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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에 강의 끝나고 나서 무려 보름도 더 넘게 지난 후에야 강의 정리한 것을 올리게 되는 군요. 저의 어영부영한 시간 관리탓입니다. 이점 사과드립니다.
강의 원 내용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고 녹음 상태가 불량한 테입을 몇 번 반복해서 듣다보니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후후후 그래도 유정열 교수님 제 뒤통수를 못치셔서 어쩌나 싶군요.)
음,,정리글 중간중간에 ()표시가 되어 있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면서 가끔 일부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흐름상 내용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어 혹여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할가봐 ()표시를 해서 구분을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강의 정리하면서 중간중간 가진 의문과 책을 보면서 가지게 된 생각과 의문 따위를 ()표시해서 써두었습니다. 이 경우는 구분을 위해서 따로 굵은 글씨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다만 우선 강의 내용을 먼저 올리는 것이 급하다 싶어서 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우선 생략하고 일부분만 넣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따로 글을 올리던지 아니면 정리 글을 재수정해서라도 올리겠습니다. 그럼,,,잘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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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부여의 연구가 안되었고 정말 부여라는 것이 기록이나 유물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부여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잡으면 서기전 58년부터 서기 493년까지,,가장 적게 잡은 것이 이렇다. 대략 550년간,,,서기전 58년이라는 것은 삼국유사에 해모수가 건국한 연대로 나오긴 하지만 이것보다 올라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 학설, 남한 학계가 비교적 짧게 잡는데 대략 기원전 2세기, 근 700년이다.
북한학계는 기원전 7세기로 잡는다. 심지어 모 교수님은 비록 사료의 오독이긴 하지만 기원전 12세기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
부여라는 나라가 특징이 첫째, 역사가 길다. 둘째 계승자가 많다. 부여란 나라가 멸망하지만 부여라는 이름을 쓰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그럼 부여라는 나라가 대체 어떤 나라길래 이런 계승성을 보이는 것일까? 부여란 나라가 가장 먼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고구려의 선조라고 얘기한다. 때문에 고구려사를 공부하는데 필연적으로 부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부여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지는 못한다.
부여사에 대해 쓰실 수 있는 분이 몇 분 없는데 작년에 교원대에 있는 송호정 교수가 원고를 탈고를 했음에도 여태껏 출판을 하지 않았다. 좀 미스터리인데,,,왜 안하는가? 조금 자신이 없어서 인 것 같다. 한양대 사학과 팀에서도 부여사를 서술하려고 했는데 거기에서도 송호정 교수가 내는 거 보고 내겠다고 해서 나 역시도 미루고 있다. 다 이런 식으로 눈치를 본다. 왜 그러한가?
첫째, 부여는 어떤 하나의 역사 기본 체계가 잡히고 있지 않다. 고구려는 고구려인들 스스로가 쓴 자체 기록을 기반으로 한 삼국사기를 통해 28대 왕을 쭉 얘기할 수 있지만, 부여는 자기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게 되질 않는다.
둘째, 부여가 하나인지, 혹은 두 개인지, 혹은 세 개인지,,,부여의 실체가 도대체 몇 개인지도 모른다. 뭐 이런 역사가 있나,,그러나 실제로 그렇다.
셋째, 부여사는 고구려인에 의해서 왜곡되었다. 이것은 아주 필연적인 사실이다 왜 부여사를 왜곡했을까? 설명은 나중에 한다.
넷째, 부여사를 누구도 쓰고는 싶은데 막상 쓰려니까 위와 같이 자체기록 같은 자료가 없어서 참고할 문헌 부족으로 글을 쓰는데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여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연구 결과가 적은 것일까?
부여사의 연구 논조를 보면 2004년 여름을 기준으로 놓고 그 이전까지 부여에 관련된 논문이 상당량이 쏟아져 나왔다. 고구려 연구재단이 생기면서 부여사 자료에 대한 정리를 대략 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부여사의 학계 통설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까지 합치면 좀더 많아지겠지만 남한에서 쓴 논문 중 고구려가 중심이 되지 않고 부여가 중심이 되는 글은 36+@개, 대략 40개 정도, 북한은 12개, 중국은 97+@개이다. 여기서 @는 부여에 관련된 고고학 유물, 즉 서단산 문화, 그리고 부여보다 원시조인 탁리국의 것으로 보이는 백금보, 한서 상층문화, 그쪽 관련 논문이 무려 192개나 된다. 일본은 18개, 대략 355+@개로 가야보다는 적지만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다섯째, 과거 부여라는 나라가 있던 곳이 죄다 현재 중국 땅이라는 점이다. 일부 학자들은 부여가 잠시 함경도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지만 함경도 지역에서 부여 유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현재 대부분 부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현지에 있는 중국학계가 당연히 연구에 유리하다. 그들은 이렇게 축적된 연구를 가지고 '부여는 당연히 중국사다!' 라고 하고 있다.
우리 연구자료는 전세계 학계에 실재하는 부여의 왕궁터가 발굴되어 알려지면 한국학계는 규정할 것이 없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부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 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첫 번째, 기원 정리. 즉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우리민족의 뿌리가 어디냐를 올라가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나는 나라가 바로 부여다. 또 하나가 고조선, 부여와 고조선 두 역사를 빼놓고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얘기하기가 애매해진다. 고구려 문화라는 그 자체의 가장 근원이 부여에서 나오니까 그걸 이제 중국에서 시비를 건다. '왜 부여가 너희랑 같느냐? 부여는 중국쪽에 가깝다' 이런 연구를 하고 있다. 즉 부여와 고구려와의 계승성 문제에 대해서 단절시키려는 연구들을 이미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손진기다. 안 끼는 데가 없다.
우리들이 흔히들 얘기할 때 한민족의 원류를 예, 맥, 한 이렇게 세 개의 족속 이름으로 부른다. 때문에 한예맥 이동고라는 글도 있다.
이중에서 고구려는 대개 맥족이라고 부른다. 한은 삼한을 얘기하고, 예는 바로 부여로 이런 개념을 잡고 있다. 우리나라 연구자들 중에서 이 예와 맥을 같은 것으로 볼 것인가, 다른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란이 일고 있는데 현재 대세는 일단은 둘은 구분이 된다고 보고 있다. 예맥이라는 말은 쓰지만 예라고 하는데는 계속 예라고 하고서 맥이라고 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구분은 되지만 두 종족은 매우 친연성이 있다. 거의 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시각이 있다는 정도.
이런 문제를 통해서 고구려와 부여관계를 통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논하는 논문도 최근에 나왔다. 이런 민족의 정체성, 뿌리에 관련되어서도 부여사는 반드시 해야 한다.
두번째, 좀더 구체적으로 간다면 고구려사의 연구에 있어서 부여사의 비중이 크다. 왜냐면 고구려가 문자명왕 때까지 부여와 500년 간을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매정하게 얘기하면 범부여계족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때문에 고구려사에서도 부여사를 모르면 제대로 고구려를 공부할 수 없다. 고구려사를 위해서도 부여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부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자.
1. 부여는 언제 건국 되었나?
단국대 윤내현 교수님이 '한국열국사연구' 라는 책에 부여에 대한 논문을 쓰신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확실히 실수하신 것 같은데 기원전 12세기에 부여가 성립되었다고 하고 있다. 근거가 무엇일까?
