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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 4 - 데라다야에서 모모야마 후시미성에 올라 강항이 본 후시미성을 생각하다!
2019년 4월 9일 교토 키요미즈고조역 에서 케이한혼센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 中書島 역에서
내려 우지센(京阪 宇治線) 으로 환승해 우지(宇治)시 에 도착해 우지바시 宇治橋 다리를
건너서 뵤도인 (平等院) 절을 구경하고는 강변을 걸어 내려가서 "윤동주 시비" 에 참배 합니다.
걸어서 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우지상신사) 와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
(원씨물어박물관) 을 구경하고는 케이한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 中書島 역에 내려서
마을을 통과해 벚꽃이 만발한 강변 에서 사케 를 실어나르던 옛스런 나룻배 를 구경합니다.
마을에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 (月桂冠 월계관) 을 찾아 사케 석잔 을 받아 마시고는
산짓코쿠부네선착장 三十石舟 船着場 옆에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가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는 데라다야 寺田屋(사전옥) 여관을 찾아서 료마의 자취 를 회상해 봅니다.
그러고는 데라다야 寺田屋(사전옥) 를 나와 후시미 거리 를 걸으니 상가가 동서남북으로
엄청 큰데..... 지붕이 씌운 아케이드 에서 여러 가게를 구경하며 후시미 지도 를
들고는 20여분을 걸으니 드디어 큰 도로가 나오고 케이한 본선 후시미 모모야마역 입니다.
대로를 건너니 맞은편에 역은 킨테츠선 모모야마고료마에역 인데 데라다야를 출발한지
25분 정도가 지났지만..... 우리 앞에는 언덕길 이 펼쳐지는데 지도상으로 보니
후시미 모모야마성 은 여기서도 한참 더 가야하는데 문제는 산을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서 일본은 좌측통행 이라 길을 건너가 역 앞에 대기한 택시 에 오르는데.....
마눌은 비싼 한식집이나 레스토랑이며 택시 타는 것을 싫어하니 오늘도 걸으면 안되겠느냐
라며 거부 반응 을 보입니다? 물정도 모르면서 조금만 더 걸으면 성이 나올것 처럼
기대를 하는데...... 재촉해 억지로 택시에 오르니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왼쪽 길로
접어들어 S자를 그리며 산을 오르는데...... 그럼 성은 산 봉우리 에 세워져 있는 모양 입니다.
택시비는 610엔 밖에 안나왔지만 우리가 걸어서 산을 올랐으면 한시간은 걸렸지 싶은데....
그럼 무릎이 좋지 않아 오르막 길은 쥐약인 마눌은 중도에 퍼지면서 혼자 갔다 오라고
말했을 것이고 이나리진자도 포기해야 할판 입니다. 후시미모모야마성 (伏見桃山城
복견도산성) 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지었다는 화려한 건물이니 보기에는 근사 한데.....
성은 무너진후 엔터테인먼트 기업 에서 재건한 건축물로 영화나 CF 촬영 등에 쓰일뿐 입장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시대 구분에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 라는게 있으니....
통상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1573년
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 에도 막부 (江戶幕府)를 수립한 1603년 까지를 이릅니다.
통일의 초석을 쌓은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가 비와호수 아즈치성(安土城) 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만년(晩年) 의 거처지가 바로 여기 교토(京都)
모모야마(桃山) 후시미성(伏見城) 이었으므로.... 그러한 명칭 이 붙었다고 합니다.
여기 후시미 모모야마성 伏見桃山城 은 16세기 이름은 후시미성 (伏見城) 인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은거후 거처 로 삼기 위하여... 우지강 연안 낮은 구릉인
시즈키산(指月山) 에 주라쿠다이의 건물을 이축 하는 등의 방식으로 축성했으나
1596년 발생한 지진으로 성이 무너지자 500m 떨어진 고하타산(木幡山)에 새로 축성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이 성에서 임진왜란 말기인 1598년에 사망 하였고
후시미성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 이라 할 후시미성
전투로 소실 되었다가 이듬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재건 되었습니다.
