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사는 지난2011년에 다녀와서 쓴 글을 서백의 블로그에서 옮겨온 것임을 밝혀 둡니다,◈
국화 축제가 열리는 계절에만 볼 수 있는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 가을 풍경을 제대로 만들어 주는 듯한 시월 어느날, 오랫만에 경남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18번지에 위치한 월아산(月牙山) 청곡사(靑谷寺)를 찾았다. 청곡사는 진주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로서 국보 제302호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688호 청곡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보물 제1232호 진주 청곡사 목조제석천,대범천의상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호 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대웅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1호 괘불함, 보물로 승격된 금강역사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9호 영산회상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업경전 등이 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창건한 것으로 월아산 청곡사에는 도선국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온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진주 남강에서 푸른 학(靑鶴)이 이곳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와 앉자 이곳에 서기(瑞氣, 성스러운 기운)가 있다하여 청곡사를 세웠다 한다. 창건 이후 고려에 이르는 기간 동안 어떤 연혁이 있었는지는 전하지 않고, 그후 고려 말(高麗 末) 1380년(우왕 6)에 실상대사(實相大師)가 중건했다. 1397년(태조 6년) 이 고장 출신인 신덕왕후의 원찰이자 비보사찰이 되어 상총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계행(戒行), 극명(克明) 두 스님이 중창했고, 이어서 1612년(광해군 5) 고명스님이 불상을 새로 조성하였다. 1661년(현종 2) 인화스님이 업경전 시왕상을 조성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괘불을 조성하였으며, 조선시대 말에 포우대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대웅전의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에 공포는 다포식이며 네 모퉁이에는 활주(活柱)를 받쳐 보강하고 있다. 또한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제1688호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은 광해군 7년(1615)에 조성된 불상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月牙山靑谷寺(월아산청곡사)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
학(鶴)이 목욕을 하였다고 전해오는 학영지(鶴泳池)
사찰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부도밭
산명과 사찰명이 적힌 '月牙山靑谷寺(월아산청곡사)' 편액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선생의 글씨인데, 하동주 선생은 1879년 거제면 동상리 진양하씨 하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남(嶺南)의 서예대가로 진주(晋州)에 나가서 명성(名聲)을 떨치니 호(號)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4년 세상(世上)을 떠날때까지 한결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철종(哲宗) 2년 이조참판 김정희는 거제(巨濟)에 귀양(歸養)와서 거제 반곡서원에 나다니면서 거제의 정훈성과 벗하고 서예(書藝)를 전파하였는데 하동주는 아버지 하지호와 정훈성으로부터 전예서(篆隸書)와 독창적인 추사체를 전수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글씨 쓰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와 가까이 있으면서 추사체를 배웠고, 추사의 글씨가 담긴 책자를 가져와서 아들인 그에게 서법(書法)을 익히게 하면서 배우게 도움을 주었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梁山)의 통도사, 고성(固城)의 옥천사, 부산(釜山)의 범어사, 통영(統營)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晋州)의 촉석루, 밀양(密陽)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懸板) 등이 있다.(출처 : 신종우의 인명사전)
신라 말 도선국사가 어느날 진주 남강변에서 푸른 학(靑鶴)이 이곳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가 앉았는데, 청학이 날아가 앉은 곳에 서기(瑞氣, 상서로운 기운)가 있다하여 산천비보설에 따라 이곳에 청곡사를 세웠다 한다. 청곡사의 누각인 환학루(부를喚, 학鶴, 다락樓)는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그래도 ‘학을 불러 온 누각’이라는 뜻의 환학루(喚鶴樓) 편액(扁額)은 1896년에 쓴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喚鶴樓(환학루)' 편액의 관지(款識)를 보면 왼편에 '崇禎紀元後四丙申孟夏上澣'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이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것을 꺼려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崇禎紀元後四丙申(숭정기원후4병신)은 1628(무진년)년 이후 60갑자로 4번째 돌아오는 병신년인 1896년이고 맹하(孟夏)는 음력 4월이며, 상한(上澣)은 초순이니 1896년 음력 4월 초순에 이 현판을 썼다는 뜻이다.
