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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며, 죽고 난 뒤 남편이 묘지(墓誌)를 쓴 경우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묘지란 관속에 같이 묻는 고인의 기록을 말한다.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
요약
염경애(廉瓊愛 : 1100~1146)는 염덕방(廉德方)의 딸로, 25세에 최루백(崔婁伯)에게 시집왔다가 47세에 별세하였다. 최루백(崔婁伯 : ?~1205)은 수원의 아전 상저의 아들로, 15살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 갔다가 범에게 물려죽었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산으로 가서 범을 발견하고는, 잠이 든 범을 도끼로 쳐서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 장례 지내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살았다.
그 후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였는데 벼슬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이르렀다. 그는 이러한 효행으로 인하여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실렸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도 실려 있다.
지금도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는데, 이 곳은 최루백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염경애는 최루백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으며, 묘지는 남편 최루백이 지었다.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
皇統六年丙寅正月二十八日戊戌漢南崔婁伯之妻峯城縣君廉氏卒於里第殯于順天院二月壬寅火櫬于京城北朴穴西北崗緘骨權安于京城東淸凉寺其三年戊辰八月十七日葬於因孝院東北君皇考墓之側婁伯誌其墓曰君諱瓊愛檢校尙書右僕射大府少卿廉公德方之女也母宜寧郡大夫人沈氏君年二十五歸于我生六子一男曰端仁二曰端義三曰端禮俱志學四曰端智度爲僧一女曰貴姜適興威衛錄事崔國輔崔氏亡還在室二曰順姜尙幼君爲人玲瓏肅頗識字曉大義言容功行出人之右未嫁善事父母旣嫁克勤婦道先意承旨孝養吾先夫人內外親戚吉凶慶弔咸得其情人莫不以此多之昔我出倅貝州中原不憚跋涉偕至千里或從軍事守因寒閨屢寄征衣或預閹䆠供饋有無凡從我于艱二十三載之事不可殫記然不及事吾先君歲時伏臘每躬奠獻又嘗親自紡績銖積寸累手縫一衣或一褌每至諱日設靈座拜獻仍隨赴齋衆多小作襪子幷施于僧此最不可忘者平日嘗與我言曰子以讀書不事事爲尙吾以主家衣糧爲職雖復僶俛求之不如意者時或有之設或不幸他日我殞賤命而子饗厚祿動輒稱意無以我爲不才而忘其禦窮也言訖大息越乙丑春吾自司直傳右正言知制誥君喜動於顔曰吾貧幾濟矣吾應之曰諫官非持祿之地君罵曰儻一日子立殿陛與天子爭是非雖荊釵布裙荷畚計活亦所甘心此似非尋常婦言也其年九月君疾作至丙寅正月疾篤而逝何恨如之予於丙寅夏傳右司諫冬十二月轉左司諫丁卯春轉侍御史其年冬貶禮部員外戊辰春轉禮部郎中仍授淸州副使累遷官序繼食厚祿顧家衣食反不如君僶俛求時孰謂君爲不才也君之將死遺囑於我及命諸子言皆詣理多可聽者其死時蓋年四十七矣銘曰 尋信誓不敢忘 未同穴甚痛傷 有男女如鴈行 期富貴世熾昌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판독자 : 허흥식
(번역문)
황통(皇統) 6년 병인(인종 24, 1146)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崔婁伯)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廉氏)가 마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가 2월 임인일에 서울 북쪽 박혈(朴穴)의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화장하였다. 유골을 봉하여 임시로 서울 동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의종 2, 1148)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례지내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루백이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짓는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공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 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자못 문자(文字)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하고자 하는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안팎 친척의 좋은 일과 언짢은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에는 다 그 마음을 함께 하였으니, 이로써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원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가고, 내가 군사(軍事) 관계에 종사하는 동안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혹은 엄환(閹宦, 內侍)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간의 일들은 다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여서, 명절이나 복일(伏日)과 납일(臘日)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일찍이 길쌈하여 이것을 모아서 저고리 한 벌이나 또는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靈位)를 모신 자리를 베풀고는 절하고 이것을 바쳤으며, 곧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가서 모두 중들에게 시주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평일에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귀중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것이 맡은 일인데,
비록 반복하여 힘써서 구하더라도 뜻과 같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는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게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다음 을축년(인종 23, 1145) 봄에 내가 사직(司直)으로부터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아내는 “문득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쟁론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정월에 병이 위독하게 되어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병인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에 오르고 12월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겼다.