이후 에도 막부의 쇼군 선하(宣下) 의식의 장소 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오사카 전투후
그 역할이 오사카성으로 옮겨 가면서 중요성이 덜해졌으며.... 결국 후시미 성은
이에야스 가 에도에서 시즈오카의 슨푸성(시즈오카성) 으로 은거한 1625년에 폐성 됩니다.
그후 성곽 일대는 꽃밭으로 개간 되었는데 그 이름을 모모야마(桃山) 라고 했기
때문에 모모야마성이 후시미성의 다른 이름 이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
모모야마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모모야마 문화 등의 말이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는 57세 되던 1593년 측실 요도기미에게서 히데요리 가 태어는데 나이가 많은지라
그전에 히데요시는 누나의 아들 조카 히데쓰구(豊臣秀次)를 자신의 후계자 로 낙점해
간파쿠(関白)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친자가 태어나니 장래가 걱정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환 을 없애기 위해 1595년 7월 히데쓰구의 간파쿠 직책을 박탈 하고 할복 시킨 뒤
처자 또한 몰살 하였으며... 다이묘들로 부터 히데요리에게 충성 을 다짐하는
혈판 서약서 를 쓸 것을 강요해서는 히데요리의 후계자 지위 를 확립시킨후
여기 후시미성(伏見城) 이 완공되자 바로 부자는 함께 이 궁전으로 거처 를 옮깁니다.
이후 정유재란 이 일어나니 일본에 성리학 을 전해주게 되는“간양록 (看羊錄)” 의 저자
조선 선비 강항(姜沆) 은 1597년 포로 로 잡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히데요시
사후 에 일본인 승려를 따라 직접 후시미성 에 몰래 들어가볼 기회 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귀환후 임금 선조에게 올린 간양록(看羊錄) 에서 자신이 본 후시미성 의 모습
에 대해..... "다섯 걸음 마다 절 이 하나씩 있고 열 걸음 마다 누각 이
하나씩 있는데, 이리저리 이어져 있어 어느 길을 따라 나가야 할지를 모를 정도다."
"귀신이 재목을 가져다 돕는다 해도 1, 2년 정도로는 공사를 마치지 못할텐데 이걸
1년이 못 되어 다 지었다니.... 왜놈들이 얼마나 제 백성을 혹사 시켰는지
왜인들이 얼마나 힘을 쏟아 일했을지를 족히 상상하고도 남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강항(姜沆) 은 임진왜란이 수년간 종전협상으로 멈추자 모친병환으로 형조좌랑 직에서
휴가를 얻어 영광으로 내려왔다가 휴전 4년만인 1597년 정유재란 이 일어나자
군량 조달 을 맡았는데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가 점령 되니 고향 영광 으로 돌아 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부터 1593년 까지 이어진 전쟁으로 명나라와 일본간에 휴전하고는
화평교섭을 하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일어난게 정유재란 인데, 국사편찬위 자료를
보면 병력수는 왜군 14만명에, 명군 11만 7천, 조선군 3만 8천 이었다는데 전쟁
당사국인 조선의 병력수가 가장 적은 것은 전란으로 조선 강토가 피폐해진 탓 입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북진하자 황석산성에 조선군 5백, 남원성에는 조선군 1천 과
명군 3천 이 수비했고 전주는 명군 2천과 조선군 500 그리고 충주에 명군 4천
등이 있었지만 그외 조선군 1000명 을 합해도 명군 9천과 조선군 3천 등 도합 1만
2천 정도로는 왜군 12만 을 저지할수 없으니 왜군은 충청도 천안을 넘어 북진 합니다.
강항 은 영광에서 의병 수백 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 앞에 흩어졌고 영광도 왜군에 유린
당하니 식솔 60명이 2척 배 에 나누어 타고 이순신 장군의 진영 을 찾아가지만....
