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장 주석
세례 요한의 증언 (마가복음 1:1-8)
우리는 아래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우리는 여기에서 신약 ─ 어떤 인간적인 일보다 우리가 더욱 고수해야 하며, 어떤 옛 것보다 우리가 더욱 추구해야 할 신약 ─ 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1절).
1. 신약은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신실하고 참되다(계 19:9; 21:5; 22:6). 그것은 선한 말씀이며 모두 받아드리기에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
2. 신약은 성서에 약속이 되어 오래 바라던 메시야 즉, 기름부음 받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전의 복음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복음에 대해서 예비적인 서문이라 할 수 있고 본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사업부터 직접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저자이며, 그에게서 복음이 왔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주인공이며 복음은 전적으로 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바로 이 진리를 근거로 복음이 수립되었고 복음이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
Ⅱ. 신약과 구약이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신·구약은 서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되었다(1절). 그리고 우리는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대로(2절) 복음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선지자들이나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행 26:22) 말하지 않는데, 그 점은 유대인들을 설복시키는데 아주 적합하고 효과적이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보내셨음을 믿었고,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때가 이르면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됨을 환영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구약과 신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확립을 위해서나, 신·구약의 빈틈없는 조화는 바로 신·구약의 성서가 하나님에게서 주어졌음을 보여 주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한 예언들은 두 예언서에서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가장 긴 예언서인 이사야서이고 하나는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이다(그리고 그들 간의 연대 차는 3백년 이상이 된다). 그들 두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에 관한 요한의 임무에 대해서 같은 목적을 언급하였다.
1. 구약에 대해서 작별 인사를 한 말라기서는 신약에 대해서 환영 인사를 하는 세례 요한에 관해서 아주 분명하게 예언을 하였다(말 3:1).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2절). 그리스도 자신도 이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해서 언급하였다(마 11:10).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을 받았다.
2.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복음적인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는(사 11:3 절)이 말씀으로 그의 예언의 복음적 부분을 시작하고 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3절). 마태 역시 이 말씀을 주의하여 세례 요한에게 적용하였다(마 3:3). 그러나 여기에서는 두 곳의 예언을 함께 적용하였다.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은혜와 보화들과 왕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다.
(2) 세상이 몹시 부패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복음의 무대가 마련되어야 했고 복음 사업에 지장을 주는 장해물이나 방해물을 제거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에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또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 심령에 보내실 때에 하나님은 충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의 길을 예비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획이 실패하지 않게 하신다. 죄를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
(4) 구부러진 길들이 곧게 고쳐질 때(잘못된 판단이나 그릇된 애착을 버릴 때)그리스도의 위로가 임하게 된다.
(5)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할 때 광야를 통과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이 준비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준비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 광야이다.
(6)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와서 죄에 대한 각성과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사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영접해야만 한다.
(7) 이와 같이 광대하고 황막한 광야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목청을 아끼지 말고 나팔 소리와 같이 큰 소리를 내어 외쳐야만 할 것이다.
Ⅲ. 신약은 무엇부터 시작하고 있나를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은 세례 요한부터 시작하였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진 것이다. 베드로도 세례 요한부터 언급하였다(행 1:21). 복음은 너무 성급하게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눅 2:25)려면 얼마간의 세월이 걸려야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신 시기에 너무 늦지 않은 반년 전에 요한이 등장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뒤에 그리스도께서 똑 같은 복음을 전하셨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복음의 날의 서광이었다. 다음에서 이 점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1. 세려 요한이 광야에서 살아온 생활 양식은 바로 복음의 얼의 발로였다. 왜냐하면 그의 광야 생활은 전적인 자기 부정과 육체의 금욕과 세상의 불의에 대한 경멸과 세상과의 비타협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런 일이야말로 어떤 영혼에게 있어서나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 6, 7). 세례 요한은 부드러운 외투가 아니라 "약대 털을 입고," 황금의 띠가 아니라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 맛 있고 우아한 음식이 아니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6절). 우리가 몸의 소욕에서 해방되면 될수록, 그리고 세상을 초월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 나은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을 명심하라.
