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는 성이 유(劉)이고, 휘가 비(備)이며, 자는 현덕(玄德)이다. 탁군( 郡) 탁현( 縣) 사람으로, 한경제(漢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원수(元狩) 6년(B.C.117)에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군의 육성정후(陸城亭候)에 봉해졌지만, 주금(酎金)을 조금 바쳤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집에 있었다. (1) 선주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일을 했다.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東郡) 범현(范縣)의 령까지 이르렀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의 집 동남쪽 모퉁이 울타리 옆에 높이가 다섯 장쯤 되는 뽕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수레 덮개와 같았다.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기이한 것으로 여겼으며, 어떤 사람은 이 집에서 틀림없이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비는 어릴 때, 같은 종족의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개거(蓋車 ; 천자의 수레)를 탈 거야."
그때 숙부 유자경(劉子敬)이 말했다.
"너는 허튼 소리 하지 마라. 우리 가문을 멸망시키겠구나!"
유비의 나이 15세 때, 어머니가 공부를 배우도록 하여 유비는 같은 종족인 유덕연(劉德然), 요서군(遼西郡)의 공손찬과 함께, 이전에 구강 태수(九江太守)를 지낸 같은 군 출신인 노식(盧植)의 제자가 되었다. 유덕연의 부친 유원기(劉元기)는 항상 유비에게 학비를 지급해 주고 아들 덕연과 똑같이 대했다. 원기의 부인이 말했다.
"각각 따로 일가(一家)를 세우는데, 어찌하여 늘상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宗中)에 있는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공손찬과 유비는 서로 우정을 쌓았다. 공손찬이 연장자였으므로 유비는 그를 형으로 대우했다.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개, 말, 음악,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 그는 신장이 7척 5촌이고,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까지 닿았고, 눈을 돌려 자기 귀를 볼 수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었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의를 지닌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으므로, 젊은 사람들은 그에게 다투어 가까이 갔다. 중산(中山)의 가장 큰 상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천금(千金)의 재산을 모아 탁군 일대에서 말을 사려다가 유비를 보고 걸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많은 돈을 주었다. 유비는 이로부터 돈을 얻어 무리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영제(靈帝) 말, 황건적이 일어나자 주군(州郡)에서는 각기 의병을 일으켰다. 유비는 부하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따라가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현(安喜縣)의 위(尉)에 임명되었다.
군의 독우(督郵)가 공적인 일로 현에 왔을 때, 유비가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했으므로 직접 안으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곤장 2백 대를 때렸다. 이어 관인 끈을 풀어 그의 목과 말뚝에 걸어 두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갔다. 오래지 않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 丘毅)를 파견하여 단양(丹陽)으로 가서 병사를 모집했다. 유비는 그와 함께 가서 하비현에 이르러 적을 만났다. 힘껏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하밀현(下密縣)의 승(丞)에 임명되었다. 또 다시 관직을 버렸다. 후에 고당현(高唐縣)의 위(尉)가 되고, 승진하여 령이 되었다. 현이 적에게 격파되자, 유비는 중랑장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고, 공손찬은 표를 올려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도록 하고, 청주 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잠시 평원의 현령을 대행하였으며, 후에 평원의 상(相)에 임명되었다.
군의 백성인 유평(劉平)은 평소 유비를 경시했고, 그의 통치를 받게 되었음을 수치로 여기고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자객은 차마 찌르지 못하고 유비에게 이 일을 말하고는 떠났다. 유비가 인심을 얻은 것은 이와 같았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자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가서 제(齊)에 주둔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전해는 유비와 함께 그를 구하러 갔다. 이 당시 유비는 사병 천여 명과 유주의 오환족에 속하는 부족의 기병이 있었으며,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은 단양의 병사 4천 명을 유비에게 증원시켜 주었으며, 유비는 그래서 전해를 떠나 도겸에게 귀의했다. 도겸은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시켰다. 도겸은 질병이 악화되자, 별가 미축( 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되게 할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유비를 맞이하려 했지만, 유비가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비 사람 진등(陳登)이 유비에게 말했다.
"지금 한 왕실은 점차 쇠약해지고 천하는 엎어지려고 합니다. 공업을 세우기에는 오늘이 호기입니다. 이 주는 튼실하고 풍요로우며, 인구가 백만입니다. 당신이 이 주를 맡아 주시기를 머리 숙여 원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원공로(袁公路 ; 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공경 다섯 명을 배출하였고,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주를 그에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진등이 말했다.
"원공로는 교만하고 오만하여 혼란을 다스릴 만한 군주가 못 됩니다. 지금 서주에서는 당신을 위해 보병·기병 10만 명을 모으려고 합니다. 위로는 천자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시대의 오패(五 )와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있고, 영지를 나눠 받아 국경을 지켜 공적을 대나무와 비단에 적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저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 진등 역시 감히 당신의 뜻을 듣지 않겠습니다."
북해의 재상 공융(孔融)이 말했다.
"원공로가 어찌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잊는 사람입니까? 그는 묘지 안의 살이 썩어 없어진 송장의 뼈와 같은데, 주의할 가치가 있습니까? 현재 상황은 백성이 유능한 인물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내려 준 좋은 기회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비는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2) 원술이 와서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우이(旴이)·회음(淮陰)에서 저항했다.
건안 원년(196),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진동 장군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候)에 봉했다.
