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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마을 이름의 유래는 콩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북정마을은 궁(宮)에 메주를 쑤어 바치는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마을에는 늘 콩을 삶은 냄새가 가득했고, 사람들이 항상 '북적' 댔다 하여
마을이름이 북정마을이 되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고풍스런 소시민 적 건물들이 없는 걸로 봐서 당시 건물이 많거나
북적 될 정도의 마을은 아닌듯하다 전문적인... 동명(洞名) 은 이 지역의
반달 모양을 한 산과 이어져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하였고 그 위쪽을
“웃다리골” 이라 불렀다니 지형의 생김새가 재미있다.
그리고 “심우장”의 “한용운”선생과의 연관은 특이할만한 기록은 없고 다만
“고려대학”이 성북구 안암동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4.19혁명과 연관 지어
별도로 역사를 살펴볼까 한다.
1959년 1월 6일, 일찍이 대통령 불출마를 표명한 바 있던 이승만(李承晩)은
다시 4선 출마의사를 밝히고, 자유당 조직 확대의 일환으로 전국청년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같은 해 1월 22일 대한반공청년단을 발족시켰다.
(1952년) “죽산 조봉암”선생에게 혼쭐이 난후 이승만은 바짝 긴장하여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고
“조봉암”선생을 “HID출신의 양명산”이란“”관제 간첩“을 이용하여 재판도
받기 전 ”사형“을 시켜 버렸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최초의 ”사법살인“으로
기록 됐다. 만약, ”죽산“선생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승만은 최초의 진보적 인사를 살해한 것이다.
그때도 “자유당”의 과격분자들이나 “박근혜”의 “박사모”나 행태가 똑 같다.
이때의 관변단체의 수효는 건국사상 최고치를 달성 했다.
어찌나 그 수효가 많은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나
관계자들도 정확한 숫자 파악을 못 했다 한다.
지을 단체이름이 없어 "땃벌레"라는 이름을 단 단체도 있었다.
2017년 3월 현재 전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MB때부터 자금을 살포했다는
진술을 특검이 확보 했는데 발설자는 전 "국정원장" 이병기 씨다.
또, “화랑동지회” 란 깡패 집단을 경무대(현 청와대) “곽영주”와
깡패 “이정재“가 이끌고 전국을 호령하고 있었다.
5월 13일에 실시된 7개도 지방장관 경질에서도 자유당은 자당인사를 대거
진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같은 해 6월 29일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李起鵬)을 지명하여 재빨리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민주당은 11월 26일의 전당대회에서 신·구파간의 실력대결을 통하여
구파의 조병옥(趙炳玉)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신파의 장면(張勉)을
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임하였다.
군소정당들도 각기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의 대책마련에 부심하여,
통일당은 11월 18일 김준연(金俊淵)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동시에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노농당(勞農黨)은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고
대통령후보에 전진한(錢鎭漢), 부통령후보에 이훈구(李勳求)를
각각 지명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즉,
① 4할 사전투표,
②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③ 완장부대 활용,
④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하여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중앙당으로 하여금 거액의 선거자금을 마련하게 하였다.
자유당 중앙당에서는 선거자금 모금목표를
당시 화폐로 50억 환으로 책정,
재무부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산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과 굵직한
기업체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여, 거의 70억 환을 모금하였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그러나 2월 15일 조병옥이 수술 중 급서함에 따라 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를
염원하던 국민들은 1956년의 신익희(申翼熙) 야당 대통령후보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실망과 좌절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에 유행했던 노래가 당시“히트했던 “영화,” “유정천리?”인가?
주제가 가사를 누군가 바꿔 불렀는데... 일반 유행가보다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유행되어 골목길 꼬마들까지 신나게 불렀다.
심지어 꼬마들은 “자유당”은 나쁜나라, “민주당”은 좋은나라 이렇게
편을 갈라 놀았다. 이젠, 가사를 모두 까먹었는데 대충 이렇게 기억된다.
가련다 , 떠나련다. 해공(신익희)선생 뒤를 따라
조 박사도 떠나 갔네,
자유당엔 꽃이 피고 ,
민주당엔 비가 오 네
이제 야권의 강력한 대통령 경쟁후보가 없어진 이상,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선거의 초점은 대통령직의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선거로 옮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후보인 이기붕 사이에서
전개되는 양상이 되었으나, 자유당은 당초에 짜놓았던
부정선거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같은 해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긴급 소집된 민주당 확대간부회의는 부정 및 불법사태를 엄단하여
달라는 내용의 ‘이대통령에 드리는 공개장’을 채택하는 한편, 전 국민에게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실상의 선거포기였으며, 3·15선거는
투표도 하기 전에 끝난 셈 이었다
개표가 시작되자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조작되어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고, 이런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하향 조정 결과 최종집계는 총투표자 1,000여만 명 중 이승만 960여만 명으로
88.7% 득표, 이기붕 830여만 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공공연한 부정행위에 대한 전 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규탄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채 물위로
떠올라 마산시민은 분개했고 , 이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분노하는
학생운동이 일어나 결국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재판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으로 이관되었다.
재판 결과, 3·15부정선거 당시의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그 뒤
감형·특사 등으로 거의 풀려났다
3.15 부정선거 후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해 다수의 사상자를 내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 앞서 시위에 대하여 4.18 의거라고도 부른다.
3.15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서야
서울에 상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4월 15일에 있었던 합의에 따른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21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선수를 날린 것은 고려대학교였다.
