입니다. 공간을 창조하려면 같은 양의 공간이 필요하지요. 재료가 없다면 만든다는 것
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조란 행위가 원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물질도 창조를 전재로 할 때 창조
란 행위의 주체가 성립될려면 그 주체는 물리적 존재란 점이어야 한다는 점과 우주전체 물질량과 같은 물질을 재료로 상대하
여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 다는 원칙이 성립합니다. 이 것은 창조가 허구임을 증명해 주는 궁극적 결론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창조자만 남길려면 피조물이라고 설정한 공간과 물질을 논리적으로 제거하면 창조자만 남아야 합니다. 창조자는 공
간이 없고 물질이 없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과 공간이 없다는 것은 곧 절대로 존재하지 않음이란 뜻입니다. 완벽
한 무란 뜻이지요. 사차원 운운하는 자들은 그것이 삼차원의 시간적 연속태 즉 인간의 인식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그러나 삼차원에서 존재 불가능하다면 사차원에서도 존재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즉 존재의 근거는 언제나 물질과 공간
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되지요. 창조론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착각에 근거한 추정에 불과하고 성경에서
창조를 말한 것은 아이가 어른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에 불과하지요. 누구말대로 뱃 속에 있는 벌레가 사람을 만들었다
고 주장하는 꼴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조론은 인간의 인식으로 접근 불가능한 논리가 아니라 접근가능한 논리이며 접근 불가능했다면 창조란 말도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왜 생각할 수 없고 미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말한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실토하는 것이니까
요. 우주를 만들려면 우주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어떤 경우에서도 공간과 물질 밖에서만이 가능하지만 그런 공간 밖은 [있지
않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로 창조자는 없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명이 안 되거나 순환론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가 유한하냐 무한하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개념만 확실해지면 분명한 증명이 되는 것입니
다. 가령 양동이 속에 사과 하나와 배가 하나 있다고 했을 때 여기에 양동이 속에 배와 사과가 각기 하나가 있다. 그것 말고는
없다고 했을 때 그대로 증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확인하고 말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동이 속에 사과나 배
말고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그 어떤 것의 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인간은 인식 대상에 대하여
항상 초월자적 입장에 있는 즉자(卽自)가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하면 여우같은 의심이 일어 어떻
게 해서라도 반박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이 난 것을 가지고 회의론적 입장을 보지하려면 물질과 공간을 떠난 어떤 존재의 증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아닌 말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서 어떤 존재를 끄집어 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전에는 '우주에서 물질과 공
간 외에 어떤 존재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시간상 정지론적 공간론에서 보면 원인론
은 사라지고 결과들만 존재하고 있으며 시간적론 원인론은 기초물질의 연기적 순환론에서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만든다고 하는 것은 연기의 일부현상을 놓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상상으로 본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재료를 가지고 무엇
을 만들었다는 것을 놓고 궁상을 떨다가 능력을 부풀려 상상한 어떤 존재가 가능한 형태로 보고 우주를 이해한 매우 유치한
관점이란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기독교의 창조론을 과학시간에서 조차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사기를 합법화 하는 꼴이 될 것
입니다. 누구말대로 하나를 속이면 열의 지식을 가지고 가서 속는 인간의 속성이 오늘 날 기독교세를 유지토록 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현재도 자연이 인간을 비롯한 매우 복잡한 매카니즘 속의 생명들을 연출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조차 확인하고 있습니
다. 이것을 자연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증명이 된 이론입니다. 왜이겠습니까 ? 그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창조자가 만들었
다고 주장하려면 공상하는 것을 증거라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을 증거로 보여야 합니다. 그런 증거를 내놓을 의무는 그렇게 주장
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증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상상하여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찌 틀린말이겠습니까 ?
[♧♧]
불교를 물질을 기준으로만 해석하려는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마음 혹은 영혼으로 해석해 보시죠. 그러면 님의 글을 읽는 분
이 이해하기가 빠를것 같군요. 물론 님의 의견은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물질과 그
에 상반되는 비물질이 있으며 제 3 의 물질이 있을수도 있지않을까요? 우리가 절에 갈때는 마음이 먼저 가고자 하여 가는 것이
지 몸이 먼저 가고자 하여 마음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죠.?
[△△△]
위험하디니요 ?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위험한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님은 사슴이 뛰어가고 있을 때 물질과 영혼으로
나누어서 봅니까 ? 하나는 물질이 뛰는 것이요 하나는 영혼이 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냥 사슴이 뛰는 것이라고 봅니
다. 쪼개질 수 없는 물질이 연기하여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면 왜 안됩니까 ? 왜 항상 사람의 행동방식이 어떤 사물을 이해함에
투사가 되어야 하지요. 밀가루와 불과 솥과 빵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빵이 됩니다. 그렇게 됨에 왜 항상 사람의
사유와 행동하는 패턴으로 이해를 해야지요. 저는 님의 사고방식이 고정관념에 의해 매우 굳어 있음을 봅니다.
과학자들은 사과를 볼 때 물질적 구성성들을 봅니다. 시인은 사과를 볼 때 그 것이 갖는 관계 연기상의 뉘앙스로 봅니다. 각기
모두 바라보는 시각을 구성하는 바라보는 이들이 앞서 채득한 심소들에 의해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것이 다 옳은 것은
될 수 없지요. 불교는 론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보이는 대로 보면 됩니다. 여과없이 사실대로 보는 법을 가르친
것이지 꼭 이렇게만 보라고 가르친 가르침이 아닙니다. 물이 끓을 때 영혼이 끓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라면 저는
그런 이해 방식은 사양할 참입니다. 물이 끓을 때는 그냥 물이 끓는다고 보면 됩니다. 그 것이 저의 이해방식입니다. 논은 논을
좋아 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하지요. 저에게는 걸구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말은 좀 신중하게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님께
서 염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공연한 기우인 것 같습니다. 물질과 영혼은 본래 보는 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이
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분류용어이지요. 그러니 그 실제 대상을 볼 때는 그런 논은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도
움이 되겠습니까 ? 물질이냐 아니냐 영혼이냐 아니냐 이것은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혼이라고 했을 때 사실과 다른 어떤
거짓을 첨가하여 같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그 엄청난 큰 문제인 것인데 영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과 다른 어떤
거짓을 껴서 이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을 이렇게 이름할 수도 있고 저렇게 이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이라
고 하든 물질이라고 하든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름하든 그 대상이 갖는 사실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실을 바로
이해를 한다면 그것이 마음이라고 하든 물질이라고 하든 상관은 없습니다. 물질이라 하여 이해를 하면 엄청난 부조리를 갖고
마음이라 이름하여 이해를 하면 훨씬 더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은 불교에서는 매우 고루한 이해 방식이 됩니다.
아직도 이데올르기의 노예가 되어 인간을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봐야 되는 그 기득권이 소중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기득
권이 소중하다고 해도 거짓으로 지키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
님의 이의 제기가 잘 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 이해가 안되거나 다른 관점이 있다면 피력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 성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님의 이의 제기 방식은 문제점을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이 없이 그냥 우려된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어 어의를 흐리는 효과를 주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가 되는 점은 건들이지 않고 저의 이해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뉘
앙스를 준다는 것입니다. 민감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불교를 배우면서 매우 잘 못 된 습관들
이 불교의 정법으로 오인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뭐 님께서야 그런 고정된 습태는 버리셨다고 생각됩니다만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서구의 기독교인들의 몰상식한 대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조리함이 이 사회에 엄
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불자들의 깊은 사유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사회악습이라 여겨집니다.