유비와 원술이 한달 넘게 서로 대치하는 동안 여포가 그 빈틈을 타서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守將) 조표(曹豹)가 배반하여 은밀히 여포를 영접했다. 여포는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고 있었으므로 유비는 군대를 돌려 해서(海西)로 갔다. 양봉·한섬이 서주와 양주 일대를 소란스럽게 하자, 유비는 그들을 맞아 공격해 전부 머리를 베어 죽였다. 유비는 여포에게 화해를 구하였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식을 돌려보냈다. 유비는 관우를 파견하여 하비를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소패로 돌아와 (3) 다시 만여 명의 병사를 얻었다. 여포는 이것을 꺼려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와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싸움에서 지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다.
조조는 유비를 두텁게 대하고, 여주목으로 삼았다. 유비가 패 땅으로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집하려고 했으므로 조조는 그에게 건량미를 공급해 주고 병사를 증원시켜 주어 동쪽의 여포를 공격하도록 했다.
여포가 고순(高順)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가서 유비를 돕도록 했지만 구할 수 없었고 고순에게 패했으며, 다시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하여 여포에게 보냈다. 조조는 직접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 유비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여포를 사로잡았다.
유비는 다시 처자식을 얻어 조조를 따라 허도로 돌아왔다.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에 임명하고, 유비에 대한 예절은 갈수록 정중하여 밖으로 나갈 때는 똑같은 수레에 탔으며, 앉을 때도 자리를 같이 했다.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 원소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조조는 유비를 파견하여, 주령·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맞아 공격하도록 했다. 서주에 도착하기 전, 원술은 병으로 죽었다.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출발하기 전, 헌제의 장인 (4) 이며 거기 장군인 동승(董承)이 궁궐을 나올 때 헌제의 허리띠에 쓴 밀조(密詔)를 주며 조조를 죽이도록 했다. 유비는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있었다. 이때 조조가 유비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당신과 나뿐이오. 원술 같은 사람은 그 안에 들지 못하오."
유비는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5) 그리고 동승과 장수 교위(長水校尉) 충집( 輯),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 등과 함께 대책을 상의했다. 마침 유비는 원술을 맞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는데, (6)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유비는 조조를 떠나 하비를 근거지로 했다. 주령 등이 돌아오자 유비는 곧바로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관우를 뒤에 남겨 하비를 수비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7) 동해군(東海郡)의 창패(昌 )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현의 대다수 사람들이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에게 의탁하였으므로, 유비의 병력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합하도록 했다.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 조조는 동쪽으로 유비를 토벌하여 그의 병력을 전부 손에 넣었으며,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유비는 청주에 도주했다. 청주 자사 원담은 이전에 유비의 무재(茂才)였었으므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유비를 맞이했다. 유비는 원담을 따라 평원에 도착했다. 원담은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보고했다. 원소는 부장을 보내 길에서 유비를 맞이하여 받들도록 하고, 자신은 업성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유비와 만났다. 이곳에서 머문 지 한 달쯤 되자 뿔뿔이 달아났던 병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여남의 황건적 유벽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파견해 병사들을 지휘하여 유벽 등과 허현 주변을 탈취하도록 했다. 관우는 유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조조는 조인에게 병사를 지휘하여 유비를 공격하도록 했다. 유비는 원소의 군대로 돌아갔지만, 은밀히 원소에게서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원소에게 남쪽 형주목 유표와 연합할 것을 진언했다. 원소는 유비에게 부하들의 지휘를 맡기고, 여남으로 가서 적군 공도( 都) 등과 합류하였으므로 그의 병력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조조는 채양(蔡陽)을 보내 공격했는데, 채양은 유비에게 살해되었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시키고 직접 남쪽으로 내려와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미축·손건을 보내 유표와 소식을 서로 알리도록 했다. 유표는 직접 교외까지 마중 나와 상빈(上賓)의 예절로 대접하고 그의 병력을 늘려 신야(新野)에 주둔하도록 했다. (8) 형주의 호걸들 중에서 유비에게 기탁하는 자가 나날이 많아졌으므로, 유표는 유비의 마음을 의심하고 몰래 방비하고, 하후돈과 우금 등을 박망(博望)에서 막도록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자, 유비는 복병을 두고 하루아침에 직접 자기 군대의 진영을 불태우고 거짓으로 도주하였다. 하후돈 등이 추격했지만, 복병에게 격파되었다.
건안 12년(207)에,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하러 갔으므로, 유비는 유표에게 허창을 습격하라고 말했지만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9) 조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유표를 정벌할 무렵, 유표가 죽었다. (10) 그의 아들 유종이 자리를 이었고,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는 번성(樊城)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군대가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조 군대가 완성(宛城)에 이르러서야 그 소식을 듣고 병력을 인솔하여 번성을 떠났다. 유종이 있는 양양(襄陽)을 지날 때, 제갈양이 유비에게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오."
곧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불렀다. 유종은 두려워서 일어날 수 없었다. 유종의 측근과 형주 사람들 다수가 유비에게 귀의했다. 당양(當陽)에 도착할 무렵에는 병력이 10만여 명이나 되었고, 군수물자는 수천 대나 되어 하루에 10여 리밖에 가지 못했으므로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에 그들 중 일부를 태우도록 하고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말했다.
"응당 빨리 가서 강릉을 보존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무장한 자는 적습니다. 만일 조조 군대가 도착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무릇 큰 일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인심을 근본으로 해야 하오. 지금 백성들은 나에게 돌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가겠소?"