명량해전 승리 7일 후인 1597년 9월 23일 우수영을 돌아 멀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계인 영광까지 북상해온 왜군 배에 사로잡혀 무안과 순천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 갑니다.
이순신 장군 은 9월 16일 명량해전 에서 13척으로 왜선 31척을 부수는 승리 를 했으나
당일 바로 후퇴하니, 조선 백성들이 기다리는 우수영에는 들러지도 못하고 당사도 를
거쳐 멀리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로 후퇴 하는데... 왜군은 아직 300척 이 남았으니
일부가 진도 바깥 바다로 우회하면 포위당해 조선 수군이 전멸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 왜군은 다음날 바로 진격해 와서는 우수영
과 진도를 초토화 시키고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쫓아 영광 까지 북진 하며 백성들을
살육하고 방화하니 전라도 해안은 아비규환 지옥 으로 변하는데... 살육의 광풍 이
지나간 후에는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포로로 잡아 끌고가니 강항일행등 수만명 에 달합니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조선 내륙에는 포장도로 가 없는데다가 의병으로 보급 이 안되고
명군의 참전 에 겨울철 혹독한 추위 로 고생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는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에 26개 왜성 을 쌓고 늦봄이면 출격해 경상, 충청,
전라 3도 를 휩쓸고는 늦은 가을 남해안 왜성으로 돌아와 휴식 하며 겨울을 납니다.
이렇게 몇년만 되풀이 하면 이미 쇠퇴해 가던중이라 제 코가 석자 인 멀리서 온 명나라 는
철수 할 것이고... 고립된 조선 은 전국토가 피폐해져 더 버틸힘을 소진 하고는 화의에
임할수 밖에 없게되면 경상, 충청, 전라 하삼도를 얻을수 있다며 장기전 으로 들어가니
9명 장수가 조선 8도와 서울을 하나씩 나누어 점령했던 임진왜란과는 전쟁 목표 가 다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2일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 하라 명하니 충청도 직산 까지
북상해 조선군이 도주한 가운데 명군 기병 4천을 격파했던 모리등 왜군 4만이 물러가고
영광까지 이순신을 뒤쫓아 추격해 올라갔던 왜 수군도 순천과 여수로 물러 가는데 왜군은
처음부터 서울로 진격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한양에서는 피난 가느라 난리 가 벌어졌던 것이라?
이순신 장군은 왜적이 물러간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우수영에 돌아온 날은 후퇴
한지 24일째인 10월 9일 로 성 안팎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으니
영화 명량 에서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비통한 심정으로 안편도 로 물러나 왜군이 여수 서쪽에 없음을 보고 목포 고하도 로 갑니다.
명량해전 에 대해 교과서와 인터넷 지식백과며 연속극 및 "영화 명량" 등에 보면 왜선 31척
을 격파하니 왜수군은 패해 도망치는지라 바다를 지켜 냈으며, 조선 수군이 제해권
을 차지했으니 백성들은 안전해 졌고,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 했으며 충청도 직산까지
올라와 서울을 위협했던 왜군이 서해바다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물러갔다고 말합니다.
기록 은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후 4시 명량해전 대승에서 멈추고 13개월후 노량해전으로
넘어 가는데, 전라도 바다에는 얼씬도 못한줄 알고있는 왜 수군은 다음날 다시 쳐들어와
우수영과 목포를 점령하고 이순신의 행방을 추격해 영광 까지 북상해 전라도 해안의 조선
백성들을 무참히 살륙하고 방화하며 아수라 지옥 으로 만든 일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뭅니다?