또 엄청난 언어 폭력을 행한다고 걸고 넘어지려나 !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고 먼저 사과드립니다. 간단함을 추
구하다보면 명료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님의 말씀대로라면 머리가 없는 다리가 걸을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생각이 스스로 머리 없이 일어납니까 ? 생각하는 것만
보면 생각 스스로 다리를 앞서 하는 것 같지만 머리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요. 생각이란 유물론적
으로 보면 신경계 물질의 연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의 구조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영혼의 작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그 영혼이란 바로 뇌수를 일컫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이 논은 더 깊은 논을 요하는 부분이라 여기서
끊맺었으면 합니다. 달마스님의 혈맥론을 보면 마음과 물질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또한 주체든 대상객체이든 물질을 떠나 독
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윤회의 올바른 이해를 촉구드립니다. 매우 깊은 문제입니다.
[◈◈]
메아리가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그림자가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문제 인것 같군요~ 메아리든 그림자든 무언가를 근거해서
만 나타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
제가 걱정한 것은 사람은 일반적인 물질과는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뜻이지요.물론 사람도 일반 물질과 동일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사람을 일반적인 물질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불교를 이해한다면 사람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그리
고 사람은 물 몇 kg에 +단백질 몇 kg에+ 석회질 몇kg------- 이렇게 볼까싶어서 우려한거죠. 물론 사람도 물질이되 물질과는
구분되어져야한다는 걱정에서 말씀드린겁니다. 만가지 물질과 사람과의 관계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해야한다는게 위험하다 그
말씀이죠.
논의하기는 조금 복잡합니다만 물질을 우선기준으로 물질에만 의존하시면 "실체없는 그림자가 있을수 있는냐?" 이렇게 말할
수 있씁니다만 반대로 표현하면 "그림자없는 실체가 있을수 있는냐?" 이렇게도 말할수 있는거죠. 육신없는 영혼(마음이라고
해석해도 무방)도 이상하거니와 영혼없는 육신도 이상하죠.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것은 "물질과 마음을 각각 하나의 개별적
독립체로 인정하고 그것 둘의 융합으로 올바른 인간의 구실을 한다." 이렇게 보는거죠. 물질에만 의존하면 유물론으로 마음에
만 의존하면 유신론으로 빠지기 쉽다. 그 말씀이죠. 둘다 개별적으로 인정하고 둘의 융합을 통한 현실세계를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거죠.
마음(영혼)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절에서 하는 영가 천도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49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 죽은자의 영은 실체가 있나요? 연기가 단지 물질의 순환이며 마음은 그기에 부속적으로 포함되어있다고 한다면 그건 상당
히 위험한 무신론이다. 그게 위험하지 않을까? 이렇게 걱정한거죠.
[△△△]
生從何處來 (생종하처래) 死向何處去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也去來亦如然 (생야거래역여연) 獨有一物常獨露 (독유일물상독로) 澹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태어남은 어디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인데 ,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함이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
이것은 삶과 생명을 바라본 시입니다. 제사 지낼 때 곡조를 넣어 스님들이 읊는 시입니다. 대체적으로 그것입니다. 그대로
연기이지요. 거울 속에 영상이 서리면 그 것이 거울의 영혼이겠습니까 ? 또한 거울의 비추는 성품이 영혼이겠습니까 ? 님께서
뇌가 이상이 있으면 몸이 이상이 있습니다. 영혼이 따로 있어 물을 주관한다면 뇌가 이상이 있다고 한들 어찌 움직이지 못하
겠습니까 ? 논서들을 좀 더 많이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로 되어 있다고 해도 인륜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을 믿는 사람들이 물질로 된 육체에 대하여 함부
로 하는 경향이 더 짙습니다. 공상주의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고요. 공산주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신처럼 받들었습니다. 인간이 목적인데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목적이 되고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보았습니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 자체가 진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기주의적 발상을 모두 척결합니다. 얼음이
녹고 기운이 따뜻해져 꽃이 피면 그것이 봄입니다. 봄이 따로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현상을 우리는 봄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대가 화합하고 물질들이 화합하여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은 자신을 위해
그 소중한 것들 그 아름다운 것들을 무엇이다 무엇이다 하면서 수단화합니다. 따로 영혼이 있다면 살인을 해도 살인을 한 것이
될 수 없겠지요. 왜 그것은 옷을 벗겨버린 것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런 엉터리 이론이 어디있습니까 ? 부모을 굶겨도 부모를
굶기는 것이 아니겠지요. 왜요 영혼이 실체고 육체는 단순히 흙댕이에 불과할 테니까요 ?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외는 게송에
서 한 물건이란 어떤 fact를 말합니다. 그것은 생사에 들지 않는 어떤 사실일 뿐입니다. 인간은 영혼이란 설정을 통해 많은 범
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기독교류의 그런 샤머니즘이 바로 그것입니다.
얼음이 얼고 녹고 그 자체가 인간 삶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되는 것이 인간 생활의 불가결한 요소
란 말입니다. 태양이 불가결한 요소란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 소중한 존재란 것입니다. 영혼 따로 육체 따로 보는 것은 범죄
를 은폐하고 반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류에 악용될 소지가 너무나 많고 실제로도 그래 왔습니다. 물질보다 영혼이 더 타락했
습니다. 온갖 죄악과 탐진치도 영혼의 장난입니다. 마음이란 것이 죄악의 근원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믿는 마음이
말입니다. 불교는 물질과 마음이 하나로 보고 합일된 상태로 무념의 상태를 도의 경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망령됨이 없는 상태
로 존중 되는 경지입니다.
물질이나 영혼이다 나눌 수 없습니다. 현재 그 부모의 모습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떠나 부모가 존재합니까 ?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현재를 바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형제를 바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영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현 존재의 실체를 바로보는 의식이 제입니다. 제사에서 독송되는 경문을 잘 탐독해 보시
기 바랍니다. 님은 피상적으로 이해를 하시고 계십니다.
[◎◎◎]
불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자연과학에서 주어지는 것만으로 생각하면 자연과학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자연과
학이 "있음"만을 다루기에...마음이 그와 같이 조건지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자연과학에 맞추어 바
라 보게 됩니다. 유심의 이치를 아는 이는...자연과학에 따라 마음을 일으킴에...이러한 점을 스스로 잘 살펴 알고 마음을 일으
키며 멈출 줄 압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일으킴에 조건지어지나 조건지어지지만은 않습니다. 마음을 일으킴에 조건을 알아 스
스로 머무르지 않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하므로 그는 "스스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이름'해요.
[△△△]
왜 그런생각을 하십니까 ? 자연과학이 불교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 잘 설명해 보세요. 나의 지식이 짧은지 이해가 안
되는 군요. 불교의 많은 부분이 자연과학을 토대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유는 기독교적 사유체계입니다. 불교는
이분법이 없습니다.
[♧♧]
님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는 무신론이군요. 단지 물체를 현미경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투시법이 특징이군요. 그리고
연기라는게 거창하게 논할필요도 없이 물질의 순환이구요. 그럼 불교는 아무것도 아니죠. 무념. 무상. 텅빈 공간. 그러나 에너
지와 질량이 존재하는 공간-------- 그게 돌멩이나 나무토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질문하면 님이 무슨 대답
을 할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안해도 좋습니다. 불교교리는 타원형과 같아서 돌고 또다시 돌아도 그 자리가 그 자리
이며 다람쥐 체바퀴돌듯 그자리가 그 자리라는 것을요.