2.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행한 설교와 세례를 복음의 교훈과 세례 예식의 시작이며 그들에게서 시초로 첫 열매를 얻는 것이다.
(1) 그는 죄 사함을 전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귀중한 복음의 특권이다. 죄 사함이 없이는 멸망을 피할 수 없느니 죄를 용사 받도록 하라고 전하였다.
(2) 그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회개를 권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심령에 새로운 변화와 그들이 생활에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야 함을 주장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마땅히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하며 그렇지 아니하고는 그들은 사죄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도록"(눅 24:47)하라는 것이 사도들이 위탁받은 임무였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리고 그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속히 나타나실 것을 기대하라고 하면서 그가 오실 때 그에게서 귀중한 사실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순 복음이며 세례 요한의 증거가 그러한 것이었다(7, 8절). 세례 요한은 참된 복음의 증인답게 다음 사실들을 전파하였다.
[1]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무 고상하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한 세례 요한이지만 자기는 예수에 대하여 지극히 적은 일도 감당키 어려울 것임을 스스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7절). 그는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열심을 다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도록 인도하였다.
[2]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큰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증거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적으로는 "내 뒤에 오시나"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분이시며(7절) 지상에 어느 능력자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기" 때문이다(8절)기로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을 주실 수 있으시며 그분에 의하여 인간의 영혼이 다스려질 것이라고 증거 하였다.
[3] 세례 요한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성령의 세례와 그의 은혜로 말미암는 정결과 그의 위로를 통한 새 힘을 얻게 될 것을 그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음을 전하였다.
[4] 세례 요한은 그의 교훈을 받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유대인들이 개종자들을 받아드릴 때 하는 방식과 같이, 회개로 말미암아 그들이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신다는 표로 그들에게 물 세례를 주었다. 이 일은 그 후에 복음적인 세례 예식으로 더 발전하였지만 결국 요한의 세례가 그 시초가 된 것이다.
3. 요한이 전도에 성과를 거두고 세례를 베푸는 일로 말미암아 제자들을 얻게 되어 복음적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이나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갔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5절). 그들은 스스로 요한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고 요한의 규율에 따르기를 원했다. 그 표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였으며 요한은 그들을 자기의 오늘날 제자로 삼았고 그 표로서 그들에게 물세례를 베풀었다. 여기에 복음적 교회의 생기가 있는 것이다. "새벽 이슬같이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후에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가지"가 된 셈이다(막 4:31, 32).
예수님의 사역 준비 (마가복음 1:9-13)
우리는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과 광야의 시험에 대하여 간단히 요약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태는 이 기사를 3장과 4장에서 길에 언급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은 오랫동안 나사렛에서 이름 없이 지내신 후 처음으로 대중 가운데 보이신 등장이었다. 이 세상에는 멸시의 먼지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못하였거나 겸허의 베일 속에 싸여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보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불원간에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나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겸허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계신가를 보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하나님은……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오직 흠 없고 없는"(벧전 1:19)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림바 되었으며"(사 53:3) "우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고" 자기를 거룩하게 하였으니(요 17:19)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를 거룩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자"(롬 6:3).
2.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에 순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화롭게 그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는가를 보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요한의 세례를 받아 하나님을 의롭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눅 7:29, 30),
(1) 예수께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그를 주로 인정하였다. 그 앞에 기쁨과 영광의 빛이 임하였다. 그리고 그의 맡은 임무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였다. 마태는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마 3:16)라고 표현하였고, 마가는 "하늘이 갈라짐과 ……내려오심을 보시더니"(He saw them opened)(10절)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당하실 고통을 분명히 내다 보셨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내다 보셨던 것이다.
