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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고흥작가회 작품집
- 제9집 <따뜻했던 울먹임> 교정용 문집
<발문>
햇빛이 산자락에서 돌담을 지나 논틀밭틀을 쓰다듬고 냇물을 따라 반짝인다. 대낮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 서늘한 그늘 같은 것이 온 몸에 슬그머니 번져온다. 어김없는 눈물이다.
꽃다운 우리 아이들을 진도 맹골수도에 방치했던 지난 4월 16일 이후의 세월은 우리에겐 안타깝고 무기력한 불면의 시간들이었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토굴에서 습한 숨결을 고르며 웅크렸던 슬픔. 그럼에도 우린 그 우짖는 물결 소리를 들으며 시를 써야 했고 시인이기에 함께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세월호 사고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나라.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이 땅의 정황 속에서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누구인가? 해묵은 자문을 반복하지만 즉답하건대 시는 당대의 울먹임이요 시인은 삶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먼저 울먹이는 사람이다.
물신의 악취가 산천을 휘젓고 있는데 시인들마저 너나없이 최소한의 습도도 갖추지 못한 채 마른 사막 같은 시들을 양산하고 있다. 실험이라는 미명으로 과장과 허황됨에 절은 시들, 혹은 미학적 몸부림이라는 합리화로 내면에만 침잠하는 자기연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시들. 이러한 건조하고 기계적인 시들을 부추기는 상당수의 소위 ‘중앙’ 세력들의 저택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어 보고자 모여든 측은한 수험생들로 문전성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만든 틀에서 붕어빵 찍혀 나오듯 제작된 적지 않은 시들에는 삶의 정황에 뿌리 내린 정직한 울먹임이 결핍되어 있기 일쑤다. 그런 울먹임이 없기에 읽는 이에게도 진정한 감동의 눈물을 오래 빚어줄 수 없는 것이고 공허한 말장난이라는 안쓰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안구건조증에 걸려 보았는가? 모든 물상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겹쳐 보이거나 뿌옇게 흐려진다. 시인의 눈에 탐욕이 끼고 거짓에 길들여져서 눈물이 마르면 건조증에 걸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처럼 순결한 눈물이 없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아니 더 아프게 말하자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다.
스러져 가는 시대와 백성들을 보며 울먹이던 두보의 눈물, 북방의 시골 토방에서 우리 민족의 사람 냄새를 그리던 백석의 눈물, ‘종종 해지는 들녘에 서서 슬퍼한다’던 김석규의 눈물, 가난한 마을의 볏가리나 우렁이 껍데기 하나에도 훌쩍이던 박용래의 눈물, 남도 민초들의 삶과 정서를 굵은 목울대로 울어 준 뻐꾹새 송수권의 눈물,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과 부패와 방탕을 한탄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 절대자의 마당에서 새로운 눈물로 참회하며 나아가던 김현승의 눈물...... 성량과 음색은 다를지라도 그들에겐 자신이 몸담은 땅의 역사적 아픔과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사람다운 사랑의 울먹임이 있다. 폭발하는 울음이든 조용한 눈물이든 그 시작은 따뜻한 울먹임인 것이다.
예수의 사도인 바울은 신약성경 로마서 12:15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다. 함께 우는 형식과 방법이 무엇이든 우리 시인들에게도 적실한 한마디이다. 시대의 아픔과 사람들을 향한 순결하고 따뜻한 울먹임이 없다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우린 생각한다. 이 따뜻했던 울먹임을 많이 상실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그것을 회복하고자 사연 많은 남도 땅을 매개로 우린 살고 쓰고 모인다. 우린 굳이 어느 저택을 기웃거리며 유명세에 노이로제 걸린 사람처럼 살지 않기로 한다. 유명하지 않아도 시인은 시인이며 기발한 기법과 솜씨로 주목 받지 않아도 정직한 눈물이 담긴 시를 써나가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솜씨야 언제든 갈고 닦으면 되지만 먼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며 더불어 울먹임이 참 시인의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입동의 길목에서 영화 ‘닥터지바고’를 생각한다. 원작자 파스테르나크의 사상이나 감독의 의도를 떠나 이 영화에서 꼭 마음에 담아둘 것은 지바고의 눈물이다. 혁명 후의 광적인 상황에 못 이겨 쫓겨가는 바리키노 행 지옥 열차 안에서 내다본 얼어붙은 러시아의 들판. 저물어가는 땅에서 지친 절규를 내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지바고의 그 소리 없는 울먹임.
먼 시골의 얼음집에 찾아가 라라와 극한의 고통을 함께하던 날, 성에 낀 창문 밖 늑대 울음으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차가운 펜을 든 지바고는 피를 토하듯 시를 쓴다. ‘언젠가 새봄이 피어나면 좋은 날이 오리라’는 갈망을 그는 자작나무 같은 심장에 새긴다. 그 숨막히는 눈꽃과 얼음과 추위와 어둠 속의 눈물은 시인인 그의 순수한 영혼을 더욱 뜨겁게 가다듬는 용광로의 불꽃이었다.
역사와 인생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가장 사람다운 삶을 희구했던 지바고의 진정한 바람은 기실은 단지 자기 개인의 탐미적 사랑이나 행복의 결실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라라의 봄, 곧 러시아의 봄이었던 것이다. 어둡고 차디찬 시대와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는 참된 사람다움은 사랑하는 이들의 봄을 위한 절절한 울먹임에 있다. 그것이 또한 시인의 일생의 거처임을 우린 믿는다.
- 2014년 11월 고흥작가회 제9집을 발행하면서
● 작품 일람
●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산.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수저통에 비치는 노을><달궁아리랑><통><시골길 또는 술통><빨치산> 산문집 <다시 산문에 기대어><아내의 맨발>이 있고 최근 2013년에 시집 <사구시의 노래>를 펴내 고향 땅 고흥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구상문학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등 다수의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초대시>
고향
고향은 멀리 있어야 보이고
집은 멀리 갈수록 가까운 것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마을에 가서 비로소 생각키는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 끝에 우리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은 늙고 태어나고
새새끼처럼 조잘댄다
==========================
● 김명숙 / 고흥 산. 부천신인문학상, 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동요 “새싹”(초등 5학년 교과서)의 작사. 가곡 동요 작사가로 활동 중. 시집 <그 여자의 바다> 현재, 논술 사회교육, 문예 강사.
<동시>
감과 까치 외 4편
앞마당 감나무의
홍시 두 개
눈에 들어 왔다.
손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딸까 말까?
손을 뻗는데
어디서 날아 왔는지
까치 한 마리 꼬리를 까닥까닥
친구들을 부른다
따 먹으면 꿀맛일 텐데
까치가 걸려
손을 거둬들였다.
옷 벗기기
비 오는 날 엄마가
아이 옷을 벗깁니다.
공차기하느라 더렵혀진
옷을 벗깁니다.
한 겹
한 겹
벗길 때마다
아이는 뽀얀 속살 드러내며 웃지만
엄마는 양파 벗길 때처럼 눈살을 찌푸립니다.
봄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봄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햇살에겐 꽃피우게 하고
바람에겐 향기 날리게 하고
새와 물에겐 소리 내게 하고
지휘봉 따라
팡팡 펑펑
짹짹 졸졸졸
사방에서
봄의 교향악 울려 퍼진다.
눈
밤새 하늘에서
하얀 쌀가루가 내리더니
어머나,
누가 이리
포슬포슬 흰 밥을 지어 놓았나
집집마다
고봉으로 쌀밥을 지어 놓았네
어디, 크게
한 술 떠 맛을 볼까나
사각사각 입안에서
씹히는 소리
슬슬살살 입안에서
밥알 녹는 소리
봉숭아
뜰에 마실 나온 바람
심심해
봉숭아 슬몃, 건들었다
발끈해진 봉숭아
툭,
세상 박차고 나왔다
바람 잡으려
통통
이리 뛰고 저리 뛰어보지만
바람은
재빨리 꽁무니 빼고
저만큼 달아난다
<시인의 말>
올해도 고향의 품에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두 곳의 집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두 채의 고향집이 아른거렸다.
고향 바닷가, 어릴 적 내 꿈이 크던 곳, 그 곳의 밤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다.
비오면 숭어가 뛰고, 밤이 되면 바다 건너 마을이 소록소록 잠이 드는 곳.