물질을 현미경 방식대로 투시하지 않으면 상이 있고 색이 있는겁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각종 현상들(물체의 형상)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님은 돼지고기 한근을 바라볼때 돼지고기로 안보이고 미립자의 텅빈 공간으로 보입니까? 차라리 현미경 방
식으로 물체를 보지말고 X-레이 방식으로 물체를 보시죠. 너무 심한 말을 했습니까? 너무나 공중에 뜬 소리같은 불교이론들에
대해서는 정말 신물이 납니다.
[◎◎◎]
이전 [♭♭♭]님이 올린 '성철스님 백일법문'의 글 아래에서 성철스님 견해를 비판할 때...[△△△]님이 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제법 길게 꼬리말을 달았습니다. 그 꼬리말을 적음에 [△△△]님의 질문 역시 고려하였습니다. 읽지 않
으신 듯... 또한 다음의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불법이 자연과학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불법에 합치한다.
불법은 자연과학을 함유한다.> 또한 [@@@]님의 새해인사 마지막 부분에서 <('구사론'등에서) 법의 세세한 분류 자체가 설
일체유부의 강한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한 바 있습니다. 위에서 [△△△]님은 다음과 같은 산냐를 일으켰습니
다. <더 이상 나뉠수 없는 무표색에 속하는 기초물질> 그리고는 그것을 기초로 산냐를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초물
질은 이미 고대 희랍권에서 '원자(atom)'란 이름으로 논의 되었습니다. '원자'라 이름하지 않고 '쿼크'라 이름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나뉠수 없는 기초물질"임에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기초물질"은 님이 전개하는 산냐에서
"자성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님의 논리 전개에서 그 기초물질은 연기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님은 연기를 인식론으
로만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님의 태도는 설일체유부가 제시한 논리와 동일합니다. 하지만 연기는 인식론이자 존
재론입니다.
"나가르쥬나(용수)"께서 <중론>으로 <인연법>을 설하심에...'설일체유부의 견해'를 논파하고 연기의 그와 같은 측면을 분명하
게 밝히셨습니다. [△△△]님은 이미 <중론>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읽어도 보셨을테고 최소한 그 내용은 알고 있을 겁니다. 우
리는 매 순간 산냐와 함께 이 세계를 바라 보고 이 세계를 규정합니다. 매 순간 "부처님 가르침을 망각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꿈의 전개에서...우리는 꿈을 꾸고 있음을, 그리고 그 꿈은 이러 저러한 조건에서 펼쳐지고 있음
을...스스로 명철하게 파악하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님...좋습니다. 위의 전개에서 [♧♧]님은 스스로와 함께 하는 '양아치'를 절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님
이 살피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껏 공부한 바로는...<너무나 공중에 뜬 소리같은 불교이론들>은 없습니다. 물론 '삿된
견해'는 그러합니다. 또한 '바른 견해'를 '삿된 견해를 형성하려는 마음'으로만 바라 볼 때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바른 견해'를
부처님의 제자로서 배우려는 마음을 내어 스스로의 마음을 일으키는 이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바른 견해만큼 구체
적이고 확실한 것은 드뭅니다. 세계를 해석하려고만 하지 말고, 스스로가 그 세계를 형성했음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도 봐야합
니다. 바로 그러한 점을 "유심의 교의"는 알려 주고 있어요. 스스로 일으키고 있는 어리석음을 놓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
보려는 노력이 바로 불자의 바른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외부로만 향하고 있다는 지적은 산냐를 일으키는 것만을 말하
는 것이 아닙니다. 산냐를 일으킴에 산냐의 내용만 살필 때...이미 마음은 외부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선정에 들어 감에 선정만
살필 때...이미 마음은 외부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산냐를 일으킴에 스스로 산냐를 일으킴을 알고 산냐의 내용이 어떠한 조건
에서 그와 같이 펼쳐지고 일어나는가 알 때...마음은 외부로만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내면 구체적으로 바로
여기에서 압니다.
나가르쥬나께서 중론을 설하심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일체 희론을 넘어 계신 부처님께 경배한다.> 저 역시 일체
희론을 넘어 계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희론을 넘어 있음은 희론을 세우지 않음만은 아니라는 것을...부처님께서 방편을 일으
켜 법을 설하심으로써...스스로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얻어지지도 않으며...부처님은 놓을 수도 없습니다. 제자
에게 있어...부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지만, 아무리 둘러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 제자인 불자에게 부처
님은 마음인 겁니다. <경>에서 말하길..."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어 상이 없으니, 일체 상을 여의었다..."
[♧♧]
조금 불쾌하더래도 내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해주시면 그건 물질과 마음에 대한 의문도 해소되리라 봅니다.
[◎◎◎]
이런 이런... 위에서 '양아치' 운운한 것은 좋은 뜻이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코만 내밀지 않으시니 보기가 즐거웠거든요.
과거 '양아치'란 표현을 님에게 한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거둬들인 겁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어떤 문제
의 논의는 내 의견을 상대방이 가장 알기쉽게 표현하고 적절하게 설득시키는데 있는 것이지 무뢰하게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
게 강제로 주입시키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꾸짖으셨으니...앞으로 [♧♧]님이 밑도 끝도 없이 코만 내
밀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비춘 것으로 알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연기"는 "변화(이것이 저것으로 됨)"와 친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찰나생, 찰나멸> 정도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후 전법의 필요상 아비달마 시대에 "변화"란 개념을 도입하게 됩니다. 인체
를 구성하는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진다는 것은 "산냐"입니다. 그렇게 산냐를 일으키는 것은 이미 자성적 견해인데...자성적 견해
를 연기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연기에 따라 사고한다면...A가 A'이 되는 것이 아니라...A가 해체되고 A'이 생성되
는 겁니다. 물질의 구성 성분이 같다고 이름할 때...유전인자가 다른 것 즉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조건에 달린 겁니다.
연기가 달랑 하나인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온의 "온"은 쌓인 것 즉 연기덩어리입니다. 그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납니
다.
[※※※]
물질과 마음은 일원성인가 이원성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같은 중생들에겐 희론인것은 틀림없습니다. 부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연기를 살펴보면 저의 사유는 십이지연기로 시작됩니다.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으로 사
유를 합니다.
[◎◎◎]
형님아... 자연과학의 입장 등이 아니라...불법에 따르면...최소한 일원론이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이에는 별다른 어려운 논의
가 필요 없습니다. 반야심경이 "오온 일체가 공"이라 명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으로 말하자면...<경>의 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일를 하는 중이라...나중에 다시 뵐께요.
[※※※]
죽음이란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이 파해지는 것이 됩니다. 최근 서양 의학자들에 의하면 임사체험을 바탕으로 한 의식의 영속
성이 제기 되었습니다. 의식의 quantum theory는 육체안에 의식은 입자성을 띠고 육체밖에서는 파동성을 띤 의식장이란 설
입니다. 이 이론은 물질의 양자이론에서 채용한 것인데, 물질과 의식의 quantum theory를 묶어서 보면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
과 유사한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생명체의 DNA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이들 이론에 의하면
DNA는 의식장과 개인의 물질적 신체사이에서 지속적인 정보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정보전달장치 혹은 공명이 일어나는 장소
로서 보게 됩니다.
서구의 전생을 연구한 논문을 보면 이전생의 상처등이 다음생에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높은 비율로 보고되고 있습니
다. 마음의 조건화가 다음생에 육체의 변화를 초래함을 사유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생명현상에 대한 많은 현상학적인 자료들
이 모아져 있습니다. 현상학적인 자료들에서 재기되는 이론들은 물질과 의식의 이원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아웃님의 지적처
럼 당연히 불법에 따르면 일원론입니다. 위의 댓글은 우리같은 중생들은 일원성인가 이원성인지 알수가 없음을 강조한 구절입
니다.
