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역사의 역할 II. 정상곽학에의 길 III. 정상과학의 성격 IV. 수수께끼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V. 페러다임의 우선성 VI. 이상 현상과 과학적 발견의 출현 VII.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VIII. 위기에 대한 반응 IX.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X.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XI. 혁명의 비가시성 XII. 혁명의 해결 XIII. 혁명을 통한 진보 후기 역자 해설
역자 서문
역자가 "과학혁명의 구조"를 처음 번역한 것은 1980년의 일이었다. 학위과정을 마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20 여 년 학문생활에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실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번역 이전에는 거의 입문 정도였던 과학사분야에 차츰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야의 연륜에 따른 깊은 지식도 없이, 그것도 20세기 사상사의 한 획을긋는 문제작을 번역했다는 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었고, 사실상 그 때문에 미흡한 점 많았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나 자신의 공부가 그 시절과 차원을 달리 할 만큼 성숙해졌다는 뜻은 아니거니와, 역자의 철학적 배경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도 그때와 별로 다를 바 없다. 다만 첫 번역 이후 11년의 세월을 통해서 역자의 전문 영역에서 무엇인가 좀 깊어진 게 있다면, 보다 나은 결실로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새로이 변역판을 내어 놓게 되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 일에 몇 달 동안 많은 정성을 쏟았다. 덧붙여 읽은 분들의 이해를 도우려는 뜻에서 '쿤 혁명'에 관한 역자 해설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함께 실었다. 그것에 의해 쿤 이론의 핵심적 골자와 쿤 혁명의 충격이 개괄적으로 정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토마스 쿤(Thomas S. Kuhn)은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로서 20세기 후반의 현대 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 책은 쿤이 1962년에 초판을 내었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Chicago;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Enlarged Edition)증보판을 번역한 것이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초판이래 십여 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쿤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에서도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예컨대 1980년도 가을에는 "쿤의 과학사 서술과 인접과학"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었다. 모임은 한국 과학사학회 창립 스무 돌을 기념 산학협동재단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그 세부 주제는 "쿤 혁명의 배경과 전개", "과학혁명에 대한 과학 철학적 비판", "쿤의 이론과 사회학의 현실", "정치 심리학 이론들의 패러다임적 지위", 그리고 "쿤의 생각과 언어 이론"으로서, 모처럼 만에 자연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성격의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었다는 데서 특히 그 의미가 돋보였던 심포지엄이었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역사를 통틀어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 과학의 전파는 과학발전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때마다 번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기원전 6세기, 합리적 과학의 시작을 열었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그리스의 쇠퇴와 함께 로마로 수용될 때, 로마 지식층들은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 자연철학은 라틴 문명에 곧바로 전승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측면도 발견된다. 한편 8세기경의 아랍 세계는 그리스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을 출발로 그들 자체의 과학을 전개시키고 있었으며, '12세기 르네상스(12th Century Renaissance)' 라고 불리는 아랍을 통한 라틴 유럽으로의 그리스 과학의 재수입 역시 아랍어 등으로 번역되었던 그리스 고전을 중역하거나 그리스 원전을 번역하는 것에 의해 진행됨으로써 '변역의 시대(Age of Translation)'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지금도 언어가 다른 문화권 사이의 다양한 교류에서 각종 저술의 번역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실감되고 있다.
번역을 가리켜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말은 진부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역자가 동일 저작을 다루면서도 시기에 따라 그 생산물이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역자는 이번에 체험하게 되었다. 크게는 생가의 깊이에 따른 것일 게고, 작게는 한마디로 우리말로 잘 표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좀 난해하게 읽히더라도 원전에 충실해야 하는가 사이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역자는 오히려 후자의 경향을 따르게 되었다. '왜'라고 설명을 붙인다면, 아마도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적 유산이 될 이 저작이 원래 지니고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역자가 영문학자도 문장가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무리일는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거의 원전 그대로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기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원전보다 더 읽기 어렵게 옮겨 놓고 변명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이 우리말로 변역되는 경우, 가장 훌륭한 번역판을 내놓을 수 있는 몇 분의 선생님이 계시는 것을 역자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 폐를 끼치기로 작정을 했다. 남이 쓴 원고를 읽어 가며 손을 댄다는 걸 잘 알면서도, 다시 또 언제 고칠 기회가 있으랴 싶어, 평소에 지도해 주시는 베푸심에 더 의지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프린스턴 대학에서 쿤의 제자였던 김영식 선생님(서울대 사학과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주임교수)께서 초고를 읽어 주셨고, 한국 과학사학회 회장이신 송상용 선생님(한림대 교수)께서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역자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원고를 읽어 주신 데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의 내용이 보다 충실해졌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처럼 조언해 주신 선생님들의 도움 덕택일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출간에 애써 주신 동아출판사의 김현식 사장님과 편집부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92년 5월 청파 언덕 연구실에서 김명자
쿤서언 Preface
여기 실린 에세이는 원래 거의 15년 전에 착상한 프로젝트에 대한 최초의 완간된 보고서이다. 그 당시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었던 이론 물리학 전공의 대학원생이었다. 비자연계 학생에게 물리과학을 가르치는 실험적인 학부 과정에 참여하게 된 행운은 나에게 처음으로 과학사(history of science)에 접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참으로 놀랍게도 낡아빠진 과학의 이론과 실제에 접한 것은 과학의 본질과 그 특별한 성공의 이유에 대해서 품고 있던 나의 기본 관념의 일부를 흔들어 놓았다.
그러한 관념들은 더러는 과학적 훈련 그 자체로부터 이미 터득했던 것들이었고, 더러는 과학철학에 대한 오랫동안의 취미와도 같은 관심으로부터 얻어진 것들이었다. 아무튼 그 관념들의 교육적 효용과 추상적 개연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관념들은 역사적 고찰에서 드러났던 과학의 실제와 전혀 들어 마지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관념이 과학의 여러 논의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사실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내게는 철저히 따져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런 곡절로 해서 내 생애의 계획은 그 방향을 급선회하여 물리학으로 부처 과학사로, 그 다음에는 점차로 비교적 직설적인 과학사의 문제들로부터 애초에 나를 역사로 끌어갔던 보다 철학적인 관심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몇 가지의 글을 제외하면, 이 책은 출간된 나의 저술 중 이들 초기의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최초의 것이다. 어떤 부분으로부터 그 역사로 길을 바꿔 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려고 한 시도가 되고 있다.
이제 말하려고 하는 견해들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는 기회가 처음 마련된 것은 하버드 대학 특별연구원회(Society of Fellows)의 신진 연구원(Junior Fellow)으로 있던 삼 년 동안이었다. 그렇듯 자유로운 시기가 없었더라면, 새로운 연구 분야로 옮겨 가는 일은 무척 어려웠을 터이고, 어쩌면 전혀 불가능했을 는지도 모르겠다. 그 연구 기간의 일부를 나는 계속해서 정통 과학사에 바쳤다. 특히 쿠아레(Alexandre Koyre)의 저술을 계속해서 공부했으며, 마이어슨(Emile Meyerson), 메츠거(Helene Metzger), 그리고 마이어(Annelies Maier)의 연구 업적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1) 최근 대부분의 다른 학자들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이 그룹은 과학적 사고의 규범이 오늘날의 조류와는 크게 다르던 시기에 과학적으로 사색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들의 특수한 과학사적 해석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갈수록 의문이 일기도 했지만, 그들의 업적은 러브조이(A. O. Lovejoy)의 존재의 대연쇄(Great Chain of Being)와 더불어 과학사상의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관념을 형성함에 있어 일차 사료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겉보기로는 과학사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들을 탐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나, 이제 그 연구는 내가 역사에서 처음 관심을 쏟기 시작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연히 어떤 각주를 들여다보고서, 나는 자라나는 어린이의 다양한 세계, 그리고 한 세계로부터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둘 다 밝혀 내었던 피아제(Jean Pigat)의 실험에 이끌리게 되었다.2) 어느 친구는 나에게 지각 작용에 대한 심리학, 특히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자들의 논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또 어느 친구는 세계관에 미치는 언어의 영향에 관한 워프 (B. L Whorf)의 추론을 소개해 주었다. 콰인(W. V. O. Quine)은 나에게 분석적, 종합적 차이의 철학적인 난제를 설명해 주었다.3) 이런 것이 바로 특별연구회가 자유롭게 연구하도록 해 준 주제였고, 오로지 그 덕분으로 나는 플레크(Ludwik Fleck)의 거의 앞질러 예견하고 있었다. 나처럼 신진 연구원이었던 서튼(Francis X. Sutton)의 도움말과 더불어, 플레크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러한 개념들은 과학자 사회(science community)의 사회학에서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그런 글이나 또는 대화에 관해 이 뒤로는 내가 거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테지만, 지금 다시 엮거나 평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여러 방면에서 나는 그것들의 신세를 지고 있다.
신진 연구원으로 있던 마지막 해, 보스턴에 있는 로웰 연구소(Lowell Institute)에 연사로 초청을 받음으로써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가던 나의 과학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발표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3월, <자연과학 이론에 대한 탐구(The Quest for Physicl Theory)>라는 주제로 여덟 차례에 걸친 공개 강의를 했다. 다음 해, 나는 정통과학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거의 십년 동안,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는 분야에서 강의를 하자니, 당초 나를 그리로몰고 간 개념들을 명료화시킬만한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개념들은 보다 놓은 수준의 강의 내용에 대한 은연중의 방향 설정과 몇몇 문제 구성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견해의 존립 가능성, 그리고 그 견해의 효율적인 의견 교환에 적합한 테크닉에 대해 양쪽 모두에 값진 교훈을 준 데 대해서 학생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와 똑같은 문제들과 방향 설정은 그 시절 나의 연구원 기간이 끝난 이후로 발표한, 거의가 주로 과학사적 성격을 띤 다양한 논문에도 일관하고 있다. 그 중 몇 개의 글은 창의적 과학연구에서 이런저런 형이상학적 요소가 수행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또 일부 연구에서는 새로운 이론의 실험적 근거가, 이와 모순된 옛 이론에 매달린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축적되고 동화되었는가를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그 연구들은 이제 내가 이 책에서 새로운 이론의 '출현(Emergence)'또는 발견이라고 부르는 과학 발전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러한 연결은 많이 성립된다. 이 에세이의 최종 단계는 행동과학 연구소(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 the Behavior Sciences)의 초청을 받아 1958__59년을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이제 말하고자 하는 문제들에만 온통 관심을 집중시킬 수가 있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로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그런 사회와 내가 쭉 훈련받아 온 자연과학자들의 사회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미처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을 겪게 된 것이었다. 특히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해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공공연한 의견 대립이 대단한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과학의 역사와 그러한 인식은 둘 다 나로 하여금,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회과학 분야들의 동료들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보다 확고하고 영속적인 답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문학, 물리학, 화학 또는 생물학의 과학활동은,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차이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나는 '페러다임(paradigm)'이라 그 때부터 불러 온 것이 과학적 탐구에서 지니는 역할에 관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들 페러다임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들이라고 간주한다. 내 수수께끼의 조각이 이렇게 잡히게 되자, 이 에세이의 줄거리는 대번에 뚜렷해졌다.
그 초고가 뒤에 어떤 역사를 밟았는가는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다만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그것이 유지해 온 형태에 대해 몇 마디 꼭 이야기할 것이 있다. 첫 판이 완성되고 크게 수정되기까지는 나는 그 원고가 통합과학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Unified Science의 한권으로만 출판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 획기적인 사업의 편집자들은 당초 그렇게 권유했으며 나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고, 결국은 마무리짓기까지 잘 참아 주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그리고 특히 모리스(Charles Moris)에게 탈고가 되기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충고를 보내 준 데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백과 사전의 지면관계로 나의 견해는 극히 함축된 개괄적 형태로 피력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그러한 제한은 상당히 완화되었고, 결국은 동시에 별책으로 출판되기까지 했지만, 이 연구는 나의 주제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전면적인 저술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에세이가 되고 말았다.
나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이미 알고 있는 데이터 대해서 인지와 평가상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첫 발표가 개요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해서 꼭 약점이라 할 것은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연구를 통해 여기에서 주장하는 식의 방향 재설정에 기틀이 잡힌 독자라면 이런 수상형식을 보다 시사적이며 소화하기 쉽다고 느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약점 또한 지니고 있고, 따라서 내가 확대판에 궁극적으로 포함시키기를 원하는 폭과 깊이의 확장에 대해 서두에서 예시하는 것을 합리화해 줄지 모른다. 내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사적인 자료가 갖추어져 있다. 더욱이 그러한 증거들은 물리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생물과학의 역사에서도 산출된다. 여기서는 전적으로 물리과학의 역사만을 다루기로 했는데, 더러는 이 에세이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함이요, 더러는 현재 나의 능력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전개하려는 과학관은 여러 가지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적,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지니는 잠재적 유용성을 시사해 준다. 예를 들면 이상(anomaly)현상을 순응시키게 만들려는 시도가 거듭 실패하면서 야기되는 위기의 출현을 더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 현상 또는 예상의 어긋남이 과학자 사회의 관심을 더욱 더 증폭시키는 방식은 정밀연구를 필요로 한다. 또는 내 생각이 정말 옳아서, 과학혁명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겪는 사회의 역사적인 전망이 바뀌는 것이라면, 그런 전망의 변화는 혁명 이후의 교과서와 연구 논문의 골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한 가지 영향__연구 보고서의 각주에 인용된 기술적 문헌의 분포가 달라지는 것도 혁명이 일어남을 가리키는 하나의 지표로서 연구됨이 마땅할 것이다.
몹시 압축시켜 만들다 보니 주된 문제의 논의도 여럿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어느 과학의 진보에서 패러다임 이전과 이후의 시기에 대한 나의 구별이 너무 개괄적으로 흘러 버렸다. 그 경쟁이 초창기를 특징지어 주었던 학파들 각각은 패러다임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을 지표로 삼게 된다. 아주 드물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후기에 이르면 두 가지 패러다임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패러다임을 소유했다는 것 자체가 2절에서 논하는 발전적 전이에 필요한 충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하게 때로는 짤막하게 곁들인 것을 제외하고는, 나는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기술의 진보 또는 외적인 사회적. 경제적. 지성적 여건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와 달력의 문제만 보더라도, 외적인 조건이 단순한 이상(anomaly)을 첨예한 위기의 근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바로 이 실례는, 이런저런 혁명적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는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대안의 범위에, 과학 외적인 여건이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설명해 줄 것이다. (4나의 견해로는 이런 유형의 영향을 명백히 고찰하는 것이 이 에세이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주제를 변형시키지는 않을 것이나, 과학의 진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제일급의 중요성을 지니는 분석적인 차원을 덧붙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이겠는데, 지면의 제약 때문에 이 에세이의 사적인 특성을 지닌 과학관의 철학적 함의를 다룸에 있어 심각하게 제한을 받고 말았다. 분명히 거기에는 함의가 내포돼 있으며, 나는 주된 것들을 지적하고 증거를 제시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나는 해당되는 이슈에 대한 당대의 철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 대체로 상세히 논의하는 것은 삼가했다. 내가 의구심을 표시한 부분으로 말하면, 완벽하게 표명된 어느 견해보다는 철학적인 자세에 대한 의혹이 더 잦은 편이다. 따라서 세련되게 발전된 입장들 위에 서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더러 내가 그들의 관점을 잘못 보았다고 느낄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만, 이 에세이에서 그들을 설득할 작정은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 책보다는 엄청나게 길고 형태도 달라져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언의 첫머리를 자서전적인 논조로 쓴 것은, 나의 사고에 형태를 갖추도록 해 준 학문적 업적들과 연구 기관 양쪽 모두에 크게 진 빚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나머지 빚진 것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나머지 인용을 통해 갚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또는 뒤에서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제안과 비판으로 나의 지적 계발을 이모저모로 지지하고 이끌어 준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 에세이에 실린 개념들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지는 무척 오래된다.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자신이 어딘가 영향을 끼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바로 내 동료들과 친지들 모두의 명단과 맞먹을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흘려 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뜻깊었던 몇 가지만으로 국한시킬 수밖에 없겠다. 우선 처음으로 나에게 과학사를 소개하고 그럼으로써 과학 발전의 성격에 대한 나의 관념을 변형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당시의 하버드 대학 총장 코넌트(James B. Conant)였으며 그 과정이 시작된 이래로 그는 줄곧 그의 견해, 비판, 시간을 베풀어 주었다__내 원고의 초고를 읽고 중요한 부분을 고치도록 할애한 시간을 비롯하여, 내쉬(Leonard K. Nash)는 코넌트 박사가 시작했던 과학사적인 성격의 교과목을 5년간 나와 함께 가르쳤는데, 내 발상이 형태를 갖추는 첫발을 내딛고 있을 그 무렵 더 없이 활발한 공동 연구자였으며, 연구 진전의 후반부에서 나는 그가 곁에 없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케임브리지를 떠난 뒤, 창의적인 반향판 이상으로서의 내쉬의 자리는 버클리에서의 내 동료인 카벨(Stanely Cavell)이 채우게 되었다. 주로 윤리학과 미학에 관심을 둔 철학자인 카벨이 나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결론을 얻었다는 점은 내게는 늘상 자극과 격려가 되어주었다. 더욱이 그는 내가 불완전한 문장으로 나의 생각들을 꺼내 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방식의 의사 소통은 첫 원고를 준비하는 동안 내가 겪어야 했던 몇 가지 큰 장벽을 뚫거나 또는 선회하는 방법을 내게 일깨워 줄만큼 그가 나를 이해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첫판의 초고가 마련된 이후에도 여러 다른 친구들이 도움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전폭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네 사람의 이름만 여기 들어도 다른 친구들은 나를 용서해 주리라:버클리의 파이어아벤드(Paul K. Feyerabend), 콜롬비아의 네글 (Ernest Nagel), 로렌스 방사능 시험소 (Lawrence Radiation Laboratory)의 노이즈(H. Pierre Noyes), 그리고 출간을 위한 최종판을 준비하는 데 많이 도와준 나의 학생인 하일브론(John L. Heilbron)에게 특히 감사를 드린다. 이들의 불만과 제안은 대단한 도움이 되었으나, 그들 또는 위에 열거한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이 책에 씌어진 내용에 대해 완전히 찬성할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으리라는 감이 든다). 끝으로, 나의 양친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은데, 위에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가 되겠다. 내가 결코 느끼지도 못한 채로 그들은 또한 더욱 중요한 무엇인가를 여러모로 베풀어 주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연구를 이어가고, 나아가서 그 일에 몰두하도록 북돋아 주었다. 나의 이러한 연구와 이어가고, 나아가서 그 일에 몰두하도록 북돋아 주었다. 나의 이러한 연구와 같은 프로제트와 씨름해 본 사람이라면 가족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 것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1962년 2월 버클리, 캘리포니아 T.S.K
"주"
1) 특히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Alexandre Koyre, Etudes Galileennes(3권, Paris, 1939);Emil Meyerson, Identity and Reality, Kate Loewenberg역 (New York, 1930);Helene Metzger, Les doctrines chimiques en France du debut du XVIII siecle(Paris, 1923), Nweton, Stahl, Boerhaave et al doctrine chimique(Paris, 1930), Annelies Maier, Kie Vorlaufer Galileis im 14.Jahrhundert("Student zur Naturphilosophie der Spatscholastik";Rome, 1949)를 들 수 있다.