조조는 강릉에 군수물자가 풍부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유비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곧 군수물자를 후방에 두고 날쌘 병력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유비가 이미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을 들은 조조는 정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급히 추격하여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가서 당양의 장판(長坂)까지 추격했다. 유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제갈양·장비·조운 등 수십 기마와 달아나자, 조조는 백성과 군수물자를 대량 포획했다. 유비는 한진(漢津)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관우의 배와 만나 면하(沔河)를 건넜다. 그곳에서 유표의 장남인 강하 태수 유기(劉琦)의 병력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유비는 제갈양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주유·정보 등 수군 수만 명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움을 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吳)의 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남군(南郡)까지 추격하였다. 그 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북쪽의 조조 군대에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돌아갔다.
유비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임명하는 한편, 또 남쪽의 사군(四郡)을 정벌하러 갔다. 무릉태수 김선(金旋), 장사 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는 모두 항복했다. 여강군(廬江郡)의 뇌서(雷緖)는 부하 수만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유기가 병으로 죽자, 부하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하고 공안현(公安縣)을 다스리도록 했다. 손권은 점점 유비를 두려워하여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 관계를 공고히 했다. 유비는 경성으로 가서 손권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1)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함께 촉을 취하자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오(吳)가 형주를 넘어 촉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촉 땅을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으므로 손권에게 승낙하는 대답을 할 것을 주장했다. 형주주부 은관(殷觀)이 나아가 말했다.
"만일 우리가 오의 선봉이 되어 나아가서는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 오에게 기회를 준다면 큰 일을 할 좋은 기회는 떠나게 됩니다. 지금은 다만 구두 상으로 촉을 토벌하는 일에 찬성하고, 우리는 여러 군을 새로 점거하였으므로 아직 행동을 일으킬 수 없음을 설명하십시오. 오는 틀림없이 감히 우리 영토를 넘어 촉을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계획이 있다면, 오와 촉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그의 말에 따랐다. 손권은 과연 자신의 계책을 중단시켰다. 유비는 은관을 별가종사로 승진시켰다.
건안 16년(211), 익주목 유장은 조조가 종요 등을 보내 한중으로 가서 장로를 토벌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 별가종사인 촉군(蜀郡)의 장송(張松)이 유장에게 말했다.
"조조의 병력은 강성하여 천하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데, 만일 그가 장로의 물자를 이용하여 촉 땅을 취한다면 누가 그에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유장이 말했다
"나는 본시 이 일을 걱정했지만 방법이 없었소."
장송이 말했다.
"유예주는 당신의 종족이며 조조의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는 용병에도 뛰어나니 그를 시켜 장로를 토벌하게 한다면 장로는 반드시 격파될 것입니다. 장로가 격파되면 익주는 강성해질 것이고, 비록 조조가 오더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유장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법정(法正)을 보내 4천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유비를 영접하게 하고, 앞뒤로 거액의 선물을 보냈다. 법정은 이 기회에 익주를 취할 수 있는 계책을 유비에게 진술했다. 유비는 제갈양과 관우 등을 형주를 지키게 하고,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부현( 縣)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직접 나와 영접했으므로 서로 만나 기뻐했다. 장송은 법정을 시켜 유비와 모신(謀臣) 방통에게 진언할 때 회담 장소에서 유장을 습격할 수 있다고 말하도록 했다. 유비가 말했다.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조급하게 할 수 없소."
유장이 유비를 행대사마(行大司馬) 겸 사예교위로 추천하였으며, 유비 또한 유장을 행진서대장군(行鎭西大將軍) 겸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유비의 병력을 늘려 장로를 공격하도록 했고, 또 백수(白水)의 주둔 무기, 자재를 매우 풍부하게 갖추었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유비는 북쪽의 가맹( 萌)에 도착하여 즉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두터운 은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다.
다음해,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려고 하자, 손권은 유비를 불러 구원하도록 했다. 유비가 유장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려고 하자, 오는 위급함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손씨와 저는 본래 입술과 이빨처럼 밀접한 관계였고, 또 악진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관우를 도우러 가지 않으면 악진은 반드시 크게 승리하여 돌아서 익주의 국경을 침범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장로에 대한 근심보다 더 클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적이니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유장에게 1만여 명의 병사와 군수물자를 빌려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단지 병사 4천 명만을 주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요구한 것의 절반만 주었다. (12) 장송은 유비와 법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지금 큰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버리고 익주를 떠나십니까!"