정묘년(의종 1, 1147)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로 좌천되었다.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기면서 그대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오르면서 계속하여 후한 녹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돌아보면 의식(衣食)은 오히려 아내가 어렵게 애써서 구할 때와 같지 못하니, 누가 아내를 말하여 재주가 없었다고 하겠는가. 아내가 장차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에게 유촉(遺囑)을 하였고 여러 자식들에게도 유명(遺命)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닿아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 대개 나이가 47세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미쁨을 찾아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 尋信誓不敢忘(심신서불감망)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 未同穴甚痛傷(미동혈심통상)
아들 딸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 有男女如鴈行(유남녀여안항)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 期富貴世熾昌(기부귀세치창)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해석자 : 김용선
최누백(崔婁伯,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효자. 본관은 수원(水原). 수원의 향리(鄕吏) 상저(尙翥)의 아들이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한 다음,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시묘중인 어느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가 시종이 없다 이를쏘냐.”라는 시를 읊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였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였다.
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 生員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으며, 뒤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최루백(崔婁伯 : ?~1205)
고려 때 수원의 아전 상저의 아들이다. 15살 때 아버지가 사냥 갔다가 범에게 물려죽자 어린 나이에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산으로 가서 범을 발견하였다.
배불러 잠이 든 범을 도끼로 쳐서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 깨끗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에 장례 지내고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살았다.
그 후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한 것으로 보이는데 묘지명은 결락이 심하여 자세한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는 효행으로 인하여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실렸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도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경기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는데, 원래의 비각은 봉담면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며, 현 위치 일대가 최루백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강암 정려비(旌閭碑)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앞면에 ‘고려효자한림학사최루백지여(高麗孝子閑林學士崔樓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뒤쪽 7m지점에는 최루백의 부 최상저의 유허비 비각이 최근에 건립되어 있는데, 최상저는 수원최씨(水原崔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벼슬은 조산대부 국자제주(朝散大夫 國子祭酒)에 이르렀으며,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고, 염경애의 사후 다시 재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최루백이 지은 첫 부인 염경애의 묘지명이 남아 있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해석자 : 김용선
고려부인 염경애 수원최씨 최루백 배위
KBS 역사스페샬(1999년 6월 19일, 8-9시 방영 "접시꽃 당신")
850년전 한 여인에게 죽음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마흔 일곱해(47세)의 삶은, 깊은 어둠 속으로 사그러 든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발견된 한 장의 낡은 돌판, 그것은 한 고려여인의 삶이 어둠을 뚫고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고려시대 묘지석들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알려주거나, 때로는 잘 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 잡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묘지석 대부분이 개성과 경기지방에서 출토됐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고려의 지배계층은 중앙에 거주함으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렸음을 의미한다.
묘지석의 글 :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나의 한이 어떠하였겠는가 ? 믿음으로써 맹서하노니, 그대는 감히 잊지 못하리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일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아들과 딸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떼와 같으나 부귀가 세세로 창성할 것이로다"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와하는 한 남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새겨진 이 묘지석은 고려때 사망한 여인의 무덤 속에 있었다.
무덤 앞에 세워두는 [묘비]와 [묘비석]은 망자와 함께 묻어둔 것인데, 일반적으로 망자의 일생과 성품,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남편이 써놓은 죽은 아내의 묘비명 : 특히 묘지석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글을 쓴이가 바로 망자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의 묘지석은 모두 100여개, 그 중 여성의 것은 34개가 있다.
이들 중 남편이 직접 글을 쓴 경우는 이 묘지석이 유일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묘지석들과는 달리, 부부관계와 가족관계 등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다 풍부하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부부간의 깊은 사랑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역사스페샬 오늘 이 시간에는 고려여인의 묘지석을 통해 고려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 가족관계를 복원해 놓도록 하겠다.
묘지석의 주인공 여인 : 묘지석의 주인공,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 훼손이 심하지 않아서, 다행히 대부분의 글씨를 알아 볼 수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요 ?
고려시대 금석문을 연구하는 김용선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묘지석을 해석해 보기로 했다. 확인 결과, 묘지석의 주인공은 염경애라는 이름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1145년 병을 얻어 1146년 음력 1월에, 47세로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염경애묘지명에는 가족관계나 여성의 경제적 지위, 역할 등 많은 정보가 있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염경애라는 이름이다.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고려도 여성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의 관료적인 지위에 따라서 군, 대부인, 현, 군과 같은 봉작호를 갖게 되는데, --염경애는 동시에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남편도 묘지를 쓰면서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고 했다.
염경애의 가족관계 : 묘지석을 통해 염경애의 가족관계도 확인해 보면, 먼저 그녀는 최루백의 아내였다.
염경애의 아버지는 대부소경(太府少卿, 종4품=부이사관)을 지낸 염덕방(廉德方),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志義, 1083-1162)다.
