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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낙동강 3차 이후 우리땅 정기 투어에서 같이 걸은 지가 벌써 반년이 넘은 듯하여, 이번 모악산 마실길에는 꼭 같이하려고 계획하고 8일 전주에 도착하여 집결장소나 알아볼까하고 카페에 들어가보니, 인원 미달로 취소 되었다한다. 낭패스러웠다. 모처럼 마음먹고 준비한 투어인데 1박2일의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모악산 마실길이 아니면 모악산 등반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먹고 다음날 토요일 여장을 꾸리다 선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고향의 산자락을 걸어가는 것인데, 혼자라도 해보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간단히 코스라도 지도를 받고 싶어서 신정일 선생께 전화를 드렸더니,
“우리집으로 오세요. 서울에서 몇분이 출발하여 고속버스로 오고 있습니다. 열시 사십분이면 도착할 겁니다.”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다. 왠 떡이냐! 횡재한 기분이었다.
혹시나 늦을까하고 짐을 서둘러 챙겨가지고 호반촌 집을 나섰다.
진북동 우성아파트에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택시를 내려서서 열 발자국 쯤 떼었을 때 습관적으로 호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지갑이 없다. 택시가 꽁무니를 보이고 가는 시점이었다. 혹시 배낭을 들고 오다 중간에 떨어뜨렸나하고 택시에 내린 자리에 확인을 해보니 없고 그 사이 택시는 사라져 버렸다.
내가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갑이라는 것을 소지한 이후로 처음, 지갑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앞자리에 앉았었고, 개인택시 기사의 인상이 좋아 보여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일순간 가져보았지만 난망한 일이었다. 신샘댁에 올라가보니, 덕진동 연립에 사실 때 보다는 집이 훨씬 넓고 넉넉하다. 만권을 책을 읽고, 천하를 주유하였다는 선비의 풍모가 느낀다. 서가에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방마다 서향이 가득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마자 경황도 없이 교통방송과 개인택시 조합 등으로 전화를 걸어 부산을 떨고, 열한시가 좀 넘어서 서울회원들이 도착하였다. 일곱분이 오셨다. 언제 보아도 반가운 얼굴들이다.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전주비빔밥의 명가 가족회관으로 향하였다. 전주시 중앙동에 위치한 가족회관, 삼십년 전만해도 여기가 전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현재의 가족회관 자리에는 전주에서 가장 규모가 컸었던 풍남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었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였던 풍년제과소가 길 건너에 있었고, 한불럭 더가면 전북은행본점 건물과 그 사거리 중앙에 거대한 아치형의 네온사인 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원에서 세운 광고용 탑이었다. 그 당시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 사거리가 미원 탑 사거리로 불리워졌다. 전주에서 가장 번잡한 거리였었다. 지금은 신도심으로 상권이 옮겨져 옛날의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다. 미원 탑이 철거된지는 오래전이고, 젊은이들이 살지 않아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한국 바둑의 명인 이창호 부친이 운영하고 있는 이시계점 만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오늘 기행의 시점인 탑선 마을로 향하였다. 모악산은 김제시 금산면과 전주시 중인동,완주군 구이면에 걸쳤있는 해발 793미터이고, 전북 평야지방의 주산이다. 모악산은 기암절벽이 있다던지,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든지 하는 특징적은 산은 아니지만, 어미母자 모악산 답게, 김만경 너른 평야를 산자락에 안고 있는 편안한 산이다. 계곡마다, 산 자락마다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얽혀져있는 신령스러운 어머니 산이다.
구이면에서 섬진강 운암댐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그 동안 모악산을 많이 다녀봤지만 처음가는 길이다. 시내버스 종점에서 차를 내리니 탑선마을이다.
눈이 수북이 쌓여 산길이 많이 미끄럽겠다. 여기저기서 아이젠을 꺼낸다. 아침에 서둘러 오는 바람에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해서 몸으로 때우리라 생각하던 참에, 서울에서 온 여성회원 한분이 선뜻 한쪽을 쓰라고 건네주신다. 고맙고 고마웠다. 우리땅에서나 볼 수 있는 뜨거운 동지애이다.
내 머쓱함을 덜어주려는 듯 “내가 얼마전에 관악산에 가서 이렇게 도움을 받았거든요. 눈길에 한짝만 신어도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13;00 탑선마을에서 배재로 향한다. 눈길위에 발자국을 따라간다. 모악산 등산객들이 자주 찾지 않는 등산로인 듯하다. 발자국이 가다 없어져 짐승발자국이 대신하기도 하고, 산속의 오솔길은 사람이 다니는 인도와 짐승이 다니는 길이 따로 구분이 없다. 사람이 다니기 편한 길이라면 짐승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렇게 확실한 길이 없으니 각자의 가늠대로 가다보니 세길로 나누어 배재를 향하였다. 나와 공윤님 우측 길로, 타이슨 님과 머핀 님은 좌측 능선으로 그리고 신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주력부대는 계곡길로, 13시 50분 배재에서 만났다.