장송의 형인 광한(廣漢)태수 장숙(張肅)은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유장에게 말하여 그 계획을 폭로했다. 그래서 유장은 장송을 붙잡아 목을 베었고, 유비와 유장 사이에 처음으로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유장은 관소를 지키는 장수들에게 문서를 보내 다시는 유비와 관계를 맺지 말도록 명령했다. 유비는 격노하여 유장의 백수군 총독인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곧 황충·탁응 등과 부현까지 나아가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은 유귀(劉귀)·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현에서 유비에게 저항했지만, 모두 패하고 물러나 면죽을 지켰다. 유장은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의 군사들을 지휘했지만, 이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점점 강대해졌고, 각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속현(屬縣) 등을 평정했다. 제갈양·장비·조운 등은 병사를 이끌고 역류하여 백제·강주(江州)·강양(江陽)을 평정하고, 단지 관우만이 형주에 남아 지켰다. 유비는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낙현( 縣)을 포위했다. 그 당시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공격한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건안 19년(214) 여름에 낙성( 城)이 공격을 받았다. 유비가 나아가 성도를 포위한 지 수십일 만에 유장은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촉은 풍요롭고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유비는 주연을 열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성 안에 있던 금과 은을 취해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곡물과 비단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유비는 또 익주목을 겸임하였고, 제갈양은 그를 보좌했으며, 법정은 꾀를 내는 상담역을 하였고, 관우·장비·마초는 무장이 되고, 허정·미축·간옹(簡雍)은 귀빈의 대우를 받았다. 동화(董和)·황권(黃權)·이엄(李嚴) 등은 본래 유장의 임용을 받은 관원이었으며, 오일(吳壹)·비관(費觀) 등은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彭 )은 유장에게 배척 당한 자이며, 유파(劉巴)는 옛날부터 한을 품었던 사람인데, 유비는 이들을 모두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여 그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했다. 뜻이 있는 선비치고 진력함을 다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건안 20년(215),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으려는 생각을 말했다. 유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주(凉州)를 얻은 후, 당연히 형주를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은 격분하여 곧 여몽(呂蒙)을 보내 장사(長沙)·영릉(零陵)·계양(桂陽) 두 군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했다. 유비는 병력 5만 명을 인솔하여 공안(公安)으로 내려오고, 관우를 익양(益陽)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 해, 조조는 한중을 평정했고,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손권과 동맹을 맺어 형주를 분할하여 강하·장사·계양을 동쪽 오나라 소속으로 하며, 남군(南郡)·영릉·무릉을 서쪽 촉나라 소속으로 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강주로 돌아왔다. 황권을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장로를 영접하도록 했지만, 장로는 벌써 조조에게 투항을 했다. 조조는 하후연·장합을 한중에 주둔시키고 파의 경계를 자주 침범하여 소란스럽게 했다. 유비는 장비에게 병사들과 탕거(宕渠)로 나아가게 하여 와구(瓦口)에서 장합 등과 싸우도록 하여 격파시켰다. 장합은 병사를 추슬러 남정으로 돌아갔다. 유비 역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3년(218)에 유비는 장수들을 인솔하여 한중으로 나갔다. 장수 오란(吳蘭)과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로 들어가게 했는데, 모두 조조 군대에게 전멸되었다. 유비는 양평관(陽平觀)에 주둔하여 하후현·장합 등과 대치했다.
건안 24년(219) 봄, 유비는 양평관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점 앞으로 나아가 정군산(定軍山)에 진영을 구축했다. 하후연이 병사를 인솔해 와서 그 땅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령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북을 쳐서 공격하도록 하여 하후연의 군대를 크게 격파시키고, 하후연과 조조가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 )등을 참수했다. 조조는 장안에서 크게 일어나 남쪽으로 정벌에 나섰다. 유비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조조가 비록 지금 온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한천(漢川)을 지킬 것이다."
조조가 도착하자, 유비는 병력을 집결시켜 요새에 의지한 채 끝까지 싸우지 않았다. 조조는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죽어 가는 자만 나날이 늘어갔다. 여름이 되자, 조조는 과연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고, 유비는 한중을 지켰다. 유비는 유봉(劉封)·맹달(孟達)·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군(上庸郡)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가을이 되자, 신하들은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으로 추대하고는 한제(漢帝)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평서 장군(平西將軍)·도정후(都亭候) 신(臣) 마초, 좌장군장사·영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龐羲), 의조(議曹)·종사중랑·군의중랑 신 사원(射援), 군사 장군 신 제갈양, 탕구장군·한수정후(漢壽亭候) 신 관우, 정로장군·신정후(新亭候) 신 장비, 정서 장군 신 황충, 진원 장군(鎭遠將軍) 신 뇌공(뇌恭),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 등 120 명은 상서를 올립니다. 