[♧♧]님의 물질과 마음에 대한 의문에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군요.. 정리해 보면 현재의 서구의 일부 의학자들도 의식과
육체에 대한 양자이론으로 의식의 영속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원론에서 출발한 이론입니다. 불법에 의하면 십이지연
기의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이며, 일원론입니다. 아우님! 다음에 또 봅시다....
[△△△]
산냐로만 본다면 산냐지요. 모두. 그러나 말입니다. 님께서 갑이란 생각에 빠졌을 때나 안 빠졌을 때나 해가 뜬 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요. 님은 산냐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자연계는 님의 어떤 생각들과 관계없이 생주이멸을 하고 있습
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모두가 지각한 상태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고 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빵을 구워 본 적이 있습니까 ? 산냐로 빵을 구우시나요 ? 아니면 빵을 구울 만한 재료와 도구를 가지고 빵을 구우십니까 ?
그리고 그 빵을 먹을 때도 입으로 먹지 않고 생각으로만 드십니까 ? 생각은 그 자연의 지극히 일부이고자연에서 인간적 생명
체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인식도구지요. 그런데 우리가 인식함으로 세상의 존재가 확인되고 심소가 연기되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식과는 별계의 어떤 존재 즉 물자체는 존재하지요. 그 것이 없다
면 산냐 또한 발생하지 못합니다. 색이 없다면 색에 대한 느낌도 없지요 소리가 없다면 소리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다른 감
각에서 지각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식주관에 상대한 세계를 대상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식시스템에 정보화
란 과정을 거쳐서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본질과는 다른 인식주관적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인간은 그 정보를 가지고
삶과 그 삶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로볼 때 본질적 접근은 할 수 없지만 어떤 사실은 존재하지요.
그런 사실에 관한 학의 하나가 자연과학일 것입니다.
활동으로서 우리의 인식이란 것은 인간이 자연과 연기하기 위한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그 또한 자연이지요. 다리가 있고 발이
있어 땅을 걸을 수 있듯이 머리로 그 선악과 호오를 가려서 삶에 쓰기 위한 인간의 삶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런 도구가 있기
에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이고요.
생각한다는 어떤 생리적 작용도 역시 팔이나 다리처럼 인간의 인간적 생체상의 합목적성 때문에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인데
인식한다고 했을 때 그 능각으로서의 지각은 바로 초월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어떤 별개의 존재로 착인될 가능성이 매우 높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을 다른 어떤 신체 부위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바라볼 때 그 자체 하나하
나가 나라는 주체를 연기적으로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각한다 했을 때 어떤 지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것이 어떤 특정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소의 연기란 것입니다. 봄이
되는 자연현상이 이루어지면 봄이란 것이 나타나듯 지각도 지각해야 할 조건과 지각되어지는 조건이 형성되면 지각됨이란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각을 이루는 심소군이 대상이 주어짐과 동시에 주체적인 선험적인 형태로 구성된다
는 것입니다. 이 것은 일부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에서 응용되고 있는 메카니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물질인 것을 놓고 영
혼이라고 한다고 해서 더 고귀해질까요. 다만 그런 느낌은 가질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에서는 자기기만적 허위인식에 불과합
니다.
의사가 내장상이 발생한 환자를 볼 때 해부학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정에 돌아가 어머니를 바라볼 때 이것은 간
이것은 콩팥 하고 이것 뼈다구 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에서 우리가 자연과
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일 뿐입니다. 좀더 정밀하게 바라보고 사실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왜 그렇게 바라보면
인간의 존엄이 훼손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근시안을 뜨고 기존의 악습적인 습태적 고정관념에서 벗어
나지 못한 관점이지요.
사람이란 전체인식이 고귀하면 그 부분적 인식도 고귀한 것입니다. 그 것을 떠나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 봄이란 물리
적 현상입니다. 얼음이 녹고 꽃이 피고 기온이 따뜻하고가 다 물리적 현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봄이 그런 현상
밖에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허위인식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 기만은 어떤 악독한 범죄를 조장하고 있으
면서 기만을 주지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의 세계인식이 허위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서 그 악으로부터 인류를 벗어나
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사회적 치유 메카니즘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계 그대로가 법계라고 합니다. 이 것은 관념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가 다 물질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는 인식론
의 기반 위에서 인식화인 관념화를 배제하고 객관적 물리적 개념을 가지고 물리적 입장에서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가지로 표현된 대상 세계는 동일세계입니다. 색이 곧 공이란 것은 환을 말합니다. 환의 세계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 대상세계는 관념론이나 유물적 관점에서 말해지는 세계와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좀 더 깊은 곳을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그 것은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확실하게 분별해 드리지 않
는 것은 제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말씀 드려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불교가 윤회를 말했다
고 해서 그것이 영혼과 육체를 둘로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문자만을 공부한 사람일 뿐입니다. 정견을 소유한 사람이라
고 볼 수 없습니다.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네/ 법과 사물이 둘이 아니듯/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나/ 그러나 그렇듯 분
리된 사람은 어떤 세상에도 없네/
[※※※]
사실, 자연과학적인 관찰에 의해 얻어지는 자료들은 육체과 의식 작용은 고유의 실체로 보게 되는 것이 더 타당한 것 처럼 보
입니다. 그런 과학적인 자료들은 많이 있습니다. 신경생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일정 뇌부위를 자극하면 그 부분이 담당하고 있
는 기능을 경험합니다. 이해의 편위를 위해... 시각중추를 자극하면 환각을 경험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눈으로 사물을 보고 시
신경을 통해서 뇌시각 중추로 정보가 전달되는 시간이 시작중추를 전자기로 자극해서 환각을 경험하게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걸리는 연구결과가 있읍니다. 또 뇌의 일정부분을 전자기 자극했을 때 몸밖으로 이탈되어 현실을 경험하는 사례도 보고되어
있습니다. 육체와 의식작용은 고유의 entity(실체)라는 거이죠. 이원론은 육체와 의식작용의 근원이 둘이다는 견해이고요 일원
론은 육체와 의식작용의 근원이 하나라는 견해입니다. 불교도 육체와 의식작용을 현상학적인 측면(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둘
로 분별합니다. 색과 명입니다. 불교의 연기적 측면에서는 색과 명은 실체가 없는 겁니다. 좋은 날님의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
네 이것은 현상학적으로 보았을 때는 틀린 소리가 됩니다. 이 견해는 불교의 연기관에서 합당한 소리가 됩니다.
[△△△]
뭐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보면 되겠지만 사실적 합리성은 결여된 것같네요. 왜냐면 우리가 수레의 작용과 수레는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생각했을 때 뇌구조가 결여되고서는 뇌의 작용이 생각을 얻을수가 없습니다. 거문고를 떠나서 거
문고 소리를 얻을수 없듯이 체와 용의 관계서 분리해서 본다는 것은 일측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리가 거문고가 아닌 것
은 맞습니다. 그러나 거문고가 아니면 소리가 날수 없기 때문에 거문고와 별개로 보지 않습니다. 별개로 보다면 그 것은 인식
자의 주관이 개여된 편견이지요. 물과 파도를 둘로 분리하는 것은 인식자의 주관적 분리지 사실적 분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현상학이란 인식주관의 이해(인식)현상이란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의학적 자료들은 뇌의 작용없이 사고작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뇌구조가 결여되고서는
뇌의 작용이 생각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견해는 현대의학의 관점과 다를바 없읍니다. 생각이란 사고 작용입니다. 뇌의 손
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회복된 경우에 그 상태를 기억하는 경우나 가사체험 자료들은 뇌에 별개로 의식작용이 일어
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원(체)이 하나라는 것과 작용간에 서로 같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온지요? 님의 말씀은 거문고 소리와 물과 수레의
작용이 하나라는 말씀이 아니옵니까?
