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부孫婦의 간구
글 : 김 민 숙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려니 했다. ‘늘 그랬었지’ 스스로 위안을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일상 반복되는 복통에도 병원을 기피하는 내게 식구들은 병을 키운다고 성화였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프다는 부위를 진찰도 해보지 않고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란다.
종합병원의 의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암호처럼 갈겨 쓴 소견서를 간호사에게 넘겼다. 그의 표정이 여러 기기만큼이나 차가워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검사를 해야 하는지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날 밤부터 굶어서 완전히 비운 장관에 현탁액을 집어넣고 가스를 채운다. 메스껍고 몽롱하다. 반듯이 누워라, 돌아보아라, 오른쪽으로 돌려라, 숨을 참아라. 긴장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끊임없는 지시가 떨어졌다. 환자에게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의사가 내린 처방이 과하다 싶어서 화가 났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 사진을 수없이 찍고도 다시 초음파로 샅샅이 훑어본 장은 마치 동굴 속처럼 어두웠다.
평소에도 개운한 날이 드물었다. 무슨 장애라도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두려워서 피해왔다. 보호자 없이 혼자 왔느냐고 묻는 간호사의 사무적인 말도 마음에 걸렸다.
입에 머금었던 마취제를 뱉고 마우스를 물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손등에 꽂은 정맥 주사가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간호사들의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돌려보니 옆 침대에 두 명의 환자가 아직 잠에 빠져있다. 내시경 검사가 끝났나 보다. 일어나 앉아 보니 목에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질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선 안심이 되었다. 한참 만에 들어 온 간호사는 정밀 검사를 위해 조직을 떼어 내었으니 세 시간 후에나 죽을 먹으란다. 혹 혈변이 보이면 즉시 응급실로 와야 한다는 주의와 별일이 없으면 일주일 뒤에 검사 결과를 보러 나오라고 했다.
‘조직 검사라니?’
지난해 생의 끈을 놓은 친구가 번개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모임을 갖는 우리 몇몇 동기생 중에서도 건강의 대명사로 통했던 만능 스포츠우먼이었다. 건강 검진을 했다가 간암을 발견했을 때에도 우리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초기 암이라서 레이저로 수술을 끝냈다며 우리에게 정기적인 건강검진 중요성을 환기시킬 때만 해도 ‘그러면 그렇지.’ 했다. 하지만 초기에 발견해서 불행 중 다행이라던 처음의 낙관과는 달리 한 해 동안의 투병은 처절했다. 백혈구 수치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이 암세포가 퍼져가듯 우리의 가슴속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될 것이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 버린 날,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의 생을 고등학교 3학년인 그의 막내에게 죄스러워했다.
정밀 조직검사란 확인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종합병원에서 삼십 년이나 근무한 전문의의 경험과 직관이 이미 심각한 병을 진단했을 것이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양손으로 모서리를 짚고서야 겨우 침대를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의 하늘은 잔뜩 내려앉아 금방 비라도 한줄기 쏟아질 것 같았다.
입술을 평소보다 붉게 바르고 밝은 색상의 스커트와 분홍색 가디건을 걸쳤다. 집을 나서면서 책장 속의 시할아버지 사진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내리 딸 셋을 낳았을 적에는 죄송스러워 방에도 들지 못하던 나를 잡아 아랫목으로 앉히시며 “이웃 구천 댁은 딸 일곱을 낳고도 아들을 낳았느니라.”는 말로 오히려 위로해 주던 시할아버지셨다. 오매불망 증손자를 기다리셨으나 돌아가시고 삼 년이나 지난 후에 나는 막내를 얻었다.
“할아버지, 늦둥이 당신의 증손자가 아직은 어립니다.”
위협에 가까운 소원을 할아버지는 들어주실 것 같았다. 시아버지가 긴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마치 곁에 살아계신 것처럼 간구하시던 일을 보면 웃음이 먼저 나왔었다. 그 일을 오늘은 내가 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실을 서성인다. 시계의 초침은 흐느적거리며 돌아가고, 병원의 공기가 나쁜지 목이 새삼 뜨끔거린다. ‘어깨를 펴고 눈에 힘을 주거라.’ 할아버지의 카랑카랑하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이름을 부른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앉아있는 의사선생님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뒤로 젖혔던 어깨가 움츠려지고 온몸이 스멀스멀 내려앉는다. 희뿌연 정면의 벽을 바라보는데 할아버지가 허위허위 걸어 나오신다. 손을 모았다. 합장하고 허리를 깊이 숙여 나는 할아버지께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