상서, 즉 서경 주관편, '주 무왕이 동이를 정벌했다.' 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 주석이 달려있는데 이것이 문제다. 공안국이라는 한 무제 때의 인물(서기전 2세기 말에서 1세기 초의 인물)이 서술한 것으로 주석 원문에는 동이의 족속 이름을 얘기하면서 그 가운데 부여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주나라 무왕 연간에 동이 정벌할 때 부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서기전 12세기의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문장은 한무제 시절의 자기네 관점에서 '동이란 나라는 어떠한 나라들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서술한 것이지, 상서 자체가 서기전 12세기의 동이족 상황을 얘기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부정당하고 있다.
그러면 이거말고 오래된 기록이 없을까?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이 있다. 일주서 왕회편이라는 것을 보면 부루(符婁)라는 나라가 있다. 주나라의 명재상 이윤이라는 사람이 '동쪽에 부루라는 나라를 치고자 한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이걸 주나라 초기의 부루인데 부여가 아니냐고 본 분이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현재 부정하고 있다. 일주서라는 책 자체가 연대가 그렇게 올라가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여를 주나라 초기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 다른 책은 어떨까?
산해경이 있다. 이것이 문제인데, 보면 불여지국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부여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기원전 5세기 설이 산해경의 불여지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그다지 신빙성이 있는 책이 못된다. 이름도 똑같지 않다. 이것도 아닌가 하고 주장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믿을만한 책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바로 사기 화식열전이 있다. 기록을 보면 '연의 북쪽에 오환과 부여가 있고 동쪽에는 예맥조선이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사마천이 쓴 글이기 때문에 당연히 믿을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나라는 한나라의 속한 연국, 즉 군국제로 다스려지던 시기의 연이다. 북경 쪽이다.
화식이라는 말은 교역을 의미하는 말로써 북쪽의 오환, 부여와 교역해서 이점이 있고 동쪽 예맥, 조선과 교역해서 이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서술이다. 기원전 2세기에 북경 북쪽에 오환이라는 부족과 함께 부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환의 성립이 기원전 200년 이후에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기원전 200년 이후의 이야기라고 알 수 있다. 결국 삼국유사에 실린 기원전 58년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부여의 위치는 어디일까?
윤내현 교수는 이 자료를 근거로 해서 부여는 북경의 북쪽이므로 현재의 난하 상류에 있다고 보았다. 난하 상류에 있던 부여가 동쪽으로 이동을 해온 것이 동부여라고 주장을 한다. 단국대에 있는 복기대 박사도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분 다 현재 길림지역의 문화는 부여 문화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두 사람의 견해를 별로 따르지 않는다. 뒷받침할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부여가 예맥조선과는 달리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라는 걸 통해서 봤을 때 흔히 고조선이 요동방면이라고 보고 그보다 북쪽에 있다면 그 위치를 대충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이쪽인지는 논란이 있다.
그럼 기원전 2세기 경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 그 전에는 없었을까? 다른 기록으로 논형이 있다. 기원 후 1세기 경에 만들어진 책이다. 그 내용을 보면,
[북쪽의 오랑캐 나라에 탁리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탁리국의 궁전에 시비가 햇빛을 받아 임신을 해서 알을 낳았다. 왕이 이에 노해서 그녀를 죽이려 했는데 그 알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뭔가 약간 틀리다. 무슨 얘기와 비슷할까? 고구려 건국 신화와 거의 흡사하다. 나오는 사건이 약간씩 틀릴 뿐이다.
추모왕의 건국신화는 부여에서 추모가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우는데 이건 탁리국에서 동명이 탈출하여 부여를 세운다는 스토리와 유사하다. 즉 부여에서 추모라는 사람이 탈출해서 고구려를 세우는 이야기, 또 알에서 태어나는 주체, 다 똑같다. 그런데 시간상으로 봤을 때 부여의 동명쪽이 더 원조다. 고구려가 부여 건국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를 베끼기 시작한다. 부여사를 왜곡한 것인데 사실 고구려는 그렇게 좋은 나라가 못된다. 부여에서 버림받거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도망친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정통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라고도 볼 수 있다. 부여에 비하면 그 당시 상대적으로 역사도 짧았기 때문에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동명의 원 나라인 탁리국이 어디 있는지가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학계에서는 눈강, 송화강(북류 송화강, 동류 송화강으로 나뉜다.)을 주목한다.
눈강 상류에 있는 치치하얼, 대안 방면, 즉 부여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길림보다도 북쪽에 있는 곳에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 문화가 싹트고 있다. 이것을 한서 상층문화라고 부르는데 그 문화의 주인공이 바로 탁리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화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남하해서 길림 일대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보고 있다. 탁리국은 당연히 부여보다 먼저이다. 그러나 동명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언제 건국했는지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때문에 할 수 없이 논형의 이 기록은 북쪽의 문화가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이라고 이해하고 끝내버릴 수 밖에 없다.
대신에 장춘, 농안, 길림, 교하 일대에서 문화 유물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길림에서 성성초 유적이 발견되었다. 모직물이 나왔는데, 개털, 돼지털을 섞어 만든 우수한 형태의 것이라고 한다. 이 성성초 유적을 거쳐서 이쪽의 대표적 문화 유적이 바로 서단산이다. 강 건너 동단산도 있다. 동단산에 올라가면 용담산성이라고 고구려의 유명한 산성이 있다. 용담이라는 큰 연못도 있다.
이 서단산 유적에 나오는 유물을 대표로 하는, 석곽묘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유물들이 나오는데 그것을 대표로 하는 문화 유적의 범위를 따져보니 대략 장춘, 노안, 길림, 교하를 잇는 이정도 구역이다. 심양보다 북쪽, 사평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위에 산맥이 있는데 바로 길림합달령이라고 불린다. 이곳을 기준으로 남쪽은 고구려고, 그곳보다 북쪽에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비파형 청동기)가 나온다. 남쪽에는 고조선 청동기의 형태는 거의 비슷한데 이쪽지방은 토기가 좀 다르다. 색깔이 좀 다르고 삼족 토기도 나온다. 이들이 부여의 선 문화라고 인정한다.(삼족토기는 삼족 청동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삼족 청동기는 보통 유목민족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교하라는 지방에서 강이 하나 흐르는데 여기서 두 곳에 100리 가까이에 서기전 10세기 경의 보루 유적이 나왔다. 지수향에서 송강현에 이르는 약 100리 구간에 토석식 보루가 10개 정도가 나왔는데 보루라는 건 군사기지로서 일종의 작은 성으로 길이가 400미터 이하 정도이다. 기원전 10세기 경에 촘촘하게 10리마다 하나씩 성을 쌓았단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이 정도 성을 쌓았고 성성초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의 수준이 높으니까 당연히 이때부터 이 지역에서 뭔가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장광재령 남쪽지역을 제하면 길림이라는 지역 중심이 북만주 방면에서 가장 문화가 번성하고 빨리 발전한다.
또 하나, 동단산이란 유적이 있는데 그 아래에 송화강이 흐른다. 그 아래에 용담산성이 있고, 이 밑에서 동단산을 둥그렇게 두르는 토성이 나왔다. 남성자 유적이라고 하는데, 건물터도 몇 개 나왔다. 가보면 알지만 생각보다 좁다. 상당히 좁은 편이라 원래는 남성자 유적만 가지고 부여 왕성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동단산까지 포함해서 부여왕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여기 빼놓고는 이쪽 지방에서 문화적 중심지가 아직까지는 유물상으로는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 동단산과 남성자 유적을 수도로 하는 나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누구인가? 바로 부여다. 이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유적의 발달을 통해서 기원전 7세기 경에 이미 국가, 즉 부여가 등장했다고 보고 기원전 5세기에 산해경에 등장하며 그 다음에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 3세기에 고구려와 싸웠다고 보고 있다. 북한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4갑자, 즉 240년 올려 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그렇게 올려 잡지 않으니까 부여의 역사도 낮춰서 본다. 대신에 부여도 대략 서기 1세기에는 확실한 국가 단계로 본다. 그런데 역사에서 국가가 있고 국가 단계가 있는데 조그만 집단, 즉 나름대로의 행정조직이 안 갖춰져 있는 추장이 있는 집단도 국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행정조직을 갖추고 어느 정도 고대국가로서 세금을 거두고 정비된 나라를 국가 단계라고 하는데 아무리 늦어도 이 단계를 부여는 1세기로 보고 있다.