전주를 중심으로 그 동안 중인리나 구이로 다니던 길이 전 사면이었다면, 오늘은 그 뒤쪽 배사면을 도는 길일 것이다. 해발 5백미터 정도되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이제는 급경사의 길을 내려간다. 반쪽이지만 아이젠의 고마음을 실로 느끼는 가파른 길이다. 삼십분여 내려가니 청룡사가 나온다.
청룡사는 나와 인연이 있는 절이다. 이십여년 전 어머님 살아계실 적에 어머님을 따라 청룡사에 다녔었다. 청룡사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그 당시는 불당과 아담한 요사체만 있었던 조용한 절이었었는데, 커다란 절집도 두어 채 새로 지어졌고, 진입로를 거대한 돌덩이로 석축을 쌓아 새 길을 냈는데 조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청룡사는 전망이 좋다. 금산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넘어에 높은 산이 구성산이고, 그 앞에 작은 봉우리가 정여립의 결사가 있었던 제비봉이라 한다. 신샘의 해설이 눈에 들어오는 지형지물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다시 금산사로 내려간다. 포장된 도로라서 아이젠을 벗고 십여분 내려가니, 금산사에 이른다. 금산사는 전라북도 조계종의 본산이고, 한 동의 국보와 , 다수의 보물을 지니고 있는 유래가 깊은 절이다. 역사상으로는 견훤이 아들 금성에 의해 유폐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월주 스님이 금산사에서 출가를 하여 오랫동안 주지를 역임하신 곳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신 선생님의 박식한 해설이 곁들여지니 나그네 절문 밖을 벗어날 줄 모른다.
금산사를 나서니 전주 근방의 회원 다섯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막걸리에 파전과 김치찌개, 오늘 같이 날씨가 흐리고 간간히 눈이 내리는 날은 김치찌개가 제격이지.
오늘 기행에 대한 총평: 밥값도 못했다. 걷기는 두어 시간하고 밤에 신 선생님 댁에 가서 까지 계속 먹어댔으니
이튿날
집에서 자고 여덟시 까지 신 선생님 댁에 가기 위해 서둘렀다. 나서다 보니 이번에 특별히 장만한 방한 장갑이 없다. 어제 늦게 까지 신 선생님 댁에 있었으니, 다시 한번 더 찾아보리라 생각하고, 가서 찾아봐도 없다. 어제는 하루 종일 잃어버리고 다녔구나!
어린 시절 공책, 연필은 물론이고, 어느 날은 신발까지 잊어버려 맨발로 집에 갔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소아적인 산만함이 되살아나려는 조짐인지, 건망증을 탓하기에는 좀 이른 나이인 것 같고. 얼마나 잃어버리기를 계속할 것인지. 계속 사서 보충을 할 것이다.
오늘은 전주지역의 회원들 3명이 추가 합류 되었다. 아침을 마치고 귀신사에 아홉시 반경에 도착하였다. 귀신사, 절 이름치고는 독특하다. 돌아갈 歸자 믿을 信자를 쓰니 믿음이 돌아오는 절이라고 직역하지만 영혼이 돌아와 머무는 곳이라 의역을 한다. 전주출신 여류소설가 양귀자의 ‘숨은 꽃’의 배경이 되었다하기도 하고 신샘의 애착이 유달리 가는 절인 듯 싶다.
대적광전 뒤편으로 올라가면 삼층석탑이 있는데, 신샘이 젊은 시절 고뇌에 시달릴 적에 이곳 귀신사에 와서 석탑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세상사 시름을 달래보기도 했다한다. , 당신의 영혼이 오래토록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데
전주에서 금산사 가는 국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심산유곡 또한 아니어서 영혼의 쉼터나, 명상을 하기에 썩 알맞은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느끼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귀신사를 떠나서 싸리재를 넘어서 금구로 향한다. 너른 임도가 나 있고, 눈이 수북히 쌓여있는데 , 아직 녹거나 얼지 않은 상태여서 아이젠 없이도 걸을만하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싸리재를 넘는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 싸리골, 오랜 추억이 있는 산골 마을이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그 때 어느 해 가을 야유회를 이 싸리골로 왔었었다. 그 당시는 여기 싸리골 마을은 무지무지한 벽촌이었다. 어디로 가든지 십리를 걸어가야 차를 탈 수 있었다., 금구 면소재지 뒷길을 따라 올라가면 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를 따라 한참 올라오면 분지형의 마을 싸리골에 닿을 수 있었다. 이십여 가호가 체 아니 되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고, 밤나무가 많아서 밤 줍기 대회도 있었던 기억이 있다. 돌아가는 길은 저수지 윗길 이었다. 억새가 많이 피어 있었고,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저수지 윗길로 갈수도 있겠다. 산등성이를 돌아가던 사십여 년 전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지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런지?