고향은 나에게 언제나 연어의 귀소 본능이었다. 나는 본향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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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 / 과역면 백일리 출생. 2013년 <시와문화>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회원, (주) 교학사 재직
뿌리의 힘 외 4편
언니가 걸레로 방바닥을 훔친다
명절날 객지에 흩어졌던 식구들 한자리에 모일 때면
햇살에 반짝거리는 먼지 일가들도 함께 모이지만
낡은 장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먼지들도
넷째언니 앞에서는 꼬리를 감춘다
말끔해진 마루에 문득 언니의 뒷모습이 비친다
가방 매고 하나 둘 열지어가는 동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식모살이 떠나던 날 아침 햇살 같은
넷째언니의 여린 발톱의 부리가
호랑가시나무 이파리로 밤새 마른 흙벽을 긁어댄다
마루를 말끔히 닦아내던 언니의 찢어진 낡은 치마는
배 타기를 그만둔 아버지의 약값이 되었고
큰오빠 대학 등록금이 되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식당 설거지를 끝내고도
밀려있는 옷 수선을 하느라
드륵드륵 밟아대는 미싱소리가
독산동 밤을 깨우는 동안
낡은 앉은뱅이 내 책꽂이에는 책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언니의 월남치마가 쓸고 간 깨끗한 마루 위로
나의 청춘이 상처 없이 지나갔다
하루도 마를 날 없는 걸레의 등을 타고
희미한 백열전등 빛 속에서 걸어 나오는 어머니
필라멘트처럼 파르르 떠는 마른 손으로
멍든 발톱의 부리를 꼭 쥐어준다
평생 먼지 같은 아홉 자식 쓸어안느라 늙어버린 어머니 가슴에
넷째 언니는 늘 가시로 박혀있다
썰물로 빠져나가는 일요일 오후 햇살에 몸을 헹구고서야
베란다 구석진 자리에 가지런한 몸을 눕는다
단단히 뿌리를 박는다
봄이 되면 그 뿌리에서 자라난
민들레, 잎을 활짝 피운다
꽃씨 훨훨 날아가 구남매의 마당에 환한 꽃밭을 일군다
그 씨를 뿌린 넷째 언니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어머니의 가슴에 걸려있는 언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리봉동 오후 4시
눈보라 치는 가리봉오거리 조개구이집에
차가운 불빛들 다 모여 있다
몇 달 전부터 죽은 조개처럼
굳게 입을 다문 셔터
꽃샘바람을 안아 뒹굴며
타악기 소리를 낼 때마다
아직 막 내리지 못할 것 있다며
휴업 안내장 속 손글씨들이 손사래 치고 있다
영하의 날씨에
맨손으로 조개를 박박 문지르고 있던 한 사내
먼 하늘 올려다보는 움푹한 눈 속으로
오래 머무르고 있던 먹구름
철거는 이미 끝났는데
누가 그 사내의 먹구름을 철거해 주나
밤마다 몰래 조개 무덤을 뒤져
여윈 실꾸리만큼 남은 달빛을 찾던
도둑고양이 시력을 회복해 주나
아직도 문을 못 닫고 기다리는
시민슈퍼 뻥뚫어철물점
기울어진 한쪽 어깨를 밟으며
겨울 햇살이 4시를 건너고 있다
개발의 향기로 살찐
빌딩 유리창마다 드리워진 일확천금의 청사진
아무리 건져도 만져지지 않는다
벽보마다 크고 화려한 재건축 조감도 속 아파트들 너머
큰 돈 만지게 해 준다는
약속이라는 큼지막한 활자에
진눈깨비가 침을 뱉고 있다
감자꽃
세상의 모든 꽃들 져버린 겨울 한복판
이 빠진 뚝배기에 버려져 있던 감자가
쭈글쭈글한 무릎을 펴며 일어선다
한 모금의 물도 허비하지 않고
온몸으로 마시더니
생글생글 기특한 싹을 틔운다
파아란 싹 힘차게 들어 올리느라
제 몸 퍼렇게 멍드는 줄도 모르고
무릎을 펴 서리를 밀치며
햇살을 향해 온몸을 던진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한밤중
새 생명 잉태하는 고통
홀로 달게 마시며
상처 깊은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잎을 피워 올린다
지금 언 손을 깨물며 내려가는 수은주는
따듯한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라는 듯
차가운 유리창에 뺨을 부비며
무섭지도 않은지
천정까지 기어오른다
이 하얀 서리만 건너면
푸른 잎 물든 꽃 피는 날
반드시 오리라 믿으며
허공에 몸을 던진다
제 몸이 까맣게 쪼그라져 사라지는 줄도 모른 채
차가운 겨울 복판에 활짝 꽃잎을 편다
아홉 자식들에게 제 몸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다 내준 어머니
꼬부라진 허리를 뿌리치며
보내온 남녘 봄 소식
감자꽃 무심한 향기에 실려
겨울의 차가운 손 뿌리친다
유월, 서울시청 광장을 지나며
-이한열을 기억하다
어두운 지하도 입구를 벗어나자
버들개지를 품은 초여름 햇살
산란하는 소리들로 부산하다
서울시청 광장에 펼쳐진 초록빛 잔디들 따라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살만한 세상이라는 듯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귓바퀴에 감기는 선율 따라
광장에 선 사람들의 허리는 저절로 흐늘거리고
나도 모르게 퀴퀴한 교정쇄며 묵은 빨랫감들을
까맣게 잊은 채 멍멍한 음악 속으로 빨려든다
곱게 자란 금잔디의 한쪽을 헤치니
와락 달려드는 지난 겨울의 차디찬 감촉
언 뿌리에 갇혀 있던 시간,
광장을 돌려달라는 시민들의 입을 막으며
쏘아대던 차가운 물대포
숨 막히는 눈물가스 냄새가 속속 되살아난다
몇 시간째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광화문 안쪽까지 퍼지는 스윙 재즈의 리듬에 맞춰
행인들은 연약한 가지처럼 흔들리고
마른기침 뱉어내는 가로수 어린잎들
입마개를 벗고 서로 얼굴을 찾은 연인끼리
걀걀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진다
몇 시간이고 자리 뜰 생각도 없이
도둑고양이처럼 두리번거려도
끝내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광장의 낮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인공 잔디밭의 허약한 뿌리에 붙어
최루가스를 한사코 뿌리치는
스무 해 전 그 사람의 맑은 숨을 불어넣어 본다
고대 카타콤 무덤을 벗어나
봄볕을 찾아 홀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 요란한 힙합 리듬 너머
꾸밈없는 소리 하나 건져 내어
광화문 쪽으로 힘껏 던진다
자꾸 죽음 쪽으로만 가지를 뻗는
가로수에 맑은 물 한 줌을 건넨다
자국
시골집 뒤안 담벼락
무심코 담쟁이덩굴 하나 잡아 뜯자
벽을 기어오르는 흰 등반의 흔적
벌판 끝까지 가고 말겠다는 듯
잔뜩 벼르고 있는
아버지의 휠체어가 보인다
강쇠바람 따라 사륵사륵 굴러가는 바퀴 소리
날이 저물어도 아버지가 걸어온 길
바퀴 자국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그 바퀴 구르지 않는다
툇마루 한쪽 흙벽엔 아버지의 구두 대신
휠체어 바퀴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다
오래전 떠나고 없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 있다
고향 앞바다의 파도 소리
새파란 보리밭의 기억을 담고
도랑에 처박힌 바퀴가
허공 속에서 헛바퀴를 돌며
아직도 내 마음속에 화석처럼 새겨있다
세게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의 오래된 자국
그 자국이 난 길을 따라
삶의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박힌 돌멩이들을 주워주고 있다
산 너머 새벽길을 보여준다
올해도 저 담쟁이 잎 무성하게 자라
힘차게 나를 끌고 갈 것이다
<시인의 말>
시시콜콜한 말들만 잡다한 것 같아 짜증나고 우울하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야? 하고 돌멩이 던지면 피할까 피하지 말까? 왜 시를 쓰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사실은 해 줄 말이 없다. 내가 아는 시란 입으로 떠들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롯이 가슴으로 쓴 내 시에서 내 모습이 읽혀진다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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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훤구 / 고흥 녹동 출생 2005년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 「신의노래」등
시집 출간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다수가 있음.
가을 길 외 7편
혼자 가을 길을 걷는다
고뇌와 번뇌도 단풍 드는가
가슴에 낙엽 지는 소리
대나무 그림자
어느 고독에다 거름하려나
빗소리 쓸어 모은
대무나무 그림자
행복한 남자
남편이 죽은 뒤
밤마다
목욕하고 화장한 부인
꿈에 만나도
자신 있는 몸으로
사랑 받아야 한다나
진짜 행복
행복은 내가 갖는 게 아닙니다
슬플 때 슬픔을 덜어주고
기쁠 때 기쁨을 키워 주는 게
참살이요 진짜 행복입니다
춘 란
조금 다르다는 건 엄청나다
노란 무늬가 잎 가운데로
들어간 춘란 중투
촉당 2억원 호가
핵 제거
북한의 입에서는 핵의 악취다
자주권 생존권 위협이 제거되면
칫솔질은 끝나고
치과의사는 백수란다
적대봉
바라보면
언제나 다정히
나와 마주보는 적대봉
비온 뒤에 흰 구름 내리니
안개위의 봉우리
구름보다 높다
안개의 부드러운 입술로
입 맞추고
고운손질로 어루만지니
골짜기 숲에
새하얀 폭포 흘러
산을 적신다
한 무리의 새떼
구름 속으로 사라지니
적대봉은 신선의 나라
그저 그런갑다
둘이 다툰다
멱살잡이 할 듯이
입에 게거품을 문다
아이들도 아닌 어른들이
별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건다
져봐야 손해 볼 것도
이겨봐야 이익 볼 것도 없는데
심장을 얼굴에 가져가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 양
혀에다 캉을 세우고
침에다 독을 푼다
알면 얼마나 알고
모르면 얼마나 모른다고
그저 그런갑다 해 두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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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선현 / 전남고흥 출생 80년대 후반부터 시작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하여「한 몸에서 두개의 그림자」,「밤은 소리로 살아있다」,「어두운 곳에 꽃이 피네외 다수의 공동저서가 있으며 개인시집으로 「문」,「나와 함께한 모든 것」등 이 있음. 현 고흥작가회 회장
평형수(平衡水) 외 5편
4.16 모두의 일상을 삼킨 세월호
우그적 아그작 평형수를 줄여
욕심껏 우겨넣는 폭식은 중심을 잃고
뒤집혀 앗아간 통곡이 지축을 흔드는데
진실로부터 안전장치 묶어놓고
현실 외면한 죽일 놈의 인간들은
살아 변명으로 일관하느니
아 ~ 어쩌란 말인가?