2) 여기에는 과학사에서도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개념과 과정이 표현되었으므로, 피아제의 두 가지 고찰은 각별히 소중한 것이었다.The Child`s Conception of Casuality, Marjorie Gabin역(London, 1930), Les notions de mouvement et de vitesse chez l`enfant(Paris, 1946)
3) Whorf 의 논문은 그 뒤로 줄곧 John B.Carroll의 Language, Thought, and Reality-Selected Writings of Benjamin Lee Whorf(New York, 1956)에 의해 수집되었다.Quine 은 그의"From a Logical Point of View"(Cambrigde, Mass., 1953), pp.20__46에 인쇄된"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그의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4) 이러한 요인들에 관해서는 T.S.Khunw저, The Cor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Cambridge, Mass., 1957), pp.123__32, 270__71에서 논의되고 있다. 외적인 지적, 경제적 여건이 실질적인 과학 발달에 미치는 다른 영향들은 나의 아래논문들에서 설명된다;"Conservation of Energy as an Example of Simultaneous Discovery", Critical Problems in the History of Science, Marshall Clagetted.(Medison, Wis, .1959), pp321__56;"Engineeriing Precedent for the Work dof Sadi Carnot", Archiv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s sciences, XIII(1960), 247__51;"Sadi Carnot and the Cagnard Engine", Isis, LII (1961), 567__74.그러므로 외적 요인들의 역할을 대단치 않게 취급한 것은 이 에세이에서 논의된 문제들에만 한정된 것이다.
I. 서론:역사의 역할 Introduction:A Role for History
만약 역사가 일화 또는 연대기 이사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라고 간주된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지금 주어져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대해 결정적인 변형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심지어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예전에는 고전에 기록된 대로,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과학의 새로운 세대마다 그 훈련을 쌓도록 익히는 교과서들에 기록된 대로, 주로 완결된 과학적 업적들의 연구로부터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들의 목적은 필연적으로 설득조인데다가 교육용이다. 그런 것들로부터 얻어진 과학의 개념이란 마치 어느 국가의 문화의 이미지를 관광 안내책자나 어학교본에서 끌어낸 격이나 다를 바 없이 실제 활동과는 잘 맞지 않는다. 이 에세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런 책에 의해서 오도되어 왔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이 글이 겨냥하는 것은 연구 활동 자체의 사적인 기록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교재로부터 얻어지는 비사적인 상투적 문구에 의해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사적인 데이터를 찾고 조사하는 것이라면, 역사를 살펴 보았자 새로운 개념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교과서들로 말하자면, 흔히 과학의 내용이란 교과서의 내용 속에서 설명된 관찰, 법칙 그리고 이론에 의해서 특이하게 예시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거의 빠짐없이 이런 책들에는 과학적 방법들이 단순히 교과서 데이터를 모으는 데 쓰인 손재주의 기법들에 의해 예시되는 것들처럼 쓰여져 있으며, 아울러 그들 데이터를 교과서의 이론적 일반화에 연관시키는 경우에 적용된 논리적 조작을 가리켜 과학적 방법인 것처럼 설명한다. 그 결과가 바로 과학의 본질과 발전에 대한 심오한 함의를 지니 과학의 개념이 되어 왔다.
만일 과학이 요즈음의 교재에 실린 사실, 이론, 그리고 방법의 집합이라면, 과학자는 성공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 특정한 집합에 한두 가지 요소를 보태기 위해서 온갖 애를 쓰는 사람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지식을 이루면서 날로 쌓여 가는 자료 더미에, 하나씩 또는 여럿이 이들 항목이 덧붙여지면서 뿔뿔이 진행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과학사는 이들 전승되는 증대와 그것들의 축적을 훼방해 온 장애의 연대사를 기록하는 분야가 된다. 그렇게 되면, 과학의 발전에 대해서 과학사가는 두 가지 주요한 임무를 띠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당대의 과학적 사실, 법칙, 그리고 이론이 발견되었거나 창안되었는가를 일일이 결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과학 교과서 구성 내용의 보다 빠른 축적을 방해해온 오류, 신화, 그리고 미신의 퇴적 더미를 찾아내고 설명해야 한다. 많은 연구가 이런 목표를 겨냥해서 이루어져 왔으며, 더러는 지금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몇몇 과학사학자들은 축적에 의한 발전(development-by-accmulation)이라는 개념으로는 그들에게 부과된 기능을 완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느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증대적 과정에 대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그들은, 깊게 파고들수록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가 더욱 곤란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에너지 보존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가? 몇몇 과학사학자들은 갈수록 이것들이 묻는 것조차 잘못된 유형의 질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과학은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축적에 의해서 발달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로 이들 학자들은 과거의 관찰과 믿음에 과학적(scientific) 요소를 그들의 선대 과학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오류(Error)와 미신(superstition) 이라 못 박았던 것들로부터 구별짓는 데 있어 점차 곤경에 빠지고 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리스의 역학(dynamics), 플로지스톤 화학(phlogistic hemistry), 또는 칼로릭열역학(caloric thermodynamics)을 자세히 연구하면 할 수록 과학사 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그 당시를 풍미하던 견해들을 전반적으로 보면, 오늘날 받아들이는 것보다 덜 과학적인 것도 아니요, 인간의 특이한 기질의 산물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시대에 뒤지는 이러한 믿음을 신화라부르기로 한다면, 신화는 현재에도 과학적 지식에 이르는 동일 유형의 방법에 의해 형성될 수 있고, 동일 유형의 이치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과학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과학은 현재 우리가 가진 것들과는 상당히 부합되지 않는 믿음의 무리를 포함한 것이 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이 주어지면, 사가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 버렸다는 이유로 해서 원칙적으로 비과학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과학의 발전을 증대의 축적 과정이라고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개개의 발명과 발견을 분리함에 있어 곤란함을 드러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연구는, 그것을 거쳐서 과학에의 이들 개별적인 기여가 복합화되었다고 사료되는 축적적인 과정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를 일으키는 원천이 된다.
이들 모든 의문과 난제가 빚은 결과는 과학의 연구에서 사료 편찬의 혁명이 되는데, 아직은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채, 과학사학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제기하고 과학에 대한 색다르고 흔히 축적성을 떠난 발전의 노선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보다 옛 과학이 현재의 우리에게 베푼 영속적 기여를 따지기보다는, 사가들은 바로 그 당대에서의 그 과학의 사적인 온전성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예를 들면 현대 과학의 관점과 갈릴레오의 관점과의 관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견해와 그의 그룹, 즉 그의 스승들, 동 시대 학자들, 그리고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직계제자들의 견해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더욱이 사가들은, 그 견해들에 최고의 정합성을 주고 또한 자연에의 가장 가까운 일치를 주는 관점에 바탕하여__대체로 현대 과학의 것과는 전혀 다른__그 그룹과 그 비슷한 다른 그룹들의 견해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얻어진 연구들을 살펴보면, 아마도 쿠아레(Alexandre Koyre)의 저술에서 가장 잘 예시될 것인 바, 과학은 아마 과거의 역사 서술의 전통을 따르는 편찬자들에 의해 논의된 것과 같은 활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묵시적으로는 이런 사적 고찰은 과학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에세이는 새로운 과학사 서술(histography in science)이 시사하는 암시를 명백하게 밝혀냄으로써 그 이미지의 윤곽을 잡고자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과정에서 과연 과학의 어느 측면이 두드러지게 부각될 것인가? 적어도 설명의 순서로 말하자면, 첫째는 그들 자체로서 다수 유형의 과학적 질문에 고유한 결론을 맺어주는 방법론적 지령의 불충분함이다. 전기적 또는 화학적 현상을 시험하라고 지시를 받는 경우, 이들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과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면, 여러 가지 부합되지 않는 결론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 옳게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한 타당한 가능성 가운데 그가 도달한 어느 특정한 결론은 아마도 다른 분야에서의 사전 경험에 의해서이거나, 그의 연구의 우연에 의해서 또는 그 자신의 개인적 특질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별들에 대한 어떤 믿음을 화학 또는 전기학의 연구에 작용시키게 될까? 새로운 분야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그럴 법한 실험 가운데 그는 우선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는가? 그리고 거기서 얻어진 복잡한 현상의 어떤 측면들이 그에게 화학적 변화나 전기적 친화력(electrical affinity)의 본질을 밝히는 데 특별히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때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해서,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은 흔히 과학 발전의 핵심적 결정 요소를 이룬다. 예로서 II 절에서 보게 되겠지만, 대다수 과학의 초창기 발전 단계는 자연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 사이에서의 부단한 경쟁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그런 각각의 견해는 일부 과학적 관찰과 방법의 지시로부터 유도된 것이며 대부분이 그런 지시와 대충 부합되는 것들이다. 이들 다양한 학파를 구별짓는 것은 방법__그것들은 모두 '과학적'이었다.__의 이런저런 실패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세계 속에서 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방식, 즉 동일한 표준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이라 부르게 될 그 무엇이다. 관찰과 경험은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으며 또 제한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그러한 믿음의 특정한 무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겉보기로서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진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에 의해 신봉되는 믿음 가운데 구성 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임의성의 이런 요소는, 어느 과학자 그룹이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어떠한 믿음이 없이 그 과학 활동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 요소가, 주어진 시대에서 그 그룹이 실제로 의존하는 특정한 기존 지식 체계의 필연성을 경감시키는 것도 아니다. 효율적 연구는 과학자 사회(scientific community)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는 개시되는 일이 거의 없다: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 실체(entity)들은 무엇인가? 이들 실체들은 서로간에 어떻게 작용하며 인간의 지각과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러한 실체에 대해서 합법적으로 어떤 질문에 제기되며 풀이를 찾는 데 있어 어떤 기술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성숙 단계의 과학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또는 해답의 바람직한 대리 격이)이 전문적 활동을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자격을 갖추게 하는 교육적인 전수에 확고하게 내재해 있다. 그런 교육은 철저하고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 해답들은 과학 정신(scientific mind)에 심각한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상과학 연구 활동의 특유한 효율성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주어진 시기에 그것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 양쪽 다 잘 설명해준다. III절과 IV절 그리고 V절에서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을 검토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러한 연구를 가리켜, 자연을 전문 교육에 의해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격렬하고 헌신적인 시도라고 묘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들의 역사적 기원에서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발전에서의 임의성의 요소가 무엇이든 간에, 그런 상자들이 없이 연구가 과연 진행될 수 있는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임의성이라는 요소는 존재하며, 그것 역시 과학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에 관해서는 VI절과 VII절, 그리고VIII절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시간을 거의 모두 바치는 활동인데, 이것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과학자 사회가 알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 활동에 있어서 성공의 대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사회가 그 가정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예컨대 정상과학은 근본적인 새로움(novelty)을 흔히 억제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러한 새로움이 정상과학의 기본 공약들을 전복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 공약들이 임의성의 요소를 지탱하는 한, 정상과학의 바로 그 성격은 새로운 것이 아주 오랫동안 억제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때로는 정상적인 문제, 즉 기존의 규칙과 과정에 위해 풀려야 하는 문제가 그것을 거뜬히 풀 수 있는 가장 유능한 학자들의 되풀이되는 공격에도 풀리지 않는다. 또 어떤 경우에서는 정상 연구의 목적으로 고안되고 구성된 예측과는 들어맞지 않은 이상 (anomaly)을 나타내게 된다. 이렇듯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정상과학은 거듭 되풀이해서 길을 잃게 된다. 또한 그렇게 될 때__다시 말해서 전문 분야가 과학 활동의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이상 현상들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을 때__드디어 전문 분야를, 과학의 수행을 위한 새로운 기초인 새로운 공약으로 이끄는 비상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문 분야의 공약의 변동이 일어나는 비상한 (extraordinary)에피소드들이 바로 이 에세이에서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s)이라 부르는 사건들이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의 전통에 기반한 활동에 전통을 파괴하는 보완이 덧붙여진 것이다.
과학혁명 가운데 가장 뚜렷한 실례는 이전에 흔히 혁명이라 표현되어 왔던 과학 발달사의 그 유명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의 성격이 처음으로 직접 파헤쳐지는 IX절과 X절에서는 코페르니쿠스, 뉴턴, 라부아지에,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연관되는 과학 발전에서의 주요 전환점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다루게 될 것이다. 적어도 물리과학(physical science)의 역사에서는 다른 어느 에피소드보다 더 명료하게 이들 사례는 과학혁명들이 대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이것들은 각기 그 과학자 사회로 하여금 그것과는 양립되지 않는 다른 이론을 택하여 높이 기리던 하나의 과학 이론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각 혁명은 과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그에 따르는 변화를 일으켰고, 또한 그 전문 분야가 어떤 것을 인정할 만한 문제로 간주할 것인가, 또는 합법적인 문제풀이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에서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마다 과학 연구가 이루어진 그 세계의 변환이라고 궁극적으로 묘사되어야 할 방식으로 과학의 상상력을 변형시켰다. 이러한 변화들은 거의 빠짐없이 그것에 수반되는 논쟁과 더불어 과학혁명을 정의하는 특성이 된다.
이러한 특성들은 뉴턴 혁명 또는 화학혁명의 연구 같은 데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에세이의 기본 명제는 성격이 그다지 확실치 않아 보이는 그 밖의 다수의 에피소드 연구에서도 그러한 특성들이 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맥스웰의 방정식(Maxwell`s equation)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훨씬 작은 전문가 그룹에 대해,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못지 않게 혁명적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저항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새로운 이론의 창안도 규칙적이고 당연하게 그 영역이 영향을 받게 되는 특수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의와 같은 반응을 유발시킨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새로운 이론은 정상과학의 기존 활동을 다스리던 규칙에서 변화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그것은 이미 성공적으로 완결되었던 과학 업적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이론은 그 적용 범위가 얼마나 전문적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것에의 단순한 축적적 보완인 경우가 드물거나 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유이다. 새로운 이론의 동화는 기존 이론의 재구축과 기존 사실의 재평가를 요구하는데, 이는 한 사람에 의해서 또는 하룻밤 사이에 완결되는 일이 거의 없는 본연적으로 혁명적인 과정이다. 그러고 보면 과학사가들이 그들의 용어가 독립된 별개 사건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 광범위한 과정을 정확하게 날짜 매김하기가 곤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새로운 이론의 창안이 그것이 일어나는 영역의 전문가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던지는 유일한 과학적 사건인 것도 아니다. 정상과학을 규제하는 공약은 우주가 어떤 유형의 실체를 포함하는가를 명시할 뿐만 아니라, 묵시적으로 그것이 포함하지 않은 것들도 제시하게 된다. 논의를 더 확장시켜야 할 주제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산소 또는 X선의 발견과 같은 것은 과학자의 세계에 속한 항목에 단순히 한 종목을 더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의 발견은 그런 결과 가져오게 되지만, 전문가 사회가 전통적 실험과정을 재평가하고 오랫동안 익숙해 온 실체에 대한 그 개념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다루는 이론의 조직망을 개편시킨 뒤에서야 일어난다. 과학적 사실과 이론은 아마도 정상과학 활동에서의 단일 전통 내에서를 제외하고는 범주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예기치 않았던 발견이 그 의미에 있어 단순한 사실로 끝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과학자의 세계가 사실이나 이론의 영역에서 근본적 새로움의 발견에 의해 양적으로 풍요해질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변형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러한 확장된 관념이 여기서부터 설명된 것이다. 물론 이런 확장은 평상적인 용법을 왜곡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발견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도 혁명이라고 표현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확대 개념을 나에게 그리도 중요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발견의 구조를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그것에 관련시키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논의는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의 상호 보완적인 관념이 곧 잇달은 아홉 개의 절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시사한다.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은 남아 있는 세 가지의 핵심적 물음에 대해 매듭지으려 시도한다. XI절은 교과서의 전통을 논함으로써 과학혁명이 이전에는 왜 그렇게 보기가 어려웠는가를 다룬다. XII절은 옛날의 정상과학 전통의 옹호자들과 새로운 것의 지지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혁명적 경쟁에 관하여 기술한다. 따라서 XII절은 과학적 탐구의 이론에서, 과학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에 의해 익숙해져 있는 확인(confirmatio)또는 반증(falsification)과정을 어느 방식이든 대치하게 되는 경로에 대해서 고찰한다. 과학자 사회 (scientific community)의 분파간의 경쟁은 실제적으로 이전에 수용된 어느 이론을 폐기하거나 또는 다른 것을 채택하는 결과를 빚는 유일한 역사적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XII절에서는 혁명을 통한 발전이 과학적 진보의 독특한 특성과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가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 이 에세이는 해답의 주요 개론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는못할 것인데, 그 해답은 훨씬 더 많은 탐색과 연구를 필요로 하는 과학자 사회의 특성에 달려 있다.
분명히 어떤 독자들은 사적 연구가, 여기서 목표로 하는 개념전환의 유형에 과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미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사용 가능한 이분법의 전 사료들은 그것이 적절히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역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순수한 기술적 전문분야(descriptive discipline)이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된 명제들은 때로는 해설적이고 때로는 규범적이다. (normative) 그러나 위에서 제시된 명제들은 때로는 해설적이고 때로는 규범적(normative)이다. 다시 나의 일반화의 대부분은 과학자들이 사회학 또는 사회 심리학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결론 중에서 몇 가지는 전통적으로 논리학이나 또는 인식론(epistemology)에 속한 것들이다. 앞단락에서 나는 '발견의 맥락(context of discovery)'과 '정당화의 맥락(context of justification)'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현대식 구분을 위배했던 것으로까지 보일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분야들과 관심사의 이러한 뒤섞임에 의해 심각한 혼돈 이외에 다른 무엇이 시사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구분과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에 대해 지성적으로 풀어 나가면서, 그것들의 의미와 위력을 더 잘 밝히기는 밝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해 동안 그것들을 지식의성격에 관한 것이라 여겨 왔으며, 아직도 적절히 개조된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일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충의 양식으로라도 지식이 획득되고, 수용되고, 동화되는 실제 상황에 그것들을 적용시키려는 나의 시도는 그런 구별들을 지극히 난제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기본 논리적 또는 방법론적 특징을 지니고 그에 따라 과학지식의 분석에 우선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은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바로 그 질문들에 대해 실질적인 해답을 주는 전통적 관념의 필수 요소인 것 같다. 그러한 순환성이 그것들을 무효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는 그것들을 한 이론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분야들의 이론에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동일한 조사를 받게 한다. 만일 그것들이 그 내용으로서, 순수한 추상적 개념 이상의 것을 가지려면, 그때의 내용은 규명해야 할 데이터를 적용하여 그것들을 관찰함으로써 발견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 과학사(history of science)가, 인식론들이 정당하게 적용되도록 요구되는 그 현상들의 근원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가?