왜냐면 부여에는 상이라는 관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상을 재상으로 볼 수 있는데 부여라는 나라의 상은 '아란불' 즉 해부루를 동쪽으로 가게 권유한 사람으로 그 사람이 상이고 다섯 명의 부족의 우두머리 5가들이 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4가와 함께 한 사람은 기록에 없는데 어쨋건 다섯 개의 가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사출도를 했다 이런 말도 나온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릉비에 보면 재미있는게 나오는데 압로라는 것이 있다. 이 압로가 5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5가 밑에 성이 있고 촌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부여도 정비된 국가 체계를 갖추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여라는 나라는 우리가 정확히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서기 22년에 고구려와 부여가 싸웠다. 이때 당시에 부여가 국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리고 부여는 왕이 죽었어도 나라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부여가 고구려보다 훨씬 먼저 체제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여 정치사에서 항상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가 왜 크게 성장하지 못했는가 때문에 소위 우리 학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의 발전은 이루지 못했다고 말한다. 가야는 연맹체적 국가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데 연맹체인 가야보다는 조금 더 발전한, 연맹체의 장인 부여의 왕이 셋이서 왕조를 이루니까 가야보다는 발전했지만 삼국보다는 정치적으로 덜 발전해서 그쳤다고 보고 있다. 부여사에서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
자, 어쨌든 부여가 건국되었는데 나의 개인적의 의견으로는 기원전 2세기가 늦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나와있는 농안, 길림 지방의 철기문화 유적을 봤을 때 조금 더 올려잡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청동기 문화들의 발전단계를 볼 때 앞으로 이것보다 올라갈 소지는 많다.
우리학계에서 추정하는 기원전 2세기는 너무 늦다. 화식 열전에 나와있는 그 기록 하나만으로 이때 처음 등장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이것보다는 조금 오래된 역사로 보고 서기전 3세기 설 같이 조금씩 올려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처럼 서기전 5세기나 서기전 7세기 설로 올리려면 다른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조금 힘들다. 조금은 더 올려볼 수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 부여의 건국
최대의 난점이 이거다. 부여 누가 건국했나? 세상에 이런 황당한 질문이 있을까? 말이 안되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고 그 이유는 부여의 건국자가 기록에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건국자는 총 3명으로 첫째 동명, 두 번째, 해모수, 셋째 해부루가 기록에 있다. 그런데 분명히 동명이 말할 필요도 없이 부여의 건국자가 맞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보면 서기전 58년에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해모수가 나라를 세우니 해부루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런 고로 해모수와 해부루는 피도 안 섞였다.
해부루의 양자가 금와왕이고 그 아들이 대소왕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체 불명의 남자 해모수에 있다. 동명은 그렇다고 치자. 동명은 분명히 어떤 위대한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모수는 정체 불명이다. 왜? 해모수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빼고는 한 일이 없다. 전설상에서 하늘을 왔다 갔다 했을 뿐이고, 유화부인을 임신시키고 자신은 하늘로 갔다. 무책임한 인물이다.
또 하나 문제는 아직은 나 자신의 가설이지만 고구려인이 만든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 있다. 무슨 근거로?
첫 번째, 고구려는 처음에 등장할 때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광개토태왕비에도 해모수는 천제라는 표현은 나오지만 명확한 이름이 안나온다. 그에 반면 추모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나온다. 추모를 두고 천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나오는데,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즉 고구려에 천자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내려가면 천손개념으로 바뀐다. 이것은 김일권 박사가 주장한 건데 나도 적극 여기에 동의하는 편이고 나와도 의견 교환이 있었다. 하늘의 신을 직접 연결하지 않고 천손개념으로 왜 끊어 내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북부여와의 관계성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지금 고구려사에서 최고의 난점이 부여가 한 두 개가 아닌 세 개라는 것이다.
4. 부여는 몇 개인가?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하나의 비에 북부여, 동부여, 부여, 3개의 부여가 나온다. 이게 부여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머리 아프게 하는 부분이다.
부여는 동명왕이 세웠고 북부여는 해모수가 세웠고 동부여는 해부루가 세웠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첫 번째 부여와 북부여는 같은 것인가? 두 번째 이 세 개의 부여는 전부 다 같은 것인가? 이건 완전히 추리싸움이다. 왜냐? 전부 전승이 틀리기 때문에 추리를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왜 이런 식의 부여, 북부여, 동부여란 말이 나올까?
서기 285년 경 요서 쪽에 모용선비가 있는데 이들이 부여를 친다. 그래서 부여가 대패를 한다. 때문에 동쪽으로 도망을 갔다가 사마씨의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동쪽으로 간 사람들이 옥저 고지에 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 동부여, 그냥 옛 땅으로 와서 세운 사람들을 북부여로 보아서, 즉 고구려를 중심으로 동부여, 북부여가 있다는 것이다. 부여는 자체기록이 없으니까 고구려의 입장에서 북쪽인가 동쪽인가를 따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해모수가 등장해서 이 때문에 해부루가 동천하여 동부여가 생긴 것이 아니고 그냥 여기에는 부여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위서 두막루전과 신당서 유귀전에 실린 두막루에 대한 묘사에서 그들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인의 눈으로서 방위명 국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부여인들 스스로가 규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다시 얘기하면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해부루의 부여다. 금와왕의 부여, 그리고 남쪽으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 대무신왕이 때려잡아 대소왕이 사망한 부여도 이 부여다. 그런데 고구려 초기의 부여는 분명히 고구려보다 북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걸 동부여라고 부른다. 이상하다.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북부여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보면 동쪽이 빠져서 부여라고 되어 있다.
윤내현 선생님은 고구려랑 싸운 부여는 동부여고 진짜 북부여는 난하 상류에 있던 부여가 또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난하 상류에 대한 언급은 그 이후에 없다. 사기 화식 열전에 있는 연나라 북쪽에 있는 부여라고 얘기만 하고 아무 설명 없다가 346년에 멸망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을 보면 그 기록 자체는 부여가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윤내현 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동부여에서 북부여로 간 것을 그분이 얘기한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럼 여기가 결국 동부여인데 이것이 그냥 부여라는 것이다, 부여가 옥저 쪽으로 오면서 광개토태왕 시기에 즉 410년 무렵에 동쪽의 부여를 정벌했고 북쪽에도 그냥 부여, 즉 원부여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모용선비에 285년에 일차로 망한 부여가 다시 와서 일부가 돌아와서 세운 힘 약한 부여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결국 410년 광개토태왕시기에는 두 곳의 부여가 있었다고 본다면 해모수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다시 얘기하면 광개토태왕 시기 410년 경에 동부여를 공격하면서 고구려의인의 인식속에서 자기의 속민이었던 동부여에서 고구려는 고생만 했고, 원수일 뿐이며 고구려는 원래 부여의 정통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고구려의 시조가 원부여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그러면서 해모수라는 인물을 가공으로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하나 한단고기의 부여가 있다. 학계에서는 한단고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지만 네티즌에게는 한단고기의 부여에 대해서는 상당한 선입견을 주는 경향이 있다. 한단고기에 보면 기원전 238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다고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군의 지위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고조선을 때려잡고 세우고 기비라는 사람과 합작을 했는데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조이다.