(2) 예수께서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었다(10절).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역사 하심을 느낄 때 하늘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음에 주의하자. 우리 안에 행하시는 그의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선한 뜻과 우리를 위한 당신의 준비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요단 강에 불이 켜졌다"고 하였다. "큰 빛이 그 주위를 비추었다"고 보는 것이 고대의 전설이다. 그 이유는 성령에게 빛과 열을 동반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3) 예수께서 들으신 하늘의 음성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들려졌으므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절)고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아래의 사실들을 알게 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그러한 낮고 천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조금도 다름없이 그를 사랑하신다. 비록 그처럼 자기를 겸허하게 하고 명성을 떨치지 않았다 해도 "그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나님은 알게 하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지금 자랑스럽게 그리고 친절하게 착수한 그 임무 때문에 그를 더욱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 되는 모든 문제들의 중재자로서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 성령에게 임하셔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시었다"(12절). 사도 바울은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갈 1:17)고 말하고,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하였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물러남은 하나님과 더욱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느 적당한 시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머물러 계시던 광야의 상황을 살펴보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13절)라 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 보셔서 그가 들짐승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 주셨다는 한가지 실례가 될 수 있으며, 그 사실은 또한 그가 시장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채워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는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표징이다.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낸 그 사실은 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아야 할 그들, 즉 광야의 들짐승보다 더 나은 점이 없고 오히려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잔인성에 대한 암시가 될 수도 있다. 끝으로 그 광야에서 되어진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그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악령들은 매우 바빴다.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13절). 내부적인 침투가 아니라 외부적인 유혹이었다. 염려는 흔히 유혹자에게 이익을 준다. 그러므로 혼자보다 둘이서 같이 있는 게 좋다. 그리스도 자신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단지 시험을 받는 것이 죄는 아니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어디로 가서 구조를 받아야 되는가를 직접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2. 그 광야에서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분주하였다. 천사들은 예수를 수종들었다(13절). 그리스도께서 필요하신 것을 공급해 주었으며 충성스럽게 그를 받들어 섬겼다.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보살피는 천사들의 임무를 생각해 보라. 우리를 향해 도전해 악령들의 간교에 대하여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사들보다도 더욱 친근감을 주고 친히 우리 심령 속에 들어와 내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을 모신 자는 "하나님께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을 악령이 해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악령들의 세력을 멸하신다.
예수님의 사역 개시 (마가복음 1:14-22)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신 일반적인 기사를 기술하였다. 요한은 이 기사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유다에서 복음을 전하신 기사를 기록하였는데(요 2, 3장), 그 일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생략하고 다만 갈릴리에서 일어나 링을 간단히 이야기하였다. 그 이유는 그 일이 예루살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한 때는 "요한이 잡힌 후"(14절)임을 주목하라. 요한이 증거하기를 마칠 때 예수께서 증거 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침묵을 지킨다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은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에 어떤 사역자들이 딴 길로 빗나갈 때는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 있는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에 세우실 것이다.
2. 예수께서 전파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14절)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을 전파하심과 거기에 따르는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아래에서 이 점을 더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중대한 진리는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다(15절). 이 말씀은 메시야 왕국이 약속되었고 그 왕국의 도래의 때가 정해져 있는 구약의 말씀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들은 구약 예언서들에 잘 나타나 잇지 않고 그 때의 징조들에 대해서 그들이 스스로 이해할 만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대해 밝히 언급하신 것이다. "예정된 때가 지금 거의 다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지금 장엄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까지 지내온 것보다 훨씬 신령하고 천국과 같은 새로운 때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지키심을 주의하라. "때가 찼을"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15절)하였다. 예언에는 이루어지는 때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체되지만 철저하게 관찰해 보아야 한 다.
(2) 거기로부터 오는 큰 의무들이 언급되어 있음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정한 때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언급하심은 그들로 때를 알아서 마땅히 할 바가 무엇인가 알게 하기 위하심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야가 외관상으로 화려와 권세를 가지고 출현하여 유대 나라를 로마의 속박에서 자유케 할 뿐 아니라 그 인접 국가들을 지배하게 될 것으로 알고 자못 부푼 마음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을 때 마땅히 전쟁을 준비하고, 그들이 얻을 승리와 영광을 위해서 준비하고, 이 세상에 나타날 큰 일들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 왕국이 가까웠음을 전망하면서 그들에게 마땅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도덕적 율법의 계약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아 그 치료의 법에 따라야만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행 20:21). 그들은 예방의 처방에서 실패하였으니 치료의 처방에 의뢰해야만 한다. 회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버려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회개로 말미암아 우리가 범죄하여 노엽게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우리의 속죄 주 예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항상 동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이 회개에 의한 생활의 변화 자체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심령과 생활의 변화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두 가지를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가 보조 역할을 하고 서로가 친숙한 관계에 있다. 회개는 믿음을 일깨워 주고 믿음은 복음적 회개를 가능케 해 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대한 성실성은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근면하고 양적인 복종에 의해서 증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회개하고 믿으라"는 말로 시작하고 "회개의 생활을 하고 믿음의 생활을 할"는 말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의 교사와 같이 등장하셨다. 여기에 그의 제자들의 부름을 살펴보도록 한다(16-20절).