[△△△]
뇌가 없이 의식작용과 사유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착인입니다. 그러므로 뇌없이 어떤 사유작용이 일어난다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증거라는 것을 보고 싶군요. 수레없이 수레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런 실체가 있다면
정확한 사실적 인식을 하지않고 인식자의 사실과 다른 오인이나 환각상태가 그렇게 표현된 경우겠지요.
[※※※]
2000년대 이후로 심장마비환자들의 가사체험이 의학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EEG 뇌파측정이 전혀
않되는 상태에서 의식활동이 일어났고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잠을 잘때에도 뇌파는 일어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님이 견
처는 전형적인 상견의 견처입니다. 저의 견해는 그렇습니다.
[△△△]
그런 측정을 신뢰한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신뢰 못할 어떤 근거를 대기 전까지는 믿겠다는 뜻일터이니 말입니다. 불행하게
도 저에게는 그런 근거가 없고 약간의 체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과 같은 류의 체험인지는 저를 담당했던 의사에게 물어보
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네요. 그러나 다를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뇌파가 정지된 상태에서도 뇌의 영상시각화 기능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요. 우리가 비몽사몽간에 몸에서 어떤 시각적 주체가 몸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도 종
종합니다. 그러나 저도 그런 경험을 몇 번 했습니다만 그 것이 유체이탈이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수행자 중에는 아마 수행과정에서 몸을 이탈시키는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래래빠의 십만송을 읽어보면 그런 것을
현실인 것처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경우 조차도 그 것이 유체이탈 현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
을 하게 되면 그런 능력이 매우 쉽게 개발될 수 있겠지요. 그 것은 좀 더 깊이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지금 현재에 대학내 정신과산하 연구소에서 소위 영계 통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는 19세기 중반부터 정신과, 심리학자들에 의해 정신현상에 대한 실험들이 행하여져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영능력
자에 대한 유체이탈 실험이 영어로 번역된 걸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영능력자가 목표가 된 사람앞에 나타나는 실험인데요. 그
사람이 영능력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영능력자도 그사람이 그당시의 상태를 묘사해 놓은 걸 보았지요. 실험에 참가한 의사가
기술해 놓은 겁니다. 2002년 'Nature'지에 뇌의 특수 부위를 전자기 자극하여 체외이탈 을 유도한 논문이 게재되었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내 마음연구소의 소장이라는 사람은 정신과의사이면서 심리학박사인 사람은 미망인아나 가족들이 사랑한 사람
을 잃은 슬픔에 헤메는 사람을 위해 죽은이와 통신하는 방법을 고대 그리스 서적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습니
다. 유체이탈은 유식의 용어로 7식의 작용으로 봅니다. 저도 경험많이 했습니다. 임사체험을 모아놓은 것을 읽어보면 유체가
여러형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은 그중의 한 형태이더군요. 이는 12지연기의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으로 설명되는
겁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는 중음의 몸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구사론에서는 중음의 몸을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묘사하
고 있습니다. 이자료들은 현재 미국내 연구소에 모아져 있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자료와 일치된 묘사들입니다.
님이 위에 하신 설명에 유식의 용어로 표현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것은 의타기성이며 그 현상을 인식하는 인식자의 이해
(인식)현상이 변계소집성입니다. 즉 몸을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각자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아참! 빠진 얘기가 있군요. 현대 의학이 사망판정을 할 때 기준은 호흡이 멎고, 심장이 정지하고, 뇌간의 활동이 소실하면 판정
합니다. EEG는 뇌의 기능이 정지될 때 뇌파가 평편해집니다. 장기이식할 때는 뇌사를 기준으로 합니다. 님도 장기를 기증하신
다면 님이 믿지 않는 EEG 판정으로 뇌사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님들이 가사체험에서 체외이탈하여 그당시의 상황을
보고 인식한 예들도 보고되어 있읍니다. 주변환경을 인지하고 의료인들간의 대화도 듣고 사고하고 기억까지 합니다.
부언합니다. 지금 논의되는 논점은 저의 견해에서는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법을 제대도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
질과 정신을 하나로 보는 것은 동양사상은 다 그러합니다.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것은 인도나 중국의 사상들은
다 그렇지요. 자연관찰에 의한 것은 육체와 의식은 각각의 실체처럼 보입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색입니다. 살아있는 사람
의 몸은 색입니다. 구조적 차이가 없어요. 차이점은 생명활동이 있다는 겁니다. 힌두사상도 (제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은 모
르겠습니다) 일원론입니다. 영혼과 몸은 둘이 니다는 것은 인도의 고유사상도 그러합니다. 불교와 무슨차이가 있습니까?
차이점은 무엇에 있는가 연기법, 중도사상에 있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선정처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불교의 최고 선정처는
상수멸입니다. 용어 그대로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면 인식되지 않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견해는 '수'는 느낌을 표
현한 걸로 보지 않고 감수작용, 한자 글자가 담는 의미를 무시하면 않된다고 봅니다. 유심적 관점에서는 마음은 인식되지 않는
겁니다.
[△△△]
유심적 관점에서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데 인식하는 사람 스스로 마음이란 생각을 내어 마음이라 한 것이란 뜻입니까 ? 애초에
인식되지 않았다면 현상되지 않은 것을 일컫는데 마음이라 할 대상이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경우 인식자가 어떤 대상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멋대로 구상하여 마음이란 말을 추정해서 나왔다는 뜻입니까 ? 그렇다면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
은 단지 추정일터 어찌 깨달았다고 하는가 설명해 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
[※※※]
상수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입니다. 인식한다는 건 마음이 작용한 것입니다. 무색계선정에서 대상은 마음
의 어떤 작용이 됩니다. 상수가 멸한다는 것은 대상이 멸한다는 겁니다. 마음작용이 멸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기신론에서 심의
초기를 각하매 심이 초상이 없어서 써 미세염을 원리하는 고로 심성을 득견’했다고 하는 것이며, 무염(심)을 관한다는 것도 같
은 소리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
본인이 경험한 바로는 무염심을 관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무염심이란 사실상 깨달음을 노래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실
체가 되거나 대상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인 된 사실이란 뜻입니다. 모든 연기는 법적인 측면에서도 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면에서도 무상하여 아라 할수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아가 있겠스며 물들 내가 있겠습니까 ? 항차 나도 없는
데 무슨 마음이 있겠습니까 ? 그 상이 없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수도 없습니다. 제 이해가 잘 못되었나요 ? 그런데 그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있겠습니까 ?
[※※※]
A의 현상을 A로 분별하고 B의 현상을 B로 분별합니다. 산을 산이라 하고 물을 물이라 한다면서 육체를 육체라 하고 의식작용
을 의식작용이라 분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님께서는 한쪽 댓글에서는 인식 주관의 이해 현상을 배제 할수 없다고 하고 여기
댓글에서 무아를 말씀하시고 저기 댓글에는 상이 있으면 구경각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면 영혼과 육체
를 하나로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같은 대상을 여기서 A로 저기서는 B로 모순되게 말씀하고 계신것은 아닙니까? 인식주관의
이해현상이 곧 아견으로 제법무아를 모르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선정에서 무아를 알지 못했다는 소리가 아닌지요?