10명 장수가 이끄는 왜군 14만 중에 모리와 구로다 2명의 장수가 인솔한 4만이 천안 까지
북상할때 저항한 조선군은 1천 5백 뿐이고 나머지는 도주하니 명나라 파새와 해생의
4천 기병 이 9월 7일 직산 에서 하루 싸우고는 수원으로 물러났고... 승리한 왜군은
3~4일 약탈후 9월 12일 물러 갔는데, 그보다 4일후인 9월 16일 벌어진 명량해전 패배
때문에 바닷길이 막혀 물러 갔다니요? 왜군은 10월 2일 까지 남해안 성채 로 물러 갑니다.
"영화 명량" 에 배설이 왜군과 짜고 거북선 을 불태우는데 배설은 도망갔으니 현장에 없었고
거북선 역시 없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배에 왜군이 올라와 수십분간 백병전 이 이어지고
부숴진 배를 백성들이 나룻배를 타고 밧줄로 끄는데 모두 사실이 아니며, 안위 장군의
배가 2~3척 왜선에 둘러쌓인게 전부인데... 왜선 31척을 격파할 때 조선군 배는 피해가
전혀 없고 전사 2명에 부상 3명 이 전부이니 원거리에서 대포로 적선을 격침한 전투 입니다!
일본 조총의 사정거리는 100미터 인데 비해 조선대포는 800미터이니 300미터에서 포격 했다는?
명량해전 승리 7일후 영광 앞 바다에서 나포된 강항등 조선인 포로들은 시코쿠섬 에히메현
이요국 오즈 로 끌려가는데 강항을 잡은 왜군 은 9월 16일 명량해전에 참가한 왜적 이니
도도 다카토라의 휘하 로..... 시코쿠섬 이요(伊豫)국 오즈 (大洲 에히메현 오즈시) 성주
사도(佐渡) 의 부하 노부시치로 (信七郞) 였으니 도망쳤다는(?) 왜군이 북상 했다 는 말이라?
1598년 6월 강항 은 에히메현 오즈 에서 교토 후시미성 으로 이송되었는데 이안 과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 등에게 성리학 을 가르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 는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석을 주고자 했으나 받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강항 이 주자(朱子)의 주석에 따라 훈점 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은
다지마 성주가 재정을 후원 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 합니다.
이 책은 일본 최초의 성리학 저서 로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 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 이 된 이후 4대 쇼군까지 시강합니다
책이 출판된후 후지와라 세이카 는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에게 청원해 강항
일행의 통행증명서 를 발급 받게 해주고 여행 비용 까지 대주니... 4월 2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와 사공등 38명은 바로 이곳 교토 후시미성을 출발 하는데
일본인들이 사공을 붙여 대마도 까지 인도해 주어 1600년 5월 부산 으로 돌아옵니다.
임금 선조 를 만나고 경과를 적어 올리는 책을 지으니...... “간양록 (看羊錄)” 인데
조용필 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 주제가" 입니다.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저 아카마쓰 히로미치 는 주고쿠를 공략하러 온 히데요시에게 저항 하다가 항복
후에는 전공을 세워 다지마 다케다성 (효고현 북부 ) 2만 2천석의 성주 가
되었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및 임진왜란 등에도 참전하였는데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의 가르침 을 받는등 문학자적 일면 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항은 간양록 에서 "일본의 무장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마음' 을 지녔으며 공자묘 를
세우고 3년상 을 치르며 중국의 제도와 조선의 예법 을 착실히 따랐으며 조선선비
들에게 유교 경전의 필사를 요청하고 옷과 음식 마저도 조선을 본뜨려고 했으며,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 책 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고 간양록 에 적었습니다.
첫댓글 임진왜란에 대해서 자세히 잘 배웟습니다.
전쟁은 물자군요.물자보급이 않되면 물러날수밖에 없는군요.
간양록 예전에 드라마도 햇었죠?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요?
예외가 있다면 투르크족과 몽골족 정도안데.....
저들은 기병이라 진퇴가 빨랐지요?
농경민족 보병 군대는 보급과 돈이 성패를 죄우합니다!
네 그런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