이 땅을 이끌고 운항하는
여왕은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귀 막고 선상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우왕좌왕 무엇이 우선인지 눈치만 살핀
잘난 꾼들의 작태 눈물바람 콧물바람
애닲게 한 진실은 무엇인가?
기다려라 제자리 지켜라
기다리면 침몰 해 죽을 텐데
어쩌란 말인가?
개방! 소고기개방, 쌀 개방,
수산물쿼터제 담뱃세 세 세
무엇이 잘살고 못사는 것인가
이것 하라 하지마라 간섭하며
합법을 불법화시켜버린 교육 현실
대책 없이 기다리면 침몰할 불신이
이 땅 덮고도 남은데 균형 잃은 난파선
평형수 채워 안전운항 하자는데
뭣이 두려운가?
끝은 어디인가
아침에 일어나 쫓기듯 시작한
반복된 하루 밤새 채워지지 않은
허기에 쓰려오는 끝자락 넣어두고
기지개켜면 텅 빈 찜찜함
모든 것이 휑하다
이내 어둠 헤집고 찾아든 혼자된 암담함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부딪혀 맴도는 순간들
기억되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연민을
잊고자 걷고 뛰고 달려 되돌아오면 알 수 없는
무력감 초점 잃고 흔들리고 있다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 바라보면
무게에 짓눌린 몸뚱이 이끌고
세숫대야에 얼굴적신 중년의 번민이
일렁이는 잔물결에 산산이 흩어지는데
주먹 쥐고 악수하기
썩어 문드러진 세태에
핏대 세워 주먹 쥐고 뻗으면
잡힐 듯 말듯 사라져 버리고
지나면 잊어버린 망각의 악수에
치를 떨지만 마주친 손뼉소리
짝~ 악 짝 거린다
쥐고 펴고 마주치면 앞과 뒤
부딪혀 둔탁한 파열음 나고
뒤집고 뒤집혀 잡힐 것 같은데
갈가리 찢긴 파편 명줄 조여와
힘없이 손 펴고 상처 감싼다
손잡고 가야하는데 쥐고 펴는
악순환 끊어야 하는데
야비하게 무장한 비열함이
신뢰를 잃고 약속은 불신과
싸워 엇갈리고 있으니
역 린
그대 아느뇨
진정성 없이 껍죽대며
주는 것 없이
무시당하는 기분을
외형적 치장에 현혹돼
존심 건드린
겁 없는 행동을
조잡하게 꿰맞춘
알량한 비늘 몇 개 떼어
기웃기웃 포장하고
식상한 처세로 기본
무시한 속빈 정신을
시궁창에 박혀 승천 못하고
날뛰는 이무기처럼
철없이 발광하는 거지근성을
해거리
장꾸방 옆 장두감나무
앙상함 감춘 채 가지마다
소복소복 쌓인 눈 붙들고
녹여낸 자리 꽃으로 피어
아쉬움 달랜다
언제부터 이었을까 묵묵히
피고지고 열매 맺고
변함없는 이 터에
힘겨울 때 쉬어가며
계절꽃 피워내는 여유로움
작년엔 빨알간 감 볼 수 없었다
뒷마당 눈꽃이 환하게 핀
자태는 가을날
주렁주렁 매달 열매에 쓸
뿌리의 활동인지
거름에 내린 눈마저
갈증 씻어 주는 청량한
수묵화 되었구나.
화전놀이 가는 길
쌍정재 초입 참꽃 몽울
그곳엔 부모 계시고
건너 성짓골 광핸성
비탈 밭 마늘 싹 빼 꼼이
하늘거린다
재 넘어 썩박골 가는 옆길
벌통 놓인 양지바른 곳
성들이 눠 지나는
이를 바라보고 있다
인학동 흐드러지게 핀 매화
암팡진 주인 손길 따라
길동무 하고
훨훨 날리는 꽃길 걸으며
세상 노래하면
기분도 몽글몽글 피어
일상의 시름 날리고
덩달아 추임새 맞춘다
울긋불긋 치맛자락 팔랑이면
매화와 어울 진 분내
흙과 솔 내 버물려
절정에 이르고
갯것 탁배기 한 사발
벌컥벌컥 넘기면
아 ~
이 땅은 품안에 녹고 있으니
<시인의 말>
詩篇을 상재하며 문득 독일시인 릴케가 했던 아니 송만철 시인인가 아니면 박호민시인이 했던 말인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어쩠든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고 한 표현이 뜨겁게 와 닿는다. 여전히 만족 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인 이놈의 작업을 내가 내게 처절하게 치열했는가 반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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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부민 /도양읍 장계리 산. 1996년 <시와산문> 신인상(조병화 시인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등불이 있는 마을> nasaret21@hanmail.net
약산의 염소 외 6편
다리를 건너면 섬마을, 바닷가 어디쯤 살붙일 염소는 딸꾹딸꾹 트럭에 실려 가고 있었어 비틀대며 자꾸 돌아보는 눈빛에 고삐를 잡듯 핸들을 움켜쥐고 내 부끄러운 속도를 줄이며 뒤따라갔지
잘 살아라 염소야 풀 많고 인심 좋다는 약산, 거기라면 참 행복할 거야 젖은 와이퍼를 한참 흔들어주다가 문득 아내도 저렇게 내게로 왔나 싶어 먹먹해진 차를 샛길에 세웠어
약산은 된바람이 무섭다는 걸, 풀 마르고 눈발 내리면 가슴까지 마냥 얇아져 딸각댄다는 진실을 미처 알려 주지 못했는데 여린 발굽에 단단히 새겨 주지 못했는데 염소는 후들후들 이미 다리를 건넜지
눈부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구름이 덮이더니 푸른 추위가 자갈 소리를 내며 엔진에 들어와 살려 하더군 어서 가야지가야지 하면서 차의 무게를 가까스로 벗어나 오래 아픈 아내를 향해 나아갔어
천 갈래 펄럭이는 바람의 틈에 끼여 약산의 염소는 갈대처럼 얇아지고 있겠지 저린 발 비벼대며 버팅기고 있겠지 길에 실려 어둑어둑 돌아오는 내내 성에 낀 불빛들이 글썽거렸어
새가 떠나간 자리
새가 앉았다 간 자리는 많이 흔들린다
높은 나무일수록 새를 멀리 떠나보낸 후엔 더 흔들린다
그러나 뒤미처 날아든 거친 새는 흐느끼는 우듬지를 속히 제압해버린다
그것이 먼젓번 새가 떠난 자리의 경련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 이유이다
정 깊어 따뜻한 새는 조용히 와서 남은 흔들림이 다치지 않게 깃털의 무게만으로 사뿐히 앉지만
모질고 차가운 새는 푸드덕 날아들어 사납게 나무를 억누르고 여린 가지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않는다
흔들림마저 나무의 행복이요 권리라면
새가 떠나간 이 자리, 그 밖은 모두 햇빛이다
빵
오늘 같이 모처럼 한가한 날엔
터미널 사거리 빵집 앞을 서성이며
서울행 차를 타 볼까, 늦은 점심을 먹을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문득 돌아보니 빵들이 빵긋빵긋 웃고 있어요
배고픈 사람들은 빵을 사러 들어갑니다
빵을 먹을 때 사람들은 착합니다
빵을 다 먹고 나면 사람들은 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싫습니다
나는 그런 빵이 싫습니다
그런데도 나 역시 빵집 문을 열고 맙니다
이번에도 빵들은 웃습니다
찬바람 타고 눈송이가 유리창에 엉깁니다
빵집하고 별 관계없는 내가
빵이 얼까 두렵습니다
빵 맛이 떨어질까 눈물도 납니다
빵 하나 사 들고 눈사람처럼 엉거주춤 나오는데
서울행 차가 빠앙 떠납니다
사람들로 배를 빵빵히 채우고는 트림을 날리며 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빵을 쥔 채 홀로 어둑해집니다
다시 푸석푸석 빵가루 쌓이는 거리에서
여린 입김으로 하늘에 물어 봅니다
세상에 빵이 없으면 정말 안 될까요?