말이 나왔으니 저의 견해를 말하겠습니다. 제가 수행자들의 선정체험담을 관심이 있어 많이 봅니다. 무심을 깨닫았다고 하시
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디가니카야에는 8선정 2처를 설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2처가 사선정 다음의 무상유정처와 비상
비비상처로 샨냐가 없는 단계가 이 두단계입니다. 무심을 말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두처 중 하나를 체험하고 말을 합니다.
제가 인용한 그구절은 상수멸(멸진정)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전생의 기억은 무상유정처 이전에서 경험합니다.
선정상태에서 인식된 어떤 것을 진아니 등등으로 취한 것이 육체와 의식의 근원으로 파악하면 그것은 불교의 중도사상이 아
닙니다. 불교적인 중도관에서 영혼과 몸은 둘로 분별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연기했다는 겁니다. 그게 중도연기법으로 이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불교의 중도사상에 의하면 상견에 해당됩니다. 서구의 과학자들은 물질과 의식의 양자이론
으로 의식의 영속성을 주장합니다. 힌두사상도 불교의 중도사상에 의하면 상견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이와같은 논의는 [◎◎◎]
님의 댓글에 이미 다 적어 놓은 내용입니다.
[△△△]
그럴까요 중도관에서 보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고 본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중관사상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근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
[※※※]
중관사상에서 이부분의 근거는 제 지식이 짧아 들어 보일 수가 없군요. 구사론에는 중음에서도 오온을 가진걸로 논의되고 있
더군요. 중음의 신체는 육체에서 본받는다고 합니다. 중음의 색과 육체를 같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사실 영혼이라는 걸 정
의해야하는데, 저는 유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의식체이지요. 저는 유체와 육체를 동일한 걸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부분도 윗글에서 댓글을 달았듯이 근원체(마음) 같다고 작용간(영혼과 육체)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될것 같습
니다.
[△△△]
중음의 문제는 무엇을 말할까요 ? 오온이 있다면 눈으로 볼 수 있을텐데 님께서는 눈으로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색수상행식중
에 색은 적어도 물질적인 어떤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색은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님은 그런 것을 확실히 보았다고 할만한 어떤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 아니면 누구의 글이나 말에 의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
그래서, 민감한 사람은 소위 귀신이라 하는 걸 봅니다. 월남전에서 가사체험을 경험했던 군인들의 경험담 중에 미국의 가족한
테 나타난 예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윗 댓글에 달았습니다. 부언하면 그건 식과 명색의 상호작용이어서 당사자의 색에
대한 갈애정도와 관계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티벳사자의 서에서 보면 중음의 몸을 갖는것은 만중음에서 나타난다 하고
그건 지구에 메인 상태이겠지요. 색에 대한 갈애가 크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색에 대한 갈애 정도에 따라 지구에 메인
정도가 다르겠지요. 한번 소설을 써 보았습니다. 경험과 묘사된 자료를 보고서요....
상견을 갖은 수행자들이 물질과 정신을 일원성으로 보고 현대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잘못이해하고는...... 에너지 파동으로 설
명합니다. 물질과 정신은 진동의 차이라는 거지죠. 이런 설명은 그 수행자의 머리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또 한가지 대표적
인 착각은 돈오하면 전지하다고 보는 겁니다. 저의 견해는 이렀습니다. 선가귀감에서 '선가의 수행의 시작은 돈오이고 수행의
끝은 점수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
[※※※]님의 견해가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정리가 되지 않는 혼돈 속을 헤메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견을 갖는 수행자
가 물질과 정신을 일원성이라고 한다고 하는 말은 언어적 개념정리가 되지 않은 표현 같습니다.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원이 하나라는 일원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원성은 또 다른 별개의 근원적 원인을 전제로 말한 것이고 일체성은 정신과 육체는 불가분성 속에서 일체란 뜻입니다. 제가
[※※※]님이 한자로 일원성(一原性)이란 한자 표현을 한 것이라고 전제해서 말씀 드립니다.
[※※※]
이부분은 님께서 이해하신 언어의 의미가 제가 이해한 의미와 같지 않는 부분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불가분성 속에서 일체라
하는 말은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견해로 보입니다. 시체에서는 생명활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원성이
란 것은 육체와 정신이 마음에서 근원했다는 겁니다.
[□□□]
[※※※]님의 견해는 바른이치로써 수지하셨다 하겠습니다 불교의 최고 선정처는 상수멸입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부분들은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님께서 수지하신 견해가 올바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교는 정신으로 인식하지 않은 선정을 말합니다. 일원론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였다가 깊은 선정이 들어가면 이들은 모두
다 떨어져 나가고 하나만 남습니다. 정신과 의식이 떨어져나가는 단계가 식무변처라고 무색계이구요 님이 말씀하신 상수멸은
비상비상처이니 28천을 뛰어넘으면 완전한 팔성도 중도의 해탈이라고 하지요... 논의 잘 보았습니다. 합장합니다.
[※※※]
아함부 경에 의하면 비상비비상처 그다음이 상수멸입니다.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멸진정)의 차이를 설하신 경이 있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비상처지나서 상수멸입니다 28천지나서도 33천에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상수멸은 비상처지나야 상수멸입
니다. 상수멸은 생각으로 생각되어지는 모양 느낌 이것을 있을때에 적멸에서 일어납니다. 아함경 보시면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있을것으로 압니다. 아함경을 보고 수행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현상학적으로 보면 현상적 상호간 상대에 대하여 불가입적 개념상에 있기 때문에 멸이란 표현을 썼겠지만 참다운 의미에서의
해탈이 되지 못하지요. 그 것은 상수가 멸태를 취하고 있지만 상수성마저 소멸된 상태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상수 약멸상(若滅
相)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 진정한 소멸상태가 아니라 수면상태와 별반 다른 것이 아니겠지요. 이 것은 구경각을
체험한 상태로 볼수 없습니다. 이것은 간화선 수행자들이 제일로 경계하는 장애입니다. 수면이란 말은 유가사 지론에서 굉장
히 폭넓게 지적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님께서 논의를 하신다면 아함경의 경전을 설명하셔야 합니다. 상수멸는 선불교로서 설명되여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
지요. 아함경을 들어내서 설명하심이 옳은줄 압니다. 왜냐하면 알음알이로 알고자 할때는 교법으로서 증명을 삼을때만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
[□□□]님은 부처님의 사십구년간 설한 것은 다 장애란 뜻으로 마설이라고 자평을 내리신 경문을 접해 보셨습니까 ? 내노라
하는 조사스님들이 법리를 염송한 선문염송 또한 그런 것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문제점을 잘 상기시켜 놓았습니다. 참고해
보심도 좋을 듯하군요.
쉽게 표현하면 상이 있으면 진정한 구경각이 되지 못합니다. 금강삼매경을 깊이 참구하여 보셨으면 합니다.
[□□□]
좋은 날님처럼 하는 말 귀가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이제 그만하십시요. 남에게 권하지 마시고 스스로 자성을 보아 성불하시
기를 기원하리다. 스스로가 행하고 남에게도 행하도록 하는것 불멸의 진리입니다. 제가 이런말 하기 싫어서 하지 않은 편인데
제 카폐에 오셔서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이라 경책하였거늘 어찌 조사가 내부처가 되겠습니까... 자성은 광명이 있으
되 홀로히 밝혀주거늘 저부처가 나의 것이라 하지마소서.