또한 염경애는 최루백과의 사이에 자녀가 6명인데, 그들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염경애의 가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족보를 연구하는 '회상사'에서 염이라는 성씨에 관해 알아 보았다. 확인해 본 결과, 국내에 염씨 성의 사람들은 본관이 하나뿐임을 알 수 있었다.
파주염씨대동보(1986) : 850년전에 살았던 여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 파주염씨 가문의 족보에는 고려시대의 조상들도 일부 기록돼 있다.
만약 염경애가 이 가문의 일원이라면, 족보에 그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족보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목을 끄는 이름이 있었다.
파주 염씨 6대조, 덕방(德方)... 바로 이 사람이 우리가 찾는 염경애의 아버지일까 ? 염덕방의 자녀들을 확인했다.
순약(順若).... 신약(信若)이 나오고 경애(瓊愛) !, 분명 우리가 찾던 인물이었다.
여자에 대한 지석이 그의 어머님이나 따님처럼 오랜 시간의 차이를 두고도 발견됐다는 것은 다른 데서는 잘 못 봤으니까 굉장한 것이다.
파주염씨족보에 실린 염경애 가족과 관련된 기록은 어머니 심씨의 묘지석을 통해 확인한 내용들이다.
이 묘지석을 통해 염경애와 그녀의 형제들 이름까지도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염경애 집안의 위치 : 고려사회에서 염경애의 집안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 가족의 사회적 지위는 그것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염덕방이란 분은 태부소경(종4품)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장인이 되는 심후라는 분(덕방의 아내, 의령군 대부인 심지의씨의 부친)은 승선(정3품)을 지냈다는 것을 보면 결혼상대가 되는 집안도 꽤 가세를 이어온 집안이다.
염경애는 바로 이 염덕방의 6남매 중에 한 분이다.
그 중에서 충약(忠若)이라는 분은 충주수령, 신약(信若)은 과거에 급제했고 그래서 이부상서를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즉, 종2품의 재상 벼슬에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의 내용을 볼 때, 염경애의 집안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문벌귀족이나 대귀족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귀족가문으로서의 위치를 이어 간 그런 집안으로 생각된다.
염경애의 성품 : 권세있는 귀족 가문의 여인 염경애, 남편이 쓴 묘지석의 내용을 통해 그녀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묘지석의 글 : "아내는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정숙했으며 자못 문자를 알아 대의에 밝았고, 말씨, 용모, 일솜씨가 여늬 여인보다 뛰어났다.
부녀자의 도리에 부지런히 힘써 나의 돌아가신 어머님을 효성껏 봉양했고, 친척들의 경조사에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묘지명은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이 썼기 때문에 가능하면 아름다운 추억이나 고운 말만 골라 썼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를 고려하더라도 최루백은 23년간 살면서 부인에 대해 못잊을 이야기들을 회고하는데, 시부모에 대한 공양을 이야기...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위해 몸소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스스로 길쌈한 옷으로 제단에 바치기도 하고, 제에 참여한 중들에게 양말을 나눠주는 등 헌신적인 효성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숙하고 현명했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최루백은 매우 상심한다. 그는 슬픔을 글로 써 남기는데, 이것이 묘지석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남편 최루백(崔婁伯)
高麗史 [통권 18권 世18권-02쪽 앞5, 04쪽 뒤3],
[통권 74권 志28권-23쪽 앞3],
[통권 121권 列傳34권-13쪽 뒤9, 14쪽 앞1줄].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함께 묻히지 못함을 통탄했던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
염경애의 묘지석에서 몇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최루백은 아내 사망 1년전, 정6품의 '우사간', '좌사간' 지위에 올랐고, 아내가 죽던 해에 '시어사'로 진급했는데,
재미있게도 그 이듬 해 '예부원외랑'으로 다시 한 단계 좌천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아내의... 빈자리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닐까 ? 묘지석의 내용들을 토대로 남편 최루백을 밝혀 보겠다.
한남 최루백(漢南 崔婁伯)..... :
바로 이 한남이라는 본관이 최루백의 실체를 찾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족보신문에서, 최루백의 본관으로 짐작되는 한남은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한남 최루백... 수주(水州)는 원래 수성(水城), 수주는 수원최씨, 한남(漢南)이 현재 수원(水原) 최씨의 옛 본관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효자 최루백(孝子 崔婁伯) : 수원 최씨 집성촌이 있는 봉담읍, 사도세자 무덤에서 불과 1km 떨어진 이곳은 '효자문골'이라 불린다.
뜻밖에도 수원 최씨 후손들은 최루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원최씨(水原崔氏) 시조가 바로 최루백의 부친이었다.
