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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 편지를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마술사
평점 10
여자들만이 근무하는 화장품 회사에 취직한 만복이와 달근이는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표를 내려고 했었다. 그즈음 사장 딸이 불란서에서 귀국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일단 사표 제출을 보류한다. 사장 딸을 사귐으로써 일약 출세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래서 달근이는 사장집 식모를 사장 딸로 오인하고 열열하게 접촉한다. 한편 만복이는 공장 안의 폭발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일약 사장 자리에 앉게 되는 동시에 사장 딸과 결혼하게 된다. 그제서야 달근이는 번지수가 틀린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된 다음이라 하는 수가 없었다.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모두 여자들로만 구성된 화장품 회사, 그 안에서 남자 두 명이 겪게 되는 자잘한 에피소드. 사장의 딸을 배경 삼아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욕망. 그리고 합심하여 공동의 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의 <번지수가 틀렸네요, 1968> 는 일단 흥미로운 설정이 눈길을 끈다. 별 다른 직업 없이 거리를 전전하던 구만복 (구봉서) 과 서달근 (서영춘) 은 우연히 성미화학의 직원으로 채용된다. 취직만 시켜주면 열심히 일하겠다는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여자들만 있는 회사 분위기에 성을 내던 두 사람은 회사를 그만두려 한다. 그러나 천순분 사장 (도금봉) 의 딸 정란 (전양자) 이 프랑스에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바꾼다. 얼굴도 모르는 사장의 딸과 어떻게 잘해서 신세 좀 펴보려는 심산이다. <번지수가 틀렸네요> 는 별 볼일 없는 청년이 돈 많고 똑똑하고 예쁜 공주님을 만나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남성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역전된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시시탐탐 무언가를 노리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영화 속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사장 딸을 '물으려' 는 만복과 달근이나 끊임없이 성미화학을 인수, 합병하려는 경쟁 업체의 사장 허태백 (허장강) 과 그의 심복 송전무 (송해) 가 그렇다. 그야말로 언감생심.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경우다. 대놓고 마초 악당임을 자처하는 허태백이 천순분을 여사라고 부르면서 슬슬 음모를 꾸미는 것에 비해 만복과 달근은 상황을 반전할 만한 힘도 없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원하면 가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러면서 천순분과 정란에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내비친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똑똑한 여성을 바라보는 그들의 이중적인 시선은 남자다움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런 남자들을 향해 천순분은 "남자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지 보자" 는 자조 섞인 조롱을 보내기도 한다. 경쟁에서 뒤처질 것을 우려해 음모를 꾸미는 허태백이나 불순한 의도로 사장 딸에게 접근해 목적을 이루려는 만복과 달근은 가부장제의 부정적인 남성상을 어느 정도씩 보여주는 인물인데, 둘은 선과 악의 개념으로도 나뉜다. 더 나아가서는 우직한 만복과 잔꾀를 부리는 달근도 구분되어지면서 백마 탄 공주님과 결혼하게 되는 신데렐라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불청객으로 갈리게 된다. 잘못 찾은 번지수에서도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해피엔딩은 보장된다. 결국, 힘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구조 속에서 약자에 불과한 여성과 하층민은 연대를 하게 되는데, 그들이 헤쳐모이는 기준은 착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번지수가 틀렸네요> 는 구봉서와 서영춘을 위해 마련된 무대다.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여성과 한 방에 인생 역전을 노리는 하층민의 연대는 세월을 뛰어넘어 여러 상황과 맞닿을 수는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그런 이야기 거리들은 구봉서와 서영춘의 입담과 온몸을 비틀고 자유자재로 표정을 짓기 위해 소비되는 코미디의 소재료에 더 가깝다. 그러면 어떤가. 요즘처럼 요란하지는 않아도 구봉서와 서영춘의 코미디는 충분히 즐거우면서 유쾌하다. 덧붙임 1. 영화의 배경이 되는 화장품 공장은 쥬리아. 지금도 존재하는 브랜드인데 기억하기로는 80년대 까지 아모레와 함께 대표적인 화장품 브랜드였다. 당시 회사이름이던 성미화학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등장한다. 2. 일개 회사의 수위가 총을 들고 경비 업무를 보는 건 신기한 일인데 그때는 그래도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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