기비는 요하 건너를 차지하고, 해모수는 만주지역을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고 치자. 북부여기를 쓴 범장이라는 인물은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기록에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이명이나 이암은 역사기록에 있는데 휴애거사 범장은 나오지 않는다.
한단고기에서 가장 크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바로 이것이고, 가장 귀한 자료일 수도 있는 것이 북부여기다. 이걸 보면 고열가 단군이 스스로 물러나서 해모수가 임금이 된 후에 천안궁을 세우고 공양태모법이라는 애 키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외국 자료들이다.(단 북부여기 단독의 독자적인 자료가 있는데 북막의 한 부족이 침공했다는 기사이다. 그러나 이를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중국의 자료들을 섞은 것이 대부분이고 자체 부여사는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기원전 193년에 기자조선에서 위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북부여가 돕지 못하다가 그냥 침략만 막았다 이정도 기록만 있고 또 서기전에 낙랑국이 생긴 얘기만 나오고 쭉 없다.
그러다가 고두막한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이 사람을 동명왕이라고 한다. 해모수 신화와 동명왕 신화가 동시에 반영이 되어 있다. 한단고기는 해모수가 동명보다 먼저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고두막한의 힘이 세지니까 당시 해모수의 자손인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버린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나온다. '해모수의 아들이 해부루다, 또 해모수의 아들이 추모다.' 그러니 추모와 해부루는 이복형제가 아니냐 라는 것이 단군기를 인용해서 일연이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단고기에서도 해부루를 해모수의 손자뻘로 나오고 있다. 이 해부루가 동쪽의 가섭원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니 가섭원 부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한단고기에서는 고두막한 즉 동명의 등장이 곧 북부여와 동부여의 갈라짐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동부여는 조그마하게 기원전 86년, 즉 중간에 갈라진 것이 아닌 동명의 출현 직후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해모수의 아들인 고진, 그 밑에 불리지의 아들 추모가 있는데 추모가 해부루의 동부여에서 성장을 했다. 후에 이 사람이 고두막한이 있는 부여의 나라에 와서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그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한단고기는 정통론을 따지니까, 해모수의 정통성이 동부여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부여에서 태어난 추모가 다시 돌아와서 북부여를 차지했다고 본다. 그런데 한단고기는 이 해부루, 금와, 대소로 이어지는 가섭원 부여에 대한 서술에 대해서 이상한 부분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대소왕의 나이가 의심스럽기는 한데 어쨋건 대소왕의 나이를 오래 잡고 대소왕 때 나라가 망한 것으로 나온다.(한단고기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듯 하다. 왜냐하면 금와왕 시기에 벌어질 대소와 추모와의 갈등 양상 시기가 금와왕 시기가 아닌 해부루왕 시기의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추모는 20년 전에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부여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오는 한단고기의 문제점은 실제로는 대소왕 때 부여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낙씨 부여라고 해서 대소왕이 사망한 후 일부 세력이 고구려에 투항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부여의 멸망이라고 써놓고 있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보면 한단고기의 내용은 교묘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묘하게 잘라내서 이 세 명의 시조왕들을 끼워 넣은 것에 불과한 듯 하다. 실제 부여의 역사하고는 봤을 때 상황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왜냐면 가섭원 부여가 이쪽으로 쫓겨가서 힘이 없는데 이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도절이 인질로 갈 뻔하고 고구려가 싸우는 얘기가 나오다. 그럼 사실상 고구려가 원부여를 차지했으면 힘이 더 세야 하는데 왜 여기가 역사가 오래되고 대국이어야 하는 것이냐 하고 맞지 않게 된다.
아마도 20세기 초반에 우리 역사의 제일 문제인 고조선 멸망한 다음의 고구려 등장까지의 계통이 불분명한 시기를 꿰어 맞추다보니 이런 식의 이상한 계보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 기록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단고기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한단고기는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북부여기에 보면 몇 종류의 전승이 있다. 한단고기에서조차도 다 맞다고 보고 인정을 한다. 혹은 해모수를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또 저렇게도 부른다. 그런 설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체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부여사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만큼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부여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우리는 망인이다' 라고 한다. 우리는 옛날에 전쟁에 크게 패해서 동쪽으로 도망해온 나라 사람들이다 라는 내용이 삼국지에 한 줄이 나온다. 부여를 어디에서 패배해서 왔다고 주장하는게 가능한데 이 사람들 얘기는 이 사람들을 뭘로 보느냐?
일부 설이지만 동호의 후예가 아니냐는 얘기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동호라는 민족이 한나라 건국 즈음해서 기원전 220년대에서 200년 사이에 유목국가에서 흉노가 가장 힘있었는데 흉노가 두려워한 상대가 바로 동호였다. 동호가 처음에 더 힘이 강했는데 흉노가 동호를 방심시켜놓고 격파를 했다. 동호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도망을 가는데 한 부락이 오환산으로, 또 한 부락이 선비산으로 도망한다. 오환선비가 이때 시작된다고 보는데 일부 논자들은 '흉노열전에는 부여가 등장하지 않는다, 혹시 부여가 동호의 후손이 아니냐?' 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고리국의 추정하고 있는 위치를 볼 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호의 이동이, 동호의 벽화가 만주지역에서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확실하고 그것이 민족의 이동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대략 이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부여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호민과 하호라는 존재가 등장을 한다. 이 하호가 무엇이냐? 호민은 일하지 않고 전쟁터에만 나가고, 하호들은 뼈 빠지게 일해서 호민을 봉사를 한다. 그래서 전쟁을 나가면 하호들은 군대에 끌려가도 보급병 밖에 못한다. 그래서 하호가 노예냐? 농노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엄청나게 많이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혹시 부여가 두 개의 민족이 결합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제시한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렇게 분리한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뻔히 보인다.
부여 문화를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려는 견해도 있다. 심지어는 일부 학설이지만 이번의 동북공정과 관련지어 중국에서 나온 책자 중에 [동북변강연구]라고 해서 나왔는데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결실이 이런 것이다. 이걸 보면 은나라에게 멸망했던 동해안의 동이들이 이쪽으로 와서 부여를 세웠다고 하고 있다. 고구려를 연대를 올리려고 윤내현 선생님이나 일부 재야 학자들이 고구려 연대를 2갑자 더 올리고 그것을 '고이'라고 올리는데 이것을 중국학자들은 거꾸로 이용해 먹는다. '연대를 올려? 좋다' 이거다. 원래 중국의 황제 후손인 하은주 문화의 세례를 받은 중국화된 사람들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그들이 동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교묘하게 왜곡을 시킨다. 부여마저도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족속들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끔찍하다
더 문제는 손진기라는 중국학자가 부여인들의 행방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한다.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갔느냐? 중국이 우리와 달리 연구를 집중하는게 이거다. 바로 족속의 문제, 이 족속들이 어디로 갔을까? 맨날 이것만 따진다.