종손들은 최루백이 요즘세대에선 보기 힘든 효자였고, 효성으로 벼슬을 했다는 것이다. 최루백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효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음 : 최루백이 15살때, 아버지 최상저가 호랑이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다.
원수를 갚겠다며 호랑이를 찾아나선 최루백은 드디어 마을 뒷산에서 쉬고있던 호랑이를 발견해서 가지고 있던 도끼로 호랑이를 죽인 후, 부친의 시신을 되찾아 묻어줬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이 마을의 뒷산에는 최루백이 호랑이를 죽였던 곳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있다.
효암(孝岩), 효자구멍, 효자비 : 15m 남짓한 바위가 현재 효암으로 명명된 것은 조선 후기 정조때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온 정조가 최루백의 효행에 감복해 이름을 내려줬다.
그 동네에는 부녀자들이 효자를 낳아 달라고 만든 구멍인 효자구멍도 있고, 마을 어귀에는 효자비가 있다. 이것은 연산군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시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교과서인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등에도 최루백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같은 흔적들을 통해서, 최루백은 젊었을 때 이미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최루백의 성품 : 최의 성품은 염경애의 묘지석을 통해 몇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직은 대부분이 명예를 중시하는 청요직이었다.
'정언'이니 '사간', '시어사' 벼슬을 지내는데, 그것은 왕에게 정책을 건의하고 왕을 보조하는 벼슬이다.
또 하나 국자사업이나 국자좨주니 하는 교육관의 지위에 있었고, 예부낭중 등의 예를 다루는 직에 근무... 이를 감안해 볼 때 최루백이 예절이 바르고 충성스러우면서도 청렴한 생활을 한 중견 관료로 생각된다.
젊어서는 효성으로 이름을 드높였고, 관리가 된 후에는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던 사람...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글로 남김으로써 이렇게 죽어서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결혼 사연 :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염경애는 개경에서도 권세있는 귀족집안의 딸이고, 남편 최루백은 수원 향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염경애는 자기보다 못한 집안의 아들에게 시집간 셈이 된다. 엄격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던 고려시대에 이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염경애와 최루백, 이들은 과연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던 것일까 ?
고려시대, 지방출신이 귀족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다. 한가지 추정되는 단서는 최루백이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과거급제자인 경우, 장래가 유망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권세있는 집안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본다면,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염경애와 결혼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유학자인 이색의 사례를 통해서도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이 13살에 과거에 합격하자, 개성의 권문세족들이 그를 사위삼기 위해서 결혼 전날까지도 쟁탈전을 벌였다.
이는 과거 급제자에 대한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결혼 풍속도 : 지금도 그런 측면이 남아있지만, 전근대적인 귀족사회인 고려사회에서 결혼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결혼상대자가 누구냐가 그 가문의 사회적 위세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끼리 중첩된 혼인관계인 인연을 통해서 패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했다.
출세를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뿐 아니라 혈연이 매우 중요했던 사회, 그것이 바로 고려 귀족사회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남성의 경우, 자신보다 좋은 가문의 딸을 배필로 맞는 경우도 잦았다.
고려사열전에 나오는 송유인은 원래 돈 많은 상인의 딸에게 장가가서 그 덕에 벼슬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신 집권기가 되자 권력가였던 정중부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버린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처가를 이용한 것이다.
가문과 출세 : 고려시대는 출세하는데 남자의 가문뿐 아니라 아내의 가문도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족보에서도 여성쪽의 기록이 남성과 동등하게 기록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가족제도를 한 마디로 특징을 얘기한다면 남계와 여자계열이 동등하게 기록되어 있고, 동등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남과 여가 분리되지 않고...
구분의식을 가진 것은 성리학 사상이 도입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사회, 친족조직내에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과 딸의 구별이 없었던 만큼, 딸과 결혼한 사위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 가문의 일원으로써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최루백의 경우도, 귀족의 딸인 염경애와의 결혼이 출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혼생활 : 염경애와 최루백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묘지석의 내용을 통해 그들의 살림살이가 그다지 넉넉치 않았던 같다.
관료로서 녹봉과 토지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토지의 경우... 성인 3.6명이 1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받아, 녹봉은 2인이 조금 넘는 양을 받았다.
