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 - 철종의 건강법
오늘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인 철종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죠.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 연결 - 인사 나누기)
Q1. 전대 임금 헌종이 후사도 없이
너무 일찍 사망한 바람에,
강화도에 있던 먼 친척인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른 것이 철종이죠?
네 말씀하신대로 헌종의 먼 친척, 엄밀히 말하면 7촌 당숙뻘 되는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요. 사실 문제가 많았습니다. 워낙에 오래전부터 왕가 자손의 출산 숫자가 적어 귀한데다, 그나마 왕자들도 워낙 단명으로 요절을 하는 바람에 6촌 이내에는 왕위 계승자가 없을 정도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절대 부족했던 것이지요.
그나마 살아있던 이들은 역모에 휩쓸려 죽거나 유배되었었는데요, 철종의 경우에도 할아버지 은언군을 비롯해서 백부와 이복형까지 역모에 엮이는 바람에,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농사짓고 나뭇짐을 지는 일반 평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Q2. 그래서 철종에게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거죠?
네 맞습니다. 철종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해서, 적발되면 곤장을 때리기도 하고, 범칙금을 부과하기도 했지만,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이 별명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실제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아버지도 그 은언군의 서자였습니다. 심지어 철종도 아버지의 서자였기에, 철종의 출신 성분은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더욱이 할아버지와 백부와 형들이 각각 역모에 휩쓸리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처음에 왕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 갔을 때도, 본인을 잡으러 온 줄로 잘못 오해하고 숲속으로 도망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즉 철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Q3. 그래도 왕족 출신인데,
철종의 어릴 적 삶이 무척 힘들었군요?
네 맞습니다. 그나마 순조가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은언군 자녀들의 집 주위를 둘러싼 가시울타리를 철거하고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주어 혼인이라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인데요. <왕조실록>의 철종행장을 보면, 철종 일가가 수많은 감시와 멸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살던 동네에 깡패 같은 자가 있어 술에 취해 문밖에서 온갖 욕설과 난동을 부렸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새로 부임한 강화유수가 너무 가혹하게 감시를 해서 집사람들이 고통스러워했지만, 그 유수는 철종 즉위 후에도 오히려 승진했다고 합니다.
Q4.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철종의 권위가 아주 밑바닥이었다는 뜻이군요?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사실 철종은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항렬이 같습니다. 이게 참 웃긴 것이 선왕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그 다음 왕위에 오른 경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데요,
심지어 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나 인조의 경우에도 항렬은 선대왕인 광해군이나 연산군보다 낮았습니다. 결국 철종은 안동 김 씨에 의해 선택된 허수아비 왕이었던 것인데요, 즉위 직후부터 순원왕후 김 씨가 수렴첨정을 합니다. 심지어 철종의 왕비도 안동 김씨 가문에서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삼 대째 세 임금의 중전이 모두 안동 김씨에게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Q5. 철종이 왕권을 행사할래야
할 수가 없는 구조였군요?
맞습니다. 철종은 자신의 뜻대로 관리를 임명할 권한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종이 수렴첨정을 벗어난 후에 딱 한번 개혁정치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는데요, 철종은 이를 계기로 ‘삼정이정청’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개혁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나 지지 세력이 없는 철종은 결국 실패를 하게 되는데요, 이후 철종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술과 궁녀들에 빠져 살게 됩니다. 원래부터 몸이 병약했었는데, 자포자기 상태로 주색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철종 12년부터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하게 됩니다.
Q6. 철종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데다가
건강관리도 제대로 안 했기에
병석에 눕게 된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철종 때의 <왕조실록>에는 어의들이 임금을 진료했다는 기록이, 다른 왕들보다 몇 배나 더 많게 나오는데요. 더욱이 그 내용을 살펴보면, 특별한 병증이나 치료에 대한 언급이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거의 습관적으로 하루를 어의의 진료와 함께 시작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 중에는 아예 그냥 단순히 ‘진료를 했다.’는 단 한 줄의 기록만 나오고 다른 기록은 아무 것도 없는 날도 허다합니다. 일단 무조건 진료부터 하고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요.
Q7. 그렇다면 도대체 철종은
어떠한 병을 앓았기에,
병명조차 나오지 않으면서
그토록 많은 진료를 받았던 것일까요?
네 철종 12년 10월 29일의 <왕조실록>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어의들이 진료를 마치고 난후, 좌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천만 가지 일들이 우려되고 급박하지 않음이 없습니다마는, 성궁(聖躬) 즉 임금의 몸을 보전하고 아끼는 것이 가장 크고 먼저 하여야 할 제일의 도리입니다. 바로 말씀하오면 음식(飮食)을 절제하시고 기거(起居) 즉 잠자리를 조심하여, 임금의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철종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그 중에서 특별히 음식과 잠자리를 언급했음을 볼 수 있는데요. 궁궐에서 조심해야할 음식과 잠자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역시 주색(酒色)이 너무 과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하가 왕에게 직접 주색이 과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으니, 에둘러 말했던 것이지요.
Q8. 결국 과도한 주색이
병의 원인이었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된 야사를 보면, 철종이 말년에 폐를 심하게 앓고 각혈까지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동의보감>을 보면, 무릇 열이 나면서 기침을 하고 가래를 토하거나 피를 토하면서 오후로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미열이 나고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술이 빨개지거나 소변색깔이 빨갛고 오줌이 시원치 않는 증상을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속의 음기와 진액성분이 허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더운 화열(火熱)의 기운이 몸속에 더 많아져서 위로 그 불의 기운이 올라간다는 뜻인데요. 이 당시에는 이러한 증상이 생명을 위협하는 아주 무서운 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Q9.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이러한 음허화동의 환자가 열에 한명도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 놓았습니다. “병의 회복을 위해서는, 첫 번째로는 지혜롭고 밝은 의사를 만나야 하고, 두 번째로는 복약(服藥) 즉 약복용을 부지런히 하여야 하고, 세 번째로는 지켜야 할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그 금기는 다름 아닌 술과 여색과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철종은 이 중 하나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살아 날라야 살아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철종은 병석에 누운 2년 후인 철종 14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