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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는 성공하고 정치에서 실패한 원칙론자
-정암(精庵) 조광조
율곡 이이는 그를 두고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여기서 ‘그’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精庵) 조광조(趙光祖ㆍ1482년∼1519년)를 가리킨다. 부패와 비리로 가득한 조정에서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올곧은 성품으로 개혁 정치를 펼치려 한 그의 삶을 살펴본다.
1. 가계와 학업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2. 관력과 정치 활동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였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한 뒤 곧이어 정랑이 되고,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3. 도학정치의 주장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하였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하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자39)·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 실시를 통하여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4. 정치개혁의 노력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成希顔)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하여 반정하였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즉,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이를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 당하기에 이르렀다.
5. 정치개혁의 반향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경빈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하여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6. 정치개혁의 실패 원인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 하다가 노련한 훈구 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를 후대의 명석한 학자인 이이(李珥)가 잘 말해주고 있다. 즉, 그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하였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
7. 사후의 상황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ㆍ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司)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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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11월에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조광조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학자였다. 그는 1515년 성균관유생 2백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 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할 목적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하여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 二倫行實>과 <언해여씨향약 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이 같은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어 정적이 생기고, 또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 이행 등의 사장파와 서로 대립하게 되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훈구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이 1519년에 있었던 반정공신(反正功臣)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한 결과,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의 과분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이용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 (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子)'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 김전, 남곤,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홍경주로 하여금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이때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이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 안당, 정광필 등은 이에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밖에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이자(李자),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명은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惟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먼 원인으로 하고,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하여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삭훈사건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폭발된 것이다.
이 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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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집(靜庵集)
조선 전기의 정치가·학자 조광조(趙光祖)의 시문집. 본집 5권, 부록, 속집 4권 합 10권 5책. 목판본. 이 책은 당초 이기주(李箕疇) 등이 유문(遺文)과 사적(事蹟)을 수집하여 그의 5대손 위수(渭修)에게 준 것을 선조의 어명으로 김굉필(金宏弼)·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의 문집과 함께『유선록(儒先錄)』이라는 이름으로 찬록(纂錄)되었다. 그 뒤 1683년(숙종 9) 박세채(朴世采) 등에 의하여 원집(原集) 4편에 부록을 추가, 5편으로 편찬되고 송시열(宋時烈)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이때 간행한 판본은 영본(嶺本)과 호본(湖本)이 전하여오고 있었는데, 영본은 대구에, 호본은 능주(綾州)에 있는 죽수서원(竹樹書院)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그 뒤 죽수서원본을 저본(底本)으로 양회연(梁會淵)이 민정식(閔正植)의 후원을 받아 1892년(고종29)에 간행된 것이 이 책이다. 이것이 삼지재본(三芝齋本)으로, 먼저 간행된 판본에 빠져 있는 연보가 추가 수록되었다. 1683년 송시열의 서문과 1892년 송병선(宋秉璿)의 중간 서문이 있고, 1681년 박세채의 발문과 1891년 정범조(鄭範朝)의 중간 발문이 있다. 권두에 「숙종대왕어제독정암집유감(肅宗大王御製讀靜庵集有感)」이라는 짧은 어제간행후문(御製刊行後文)이 있고, 어제시에 대한 후지(後識)·중간 서문, 원집과 부록의 목록이 있다. 권1은 부(賦) 1편, 시 5수, 권2는 대책(對策) 1편, 소(疏) 1편, 계사(啓辭) 13편, 서(書) 1편, 잠 1편, 묘갈 1편, 공장(供狀) 3편, 권 3은 경연진계(經筵陳啓) 44편, 권 4는 경연진계 36편, 습유(拾遺)로 계(啓) 5편, 권5는 연중기사(筵中記事) 4편, 습유에 기사(記事)와 유묵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은, 권1은 사실(事實), 권2는 어류(語類), 권3은 계·소·차, 권4는 전지(傳旨)·제문·축문·기문(記文)·발문, 권5는 세계와 연보, 권6은 행장·묘지명·신도비명·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대책의 “알성시책(謁聖試策)”은 그가 과장에서 왕의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치국의 경륜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어 그의 학문과 정치적 안목을 말하여주는 글이다. 소의 「홍문관청파소격서소(弘文館請罷昭格署疏)」는 성리학의 입장에서 도교를 허탄(虛誕)한 것이라 비판하고, 불교는 차원이 높으나 민생 일상생황에 실상이 없다는 점을 들어 각각 이단으로 몰아 배척한 내용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견해와 사상을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또한, 계사의 「사간원청파양사계(司諫院請罷兩司啓)」와 「양사청개정정국공신계(兩司請改政靖國功臣啓)」는 모두 왕정이 어떠한 정규(定規)가 없어 착오가 생긴 것을 지정하라는 내용이다. 전자는 박상(朴祥)·김정(金淨) 등 신진사류들이 신비(愼妃)를 폐출하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한 대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고, 앞으로는 대간의 언로를 넓혀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며, 후자는 중종의 반정공신 가운데 성희안(成希顔)과 박원종(朴元宗) 등이 무식하여 유자광(柳子光)을 공신록에 넣는 등 공신의 녹정(錄定)이 잘못되었음을 공박한 글이다. 이로 말미암아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 사화로 그 자신은 정치적으로 제거되었다.
조광조는 16세기 사림파의 대표자로 훈구관료에 대하여 반대적인 입장에서 도학정치와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시의(時宜)에 맞지 않아 좌절된 사람으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사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의 학통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의 도학연원(道學淵源)을 이어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