그러니까 하급관리의 경우는 성인 5명 정도가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하급관리의 생활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묘지석에 따르면, 의복과 식량을 구하는 일은 전적으로 염경애가 맡고 있다. 이를 통해, 가계를 책임자는 아내 염경애의 몫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 길쌈 같은 일이 있겠지만, 그들이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해서 얻어지는 수입은 힘들었을 것이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고려시대는 남녀균분 상속...고려때 여자들이 재산상속을 해서 살림에 보태는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최루백의 경우도, 아내 염경애의 친정에서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아내의 내조를 바탕으로 최루백이 청렴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850년전, 최루백 염경애 부부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최루백의 묘지석 : 염경애가 사망한 후에 최루백은 재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루백의 묘지석의 탁본은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서 알아보기가 쉽지는 않은데, 여기에 매우 놀랄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재취유...삼남..녀, 염경애 외에 유씨라는 여자와 또 결혼을 해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으나, 최루백과 염경애 부부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년후 원의 간섭기에 일부다처제가 나타났다.
최루백과 염경애의 자녀들, 그리고 승려제도 : 묘지석에 따르면, 염경애와 최루백 부부 사이에 첫째 딸 귀강이 남편과 사별한 후에 집에 돌아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딸을 포함해서 모두 여섯 자녀가 있었는데, 또 한 명의 딸은 아직 어리다고 적혀 있다.
4남 2녀 : 그리고 네 명의 아들 중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모두 유학에 뜻을 두어 공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넷째 아들 '단지'는 출가한 걸로 되어 있다(승려가 되었다는 뜻)
넷째 아들 : 그런데...아버지 최루백의 묘지에는 이 '단지'가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부음....' 이것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가했다가 다시 환속해서 벼슬을 했다는 뜻인데... 이 넷째 아들 '단지'는 귀족의 아들이면서 왜 출가를 했던 것이며, 그 뒤엔 다시 환속했던 것일까요 ?
사례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확인 가능한 아들의 숫자는 731명. 그 중 74명이 출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귀족가문의 자제가 출가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교국가 고려 : 고려는 불교국가라는 점,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아들 여럿중 한두 사람의 출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때문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동시에 주어지는 일이었다. 귀족 자제는 물론이고 일반인 중에서도 출가하려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집에 세 아들이 있으면 아들 중에 한 명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출가하는 데 큰 제약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승려가 됐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승과제도 : 고려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과(僧科)를 거쳐야만 했다. 고려시대 승과는 스님들이 치르는 과거시험과도 같은 것으로 합격한 사람에게 승적을 주는 제도였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은 승계와 승직을 받아 불교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즉, 불교 교단내에서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 조직은 관료조직과 매우 흡사했다. 왕이 임명권을 가진 것도 두 조직의 공통점이다. 이것은 고려왕실에서 관료조직과 마찬가지로 불교 교단을 통제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승과를 실시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신진관료를 양성해 정치개혁을 추진한다.
신진세력 양성법이 과거제도 실시였는데, 그와 같은 시기에 신진승려를 양성해서 교단체제를 장악하려는 목적에서 승과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왕실은 한쪽으로는 행정조직을, 다른 한 쪽으로는 불교 교단을 이용해 중앙집권 통치를 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 합격자에게 관직과 토지를 부여했다. 승려 신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과거 합격자와 다름 없었던 것이다.
방송 기본 세트 : 오늘 우리는, 한 장의 묘지석을 통해 12세기에 살았던 고려귀족들의 전형적인 삶과 죽음의 통과의례를 엿볼 수 있었다.
귀족가문의 일원이었던 염경애와 최루백 부부의 가족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85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한 장의 묘지석 때문에 가능한 일이이었다.
기록에 조차 남겨져있지 않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비밀의 문, 바로 그것이 고려시대의 묘지석인 것이다.
850년전, 고려의 귀족이었던 염경애는 남편의 애절한 사랑이 새겨진 묘지명과 함께 땅속에 묻혔고..... 곁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름 석자 온전히 남긴 고려여인 염경애
(서울=연합뉴스 2004.10.19) 이봉석 기자
서기 1146년(고려 인종 24년) 정월. 최루백(崔婁伯)이라는 사내가 여성의 시신 하나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낸다.
죽은 사람은 바로 최루백의 아내 염경애(廉瓊愛.1100-1146). ''고려여인의 귀감''으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고, 고려시대에 드물게 이름 석자를 온전히 남긴 여성이었다.
''염경애''라는 이름이 후세까지 알려진 데는 남편 최루백의 공이 컸다.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를 애통해하던 최루백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던 당시관례와 달리 자신이 직접 묘지명(墓誌銘)을 짓기로 마음 먹는다.
그래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묘지명에는 당시 여성의 묘지명에 대한 일반적인 표기법이었던 ''봉성(현재의 파주)현군 염씨''가 아닌 ''염경애''라는 이름석자가 새겨진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묘지명 100여개 가운데 여성의 것은 34개가 있는데! ,남편이 직접 글을 쓴 것은 이 묘지명이 유일하고, 여성의 이름이 온전히 드러나있는묘지명 역시 드물다.