세상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맹골수도 (孟骨水道)
- 세월호 침몰을 한하며
대낮인데 이토록 어둡고 추운 건
너희 등불이 너무 일찍 꺼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꽉 막힌 지점, 숨찬 너희가
마지막 발돋움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던 바다
오류와 모순이 뒤엉켜 맹골수도의 핏물이 된다
기다림밖엔
무얼 할 수 있었으랴
우린 너희에게 끝내 가지 않았다
이 나라 흔들리는 불빛들 모두 여기 와서 울음을 섞고
동해 남해 물고기들 왔다가 속수무책으로 흩어진다
이렇게 물 깊이 미안하다
미안하다
기다림이 그 흔한 희망의 깃털 하나 받아들지 못했으니
더 무슨 말을 보태랴
우리 안의 뻔뻔한 따개비들 징그럽고 비겁한 비늘들을 한 겹 한 겹 쥐어뜯으며
한밤인데 마음이 고요치 않다
너희가 온 몸으로 맞닥뜨린 파도가 집집이 찾아 와서
비루한 세월, 우리를 향한 목울음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 맹골수도-진도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의 수도(水道)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지
프로필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의 옆모습이 멋지다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나 사진첩을 배회했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덤덤한 표정 몇 개 뿐
산도 그랬다. 육중한 앞 얼굴만 떠오르는 건
한 번도 그의 옆구리를 타 본 적이 없어서였다
아버지를 여읜 아픔이 가문의 초록을 다 벗겨내자
구름이 시린 눈물을 산자락에 털어냈고
억새풀들은 그곳에 무성히 자라났다
누구도 쓸쓸하거나 아프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온몸으로 기막힌 춤을 마구 추어댔다
그런 가을이 한참을 머물다 간 오후
숨 가쁜 중년의 등성이에 잠시 짐을 부리고
아내더러 프로필을 근사하게 찍어 달라 하니
왜 굳이 위태롭게 바람 속에 서느냐며
쓸리는 내 옆모습을 잘 그려내지 못 한다
여기서 굼뜬 발걸음 울먹이고
얼마나 더 노을에 젖어야 어눌하고 멋없는 아버지를 닮을까
언제쯤 이끼 낀 옆구리를 타고 올라 산마루의 눈발을 만날까
회한이 남아 희끗거리는 능선에 달빛이 연민의 손을 얹을 때
산에 안겨드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멀리 넘어가는 달의 부드럽고 엷은 미소
거기 어머니는 짙은 안개를 뱉어내고는
단아하게 정돈된 아버지 옆에 새벽빛으로 살며시 눕고 있었다
시대착오적인 눈
한때는 로터리 빵집에 앉아 시간 속으로 낙하하는 눈송이의 순례 행렬을 바라보며 오래된 성좌 같은 것이 빙벽처럼 맑은 유리창에 존재한다고 믿는 서정의 시대였지
눈송이는 허공의 출발점에서 착지할 때까지의 여정이 눈물겹지만 간혹 인적 없는 좁은 건물 사이의 비루한 쥐똥 위라든가 이제는 천물 취급당하는 색 바랜 우체통 위에 부도 수표의 찢긴 파편처럼 흩어져 있기도 하고
굶주려 더 얇아진 노숙자의 신문지 위 슬픈 분비물로 달라붙거나 24시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지친 눈꺼풀에 앉아 잠시 꿈의 부피를 더하기도 하는, 그런 쓰라림이 엉겨 그리운 성좌의 그림자, 천상의 모델하우스가 순식간에 울타리를 치며 하얗게 펼쳐지는 통유리에
들어 앉아 있다 보면 눈 내리는 저쪽이 조금씩 보일까 겉과 속이 얼어 하나 되는 통유리의 나라, 뉴타운의 변두리 빵집에서 멈칫 멈칫 기웃대는 시대착오적인 눈물들이 바람을 만나 유리 속의 냇물에 떠서 흐르는
저녁, 분방하게 들락거리는 자동차들과 생경한 간판들의 점멸하는 불빛, 쓱싹 지우고 나면 하아 입김 뿜으며 불투명하고 비릿하며 역한 비서정의 시대가 성큼 빵 냄새를 품고 다시 불안하게 번져오는
지붕에 구멍
버려두면 버려둔 만큼 냉습하고 초라한 것이
집이며 사람이고 시이다
사다리 놓고 올라가 흙을 개어 붙이고
새 기왓장도 얹어보다가
이게 임시 부분 수리로는 안 되겠다 싶어
손발 떨려 내려오고 마는데
구멍 뚫은 놈들은 따로 있지만
녀석들의 얄미운 행각을 탓해 뭐 하나
쏟아지는 저녁의 먹물을 막을 길이 없다
하긴 새는 빗물을 낭만쯤으로 받아들일 아량이 있다면
오래된 집일수록 한 구멍 뚫려
바람 술술 드나드는 것도 괜찮겠다
지붕을 아예 거둬내고 유리로 덮어버릴까
낮엔 햇빛과 푸른 하늘, 밤엔 달빛의 축제
여름엔 눈부신 별자리, 겨울엔
입체영화처럼 안겨드는 눈송이
기가 막히겠지. 벽마저 통유리로 바꾸면
마침내 안팎으로 온통 장엄한 시집이 될 테지
그렇게 슬쩍 집을 극복하고 나면
침낭 하나 장만하여 아무데나 옮겨 다니다
밤엔 입김으로 허공에 노래를 올리고
낮엔 나뭇잎이나 돌멩이에 시를 새기다가 그악해져서
애먼 남의 집 지붕에 구멍 하나 뚫어주고 도망가는
얄미운 고양이로 늙고 싶은 일탈의 상상
집이 없어도 좋은 자들의 당당한 비상구다
지붕에 뚫린 구멍은
<시인의 말>
한동안 시에 대한 애착을 애써 지워 버리며 살다가도 느닷없이 풍로를 돌려 활활 불을 지피기도 한다. 시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탓이리라. 이것이 좋은 일인가? 시를 버릴 수 있을 때 진짜 시인이 된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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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호민 / 도양읍 장계리 산. 단국대경제학과 졸업. 1989년 <민족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들개와솔개>. 한국작가회의 회언. garosup@daum.net
눈동자 외 7편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는 그가 딛고 서있는 땅이 있고 우러르는 하늘이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푸른빛 도는 눈 속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맑게 맑게 터져 나오는 별빛.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너무 외로워 이젠 외로움도 잊어버린 사람, 그래서 갈 곳이라고는 언제나 방 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서 그 눈동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다. 함께 그 하늘에 빠지고 싶다. 그 땅을 일으키고 싶다. 다시 한 번, 처음 같은 그 별빛으로 터지고 싶다.
겨울엔, 누구를 만나든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진정 사람인지, 도깨비인지를.
청동새
새가 난다
청동으로 만든 새가 난다
모든 밥그릇을 다 뺏어먹고
무슨 새가 난다
어둔 밤, 홀로 날뛰는 저것이
정녕 새라고?
어찌, 피를 토하지도 않고
새가 나는가
앞으로, 더는
새가 난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시 봄길에서
ㅡ 세월호 이후
님도 없이 봄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돌담집 빨랫줄은 여직 가난했고 텃밭에선 노오란 갓꽃만 한나절을 바빴습니다. 길 잃은 그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선가 흰 나비 두 마리 팔자걸음으로 길을 어루다 사라집니다. 이 한낮, 세상은 꽃 더미로 눈이 무거운데 한 생이 더욱 캄캄한 사람들은 아지랑이보다 가볍습니다. 우리도 저 나비처럼 춤이라도 추어볼거나, 애초부터 타고난 팔자춤을. 황사바람 부연 들녘 끝에서 이윽고 잊었던 새가 웁니다. 그렇게 또 머슴새가 울고 이승은 긴 여운으로 적막하였습니다.
님도 없이 들길을 걸었습니다. 봄은 늘 황홀하였지만 돌아갈 때는 쓰라림뿐이었습니다. 변함없이, 어린 백성은 부옇게 시들고 빈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 제 목소리를 잊었습니다.
파꽃
오월 한낮, 나는 문득 파꽃으로 피어있었다
호랑나비 한 쌍이 날아와 나를 애무한다
내 굳은 가슴을 쓰다듬다 간다
마음만 황홀한 봄날
나는 종일을 파꽃으로 피어있고 싶었다
미래의 계산도, 약속도
내가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사람이 얼마나 더 울어야 꽃이 될 수 있는 건가
오월 한낮, 나는
오래도록 파꽃으로 있고 싶었다
방 안의 시간
내 방은 1.5평 쯤 된다. 조금 좁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우주를 만나고, 옛사람을 만나고, 애틋한 애인도 만난다. 어느 때 내 방은 너무도 아늑하여 아마 11차원쯤의 시공이 되기도 한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가끔 온갖 사물들의 표정과 그림자가 보이고, 그것들이 지나온 사연들과 노랫소리, 그리고 비명소리와 한숨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외출했다가 내 방에 들어서면 다시 먼 우주로 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어쩌면 그것이 내 유일한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남 모르는 기쁨 하나쯤은 숨겨놓고 사는 셈인가. 그렇드라도 문풍지 떨리는 창문이 없다면 그건 방이 아닐 것이다.
봄빛 아래서
다 지나온 것, 너무 애쓰지 말자
설마, 하늘까지 무너지리요
밭둑에 앉아 너를 생각한다
한없이
음악소리가 들린다
벌들이 날갯짓을 하고 지나간다
이런 봄날엔 말이 필요 없구나
산다는 것은 말이 아니니까
이 봄, 살아있기 때문에
너도 살아있구나
그렇구나,
그래서 서로가 더욱 고맙다.
그리운 손
떠나갔다, 아니 떠나왔다
슬픔은 언제나 남은 사람들의 몫
한 번의 소맷자락으로 만났으니
서로가 말은 필요 없구나
오늘도 오지 않고 내일도 오지 않으리라
알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하늘이 두 쪽이 나는 날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인가
뜻 없이 바람이 분다
누구나, 언젠가는 길 끝에 이르겠지만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질긋하게 한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그것뿐이다
손을 놓고 돌아서면 다 각자의 길,
각자의 슬픔
그러나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이다.