삼국지에 보면 3세기 부여의 인구는 8만 호, 고구려가 3만 호.(이게 문제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당시 삼국지 시절에 부여는 위나라와 친했고 고구려는 적대적이기 때문에 부여를 잘 평가해준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8만 호는약 40만 정도 된다. 이 부여라는 나라의 40만 인구가 어디로 갔을까? 중국의 연구를 보자. '285년 모용선비가 부여를 쳐서 1만 명을 사로잡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 부여사람들이 노예시장에 많이 나온다. 346년, 5만 명을 또 잡아간다.' 대략 7만 정도를 잡아갔다고 본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 부여인들이 망한 다음에 나라들이 있는데 그 행방들을 중국 학자들이 다 찾아낸다. 그래서 이 7만을 제외한 나머지 부여인들 중 고구려로 몇 만이 가고, 그냥 현지에 남아 있다가 최종적으로 중국에 들어온 사람들이 몇 만인지를 계산한다. 이것이 중국 연구의 기본적인 것이다. 종족문제 연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중국에 밀리는 부분이 이런 부분들이다. 별거 아닌 얘기지만 이것을 논리화시킨다. 그러니까 고대 족속이 나중에 어디로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여사의 어떤 식의 전개과정을 거쳤는지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연구를 별로 안 했기 때문에 당황스럽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계승자입니다.'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인구가 몇 % 가고 이런걸 따지니까 우리가 골치 아프다.
우선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사를 얘기하지 않을 밖에 없는데, 서기전 58년에 추모왕이 태어나서 서기전 3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일단 이때 부여의 인구가 추모왕 혼자서 망명을 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여하고 고구려하고는 초기인 추모왕 시절에는 안 싸운다.
왜냐면 고구려가 남쪽으로 도망하여 숨어서 직접 대결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행인국, 구다국, 송양왕의 비류국을 다 차지하고 좀 커지고 나니까 이제 유리명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한다. 그런데 초기 기록들을 보면 전부 부여의 압도적인 국력에 고구려가 꼼짝 못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부여왕이 인질을 교환하자는 명분으로 태자를 보내라고 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태자 도절을 보내려고 했는데 도절이 겁이 나서 안 가려고 했다. 그래서 부여가 노발대발하면서 5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다. 부여가 5만의 군대를 동원할 정도라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눈이 와서 부여군대가 철수를 한다. 그래서 또 쳐들어왔는데 대무신왕이 태자 시절에 학반령에서 한번 이긴다.
그러다가 22년에 대무신왕이 부여정벌에 나선다. 이때 고구려는 혼자의 힘이 아닌 주변의 범 세력들을 포섭한다. 부정씨라든가 또는 대장장이 집단들, 괴유나 마루나 다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부족장 내지 장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을 인솔을 해서 전체 연합군을 이끌고 부여로 쳐들어간다. 근데 이 싸움에서 고구려가 이긴 게 아니라 대패한다. 고구려가 간신히 물건 다 뺏기고 도망친다. 결국 대무신왕이 연합세력에게 사죄를 한다.
이에 반해 부여는 힘도 강하고 전쟁에도 이겼지만 대소왕이 죽었다. 유일하게 왕이 죽은 것이다. 왕이 죽고 나니까 그 다음 왕 자리를 놓고 싸우기 시작한다. 전리품을 놓고 싸우기도 한다. 보통 전쟁을 하게되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해줄 권한을 가진 것이 왕이다. 그런데 왕이 죽으니 전리품을 더 갖겠다고 싸우는 것이다. 조정자가 없으니 서로 막 싸운다. 그래서 부여의 왕제가 도망을 가서 갈사국을 세우고 한 명은 고구려로 1만 호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 이 사람의 등에 무늬가 있다고 해서 낙씨라는 성을 주고 연나부에 배치했다고 한다. 이를 낙씨 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는 존재했다. 망한 게 아니다. 한단고기가 그런 점에서 손쉬운 실수를 저질렀다. 망한 게 아닌데 망했다고 했으니까,
부여가 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조대왕 때 고구려와 부여는 또 한번 교류를 한다. 그런데 이때는 태도가 바뀐다. 고구려가 이제는 우세한 입장에 선다. 부여를 때려잡고 난 다음에 낙랑국도 공격하고 주변 세력들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힘이 세지니까 부여국에 행차를 한다. 그리고 유화부인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거기서 태조대왕이 몇 개월을 머물면서 부여의 속국인 숙신에게 조공을 받는다. 그러니 부여가 열 받았을 것이다. 분명히 역사도 짧고 신하나라였는데 역전되었으니까 말이다. 태조대왕이 아주 신이 나서 일을 벌였다. 그런데 그 이후 부여의 행보가 문제다.
이후 서기 120년에 고구려와 후한이 이곳에서 전쟁을 벌일 때 변수가 하나 생긴다. 바로 북쪽에 있는 부여가 고구려가 아닌 후한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좀 아이러니 하다. 9년 전인 111년에는 부여가 낙랑, 즉 후한도 공격한다. 왕망 열전에 보면 초기 유리왕 때 부여가 고구려와 연합해서 후한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후한이 부여와 고구려가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부여가 후한의 편을 들었을까? 원인은 한가지, 이 고구려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에 후한 편을 드는 것이다. 고구려 열심히 싸워서 이길 뻔하다가 부여 때문에 진다.
그래서 고구려가 121년과 122년 두 차례 후한을 쳤는데 두 번 다 부여 때문에 진다. 고구려는 더 이상 부여를 치지 못하고 대신에 부여는 급격하게 한화가 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유물에도 나온다. 부여가 이 지역의 맹주자리를 빼앗기기 때문에 급격히 중국세력에 붙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136년에는 부여의 위구태왕이 후한 왕실에 직접 간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수도까지 가서 놀다 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부여가 후한에 밀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여 위구태가 후한 왕실에 갔다는 기록이 중국인들에게 굉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의 역대에 춘추전국시대 때 천자들은 내복, 구복, 외복이라고 해서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먼 거리마다 주역에서는 매일 제사지내는 것을 갖다 바치는 것, 한달마다 제사지내는 것을 갖다 바치는 것, 혹은 1년마다 제사지내는 것을 갖다 바치는 것. 더 먼곳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그냥 천자에게 가끔씩 조회하는 것으로 이렇게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그 시대 정치적 이상이었는데 그 이상이 후대에 가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이 생각하는 만이들 가운데서 만이의 제왕이 중국 정부에 와서 조공을 한다는 것은 자기네 이상의 실현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부여왕이 그걸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에 대해서 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한나라에서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 때문에 선물을 엄청나게 준다. 그래서 130년대 이때부터 이 위구태라는 이름이 나중에 중국 역대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오래 기억할 만 해서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쓴 연개소문을 모델로 한 소설인 규염객전에 보면 규염객이 이세민을 만나고 그 이후에 부여왕이 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왜 하필 부여이냐 하면 바로 이러한 과거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기억 때문에 소설에서도 그렇게 표현해되는 것이다. 굉장히 밀접해진다.
그래도 부여는 한화도 되고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한나라와 싸우기도 한다. 잠시 167년에는 잠시 싸운다. 그렇지만 다시 이 한번 싸운 것 외에는 계속 후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가 190년부터 204년 사이 이때가 또 부여사에서의 하나의 그 계기가 되는데 공손역 부터를 공손씨 정권으로 놓고 본다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후한시대에 가면 한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 중의 하나가 요동지역에 있는 공손씨 인데 요동태수 역할을 하면서 오래동안 중앙정부의 통제를 안 받으면서 강력한 요동군을 기반으로 해서 낙랑, 대방, 그 외에 힘없는 세력들까지 다 통솔하는 세력이다. 그 중에 공손역이라는 사람이 최초이다. 그의 양자인 공손도나 공손강이 고구려와 싸우기도 한다.