옛날 당 요는 최고의 성인이었지만 조정에는 네 명의 간신-공공(共工)·곤( )·환두(驩兜)·삼묘(三苗)-이 있었고, 주 성왕은 인자하고 현명했지만 네 명의 제후국-채숙(蔡叔)·관숙(管叔)·곽숙( 叔)·무경(武庚)-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고후(高后 ; 한고조의 황후)가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자, 여씨(呂氏) 일족은 권력을 찬탈하였고, 효소 황제(孝昭皇帝)가 어렸으므로 상관씨(上官氏)는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대대로 전해진 은총에 의지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극도로 흉악하게 굴어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사직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대순(大舜)·주공(周公)·주허후(朱虛候 ; 여씨 일족을 주살한 劉?)·박육후(博陸侯 ; 상관씨 일족을 주살한 ?光)가 없었다면, 이런 자들을 추방하고 체포하고 토벌하여 위기로 경도된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는 위대한 용모와 지고한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지만, 액운을 만나 왕실이 쇠퇴하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동탁이 제일 먼저 혼란스럽게 하여 수도를 흔들어 놓았고, 조조가 그 재난을 이용하여 제왕의 권한을 몰래 취하였습니다. 황후나 태자에게 짐새(광동성에서 사는 毒鳥)의 깃을 술에 담근 독을 마시게 하여 살해하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백성들을 파멸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오랫동안 폐하에게 도망의 고통을 겪게 하여 근심스럽게 하고 텅 빈 성에 유폐시켰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도, 신을 제사지내는 주재자도 없고, 왕의 명령을 끊어 버리고 제왕의 자리를 가리고 정권을 찬탈하려고 합니다. 좌장군·영사예교위(領司 校尉), 예(豫)·형(荊)·익(益) 세 주의 목(牧), 의성정후(宜城亭候) 유비는 조정에서 작위와 봉록을 받았으며, 힘을 다하여 국난을 위해 몸을 바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의 징조를 보고 떨쳐 일어나 거기 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를 주살할 계획을 세워 나라를 안녕 되게 하고 고도(古都 ; 낙양)를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동승의 기밀이 지켜지지 못하여 조조의 떠도는 혼이 악한 일을 널리 하도록 하여 천하를 파멸시키게 했습니다. 신 등은 항상 왕실에 크게는 염락(閻樂)의 재화가 있고, 작게는 정안(安)의 변고가 있음을 걱정해 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안해하며 떨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우서(虞書≫에는 '너그러운 태도로 구족을 대하라(?序九族)'고 했고, 주는 두 시대(하와 은)를 참고하여 동성(同姓)의 제후국을 세웠으며, ≪시경≫이 그 의의를 서술하여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한왕조가 건립된 초기에는 영토를 분할하여 왕실의 자제를 존중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씨(呂氏) 일족의 반란을 결국 뿌리뽑아 태종(太宗)의 기초를 완성했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유비는 황실의 일족이며 왕실의 울타리로서 한마음으로 나라를 염려하며 혼란을 퇴치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에서 격파시킨 이후부터 천하의 영웅은 유비의 주위로 모여들었는데, 그의 작위와 이름은 분명하지 않고 구석(九錫)의 예 또한 더하지 않은 것은 국가를 지켜 보존하고 만대에까지 그의 공적을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조정 밖에서 조서를 받드는데, 관위를 수여하는 문서는 끊겼습니다. 옛날 하서 태수 양통(梁統) 등은 한의 중흥을 만났지만, 산하에 가로막혀 지위와 권력이 모두 똑같아 서로 통솔할 수 없었으므로 모두 두융(竇融)을 원수로 추대하여 공적을 세우고 외효를 격파시켰습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은 농·촉-두융·양통 등이 있던 지역-의 상태보다 위급합니다. 조조는 밖에서는 천하를 집어삼키려 하고, 안에서는 많은 관료들을 살해하여 조정에는 내란이 발생할 위험이 있지만, 왕실의 종친들은 협력하여 조조에 맞서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합니다. 신 등은 옛날 규범에 따라 유비를 한중왕으로 봉하고, 대사마로 임명하여 육군(六軍)을 총지휘하도록 하고, 동맹군을 규합하여 역적을 소탕하려고 합니다. 한중·파·촉·광한(廣漢)·건위( 爲) 등의 군을 국(國)으로 하고, 관서를 설치하는 것은 한나라 초, 제후왕의 옛 예에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바뀐 제도가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독단적인 행위는 가능합니다. 그런 연후에 공업이 성취되는 일이 세워지게 됩니다. 신 등은 물러나 거짓 조서를 받은 죄를 받을 것이며, 설령 죽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면양에서 단장(壇場)을 설치하고 병사들을 정렬시키고 신하들을 배석시켜 상주문 읽기를 끝마치고 유비에게 왕관을 씌웠다.
유비는 한제(漢帝 ; 헌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말했다.
---신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상장군(上將軍)의 임무를 맡았고, 삼군을 통솔하며 조서를 밖에서 만들었지만, 적의 반란을 소탕하여 왕실의 안정을 돕지 못하여 오랫동안 폐하의 성명한 교화가 쇠미한 상태로 있게 하였으며, 천하가 혼란스러워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걱정하여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통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동탁이 혼란을 조장하였고, 이 이후부터는 흉악한 자들이 도처에서 날뛰며 천하를 해롭게 하였습니다. 폐하의 성스런 덕과 위풍에 의지하여 사람과 신이 모두 호응하여, 어떤 때는 충의를 떨쳐 일어나 토벌하고, 어떤 때는 하늘이 벌을 내려 포학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소멸시켜 얼음이 서서히 녹는 것처럼 했습니다. 오직 조조만은 오랫동안 제거되지 않아 국가의 권력을 찬탈하고 마음대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옛날에 거기 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기밀이 지켜지지 않아 동승은 살해되었습니다. 신은 갈 곳을 잃고 떠돌면서도 조정에 충의를 다하려고 했지만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조조에게 흉악한 반역 행위를 저지르도록 방치하여 황후가 살해되고 황태자가 독살되었습니다. 비록 동맹을 규합하여 힘을 떨치려고 했지만, 유약하고 무력이 없어 몇 해를 지나도록 성과가 없습니다. 항상 느닷없이 죽어 국가의 은덕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워 자나깨나 줄곧 탄식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들은 생각합니다. 이전에 ≪우서≫에서는 '너그러운 태도로 구족을 대하라. 