세대
어젯밤 꿈속에서
십 여 년 전에 딱 한 번 보았던 여인이 나왔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당신은 웬일이냐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꿈속에서 마주칠 수가 있나 보다
흥타령 속 꿈은 장자莊子적이지만
현실은 노자老子도 공자孔子도 아닌 맑스 끄트머리인 것 같다
갈 곳이 없는 생이 불쌍하다고 하지 말자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어도 스스로 돌아가지 못한다
얽매임 속, 술로 달래며 지나온 날들
그러나 여전히 비쩍 마른 몸뚱이로 서 있을 뿐이다
그래, 넘어선다는 것은
결국 세대를 뛰어 넘는 것이구나
<시인의 말>
이 아침, 마당가에서 무당거미가 아흔 아홉 칸의 집을 짓고 있다. 그 칸칸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영롱하다. 책을 읽는다, 산천을 읽는다. 몇 백 년을 격하여도 우린 만날 수 있다. 책 속의 그는 할 말만 하고 있다. 고맙다. 사실 우리 모두는 현재를 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지나간 사람들 대신 살고 있는 것이다. 저 거미가 새롭게 집을 짓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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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만철 / 고흥 과역면 산 1996년.<불교문예>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참나리꽃 하나가><푸른 빛줄기의 시간>
눈빛이여 외 6편
지땅밭 언덕에 땅찔구 꺽다
겨울잠 깬 뱀한테 덜컥 물렸던 아득함이여
금새 하늘도 샛노랗게 질렸던 몸서리침이여
집으로 치닫다 대끌텅에 찔린 것 같은 까마득을
한 숟깔 된장으로 덥썩 싸매주던 할매
오래고 오랜 그 밤, 다시는 세상에 없는 눈빛이여
소리치다
평애들에 쏙새들아 자운영들아
어디로 갔냐
바람 거친 해질녁 찾아들던 새들아
잠방거린 물논에 울던 깨구락지들아
등잔불 밑에 둘레둘레한 식구들
그 가난아, 따뜻했던 울먹임아
멀리 멀리, 어디 까마득이냐
제비 한 쌍
1.
둥지에 알을 품어 꿈쩍 않는 암놈에게 하루내 먹이를 물어 나르던 쑥놈
해거름에 마당 뺄랫줄로 불러내더니 몸을 맞대고 눈쌀 주고받으며
뭐라고 뭐라고 서로 쫑알대다
쑥놈 입주댕이가 암놈 삭신 구석구석 매만져준다
빤한 초닷새 낮달이 서녘에 걸려 물끄럼이다
2.
물끄러미 암놈 쑥놈 눈쌀 불똥 튀는가 싶더니 온몸 화들짝 깨자는 듯
빨랫줄 출렁 날아올라 쏜살 같이 하늘을 휘젓는 저저 제비 한 쌍
애葬
죽어버린 어린 손지 둘둘 말린 덕석을 짊어지고
혼자 새르팍을 나섰던 늙은 신센
민둑골 공동묘지 가새 어디 파묻었다, 하고
산등성이로 볼가진 달 편에 딸려보냈다, 고도 했던
어린 날
그 밤
달빛은 신센집 마당 가에서 겁나게 훌쩍대고
대바람은 문짝 붙들고 서럽게 떠날 줄 모르고
그리움
민둑골에서 소를 뜯기다 지땅 밭머리에 서면 서녘에 걸린 구름들아
엄니들의 저녁밥 짓는 흰 냉갈이 뭉게뭉게한 눈시울들아
소는 양철통에 허드렛물 퍼마시고 마구간으로 가고
나는 목매어라 한 방울 국물까지 숟꾸락 떨거덕대다
마당으로 나가면
싯뻘건 노을은 떠나가고 별 별이 눈물처럼 와락했던 날들이여
물결들아
동구 밖 시냇가에 물레방앗간
한밤중 스며든 어둠의 쌍쌍들이 무작스럽게 굴러대며 맞불 놓는 소리소리
어디로 갔냐
온 들판 들깨우며 내달리는 물결 물결들아
물비린내 홀라당한 달빛들아
추석 무렵
그네를 띄우자
학교가 무엇이랴
책인들 내던져버려라
신작로 가에 말려둔 햇볏짚 훔쳐다 사챙기를 꼬자
소 뜯기는 마을 뒷산
소가 감재밭으로 뛰어들든 콩밭에 똥오줌을 내깔기든
사챙기 대여섯 가닥에 우리들 마음까지 한 줄로 역이어
바람과 구름, 떠들썩한 장난질과 신나는 노래도 항꾸네 엮이어
달 떠온다 달 떠온다
모질게나 둥글어서 쿵덕덕한 마음들 달아올라 달아올라
끝잠 잘 누에, 뽕잎 따러 가자는 소락떼기는 흘려버리고
추석 다음 다음날까지 그네 툭 끊어질 때까지
어린 날을 걸어보자
어린 날을 띄워보자
<시인의 말>
저 멀고 먼 어린 날들
마음의 풍성한 젖줄이었고 삶에 깊고 드넓은 뿌리였던 고향이
고향이 때로는 툭 튀어나와 뭐하냐고 울먹거리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시원스레 내갈기지 못한 나의 시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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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선 / <크리스찬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고향풍경> 동시집 <해바라기><네잎 클로버>이 있음
금메달 /동시 외 2편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
제 17회 아시안 게임
저마다의 꿈을 향한
아름다운 땀방울에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는
45억 아시아 인
우리 모두의 잔치
초고의 금메달입니다
풍 년 / 동시
정성들여 뿌린 씨앗
거센 비바람
사나운 벌레 떼
모두 물리치고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황금 옷 갈아입을 때
함박웃음 그치지 않고
흐뭇함에 배부릅니다
흰 구름 / 동시
한 움큼씩 떼어놓은
보송보송 흰 구름
여름의 끝자락
짓궂은 심술에
깜짝 놀라 헤어졌다
한숨을 내 쉬면서
다시 만나 한 무리 되어
높이 더 높이 떠오릅니다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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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호 / <시와 사랑>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11년 <창작21> 신인상 수상. 20여 년 간 한글자모음 연구. 시집 <ㄱ에 대하여>. 창작21작가회 회원. 현재 고흥에서 농업 중.
그렇구나 가는 골 외 9편
내가 사는 마을에 가는골이 있는데
정자나무 귀엣말 그늘 밑 이르기를
이곳 쌀 먹고 사는 이 꽃상여 더 무겁더라.
곰보 배추 약초랑 다박솔 밑 야생화
지천에 널려있어 벌로 보고 살았는데
승용차 머물다 떠난 제초제 뿌린 그 다음
발빠르게 살아도 앞당기는 몹쓸 세상
그렇구나 가는 골 그냥 거기 있는데
약초랑, 어느 틈에 야생화 살아지고 말았네
늦게 자란 옥수수
구슬 옥 목숨수수 옥수수를 심었는데
사랑처럼 사붓이 봄 비 내린 고랑 밭
산새가 다 쪼아 먹고 금년 농사 망쳤다네
사색이 다 된 아내더러 흉도 복이 될 수 있다
다행히 남은 종자 물에다 담그면서
아직은 봄이 한창이니 다시 내일 심읍시다.
적막의 허수아비 훠이! 훠이! 잠을 깨워
늦게 자란 옥수수 제값 받고 팔린다면
알겠오, 그때쯤 가서 고맙다고 웃을 런지
밤하늘 함께 건널목
강물 깊지 않다 탓 하지는 않겠오
흰 물살 둥근 자갈 모래톱을 돋우고
여울목 돌 징검다리 겨울 강 건너가는 곳
오른 적 한번 없는 내리막 삶이였오
타는 가뭄 실개천 멈추지를 않았고
장마철 홍수가 난들 넘친 적이 없었오
그대 잠든 시심을 깨워 마주할 순 없어도
우리 인생 은하수 여울목 아니겠오
밤하늘 함께 건널목 징검돌을 놓는데
영등사리
푸른 치마 들어 올려 배꼽까지 다 드러낸
허벅살 금침 같은 키조개를 뽑아 오고
해마다 단 한번 뿐인 영등사리 썰물 때
음력 정월 그믐날 밤 구름 끼면 무영등이라
생전에 어머님이 영등 할메 점괴를 풀 듯
사붓이 내리는 봄비 겨울가뭄 적시네
동장군 하늬바람 잠을 재운 저 마파람
밀물 듯 밀어 올려 게눈 감춘 아랫바람
한식날 서마 나울 한번 흔들릴 채비 하는데.
일몰
노을이 저리 고우면 내일 날씩 맑다 하고
그 맑은 가을날 보리를 파종하는 행복
내년 봄 보릿고개를 이래저래 넘겠네
우리 부부 나이고개 황혼을 하얗게 넘어
무난히 지났지만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옳’단 말 닿소리 받침 실천하고 살았을까
히읗은 하늘이라 한글모양 그렇구나
죽은 다음 옮아야 오래오래 옳다는데
남에게 남으려거든 살아생전 남에게
인생은 들녘을 적시며 흘러가는 물 이련가
오른 적 없어도 내리막은 있더라
지는 해 마지막 흔적 모래 살을 비추네.
스믄여
밀물에 잠그랐다 썰물에 드러났다
섬마을 간척공사 국도까지 뚫렸지만
그 옛날 재 너머 노딧길 신호등이 됐었지
모자반 뜯어다가 나물로 데쳐 먹고
이른 봄 영등사리 해삼은 뭉클한데
늦가을 그물 두르고 전어 잡는 똑딱선
똑딱! 똑딱! 전어 똑딱! 코 콧마다 걸려주소
장단치는 물때 짚어 고래처럼 떠오르는
스믄여 간이 등대 불빛 밤새도록 반짝이네
밀감 한 박스
받은 다음 보낸다면 정성은 소진될까
신부전 입원한 형이 밀감 한 박스 보내 왔네
나는 야 언짢은 생각 보낸 적이 없구나
구좌를 물어보아 현금을 넣어줄까
봄 굴을 얼마쯤 따서 젓을 담아 보낼까
날마다 완쾌 하소서 빌어봄은 어떨까
아쉽다 젊었을 적 신발공장 사장님아
중국과 베트남에 진출까지 하고서도
당뇨랑 합병증으로 피를 걸러 지낸다니
누군들 병을 얻어 꼼짝없이 누웠다면
저-멀리 무심한 친구 서운키도 하련만은
형이사! 전보다 더욱 정이 넘쳐흐르네.