1.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학교를 세우신다면 그는 학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만일 그가 군기를 세우신다면 군인들을 얻을 수 있으셨을 것이고, 만일에 그가 설교를 하신다면 그는 많은 청중들은 얻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방법을 취하셨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요 6:37)하셨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택한 그릇들은 "세상에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이었다"(고전 1:27). 저 유명한 산헤드린(예루살렘에 있었던 장로회 또는 대법원 심의회)에서나 랍비들의 학교에서 부른 것도 아니고 바닷가의 어부들 중에서 택하셨으니 그것은 탁월한 능력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이고 사람에게 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3. 비록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인간의 도움을 유효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엄한 분이 아니라 친숙한 분으로서 대하시고, 우리로 그의 나라에서 왕과 통치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다(렘 30:21).
4.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천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일에 부지런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부들이고 형제끼리 같이서 종사하고 있음을 아셨다. 근면과 협동은 좋은 일이고 즐거운 일이다. 그린 곳에 예수께서 축복을 하신다. "나를 따르라"는 이 축복까지도 허락하신다.
5. 목사들의 사업은 영혼을 낚아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이다. 인간들은 본래의 상태에서 잃어버린 자들로서 이 세상의 대양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물결의 방향과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있다. 그들은 무능력하고 무익한 자들이다. 마치 물 속에 있는 큰 물고기 리워야단과 같이 그들은 거기에서 놀고 있고 바다의 고기들처럼 자주 서로를 삼켜버린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물 속에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마 13:47). 어떤 물고기들은 잡혀서 바닷가에까지 운반되나 대부분의 고기들은 피해서 달아나 버린다. 어부들은 여러 번 헛수고를 하게 되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된다. 사람을 낚는 어부인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가 필요하다. 설사 여러 번 헛수고를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계속 20일을 해야 한다.
6.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야 한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일에 지장이 되는 것이나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데 장해가 되는 것은 버려야 된다는 것이다.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을(20절)주목하고 있는데 여기에 삯군들은 그들의 동업자들이요, 동료들로서 아마 형제들처럼 다정히 지내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친척들도 동료들도 친지들도 다 버려 두고 따라 나서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부친을 버려두고 떠나게 되는 마당에서 부친을 보살펴 줄 어떤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버려두고" 한 것은 그들이 부친을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암시일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이 표현은 그들의 부름은 그들의 동료들에게도 유익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계속 배 안에서 일하며 급료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일손이 모자라지만 그들은 예수를 따라 나섰다.
Ⅲ.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의 성읍 가운데 하나인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하신 특수한 기사가 나와 있다. 비록 세례 요한이 복음 전도의 무대를 광야로 택하여 일을 잘하고 성과를 거두었지만 가버나움은 거기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셔야 했다.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의향과 기회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이 두 가지는 다 필요한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오시자 그는 당신의 복음 사업에 곧장 자신을 적응하여 복음 전도의 첫 기회를 바로 포착하였다.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일은 많이 생각해 놓고 시간은 조금만 들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 비록 그가 안식에 대한 세밀한 장로들의 전통에 매이지는 않으셨지만 훨씬 나은 각도에서 안식을 수립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쳐서 열심히 안식일에 복음 전하는 일을 하셨다.
3. 안식일은 기회가 있는 대로 종교적 집회에서 거룩하게 되고 거룩한 무리들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날이다. 이것은 비교적 잘 지켜온 옛 방법이다(행 13:27; 15:21).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곧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셨다.