그들의 현명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보좌하도록 하라'했었고, 오제(五帝 ; 黃帝· 頊·帝 ·堯·舜)는 여기에 더하고 뺐지만, 이 도는 지속되고 있고, 주(周)는 두 조대를 참고하여 희성(嬉姓)의 나라를 나란히 세운 결과, 실제로 진(晋)·정(鄭)의 보좌를 받는 복이 있었습니다. 고조는 한왕조를 창립하여 왕실 자제들을 존중하고 아홉 왕국을 세워 결국 여씨 일족을 참수시켜 본가를 안정시켰습니다. 지금 조조는 정직한 사람을 증오하고 있으며, 실재로 이와 같은 사람을 많이 모았고, 험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찬탈 의도는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미 종실은 쇠약해졌고 황족으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가 없는데, 옛날 법식을 생각 해보면서 권위의 마땅함을 빌려 신을 대사마 한중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신은 엎드려 제 자신을 세 번 반성하니,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한쪽의 중임을 맡았으면서 힘을 다해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얻은 관직은 분에 넘치는데 또다시 높은 지위를 더하여 죄악이나 비난을 무겁게 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료들은 도의를 갖고 저를 가까이 한 것입니다. 신이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면, 적은 멸망하지 않았고 국가의 혼란은 멈추지 않았으며 종묘는 기울고 사직은 멸망하려고 하므로, 신은 직책을 다하지 못함을 걱정하고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책임을 갖게 됩니다. 만일 사태의 변화에 대응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면, 비록 물이나 불 속에 이르더라도 부득이하여 말할 경우에는 일반적인 예를 고려하여 후회하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인새(印璽)를 받아 국위를 양양시키기로 했습니다. 고개 들어 이 작호를 생각하면 위치는 높고 총애는 두터우며, 고개 숙여 은덕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면 걱정은 깊고 책임은 무거워 놀라 두려워 숨을 몰아쉬니 계속 옆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힘을 다해 성의껏 받들고, 육군(六軍)을 떨치도록 하며, 정의로운 선비들을 통솔하고, 하늘에 호응하고 시운에 따라 역적을 토벌하여 사직을 안정시켜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겠습니다. 삼가 상주하여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역(驛)에서 가좌장군(假左將軍)·의성정후의 인수(印綬)를 반환하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성도에 관소를 설치했다. 위연(魏延)을 발탁하여 도독으로 삼고 한중을 진무하도록 했다. 이때 관우는 조조의 장수 조인을 공격했는데, 번(樊)에서 우금을 사로잡았다. 돌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여 죽이고 형주를 취했다.
건안 25년(220), 위문제(조비)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연호를 바꿔 황초(黃初)라고 했다. 어떤 이가 한제(漢帝 ; 獻帝)가 살해되었다고 전했으므로, 유비는 곧 국상을 발표하고 상복을 입고서 시호를 효민황제(孝愍皇帝)로 추증했다. 이 이후로 여러 가지의 상서로운 조짐이 줄을 이어 보고되었고, 태양과 달이 서로 속하였기 때문에 의랑인 양천후(陽泉候) 유표(劉杓), 청의후(靑衣候) 상거(?擧), 편 장군(偏將軍) 장예(張裔)·황권(黃權), 대사마속(大司馬屬) 은순(殷純), 익주별가종사 조작(趙 ), 치중 종사 양홍(楊洪), 종사좨주(從事祭酒) 하종(何宗), 의조종사(議曹從事) 두경(杜瓊), 권학 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윤묵(尹默)·초주( 周) 등이 상주문을 올렸다.
---신들이 듣기로는 ≪하도(河圖)≫, ≪낙서(洛書)≫, 오경(五經)의 참위서(讖緯書)는 공자가 밝힌 것인데, 사태에 대처하는 징험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서는 '적(赤 ; 火德)이 사흘 간 나타나면 번창하고, 여러 대를 거쳐 이름과 알맞게 갖추어지면 합쳐 제제(帝際)가 된다'고 했고, ≪낙서보호명(洛書寶號命)≫에서는 '천도(天度)와 제왕의 도(道)가 갖추어지면 황(皇)이라고 칭하고, 왕명을 통솔하여 성공하고 패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낙서녹운기(洛書錄運期)≫에서는 '구후칠걸(九候七杰)이 운명을 다투고, 백성들은 유해를 불태우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종횡으로 뒤섞여 사람의 머리를 밟는다. 누가 사람의 주인이 되게 할까? 이름에 현(玄)자가 있는 사람이 와야만 한다'고 했고, ≪효경구명결록(孝經鉤命決錄)≫에서는 '제(帝)는 이미 여러 차례 비(備)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신의 부친인 주군(周 )이 살아 있을 때, 서남쪽에서 자주 황색 기운이 나타나 수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몇 장이나 되었으며, 출현한 지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항상 상서로운 운기(雲氣)와 길상의 바람이 있어 선기(璿璣 ; 北斗四星)로부터 아래에서 황색 기운에 호응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징조입니다. 또 건안 22년(217)중에, 깃발처럼 생긴 운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르며 하늘 중앙에서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는데, ≪하도≫·≪낙서≫에서는 '그쪽에서 반드시 천자가 나온다'고 풀이했습니다. 게다가 그 해에는 태백(太白 ; 금성)·형혹(熒惑 ; 화성)·전성(塡星 ; 토성)이 항상 세성(歲星 ; 목성)을 좇아 이동했습니다. 가까이로는 한(漢)이 흥기할 초기에 오성(五星 ; 목성·화성·금성·수성·토성)이 세성을 따라 함께 있었는데, 세성은 오상(五常) 가운데 의(義)를 주재하며, 한나라의 방위는 서쪽에 위치하므로 의(義)의 위쪽인 것입니다. 때문에 한나라의 법에서는 항상 세성으로 천자를 점쳤습니다. 응당 성명한 군주는 이 주에서 일어나 대업을 성취하여 중흥시켜야 합니다. 당시 허도에는 한헌제가 여전히 있었으므로 신하들은 그것을 감히 누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최근 형혹이 또 세성을 따라 운행해 위(胃)·묘(昴)·필(畢)-모두 별자리 이름-에 나타났습니다. 묘와 필은 천체의 중추 부위이며, ≪역경≫에서 '제성(帝星)이 이곳에 있으면, 일체의 사악함은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성스런 휘가 미리 예견되어 나타났고, 증험을 추구하는 사이에 부합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신이 듣기로는 성명한 군주가 하늘에 앞서서 행동할 경우 하늘은 그를 등지지 않고, 하늘 뒤에서 행동할 경우 하늘의 때를 받들기 때문에 하늘의 때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종하여 즉시 대업을 넓혀 천하를 안정시키십시오.