II. 정상과학에의 길 The Route to Normal Science
이 에세이에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뜻하는데, 그 성취는 몇몇 특정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과학의 한걸음 나아간 활동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즈음에는 이러한 업적들은 물론 그 원래의 형태로는 아니지만, 초급 및 고급 과학 교재에 의해서 자세히 설명된다. 이들 교과서들은 수용된 이론의 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 성공적인 적용 사례의 다수 또는 전부를 들어 해설하고, 그들 응용을 범례적 관찰과 실험에 비교한다. 이런 책들이 19세기 초에 이르러 널리 퍼지기 전에는(그리고 새로이 성숙의 경지에 이른 과학에서는 보다 더 최근에 들어서) 과학 분야의 유명한 고전들의 다수가 교재 비슷한 기능을 맡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a)"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뉴턴(Newton)의"프린키피아(Principia)"와 "광학(Optics)", 프랭클린(Franklin)의 "전기학(Electricity)", 라부아지에(Lavoisier)의 "화학(Chemistry)", 그리고 라이엘(lyell)의 "지학(Geology)"등의 책들과 다수의 여타 저작이, 일정 시기 동안은 연구 분야에서의 합당한 문제들과 방법들을 연구자의 다음 세대에게 묵시적으로 정의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 저술들은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것들의 성취는 과학 활동의 경쟁 방식으로부터 끈질긴 옹호자들의 무리를 떼어낼 만큼 가위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동시에 모든 유형의 문제들을 연구자들의 재개편된 그룹이 해결하도록 남겨 놓을 만금 상당히 융통성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띠는 성취를 이제부터 '패러다임(paradigm)'이라 부르기로 하는데, 이 용어는 '정상과학'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이__법칙, 이론, 기기법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례들__그로부터 과학연구의 특정한 정합성의 전통이 생겨나는 모델들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과학사학자들이 "프톨레미오스의 천문학( 또는'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또는 '뉴턴의 역학')", "입자광학(corpuscular optics)[또는 '파동광학(wave optics)']"등의 제목 아래 기술하는 전통들이다. 서술적으로 위에 명명된 제목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다수 명칭들을 포함하여 패러다임의 연구는 과학도가 훗날 과학 활동을 수행할 특정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과학도는 거기에서 바로 그 확고한 모델로부터 그들 분야의 기초를 익혔던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므로, 이후에 계속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들의 연구가 공유된 패러다임에 근거하는 사람들은 과학 활동에 대한 노골적인 의견 충돌이 빚어지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들의 연구가 공유된 페러다임에 근거하는 사람들은 과학활동에 대한 동일한 규칙과 표준을 지키게 된다. 그러한 약속과 그것이 조성하는 분명한 여론 일치는 정상과학, 즉 특정 연구 전통의 출현과 지속에 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이 에세이에서는 패러다임의 개념이 여러 가지 친숙한 관념 대신에 자주 쓰일 것이므로, 그것의 도입 이유들에 대해 좀더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적 공약의 지위로서 확고한 과학적 성취는 어째서 그것으로부터 추상화되는 다양한 개념, 법칙, 이론, 그리고 관점보다 우선하는 것인가? 공유된 패러다임은 어떤 의미에서 과학적 발전에서의 과학도에게 기본적 단위 즉, 그 대신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논리적 기본 요소들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그런 단위가 되는가? 'V'절에서 이것들을 다루는데, 이런 질문과 그 비슷한 것들에 대한 해답은 정상과학과 패러다임의 관련된 개념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보다 추상적인 논의는 정상과학의 실례를 또는 작동하는 패러다임의 실례를 전에 접해 보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특히 이들 관련되는 개념들은 모두, 페러다임이 없는 또는 적어도 위에서 명명된 것들처럼 명백함과 구속력을 갖지 않은 과학연구의 유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함으로써 명확해질 것이다. 패러다임 획득과, 그것이 허용하는 보다 심원한 연구 형태의 획득은 어느 주어진 과학 영역의 발전에 있어 성숙의 징조가 된다.
만일 과학사학자가 서로 연관된 현상에 대한 어느 선정된 그룹의 과학 지식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면, 물리광학(physical optics)의 역사와 관련하여 여기에 예시된 양상과 거의 다름없는 현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물리학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빛은 광자(photon) 즉,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아울러 나타내는 양자 역학적 실체라고 가르친다. 연구는 그에 따라 진행되거나, 아니면 이런 통상적인 언어 표현이 유도하는 더 정교하고 수학적인 특성화에 따라서 진행된다. 그러나 빛의 그러한 특성을 규정한지는 반세기 정도밖에 안 된다. 20세기 초에 플랑크(Plank), 아인슈타인(Einstein),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학자들이 진전시키기 전까지는, 물리학 교재에서 빛은 횡파(역주;진행 방향에 수직되게 진동하는 파동)운동이라고 가르쳤는데, 이 관념은 19세기 초 영(Young)과 프레넬(Frenel)의 광학에 대한 저술들로부터 유도되었던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파동 이론은 광학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수용되기에 이른 첫 번째 학설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18세기 동안 이 분야의 패러다임은 뉴턴의 광학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빛을 물질의 입자들(material corpuscles)이라고 가르쳤다. 그 당시 물리학자들은 고체 물체에 부딪치는 빛의 입자에 의해 나타내어지는 압력에 대한 증거__초기의 파동 이론의 학자들은 찾지 않았던__를 찾으려 애썼다.1)
물리광학에서의 패러다임의 이들 전환은 과학혁명이며,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혁명을 거친 다른 것으로의 연속적 이행은 성숙된 과학에서의 통상적 발달 양상이다. 그러나 뉴턴의 연구 이전 시대의 특징적인 양상은 그렇지 않으며, 여기서 우리가 관심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득한 고대로부터 17세기 말까지 이르는 시기에 빛의 본질에 관해 널리 수용된 단일한 견해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그 대신 다수의 경쟁하는 학파들과 다시 그 분파가 산재하였고, 대부분이 에피쿠로스주의 (Epicurean),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또는 플라톤주의 이론의 이러저러한 변형을 신봉하고 있었다. 어느 그룹은 빛을 물체와 눈 사이에 자리한 매질의 변형이었다. 또 어느 그룹은 눈으로부터 발산되는 것과 매질의 상호작용에 의해 빛을 설명하였다. 이 밖에도 갖가지 조합과 수정의 이론이 존재했다. 해당 학파들은 각각 어느 특정 형이상학에 관련시켜 세력을 키웠으며, 이 각기 패러다임적 관찰로서 그 고유 이론이 가장 잘 설명해 낼 수 있는 광학 현상의 특수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그 밖의 관찰은 특별 취급에 의해 다루어졌거나 또는 앞으로 더 연구할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2)
여러 시대에서 이들 학파들은 모두 개념, 현상, 기법의 전반에 걸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뉴턴은 그것들로부터 거의 통일적으로 수용한 물리광학의 패러다임을 최초로 끌어냈던 것이다. 이들 다양한 학파의 보다 창의적인 학자들을 제외한 과학자에 의해서 내려진 정의는 현대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로 탈락시킬 것이다. 그들은 과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뉴턴 이전의 물리광학의 개요를 검토해 본 사람은 그 분야의 종사자들이 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활동의 총체적 결과는 과학 이하의 어떤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알맞다. 당연시할 수 있는 공유의 믿음이 아무것도 없었던 까닭에, 모든 물리광학의 저자는 저마다 기초부터 새롭게 그의 분야를 개척해야 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관찰과 실험을 고르는 선택은 비교적 자유로웠는데, 그 이유는 광학 분야의 저자마다 채택해서 설명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방법 또는 현상에 대한 표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로부터 나온 책 속의 대화는 통상적으로 자연을 향한 것 못지 않게 다른 학파의 학자들에게 향했다. 이런 양상은 오늘날에도 창의적인 여러 분야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의미있는 발견 및 발명과 모순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물리광학이 뉴턴 이후에 획득한 그리고 여타의 자연 과학이 오늘날 익숙해진 그런 발달의 유형은 아니다.
18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전기학 연구의 역사는, 과학이 보편적으로 인정된 최초의 패러다임을 획득하기 이전에 발전하는 방식에 대한 보다 확실하고 잘 알려진 예증을 제공한다. 이 시기 동안은 전기학 실험학자들의 주요 인물 수만큼이나 전기의 본성에 대한 견해도 갖가지였는데, 혹스비(Hauksbee), 그레이(Gray), 데자글리에(Desaguliers), 뒤페이(Du Fay), 놀레트(Nollett), 왓슨(Watson), 프랭클린(Franklin)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수많은 전기의 개념은 모두 무엇인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개념들은 부분적으로는 당대의 모든 과학적 연구의 지침이 되었던 역학적__입자 철학(mechanico-corpuscular philosophy)의 이런저런 수정으로부터 유도되었다. 게다가 그런 개념들은 모두 실제적인 과학 이론들__일부는 실험과 관찰로부터 유도되었고, 연구에서 수행된 추가적 문제들의 선택과 설명을 부분적으로 결정했던 이론들__의 구성 요소였다. 그러나 모든 실험들이 전기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실험자들의 대부분이 서로의 연구 논문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들은 일가의 유사성 이상을 갖지 못했다.3)
17세기 과학 활동을 따르는 이론들 중 초기의 한 그룹은 인력 그리고 마찰에 의한 전기 발생을 기본적 전기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이 그룹은 전기적 반발을 모종의 역학적 반동으로 인한 이차적 효과로 취급하는 경향을 띠었고, 또한 그레이가 새로 발견한 효과인 전기 전도(conduction)현상에 관한 논의와 체계적 연구도 둘 다 가능한 한 뒤로 미루려고 했다. 다른 '일렉트리션(electrician:그들 스스로가 불렀던 용어이다.)'들은 서로 인력과 반발력을 동등하게 전기의 기본 작용이라 여겼고, 그에 준해서 그들이 이론들과 연구를 수정하였다.(실은 이 그룹은 지극히 작은 단위였다__프랭클린의 이론조차도 음전하를 띤 두개의 물체 사이의 상호 반발에 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단순한 전도 효과를 제외하고는 첫 번째 그룹과 마찬가지로 어느 것에 대해서도 동시에 제대로 설명하는 데에는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효과들은 다시 제3의 그룹에게 출발점을 제공했으며, 그 그룹은 전기를 비도체로부터 튀어 나오는 '전기소(efluvium)'로 보기보다는 도체를 통해서 흐를 수 있는 유체(fluid)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 그룹은 그 이론을 여러 가지 인력이나 반발 효과와 함께 조화시키는 데 곤란을 겪었다. 프랭클린과 그의 직계 후계자들의 연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전기의 이러한 효과들을 모두 거의 비슷한 정도로 그럴듯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출현했으며, 그럼으로써 '일렉트리션(electricians)'들의 뒤를 이은 세대에게 그 연구에 대한 공유의 패러다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실제로 제공했던 것이다.
수학과 천문학에서처럼 최초의 확고한 패러다임이 선사시대로부터 유래되는 분야들을 제외하고 또한 생화학처럼 이미 성숙기의 전문 영역의 분할과 재결합에 의해 형성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앞에서 개론했던 상황들이 사적으로 본아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광범위한 역사적 사건을 상당히 임의적으로 선정된 이름 하나(예컨대 뉴턴이니 프랭클린이니)를 써서 나타내는 적절치 못한 단순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운동 연구와 아르키메데스 이전의 정력학(statics)연구, 블랙(Black) 이전의 열 연구, 보일과 보어하브(Boerhaave) 이전의 화학 연구, 허턴(Hutton) 이전의 지사학 연구에서도 그런 비슷한 근본적인 의견의 불일치를 보였음이 특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생물학의 일부영역 __예컨대 유전학 연구__에서는 최초의 보편적인 정통 패러다임들이 상당히 최근에 나타났다. 그리고 사회과학의 어느 부분이 과연 그러한 패러다임을 얼마만큼 획득했는가의 문제는 지금도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역사는 확고 부동한 연구의 합의에 이르는 길이 지극히 험난하고도 먼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그 노정에서 부닥치게 되는 난관들에 대한 이유를 일부 제시한다. 패러다임 내지 패러다임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느 과학의 발전에 관계될 수도 있는 사실들이 모두 그저 비슷비슷하게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초기의 사실__수집(fact-gathering)이란 이후의 과학적 발전에서 친숙하게 되는 활동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의 무작위적인 활동이 되고 만다. 더욱이 보다 심오한 정보의 어떤 특정 형태를 추구해야 할 이유도 없으므로, 초기의 사실__수집은 보통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체이터 더미를 쌓는 데 그친다. 이렇게 얻어진 사실들의 집합은 의술, 달력 제작, 야금술 같은 기반잡힌 기예(crafts)로부터 얻을 수 있은 좁더 심오한 의미를 가진 데이터와 더불어 평범한 관찰과 실험으로 얻기 쉬운 사실들을 포함한다. 기예는 어쩌다가 우연히 발견될 수가 없는 사실들에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용이한 획득 원천이므로, 기술(technology)은 흔히 새로운 과학의 탄생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실__수집은 다수의 의미있는 과학의 기원에 필수적이긴 했지만, 예컨대 플리니(Pliny)의 백과 사전 식의 저술 또는 17세기 베이컨(Bacon)식의 자연사를 자세히 검토한 사람이라면, 사실__수집이 난국을 초래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베이컨이 말하는 열, 색깔, 바람, 채광 등의 '역사들(histories)'은 그 중 얼마는 심오한 정보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중에 실제로 판명될 사실들(예컨대 혼합에 의한 가열 작용)과 또한 너무 복잡해서 얼마 동안은 이론과 전혀 합치되지 않은 채로 남겨질 사실들 (예를 들면 거름더미가 따뜻해지는 현상)을 나란히 배열하게 된다.4) 게다가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전형적인 자연사는 이후의 과학자들이 상황적인 설명으로부터 생략하게 된다. 전기에 대한 초기 '역사들'의 어느 것도, 이를테면 비벼 준 유리막대에 끌렸던 왕겨가 다시 튕긴다는 얘기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런 작용은 전기적이 아니라 역학적으로 보였던 것이다.5) 더욱이 평범한 사실__수집가는 비판적이 될 만한 도구나 경험을 가진 적이 거의 없으므로, 자연사는 이와 같은 기술과 다른 사실들, 이를테면 이제 와서 확인할 도리가 없는 해열(또는 식힘)에 의한 가열 작용과 나란히 배열하기가 일쑤였다.6) 매우 드물게 고대의 정력학, 역학, 그리고 기하광학의 경우에서처럼 확립된 기존 이론에 의해 지시됨이 거의 없이 수집된 사실들은 충분히 명징적으로 첫 패러다임의 탄생을 허용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 발전사의 초기 단계의 특성적인 여러 학파를 창출해 낸 상황이다. 자연사는 그 어느 것도, 선택이나 평가 그리고 비판을 허용하는 이론적 및 방법론적 신념이 서로 얽힌 최소한의 함의된 본체가 없이는 해석해 낼 수가 없다. 그 믿음의 본체가 사실의 집합__'단순한 사실들(mere facts)' 이상의 것이 갖추어진 경우6)__에 이미 함축된 상태가 아니라면, 아마도 당시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의해서이거나 다른 학문에 의해서 또는 개인적 및 역사적 사건에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어느 과학이나 그 발달의 초창기에서는 현상의 같은 영역__그러나 대체로 동일한 특수 현상은 아닌__에 부닥치는 사람들이라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현상들을 기술하고 해석한다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정작 놀라운 것은 아마도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분야들에 있어서 나름대로 특성이라 하겠는데, 그러한 초기의 분기 현상이 점차로 사라져 간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차이는 상당한 정도까지 사라지고, 결국에는 명백하게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더욱이 그러한 선입견 때문에 지극히 방대하고 미완성인 정보 더미의 어느 특수 부분만을 강조했던, 패러다임__이전 학파들 가운데 하나의 승리에 의해 연유된다. 전기를 유체라 생각했고, 그럼으로써 전도 현상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그런 전기학자들은 이 관점에서 훌륭한 사례를 보여 준다. 서로 끌어당기는 작용과 반발하는 작용이라는 잘 알려진 사례를 보여 준다. 서로 끌어당기는 작용과 반발하는 작용이라는 잘 알려진 다원성에 대해 해결해 내기가 벅찼던 이런 믿음에 이끌려 오다가, 그들 가운데 몇몇은 전기의 흐름을 병 속에 담을 궁리까지 하게 되었다. 그들의 시도가 맺은 직접적인 결실이 바로 라이덴 병으로서, 자연을 멍청하게 바라본다든가 또는 되는대로 무작위적으로 탐사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결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나, 1740년대 초반 들어 적어도 두 사람의 연구자에 의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7) 프랭클린은 거의 전기에 관한 그의 연구의 출발 당초부터, 이상스럽고 마침내는 특히 계발적인 이 특수 장치에 대해 설명하는 데 각별히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의 성공은, 비록 이미 알려진 전기적 반발 현상의 경우들을 모두 다 설명할 수은 없었다 할지라도, 그의 이론을 패러다임으로 승격시키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논거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8)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되기 위해서 그 이론은 경쟁 상대들보다 더 좋아 보여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당면할 수 있는 모든 사실을 다 설명해야 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결코 그렇지 못하다.
전기의 유체 이론(fluid theory)이 그것을 신봉했던 소학파에게 베풀었던 것은 프랭클린의 패러다임이 훗날 전기학자들 전체에게 나타냈던 위력이었다. 이것은, 어떤 실험이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어떤 것이 전기의 이차적 작용 내지는 너무 복잡한 작용이기 때문에 해 볼만한 가치가 없는지 가려 주었다. 그 패러다임이 매우 유효 적절하게 그 구실을 나타냈던 것은, 더러는 학파간 논쟁의 종식이 기본 원리에 대한 끊임없는 중언 부언을 종식시킨 까닭도 있고, 또 더러는 길을 바로 잡았다는 자신감이 과학자들을 보다 정밀하고 심오하고 열띤 형태의 연구를 진행시키도록 사기를 진작시켰기 때문이다.9) 전기 현상의 어느 것 그리고 모든 것을 구명하지 않아도 됨으로써, 전기학자들의 단합된 그룹은 그 목적을 위한 특수 장치를 많이 고안해 내고 그것을 이전에 수행했던 어느 것보다도 더 확고하고 체계적으로 활용하면서 선정된 현상을 아주 자세히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__수집과 이론의 명료화는 둘 다 방향이 뚜렷한 활동으로 변모되었다. 그에 따라서 베이컨의 예리한 방법론적 금언의 사회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생생한 증거를 제공하면서 전기학 연구의 성과와 능률은 증가되었다:"진리는 혼동(cofusion)에서 보다는 과실(error)로부터 더 쉽게 나타난다."10)
우리는 다음 적에서 이렇듯이 방향이 뚜렷한 또는 패러다임에 근거한 연구의 성격에 관해 살피게 될 것인데, 글에 앞서 하나의 패러다임의 탄생이 그 분야를 전수하는 그룹의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간단하게 나마 살펴야 한다. 자연과학의 발달에서는 어느 개인이나 또는 그룹이 다음 세대의 대다수 전문가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한 종합을 처음으로 이룩하게 되는 때, 그보다 낡은 학파들은 점진적으로 사라져 간다. 그들의 퇴조는 더러 그들 학파의 학자들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향해 가는 것에도 연유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간에 보다 낡은 이론 중의 이런저런 것에 고착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이후 그들의 연구를 무시해 버리는 그 전문 분야로부터 소외될 따름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분야의 새롭고 보다 확고한 정의를 내포한다. 자기들의 연구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시키는 것을 원치 않거나 또는 적응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고립된 채로 계속해야 하든가 아니면 스스로를 어느 다른 그룹에 소속시켜야 한다.11) 역사적으로 그들은, 대체로 그것들로부터 수많은 전문 과학분야들이 분기되어 왔던 철학의 학과들에 안주해왔다. 이러한 지적들이 시사하듯이 이전에는 단지 자연의 연구에만 관심을 두었던 그룹을, 전문 연구(profession)또는 적어도 하나의 분야(discipline)로 변형시키는 것은 때로는 바로 그 그룹의 패러다임 수용의 소치이다. 과학에서 "과학에서 주된 존재 이유가 외부의 사회적 요구 때문인 학문, 예컨대 의학, 기술, 법학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전공 분야 학술지의 발간, 전문가들의 학회의 결성, 교과 과정에서의 특별한 위치에 대한 주장은 어느 그룹이 단일 패러다임을 최초로 수용하는 것과 흔히 연관되어 왔다. 적어도 이것은 일 세기 반 이전, 즉 과학 전문화의 제도적 형태가 최초로 전개된 시기로부터 전문화의 세분화된 분야들이 그들 고유의 명성을 획득한 시기 사이에서의 경우였다.