늙은 농사꾼
월동 배추 삼만 포기를 둘이서 다 묶었다.
십일월 중순쯤부터 양력섣달 초순까지
훈련병 사열을 하듯 부동자세로 세웠다.
여보! 미안하오. 늙어가는 이 나이에
농장 삼천 평을 뭣 하러 또 샀을까?
행여나 그런 말 맙시다. 소가 비빌 언덕이니
자식들 이남이녀 벌이도 시원찮고
퇴직하면 돌아와 대를 이어 함께 살자
행복은 맑은 가을날 보리종자 파종이라
인생의 보릿고개 이래저래 넘는다면
우리 부부 더 늙기전 밑거름이 됩시다.
죽으면 흙이 되얄 몸 아낀들 천년 살리요.
태 묻은 갯마을
이십 미터 됩니다 사립문 밖 남해바다
작은 전마선 타고 스프링통발 가득 싣고
흰 그물 자망하였다 고기 잡아 옵니다.
어쩌다 많이 잡히면 공판장에 내다 팔고
불법단속 쫓아오는 벽력같은 저-경비선
왜-진작 쉽게 발부된 허가라도 받아둘 걸
사고팔긴 하더라도 신규로는 안 된다니
문전에 뛰는 고기 사먹어야 할 판이면
묻지요 태 묻은 갯마을 뿌리박고 사는 이씨
주인은 누굽니까? 어민이 아니라면
수협 조합원이면 허가 된 것 아닌가요
지금껏 갯마을 해변 떠난 적이 없는데
이십 미터 못 됩니다. 넘실대는 남해바다
개펄에 물 빠지면 아내랑 낙자잡고
달밤에 갯돌바지락 달팽이 춤 곱네요.
소나무
배추밭 그림자 진다 기계톱으로 잘라내고
도끼로 장작을 패 보일러에 군불을 땠다.
선 식물 말 못한 억울함 잉글잉글 타올라
온 가족 긴-겨울밤 따뜻하게 지났지만
벤 나무 보다 심근 나무 더 많아 얄 텐데
어린 적 송기 벗겨먹던 침을 꿀꺽 삼킨다.
미안하다 소나무야 네 발 밑에 밭을 일군
내 잘못이 크구나, 송판 관속에 누울 몸
눈감고 뒤척거린 밤 나랑 같은 나무야.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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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현 / 고흥산 <문학세대>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문학세대 회원.
신사 외 6편
가을 문턱을 넘어서니
벼가 여물든 무게만큼 고개를 숙인다
한 알 싹 틔워
한철
푸르게 살았노라. 오늘은
황금빛 머리 숙여 하직 인사
논두렁 다리 긴 새도
주억주억 고개를 숙이며 맞받는다 농부도
엎드려 절 받는다
죽정이
뻣뻣하다. 예나
지금이나
둘이 하나
나무와 나무
가지마다 잎이 무성합니다
잎과 잎 사이
하늘은 조각나 있고요
그늘은 어둡습니다
어느 봄날
연둣빛 잎을 피워
솜털 보송한 가지 하나가 다가갔지요
멱살을 잡혔는가, 골마리를 잡혔는가
그 봄부터
시간이 뻣뻣이 굳어
가죽이 벗겨지고 가지가 부딪혀
삐거덕 빠드득 하였습니다
사랑도 깊어서 피 철철 흘리던
상처가 굳었어요 서로 피가 통했어요
사람들은 연리지라 하더이다
어떤 가출
멈출 수 없다 아내의 바가지
컴퓨터 게임에 빠져버렸다
나보다 더 큰 아이 하나, 내 마음은
내 몸에서 나간다
손가방을 가만히 들고
모르는 길을 걷는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구석진 곳을 찾는다
불빛이 없는 마을, 긴 담벼락
숲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지만
비 오고 바람 거센 들에
늙고 작은 나무 한 그루 뿐
집으로 가는 역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손가방이 없다 집으로 가는
키가 가방에 있다
망연자실 젖은 몸을 뒤척인다
깬다. 잠에서
딱 보면 아시잖아요
걸을 수 없으면 앉으십시오
바퀴가 구를 수 있는 곳이라면 함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지요
당신 같은 분만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간혹 성성한 사람이 앉기도 하지만요
그럴 때는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어요
그래야 앉을 자격을 얻는 거지요
어떤 사람도
제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람끼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앉아 본 사람은 알아요
늘 손님처럼 앉았다 가길 바랍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모는 환영합니다
일주일씩 앉는 아기 엄마도 많지만,
자연스런 아기 엄마는 하루나 이틀만 앉았다가
걸어가기 때문이지요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를
모르거나 잊고 사는 세상이길 바랍니다
어쩌다가 앉을 불행을 얻지 마시고
행여라도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턱이 없고 걸림 없는 세상, 평평을 바랍니다
낙타
동서를 오가는 대상들은 낙타가 사막에서 새끼를 낳으면
모래 속에 매장을 했다지요. 낙타는 본능적으로 새끼가 죽은
자리를 찾아 간다지요. 이정표 없는 사막에서 대상들은
길을 잃지 않고 돈을 벌었다지요. 더 이상 새끼의 무덤을
찾지 않을 때 리더의 자격을 잃었다지요.
대상들이 씌운 굴레와 고삐에 끌려가는 일꾼으로 전락한 지금,
세상에 태어나
어미 젖 몇 모금 빨다
모래 속에 묻혀 죽은 자식의
낙타야!
눈물이 속으로만 고여 등에
혹이 생겼느냐. 오늘까지
그렁그렁한 눈빛을 하고
먼, 먼 모랫길을 걷고 있구나.
모래바람 속 네 새끼들의 울부짖음
육봉(肉峰)의 눈물 마른다 한들
잊을 수야 있겠느냐.
사막의 길,
걷고 걸어도 사막의 길.
신의 이름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네 슬픔의 별, 우리는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다.
세월,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별들을
가실
뻐꾸기 울고 개구리 소리 꽉 찬 그 봄을 지나 꽃 지고 잎 푸르러 지하 어둠을 탈속한 매미의 언어를 들었겠지요
풀벌레 소리로 쓰르르 쓰르르 찬 이슬에 행구였겠지요
쓰고 달고 시고 맵고 떫은 그것은 제 각각 수 천만 년 이어받은 작법이겠지요
부실한 사연, 토실한 이유야 우주의 뜻이지만, 부실의 아픔이야 찢기거나 멍든 잎이 알겠지요
하늘 땅 그 밤 낮, 빛과 바람 맑고 흐림을 담은 거 아닐까요
풀벌레 소리, 짐승의 발자국까지 놓치지 않고 후생으로 전하는 언어랄까요
도토리나 밤 같은 것은
다람쥐가 겨울잠 자다 일어나 야금야금 읽어 내겠지요
아무래도 독해가 어려운 것은 제칠 거요
가능한 쉬운 것부터 읽어나갈 테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후손에게 우주를 알리는 유언
어디로 가고 있나요
네비게이션이 제게 말을 합니다
'길을 재탐색해야 합니다
목적지를 입력하십시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가는 길
저축이 안 되는 통장
세월만 꺼내 써 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지만요
봄날이 시키는 대로 청춘을 소비했지요
썩을 것을 부여잡고 단맛에
그늘로 기었습니다
음습한 그늘 비굴의 다리를 건너
눈물을 견디었습니다
한 생은 다 문드러지고
서리 내리는 강가에 서서
지난날에 어디선가 잃어버린
그 파아랗고 높은 하늘을 생각합니다
아무도 가리켜 주지 않은
생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것을 찾다가
경로를 잃어버렸습니다
<시인의 말>
4.16 그날 이후 그동안 평범하게 살아온 일상들이 죄스럽고 산다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때로 다정한 사람과 커피 한잔의 휴식마저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즐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듭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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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규상 / 고흥 산. <사람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고흥민주단체협의회 의장, 행의정감시연대 전남 대표.
좌골신경통 외 7편
잠자리에서도 머리를 북쪽으로 두지 말아야 한다.
밤하늘 소매쪽박도 보지 말아야 한다.
북어 국도 먹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께 감자를 북 감자로 배웠지만 감자로
또렷하게 발음하기로 했다
북 콘서트도 책 콘서트로 해야 한다
북녘으로 날아가는 철새들도 친북이거나 종북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을은 종북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봄은 친북
내 거시기도 좌로 뻗쳐있으니
이놈도 좌파-
좌우간 좌가 문제다
그런데 어쩌나
이 겨울에 찾아온 나의 좌골신경통은
소매쪽박 (북두칠성)
시란 말이시
아랫동네 소 팔아서 큰 공부한 선배를 찾아가
시집을 내밀었다
뭣인가?
시집이요
시가 뭣이 당가?
마음의 곰국이요
에끼 이사람 반이나 베께 짜깁기한 껄렁한
얼레탕도 (詩)신가 민폐네
왜요?