염경애의 행실이 어땠길래 최루백의 사랑은 이토록 애절했을까? 최루백은 묘지명에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했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했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는데, 그대를 결코 잊지 못하노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애통하도다"라고 적고있다.
최루백은 1145년 정7품에서 정6품으로 승진했는데, 최루백에게는 집안살림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자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가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최루백은 관직생활 대부분을 정7품 이하의 하급관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집안환경은 넉넉지 못했고, 염경애는 밤낮으로 길쌈과 품앗이 등을 하며 가족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써야했다.
염경애는 다른 역사적 위인들에 비해 평범하게 살다갔지만 치열했던 삶이 남편에게 깊은 감동을 줘 역사 속에 남게된 것이다.
염경애는 1999년 6월 KBS 역사스페셜에 그녀의 생애가 소개되면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정해은 성공회대 강사는 최근 발간된 격월간 불교포교지 ''우바이예찬''에서 그녀를 ''온전하게 이름 석 자를 남긴 고려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경기도 향토사연구협의회는 오는 20일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고려 여성 염경애 재조명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심포지엄에서는 ''고려가족에서 여성의 위상과 역할''(허흥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연구원),
''고려여성 염경애의 삶과 생활''(권순형 이화여대 교수), ''고려시대 묘지명과 여성 관련자료의 확대''(이정란 고려대 교수) 등 논문이 발표된다.
고려시대 개경 여인 '염경애'
오영선(국립중앙박물관)
한국역사연구회(http://www.koreanhistory.org/)에서
여자가 이름을 갖는다는 것
최근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을 남녀차별 문제가 해소되는 의미 있는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의 목소리도 있지만, 신라시대 세 명의 여왕이 나온 이래 여성으로서는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직책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그 상징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공직사회에 취임하여 공적인 업무를 보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부분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대부분 남성의 역할을 보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국가가 성립된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신라시대 3명의 여왕이 등장했던 것은 그것이 '국왕(國王)'이라고 하는 특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딸로서,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아내로서,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어머니로서 존재하였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독자적인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고려시대에도 "나라의 풍속에 따라 (여자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자의 이름은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실제 고려시대 여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경우는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봉성현군 염씨'인가, '염경애'인가
1148년(의종 2) 예부낭중 최루백은 2년 전에 죽은 아내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한 23년의 세월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묘지명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최루백은 자신이 직접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아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죽은 아내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통 6년 병인(1146년)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의 처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 염덕방의 딸이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다.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받들었다.
--- 내가 고을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거리끼지 않고 함께 천리 길을 가고,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는 가난하고 추운 방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주었으니,
---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 간의 일들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최루백은 아내의 묘지명에다 둘이 함께 한 23년의 세월을 그리워하면서 아내의 이름을 적었다. 다른 사람이 묘지명을 지었다면 분명히 "봉성현군 염씨"라고만 적었을 것이었다.
최루백에게 있어 자신의 아내는 단지 '봉성현군 염씨'가 아닌 '염경애'였던 것이다. 최루백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아내의 묘지명을 끝맺었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노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 딸 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장가를 갈까, 시집을 갈까
현재 우리나라는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丈家)' 즉 '장인의 집'에 간다고 하고,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시집' 즉 '시부모가 있는 집'에 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시집'과 '장가'를 간다면 둘은 영원히 따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남자가 '장가'를 가든, 여자가 '시집'을 가든 한 가지만 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시집가는 날'이라는 영화 제목도 있듯이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자는 혼인식을 치르기 위해 '장가'에 갔다가 3일 정도 머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장가'는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려시대에는 남자가 '장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혼인식 역시 보통 여자의 집에서 치렀고, 이후 한동안 신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길렀다.
따라서 자식들 상당수는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혼인을 하면 남자가 처가로 갑니다.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존하니, 장인, 장모의 은혜가 부모와 같습니다"(이규보),
“고려의 풍속은 아들과는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딸은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니, 무릇 부모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주관합니다”(이곡) 등의 말이 빈 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권리, 같은 의무
고려시대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3-4명의 자녀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불교가 정서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적었으므로 남아선호사상이 통하지 않았다.
사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조선시대와 같이 조상의 제사를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에도 굳이 아들만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딸들도 돌아가며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권리, 의무상에 있어서 고려시대에는 아들, 딸 간의 차별이 크지 않았다. 우선 재산이 아들과 딸 구분 없이 균등하게 상속되었다.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받았으므로 의무도 균등하게 주어졌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부모를 모시는 것은 아들과 며느리뿐 아니라, 딸과 사위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의무였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다. 부모가 죽고 난 뒤 지내는 제사 역시 아들 딸 뿐만 아니라 딸들도 돌아가며 모셨다.