과학자 그룹에 대한 보다 철저한 정의는 그에 따르는 여러 결과들을 빚어낸다. 어느 과학자 개인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때, 그는 그의 주요 연구에 있어서 제일 원리들로부터 출발하고 도입된 각 개념의 용도를 정당화시키면서 그 분야를 새롭게 일으키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교과서의 저자에게 맡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교과서가 주어지면 창의적인 과학자는 그 책이 끝나는 곳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학파의 관심을 끄는 자연 현상에 대한 가장 미묘하고 해득키 어려운 측면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에 따라서 그의 연구 보고서들은, 그 진화에 대해서 거의 연구된 바 없으나 현대적 최종 결과는 모두에게 확실하며 다수에게 구속력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연구들은 통상적으로, 프랭클린의 "전기학... 실험(Experiments... On Elextricity)" 또는 다읜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처럼, 더 이상 그 분야의 주제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반 대중을 위한 저술형태로 내용이 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그의 연구는, 오직 전문 분야의 동료 죽 공유된 패러다임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며, 그들에게 공표된 논문을 읽을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 밝혀진 이들을 향한 간명한 논문으로서 공표될 것이다.
요즈음 과학 분야에서는 서적이라 하면 흔히 교과서 또는 과학적 생애의 이러저러한 면모를 되돌아보는 회상의 형식을 띤다. 이런 것을 저술한 과학자는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평판이 올라가기보다는 오히려 손상되는 것을 발견하기 쉽다. 다양한 과학의 발전에서의 초창기, 즉 패러다임__이전의 시기에서만 과학 서적은 여타의 창의적인 분야에서 아직도 유지되는 것과 같은 전문적 업적에 대한 연관성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논문이 실려 있지 있든 실려 있지 않든 간에 서적이 여전히 연구의 교류와 전달 수단이 되고 있는 분야에 한해서, 전문화의 윤곽이 심히 모호한 까닭에 보통 사람이 그 분야 전문가의 원전을 읽더라도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학과 천문학에서는 양쪽 다 그 연구 보고서가 이미 고대시대에 일반 교양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어렵게 되었다. 역학에서는 연구가 중세 후반에 이와 비슷하게 비전의 것으로 바뀌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중세의 연구를 주도하던 패러다임을 대체했던 17세기 초에 그것은 잠시 보통 사람이 알 수 있게 바뀐 적이 있었다. 18세기 말 이전, 전기학의 연구는 비전문인을 위해 번역할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물리과학의 다른 분야들은 거의 모두가 19세기에 들어 일반인들이 근접할 수 없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 두 세기 동안에는 생물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환을 찾을 수 있다. 사회과학의 부문들에서는 그런 전이가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전문 과학자를 다른 분야들의 동료 학자들로부터 갈라 놓는 간극이 점점 넓어짐을 개탄해 마지않는 것은 통상적이고 분명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그 간극과 과학적 진보에 고유한 메커니즘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에 해서는 거의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고 있다.
선사의 태고적부터 한 연구 분야에 뒤이은 또 다른 분야의 생성은 사학자들이 하나의 학문 내에서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라고 부를지도 모르는 경계를 넘어왔다. 학문 전통의 성숙을 향한 이들 전이는, 불가피하게 도식적인 나의 논의가 의미하듯이 그렇게 돌연히 일어난다거나 또는 그렇게 명백하게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런 전이가 점진적으로 같은 폭을 갖고, 말하자면 그것이 발생한 테두리 내에서 그 분야들의 총체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18세기 초 40년 동안 전기학에 관한 저자들은 16세기 그들의 선행자들이 지녔던 것에 비해 전기 현상에 대한 훨씬 풍부한 정보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740년 이후 반 세기 동안, 전기 현상의 항목 수에 덧붙여진 새로운 현상은 몇 종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관점에 있어서 18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 쓰여진 카벤디쉬, 쿨롱, 볼타의 전기학 저술은 그레이, 뒤 페이, 그리고 심지어는 프랭클린의 것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는 18세기 초의 이들 전기의 발견자들의 저술과 16세기의 것들 사이의 차이에 비해 훨씬 큰 것 같다.12) 1740년과 1780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선가 전기학자들은 사상 최초로 그들 분야의 기초 원리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그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난해한 문제들로 밀고 나갔으며, 그 다음 점차로 주로 일반지식 층을 대상으로 하는 저술보다는 다른 전기학자들에게 공표하는 논문형식으로 그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게 되었다. 하나의 학파로서 그들은 고대 천문학자들에 의해 얻어졌던 것을 성취했으며, 중세의 운동에 관한 연구자들에 의해서, 17세기 후반의 물리광학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19세기 초의 지질사에 관한 연구자들에 의해서 얻어진 것들을 달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전체 그룹의 연구를 지시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된 패러다임을 얻어낸 것이었다. 뒷궁리의 묘수를 제외하고는, 한 분야를 명백하게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또 다른 기준을 찾아내기는 힘든 일이다.
f "주"
1) Joseph Priestley,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London, 1772), pp.385__90
2) Vasco Ronchi, Histoire de la lumiere, trans, Jean Taton(Paris, 1956), chaps.i-iv.
3) Duane Roller H.D.Roller, The Development of Concept of Electric Charge:Electrictiy from the Greeks to Coulomb ("Ha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Case 8 ;Cambridge, Mass., 1954);그리고 I.B.Cohen, Franklin and Newton; 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of (Philadelphia, 1956), chaps.vii-xii.본문에 나오는 구절의 분석적인 상세한 내용은 나의 학생인 존 L.하일브론(Heilbron)의 아직 출판되지 않은 논문에 빚진 것이다. 그것이 인쇄되는 동안, 프랭클린의 패러다임의 출현에 대하여 광범위하고, 더 자세하게 설명한 내용이 다음 책들에 실려 있다; T.S. Kuhn, "The Function of Dogma in Scientific Research", A.C.Crombie ed, "Symposium on the History of Science, University of Oxford, July 9__5, 1961", Heineman Educational Books, Ltd.
4) Novum Organum, Vol.VIII of The Works of Francis Bacon, ed.J.Speddiing, R.L.Ellis, and D.D. Health (New York, 1869), pp.176__203에 실린 열의 자연사에 관한 개요와 비교하라.
5) Roller and Roller, op.cit., pp.14, 22, 28, 43. 이들 인용문의 맨 끝에 기록된 연구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반발 작용은 재론의 여지없이 전기적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6) Bacon, op.cit, pp.235, 337에는 "약간 따스한 물은 아주 차가운 물보다 더 쉽게 언다"고 쓰여 있다. 이런 야릇한 관찰에 관한 초창기 역사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찾아보려면, Marshall Clagett, Giovanni Marliani and Late Medieval Physics(New York, 1941), iv절 참조
7) Roller and Roller, op, cit, pp.51__54. 8) 말썽 많은 케이스가 바로 음전하를 띤 물체들이 서로 반발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Cohen, op.cit., pp.491__94, 531__43 참조.
9) 프랭클린의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논쟁에 종지부에 찍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759년, 시머(Robert Symmer)는 프랭클린 이론을 수정한 두 가지 유체 이론을 제안했으며, 이후 여러 해 동안 전기학자들은 전기가 하나의 유체냐, 두 가지 유체냐를 놓고 분열되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논란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성취가 어떻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합하는가의 방법과 관련하여 위에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전기 학자들은 이 견해에 관해 줄곧 대립되어 있기는 했지만, 어떤 실험 검증으로도 그 두 가지 이론을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따라서 두 이론은 동격이라고 판정하였다. 그 뒤로 두 학파는 프랭클린 이론이 제공한 이점을 모두 구명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10) F.Bacon, op.cit., p.210. 11) 전기학의 역사는 프리스틀리, 켈빈 등의 생애에서와 똑같은 기막힌 실례가 된다. 프랭클린의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 중엽 대륙의 전기학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학자인 놀레(Nollet)는 "미스터B__그의 생도였고 직속 제자인__를 제외하고는, 그의 학파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게 되었다. [Max Farrand(ed.), Benjamin Franklin`s Memoirs(Berkeley, Calif., 1949), pp.384__86]"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체 학파들이 전문적인 과학으로부터 차츰 고립되어 가는 것을 잘 견디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한때는 천문학의 한 부분이었던 점성학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아니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서, 이전에 존중되었던 전통인 '(신비로운)'화학이 끈질기게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런 전통에 관한 논의는 Charles C.Gillispie 의 "The Encyclopedie and the Jacobian Philosophy of Science ;A Study in Ideas and onsequences", Critical Problems in the History of Science, ed.Marshall Clagett(Madison, Wis., 1959), pp.255__89;"The Formation of Lamarck`s Evolutionary Theory" Archiv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s sciences, XXXVII(1956), 323__28에 실려 있다.
12) 프랭클린 이후 시대의 진전에는 다음 상항들이 포함되는데, 구체적으로 검전기의 민감도가 엄청나게 향샹되고, 전하를 측정하는 기술도 처음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널리 보급되고, 전기 용량이라는 개념이 탄생되고, 전압의 새로 밝혀진 개념과 용량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고, 정전기력이 정량화되었다. 이 모든 내용은 다음 문헌에 실려 있다. Roller and Roller, op.cit., pp.66__81;W.C. Walker, "The Detection and Estimation of Electric Charges in the Eighteenth Century", Annals of Science, I (1936), 66__100;Edmund Hoppe, Ceschichte dre Elektrizitat (Leipzig, 1884), Part I, chap.iii-iv .
III. 정상과학의 성격 The Nature of Normal Science
그렇다면 한 그룹의 단일한 패러다임의 수용이 허용하는 보다 전문화되고 심오한 연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만일 그 패러다임이 일단 완전히 수행된 연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통합된 그룹에게 어떤 문제들을 해결 과제로 남겨 놓는가? 이제 지금까지 사용해 온 용어들이 오류를 범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관점에 주목한다면, 이런 질문들은 더욱 시급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의 확립된 용법으로 보면, 하나의 패러다임은 인정된 모형 또는 유형이 되며, 그 의미의 그런 측면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낱말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패러다임'이라고 전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전용을 허용하는 '모형'과 '유형(pattern)'의 의미는 패러다임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통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곧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문법에서는 예컨대 'amo, amas, amat'는 하나의 패러다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숱한 라틴어 동사의 변형에서, 이를테면 'laudo, laudas, laudat'를 얻는데 쓰이는 유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준 적용에서 패러다임은 그 중 어느 하나가 원칙적으로 그 패러다임을 대치 할 수 있는 그런 예제들을 모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 기능을 나타낸다. 한편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이 모사의 대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관습법에 의해 판가름이 난 판결처럼 그것은 새로운 또는 보다 엄격한 조건 아래서 더욱 명료화되고 특성화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살피려면, 먼저 그 패러다임의 첫 출현 시기에 그것의 전망과 정확도의 양쪽 측면에서 얼마나 크게 제한될 수 있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패러다임은 전문가들 그룹이 시급하다고 느끼게 된 몇 가지의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그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보다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일한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든가 또는 많은 문제에 대해 상당히 성공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패러다임의 성공__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행성의 위치에 대한 프톨레미오스의 계산, 라부아지에의 천평 이용, 또는 전자기장에 대한 맥스웰의 수학화__은 당초에는 주로 아직 불완전한 예제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성공의 약속일 따름이다. 정상과학은 그런 약속의 실제화(actualization)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패러다임이 특히 시사적이라고 제시하는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키면서 그리고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시킴으로써 달성된다.
실제로 성숙된 과학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패러다임이 이런 유형의 정리 작업을 얼마나 많이 처리하는가를 거의 모르는 형편이며, 그 수행에서 그런 활동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마무리 작업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들 생애를 통해 종사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것들이 바로 여기서 내가 정상과학이라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역사적으로든 또는 현대의 연구 실험실에서든 간에, 자세히 잘 검토해 보면 이런 활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지고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 넣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정상과학의 목적의 어느 부분도 현상의 새로운 종류에 대해서 환기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상자에 들어맞지 않을 현상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에 의해 창안된 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1) 오히려 정상과학적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그러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결함일는지도 모른다. 정상과학에 의해 탐구되는 영역들은 물론 소단위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활동은 지극히 한정된 범위에 국한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러한 제한들은 과학의 발전에서 불가결의 것으로 드러난다. 상당히 심오한 문제의 작은 영역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자연의 어느 부분을 상세히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정상과학은 내장된 메커니즘을 지니는데, 그것은 제한을 유도해 낸 패러다임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언제든지 그 연구를 제한하는 한계성의 완화를 확실하게 한다. 이 시점에 이르면, 과학자들은 저마다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하며 그들 연구 문제의 성격도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이 잘 들어맞는 엄마 동안, 그 전문 분야는 그 패러다임이 잘 들어맞는 성원들이 상상조차 못 하고 도저히 손댈 수 없었던 문제들을 잘 풀어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성취의 일부는 언제나 영속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정상적 또는 패러다임__기초의 연구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를 좀더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 이제 원칙적으로 정상과학을 구성하는 문제들을 분류하고 설명해 보려고 한다. 편의상 나는 이론적 활동은 뒤로 미루고 우선 사실__수집(fact-gathering), 즉 과학자들이 그것들을 통해 그들의 동료들에게 지속적인 연구 결과를 알리는 전문 학술지의 설명된 실험과 관찰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과학자들은 보통 자연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 연구 보고 하는가? 무엇이 그들의 선택을 결정짓는가? 그리고 대개의 과학적 관찰은 많은 시간, 시설, 그리고 경비를 소요하게 되는데,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 선택을 결론에 이르기까지 추구하게 하는 동기 부여는 무엇인가?