4. 안식일에 종교적 모임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는 무리들은 예수에게 있는 권리를 배웠다.
5. 그리스도께서는 많이 볼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선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22절)하였다. 서기관들은 마치 배우는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모세의 율법을 한 줄씩 읽으며 설명하였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들이나 배우는 자들이나 그들은 율법과 친숙하지도 못하였고 효과를 거두지도 못하였다(바울 자신도 그가 바리새 교인으로 있을 때에는 율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파하도록 위탁받은 복음을 "권세 있는 자와 같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같이 가르치셨다.
6.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놀라게 될 일들이 많다. 우리가 그의 교훈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감탄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심 (마가복음 1:23-28)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단을 정복하고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그의 복음적 교훈의 의도와 경향을 암시하는 듯하였다.
아래에서 이 말씀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Ⅰ.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는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 성경 기절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 33절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악령은 사람을 결박하여 자기 마음대로 주장한다. 온 세상이 악령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엡 6:12). 어떤 분은 몸이 영혼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영혼이 몸 안에 있다기보다 몸이 영혼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마치 사람이 열로 몸이 뜨거웁거나 흥분해 잇는 것처럼 더러운 귀신에게 정복되어 거기에 빠져 있다. 마귀가 여기에서 "더러운 귀신"이라고 표현된 것에 주의하라. 그것은 마귀는 본래의 순결성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는 정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회당 앞에" 있었다. 그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나 고침을 받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적하거나 방해를 놓기 위해서 왔을 것이고 회중들로 그리스도를 못 믿게 방해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더러운 귀신이 그리스도에게 표현한 노한 소리를 살펴보자. 그리스도 앞에서 마귀는 고통스러운 듯이 그리고 추방당할 것이 두려운 듯이 소리 질렀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느니라"(약 2:19). 귀신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였으며 그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았고, 그렇다고 그리스도에게 머리를 숙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본문 24절에 귀신이 외친 말을 볼 수 잇다. 여기에서 귀신은 항복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끝장이 날 것도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 귀신은 그 사람과의 동맹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귀신은 예수의 신분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1) 귀신은 예수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예수를 그렇게 부른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귀신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에게 대한 존경심을 없애버리려고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귀신은 거짓말쟁이로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잘못된 편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귀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하는 귀신들린 여자도 사도들에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와 비슷한 고백을 하였다(행 16:17).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를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자들은 마귀보다 더 나을 게 없다.
(3) 귀신은 자기다 그리스도에게 상대가 안 되며 그리스도의 능력을 대항할 수 없음을 바로 인정하였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왔나이까"(마 8:29).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절). 이것이 바로 악령들의 가련한 소리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반항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이 멸망할 것을 알고 있다.
(4)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일도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절망과 그리스도에게 멸망하리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홀로 있게 하소서." "우리를 떠나소서." 이러한 말들이 바로 귀신들이 전능하신 그리스도에게 말한 것들이다. 귀신은 자기가 "더러운 귀신"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두려워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 8:7) 특히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그러하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귀신을 멸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어떤 아첨이나 협박을 받을지라도 이 마귀 소탕전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를 홀로 있게 하라"는 애원이나 탄원도 헛된 것이다. 마귀의 세력은 파멸하고야 말 것이며 불쌍한 사람은 구원받아야 한다.
(1)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령을 하신다. 그가 "권세 있는 자"같이 가르치신 것처럼 그렇게 병을 고쳐 주시었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었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기도 하시고 위협도 하시고 침묵케도 하셨다. 여기에 "잠잠하라"는 원어 "fimw,qhti "의 뜻은 "입에 자갈을 물려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더러운 귀신이 아첨하거나 짖어댈 때 "자갈을 물려" "잠잠하게"하신다. 마귀의 그와 같은 고백들은 그리스도께서 무시한 것처럼 누구에게도 인정을 못 받는다. 귀신들은 고백의 가면 아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그들의 사악하고 해로운 계교를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 고백은 주 예수께 이중적인 혐오밖에 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범죄의 유혹자란 이름이 그것들에게 타당함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로 하여금 침묵과 수치를 당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귀신에게 "잠잠하라"고 하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이유이다. 귀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을 해롭게 할 악행이 금지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더러운 귀신은 항복했다. 그것은 다른 구제책이 없기 때문이다(26절). 귀신은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 몸에 큰 상처를 입고 죽는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귀신은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그 울분을 그 사람에게 쏟아 이 불쌍한 사람을 사정없이 괴롭힌 것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불쌍한 영혼을 사단의 손에서 구원하여 낼 때 그 영혼에는 비참한 동요와 격동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간악한 원수는 그가 멸하지 못한 영혼들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귀신이....큰 소리를 지르며"(26절) 소동을 피움으로써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자기가 무서운 존재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비록 그가 패배하였지만, 지금 패하였으므로 다시 힘을 내어 실지를 회복하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Ⅱ. 이 기적이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 준 인상.