여성에게 재산이 균등하게 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번 정해진 여자의 재산은 결혼 후에도 따로 구분되어 보호받았다.
여자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노비 역시 남편 밑으로 넘어가지 않고,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있었다.
여자가 재산을 물려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그녀의 재산은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혼을 할 경우에도 여자는 당연히 자신의 재산을 다 챙겨서 나갈 수 있었다.
이혼과 재혼, 그리고 수절
상대적으로 평등하였던 부부관계에서는 이혼도 그만큼 잦을 수밖에 없었다. 남녀의 애정에 문제가 생기면 억지로 참고 사는 것보다 이혼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를 보고 "고려인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조롱하였으나,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평가가 오히려 가소로울 것이다.
이혼은 재혼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다. 고려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고 수절을 강요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고려 여성의 재혼에 큰 제약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자(義子)가 있다.
의자는 재혼한 여성이 전 남편에게서 낳은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사회 진출에 있어서 거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왕의 부인 중에도 재혼녀가 있었다. 충숙왕의 다섯 번째 왕비인 수빈 권씨는 원래 전형이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는데, 충숙왕이 이혼시키고 결혼하였다.
충렬왕의 세 번째 부인인 숙창원비도 과부였다. 충선왕의 후비인 순비 허씨는 이전 남편에게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충선왕가 결혼한 후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았다.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시키자는 주장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때에 비로소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일반 여성의 재혼을 금지시키자는 것은 아니었고, 6품 이상 관리의 아내에 대해서 재혼을 제약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이것은 여자의 재혼 금지보다는 수절의 장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과전법을 시행하면서 '수신전(守信田)'이라는 명목으로
남편이 사망한 후 재혼하지 않고 수절(守節)하는 여성에게 반대급부를 제시하였지만, 얼마나 효과를 보았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보편화되었던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시대의 남녀관계는 상대적으로 평등하였다.
그렇다고 고려시대에 현대 사회와 같은 평등사회, 적어도 평등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에 비해 이혼과 재혼은 자유로웠지만,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많았다.
재혼의 경우도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 남성의 재혼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여성의 재혼은 선택이었다.
조선시대와 같은 법적인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개경에 살고 있던 고위 관리의 아내에게 재혼은 그다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현대사회는 법적으로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한다. 이는 사회 관계에 있어서나, 가족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얼마 전 부부관계에 있어 ‘(여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논란이 되었을 정도로, 실제 평등한 관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수십 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한 이혼도 아직까지 남성의 이혼은 적극적인 데 비해, 여성의 이혼은 소극적인 선택의 경우가 많다.
염경애를 잊지 못하겠노라고 믿음으로 맹세했던 최루백은 그 후 재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그와 비슷한 경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배우자와의 사별 후 자신의 행복을 찾아 새로운 배우자를 찾는 것은 당연한 법적 권리이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도 여성이 당연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
고려사회에서 그것이 당연한 법적 권리로 인정되었는지는 않았다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가 변화하는 한 단면을 되새겨 보게 하고 있다.
온전하게 이름 석 자를 남긴 고려 여성 염경애
(정해은 / 성공회대 강사)
남편이 묘지(墓誌)를 쓰다
서기 1146년(인종24) 정월, 최루백(崔婁伯)은 아내 염경애(廉瓊愛, 1100~1146)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고생만 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과 연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염경애는 남편 최루백이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승진한 기쁨을 누린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1145년 9월에 병을 얻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생활고에서 조금 벗어나는가 싶더니 병을 얻은 지 4개월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최루백은 애절한 마음으로 묘지(墓誌)를 지어 무덤에 묻으면서 죽은 아내에게 자신의 슬픔을 전했다.
염경애. 이 여성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남편이 지은 이 묘지 때문이다. 묘지는 죽은 자를 추념하는 뜻에서 그 일생을 기록해 무덤 속에 묻는 석판이나 또는 거기에 새긴 글로서, 고려시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염경애 묘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려의 묘지석은 100여 개이며, 이 가운데 34개 정도가 여성의 것이다.
특히 그이의 묘지는 남편이 직접 글을 지었다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끈다. 대체 그 속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일까?
이 묘지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부분은 ‘염경애’라는 이름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묘지를 살펴보면 ‘낙랑군 부인 김씨 묘지’나 ‘이자원의 딸 이씨 묘지’ 등, 여성은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름 대신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봉작호를 사용하거나, 아버지 이름을 빌려 여성의 존재를 나타냈다. 하지만 최루백이 묘지에다 “아내 이름은 경애다.”라고 밝힘으로써, 그이는 고려 여성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전한 아주 드문 여성이 되었다.