나는 사실적 과학 탐구에 있어서는 오직 세 가지 정상적인 핵심이 있을 뿐이며, 이것들은 항상 또는 영속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패러다임이 사물의 본질에 대해 특히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준 것으로 밝혀진 사실들의 부류가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사실들을 적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그 사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양쪽 다 결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어느 시대에서나 이들의 의미 있는 사실적 측정은 다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천문학에서의 별들의 위치와 광도, 연성의 포개지는 주기와 행서의 주기, 물리학에서의 물질의 비중과 압축률, 파장과 스펙트럼의 강성도, 전기 전도도와 접촉 전위, 그리고 화학에서의 조성과 결합 무게, 용액의 끓는 점과 산도, 구조식과 광학 활성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더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실험 및 관찰의 과학을 다루는 문헌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잡한 특수 장치들이 그런 목적을 위해 잇달아 고안되어 왔고, 그러한 장치의 고안, 구성, 활용은 최고 수준의 재능과 많은 시간 그리고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싱크로트론(synchrotron)과 전파 망원경은, 어느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사실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산시키는 경우, 연구자들이 얻어내게 될 길다란 기기 목록 중 가장 최신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헤(Tycho Brahe)로부터 로렌스(E. O. Lawrence)에 이르기까지, 이들 과학자들은 무슨 신기한 새로운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종류의 사실을 재정립하는 데 필요한 매우 정밀하고, 신뢰도가 크며, 적용 범위가 넓은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사실 측정에서의 두 번째 부류는 통상적이지만 첫 번째 것보다 작은 규모로서, 흔히 자체로서의 흥미는 대단치 않지만 패러다임 이론으로부터의 예측들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그러한 사실들을 향한 것이다. 곧 설명하게 되겠지만 정상과학의 실험적인 문제로부터 이론적인 것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면, 특히 그것이 뚜렷하게 수학적 형태로 주어지는 경우에는 과학 이론이 직접 자연과 비교될 수 있는 분야들은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에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은 세 가지밖에 안 된다.2) 더욱이 적용이 가능한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흔히 기대되는 일치성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이론적 및 방법론적 근사를 필요로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일치를 증진시키거나 또는 어찌하든 간에 그런 일치가 증명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필요로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일치를 증진시키거나 또는 어찌하든 간에 그런 일치가 증명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는 일은 실험학자와 관찰자의 기술과 상상력에 끊임없는 도전을 제기한다. 1년의 시차(parallax)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예측을 증명하게 위한 특수 망원경, "프린키피아(Principia)" 이후 거의 1세기가 지나 최초로 고안되어, 뉴턴의 제2법칙을 최초로 재론의 여지 없게 증명해낸 애트우드(Atwood) 기계, 빛의 속도가 물 속에서보다 공기 중에서 더 빠르다는 것을 증명한 푸코(Foucault)의 장치, 또는 중성미자(neutrino)의 존재를 실증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섬광 계수기(scintillation counter), 이들 특수 장치와 그 비슷한 많은 장치는 자연과 이론을 점점 더 가깝게 일치되도록 만드는 데 필요했던 엄청난 노력과 발명의 재간을 보여 준다.3) 일치를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는 정규적인 실험 연구의 제2의 형태이며, 첫번 것보다 패러다임에 보다 분명하게 의존한다. 퍼러다임의 존재는 풀어야 할 문제를 설정해 준다. 흔히 패러다임 이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의 고안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는 수가 많다. 예컨대 "프린키피아"가 없었더라면 애트우드 기계를 이용한 측정은 전혀 아무런 의미를 띠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실험과 관찰의 제3의 부류는 정상과학의 사실__수집 활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패러다임 이론을 명료화하기 위해 수행된 경험적인 연구로 이루어지는데, 이 때 패러다임 이론의 나머지 모호성의 일부를 해결하고 이전에는 단지 관심을 끄는 것에 그쳤던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허용하게 된다. 제3의 부류는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을 설명하려면 다시 세분화가 필요하다. 보다 수학적인 과학에서는 명료화를 겨냥한 실험의 일부는 물리적 상수를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뉴턴의 연구는 예컨대 단위 거리만큼 떨어진 두 개의 단위 질량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우주의 모든 위치에서 모든 종류의 물질에 대해 똑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고유한 문제들은 이런 인력의 크기인 만유인력 상수(universal gravitational constant)를 결정하지도 않고 풀릴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린키피아"의 출현 이후 1세기 동안 아무도 그 상수를 결정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내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카벤디쉬(Cavendish)의 유명한 측정도 결정적인 해결은 못 되었다. 물리 이론에서의 그 핵심적 지위로 인해, 그 이후로도 줄곧 중력 상수의 값을 개량시키는 일은 다수의 탁월한 실험학자들이 끈질기게 공략했던 목표로 남게 되었다.4) 이와 같은 유형의 지속적인 연구의 사례들은 이밖에도 천문학적 단위, 아보가드로의 수(Avogadro`s number), 줄의 계수(Joule`s coefficient), 전자의 하전(electronic charge) 등등의 측정을 포함할 것이다. 이러한 정교한 시도들의 몇몇은 문제를 정의하고 불변적인 해답의 존재를 보증하는 패러다임 이론이 없었더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며 아무것도 수행되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그러나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려는 시도들은 보편 상수의 결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정량적인 법칙을 얻는 데에도 그러한 노력은 필요하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나타내는 보일의 법칙, 전기적 인력에 대한 쿨롱의 법칙, 생성된 열량을 전기 저항과 전류에 관계짓는 줄의 관계식 등이 모두 이 범주에 든다. 이들과 같은 법칙들의 발견에 패러다임이 선수 조건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분명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흔히 그러한 법칙들은,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실험 그 자체를 위해 진행된 측정들을 검토함으로써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듯이 지나친 베이컨 식의 방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보일의 실험들은 공기를 유체 정력학의 모든 정교한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탄성의 유체(elastic fluid)로 인식하게 되기 전까지는 구상되지 못했다(그전에 만일 보일의 실험을 상상해 냈다고 했더라도, 그 해석은 엉뚱했거나 아니면 전혀 설명되지 못했을 것이다)5) 쿨롱이 성공을 거둔 것은 점전하(point charges)사이의 힘을 측정하는 특별한 장치를 스스로 꾸며냈기 때문이었다(이전에 보통의 접시 저울 등을 이용해서 전기적 힘을 측정했던 장치 고안은 결국 전기 유체의 각 입자는 떨어져 있는 것들끼리 서로 조사하고 있었던 힘인 그러한 입자 사이의 인력__거리의 단순한 함수라고 가정해도 무방했던 유일한 힘__때문이었다.6) 줄의 실험은 패러다임 명료화를 통해 정량적인 법칙들이 어떻게 출현하는가에 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정성적 패러다임과 정량적 법칙 사이의 관계는 매우 일반적이며 긴밀하기 때문에, 갈릴레오 이래로 실험적 측정에 필요한 장치가 고안되기 이전의 패러다임 연대(paradigm years)의 도움으로 그러한 법칙들은 추측될 수 있는 경우가 흔했다.7)
마지막으로 어느 패러다임을 명료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3의 유형의 실험이 존재한다. 다른 것들에 비해 이런 실험은 탐구 작업에 가까우며, 자연의 규칙성에서의 정량적 측면보다는 정성적 관점을 더 많이 다루는 그런 시대와 그런 과학들에서 특히 우세하게 된다. 흔히 현상의 어느 한 무리에 대해 전개된 어느 패러다임은 그 밖의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적용에서는 모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관심영역에 그 패러다임을 응용하는 대안적 방법 가운데서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실험할 필요가 생긴다. 예를 들어, 칼로릭 이론(caloric theory)의 패러다임 응용들은 혼합물에 의한 그리고 상태의 변화에 의한 가열작용과 냉각작용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열은 갖가지 다른 방식으로도 방출되거나 흡수 될 수 있었다__예컨대 화학적 결합에 의해서, 마찰에 의해서, 기체의 압축 또는 흡수에 의해서__그리고 이들 여타 현상들이 각각에 대해서 칼로릭 이론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압력이 변화하는 데 따라 기체의 비열(specific heat )이 변화하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명이 이루어졌다. 이렇듯이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8) 일단 압축에 의한 발열 현상이 확립된 다음에는 이후의 그 분야의 실험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패러다임 의존형이 되었다. 현상이 주어진 이상, 그것을 밝혀 내는 실험이 어떻게 달리 선택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실험 및 관찰에 관한 문제들과 거의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정상 과학의 이론적 문제들로 방향을 돌리기로 하자. 정규적인 이론 연구의 일부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긴 하지만 단순히 기존 이론을 이용해서 고유의 가치를 지닌 사실적 정보를 예측하는 일이 된다. 천체 위치 추산력(astronomical ephemerides)의 제작, 렌즈 지표의 계산, 그리고 전파의 전파 곡선의 작성 등이 이런 종류의 문제들에 속한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공학자(engineers)나 기사(technicians)의 소관인 별로 창의성이 없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런 것들은 주요 과학 문헌에 많이 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학술지는 과학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거의 똑같아 보일 수밖에 없는 문제들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굉장히 많이 싣는다. 이들 논문들은 채택된 이론을 교묘하게 다루는 직업인데, 그 속에서 나타나는 예측이 본질적으로 가치가 커서라기보다 실험을 함으로써 직접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찰의 목적은 패러다임의 새로운 응용을 제시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이미 이루어졌던 응용의 정확성을 제시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이미 이루어졌던 응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유형의 연구의 필요성은 하나의 이론과 자연 사이의 접촉점을 전개시키는 데 있어 흔히 당면하게 되는 엄청난 난관들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난관은 뉴턴 이후의 역학(dynamics)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프린키피아"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찾아낸 과학자들은 그 결론의 일반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과학사에서 알려진 업적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과학연구의 범위와 정확성을 둘 다 동시에 그만큼 대단하게 증진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늘에 대해서 말하자면 뉴턴은 행성의 운행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유도했으며, 달이 케플러의 법칙들을 만족시키지 않았던 관찰들의 일부에 대해서 설명해 내었다. 지구에 대해서는 뉴턴은 진자(pendulum)와 조수의 간만에 대해 몇몇 단편적인 관찰 결과들을 수학적으로 유도해 내었다. 추가적인 그러나 무작위적인 가정을 도입함으로써, 그는 보일의 법칙과 공기 중에서의 소리의 속도에 대한 중요한 관계식도 유도해 낼 수 있었다. 그 당시 과학의 상황으로서는 그런 증명들의 성공은 지극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뉴턴 법칙들의 일반성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적용 사례는 많지가 않았으며, 뉴턴은 다른 적용들을 거의 전개시키지 않았다. 더욱이 물리학 전공 대학원생이 오늘날 그와 똑같은 법칙들을 갖고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비교하면, 뉴턴의 몇 가지 안 되는 적용 예는 심지어 정확성 있게 전개되지도 못했다. 결국 "프린키피아"는 주로 천체역학에 관한 문제들에 응용되도록 고안되었다. 지상의 문제들, 특히 속박된 운동(motion under constraint)에 어떻게 그것을 적용해야 할 것인가는 전혀 확실치가 않았다. 지상 문제에 대한 접근은 어느 경우에서나, 원래 갈릴레오(Galileo)와 호이겐스(Huyghens)가 전개시켰고 18세기 동안에는 대륙에서 베르누이(Bernoullis), 달랑베르(d`Alembert),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장되었던 매우 다른 기술에 의해서 이미 크게 성공적으로 공격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기술과 "프린키피아"의 기술은 보다 일반적인 정식화의 특수 경우로 밝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나, 얼마 동안은 아무도 그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9)
이제 잠시 정확성의 문제에 주의를 국한시켜 보자. 우리는 이미 그 경험적 측면에 대해서는 다룬 바 있다. 뉴턴 패러다임의 구체적 응용이 요구했던 특수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특이한 장치__카벤디쉬 장치, 애트우드 기계, 또는 개량된 망원경과 같은 기기__가 필요했다. 이론 쪽에서도 일치를 얻는 데에는 그와 비슷한 여러 가지 난관이 따랐다. 뉴턴은 그의 법칙들을 진자에 적용시킴에 있어서, 예컨대 진자의 길이에 특정한 값을 매기기 위해서 추를 질량점(역주:질량만 갖고 크기를 갖지 않는)으로 취급해야 했다. 그의 정리(theorems)의 대부분은 가설적이고 예비적인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또한 공기 저항의 영향을 무시하였다. 이런 것들은 건실한 물리적 근사(approximations)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로서 그것들은 뉴턴의 예측과 실제 실험 사이에서 기대되는 일치성을 제한하였다. 뉴턴의 이론을 하늘에 적용하는 데서는 발로 이 난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간단한 계량적 망원경 관찰에 따르면 행성들은 케플러의 법칙을 꼭 만족시키지는 않는데, 뉴턴의 이론은 행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런 법칙들을 유도하기 위해서 뉴턴은 각각의 행성과 태양 사이를 제외하고는 인력에 의한 작용을 모두 무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행성들은 상호간에도 끌어당기고 있으므로, 적용된 이론과 망원경의 관찰 결과 사이에는 고작해야 근사적인 일치만이 예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10)
이러한 일치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었던 사람들에게는 물론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지사의 문제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론도 그렇듯이 잘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치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었던 사람들에게는 물론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지상의 문제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론도 그렇듯이 잘 풀어낼 수가 없었다. 뉴턴 연구의 타당성을 의심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험과 관찰 사이의 일치가 한계를 지닌다는 이유 때문에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성에서의 이러한 한계는 뉴턴의 후계자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적 문제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이를테면 동시에 끌어당기는 둘 이상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기 위해서 그리고 교란된 궤도에서의 안정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기교들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걸쳐, 이와 같은 문제들은 유럽의 가장 우수한 수학자들을 사로잡았다. 오일러(Euler), 라그랑주(Lagrange), 라플라스(Laplace), 가우스(Gauss)는 모두들 뉴턴의 패러다임과 하늘 세계의 관찰 결과 사이의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문제들에 대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이들 인물들의 대부분은 동시에 뉴턴이나 또는 역학의 당대 어느 대륙학파도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응용에 요구되는 수학을 전개시키는 일도 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유체역학(hydrodynamics)과 진동하는 현의 문제에 대해 방대한 문헌과 몇 가지의 막강한 수학적 기법을 탄생시켰다. 응용의 이들 문제들은18세기 가장 빛나고도 심혈을 기울인 과학적 연구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패러다임__이후(post-paradigm)시대를 검토해 보면 다른 실례들이 발견되는데, 그런 것으로는 열역학(thermodynamics), 또는 그 기본 법칙들이 완전히 정량적인 과학의 여타 분야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적어도 보다 수리적인 과학에서는 이론적 연구는 거의 모두 이런 유형의 작업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유형인 것은 아니다. 수리적 과학(mathematical sciences)일지라도 패러다임 명료화(articulation)이 이론상 문제는 따르게 마련이다. 과학의 발전이 주로 질적인 성격을 띤 시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두드러지게 많다. 보다 정량적이고 보다 정성적인 과학 양쪽에서 문제들의 일부는 단순히 재공식화(reformulation)에 의한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목표로 삼게 된다. 이를테면 "프린키피아"는 모든 경우에 응용하기가 용이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로는 최초의 모험에서의 불가피한 미숙함도 있었고, 또 그 의미의 많은 부분이 응용에 있어서 단지 묵시적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서나 다수의 지상 세계 응용에서, 겉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유럽 대륙의 기법이 대단히 더 막강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오일러와 라그랑주로부터 19세기의 해밀턴(Hamilton), 야코비(Jacobi), 헤르츠(Hertz)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가장 탁월한 수리 물리학자들은 역학 이론을 동등하면서도 논리적이고 심미적으로 보다 만족스러운 형태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프린키피아"의 그리고 유럽 대륙 역학에서의 명시적이고 묵시적 교훈을 논리적으로 보다 정연한 형태로 나타내기를 원했는데, 그런 수정안은 새롭게 파헤쳐진 역학 문제에의 그 적용에서 즉각적으로 보다 통일적이며 보다 좋은 일치를 나타낼 것이었다.11)
하나의 패러다임을 재공식화하는 이와 동류의 작업은 과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으나, 그런 것들의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프린키피아"의 재공식화보다 훨씬 더 뚜렷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불러왔다. 그러한 변화들은 앞에서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겨냥하는 것으로서 설명된 경험적 연구의 결과로부터 나타난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연구를 경험적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임의적인 것이었다. 정상과학에서의 다른 어느 유형보다도 패러다임 정련의 문제는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험적이다. 앞에서 주어진 실례들은 여기서도 똑같은 구실을 할 것이다. 쿨롱은 스스로 그의 장치를 꾸며서 그것으로 측정을 할 수 있기에 앞서, 그의 장치가 어떻게 꾸며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전기 이론을 원용해야 했다. 그의 측정에서 귀결된 결론은 그 이론에서의 정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는 다시, 압축에 의한 발열 현상에 관한 갖가지 이론들을 구별지을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비교되고 있는 여려가지 해석들을 내어 놓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실과 이론 두 가지를 모두 다루고 있었고, 그들의 연구 결과는 단순히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보다 정확한 패러다임을 산출했으며 그것은 그들이 연구를 시작했던 원래의 형태가 지닌 모호함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지게 되었다. 다수의 과학에서 정규의 연구 활동은 대부분 이런 성격을 띠게 된다.
나의 견해로는 문제들에 관한 이들 세 가지 유형__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에의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__은 실험적 및 이론적 과학의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거의 전부 차지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과학의 문헌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반적이 아닌 비상적(extraordinary)문제들도 들어 있으며, 과학적 활동을 전반적으로 그다지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비상적 문제의 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상한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상과학의 진보에 의해 마련된 특별한 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에 의해 다루어지는 문제라 할지라도, 그 압도적 다수는 보통 위에서 요약한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하의 연구는 여타의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가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을 다루는 일을 중단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곧 이어 그러한 패러다임의 폐기가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과학혁명을 주도하는 추축이 된다. 그러나 그런 혁명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는 정상과학적 연구 활동의 총체적인 조망에 관해 개관할 필요가 있다.
"주"
1) Bernard Barber, "Resistance by Scientists to Scientific Discovery", Science, CXXXIV(1961), 596__602. 2) 아직도 널리 인식되어 있는 오래 끌어 온 유일한 검증점은 수성의 근일점이 세차이다. 멀리 떨어진 별들로부터의 빛의 스펙트럼에서의 붉은 빛 이동은 일반 상대성 이론보다 더 기본적인 고찰로부터 유도될 수 있으며, 태양 주위에서의 빛의 휘어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의가 가능할 것 같지만, 이것은 현재로서는 다소 논쟁이 되고 있다. 아무튼 후자의 현상에 대한 측정은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다. 또 한가지 조사할 점은 아주 최근에 확실해진 것 같다:뫼스바워(Mossbaur)복사의 중력에 의한 이동이 그것이다. 지금은 이처럼 활발한 분야이지만 오랫동안 휴지 상태에 있던 다른 분야들이 속속 더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요약된 최신 해설에 대해서는, L.I.Schiff, "A Report on the NASA Conference on Experimental Tests of Theories of Relativity", Physics Today, XIV(1961), 42__48에 실려 있다.
3) 시차 망원경 두 가지에 대해서는, Abraham Wolf, A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Philosophy in the Eighteenth Century (2d ed.;런던, 1952), pp.103__5참조. 애트우드 기계에 대해서는, N.R.Hanson, Patterns of Discovery (Cambridge, 1958), pp.100__102, 207__8참조. 나머지 두 개의 특수 장치에 대해서는 M.L.Foucault, "Methode generale pour mesure la vitesse de la lumiere dans l`air et les milieux transparants. Vitesses relatives de la lumiere dans l`air et dnas l`eau...", Comptes rendus...de l`Academie des sciences, XXX(1850), 551__60;C.L. Cowan, Jr., et al ., "Detection of the Free Neutrino:A Confirmation", Science, CXXIV(1956), 103__4참조.
4) J.H.P [oynting]는 1741년부터 1901년 사이에 이루어진 인력 상수의 측정 24가지에 대해 Encylopaedia Britannica(11th ed.;Cambridge, 1910__11), XII, 385__89에 실린 "Gravitation Constant and Mean Density of the Earth"에서 개관하고 있다.
5) 유체 정력학의 개념을 기체화학에 완전히 이식시킨 데 대해서는, "The Physical Treatises of Pascal"(trans.I.H.B Spiers and A.G.H.(Torricelli)의 병행 이론("우리는 공기 성분으로 이루어진 대공간의 밑바닥에 잠겨서 살고 있다 )에 관한 원래의 서론은 p.164에 나와 있다. 두 가지 주요 연구에 의해서 이런 견해는 급진전을 이루게 된다.
6) Duane Roller and Duane H.D.Roller, The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Electric Charge: Electricity from the Greeks to Coulomb("Ha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Case 8;Cambridge, Mass., 1954), pp.66__80. 7) 예를 들어 T.S.Kuhn, "The Function of Measurement in Modern Phuysical Science", Isis,LII(1961), 161-93 참조.
8) T.S. Kuhn, "The Caloric Theory of Adiabatic Compression", Isis, XLIX(1958),132__40. 9) C.Truesdell, "A Program toward Rediscovering the Rational Mechanics of the Age of Reason", Archive for History of the Exact Sciences, I(1960), 3__36, "Reactions of Late Baroque Mechanics to Success, Conjecture, Error, and Failure in Newton`s Principia", Texas Quarterly, X(1967), 281__97. T.L.Hankins, "The Reception of Newton`s Second Law of Mo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Archiv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s Sciences, XX(196), 42__65.
10) Wolf, op.cit., pp.75__81, 96__101;William 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rev .ed.;London, 1847), II, 213__71.
11) Rene Dugas, Histoire de al mecanique (Neuchatel, 1950), Books IV-V.