이 공손역의 딸이 부여에 시집을 온다. 부여라는 나라는 외부와의 결합을 통해서 고구려를 계속해서 견제하면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부여가 이렇게 했을까? 왜 생존방식을 이렇게 취했는지에 대해서 주목을 해봐야 한다. 왜 이런 생존방식을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문이 나온 게 없다.
첫 번째 원인, 부여라는 나라는 활을 잘 쏘고 거친 족속인 숙신을 속민으로 삼았다. 또 부여는 목축도 했고 농경도 했다. 부여 농경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돼지이다.
부여사 공부할 때나 고구려사 공부할 때 마찬가지로 의문스러운 것이 그 당시 만주의 기온이 현재와는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뭐나하면 성성초 유적을 보면 사람 무덤에 돼지뼈를 순장을 한다. 돼지를 신성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수도 옮길 때 돼지가 등장하는 것처럼 부여에서도 돼지를 남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가 중에 저가가 나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돼지를 키울 수 가 없다. 결국 부여라는 사회는 농경이 주가 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가의 명칭이나 여타 기록을 보면 그 문화가 가축을 중심으로 하고 반농반목이라고 하는데 목축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금이 많이 난다, 부여는 황금의 나라다' 그래서 부여를 대표하는 유물이 보면 황금 귀걸이 이런 것이 막 나온다. 나중에 고구려가 '황금은 부여에서 나는데 그 땅이 물길에서 쳐들어오는 바람에 못 구했다' 라는 얘기도 나오는 황금이 많이 나오는 부자 나라다.
또 하나 여기는 농경지가 아주 넓다. 동이에서 최고로 땅이 평창한 곳이다. 고구려라는 나라는 산이 험악해서 사람이 살기 힘든데 부여는 농사가 잘된다. 오곡이, 한마디로 부여는 잘 산다는 것이다.(그런데 그 앞의 기록은 산과 구릉이 많고 늪지가 광활하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부여의 영토가 거대한 평원과 산악지역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2개의 부여에 대한 것을 오해하여 한 나라로 취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부여의 영토를 얘기하는데 이 길림쪽을 안보는 사람이 있다. 나도 사실은 유적에 있어서는 서단산 문화가 확실하지만 조금 어려운 것이 길림쪽은 나도 가봤지만 산이 조금씩 있다. 최고 평탄한 지역은 여기가 아니다. 실제로 만주 제일 평탄한 지역은 송눈 평원이라고 해서 더 서쪽이다. 이쪽이 더 개괄지이다. 그래서 너무 길림쪽으로 보는게 아니냐 한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부여의 초기중심지는 길림인데 후기 중심지는 농안으로 갔다고 보고 있다. 농안은 초원과 농경지하고 결합되는 지역이다. 그래서 그 기록들 때문에 그렇게 보는데 사실은 학계에서도 삼국지 기록 때문에 말은 하지만 그러면 문제가 하나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면 285년에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때는 이미 삼국지가 쓰여진 다음이다. 삼국지가 이것보다는 먼저 쓰여졌는데 아직 부여가 도읍을 옮기기 전에 평탄한 곳이었는데 뒤에 도읍을 옮겼다고 하는 거 가지고 부여가 평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부여의 중심지도 조금 논란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부여는 자체적으로 굉장히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의존했냐 하면 아마도 왕과 나머지 4가들, 이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 간에 군대를 징집하는 것에서의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왜 문제가 있냐고 하면 부여 초기 기록에 5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다는 말이 있지만 부여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호민을 중심으로 해서 하호는 부속된 군대, 즉 보급대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하호는 별로 전투능력이 없고 호민들이 전투력의 핵심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 하호들을 완전히 중무장 시켜서 전사집단이 아닌 이른바 보편적인 군대, 즉 국민개병제를 통한 군대로의 전환을 부여는 제대로 하질 못하지 않았나 싶다. 고구려는 3세기부터 분명히 한다. 경당이라고 하는 것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제도였는데 부여는 그것을 못해서 여전히 전쟁을 특권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했기 때문에 병력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전투집단의 이 구분을 넘나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고구려에 비해서. 그것이 한가지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원인, 인구와 생산기반이 초기에 비해 후기가 좀 변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를 해봐야 하는 문제의 하나다. 부여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건 아직까지 순전한 가정이다.
세 번째 원인, 중앙집권화 문제다. 부여도 분명히 중앙집권화를 했다. 안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왕위가 세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위 세습을 할 때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부여의 왕 중에서 위구태가 있고 그 아들인 간위거는 정상적으로 세습이 된다. 그런데 그 밑에 마여라는 왕이 있는데 서자다. 서자라도 왕위 계승을 쉽게 한다. 그리고 마여 다음에 등장하는 왕이 의려인데 이 왕은 6살 때 왕위에 오른다. 이렇게 나이가 어리고 서자가 왕위 계승을 한다는 것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어느 집안에 귀속한다는 것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부여 얘기하면 많이 하는 것이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 농사가 망치면 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문장에 너무 집중해서 여태껏 부여는 왕권이 약하다고 이야기했다. 부여는 대표적으로 가야와 마찬가지로 부족연맹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까? 왕위 계승이 되고 서자도 왕이 되며 어린 아이도 왕위를 계승하는데 문제가 없다. 너무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왕이 계승은 하는데, 문제는 우가 관직을 가진 위거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위거가 전횡을 저지른다. 그래서 어떨 때는 왕권보다 더 셀 때도 있다. 그리고 우가 중에서 이름은 나오지는 않지만 위거의 계부, 즉 삼촌 뻘 되는 사람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 현도태수가 부여에 군사 지원을 요청할 때 그때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위거라는 사람은 친중파 정도가 되고, 반란을 일으켰던 한 사람이 있어서 중국을 안 돕고 아마도 다른 생각, 뭐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던가 이렇게 공론도 서로 양분했던 것 같다. 그래서 3세기 들어서 부여가 비록 왕위 계승은 되지만 정통성은 떨어지는 서자와 나이 어린 왕, 그 다음에 이렇게 전횡하는 신하, 또 한 차례의 반란, 그 다음에 중국을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실익을 챙기지 못한 문제들까지 겹쳐서 부여는 차츰차츰 권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약화된 듯 하다. 특히 군대문제와 어울려서 약화된다.
자, 이런 이유로 부여가 친중세력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부여가 친중세력이 된다는 것이 나쁜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민족주의로 보진 말자. 왜? 관구검이라는 사람이 244년 경, 246년 경 두 시기 무렵에 고구려를 쳐들어온다. 이때 관구검이 고구려에게 2차례 총 6천명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긴다. 대략 살펴보면 동천왕이 2만의 군대로 위군과 싸워서 3천명씩 2번에 걸쳐서 죽인다. 기록에는 관구검이 만명 데리고 왔다고 했으니까 남은 병력은 4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만 명의 고구려 군대가 쳐들어갔다가 관구검의 4천 병력에 1만 8천이 전사한다.
고구려가 그래서 환도성이 함락되는 사건이 있다. 이때에 과정을 살피는데 잘못이 있다. 관구검의 군대는 처음의 만명의 군대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위나라가 1만이고 나머지 +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료 중에서도 위지 동이전만 보니까 그 다음 @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뭐가 있는가? 선비족이다. 관구검기공비에는 오환선우가 나오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체는 선비이다. 이미 오환은 이때 이미 다 끝났고 오환이라는 이름은 왕의 이름을 지칭할 뿐 실제로 득세한 것은 특별히 뒤에 있었던 모용선비다.(자치통감이나 진서를 보면 선비족인 막호발이 좌현왕, 즉 태자격인 목연이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 때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막호발과 목연은 모용선비의 선조 중 한 사람이다.) 이들 군대들이 이 전쟁에 참전한다. 이들 모용선비들은 기병들을 데리고 온다. 4천의 관구검군이 장창병으로 구성된 방진을 이루고 고구려는 기록에 나오는 철기병이 중장기병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들을 쓸고 가다가 딱 멈추게 된다. 앞에 창이 있으니까, 이상하다 싶어서 기병이 서니까 보병들도 갈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양쪽에서 날랜 선비족 기병들이 와서 고구려군을 두들겨 잡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고구려 패배원인이 아닐까 한다.