고대 총학생회에서는 4월 16일, 전체 신입생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 때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서 한꺼번에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
그러나 이는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에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고대 총학생회에서는 이 행사를 18일로 연기한다. 당일인 18일, 10시 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유진오 박사와 이철승 의원등과 면담한 학생들은
일단 저녁이 되자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평화시위를 하면서 학교로 돌아가던 중 청계4가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정치깡패들에 의해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당시에도 언론의 자유는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 구타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기풍이 짙게
남아있었으며, 어지간하면 다 대학을 나오게 된
1990년대 이후와는 달리 초등학교도 못나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생이라고 하면 실제로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야말로 앞으로 사회를 짊어지고 갈 동량이 될 인재로서 여겨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치깡패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인간쓰레기로 여겨지고 있어서
나중에 군사정권에서 마구 사형시켜도 반발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학생 한명이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사경을 헤맬 정도로 다친 바람에
병원으로 옮겨져 기사 표제로 '학생 1명 피살?'이라고 나갔는데,
물음표가 실제로 보면 잘 눈에 띄지 않기에 "깡패들이 대학생을
때려죽었다더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특히 동아일보가 이를 앞장서서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가 고대의 전신이었기 때문.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미 2월부터 특집코너로 부정선거 관련속보를
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날 보도도 그의 연장선이라고 추측된다.
시위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박마리아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그냥
사태를 확 키워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라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신도환에게 시위대 습격을 지시하는 식으로 나온다.
이 수법은 지금도 광화문 촛불과 태극기 집회 "박사모"의
계략과 맞아 떨어진다. 시비를 걸어 크게 싸움을 벌리면, "계엄령"을
선포하려는 계략인 것이다. 이들의 원조가 바로 "자유당"시절의
부패한 "매국노"집단들며, 다만 태극기를 들었다는 점 이다.
이에 신도환이 임화수, 유지광에게 지시해서 깡패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을 습격한다.
물론 이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4.19 혁명이 촉발되어
박마리아가 의도한대로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정작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이 선을 지키면서 과격진압을 거부했기에
이기붕 일가는 집까지 잃고 도망 다녀야하는 신세로 전락하기만 했다.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3월 15일 마산(현 창원시)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 시위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
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기붕(李起鵬)과 ”박 마리아“는 그의 큰아들 ”이강석“이 쏜 총에
모두 쓰러졌고 그의 동생 “이강욱”도 총에 맞아 죽자 자신도 총으로
자살을 기도 했다. 이 가족의 영욕의 세월의 마감을
일가족 집단 자살극이란 “비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 아들로 “육사를 거쳐
미국 ”웨스트 포인트(미국 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생도 시절 “이승만”처럼 한국의 “황태자” 행세를 하며 금발의 육체파 인기 여배우
“킴 노박”에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일거에 거절당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부터 아들을 “육사에 보내는 건,
”박정희“도 마찬가지 였다, 아마도 독재자들의 권력 의 꽃은 군권(軍權)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므로 박정희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유추해 본다.
만약, 이 부분을 트집 잡는다면,
아마도 죽은 사람들까지 모두 깨워 고소해야 될 것이다.
요즘, 하도 ”고소 왕“들이 많아서 하는 소리다. “이승만”의 긴 독재는 “하와이로
도주하듯 망명을 하므로 써 ”독재“가 끝났다고 환호를 할 때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 1년이 채 안된 시점에 더 큰
민족의 소용돌이 가 닥치는 걸 아무도 예측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더 “사악한 독사”처럼 생긴 “박정희”의 군사 “구테타”가
“혁명공약”을 들고 나와 “공약을 지키겠다고 외쳤지만,
그는 애초 그럴 마음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는 독재정치를 위해 “김똘똘이(김기춘)을 기용, 벼락출세를 시켜주고
”유신헌법“ 을 만드는 등 공안정치로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 시절엔 정부의 곤란한 일만 터지면 “간첩들이 대거 체포 되었다.”
그 간첩들은 모두 “관제 간첩”들이었다. 관심을 간첩사건에 쏠리게 하는
괴씸한 수법 이었다. 이 시절엔, “국정원”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였다,
후 에 “안전기획부”로 바뀐다. “대한민국” 재수립이후(1948년 이 후 부터) 잡은
간첩 수보다 짧은 기간 동안 김기춘이 잡은 간첩수가 비교가 안될 만큼 많았다.
그러나 모두 멀쩡한 사람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유도한 관제 빨갱이들 이었다.
문제는 “김기춘” 땜에 간첩으로 사형당한 당사자나 그 가족들은 “연좌 죄” 로
“빨갱이”란 낙인이 찍혀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폐인이 되어 일생을 처참하게
살다 사망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
지금 구속된 “김기춘”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을 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해도 국민들의 감정은 풀리지 않는데,
“적반하장”격으로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파렴치한” 들,
법을 주물렀던 인간들 모두가 “惡 의 根種”들이다.
지금 “박정희 딸”을 대통령이랍시고 싸고도는 “변호사”들 ....
“최순실“의 변호사 , 그런, 우리나라의 법률이 얼마나 엉성하면
이런 무리들이 설치는 가? 법이 엉성하진 않겠지만,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썩어빠져 “유전 무죄, 무전 유죄” 라는 소리가
성경 말씀처럼 실감나는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인지....
정의는 존재하는가? 묻고 싶다.
그러나 오히려 “박사모”에서 정의를 외치고 있으니
정의도 부르짖을 수 없게 됐다.
법의 정의는 “김기춘” 이하 우병우 등 지저분한 대통령 변호사들과
최순실 변호사들을 모두 남김없이 척결하고 이들에게
부역한 부역자들을모두 처벌해야 만
법의 정의가 바로서고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