태부(太傅) 허정(許靖),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 군사 장군(軍師將軍) 제갈양, 태상(太常) 뇌공(?恭), 광록훈(光祿勳) 황주(黃柱), 소부(少府) 왕모(王謀)등이 상서를 올려 말했다.
---조비는 군주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였으며, 한나라 왕실을 멸망시키고 국가의 대권을 훔쳐 취했으며, 충의롭고 선량한 신하들을 협박하고, 잔혹하고 도가 없습니다. 사람도 귀신도 격분하고 모두 유씨(劉氏)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고, 천하는 불안하며, 양모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신하들 중에서 앞뒤로 상서를 올린 사람이 8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좋은 징조를 서술했고, ≪도참(圖讖)≫에서도 분명한 징조를 나타냈습니다. 최근 무양현(武陽縣) 적수(赤水)에 황룡이 출현했다가 9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서는 '덕(德)이 깊은 냇물에 이르면 황룡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용은 군주의 상징입니다. ≪역≫의 건괘(乾卦) 95에서는 '날아가는 용이 하늘에 있다'고 했는데, 대왕에게는 용이 승천하는 일이 제위에 오르는 것에 상당합니다. 또 이전에 관우가 번성·양양을 포위했을 때, 양양의 남자 장가(張嘉)와 왕휴(王休)가 옥새를 바쳤는데, 옥새는 한수(漢水)에 잠겨 깊은 샘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신비한 광채는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무릇 한(漢)은 고조가 일어나 천하를 평정시켰을 때의 국호입니다. 대왕은 선제의 자취를 답습하였고, 또 한중(漢中)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자의 옥새에 신비스런 광채가 미리 나타났고, 옥새는 양양에 있는 한수 하류에서 출현했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 선제의 후대를 계승하고, 천자의 지위를 대왕에게 주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길상의 징조가 인사와 서로 합쳐진 것이지 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주(周)에서 오어(烏魚)가 나타나는 징조가 있었는데, 모두 좋은 징조라고 했습니다. 고조와 세조가 천명을 받을 때에는 ≪하도·낙서≫에 먼저 나타나 징조가 되었습니다. 지금 하늘은 징조를 말했고, 많은 유학자와 영웅 호걸들은 함께 ≪하도·낙서≫, 공자의 ≪참기(讖記 ; 예언서)≫를 발굴하여 모든 징조가 구비되었습니다. 대왕께서는 효경 황제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예이며, 본가와 분가의 백대를 지나게 되었고, 천지의 신은 복을 내렸고, 성스런 자태는 아름답고 빼어나며, 신같은 무용을 몸에 갖추고 있는, 인의는 천하를 덮고 은덕은 천하에 쌓았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방 사람들이 마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영도(靈圖)를 고찰하고, 참서·위서에 근거하면 선명한 의지의 표출로, 이름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마땅히 제왕의 자리에 올라 이조(二祖)의 사업을 계승하고 종묘를 지속시켜야만 천하가 큰 행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박사 허자(許慈), 의랑 맹광(孟光)과 함께 즉위 의식을 제정하고 길일을 선택하여 존호(尊號)를 받듭니다.
유비는 성도(成都) 무담산(武擔山) (13) 남쪽에서 제위에 올랐다. 제문을 지어 말했다.