[△△△]
보장엄님 님께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을 제가 했다고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시는데 그 것은 님의 허물이지요. 님께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제가 아는 바가 아닙니다. 또한 님의 말 속에서조차 들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
다. 그런데 님께서는 예의에 어긋나게도 언제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했는데 그 사람에게 엉뚱하
게 저와 같이 찾아온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이 봤다고 하는 것처럼 저를 나무라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
이 말에 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심히 궁금해 집니다.
귀에 딱지가 앉을정도로 들었다면 그 뜻을 관통하고 있다는 말일진데 님의 말씀은 전혀 그 뜻을 감도 못잡고 계시다는 것입니
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제가 지적해 드린 것인데 퉁명스럽게 말을 받으시니 의아할 뿐입니다. 또한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오면 조사를 죽이라 경책하였거늘 어찌 조사가 내 부처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시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음을 봅니다.
저는 이 말씀의 문제 또한 봅니다. 그렇게 죽이라는 말을 듣고 님은 죽였습니까 ? 살렸습니까 ? 님의 답변이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저는 나름대로 말만 익히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습니다.
[□□□]
스님 ㅎㅎㅎ 제가요 하는 말은 한국스님들한테서 수없이 들었다는 말이네요 어째서 말의 뜻을 관찰할지 모르고 하십니까 ㅎㅎ
그 뒷말은 뭔말인지 저도 모르는 말인데 설명해주시고요...우리불법 공부는요 자기 내면의 공부이니 내면을 닦아가면 되구요...
이제 그만 하십시다. ㅎㅎ 시장하실테니 차나 한잔 하십시다. 제가 손수 대접하리다. 합장합니다.
[※※※]
사실 이 댓글을 달기가 망설여 집니다... [△△△] 님이 아함부 경전에 나오는 불교의 최고선정인 상수멸(멸진정)을 간화선 수행
자는 구경각이 아니라 보는가 봅니다. 이 말씀은 간화선 수행자는 불자가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리는 군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아함부경전에서는 8선정 2처로 설하십니다. 불교의 최고위 선정이 상수멸(멸진정)입니다.
선가(간화선자만이 아니겠지요)에서는 무기(심)을 경계하지 眞心을 각하는 상수멸(멸진정)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왜 무기심을 경계하는가 그것이 8식의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공무변처부터 무색계선정입니다. 여기에서 8식의 작용이 드러납
니다. 바로 이전이 무정유정처입니다. 식작용이 일어난다하는 것은 대상이 있습니다. 외부 대상의 정보가 감각기관을 통해 받
아 들입니다. 색,성,향,미,촉이 감각기관의 대상입니다. 이 다섯가지는 색(물질)입니다.) 공무변처부터는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부대상이 아닙니다. 텅비어 있거나, 환하면서 고요하다고 하거나 합니다. 더 깊어지면서는 고요함이 더해
집니다. 적적하다고 표현합니다.
[□□□]
공무변처는 이미 오온이 개공하였으므로 받아들임이 없습니다. 공의 세계이며 화엄경 십신위의 주처입니다. 그런데 교법을 통
하여 공부하셨을텐데 정확히 인지하고 계시네요. 휼륭하십니다. 교법으로만이라도 문답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길을 바라면서
건안하십시요. 합장합니다.
[※※※]
부처님법에 어디 교법과 선법이 다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선을 제대로 하면 교법과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경전
과 다른 소리가 나오는 선자가 불자입니까?
비상비비상처에서는 샨나를 내지 않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8식의 작용으로 전 보고 있습니다. 샨나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상유정처와 비상비비상처를 무심(염)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상비비상처를 최고위 무기공으로
표현하고 8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무기공을 경계합니다. 선가귀감에도 무기에 대해 경계하는 구절이 있
습니다.
[□□□]
산냐산냐 이해하기 싫어서 알아보지 않았지만 비상처는 최고의 무기공입니다. 육조단경에서 무기공을 경계한것이야 당연한
것이지요. 육조단경은 불종자이며 부처님의 불종자인걸요.
[※※※]
기신론에서 구경각을 기술한 위 댓글에 인용구절은 상수멸(멸진정)을 묘사한 구절로 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선가에서의 견
성은 구경각을 말하며 상수멸(멸진정)을 말합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의 귀절을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선가의 수행의 시작
은 돈오이며 수행의 끝은 점수이다"
[□□□]
선가의 수행은 돈오이며 수행의 끝은 돈수입니다. 다만 점수도 인정합니다.
2007년 01월 08일[맑은 자유게시판](39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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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은 물질과 영혼은 나눌수없다 라고하며 일원론을 말씀하시고,...◎◎◎님은 이에대해 반박하기를 '그말대로라면 더이상 나뉠 수 없는 무표색에 속하는 기초물질인 쿼크는 자성적으로 드러난다'고 하며 '그렇다면 그 기초물질은 연기로 성립하지 않는다'하셨구요 ...※※※님은 물질과 영혼은 나뉘는 것으로 이원론을 주장하시고...◎◎◎님의 이부분에 대한 반박글은 없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방문객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 지요? 일원론이다 이원론이다 하는 식으로 분별해서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구요 ... ※※※님이 말씀하시는 영가천도와 중음신 그리고 49제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도 윤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이 죽으면 49일동안 중음신 상태로 머문다는게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었습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의식이 육체와 분리된다 하고 전생을 말하고 신경생리학적 연구등의 근거를 들이대며 유체이탈이라던가 심장마비 환자들의 가사체험을 말하고 또 중음신을 설명하며 티벳사자의 서 등의 자료를 말씀 하시던데...제가 요근래에 홀로그램우주라는 책을 읽다고 ※※※님이 말씀하시는 그런류의 내용들 때문에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그 책을 집어 던져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방문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 그외는 너무 어려운 내용들이라 읽어도 내용 숙지가 안돼서...
몇 번 말하려다 말았는데...갑을병정식으로 하시면, 별☆님이 편하실 듯... . . 제가 ◎◎◎인데, 일원론을 반박하진 않았구요... 얼마전...자연과학과 관련해 적을 때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적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근 샘터님이 한 지적이기도 한데, 위에 보면 ◎◎◎이...[자연과학의 입장 등이 아니라...불법에 따르면...최소한 일원론이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이에는 별다른 어려운 논의가 필요 없습니다. 반야심경이 "오온 일체가 공"이라 명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으로 말하자면..."경"의 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다만 명색의 분별이 있듯...명(수온, 상온, 행온, 식온)과 색(색온)은 좀 다르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일원론, 이원론이...위에서 중요한 논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견해가 다르다고, 굳이 반박할 필요성은 없단 말이죠... 논점을 놓치고 이것 저것 끌어들이면, 배가 산으로 가기 때문에...아무래도 역량을 집중해야 끝이 나거든요. 다만 철저히 분리하는 이원론의 입장이 비판의 논거로 반복되면, 언급하고 지나갈 필요 정도는 있죠? "그것만이 답은 아니다... 오히려 일원론이 적합한 측면이 있다...", 그 정도... 유심론은, 색을 부정합니다. 반면 위 본글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색온을 중심으로 설명하시죠? [명과 색 중 어디에 초점을 두는가?]는, 그냥 상황에 달려 있을 뿐, 별로 중요하진 않다고 봅니다.