어쨋건 위라는 나라에 도움을 준 모용선비는 군대를 동원했고, 부여는 군량을 지원해 준 것같다. 그러니까 고구려에 쳐들어올 때 모용선비, 위, 부여 3국이 연합해서 고구려를 친 것이다. 그래서 부여도 현도태수가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대다수는 도와주자고 하는데 우가의 계부가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 왜 부여가 위나라를 도와줄까? 도와줄 목적은 뭘까?
의리보다는 실익 때문이다. 모용선비가 군대를 내어 도와주면 위가 엄청난 재물을 준다. 부여도 군량을 지원했으면 나중에 그 식량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 실제로 모용선비는 이렇게 해서 힘이 커졌다. 모용선비는 처음에 별 힘이 없다가 위나라에게 한번 돈 받고 3세기 말 한 280년대 가서도 평의사 사건을 대신하면서 계속 커진다. 그런 점에서 부여는 모용선비와 달리 못 찾아 먹는지 아닌가 싶다. 모용선비가 빨리 성장하는 것에 비해서 부여는 거리상으로도 멀리 있고 위를 계승한 진이 동북 방면에서 힘이 약화되자 부여를 별로 못 도운 듯 하다. 그래서 모용선비가 빨리 켜져서 부여를 공격한다. 285년 전쟁에서 부여가 1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가는 아주 중요한 패배를 당한다.
그런데 부여가 모용선비와의 관계에서 패배를 당할 때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뭐냐하면 모용선비는 위나 진의 도움을 받아 세력이 켜졌고 부여 역시 위와 진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부여는 고구려, 특히 서천왕 연간에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한다. 서천왕이 달가를 시켜 부여의 또 다른 힘인 숙신족을 공격해서 제압했다.
그래서 고구려에 밀린 다음에 선비도 공격한다. 두 나라가 동시에 공격하니 부여가 약화되었다. 부여사도 부여라는 나라가 고구려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때 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여가 아마도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때 그 땅을 뺏던가 뭔가를 했어야 했는데 관구검이 환도성을 점령을 했지만 동천왕에 의해서 또 쫓겨가는 바람에 그럴 기회를 놓쳤다. 중천왕은 위나라 군대 쳐들어온 것을 또 격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당시 고구려는 체제적 개혁을 많이 한다. 농사에 있어서 가난했던 고구려가 진대법을 시행함으로써 농민들을 끌어 안는 것에 비해서 부여는 그와의 경쟁에서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280년대 들어와서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때 나라가 망할 뻔 한다. 일부는 동쪽으로 도망가는데 의려왕이 진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진이 부여의 복국을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서 의문이 간다. 진이 그 당시에 부여를 도와줄 만한 능력이 있는가다. 그런 의문이 가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그러나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을 갔을 때 모용선비나 부여가 관구검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모용선비와 적대적 입장에 있던 우문선비나 단선비를 동원해서 3자 연합으로 모용선비를 견제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당시 고구려가 부여를 도와주려고 했다면 애초에 숙신을 제압할 필요도 없고 또한 정통성 문제로 부여를 그냥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어쨋거나 부여는 이때부터 무지 힘이 약해지고 현재 남한 학계 학설에 따르면 285년 이때 2개의 부여로 나뉘어 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나뉘어져서 동부여는 이쪽에 있다가 동쪽을 서서히 개척했던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광개토태왕 연간에 가면 꽤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가 410년에 고구려에 합병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이 부여는 다시 나라를 복구하는 가운데 있다가 모용선비에 의해서 346년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무려 5만 명의 인구가 잡혀간다. 거의 멸망수준이다. 그래서 일부에서 북부여의 멸망으로 보기도 하는데 부여는 346년 이후로는 거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다. 457년에 북위에 사신도 보내긴 하는 등 존재는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여가 346년 이후에 모용선비에 의해 대규모로 중국에 끌려가는데 이들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370년에 '여울'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왕자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아직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이 여울이라는 사람이 전연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공으로 전진에서 형양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형양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관구검이 고구려사람들을 잡아가서 집단적으로 놓아 둔 곳이 형양이다. 고구려 백성을 통제할 때 언어나 문화가 비슷한 부여사람을 왕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진이 망하고 후연이 들어서니까 또 후연 쪽으로 붙는다. 그러자 후연왕으로부터 부여왕에 봉작되기도 한다. 부여계승 의식은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 하나 중요한 것이 여암이라는 인물인데 이 여암은 357년에 7월부터 11월까지 영기라는 곳 즉 난하 하류에서 자립을 한다. 그래서 여호규 선생의 경우 이것을 토대로 여암이 난하에서 자립한 것을 '대륙백제다'라고 주장을 한다.
굉장히 과감한 학설인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하면 이 여씨가 백제 왕성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왕들이 전부다 표현할 때 부여씨라고도 하지만 보통 여씨로 나온다. 같은 여씨니까 여암을 백제사람인줄 알고 백제 사람들이 백제라고 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별로 신통하지 않은 설인 것 같다.
이 사람들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북중국에서 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사라진다. 그런데 보면 북중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다지 오랫동안 자기 색깔을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410년에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들어온 사람들은 고구려 내에서 벼슬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어떤 나라를 멸망시키면 그 나라 상층부들은 포섭을 하니까, 그래서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고구려로 합쳐진 것 같다. 그런데 494년에 멸망할 때가 문제가 된다. 멸망을 했는데 그 다음에 부여의 후손들이 또 나타난다.
바로 두막루국이다. 이 두막루가 남한 학계에서 문제인데 이 두막루국의 위치를 흑룡강 이남내지 송화강 이북이라고 본다. 그런데 사서상에서 두막루국 위치는 거기가 아니다. 두막루는 동쪽에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해주 북쪽이다. 왜 남한 학계에서 두막루국을 이곳으로 비정했는지는 이해할 순 없다. 어쨌든 이쪽으로 본다. 두막루국도 꽤 큰 것 같다. 그리고 두막루국이 꽤나 오래 살아남아서 7~8세기까지도 사서에 나타난다.
그리고 두막루국 외에도 신당서 열전 유귀전을 보면 7~8세기에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에 속했던 부여국 사람들이 나하라는 강을 건너서 아마 이쪽에 나라를 세운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북부여의 후손이다'라는 부여의 계승의식이 고구려에 포섭이 되었어도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부유말갈이라는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것도 우리가 부여의 후손으로 본다. 그러니까 부여의 일부를 말갈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중국학자들 중 일부는 속말말갈이 부여인이이다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면 대조영이 그러면 부여의 먼 후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발해 사람들이 부여고지에 부여부와 막힐부라는 두 부를 두는데 이들이 나중에 가면 발해가 멸망한 1020년의 요나라 시대까지도 부여부에 사는 사람들을 부여인이라고 따로 불렀다. 그러니까 망한지 6~700년까지도 이 사람들을 계속 부여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금나라 시대에 가면 두막루국 고지에 포서로라는 것을 두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굉장히 오랫동안 나온다. 그 다음에 발해 3대 무왕인 대무예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우리는 부여의 유풍을 가지고 있다' 이런 표현을 한다.