요사채로 들어가는 일각문
일각문에 걸려있는 無爲門(무위문) 편액
無爲門(무위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적묵당
청곡사박물관으로 '영산회상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추녀 아래에는 청학을 탄 도선국사의 조각상과 다듬지 않은 기둥들이 눈길을 끈다.
범종각은 앞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으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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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選佛場)
설선당(說禪堂)인데, 지금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삼존불(좌우협시는 문수와 보현보살)
대웅전의 건물양식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의 건물로 광해군4년(1612)에 재건한 것으로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며,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광해군 7년(1615년)에 조성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비교적 큰 불상에 속한다. 그리고 제석과 범천은 회화로서는 조선 후기 불교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조각으로 새겨져 있는 제석, 범천상은 청곡사의 것이 유일하다고 하며, 조각 기법은 조선 후기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두 상은 현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보물 제1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제석, 범천상은 모조품이다. 또한 근래에 지붕기와를 개수하다 청기와 3장이 대웅전의 한복판에서 발견됐는데 이는 청룡의 상징으로 짐작을 하고 있다.
업경전(業鏡殿)은 일반적으로 명부전 혹은 지장전 등으로 부르며, 본존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염라대왕 등 10대왕을 봉안하는데,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무불(無佛)시대에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육도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고, 그밖에 시왕상과 판관, 녹사, 사자(使者),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금강역사상(인왕상)은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나 조선 후기 인왕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보통 사찰에서는 지장전, 명부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청곡사는 특이하게 업경전(業鏡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업경"은 죽은 이의 죄를 살피는 거울을 말하는데 업경전에 들어서면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가 되기를 포기한 지장보살 좌우로 시왕(十王, 염라대왕도 시왕 중 하나다)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도열해 있다. 업경전 안에서는 산 자가 아니라 시왕의 심판을 받는 죽은 자가 된다. 등에 한기가 스치는 걸 보니 지은 죄가 많은가 보다.
업경전(業鏡殿)의 출입문 좌우에 서 있는 금강역사상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 중의 하나로, 다른 말로 ‘인왕(仁王)’이라고도 한다. 보통 사찰 문의 양쪽에 서 있는데, 법당쪽에서 바라 보았을 때 왼쪽은 밀적금강,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역사상은 머리 부분에 두광(頭光)을 표현하는데, 그들이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지혜 또한 뛰어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나라연금강은 입을 벌려 ‘아’하고 소리치는 듯한 형상을 하여 ‘아금강역사’라고 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 ‘훔금강역사’라고도 부른다. 나라연금강의 ‘아’와 밀적금강의 ‘훔’은 범어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이들 두 금강역사의 입은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 완성을 상징한다. 청곡사 금강역사상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명부시왕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조선 후기 작품으로 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안에는 1877년(고종 14)에 그린 치성광여래탱과 칠성여래탱 7폭이 있고, 또한 최근에 그린 산신탱과 현왕탱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의 열여섯 제자를 모신 법당을 나한전이라고 한다. 건물양식은 앞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이며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안에는 조선시대 중기에 조성하였다고 하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안치되어 있고, 16나한상도 좌우로 함께 봉안되어 있다.
한 건물에 중앙의 산신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독성각을, 우측에는 진영각이 자리하고 있다.
할매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으로 불교가 전파되기전 부터 믿었던 토착신앙이지만 불교에 유입되면서 호법신(護法神)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편액을 보면 특이하게도 할매산신각 이름으로 걸려 있다. 이는 가야산 산신인 대가야왕의 어머니인 정견모주를 할머니 산신상으로 형상화하여 봉안한 것이다.
광해군 4년(1612년0에 조성된 보물 제1232호 목조대범천왕과 목조제석천왕으로, 목조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는 곳은 청곡사가 유일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각상이 아닌 그림으로 전하며, 조선시대 탱화에서 주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역시 답사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여유롭게 다녀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진주에 간 길에 잠깐 둘러 보고 바쁘게 오다보니 국보 제32호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유형문화재 제261호 괘불함 등을 눈으로 확인하고 오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첫댓글 이번에 못봐서 서운했지만 긴~~~쾌불이 기억에 남는 청곡사 였습니다
덕분에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