싸리재 정상에서 한 십여분 걸었나? 아직 시장기가 들기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눈길 위에서 좌판이 벌어졌다. 호박고구마, 빵 ,초코렛 까지, 먹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잠시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신샘이 갑자기 진행되는 길 방향을 바꾸어, 금구로 내려가는 길 대신 위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택하신다.
금구로 가는 옛길은 포기다. 잠시 올라서 보니, 임도가 아니고, 공원묘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사무실도 있고, 무덤봉분 샘플도 있었다. 막다른 길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갈 것이다. 계곡을 따라 야지로 올라섰다. 때로는 미끌어지기도 하고,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앞 사람의 꽁무니만 따라 간다. 만원 전철에서 앉아 있는 사람이 무척 부러워 보이는 것처럼 몇 발자국 앞서서 능선에 서 있는 우리 일행이 무척 부러워 보인다. 드디어 능선에 올랐다. 능선을 따라 이십여분 구성산 정상에 올랐다. 11시 47분, 정확히 정상은 아니다. 정확히 50미터 북쪽에 여기보다 5~6미터 높은 봉우리라는데 거기 가서 발 도장 찍고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지 등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해발 467미터, 다른 이름으로 봉두산으로 불려졌다하고, 잠시 쉬었다가 길을 내려선다. 15분 정도 내려가니 작은 암자가 나온다. 요사채가 있고, 불당이 있는 자그마한 암자 인데, 불당 마루에 세간이 놓여져 있어 깔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초로의 스님이다. 처음에는 스님도 약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십여 명 되는 사람들이 절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합장을 하며 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스님이 신 선생님을 알아 보신다. “혹시 신정일씨 아닙니까?” 하고, 이렇게 심산유곡에서 아는 인연을 만나다니, 반가운 일이다. 서로 안부를 묻고, 암자 사정을 이야기 하신다. 작년 여름에 비가 적게 와서 우물에 물이 없어서 차 한잔 대접을 못한다고 하며,
법명은 도웅이시고, 청화 큰 스님의 제자라 하시며, 학선암이라는 불당 현판글씨가 청화스님이 써주신 글씨라 한다.
인적 드물고, 바람만이 스쳐지나가는 고요한 암자이다. 스님에게 길 안내를 받고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금평저수지를 끼고도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사십 분여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니, 논두렁에 내려선다. 저수지 뚝이 보이고, 오늘 점심이 예정되어 있는 호수산장이 불과 5분 거리이다.
호수산장에 도착하니, 전주 호성동에 사는 회원 윤명숙씨가 이미 도착하여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다.
민물새우탕, 메기탕, 단배를 골린 시장기에 맛있다. 서울회원 만호씨의 감탄사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새우탕으로 손색이 없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문화, 역사기행이다. 금평저수지 뚝을 올라서서 증산교본당에 도착했다.
강증산이 창시한 민족종교이고, 조상신을 섬기며, 후천개벽사상이 말씀의 요체이다. 증산은 1900년대 초에 승천을 하셨는데, 그 당시는 파격적으로 여성인 부인에게 법통을 넘겨주었고, 앞으로는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가 올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한다.
지금은 증산교나 그 아류인 대순진리교, 용화교 정도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옛날 해방과 육이오를 거쳐 오면서, 이곳 모악산 자락은 수많은 신흥종교가 생성되었던 곳이다. 계룡산의 신도안 못지않게 신흥종교가 융성했던 곳이다. 도참서에 모악산에 미륵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 금산사 좌우 계곡과 금산사 아래쪽으로 서로 미륵을 자처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수 없이 명멸하였고, 나중에는 국가에서 국,도립공원 정리법에 의해서 금산사 아래로 강제로 내려 보냈는데도, 사십여 개의 종파가 남아 있었다 한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혹세무민하기가 쉬운데, 어쩌면 지금은 살기가 좋아서 미륵이나, 메시아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나 보다.
금평저수지를 따라서 돌아간다. 저수지 기슭에 어떤 개인의 정원에 이른다. 겨울철이라 주인은 보이지 않고, 호수를 향한 누각이 운치 있다.
여기가 동심원이다. 정원의 주인은 송재욱님 이시고, 국토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다. 삼일선언을 하였던 태화관의 주춧돌을 모아서 세워놓았고, 독도 최초의 주민등록인 이었고, 돌로 세워진 비문에 옛 고조선의 국토가 표시되어 있다. 우수리강, 송화강, 요하, 흑룡강 등의 넓고도 넓은 만주의 땅이 우리 국토였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오루네시, 오늘의 정기투어가 끝났다. 중인리에서 귀신사 까지 또 중인리에서 구이까지 연결되는 길은 다음 기회에 걸어봐야 겠다.
첫댓글 울 동내 이야기라 청룡사, 귀신사, 싸리골, 호수산장, 다 옛추억이 담겨있는 곳인데...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