---건안 26년(221) 4월 6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 ; 검정색 소)를 써서 황천의 상제와 후토(后土)의 신지(神祗)에게 명백하게 보고합니다. 한은 천하를 끼고 있고, 천명은 무궁합니다. 이전에 왕망(王莽)이 찬탈하여 훔쳤을 때, 광무제가 진노하여 그를 토벌하고 멸망시켰으므로 국가는 또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무력에 의지하여 황자와 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하늘을 업신여기며, 중원을 소란스럽게 하고 하늘의 밝은 도를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는 조조의 흉악무도함을 계승하여 국가의 권력을 훔쳐 차지했습니다. 신하와 장수들은 국가가 멸망하려고 하므로 저 유비가 응당 회복시켜 이조(二祖)의 사업을 잇고 하늘의 징벌을 집행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는 덕행이 비루하여 제위를 부끄럽게 할까 두렵습니다. 백성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밖으로는 만이(蠻夷)의 군장(君長)에게 의견을 청취했는데, 모두 '천명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고, 선조의 사업은 오랜 기간 방치할 수 없으며, 천하에는 군주가 없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국 선비들이 앙모하는 사람은 저 유비 한 사람뿐입니다. 저는 하늘이 명시한 뜻을 두려워하고, 또 한왕조의 황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삼가 길일을 선택하여 백관들과 함께 제단에 올라 황제의 인새를 받게 되었습니다. 천지의 신들에게 예절을 차리고, 그 일을 천신(天神)에게 보고합니다. 신께서 한왕실에 복을 내려 주시어 오랫동안 사해를 안정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장무(章武) 원년(221) 여름 4월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고쳤다. 제갈양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허정을 사도로 임명했다. 배관을 두고, 종묘를 세우고, 고황제(高皇帝) 이하의 선조에게 합동으로 제사지냈다. (14) 5월, 오씨(吳氏)를 황후로 세우고,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아들 유영(劉永)을 노왕(魯王)으로 삼고, 유리(劉理)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거기 장군 장비가 측근에게 살해되었다. 당초,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동쪽 정벌에 나서려고 했었다. 가을 7월에 군사들을 인솔하여 오를 토벌했다.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지만, 유비는 격노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장군 육의(陸議)·이이(李異)·유아(劉阿) 등은 무현(巫縣)·자귀현( 歸縣)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계의 장군 오반(吳班)·풍습(馮習)이 무현으로부터 이이 등을 공격하여 격파시키고, 군대를 자귀현에 주둔시켰다. 무릉(武陵)·오계(五谿)의 만족이 사자를 보내 병사를 요청했다.
2년(222) 봄 정월에 유비의 군대는 자귀현으로 돌아왔고, 장군 오반·진식(陳式)의 수군이 이릉(夷陵)에 주둔했으며, 장강 동서쪽 해안에 진영을 설치했다. 유비는 자귀현으로부터 장군들을 인솔하여 진군해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의 효정( 亭)에 진영을 두었다. 흔산(?山)으로부터 무릉을 지나서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의 만족을 위로하도록 했으므로, 만족은 모두 서로 이어서 호응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진북장군 황권(黃權)이 강북의 군대들을 통솔하여 이릉도에서 오나라 군대와 서로 대치했다.
여름 6월, 자귀현으로부터 10여 리쯤 되는 곳에 황색 기운이 나타났는데, 넓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그 후 10여 일 있다가 육의(陸議)가 효정에서 유비의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으며, 장군 풍습·장남(張南) 등은 모두 전사했다. 유비는 효정으로부터 자귀로 돌아와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서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으로 돌아왔다. 어복현을 바꾸어 영안(永安)이라고 불렀다. 오나라는 장군 이이·유아 등을 파견하여 유비의 군대를 추격하고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에 유비는 병사를 모아 무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에 승상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려 성도(成都)에 남교(南郊 ; 동짓날 하늘에 제사지냄)·북교(北郊 ; 하짓날 땅에 제사지냄)의 제단을 세우도록 했다. 손권은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유비는 그것을 허락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종위(宗瑋)를 보내 이 일을 완결 짓고 돌아오도록 했다.
겨울 12월에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은 유비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저항했다.
3년(223) 봄 2월에 승상 제갈양이 성도에서 영안으로 왔다. 3월, 황원이 병사를 진군시켜 임공현(臨 縣)을 공격했다. 유비는 장군 진홀(陳?)을 파견하여 황원을 토벌하도록 했다. 황원의 군대는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황원은 자신의 호위병에게 결박당하여 그대로 성도로 보내졌으며 참수되었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양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광무 3년(223) 여름 4월 계사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제갈양은 후주(後主 ; 劉禪)에게 상주하여 말했다.
---엎드려 생각 해보면, 이미 고인이 된 황제께서는 인(仁)을 행하고 덕(德)을 세웠으며 천하를 덮는 일이 끝이 없었는데, 커다란 하늘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중병을 오래 앓도록 하여 이번 달 24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했습니다. 신하들과 비빈(妃嬪)들은 소리를 내어 울며 슬퍼했는데,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습니다. 남긴 조서를 돌아보면, 일은 종사를 생각하고, 행동은 손익을 용납했습니다. 백관이 애도를 할 경우는 사흘을 채우면 상복을 벗고 매장하는 날에 다시 장례 예절에 따르도록 하고, 군국(郡國)의 태수·상·도위·현령·현장은 사흘이 지나면 상복을 벗도록 했습니다. 신 제갈양은 직접 칙명을 받은 후부터는 선제의 신령을 두려워하며 감히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신은 널리 알려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기를 요청합니다.
5월에 영구가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왔고, 시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고 했다. 가을 8월, 혜릉(惠陵)에 매장했다.
*평하여 말한다.---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강하며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인물을 알아보고 선비를 예우했다. 그는 한고조의 풍모를 갖고 있었으며, 영웅의 그릇이었다. 그가 모든 국가와 태자를 보좌하는 일을 제갈양에게 부탁하고, 마음으로 의심이 없었던 것은 확실히 군신(君臣)의 지극한 공심(公心)이며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모범이었다. 유비는 임기응변의 재간과 책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토 또한 협소했다. 그러나 좌절해도 굴복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조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조조의 도량으로는 틀림없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으로 예측하여 그와 이익을 다투지 않았으며, 그래서 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첫댓글 가끔씩 보이는 '?' 표시는 제가 한글 97에서 한자를 찾을 수 없거나 제가 못찾은 경우에요.^^
으앙~!(지금 열심히 선주전 치고 있는데! 그리고 한글2002에는 한문 개수도 많고..)
컥~ 흠흠... 이런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