위에 보면, 제가...[더 이상 나뉠수 없는 무표색에 속하는 기초물질]로 전개하는 방식이 자성적이라고 비판하는데요. 말 그대로...해당 분, △△△님이...해당 기초물질을, 연기를 떠나 성립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초물질을 명상해 보면 부증불감의 상태가 됩니다...과거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닌 소멸이 없는 물질...]과 같은 표현들...부증불감이 대상이 되고 있죠? 부증불감은, 불생불멸과 같이 중도에 상응한 표현으로 사용되었구요. 분명 항존불변하는 물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물질은 스스로 있는 것이지, 연기에 따라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명한 것이죠...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비판할 수 밖에요...
문제는...본글의 [경]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꼬리말로 이렇게 설렁 설렁 [경]에 대해 적으면 곤란한데 말이죠... 참... 대강을 적어 봅시다. 먼저...해당 [경]은, 꼬마에게 설해지고 있는 겁니다. 라훌라 존자가, 아라한이었지만...해당 [경]을 들을 당시에는, 다망구를 좋아하는 꼬마일 뿐이거든요. 꼬마가 뭐를 알겠어요? 꼬마가 알아 듣기 좋도록, 설명하시고 있는 겁니다. 논리 전개를 봅시다. 영원한 있음도 없고, 영원한 없음도 없다...이렇게 말씀하시죠? 너무나 자명하게, 해당 언명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님은, "과거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닌 소멸이 없는 물질"을 이야기합니다. [경] 즉 법이 아니라, 자기 견해가 최고인 거죠.
왜 그런가? 자기 견해에 부합한, [텅 빈 상태(空, Sunya)라 하지만 그 수냐(空)속에는 무수한 인자(원소)들이 있어]라는 표현만으로 생각한다구요... 나머지는 뭐 다 무시하는 거죠... 명백하게 있는 말도 소용 없어요. 그게 뭐...△△△님이 나쁜 놈이라 그런가? 특별히 어리석어 그런가? 그것은 아니구요... 우리들 습관이예요.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해요. 짧은 내용의 글도, 자기 견해에 부합하지 않으면 막 건너 뛰거든요... 그래 놓고는, 단정은 무지 잘하죠? 거의 전지전능을 표방한단 말이죠... 참...그런 줄 알면서도, 거시기함을 떨칠 수 없는...뭔가 멜랑꼬리무루한... 뭐...어쩔 수 없죠...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이니까...
영원한 있음은 없다...이건 꼬마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없음은 없다...그것은 따로 설명합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이 말이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면 있는 것이 발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쉽습니다. 꼬마도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 다음 대목이, 바로 연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공'이 나옵니다. 영원한 있음은 없으니까요. 죽으면 끝이 아니다...발생이 있으니, 영원한 없음은 없으니까...그런데 영원한 있음도 없다...그러니 요것을 '공(비어 있음)'이라 이름하자. 꼬마도 그렇게 알아듣겠죠? 연기의 언명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발생은 덩어리다...서로 조건지어져 발생한다... 그거잖아요.
'공'이라 이름했지만, 인자들이 있어서 서로 인연을 맺어 발생한다. 연기의 언명에서, 이것과 저것을 그냥 인자라고 이름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색이다. 꼬마는 마음작용...이런 말 몰라요. 눈깔사탕은 압니다. 눈에 보이잖아요. 그러니 색으로 설명하시는 겁니다. 일차적 의미는 쉽습니다. 꼬마에게 말한 내용인데, 그 일차적 의미가 어려울 수 없습니다. 눈깔사탕은 예외 없이 운동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흐름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연이 다하면 소멸합니다. '공(비어 있음)'일 뿐이라는 겁니다. 뭐...물론 눈깔사탕은, 꼬마의 입장에서 먹어야 없어지니까...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바위를 예로 추가해 거론하십니다.
너무나 평이한 [경]을 가지고...어렵지도 않아요...꼬마에게 설명하시는 거니까... 그런데 뭐...오만 소리가 다 나옵니다. 꼬마에게 그러라고 해당 경을 설하신게 아니거든요. 그렇잖아요... . . 해당 [경]을 들은 꼬마, 부처님의 아드님, 라훌라 존자는...총명합니다. 처음 꼬리말을 적은 △△△님과 같은 말 하지 않습니다. 바로 가장 요긴한 점을 파고 들어 옵니다... 모든 것이 비어 있음에서 비롯되고 비어 있음으로 가는, 색이라면(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떠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잖아요...그리고 비어 있음일 뿐이라면(기초 물질은 거론도 하지 않는다)...재미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잖아요...
왜 '인자들이 있어서'의 인자에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있음이 없고, 영원한 없음이 없는 발생과 소멸을 말하기 위한 내용일 뿐이란 점을...꼬마도 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 . 그와 같이 묻자...그러한 의문의 대답까지 찾으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같이 가자... 그래서 라훌라 존자는, 아빠의 손을 잡고 떠나게 된 겁니다. . . 위에서 저는, 쿼크가 바로 자성적인 물질이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님이 말한 기초물질은, 오늘날엔 쿼크라고 할 수 있는데...["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기초물질"은 님이 전개하는 산냐에서 "자성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했을 뿐이죠.
자연과학은, 에너지를 다룹니다. 그래서 작용이 있습니다. 작용이 있다면, 작용을 떠나 홀로 성립하는 기초물질은 결단코 없습니다. 작용을 한다면, 반드시 다른 무엇과 함께 성립합니다. 본질적으로...자연과학에서, 오늘날 입자물리에서...어떤 물질의 발견은, 그 물질을 발견하기 위해 쏘아 보낸 입자와의 상호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상호작용을 떠나, 발견될 수 없습니다. 홀로 독존하는 어떠한 기초물질은, 머리 속에서만 있는 겁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머리속에서만 있습니다. 관념일 뿐이예요. . . 중음신 관련 지적에 대해...[맞춤불교 1. 광명진언과 영가천도]에서, 쭈욱 내려 보면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파란색으로 처리된 { (5) '영가(靈駕)'와 '천도(薦度)'의 의미 }라는 소제목 아래 내용입니다. 색깔이 달라 찾기 어렵진 않지만, 찾아가면서까지 읽기는 귀찮을 수 있단 말이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49일이 뭐 중요합니까? 49일이란게...신화상의 숫자입니다. 경에도 종종 7이 나옵니다. 7에 의미를 부여할 때, 49인데요. 7의 제곱수죠?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 7일간 앉아 계십니다. 전승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일간 7주를 계시는 전승도 있습니다. 기억에 대승불교 계열 전승에서는 그렇거든요. 대승불교...그러니까...인도 북부의 전승이죠... 49일에서 하루가...지구 자전주기만이 절대 기준일 필요는 없죠?
'죽음 유사 체험'은...인간이 죽음을 고찰하려고 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일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아니다... 일주 늦어져 이번 주말에나 올릴텐데, 자기 기억으로도 뭐 단정이 일어나진 않는단 말이죠...그런데 넘의 기억으로 단정이 일어나겠어요? 그런 것은 아닐 거구요... 중요한 것은...실제 그러하냐 아니냐가 아니라...그러한 자료들에 입각하여, "우리들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맞이할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죠. 누구나 죽는단 말이죠... 죽음도 자기 삶의 한 모습으로 바라 보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출생은, 이미 못봤단 말이죠...
방문객님의 설명을 듣고 본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저의 어제 질문이 본글의 논지와 어긋나 있다는거 알았습니다. 명쾌하신 설명 감사합니다... 더불어 지난번 산냐라는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에대한 방문객님의 설명을 듣고도 도통 이해 못했던 산냐라는 의미가 엉뚱하게도 이번 글들 읽으면서 와 닿는군요... 감사합니다. 화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했을 많은 것들을 가까이서 알려주시니 너무 고맙구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