1. 이 기적을 보는 사람들은 다 놀랐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27절) 그 사람이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그 귀신이 그를 상하게 하고 큰 소리를 질렀던 일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귀신이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미암아 쫓겨 나간 사실도 분명하였다. 이 사실은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고 묻고 생각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되어졌음이 그들에게 확신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명령을 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그는 또한 "더러운 귀신을 명한 즉 순종하는"(27절) 권세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유대 나라의 귀신 추방자들은 주문을 외우거나 마귀를 불러내어 악령들을 추방하는 척하는데, 지금 되어진 이 일은 전혀 다르게 "권세"를 가지고 "명한 즉 순종하는" 것이었다. 악령들을 지배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친구로 삼는 일은 우리에게 분명히 유익한 일인 것이다.
2. 이 소문은 곧 퍼져 모든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명성을 알게 하였다.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니라"(28절). 갈릴리는 가나안 땅의 세 번째 부분이다. 이 소문은 여러 사람의 입과 글을 통해서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목을 끈 것은 이 얼마나 "권세 있는 새 교훈"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은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것이다(요 3:2). 비록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기대한 그러한 외관상 화려와 능력으로 오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상한 인격 아래에서 영광의 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므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지금 당신의 길을 스스로 준비하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행하신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은 자세하게 널리 퍼져야만 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상승하는 그리스도의 a여성을 시기한 나머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마 9:34)는 참람된 말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모든 그들의 허황된 선전을 무익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심 (마가복음 1:29-39)
아래에서 이 말씀들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Ⅰ. 여기에서 먼저 그리스도께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신 기적에 대한 특별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에서도 우리가 살펴본바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사방에 그의 소문이 퍼지게 한 그 일을 행하신 두에도, 그들의 명성이 상승할 때 가만히 방에 머물러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조용히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러시지 않으셨고 계속해서 선을 행하셨다. 그 일이 당신이 목적하신 바이고, 명성을 얻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은 그의 이름을 떨칠수록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서 근면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 주시던 "회당에서 나와서" 그를 수행하던 가난한 어부들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시었고, 당신의 신분에 비해 천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소유하신 그러한 변치 않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도록 하자.
3.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아마 가난한 어부로서 마련할 수 있는 그런 대접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초대하였을 것이고 그는 이를 달게 수락하셨을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상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 병들어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마다 선행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가 받은 대접에 대해서 톡톡이 갚아 주셨다. 그 병고침이 얼마나 완전하였나 주의해 보라. "열병이 떠났을"때 베드로의 장모는 흔히 보는 대로 허약한 상태에 얼마간 더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여자를 고쳐 주신 동일한 그리스도의 손이 그 여자의 원기도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하여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서 그분을 섬기고 그 분을 위해 그 분에게 속한 자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내어쫓으시는 일반적인 병 고침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다. 그 일들은 안식일 저녁 "해 질 때" 이루어졌다. 아마 안식일에 병 고침 받는 것이 거리끼다고 생각된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관련 있는 병자들을 "해 질 때" 즉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에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약점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선입감도 갖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증거 하시었다(마 12:10, 11). 그 말씀에 의문을 품는 자가 있을지라도 어느 날인가 동의하게 될 것을 그는 내다 보셨다.