이 사람아 밤낮으로 눈코 돌릴 수 없이 바빠서
건너 산 처다 볼 시간도 없는디 읽으라고 갖다
중께 민폐 아닌가!
그라고 글로 써야 시고 詩人인가 시를 글로 안
써도 시처럼 사는 것이 시고 詩人인 것이여
꾀꼬리가 지 소리 좋다고 때 없이 소리만 지르면
그것이 노래가 되겄는가?
시란 씨암탉이 알을 품는 동안 물 한모금도 재대로
못 마시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수무하루 동안이
지나서야 삥아리가 되든가 구란이 되든가
하는 것처럼 말이시
그런 시라야 짚은 맛이 있는 것
시란 그런 것 아니겄는가?
금메 말이요
물리치료 실에서
인생 졸업반 어메들이 삭신을 풀었다
나는 어께를 지저야 쓰겄소
나는 모가지가 쒸세쌋는디 옹삭해서 어쩌까
어메는 허리지라?.....
치료사 아저씨가 앞질러 거든다.
이웃한 어메들이 말을 섞는다
몇 살 잡샀소?
도굿대 두 개를 포개놨소
그렇게 안 뵈는디 많이 잡샀네
집이는 몇 살이요?
팔학년 육반이나 되부렀단 말이요
그래도 나보다 두 살이나 덜 묵엇네
집이나 나나 거그서 거긍마
금메 말이요!
짐장 해놓고 매주써- 놨응께
방만 따땃하먼 올 시안은 살겄소마는
사람 사는 것이 어디 이녁 맘대로 됩디여
..........
금메 말이요
불 씨
울 집 늙은 암캐가 불이 났나보다
이장네 수캐가 뒤를 지키는 것을 보면
암캐 이름이 명색이 진돗개 진순인데
감히 잡종 씨를 어디다 심을라고
몽둥이 돌팔매질을 해대도 한눈만 팔면
끈덕지게 제 집처럼 들락거리니
철물점에 개 정조대 貞操帶 사러갔더니
허참 나 !
그런 물건은 공장에서도 안 나온다네
불이 타올라 뜨거워서 견딜 수 없을 때
제 몸 허락하고 불 꺼지면 돌아서고
돌아서는 것이 개정情이라
윗동네에 소문난 동네 개가 있었다는데
눈도 코도 없는 불씨하나 앞세우고 밤이면
골목을 어슬렁거리니 늑대라고도 하는
이 짐승은 염치도 촌수도 없이 불을 지르니
또 한 개 !
동네 개 -
그 몹쓸 불씨도 세월의 가파른 언덕에 막혀
가을 풀잎처럼 사위어 간다 하더라.
하늘을 날 때까지
이마가 점점 멀어져 간다.
공짜를 좋아 한다는 것을
머리카락이 눈치 챘다보다
흘러간 세월의 강이
살아온 날들의 오솔길이
지금도 쉼 없이 얼굴 위에 공사 중이다
아름답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마는
바위에 핀 바위 꽃조차도 밉지는 않는데
얼굴에 핀 세월의 꽃을 누가 아름답다
하리요
꽃은 피었다 지는 것이니
지혜롭게 살라는 가르침이라
혀가 둔하여짐은 말을 아끼라는 것이요
귀가 멀어짐은 적게 들으라는 것이려니
눈이 흐려진 것은 볼 것만 보라는 것이요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욕심을 비우고
가벼이 살라는 것이니
새보다 더
가벼이 하늘을 날을 때까지
상처 喪妻
교장 아재가 상처한지 삼년을 채우지 못하고
새장가를 갔다.
묏등 풀뿌리도 안 내렸는디 각시를 얻었다고
쑥덕쑥덕-
화장 빨 새 각시한테 까딱하면 살림 쪽 뽈릴지
모른다고 걱정들이 이만 저만-
들길 지날 때도 손 꼭 잡고 매달려 걷는 것도
꼴 보기 싫다고 수군수군-
교장 아재가 밥하고 빨래하고 늙은 말년에
여시한테 홀렸다고 쯧쯧-
마른자리에서 노래만 하는 매미 같은 그 각시
동네 사람들 교장아재가 고생문이 열렸다고
걱정이 태산
손끝 매시라운 교장 아짐 생각도 날것 인디
가을모과 뚝- 떨어져나간 자국처럼 교장 아재
喪妻가 상처겠지요......
매화
아직은 발 시린
삼동인데
무엇이 그리 바빠
잎새는 아직 인데
꽃 먼저 피어
봄을 깨우는지
잔설을 입에 물고도
희게 웃고 있는 그대는
꽃 동무들 다 두고
홀로 피었어도
향을 잃지 않는
그 고결함이여
본동 양반
고향 떠난 십 수 년 만에 영구차에 실려 고향 찾은 본동 양반
흙집을 짓느라.
이른 아침부터 매우고 돋우고 포클레인이 부산을 떨어 싼다.
일찍 세상 떠난 마누라 命까지 뺏어 산다고 고향사람 만나면
푸념처럼 나가 죽어야 쓸 것 인디 자석들 눈치도 뵈요 하던
본동 양반 소원 아닌 소원처럼 죽어서 고향 찾아 꽃상여도 없이
족제비 낮짝 만한 산비탈에 본동 양반이 누웠습니다.
마누라 잃고 자식들 따라 낮선 곳 "보이소 앙 그란교"
그 말을 못하고 "예말이요 앙 그라요"
사람 만나도 말 섞기가 싫어 입 다물고 물 위에 기름처럼 살다가
마른 명태처럼 피골이 상접한 육신으로 고향을 찾았습니다.
80이 넘으면 집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같다하더니
모진 것이 목숨이여서 살아도 죽은 몸으로 골방에 갇혀
살아 살던 그 세월을 지나
육신에 굴레를 벗고 그립던 고향산천 두루두루 사방팔방
훨훨~날아 나소서.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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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라 / 고흥 출생. 2010년 <시와 문화>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우주시낭송회 회원, 문학예술강사.
친절한 이웃 외 4편
우리 집엔 말벌이 세 들어 산다
봄부터 말벌들이 대문 옆 인터폰 틈새를 들락거렸다
얼마 후 햇살 몇 줌, 이슬방울 모아
아담한 흙집이 지어졌다
대문을 들고 날 때마다
내 집이 아닌 이웃집에 인터폰을 누르는 것 같다
뚜뚜 진동에 곤한 낮잠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지진 나지나 않을까
손가락 매듭만한 그 집 앞을
살금살금 눈치 보며 지나간다
난 여왕벌이야
아니지 애들 얼굴에 침을 놓으면 어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
무단철거에 거리로 나앉을
한 가족 생각에
맘 약한 이웃이 되고 만다
아내를 위하여
경기도 광주에 사는 J시인의 집엔
꺾어도 되는 장미가 있다
가위로 꽃을 자르면 쇳독이 올라
나무가 아파한다고
이쁜 꽃을 또 보려면 손으로 꺾으라 한다
천정이 높은 목조 가옥 옆 정원에서
시인은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듬뿍 넣으며
8월의 해바라기처럼 웃는다
뽕나무 가지를 지팡이 삼아 덩실 매달린
청호박이 이마를 맞대고
올망졸망 머루포도 풍경이 까르르 들어왔다
싱크대 창 가득 댓잎들이 살랑인다
아내를 위해 담벼락에 대나무 화분을 놓아두었노라고
눈을 감아도 들리는
저 몸짓들이 나를 불러왔나
살아있는 대나무 병풍을 두고
설거지하는 시인의 아내는 날마다 흔들리겠다
덩달아 그 집 진돗개 달봉이도 컹컹 짖겠다
그늘
햇빛낭자한 길 위에 선다는 건 때론 지치지
눅눅하지만 젖은 품이 참 따뜻해
어깨 위 삶의 배낭을 내려놓으면
지나온 구멍 같은 허기도 쑥 뽑힐 것 같았지
네 연약한 바탕이 맘에 들었어
눈물을 흘려도 빨리 스며들잖아
종이 한 장이면 무얼 그려 넣어도 넘치지 않지/
순한 풀잎 같은 애인과 함께라면
햇살을 끌어당겨 작은 창이라도 만들겠어
좁은 길을 내는 지렁이의 쪽방이라도 빌려
한 오백년 지하탐험 같은 여행도 꿈꿀 수 있을 테니/
촉촉한 땅의 밀도를 스스로 짜가며
네 심장을 후벼 파며 녹고 싶은 거지
햇살을 품은 부드러운 음표 쪽파인양 심어놓고
어둠을 끌어안고 노래하는 무늬였던거야
옥탑방으로 가출을 한다
가을 숲에는
태양을 꿈꾸다 스러진 것들이 흩어져 있다
아직도 이글거리는 상수리 꼭지들
달을 꿈꾸다 열매가 되고
별을 닮으려다 단풍잎이 되어버린 것들
큐피트 화살로 인해 어긋나버린 관계처럼
산에 들어도 사람이 많고
바다엘 가도 배를 구할 수가 없다고
안으로 품어버린 뜨거움이 핵으로 쏟아질 때
옥탑방에 가면 별이 하나 뜨려는가
자기만의 예쁜 방도 마다하고
세상이 다 보이는 옥탑방으로 날마다 가출을 한다
다프네의 월계수는 아닐지라도
옥탑방으로 가출한 어린왕자는
달에 사다리를 걸어 놓고 돌절구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풍선인간
사람 숲으로 오갈 데 없는 신촌 사거리에서
‘꽁짜폰’선전에 사지를 뒤틀며
풍선인간은 길이 열려있다고 유혹한다
온몸을 흔드는 일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는 듯
누구를 위해 춤을 추는지
무엇이 저토록 허리를 꺾어
관절조차 끊어 엎드리게 했을까
공짜도 모라라서
텅 빈 허울을 둘러 쓴 채
출출한 빈속도 아랑곳 않고 막춤을 춘다
흔드는 세상 속에서 만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데
하늘 높이 날아 지친 몸을 아물 수 있게
날개를 다는 포퍼먼스일까
“저를 통째로 드립니다!”