IV. 수수께끼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Normal Science as Puzzle-solving
우리가 방금 살펴본 정규적인 연구 문제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그들 연구가 개념적이거나 현상적인 주요한 새로움을 얻어내는 것은 거의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일례로 파장의 측정에서 보면 그 결과의 가장 심오한 세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미리 알려진 것이며, 예상의 전형적인 폭이 약간 더 넓어질 따름이다. 쿨롱의 측정은 아마도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 law)에 맞추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압축에 의한 가열 현상에 관해 연구하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과 중의 어느 하나를 얻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우에서조차도 예상되고 따라서 동화 가능한 결과들의 범위는 상상이 허용하는 범위에 비하면 언제나 소폭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런 좁은 범위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프로젝트는, 대개 연구의 실패가 되는데 그런 실패는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과학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세기에는 예컨대 접시 저울 같은 장치로 전기적 인력을 측정했던 실험에 대해서는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실험들은 일관성 있는 결과를 내거나 간단한 결과조차도 얻지 못했으므로, 그것들이 유도되어 나온 패러다임을 명료화시키는데 이용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학 연구의 지속적인 발전과는 무관하고 또 관계를 지을 수도 없는 그저 단순한 사실로 머물렀을 따름이었다. 다만 이후의 패러다임이 포함된 회고속에서만 우리는, 그 실험이 전기 현상의 어떤 특성들을 드러내 보이는 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쿨롱과 그와 동시대의 연구자들 역시 이런 후기의 패러다임 또는 인력의 문제에 적용될 때 똑같은 예측을 낳았던 패러다임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쿨롱이 어떻게 패러다임 명료화에 의해 동화될 수 있는 결과를 주는 장치를 고안할 수 있었는가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어째서 그 결과에 아무도 놀리지 않았는가의 이유이며 또한 쿨롱의 동시대의 몇몇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가의 이유도 된다. 그 목적이 패러다임을 명료화시키려는 프로젝트일지라도 예기치 못한(unexpected)새로움을 겨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정상과학의 목표가 실질적인 주요 혁신이 아니라면__예측된 결과의 근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통 과학자로서의 실패라고 한다면__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이미 앞에서 제시되었다. 과학자에게는 적어도 정규적인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는 의미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대답은 과학자들이 정상적 연구의 문제들에 대해 드러내는 열성과 헌신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단지 거기서 얻어지게 될 정보의 중요성 때문에, 이를테면 개량된 분광계를 만드는 일에 또는 진동하는 현의 문제에 보다 나은 해답을 얻기 위하여 몇 해를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람은 없다. 천체력을 계산하는 것에 위해서거나 또는 기존의 기기로 측정하는 것에 의해 얻어지게 되는 데이터도 흔히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런 활동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예전에도 줄곧 수행되었던 과정의 반복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부 반응은 정규적 연구 문제의 매혹에 이르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 결과가 예측될 수 있는, 그것도 흔히 아주 상세하게 예측되는 까닭에 미지의 것으로 남겨지는 자체가 별 흥미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결과를 성취하는 방법은 의문 속에 남게 된다. 정규의 연구 문제를 결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예측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은 갖가지 복합적인 기기적, 개념적, 그리고 수학적 수수께끼의 풀이를 요구한다. 이것을 해내는 사람은 수수께끼 풀이의 선수로 밝혀지며, 수수께끼의 도전은 과학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게 하는 무엇인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수께끼(puzzle)' 그리고 '수수께끼 푸는 사람(puzzle-solver)'이란 용어들은 앞의 단락에서 점진적으로 뚜렷해졌던 주제들의 몇 가지를 강조시킨다. 수수께끼는 여기에서 적용된 완전한 표준적 의미로서, 풀이에서의 탁월성이나 풀이 기술을 시험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의 특이한 범주를 말한다. 사전적 설명으로는 '조각그림 맞추기(jigsaw puzzle)'와 '글자 맞추기 수수께끼(crossword puzzle)'이고, 이것들은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정상과학의 문제들과 공통된다는 것이 특성이다. 그 중 한가지는 방금 언급된 것이다. 수수께끼에서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대조적으로 참으로 급박한 문제들, 이를테면 암 치료라든가 평화를 영속시키는 계획 같은 것은 전혀 수수께끼가 아닌 경우가 많다. 대체로 그 이유는 그런 문제들은 그 어떤 해답도 갖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조각그림 맞추기 상자 속에서 멋대로 조각들을 꺼내어 그림을 맞춘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문제는 아무리 솜씨 좋은 사람일지라도 별도리가 없는 까닭에(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르긴 하지), 그것은 풀이에서의 재주 테스트는 될 수가 없다. 통상적인 의미로 보면 그것은 전혀 수수께끼가 아니다. 본질적 가치는 결코 수수께끼에 대한 기준이 되지 못하지만, 확실히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한계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과학자 사회가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획득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패러다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안 풀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패러다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안 풀이를 가진 것으로 가정될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 이들 문제들은 그 과학자 사회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참여하라고 권장하게 될 유일한 문제들이 된다. 이전에는 표준으로 되어 있었던 다수를 비롯하여 다른 문제들이 탁상공론이라거나 다른 분야에서의 관심사라거나 또는 시간 낭비일 정도로 너무 말썽이 많다 하여 거부당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의 패러다임은 그 과학자 사회를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수께끼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 격리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그런 문제들은 그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개념적, 기기적 수단을 써서 진술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은 17세기 베이컨주의(Baconianism)의 몇 가지 성격에 의해서, 그리고 현대의 사회과학 분야들의 몇몇에 의해서 분명하게 예시된 교훈으로서 혼란스러움이 될 수 있다. 정상과학이 이렇게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문가들이 그들 자신의 독창성의 결핍만이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그런 문제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정상과학의 문제들이 이런 의미에서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어째서 과학들이 정열과 헌신으로 그런 문제들을 공격하는가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인간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데에는 갖가지의 이유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유용성에의 욕구, 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는 경이감, 질서를 찾아내려는 희망, 이미 정립된 지식을 시험하려는 충동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동기와 다른 동기들 역시 이후에 그 사람이 다루어야 할 특수 문제들을 결정짓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 결과는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동기들이 일차적으로는 과학자의 관심을 유발하고, 그 다음에는 그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1) 전반적으로 과학 활동은 유용하다고 판정되는 일이 잦으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질서를 표출하며,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믿음을 시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 연구 문제에 종사하는 개인으로서는 이들 유형의 활동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 일단 과학에 몸담게 되면 과학자의 동인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 다음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가 만일 충분히 재능이 있다면 이전에 아무도 풀지 못했거나 제대로 잘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가장 위대한 과학적 정신의 대가들은 대개 이런 종류의 미결된 수수께끼들에 전문가로서 헌신해 왔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세분화된 어느 특수 분야이건 간에 그 밖의 다른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는 정통의 숙련된 연구자에게는 그것을 상당히 매혹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논의를 바꾸어, 수수께끼들과 정상과학의 문제들 사이의 유사 관계에서 좀더 까다롭고 보다 계시적인 측면으로 돌려보자. 만일 수수께끼로서 분류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문제는 그 해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 이상의 특성을 지녀야 한다. 거기에는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해답의 본질과 그것들이 얻어지게 되는 단계를 모두 한정짓는 규칙도 존재해야 한다. 이를테면 조각그림 맞추기를 완성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to make a picture)'일이 아니다. 어린이거나 또는 당대의 예술가거나 간에 어떤 우중충한 배경에다가 골라낸 조각들을 추상적인 형태로 흩어 놓아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원래 조각 맞추기로 만들어진 것보다 더 근사할는지도 모르며, 더욱 독창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은 해답이 아닐 것이다. 해답을 구하려면 모든 조각을 다 써서 맞춰야 하고, 그림 없는 쪽은 바닥으로 면해야 하며, 그리고 모두 꼭 맞게 끼워 맞추어서 빈 구멍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조각그림 맞추기의 풀이를 다스리는 규칙들에 포함된다. 글자 맞추기 퀴즈, 수수께끼, 장기 두기 등 문제들의 허용가능한 해답을 끌어내는 데에도 그와 비슷한 제한 조건들이 쉽사리 발견된다.
만일 '규칙(rule)'이란 용어를 상당한 폭넓게 사용하기로 한다면__경우에 따라서는 '기존 견해(established viewpoint)'또는 '예지(preconception)'와 동격으로 쓰일 것인데__주어진 연구 전통 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들은 이 같은 부류의 수수께끼 특성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을 드러낸다. 빛의 파장을 측정하는 기계를 고안하는 사람은 어느 장치가 단지 특정한 스펙트럼 선에 특정한 값을 매겨 준다고 해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단순히 탐사자 또는 측정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해야 할 일은 광학 이론의 정립된 개념에 의하여 그의 장치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기기가 알려 준 숫자가 바로 이론에서의 파장과 같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론에서 미결된 허점이 있다거나 또는 그의 장치에서의 분석되지 않은 요소로 인해 그 증명을 완결시키지 못하는 경우, 그의 분야의 동료들은 그가 아무것도 측정하지 않았다고 결론짓기가 알맞다. 예를 들면 전자 산란의 최고 값도 그것이 처음 관찰되고 기록되었을 때에는 별로 의미를 갖지 못했다가, 후에야 전자 파장의 지침으로 진단되었던 것이다. 그런 결과들이 어느 것의 척도가 되기까지에는, 그것들은 우선 운동하고 있는 물질이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했던 이론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연관성이 지적된 이후에도 실험결과가 이론과 양론의 여지없이 분명한 상관 관계로 연관될 수 있도록 장치를 다시 꾸미지 않으면 안 되었다.2) 이런 조건들이 만족되기 전까지는 어떤 문제도 해결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납될 만한 풀이들은 이론적인 문제들에 이와 비슷한 종류의 제한 조건으로 매이게 된다.18세기를 통틀어, 운동과 중력에 관한 뉴턴의 법칙들로부터 달의 관측된 운동을 유도해 내려 했던 과학자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결과 학자들의 일부는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law) 대신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 법칙으로부터 벗어났던 다른 법칙의 대치를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수수께끼를 정의하고, 옛 수수께끼를 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기존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다가 1750년 그들 중의 하나가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3) 게임의 규칙에서의 하나의 변화에 의해 비로소 대안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상과학 전통의 연구에서는 이 밖의 여러가지 규칙들이 더 드러나게 되며, 그 규칙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유도한 고약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들 규칙들이 속하는 주요 범주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4) 가장 분명하고도 아마도 가장 구속력 있는 것은 우리가 방금 주목했던 일반화의 유형들에 의해 예시될 것이다. 이 일반화는 과학적 법칙 그리고 과학적 개념과 이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다. 이 같은 진술이 계속 존중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서술은 수수께끼를 설정하고 수용할 만한 해답을 한정짓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테면 뉴턴의 법칙들은 18__19세기에 걸쳐 그런 기능을 맡았다. 이 기간만큼은 물질의 질량(quantity-of-matter)이란 물리학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실체의 범주였으며, 물질의 조각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연구의 주요 주제였다.5) 화학에서는 정비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이 오랜 세월을 두고 바로 그와 똑같은 위력을 발휘하였다__원자량의 문제를 정리하고, 화학분석의 수용 가능한 결과에 한계를 긋고 원자와 분자, 화합물과 혼합물이 무엇인가를 화학자에게 알리는 일을 맡으면서6) 맥스웰 방정식들(Maxwell`s equations)과 통계 열역학(statistical thermodaynamics)의 법칙들은 오늘날 바로 그와 같은 위력과 기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류의 규칙은 역사적 고찰에 의해 드러나는 유일한 형태도 아니며, 가장 흥미론운 다양성도 아니다. 법칙과 이론의 수준보다 더 낮거나 또는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를테면 기기장치법의 보다 바람직한 형태 그리고 인정받은 기기가 올바르게 적용되는 방식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화학 분석에서 불의 역할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은 17세기 화학의 발달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7) 19세기에 헬름홀츠(Helmholtz)는 물리적 실험 방법이 그들 생리학 분야를 구명할 수 있다는 관념에 대해 생리학자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8)그리고 금세기 화학 크로마토그래피의 진기한 역사도 기기적 의존의 끈질김을 보여주는데, 그 기기법은 법칙과 이론만큼이나 과학자들에게 게임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9) X선의 발견을 분석해 보면, 이런 유형의 집착에 대한 타당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역과 시대에 덜 구애받고, 그러면서 변모하는 성격의 과학 특성이 되는 것은, 사적인 고찰에서 매우 규칙적으로 드러나는 보다 고차원적인 유사__형이상학적(quasi-metaphysical)입장이다. 예를 들면 1630년경 이후 그리고 특히 물리학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의 과학저술의 출현 이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우주는 미시적인 입자로 이루어졌으며 자연 현상은 모두 입자의 형태, 크기, 운동 그리고 상호 작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공약의 한 묶음은 형이상학적이며 또한 방법론적임이 밝혀졌다.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우주는 어떤 유형의 실체를 포함하며 또 어떤 것을 포함하지 않는가를 일러주었다. 우주에는 오로지 형태를 갖춘 물질이 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궁극적인 법칙과 기본이 되는 설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러주었다. 법칙들은 입자의 운동과 상호 작용을 명시해야 하며, 설명은 어느 주어진 자연 현상을 이들 법칙 하에서의 입자의 작용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보다 더 중요하게, 우주에 관한 입자적 관념은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 문제의 다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지시했다. 예를 들면 보일(Boyle)처럼 새로운 입자 철학을 포용했던 화학자는 연금술적 변성으로 변성으로 간주될 수 간주될 수 있었던 반응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는 모든 화학적 변화의 바탕에 깔려 있음에 틀림없는 입자들의 재배열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10) 역학, 광학, 그리고 열의 연구에서도 입자철학(corpuscularism)은 이와 비슷한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것 없이는 과학자라고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공약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과학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가 질서를 갖추게 된 그런 정밀성과 법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개입은 나아가서 과학자 그 스스로 또는 동료들과의 협동을 통해 자연의 몇 가지 측면을 실험적으로 상세하게 밝히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만일 이런 탐사 작업에서 불규칙서의 구멍들이 완연히 드러나는 경우, 그것들은 과학자로 하여금 그이 관찰 기술을 새로이 정련시키거나, 또는 그의 이론을 더욱 명료화시켜야 하는 도전에 부딪치게 만든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와 비슷한 규칙들은 아직도 허다하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과학자들을 사로잡아 온 것들이다.
이러한 공약의 강인한 그물망__개념적, 이론적, 기기적, 그리고 방법론적인__의 존재는 정상과학을 수수께끼 풀이에 관련짓고 있는 비유에서 주된 원천에 된다. 그것은 성숙된 경지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에게 세계와 그의 과학이 둘 다 과연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규칙을 제공하는 까닭에, 연구자는 이들 규칙과 더불어 기존의 지식이 정의해 주는 난해한 문제들에 확신을 갖고 집중할 수가 있다. 그 다음 단계로 과학자 개인에게 도전하는 것은 나머지 수수께끼를 어떻게 해결로 끌고 가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러한 측면과 그 밖의 관점에서, 수수께끼들과 규칙에 관한 논의는 정상과학에서의 실제 활동의 본질을 밝혀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해명은 상당히 오류를 빚게 될는지도 모른다. 과학의 전문 분야의 수행자들은 모두 어느 주어진 시대에서 거기에 집착할 수 있는 규칙을 지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규칙들이 그 자체만으로 그 분야 전문가들의 활동에서 공유되는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마로 이 에세이의 첫머리에서, 공유된 패러다임을 가리켜 공유된 규칙, 가정, 그리고 견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과학 전통의 일관성의 원천이라고 소개했던 까닭이 된다.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ff
"주"
1) 과학 발달에서의 개인의 역할과 총체적 양상 사이의 갈등으로 생기는 좌절은 상당히 심각한 경우가 많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Lawrence S.Kubie, "Some Unsolved Problems of the Scientific Career", American Scientist, XLI(1953), 596__613;XLII(19554), 104__12를 보라.
2) 이들 실험들이 진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Les Pric Nobel en 1937(Stockholem, 1938) 4페이지에 실린 C.J.Davisson의 강연 내용 참조.
3) W.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rev.ed.;London, 1847), II, 101__5, 20__22. 4) 이 질문은 W.O.Hagstrom 에게서 얻은 것인데, 과학 사회학에 대한 그의 연구는 내 자신의 것과 때로는 겹치고 있다.
5) 뉴턴 이론의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I.B.Cohen, Franklin and Nwewton;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of (Philadelphia, 1956), chap. vii, esp. pp.255__57, 275__77.
6)이러한 보기에 대해서는 X절 뒷부분에서 길게 논의하였다.
7) H.metzger, Les doctrines chimiques en France du debut du XVII siecle a la fin du XVIII a la fin du XVIII siecle (Paris, 1923_, pp.359__61;Marie Boas, Robert Boyle and Seventheenth-Century Chemistry(Cambridge, 1958), pp.112__5.
8) Leo Konigsberger, Hermann von Helmholtz, trans. Francis A. Welby(Oxford, 1906),pp.65__66. 9) James E.Meinhard, "Chromatorgraphy ; A Perspective", Science, CX (1949), 387__92. 10) 전반적인 입자설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Marie Boas, "The Extablishment of the Mecanical Philosophy", Osiris, X(1952), 412__541. 보일의 화학에 대한 그 영향에 관해서는, T.S.Kuhn, "Robert Boyle and Structrual Chemistry in the Seventeenth Century", Isis, XLII(1952), 12__36.
V. 패러다임의 우선성 The Priority of Paradigms
규칙, 패러다임, 그리고 정상과학 사이의 관계를 구명하기 위해서 우선 인정된 규칙이라고 방금 표현하였던 공약(commitment)의 특수한 위치를 과학사학자들이 어떻게 구별짓는가를 고려해 보자. 어느 시대의 어느 전문 분야를 면밀히 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양한 이론들의 개념적, 관찰적, 그리고 기기적인 응용에서의 그들 이론의 되풀이 되는 유사__표준형(quasi-standard)의 설명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교재, 강의와 실험 실습에 구현된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들이다. 그것들을 고찰하고 그것들을 갖고 과학 활동에 임함으로써 해당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일을 배우게 된다. 물론 사가들은 추가적으로 그 정체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과학의 성취들로 채워진 모호한 부분을 발견할 것이지만, 해결된 문제들과 기술들의 핵심은 보통 명백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모호하기도 하지만 성숙된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은 비교적 수월하게 결정될 수가 있다.
그러나 공유된 패러다임의 결정이 굥유된 규칙의 결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 2단계를 필요로 하며, 약간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런 단계를 밟을 때 과학사학자는 그 사회의 패러다임끼리도 서로 비교해야 하며, 과학자 사회의 당대 연구 보고서들과도 비교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의 목적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보다 일반적인 패러다임으로부터 명시적 또는 묵시적인 분리 가능한, 어떠한 요소들을 추상해내어 그들 연구의 규칙으로서 전개시켰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특정한 과학전통의 출현에 대해 설명하거나 분석해 보려고 애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 종류의 인정된 원리들과 규칙들을 추구했을 것이다. 앞 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거의 틀림없이 그 사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경험이 나 자신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면, 그는 규칙에의 탐색이 패러다임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덜 만족스럽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 사회가 공유하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도입하는 일반화의 어느 부분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예제로 제시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여타의 일반화는 매우 강한 암영으로 보일 것이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또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어느 방식으로 표현될 때, 그것들은 그가 연구하는 그룹의 몇몇 구성원들에 의해서 거의 틀림없이 거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 전통의 근거에 대한 어떤 명사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주어진 정규 연구의 전통을 이룰 자격이 있는 규칙들의 본체를 찾는 것은 항상 지속적이고도 심각한 좌절이 된다.
그러나 그런 좌절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 좌절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진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과학자들은 뉴텬, 라부아지에, 맥스웰, 또는 아인슈타인이 한 무리의 굉장한 문제들에 대해 영구적으로 보이는 해답을 얻어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때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그런 해답들을 영구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특정한 추상적 특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다시 말하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완벽한 해석(interpretation)또는 합리화(rationalization)에는 동의하지 않거나 또는 그런 것을 얻어 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패러다임의 확인(indentification)에서는 의견의 합치를 볼 수 가 있다. 표준 해석 또는 규칙에의 합의적 수렴의 부재가 패러다임이 연구의 방향을 잡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정상과학은 부분적으로 패러다임들의 직접 점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데, 그것은 흔히 규칙들과 가정들의 공식화의 도움을 받게 되나, 그렇다고 그것들에 의존하지는 않는 과정이다. 사실상 하나의 패러다임의 존재는 어느 완벽한 한 벌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조차 할 필요가 없다.1)
불가피하게 그들 진술들의 일차적 효과는 문제들을 제기하는 일이다. 자격을 갖춘 규칙들의 본체가 없이, 과학자를 특정한 정상과학의 전통에 묶어 놓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패러다임의 직접적 점검(direct inspection)'이란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크게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비트겜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 의해 전개되었던 바 있다. 그 내용은 보다 기본적이고 보다 친숙한 것이므로, 그의 논거의 형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자'니 '잎사귀' '게임'이니 하는 말들을 애매하지 않게 그리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게 적용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2) 라고 묻는다.