향리 집안과 혼인한 귀족의 딸
염경애는 아버지 염덕방(廉德方)과 어머니 의령군 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그이 집안은 명문은 아니나 개성의 귀족 가문이었다. 최루백의 회고에 따르면, 그이는 사람됨이 정숙하고 자못 문자를 알아
대의에 밝았다고 한다. 염경애 묘지를 남편이 썼으므로 그 행실이 미화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 묘지에 문자를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염경애는 25세의 늦은 나이에 최루백과 혼인했다.
시가는 대대로 수원 지방의 향리를 지냈으며, 시아버지 최상저도 호장(戶長)이었다.
고려시대 향리는 토착 기반이 강한 세력이며, 호장은 향리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개성 귀족이 지방의 향리 가문과 혼인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고려시대는 귀족들이 통치하는 사회로서 귀족간의 중첩된 혼인을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최루백이 염경애와 혼인한 것은 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장래가 유망했기 때문이다.
일하는 여성으로 살다
최루백 집안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또 최루백은 염경애가 죽기 한 해 전인 1145년 초까지 정7품의 하급 관리로 있었다.
이때 염경애의 나이는 46세였다. 25세에 혼인했으니 결혼한 지 20년이 넘도록 염경애는 가족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그러나 당시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 길쌈이나 품앗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최루백은 어려운 생활을 같이한 23년 동안의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 슬퍼했다.
노동에 지친 염경애는 때때로 글만 읽는 자식들이 야속하기도 하였다.
자식들이 글만 읽고 일하지 않는 것을 숭상합니다. 나는 집안살림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의식(衣食)을 맡아 힘써 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 내가 죽은 뒤 자식들이 많은 녹을 받아 무엇이든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어미를 재간이 없다 여기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고생한 일을 잊지 않겠습니까?
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염경애 나이 46세 되던 봄, 최루백은 정6품의 우정언지제고로 승진했다. 염경애는 이제 살림이 조금 나아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이에 남편이 “직언하는 직책이지 녹만 먹는 자리가 아니다.” 하며 핀잔을 주자,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전각의 섬돌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다툰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간다 해도 기쁘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최루백은 이 일화를 염경애의 부덕을 기리기 위해 묘지에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염경애 자신이 지금껏 남편의 출세나 바라면서 살지 않았으며, 자신도 신하의 도리가 무엇인지 안다는 항변으로 읽힌다.
염경애가 죽은 뒤 남편은 재혼해서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그리고 한때 좌천도 당했지만 승진을 거듭했다.
버선을 지어 절에 시주하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종교이자 생활이었다. 생활이 여유가 있는 귀족 여성은 아침에 일어나 불경을 외고 낮에 길쌈을 하다가,
밤이 되면 불경 읽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다고 할 정도였다.
가정에서는 불경을 독송하며 불심을 닦았고, 밖으로는 시주 활동을 통해 신앙심을 실천했다.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면서 불교에 깊이 귀의한 염경애는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절에 물품을 시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재(齋)가 있는 날이면 정성껏 버선을 지어 절에 시주했다.
또한 슬하의 4남 2녀 가운데 넷째 아들 최단지(崔端智)를 출가시키기도 했다.
당시에는 불심이 강한 어머니가 아들을 출가시키는 일은 종종 있었다. 최단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환속해서 관직에 나갔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이의 신심은 장례 절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염경애 장례는 불교의례로 치러졌다.
1월에 집에서 죽은 뒤 그이의 시신은 순천원에 안치되었고, 2월에 화장해서 뼈를 청량사에 두었다가 3년 뒤에 장사지낸 것이다.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시신이 개경에 있는 친정아버지 묘 옆에 묻혔다는 점이다. 귀족의 신분으로 개경에 묻힌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가족 제도가 여성을 출가외인이 아닌 친정 쪽의 가족 구성원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하지만 역사에 남은 여성
염경애. 죽은 뒤 850여 년이 넘은 오늘날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남편이 쓴 묘지 덕분이다.
그 삶을 돌이켜보면 특별한 사항은 별로 없다. 다른 여성의 묘지에서도 그이처럼 살다간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염경애의 삶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물러서지 않고, 평범하지만 치열하게 살다갔기 때문이다.
그 치열한 삶이 남편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그이의 생애를 기록하게 했으며,
우리는 그 묘지를 보면서 한 평범한 인간이 역사 속에 어떻게 남았는지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