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6일 화요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는 말씀에 따른 것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이다. 이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에서 사십 일 앞서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사십 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보편 전례력에 이 축일을 받아들였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연로하신 분이 옥좌에 앉으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옷이 새하얗게 빛난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복음).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혀 줍니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께서 본래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장차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셔도,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마르 9,9) 이 변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겪는 이들의 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의 시점에서 다시 복음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수난받으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수난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전능하신 분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셔야 하였는지 인간의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모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이를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이야기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난 그 순간에, 그분의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의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께서 오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표지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들의 증언이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원판 불변의 법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생토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평생토록 같은 고백성사를 보고 있는 저 자신, 그리고 죽어도 안 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사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 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무기도, 용도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3가지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영성을 닦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체력을 키웁니다.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도 신심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능력과 신심이 좋지만, 건강 때문에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모른다면 나비가 원래는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생이 사제가 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본당으로 파견되어 사목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됩니다.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배식을 받습니다. 버스에 탈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1인실을 사용합니다. 사제이기에 존중받고, 사제이기에 존중받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존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가 있었음을 망각하듯이, 왜 사제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 바리사이의 자만과 율법 학자의 교만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어가고 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이 났고, 옷은 새하얗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곳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하나는 주님을 위한 천막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무기가 용이 되는 성공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성품성사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걷는 표징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다만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다만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
지니신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
이루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
베푸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호르미스다 (Hormisdas)
활동년도 : +523년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호르미스다스
이탈리아 중부 프로시노네(Frosinone)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호르미스다는 결혼한 지 얼마 후에 아내를 잃고 홀로 되었으나, 514년에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그는 로마(Roma)에서 교황 성 심마쿠스의 부제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교황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 하다. 그의 재임 기간에 가장 돋보이는 일은 아카키우스(Acacius) 이단을 소멸시킨 것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로마와 재결합한 것은 아카키우스를 공식으로 단죄하고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이구동성으로 선언한 소위 ‘호르미스다 신앙 고백문’의 결과였다.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2세(Joannes II)을 비롯하여 동방 주교 약 250명이 그 당시에 서명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와 수위권에 대한 획기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세기를 통하여 이 요구를 구체화시킬 때마다 인용되어 왔다. 또 그의 재임 초기에는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이단을 교회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난 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은 후에 교황이 된 성 실베리우스(Silverius, 6월 20일)이다.
성 유스토 (Justus)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소년,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성 파스토르 (Pastor)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소년,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빠스또르, 빠스똘, 파스또르, 파스톨
성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와 성 파스토르(Pastor)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학생이었다. 박해자들이 지금의 에스파냐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다닐 때, 성 유스투스와 성 파스토르는 그곳의 초급학교에서 기초 과목을 배우는 어린이였다. 이 두 소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하여튼 그 지방 관리에게 가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판관은 그들을 겁주려고 무서운 형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하였고, 그로인해 결국 모진 채찍질을 당하고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