1. 여기에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나 유의하라. 마치 거지들이 구걸을 위해 모여들 듯이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다(32절). 회당에서 병 나은 사람이 동기가 되어 이 많은 병자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리스도를 잘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대한 우리의 의문을 일깨워 준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 4:2) "많은 사람이 모여"오게 된다(막 2:2). 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집에도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나 주의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그의 추종자들과 병자들이 있었다. 안식일 저녁 공식 예배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공식 예배를 마치고도 가정들을 방문하시어 병을 고쳐 주시었다.
2. 그리스도는 얼마나 능력 많으신 의원이신가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제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와도 그에게 나오는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특수한 환자라 해서 따로 구분하여 치료를 받게 하시지 않았다. 그는 각색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만병 통치약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회당에서 행하신 특별한 그런 기적을 그날 가정집에서 다시 행하셨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34절). 그리스도는 그 앞서 회당에서 귀신들이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하고 말하는 것을(24절) 더 이상 허락지 않고 금하셨다.
Ⅲ. 그리스도께서 조용한 곳에 가셔서 은밀히 기도하시었다(3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밀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 조용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기도하셨고 사람으로서 기도하셨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공적 사업에서 선을 행하셨지만 그는 하나님과 홀로 있는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므로써 그는 모든 의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시간.
(1)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시간은 안식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안식이 지나면 다음 안식일까지 우리의 기도를 쉬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우리가 비록 "회당"에는 가지 않는다 해도 한 주간을 매일과 같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도록 하라. 특별히 안식 다음 날 새벽은 안식에 대한 우리의 좋은 인상이 그대로 간직돼 있는 것이다. 이 새벽은 한 주일의 첫날 아침이며, 그 뒤에 이 안식 후 첫날 새벽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거룩하고 특별한 날이 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시간은 "새벽 오히려 미명"이었다(35절).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마 10:47)답게 기도하고 계셨다. 다윗은 이른 아침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였다(시 5:2; 88:13). "아침은 뮤우즈 신(희랍신화에 나오는 詩神)의 친구이며 그레이스 신(희랍 신화에 나오는 美神)에게도 마찬가지로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심령이 가장 새로워지고 활기를 띠게 하려면 경건한 훈련을 위해 우리는 시간을 내도록 해야 한다. 첫째가 되기를 원하고 가장 좋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첫 시간과 제일 좋은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라.
2.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장소.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시었다(35절). 이 한적한 곳은 동리 밖이었을 것이고 떨어져 있는 동산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유혹이나 헛된 영광을 얻고자 하는 시험을 받을 위험은 없었지만 "너희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마 6:6)는 당신 자신이 세운 기도의 규칙을 모범으로 보여 주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시었다. 은밀한 기도는 은밀한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훌륭한 공익 사업이나 선한 사업을 하시는 그런 분들도 이따금씩 하나님과 은밀히 지내기 위해서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과 교통을 가져야 한다.
Ⅳ. 예수께서 기도 장소에서 돌아와 전도하심. 제자들은 자기들이 일찍 일어난 줄로 생각하였으나 주께서 그들보다 먼저 일어나신 것을 알고 주님이 어디 가셨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의 뒤를 따라가"(36절)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났다.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절). 많은 병자들이 병 나음을 받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어 예수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 벌써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시금 무리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로 가시도록 권했다. 아마 그 곳은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얼마나 편파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고 흥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장소로 가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는 가버나움이 그의 전도와 기적을 행하시는 독점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거절하셨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활 쏘는 자의 지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이스라엘의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도 여화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이 부분은 한글 개역판에는 나와 있지 않음─역자 주) (삿 5:11). 그리스도는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목적 의식이 항상 뚜렷하였고 거기에 항상 따랐다. 그의 주위 사람들의 극성스러운 요구나 설득에 끌리거나 동요되지 않으셨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39절). 그리스도께서는 귀신들을 내어쫓는 데서 그의 교리를 더 확증했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사단의 세력을 멸하는 것이다.
문둥이를 고치심 (마가복음 1:40-45)
여기에는 전에 우리가 마태복음 8장 2절부터 4절까지에서 생각해 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이야기가 나와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1. 우리가 마땅히 이 문둥병 환자와 같은 태도로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됨을 보여 준다.