“주머니가 빈 분일 수록 우대합니다!”
목적지를 가르쳐주지 않는 먹장승처럼
설탕으로 혀끝을 마비시키는 버블 빵처럼
마지막까지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제는 명목도 없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일부러라도 흔들려야 한다고
바람이 머물러서가 아니라
스스로 바람을 만드는 일이라고
홀로 향기를 채우는 일이 오직 날 위해 추는 춤이라고
밤낮없이 삐에로가 되는 몸짓이어야 한다고
혀를 버리고 몸을 버리고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고
<시인의 말>
꽃무릇에 대한 단상 지지난해...꽃무릇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밭에서 왜 잎이 없나 궁금했었다.
꽃무릇 전설을 알고난 후, 지난해........꽃과 잎이 만날 수 없음에 옆구리로 태어난 슬픔같았다. 올해...꽃무릇 꽃밭을 지나며 '원래 만날수 없는 인연이었던 거야... .' 이렇게 생각하니,
꽃이 피고 지는 거의 두주동안 담담히 꽃의 아름다움만 생각하며 꽃을 보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꽃 저런 꽃이 있다는 거! 꽃으로만 당당히 피어 더 자주적인 꽃! 더 싱싱하고 건강한 잎이 올라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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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선 / 서울 산. 2001년 <전태일 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산문집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 현재 녹동고 교사. 고흥작가회 총무.
영원 외 4편
오늘은 담임선생님 생일
가족과 같이 있지 못해 서운해도
이번엔 저희랑 보내요
밤바다 폭죽에 놀라
우리를 실은 고래가 어디론가 사라진대도
누군가 손도끼로 창문을 깨뜨리나요
우리 반 떼창 소리 너무 커
지상에서 발 구르는 울음 소리 들리지 않는
여기는 노란 꿈결 망망대해
괭이갈매기야 바다제비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기우는 세월호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헤엄쳐 가고 있단다
폭죽은 별똥별로 우르르 쏟아져
심해 불가사리로 영원히 반짝거릴겁니다
늘 가만가만 있으라 했지만
유일하게 우릴 버리지 않은, 선생님.
엄마, 아빠
전부 사랑합니다
부름
하얀 그릇 뜨거운 밥을 푸고 육개장을 담는다
돼지고기 수육에 새우젖을 얹는다
이런 날에 홍어회가 빠지면 안된다
묵은 김치 한 접시 소주 한 병 쟁반에 담아
제일 먼저 달려온 농민회 사람들 사이에 앉으니
팔영산 축사에서 키우는 소처럼
큰 눈 꿈뻑꿈뻑 기골장대한 아저씨가 손짓하며
술 한 잔 먹자 한다
경선씨, 사는 게 어때요
영등포에서 해창만 건너 발포바닷가 마을에 도착하니
꼬박 하루 저물고
난생 처음 농사일도 시부모님과 사는 일도 어려워요
동네 사람들 농민회 사람들 마음 터놓기 불편해요
두원 사는 선배가 벌떡 일어나
우리가 기억하는 그 분 이야기를 해보자며 울컥했지만
차마 아무도 일어나 말하지 못한다
땅도 사람도 빚도 많은 아저씨,
저는 이제 그만 공부해서 학교로 갈래요
오랜만에 사방에서 잔뜩 크게 들리는 소리
오늘도 이야기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 모를 소리에
조금은 웃음이 나는 날
한 사람이 떠나자 흩어졌던 모두가 모인 날
왁자지껄 사람들 사이
흐릿하게 앉아 웃고 있는 아저씨
구월의 국화꽃 향기 짙고
해승 언니 눈물 범벅이다
구월
잡은 손 놓고
그 이름 입속에 넣고
잘게 씹어
톡 톡 내뱉자
말은 숨고 별빛이 난다
깊은 밤바다 달빛이 기다리고
섬 사이 밀물 쓸려와 발목에 닿을 때도
공연히 들뜨지 않도록.
공간과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좀 더 뒤로 물러나 걸으며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동그랗게 굴려 내뱉으면
더듬더듬 환해져 반딧불이가 된다
오래 전 그날 우리가 그러지 못했듯이
꽃아이
고흥 바닷가 마을에서 살기 위해
집을 장만했다는 친구 생각에
서귀포 어느 미술관 공방에서
집들이 선물로 액자 하나를 샀다
전쟁이 끝나고
한 남자를 사랑한 어느 외국인 여자가
홀로 현해탄 건너와
아이들 낳고 발가락을 서로서로 간질거리며
끌어안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다 같이 홀딱 벗고 놀았던 섶섬 바닷가
3평 남짓한 식구의 방은 몽환적이어서
그 순간 남자의 그림은 평화로웠단다
가난한 가장이었던 화백이
한 해가 온전히 저물 때까지 가지지 못한 풍경
이 액자 속에 하나 남겼으니
친구여, 너는 이 꽃아이가 닳아 없어질 먼 훗날까지
너의 가족과 오래오래 입맞추고 살아라
부엌
오늘처럼 여름비 내리는 날이면
나도 사카린을 조금 넣고 감자를 찐다
고층아파트 13층 부엌에서
어머니는 온갖 장을 다리고
사시사철 김치를 담그고
시래기와 무를 말리고
메주콩 삶아 가지런히 청국장까지 만들었다
늙은호박물 마시고 혈압약 당뇨 약 우울증 약 삼키고
그렁그렁 빗물까지 다 삼키면
못 배워 가족들이 다 무시한다며
궁시렁 궁시렁 말들을 늘어놓으시다
연필을 깍아 네모 칸 공책에 글 쓰던 곳
감자 찌는 냄새 따라 창밖을 바라보니
어머니는 등을 보이고 음식을 하신 게 아니라
강 건너 바라보고 서있었다는 것을 안다
한 덩어리 세찬 바람이 지나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면
어머니 부엌도 고스란히 받았으리라
씻고 만들고 담는 부엌 가장자리에서
어머니는 생각하고 쓰고 담고 비우고 퍼주었으리라
나도 나의 부엌에서
감자가 잘 삶아지기를 기다리며
연필을 깎아 창문을 연다
<시인의 말>
4월 16일 이후에 나의 말과 손과 발과 마음이 달라졌는지 자문해 봅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뭐라도 말하고 소리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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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시인의 말> 첨부 안된 회원/ 김훤구,양동선,이광호,임규상 회원
조속히 협조 부탁드립니다.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2. 출신 소개 형식/ 에1) 도양읍 장계리 산. 조경선 시인 외에 나머지 분들은 고흥은 기본이니 명기할 필요 없고 그 다음 지명을 명기해 주십시오. 예2) 점암면 성기리 산.
그늘
-장수라
햇빛낭자한 길 위에 선다는 건 때론 지치지
눅눅하지만 젖은 품이 참 따뜻해
어깨 위 삶의 배낭을 내려놓으면
지나온 구멍 같은 허기도 쑥 뽑힐 것 같았지
네 연약한 바탕이 맘에 들었어
눈물을 흘려도 빨리 스며들잖아
종이 한 장이면 무얼 그려 넣어도 넘치지 않지/
순한 풀잎 같은 애인과 함께라면
햇살을 끌어당겨 작은 창이라도 만들겠어
좁은 길을 내는 지렁이의 쪽방이라도 빌려
한 오백년 지하탐험 같은 여행도 꿈꿀 수 있을 테니/
촉촉한 땅의 밀도를 스스로 짜가며
네 심장을 후벼 파며 녹고 싶은 거지
햇살을 품은 부드러운 음표 쪽파인양 심어놓고
어둠을 끌어안고 노래하는 무늬였던거야
<문득>대신 <그늘>로 교체합니다
<옥탑방으로 가출을 한다>에서
9행 뜨거움들이--->뜨거움이
14행 가출중인--->가출한
늘 바쁜 일상속에서 수고 많으셨네요!! 살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늘 건강하시고 11월에 뵙겠습니다.^^ 간단한 <시인의 말>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뿌리의 힘>에서 호랑나무가시--->호랑가시나무 수정 / 약력에서 고흥군 과역면 백일리 추가(통일해야 한다면), 본명 김선자 삭제, 머루시 동인 활동 삭제 / <시인의 말> 에서 마지막에 이어붙이기. --> 내가 아는 시란 입으로 떠들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롯이 가슴으로 쓴 내 시에서 내 모습이 읽혀진다면 다행이다.
이 부분 수정요함=<시인의 말 중>두 곳의 집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없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두 채의 고향집이 아른거렸다.-아른거린다. 로 수정하세요.
그리고 약력에 논술, 사회교육, 문해교사 로 수정하세요. ^^
(참고로 문해는 문예와 다릅니다. 글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한 한글가르치는 교사입니다.)즉 비문해자들을 가르치는 자.
사회교육으로 문예강사 활동 중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