이런 물음은 아주 오랜된 것이며 대체로 우리는, 의식적이든 또는 직감적이든 간에, 의자니 잎사귀니 게임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대답하여 왔다. 말하자면 오로지 게임들만이 공통으로 지니는 어떤 속성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주어지고 우리가 그것을 적용하는 세계의 유형이 정해지는 경우, 그런 공통의 특성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 지었다. 다수의 게임이나 의자나 나뭇잎에 공유되는 어떤 속성들을 논의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용어를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익히는 데 도움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분류층의 모든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동시에 모조리 그리고 거기에만 유일하게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의 묶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전에는 관찰되지 않았던 어떤 활동에 직면하여 우리는 '게임'이란 용어를 적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이미 그런 이름으로 부르도록 배웠던 많은 활동에 아주 가깝게 '가족처럼 닮음(family resemblance)'을 지녔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게임, 의자, 잎사귀는 자연의 가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 족은 서로 포개지고 교차되는 유사성이 얽혀 구성된다. 이러한 조직망의 존재는 상응하는 대상이나 활동을 확인하는 것에 우리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우리가 이름 붙인 가족들이 포개지고 점진적으로 서로 병합되기만 한다면__즉 다른 자연의 족들이 존재하지만 않는다면__확인과 명명에서의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쓰는 족 이름의 각각에 상응하는 공통적 특성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단일한 정상과학의 전통 내에서 야기되는 다양한 연구 문제와 기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유형의 양상이 충분히 성립된다. 이들의 공통점이, 더러는 뚜렷한 또 더러는 완전히 찾아낼 수 있는 규칙과 가정의 한 벌__전통에 그 특성을 부여하고 과학적 정신의 위력을 제공하는__을 만족시킨다는 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과학 체계의 이런저런 부분에 대해서 유사성과 모형화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체계란 이미 그 확립된 업적 가운데서 문제의 과학자 사회가 인정한 것을 가리킨다. 과학자들은 교육을 통해서나 문헌을 계속 접함으로써 터득하게 되는 모델로부터 연구하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 어떤 특성에 그러한 모델들이 그 사회의 패러다임의 자격을 얻게 되었는가는 잘 알지 못하거나 또는 알 필요가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규칙의 완벽한 묶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참여하는 연구 전통에서 드러나는 일관성은 역사적, 철학적으로 더 연구하면 베일이 벗겨질 수 있는 내재적인 규칙과 가정 본체의 존재조차도 암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보통, 무엇이 특정 문제나 풀이를 정당화시키는가를 묻거나 논쟁삼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직관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은 답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물음도 답변도 그들의 연구에 관련되지 않은 듯이 느껴지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패러다임들은 그것들로부터 분명하게 추상화될 수 있는 연구 규칙의 어느 묶음보다도 우선적이며 더욱 구속력 있고 더욱 완전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관점은 전적으로 이론적이었다. 패러다임은 발견될 수 있는 규칙들의 개입이 없어도 정상과학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실제로 패러다임이 그런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믿게 할 만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그 명백함과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상당히 완전하게 논의 된 바로서, 특정한 정상과학 전통을 추구해 온 규칙들을 찾아내는 것이 지극히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런 난점은 철학자가 모든 게임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할 때 당면하는 어려움과 거의 똑같다. 두 번째 이유는, 사실상 첫 번째 이유는 필연적 결과인데, 과학 교육의 성격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미 분명해진 사실로서 과학자들은 결코 개념, 법칙, 이론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그것들 자체로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능적 수단들은 당초부터 과학자들에게 그 적용과 더불어 또는 적용을 거쳐서 드러나는 역사적, 교육적 선행 단계에서 접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은 언제나 자연 현상의 어떤 구체적 영역에 적용시킴과 더불어 발표된다. 그런 적용들이 없었다면 수용할 만한 후보 이론조차 없었을 것이다. 일단 수용된 뒤에는 그런 똑같은 응용 또는 여타의 적용 예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자기 할 일을 배우게 될 교과서에 이론과 함께 실린다. 그것들은 단순히 장식이라든가 또는 심지어 증거 문서로서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의 이론을 깨우치는 과정은 응용 연구에 의존하며 여기에는 연필과 종이를 갖고 또는 실험실에서 기기에 의해 실제 문제를 푸는 것이 둘 다 포함된다. 이를테면 뉴턴의 역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힘' '질량' '공간', 그리고 '시간'과 같은 용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경우, 대개 이들 개념을 문제__풀이(problem-solution)에 적용시켜 관찰하고 관여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지, 교재에 실린 불완전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되는 정의들로부터 터득하는 것은 훨씬 적다.
실제 계산이나 실습을 통해 배우는 그런 과정은 전문화의 전수 과정을 통틀어 지속된다. 학생이 대학 신입생 과정으로부터 박사 논문 과정까지 밟아 감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문제들은 점점 복잡해지며 전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것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그 뒤에 따르는 독자적인 과학자의 생애에서 정규적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이루어진 성취에 바탕하여 가깝게 계속 모델화 된다. 그 경로의 어디선가 과학자는 스스로 그 게임의 규칙들을 직관적으로 추상해 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믿어야 할 만한 이유는 거의 없다. 많은 과학자들은 당시의 구체적 연구 주제에 내재하는 특정한 개별적 가설에 대해서는 쉽게 그리고 잘 논의하지만, 그들 분야에서 확립된 기반이나 타당성 있는 문제들과 방법들을 특성화함에 있어서는 비전문가에 비해 별로 나을 게 없다. 과학자들이 그런 추상적 개념화를 터득하는 경우, 그들은 주로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게임의 가설적인 규칙들에 의지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다.
과학 교육의 이러한 결과들은 패러다임이 개념화된 규칙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직접 모형이 됨으로써 연구의 지표가 된다고 보는 세번째 이유를 제공한다는 논의를 성립시킨다. 관련되는 과학자 사회가 이마 성취된 특정 문제__풀이를 의문없이 수용하는 한에서만 정상과학은 규칙없이도 진행될 수 있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나 모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경우에는 규칙들은 중요해지게 될 것이며, 규칙들에 대한 특유의 무관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바로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특히 패러다임__이전(pre-paradigm)시대는 으레 합법적인 방법, 문제 및 문제__풀이의 표준__이것들은 합의를 도출하기보다는 학파를 정의하는 구실을 하지만__에 대한 빈번하고 심각한 논쟁에 관해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그들 논쟁은 17세기 화학과 19세기 초엽 지학(geology)의 발달에서는 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더구나 그와 같은 논쟁들은 어느 패러다임이 출현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정상과학의 시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과학혁명, 즉 패러다임이 공격을 받게 되고 다음 단계에서 바뀌게 되는 시기의 바로 직전과 그 과정에서는 논쟁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곤 한다.
뉴턴 역학으로부터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으로의 이행은, 더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물리학의 성격과 규범에 관해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4)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에 의해서 그리고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에 의해서 그와 비슷한 논쟁이 빚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5) 그리고 이보다 앞서, 갈릴레오 역학과 뉴턴 역학의 동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데카르트주의자들, 그리고 라이프니트 학파와의 사이에서 가학의 적법한 기준에 관해 특히 유명한 일련의 논쟁사를 기록하였다.6)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들 분야의 기본적 문제들이 해결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합의되지 않을 때에는, 규칙을 찾아낸다는 일이 평상시에는 지탱되는 동안에는 합리화에 대한 동의가 없이 또는 합리화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채 패러다임은 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이 절에서는 패러다임이 공유된 규칙과 가정에 우선하는 지위를 차지하는 네 번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결론을 맺으려고 한다. 이 에세이의 서론에서는 대규모 혁명들뿐만 아니라 소폭적인 혁명도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했으며 어떤 혁명들은 세분화된 전공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했고, 또 그런 그룹에게는 새롭고 예기치 않은 현상의 발견조차도 혁명적이 될 것임을 시사했다. 다음 절에서는 그런 종류의 혁명을 발췌하여 소개할것인데,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가 확실해지려면 아직 요원하다. 만일 정상과학이 그렇게 경직된 것이라면, 그리고 과학자 사회가 앞의 논의에서 암시한 것처럼 그렇게 밀접하게 얽힌 것이라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어떻게 소규모의 하부 집단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논의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정상과학은 단일 체제의 통합적인 활동으로서 모든 패러다임과 운명을 함께 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그런 일이 매우 드물거나 전혀 그런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개관하면, 오히려 과학은 그 다양한 부분 가운데서 거의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상당히 줏대 없는 구조를 가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흔히 보이는 관찰과 모순될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규칙 대신에 패러다임을 대치하는 것은 과학의 분야와 세부 전공의 다양성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명시적 규칙들은, 그것들이 존재할 때에는, 매우 광범위한 과학자 집단에 공통적인 것이 상례지만 패러다임은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천문학과 식물 분류학처럼 크게 동떨어진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책들에서 설명된 다른 업적에 접하며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똑같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에서 동일한 책들과 업적들을 많이 공부하는 것으로 출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전공의 세분화 과정에서 상당히 차이 나는 패러다임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의 실례로서, 모든 물리과학자들로 구성된 방대하고 다양한 과학자 사회를 생각해 보자. 요즈음은 그런 그룹의 구성원은 누구나가 예컨대 양자 역학이 법칙들을 배우며, 그들 대부분은 연구라든지 강의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이들 규칙을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이들 법칙들의 동일한 적용을 배우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이 양자 역학의 실제 변화에 의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전공의 세분화에 이르는 길에서 일부 물리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들에만 접하게 된다. 다른 학자들은 이들 원리들의 화학 분야에의 패러다임 적용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게 되며, 또 다른 학자들은 고체 물리학에의 적용에 관해 연구하는 등등 다양해진다. 양자 역학이 과학자들의 각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는 그가 무슨 과목을 했는가, 무슨 책들을 읽었는가, 어떤 문헌을 공부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양자 역학 법칙에서의 하나의 변화는 이들 그룹 모두에게 혁명적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양자 역학에서의 이런저런 패러다임 적용에만 영향을 미치는 변화는 세분화된 특정세부 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혁명적인 것이 된다. 나머지 전문 분야들, 그리고여타의 물리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는 전혀 혁명일 필요가 없다.단적으로 표현해서, 양자 역학(또는 뉴턴 역학 또는 전자기 이론)은 다수의 과학그룹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이기는 하나,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패러다임은 아니다.그러므로 그것은 같은 폭을 갖지 않으면서 중첩되는 정상과학의 여러 전통을 동시에결정할 수 있다. 이들 전통의 어느 하나에서 일어나는 혁명은 다른 것에까지반드시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공 세분화의 영향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이런 전반적인 일련의 요점을더 보강시켜 줄 것이다. 어떤 연구자가 과학자들은 원자론(atomic theory)을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에 대해 좀 알고 싶어서 특출한 물리학자와 유명한화학자에게 헬륨의 단일 원자는 분자인가요,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양쪽 다망설 없이 대답했으나, 그들의 답변은 같지 않았다. 화학자에게는 헬륨의 원자는하나의 분자였는데, 왜냐하면 기체의 운동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분자처럼행동했기 때문이다. 한편 물리학자에게는 헬륨 원자는 하나의 분자가 아니었는데,왜냐하면 그것은 분자 스펙트럼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7) 두 사람은 동일한입자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으나, 자신들 특유의 연구 훈련과 활동을 통해서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__풀이에서의 그들의 경험은 분자는 무엇이라야하는가를 깨우쳐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경험은 공통점을 많이 갖고있었으나, 이 경우 그 경험들은 두 전문가에게 동일한 내용을 말해 주지는 않았던것이다. 앞으로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이런 유형의 패러다임 차이가 경우에따라 어떤 결과들을 빚게 되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
1) Michael Polanyi는 과학자들의 성공은 대부분 '묵시적 지식, 즉 실습을통해서 터득되고 명시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지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이와 매우 비슷한 주제를 훌륭하게 전개했다. 그의 저서 PersonalKnowledge(Chicago, 1958), 특히 v장과 vi장 참조. 2) Ludwin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E. M.Anscombe(New Your, 1953), pp.31__36.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요약한명명 과정을 뒷받침하는데 필요한 세계의 유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게 없다.이어지는 견해의 일부는, 따라서 그에게서 따 온 것이 아니다. 3) 화학에 대해서는 H. Metzger, Les doctrines chimiques en France dudebut du XVII a la fun du XVIII siede(Paris, 1923), pp.24__27, 146__49;MarieBoas, Robert Boyle and Seventeenth Century(Cambridge, 1958), 2장 참조.지질학에 대해서는 Walter F. Cannon, "The Uniformitarian-Catastrophist Debate."Isis, LI(1960), 38__55;C. C. Gillispid, Genesis and Geology(Cambridge,Mass., 1951), 4__5장 참조. 4) 양자 역학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Jean Ullmo, La crise de la physiquequantique(Paris, 1950), 2장 참조. 5) 통계 역학에 대해서는 Rene Dugas, La theorie physique au sens de Boltzmannet ses prolongements modernes(Neuchatel, 1959), pp.158__83, 206__19 참조.맥스웰의 업적의 수용을 살피려면, James Clerk Maxwell:A Commemoration Volume,1831__1931(Cambridge, 1931), pp.45__65, 특히 pp.58__63에서 Max Planck,"Maxwell`s Influence in Germany" 참조:Silvanus P. Thompson. The Life ofWilliam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II, 1021__27 참조.
6)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의 투쟁에 대한 하나의 실례를 살피려면 A. Koyer,"A Documentary History of the Problem of Fall from Kepler to Newton",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XLV(1955), 329__95 참조.데카르트 학파, 라이프니츠 학파와의 논쟁에 관해서는 Pierre Brunet, Lintroductiondes theories de Newton en France au XVIII siecle(Paris, 1931):A. Koyre, From the Closed World to the Infinite Universe(Baltimore, 1957), 제6장 참조.
7) 이 연구자는 나에게 구두 보고를 해줌으로써 내가 신세를 진 JameK. Senior이었다. 몇몇 관련되는 주제들은 그의 논문, "The Vernacular of theLaboratory." Philosophy of Science, XXV(1958), 163__68에 실려 있다.
VI. 이상 현상과 과학적 발견의 출현 Anomaly and the Emergence of Scientific Discoveries
정상과학, 즉 우리가 방금 검토했던 수수께끼 풀이(puzzle-solving)의 활동은 과학지식의 범위와 정확성의 꾸준한 확장이라는 그 목표에서 크게 성공적인 고도의 집적된 활동이다. 이들 모든 관점에서 정상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에 매우 정확하게 잘 맞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과학적 활동의 표준적 산물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정상과학은 사실이나 이론의 새로움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적인 경우, 그 어떤 새로움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리고 뜻밖의 현상들이 과학 연구에 의해 끊임없이 베일이 벗겨졌고, 과학자들에 의해 첨단의 새로운 이론들이 또다시 거듭 창안되어 왔다. 역사는 심지어, 과학 활동은 이런 종류의 경이로움을 낳게 하는 고유의 강력한 테크닉을 개발해 왔음을 시사한다. 과학의 이런 특성이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조화를 이루려면, 패러다임하의 연구는 패러다임 변화를 유발하는 특수하게 효율적인 방법이라야 한다. 그것은 사실과 이론의 근본적인 새로움(novelty)이 하는 일이다. 그런 새로움들의 동화가 한 벌의 규칙에 따른 게임에서 우연히 생겨나면, 그것은 다른 벌의 규칙의 세밀한 완성을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것들이 과학의 일부로 동화된 뒤에는, 적어도 그 새로움이 끼여든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하는 일은 이전과는 결코 같지가 않다.
우리는 이제 우선, 발견 또는 사실의 새로움을 고찰하고, 다음에 창안 또는 이론의 새로움을 고찰하면서, 이런 종류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발견과 창안 사이의 차이, 또는 사실과 이론 사이의 차이는 지극히 주요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몇 가지의 발견을 골라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이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재발하는 구조의 확장된 에피소드라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발견은 이상현상(anomaly)의 지각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자연이 정상과학을 다스리는 패러다임__유도(paradigm-induced)의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다음 단계로 이상 현상의 범위를 다소 확장시켜 탐사하는 것과 더불어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상이 기대치가 되도록 패러다임 이론이 조정되는 경우에만 종결된다.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동화시키는 것은 이론의 추가적 조정 이상의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그 조정이 완료되기까지__과학자가 자연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깨우치기까지__새로운 사실은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사실적 그리고 이론적 새로움이 과학적 발견에서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 특히 유명한 사례인 산소의 발견에 대해 검토해 보자. 적어도 세 사람이 각각 산소 발견에 대해 이치에 맞는 주장을 했고, 1770년대 초 그들 이외의 여러 화학자들이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로 실험실 용기에 산소가 풍부한 공기를 얻었을 것은 틀림없다.1) 기체 화학(pneumatic chemistry)의 경우에서, 정상과학의 진보는 매우 철저하게 비약적 발전에의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비교적 순수하게 산소 기체의 시료를 처음으로 얻었다는 사람은 스웨덴의 약제사인 셀레(C. W. Sheele)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업적을 무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다른 데서 산소의 발견이 거듭 선언되기까지 그것은 공표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여기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는 역사적 양상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2) 시기로 보아 산소 발견을 주장한 두 번째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이며 신학자인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로서, 그는 여러 가지 고체 물질로부터 방출되는 '공기(airs)'에 대해 정규적인 연구를 오랫동안 계속하던 중, 수은의 붉은 산화물을 가열할 때 방출되는 기체를 모으게 되었다. 1774년에 그는 이렇게 생성된 기체를 아산화질소(nitrous oxide)라고 확인하였다가, 좀더 시험한 결과 1775년에는 플로지스톤이 그 통상적인 양보다 좀 덜 들어 있는 보통 공기라고 설명했다. 세 번째 주장자인 라부아지에(A. L. Lavoisier)는 1774년의 프리스틀리의 실험 후, 그리고 아마도 프리스틀리에게서 힌트를 얻은 결과로서, 산소까지 이끌어 간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1775년 초,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붉은 산화물을 가열해서 얻은 기체는 '바뀐 것이 없는 공기 그 자체로서(다만 다른 것은)... 보다 순수하며 호흡하기에 더욱 좋은'3) 것이라 하였다. 1777년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프리스틀리로부터 두 번째 힌트를 얻은 결과이겠는데, 라부아지에는 그 기체는 별개의 화학종으로서 대기의 두 가지 주성분 가운데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으며, 이는 프리스틀리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었던 견해였다.
발견의 이러한 양상은 과학자들의 인식 영역에 들어왔던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한결같이 묻게 되는 질문을 제기한다. 산소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만약 둘 중 하나라면 프리스틀리인가 라부아지에인가? 어느 경우이거나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질문은 마찬가지로 제기될 것이다. 우선권(priority)과 발견 시기에 대한 판정으로서,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우리에게 별 문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해답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찾고 있는 종류의 대답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발견의 본질을 밝혀줄 것이다. 발견이란 거기에 대해 적절하게 질문이 제기 되는 그런 유형의 과정이 아니다 그런 물음을 묻게 된다는 사실__산소에 대한 발견의 우선성에 대해서는 1780년대 이래 줄곧 논쟁이 되어 왔다.__은 발견에 매우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과학의 이미지에서 좀 빗나간 증상이 된다. 산소의 실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했다는 주장은 후에 특이한 종(species)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기체를 먼저 분리해 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프리스틀리가 얻은 시료는 순수하지가 못했다. 만일 불순한 산소를 얻은 것이 그것을 발견해 낸 것이라면, 대기 중의 공기를 병에 담았던 사람은 모두 산소를 발견했다 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리스틀리가 발견자라면 그가 이미 알고 있었던 종인 아산화질소라고 생각했다. 1775년에는 그 기체를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직 산소는 아니었고 플로지스톤 화학자에게는 심지어 전혀 예기치 못한 종류의 기체였다. 라부아지에의 주장은 보다 강점을 지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프리스틀리의 공로를 거부한다면, 마찬가지로 라부아지에가 그 기체를 '온전한 공기 자체(air itself entire)'라고 보았던 1775년의 연구를 들어 그에게 영예를 돌릴 수도 없다. 아마도 우리는 라부아지에가 단순히 그 기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1776년과 1777년의 연구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판정조차도 의심의 여지는 있는데, 왜냐하면 1777년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원자적 '산성의 원리(principle of acidity)'라 주장했고 산소 기체는 그 '원리'가 칼로릭(caloric), 즉 열의 물질과 결합할 때에만 생성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우리는 1777년에도 산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러나 산성의 원리라는 개념은 화학에서 1810년이 지나도록 소멸되지 않았으며, 칼로릭 개념은 186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산소는 이들 연대들의 어느 시기보다 일찍이 표준적 화학 물질로 자리잡았다.