그리고 속말말갈을 왜 부여의 후손으로 보느냐하면 수나라에서 속말말갈의 돌지계라는 사람이 수나라에 항복을 하고 돌지계를 부여후로 봉한다. 왜 봉하느냐 하면 이 돌지계가 살던 곳이 부여방면이라 이것이다. 나중에 가서 우리를 잘 도와주면 나중에 가서 왕을 시켜준다는 이러한 뜻으로 봉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말말갈도 부여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송나라 때 저술된 무경칠서가 있다. 이게 사료상으로 가치가 그리 있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발해는 부여인이 세운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즉 부여라는 나라가 망했지만 생명력이 엄청나게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아주 재미있는 유물이 나온 게 있다. 내몽고 파림좌기란 곳에서 진나라가 부여에게 준 인장이 나왔다. 진부여솔선백장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것이 왜 여기서 나왔을까? 가능성은 2가지, 첫째 부여가 거기 있었다. 둘째 가다가 흘렸다.
왜 내몽골쪽에서 나오는가 이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1978년에 발견되었는데 286년 때 진나라의 부여 복국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286년 때 부여가 다시 세워지면서 원래보다는 약간 서쪽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그래서 후기 중심지인 농안 일대를 생각했는데 파림좌기는 농안에서 좀 멀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윤내현 선생의 견해가 떠오른다. 바로 부여는 난하 상류에 있었다는 설, 그러나 말이 안되는 것이 그 당시 선비족들이 떼거지로 중원에 들어가는데 한번도 안 만날 리가 없다. 그래서 그건 말이 안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열선전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의하면 하구중이라는 사람이 있다. 북경 북쪽의 선하라는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도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부여에 갔다가 부여왕의 통역관이 된다. 후에 신선이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구중이 나타났던 곳이 대릉하 중류 즈음이 된다.
이러한 단 두가지 기록가지고 부여의 위치를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우리가 부여의 위치에 대해 정한 것도 오직 하나 고고학적으로 이쪽 지방에서 서단산 문화가 가장 강력한 문화이기 때문에 여기로 규정하는 것이다. 왕궁지라고는 하지만 남성자 유적 등이 좁다. 혹시 고고학유물이 더 나오면 바뀔 수도 있고 또 하나, 부여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위치를 장광재령 이남으로 봤기 때문에 그게 북쪽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사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고구려 초기사의 위치가 변화가 있으면 부여사도 따라서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부여의 위치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이걸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신선 열선전을 보니 그런 가능성도 있더라 하는 것이다.
5. 마무리
부여는 왜 오래 기억되었을까? 지금까지 생활사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나라인 것 같다. 민족주의 사관으로 봤을 때 부여라는 나라는 일찍부터 중국에 부합하고 재미없는 나라인 것 같다. 하지만 부여는 고조선 다음으로 국가를 이룬 나라고 1등은 아니지만 고조선 다음으로 2등으로 강력한 나라였다.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가 절해야 하고 꼼짝도 못한 나라가 부여다. 그리고 부여의 문화가 고구려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형사취수제, 그 다음이 부여의 영고, 제천행사. 5부제, 이런 것들은 고구려문화의 기본이 된다. 백제도 5부 체제다. 또 하나 백제에게도 선조다. 이게 중요하다.
이도학 선생님의 백제사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가? 형제국가인데 왜 그럴까? 원인은 한가지, 정통성의 확보 문제이다. 백제의 왕권에서 보면 추모왕이 시조가 아니라 우태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이 우태는 부여의 왕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도 그렇고 백제도 그렇고 부여의 왕을 자신 나라의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제는 적대국인 고구려가 자신의 시조가 되기는 싫으니까, 고구려도 적대국인 동부여가 자신의 시조가 되기는 싫다. 고구려의 영향으로 간신히 맥을 잇는 북부여의 정통성을 고구려가 이었으니까 북부여가 고구려의 시조인 것은 괜찮다. 북부여의 해모수가 가공의 인물이라고 본 이유도 거기 있지만 진나라가 도와주었다기 보다는 고구려가 도와주었을 가능성이 큰데 백제도 부여의 계승의식을 가져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한번 내려와서 고리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백제로 내려왔다. 전체적인 부여계의 이동의 맨 끝에 있는 백제도 나도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5세기가 되면 아예 국호를 남부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대내외에 설명하는 것이다. 정통성 싸움 할때 옛 화려한 조상을 찾는 것은 다 똑같다. 그래서 백제도 옛 부여, 고구려가 일어나기 전에 부여는 컷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 부여사에서 문헌기록이 없고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안되서 그런데 뭐가 걸리냐면, 기원전 108년이든 그 이전이든 고구려가 등장하기 이전의 이 전후상황에서 부여가 어떻게 만주에서 가장 큰 나라로 성장한지에 대해서는 문헌사료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상상에 의존해야 한다. 한단고기를 인용한다고 쳐도 영웅 고두막한이 도둑을 물리쳤다, 그 한 줄 한가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부여가 왜 이때 커졌는지 아무도 설명못한다.
다만 유물을 봤을 때 알 수 있는 것은 길림 일대가 요녕 다음으로 청동기 문화가 먼저 성장했고 철기문화도 빨리 발전했다는 것, 그래서 이쪽의 인구적으로 평야이니까 산악지역보다도 더 많이 살았던 요인들, 기온차가 꽤 큰데 그때 성장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이런 문제들도 부여사는 남아 있다. 부여가 몇 개이고, 시조는 누구이며, 위치는 어디이고 발전 양상은, 하호와 호민의 정체는, 군제 개혁 양상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접근만 되었지 풀리지 않은 문제가 많다. 누군가는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여에 대한 기본 개념의 접근이 시급하다.
첫댓글 수고했습니다. 우선 내가 잘못 말한 것은. 장광재령이 아니라, 길림합달령 북쪽이 부여의 위치라고 해야 하지요. 기타 고칠 것-금나라는 두막루 고지에 포서로 를 두었고, 윤내현 교수는 단국대 교수님이지요. 그리고 결론에서 아무도 풀지 못했다가 아니라,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로 해야지요.
그런데 너무 자세히 내가 말한 것을 다 적어놓으니까 좀 문제가 있는 곳도 있군요. 내용을 요약해서 좀 줄여서 올려주면 더 좋겠군요.
헉,,언제 왔다 가셨나요? 새벽 2시라니,,ㅎㅎㅎ 녹음기 상태가 별로 안좋아서 잘 안들리는 부분이 오기도 있고,,
음,,그리고 말씀하신걸 거의 그대로 올린 이유는 강의 참석하시지 못하신 분들이 내용 요약을 해 놨을 경우 제가 잘못 써서 혹여 잘못된 연상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우선은 자세히 적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요약하는 중간에 제 주관이 들어가서 다른 분들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는 부분을 삭제하는게 아닌가 해서라는
그런 이유도 있고,,가장 중요한 이유는,,시간이 없어서 요약본 만들지를 못했기 때문이니다. ㅠㅠ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만간 요약본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다시 이렇게 보니 강의 내용이 새록새록 기억나는군요. ^^
바쁘신 와중에 강의 내용을 정리해주신 한단인님께 감사드립니다.
ㅋㅋ 우선은 퍼가야지. 수고하셨수
김용만님, 한단인님 두분다 너무 수고 하셨습니다, 잘 봤습니다...^^
스크랩하면서 틀린 부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