(1) 이 문둥병 환자는 아주 겸손히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렸다"(40절). 그가 "예수에게 하나님으로서 경건한 경의를 표시했는지 또는 그보다 못하게 한 분의 큰 선지자로서의 존경을 나타냈는지는 모르나,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자비를 받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영광과 존경을 그리스도에게 드려야 하며 겸손과 경의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와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2) 이 문둥병 환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왔다. 비록 그리스도의 외모는 초라했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이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대해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나이다"(요 11:22)라는 일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친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어려운 실정에 대해서 "주께서 저를 위해 이일을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됨을 명심하자.
(3) "원하시면……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복종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왔다. 예수께서 고통하는 자들을 도와주려는 일반적인 준비에 대해서 의심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가련한 간청자로서 겸손하게 그 자신의 특별한 사정을 주님에게 아뢰는 것이다.
2.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을 그리스도에게 기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문둥병 환자는 그의 진술에 있어서 기도의 형식을 띠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오히려 요청의 형식으로 응답해 주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신앙 고백과 복종은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간청임을 유의하자.
(1) 그리스도께서 동정심을 나타내시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41절)라고 그리스도의 동정심에 대한 표현이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능력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동정심에서 나타남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사리 판단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시므로 우리는 우리를 그에게 추천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가련함은 그리스도의 자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실 때는 아주 친절히 해주신다.
(2) "예수께서……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41절).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접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을 고치실 때 그들을 만지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 그리스도의 능력이 말씀에 의하여 나타난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법으로 영적인 치유를 보통 행하시는가를 암시해 준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요 15:3; 17:17). 이 불쌍한 문둥병 환자는 "원하시면"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의문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그 의문은 "내가 원하노니"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 곳 물러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에 합당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쾌히 원하시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확신을 가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믿음에 따라서 그의 능력이 나타나 역사함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깨끗함을 받으라"고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능력이 나타난 순간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이다.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42절).
3.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받으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주께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그의 명령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셨을 때에 그에게 "엄히 경계"하셨다(43절). 이 "엄히 경계하사"란 말씀의 원어 evmbrimhsa,menoj 의 뜻은 "위협함으로 금하신다"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 병 나은 사실을 숨기라는 의도로만 언급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44절).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쳐 주셨던 38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경계하신 것 같은 그런 "범죄 금지령"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문둥병은 미리암이나 게하시나 웃시야 왕의 경우와 같이 보통 어떤 특별한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쳐 주신 뒤에 만일 다시 죄를 범하면 그에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가 닥칠 것을 경고하고 위협하였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일을 지적해 주셨다.
(1)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44절). 제사장이 그 자신의 판단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되심을 알도록 문둥병 환자로 증거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마 11:5).
(2) "제사장에게 보이"기 전에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44절).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음을 보여 준다(사 13:2).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지" 말라는 (잠 25:17) 모범을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문둥병 환자는 자기의 병 나은 사실을 퍼트리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많은 무리들이 모여왔는데 그 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모여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선을 행하여 정부 당국에도 골치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대중의 평온한 분위기를 깨는 방해 거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겉치레 같은 보이는 그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대중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 그런 감격 같은 것도 원치 않으셨다. 왜 이 문둥병 환자가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하였는지 모르겠다(45절). 선량한 사람들의 고상한 인격이나 선행들에 대해서 본인들보다 친구들이 더 못 참고 소문을 낸다. 또한 우리는 겸손한 사람들의 겸손한 명령에 매여 있지를 못한다. 이 문둥병 환자는 주님의 명령을 지켰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병 나음을 전파한 것은 좋은 취지에서였음은 의심할 여기가 없다. 그리고 그 일은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리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45절) 그리스도를 따르는 군중들의 수가 급증한 것 외에는 다른 나쁜 결과는 없었다.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아직 그런 위험은 없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너무 많아 길목이 그들을 수용하기에 감당을 못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바깥 한적한 곳과, 산과(막 3:13), 바닷가(막 4:1)에 나가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일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는(요 16:7)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 밖에 계시지 못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이(45절) 다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세계 어느 곳에 있거나 그들과 같이 계시며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