산소의 발견과 같은 사건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분명히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요구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옳기는 하지만, '사소가 발견되었다'라는 글귀는, 본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그리고 또한 미심쩍은) 관념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도 일회적인 단순행위라고 암시함으로써 오해를 유발시킨다. 이것이 바로, 보거나 만지는 것처럼 발견하는 것도 똑 떨어지게 한 사람 손으로 어느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쉽사리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발견을 한순간의 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한 사람에 의한 것으로 발견을 돌리는 것도 흔히 마찬가지이다. 셀레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1774년 이전에는 산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해도 무방하며, 아마도 1777년쯤 또는 그 바로 직후에 산소가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 또는 그 비슷한 여러 한계 내에서 발견의 시기를 잡으려는 시도는 어쩔 수 없이 임의 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발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복합적 사건으로서 무엇인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둘 다 확인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일 산소가 우리에게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dephlogisticated air)였다면, 언제 발견했는지는 모르는 채로라도 주저없이 프리스틀리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개념화, 사실과 이론에의 동화, 이 두 가지가 발견 과정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면 발견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며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 관련되는 개념적 범주가 모두 미리 갖추어진 경우, 즉 현상이 새로운 우형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함께 즉각적으로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이제 발견에서는 개념적인 동화라는 확장된, 그러나 반드시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 과정이 개재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자. 그러면 발견은 패러다임에서의 변화를 포함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보편적인 해답이 제시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산소의 경우에서 대답은 '그렇다'가 틀림없다. 라부아지에가 1777년부터 줄곧 그의 논문에서 공표한 내용은 산소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소에 관한 산소 이론(oxygen theory of combustion)이었다. 그 이론은 매우 광범위하게 화학의 계통적 재구성에서의 쐐기가 되었던 까닭에 보통 화학혁명(chemical revolution)이라 불린다. 실제로 만일 산소의 발견이 화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의 요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묻기 시작했던 우선 순위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새로운 현상, 따라서 그 현상의 발견자에게 부여되는 가치는, 그 현상이 패러다임에서 유도된 예측들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가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만 후의 논의에서 중요하게 될 것이므로, 산소의 발견 자체는 화학 이론에서의 변화의 원인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하라.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기체의 발견에 기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플로지스톤 이론(phlogiston theory)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며, 타고 있는 물체는 대기의 어느 성분을 흡수한다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내용 정도는 이미 1772년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Secretary of the french Academy)에게 기탁한 봉인된 노트에 기록을 남긴 바 있었다.5) 산소에 대한 연구가 기여한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라부아지에의 초기의 느낌에 훨씬 더 구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갖추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라부아지에에게 그가 발견하도록 이미 마련되어 있던 것__연소가 대기로부터 제거시키는 물질의 본질__을 일러주었다. 잘못된 것을 이렇게 미리 인지했던 것은 라부아지에가 프리스틀리의 것과 같은 실험을 하면서, 거기에서 그가 볼 수가 없었던 기체를 볼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며, 라부아지에가 보았던 것을 보기 위해서 패러다임의 대폭 수정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프리스틀리가 그 긴 생애의 종말까지 어째서 그것을 볼 수 없었던가를 설명하는 주된 이유임에 틀림없다.
더 간단한 다른 실례 두 가지는 방금 언급된 내용을 훨씬 뚜렷하게 밝혀주고, 동시에 우리를 발견의 성격 규명으로부터 과학에서 그런 발견들이 출현한 배경을 이해하는 쪽으로 인도할 것이다.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는 주된 방식을 대변하도록 하는 시도로서, 이들 사례는 서로끼리도 다를 뿐만 아니라 산소의 발견과도 성격이 틀리는 것으로 선정하기도 한다. 첫째 실례는, X선으로서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발견의 고전적인 보기가 되는데 그것은 과학 논문에서의 일반적인 표준이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깨닫게 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는 형태이다. 이 이야기로 말하자면, 그의 차단된 실험 장치에서 꽤 떨어진 시안화백금바륨 스크린이 방전 도중에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음극선의 정규적인 연구를 중단하게 되었던, 물리학자인 뢴트겐의 어느 하루에서 시작된다. 보다 자세한 연구__그 연구로 륀트겐은 실험실에서 꼼짝 않고 정신없이 7주일을 보냈다.__결과 그 빛남의 원인은 음극선 관으로부터 직선으로 들어오며, 복사 흔적은 자기장에 의해서 휘어지지 않는다는 등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발견을 발표하기 전에 뢴트겐은 그가 얻은 결과가 음극선 탓이 아니라, 빛과 적어도 일부 유사성을 지니 떤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6)
이렇게 간단한 요약만 보아도 산소의 발견과 기막히게 닮은 점이 나타난다. 수은의 붉은 산화물로 실험하기 이전에는, 라부아지에는 풀로지스톤 패러다임하에서 예기되던 결과를 나타내지 않는 실험들을 수행했다. 뢴트겐의 발견은, 그의 스크린이 그러치 않아야 할 때 빛을 낸다는 것을 인식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두 경우에서 이상의 감지__현상의 이변, 즉 연구자의 패러다임이 그로 하여금 그 현상에 대한 채비를 갖추게 하지 못한 것__은 새로움을 인지하는 길을 여는 데 필수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다시 이 두 경우에서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것은 발견을 향한 전주일 뿐이다. 산소건 X선이건 어느 것도 실험과 동화라는 과정을 차근차근 더 밝지 않고는 출현하지 못했다. 예컨대 뢴트겐의 연구에 있어서 어느 시점을 가리켜 참으로 X선이 발견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쨌거나 알아낸 것이라고는 고작 빛을 발하는 스크린이었던, 첫 순간은 아니었다. 뢴트겐말고도 적어도 한 사람은 더 그런 빛을 보았으나, 그로서는 억울하게도 전혀 아무것도 발견하지를 못하였다.7) 그리고 거의 분명한 사실로서, 그 발견의 순간은 탐색의 마지막 주일의 어느 한 시점으로 밀려날 수도 없는데, 그 무렵쯤 뢴트겐은 자기가 이미 발견한 새로운 복사선의 성질을 밝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X선은 1958년 11월 8일에서 12월 28일 사이의 어느 시점에 뷔르즈부르크(Wurzbrug)에서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 번째 영역에서는 산소 발견과 X선 발견 사이의 유의미한 유사성들이 훨씬 불투명하게 드러난다. 산소의 발견과는 달리 X선의 경우는, 적어도 그 사건 뒤 한 10년 동안 과학 이론상의 어느 격변에서도 암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발견의 동화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패러다임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변화를 부정하는 입장은 상당히 강경하다. 확실한 것은 뢴트겐과 그 시대연구자들에 의해 동의되었던 패러다임으로는 X선을 예측해 낼 수 없었다[그 때까지만 해도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은 널리 인정받지 못했으며, 음극선이 입자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은 그 당시의 여러 추측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패러다임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프리스틀리의 기체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설명을 방해했던 것처럼, 적어도 어떤 분명한 의미에서 X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895년에는 수용된 과학 이론과 실제는 여러 가지 형태의 복사파__가시 광선, 적외선, 그리고 자외선__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째서 X선은 자연 현상의 잘 알려진 부류의 부가적인 한 형태로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째서 X선은 이를테면 화학 원소의 한 가지를 더 발견해 낸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던 것일까? 주기표상의 빈 자리에 새로운 원소들을 찾아 넣는 일은 뢴트겐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실제로 발견되고 있었다. 그러한 노력의 추구는 정상과학의 표준형 프로젝트였으며, 성공을 거두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
그러나 X선은 놀라움뿐만 아니라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켈빈 경은 처음에는 X선을 가리켜 정교한 속임수라고 선언했다.8) 다른 학자들은, 그 증거를 의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 발견에 의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X선은 확립된 이론에 의해 이단시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확고부동한 예상들을 위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측들은 확립된 실험 과정의 고안과 해석 가운데 묵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1890년대까지 음극선 장치는 유럽의 각종 실험실에 두루 광범위하게 배치되었다. 뢴트겐의 장치에서 X선이 발생했다면, 그 밖의 실험자들도 다수가 상당 기간 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로 X선을 발생시키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다른 미지의 복사원이 있었을 법한 그런 복사선도, 그것들과 관련시키지 않은 채로 앞에서 설명된 행동에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오랜 기간 잘 써 왔던 장치의 몇 가지는 장차 납으로 가려져야만 했을 것이다. 정규 프로젝트에서 이미 완료된 연구는 이제 다시 검토되어야 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전의 과학자들은 X선에 관련되는 변수를 인식하고 조절하지를 않았었기 때문이다. 말할 나위 없이, X선은 새로운 장을 열었고 그럼으로써 정상과학의 잠재적 영역에 덧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X선은, 현재로서는 보다 중요한 측면으로서 또한 기존의 분야들까지 변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X선은 기기 장치의 종전의 패러다임적 형태로부터 그 패러다임적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요컨대 의식적이건 아니건 간에, 어느 특수 장치를 도입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결정은 어떤 종류의 상황들만이 전개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론사의 예측뿐만 아니라 기기적인 예상도 따르며, 그런 것들은 과학의 발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수가 많았다. 예컨대 그런 예측의 하나로서 산소의 지연된 발견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를 들 수 있다. '공기의 정수(the goodness of air)'에 대한 표준 시험을 통해서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는 둘 다 그들의 기체를 산화질소와 2대 1의 부피비로 섞어, 물 위에서 그 혼합물을 흔들고, 기체 잔여물의 부피를 측정했다. 이런 표준 과정에까지 이르게 된 과거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대기 중의 공기로 실험하면 잔여 기체의 부피가 1이 될 것이며, 그 밖의 다른 기체(또는 오염된 공기)에 대해서는 부피가 그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케 했다. 산소 실험들에서 두 사람은 모두 잔여 기체를 확인하였다. 한참 지난 후에야, 그리고 더러는 우발적인 사건을 거쳐, 프리스틀리는 표준과정을 버리고 산화질소를 그의 기체와 다른 비율로 섞어 보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산화질소 부피를 4배로 늘려 섞으면 도대체 남는 기체가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의 시험 방법__훨씬 이전의 경험으로 성역화된 과정__을 고수한 것은 또한 산소처럼 작용하는 기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고집한 것을 의미했다.11)
이런 종류의 사례들은, 예컨대 우라늄 분열반응에 관한 지연된 확인에서처럼 여러 가지가 있다. 그 핵반응을 밝혀내는 데 유난스럽게 난관을 겪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우라늄에 충격을 가할 때 예측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주로 주기표의 상단에 위치한 원소들을 겨냥한 화학 시험을 택했던 까닭이었다.10) 우리는 그러한 기기적인 방법에 대한 믿음이 오류로 판명되는 횟수로 보아, 과학은 표준 시험과 표준기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어도 좋은 것일까? 그런 일은 상상도 못 할 연구 방법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 실험법과 응용은 패러다임 법칙과 이론만큼이나 과학에 필수적인 것이며, 그 영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피할 수 없이 패러다임 과정과 응용은 어느 주어진 시기에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상학적 영역을 제한하게 된다. 이 정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X선과 같은 발견이 과학자 사회의 특정분파에 대하여 패러다임 변화__따라서 실험 과정과 예측 둘 다에서의 변화__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본질적 의미를 아울러 깨닫게 된다. 그 결과 X선의 발견이 어떻게 해서 다수의 과학자들에게 신기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으로 보였는가, 그리고 그럼으로써 20세기 물리학에 이르게 했던 위기에서 어떻게 막중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에 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의 마지막 사례로서, 라이덴 병(Leyden jar)의 경우는 이론__유도형이라 표현될 수 있는 부류에 속한다. 처음에는 이 용어가 패러독스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의 대부분은, 이론에 의해서 미리 예측된 발견들이 정상과학의 부분을 이루며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파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앞에서 나는 그런 방식에 의해 정상과학으로부터 진전된 것으로서, 예컨대 19세기 후반 동안의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발견된 것을 사례로 든 바 있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전부 패러다임 이론인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__이전의 시대와 패러다임의 대규모 변혁이 진행되는 위기의 와중에서는, 과학자들은 보통 그 자체가 발견에의 길을 지시할 수 있는 갖가지 추론적이며 명료화되지 않는 이론들을 전개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발견은, 흔히 추측적이며 잠정적인 가설에 의해서 명료화되는 경우에 비로소 발견이 이루어지며 이론은 패러다임으로 탄생된다.
라이덴 병의 발견은, 앞서 살펴본 특성은 물론 이들 모든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발견이 시작되었을 때, 전기학 연구에는 단일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결같이 비교적 접하기 쉬운 현상들로부터 유도된 다수의 이론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이론 가운데 전기적 현상들을 모두 잘 다스리는 데 성공한 이론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실패가 바로 라이덴 병의 발견의 배경을 제공하는 여러 가지 이상 현상들의 원천인 것이다. 전기학자들의 어느 학파는 전기를 유체(fluid)로 다루었고, 그런 관념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은 물을 채운 유리병을 손에 쥐고 물을 가동된 정전기 발생기(electrostatic generator)에 달린 도선에 닿게 함으로써 유체를 병에 담으려고 애쓰게 되었다. 기계로부터 병을 떼고 다른 쪽 손으로 물(또는 물에 연결된 도선)을 만졌을 때, 실험자들은 누구나 심한 전기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최초의 실험들이 전기학자들에게 즉각적으로 라이덴 병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장치는 보다 점진적으로 형체를 갖추게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 발견이 언제 완결되었는가를 잘라 말하기는 곤란하다. 전기적 유체를 저장하려는 당초의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 진 것은 오로지 실험자들이 땅에 발을 붙이고 손에 유리병을 쥐었기 때문이었다. 전기학자들은 그때까지도 그 병이 내부의 전도성 피막뿐만 아니라 외부 피막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유체가 병에 실제로 저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고 그 밖의 몇 가지 이변적인 결과를 보여 준 탐구 과정의 어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른바 라이덴 병이라는 장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더욱이 그 출현까지에 이르는 실험들__그 중 다수는 프랭클린에 의해서 수행된__은 또한 유체 이론의 전폭적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고, 그에 따라 전기에 대한 최초의 완벽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게 되었다.11)
정도의 크고 작음은 다르지만(충격으로부터 예상되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연속선상에 해당하는) 위에 든 세 가지 사례에 공통되는 특성은 새로운 양상의 현상이 그로부터 출현한 모든 발견들의 특징적 성격이다. 그 특성들은 이상 현상에 대한 사전인지, 관찰적 및 이론적 인식의 점진적 및 동시적 출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흔히 저항을 수반하는 패러다임 범주와 과정의 변화를 포함한다. 이들 똑같은 특성이 지각 과정 자체의 성격에 내재한다는 증거까지도 얻어져 있다. 심리학 이외의 분야에서 훨씬 잘 알려진 만한 이유가 충분한 심리학의 한 실험에서, 브루너(Bruner)와 포스트먼(Postman)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트럼프 한 벌을 잠시 조정해서 보여 주고 가려내게 했다. 예컨대 스페이드의 6을 빨강으로, 하트의 4를 검정색으로 만들었다. 한 차례 실험은 한 사람에게 카드 한 장씩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점차로 횟수를 늘려 보여 주었다. 매번 패를 보여 줄 때마다 실험 대상자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고, 연달아 두 번을 옳게 맞추는 경우 한 차례가 종료되는 식이었다.12)
아주 잠깐 보는 것으로도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은 거의 모든 카드를 알아보았고, 좀더 늘린 결과 피실험자들은 카드에 대해서는 보통 옳게 맞추었으나, 이상한 카드는 거의 예외없이, 외관적인 망설임이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정상적인 카드에 대해서는 보통 옳게 맞추었으나, 이상한 카드는 거의 예외없이, 외관적인 망설임이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정상적인 카드로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하트 검정색4는 스페이드4 또는 하트4라고 대답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것은 기존의 경험이 마련해 준 개념적 범주 중 하나에 즉각적으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피실험자들은 자기들이 대답했던 것과는 다른 카드를 보았다고는 아무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상스런 카드를 점점 자주 보여줌에 따라, 피실험자는 망설이기 시작했고 이상의 감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빨강 스페이드6을 여러 번 보여 주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이었다. "그건 스페이드6인데,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걸, 검정색에 붉은 테두리가 둘렸나." 더 주주 봉 주는 것은 보다 오랜 망설임과 혼돈을 초래하다가 드디어 어느 시점에서, 때로는 아주 갑자기, 대부분의 피실험자가 망설이지 않고 제대로 맞추게 되었다. 더욱이 이상스런 카드를 두세 개 써서 이런 시험을 한 후에는, 그들은 다른 이상한 카드에 대해 더 이상 별로 어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그들 범주에 제대로 적응해 내지를 못했다. 정상 카드를 옳게 알아맞출 수 있는데 필요했던 평균치보다 40배나 더 카드를 접하면서도, 이상한 카드의 10% 이상이 제대로 맞춰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은 상당히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나는 도대체 짝패를 맞출 수가 없는 걸. 그건 그때 카드처럼 보이지도 않았어. 이제는 그것이 무슨 색깔인지 또는 스페이드인지 하트인지도 모르겠는 걸. 나는 지금 스페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얼떨떨하다. 맙소사!"13) 다음 절에서 우리는 과학자들 역시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하나의 은유로서 또는 그것이 정신의 본질을 반영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러한 심리학의 실험은 과학적 발견의 과정에 대해 신통하리만큼 단순하고 수긍이 가는 도식적 설명을 제공한다. 트럼프 실험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는 신기한 새로움은 예측되었던 바에 거스르는 저항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는 난관을 뚫고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 후에는 이상현상이 관찰되도록 마련된 상황일지라도, 초기에는 예상되고 통상적인 것만이 경험된다. 그러나 더 깊게 인식하게 되면 무언가 잘못이란 것을 깨닫게 되거나 또는 이전에는 잘못되었던 그 무엇에 그 결과를 연관시키기에 이른다. 이상의 이러한 인지는 개념적 범주가 조정되는 시기의 막을 열게 되며, 드디어 당초에는 이상하던 것이 결국 예측되는 것으로 바뀌기에 이른다. 그 시점에서 그 발견은 완료되는 것이다. 앞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그런 과정 또는 그와 매우 비슷한 과정은, 과학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이 출현하는 경우라면 어디에나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 과정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정상과학이 새로움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 그런 것을 억제하는 경향을 띤 탐구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렇게 효과적인가를 보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과학의 발달에서나 최초의 수용된 패러다임은 보통 그 과학의 종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관찰과 실험의 대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듯이 느껴지게 된다. 따라서 더욱 발달됨에 따라 정교한 장치의 제작, 심오한 의미의 어휘와 기술의 개발, 그리고 상식에 대한 일치성이 점점 감소되는 개념들의 정련이 요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전문화는, 한편으로는 과학자의 시야를 크게 제한시키며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상당한 저항으로 작용한다. 과학은 점점 경직되어 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이 그룹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그런 분양에서는 정상과학은 정보의 세부화로 유도하며, 다른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관찰__이론 일치(observation-theory match)의 정확성으로 유도한다. 더구나 그런 상세함과 일의 정확성(precision-of-match)은 항상 대단히 높지는 않은 그들의 본유적 관심을 능가하는 가치를 지니다. 예측되는 기능을 위주로 제작된 특수 장치가 없었더라면, 궁극적으로 새로움으로 이끈 결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치가 갖추어진 경우라도,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anomaly)은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배경에서만 나타난다. 패러다임이 정확하고 영향력이 클수록 그것은 이상 현상에 대하여, 따라서 패러다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보다 예민한 지표를 제공한다. 정상적인 발견의 양식에서는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저항조차도 유용성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더 자세히 살피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이 맥없이 함락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함에 의해서, 저항은 과학자들이 어이없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확고히 하고, 패러다임 변화로 이끄는 이상들이 기종 지식의 핵심으로까지 침투하는 것을 보증한다. 과학에서의 유의미한 새로운 발견이 흔히 여러 실험실에서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로 정상과학의 강렬한 전통적 성격과 그런 관례적 탐구로 그 자체의 변화에의 길을 마련하는 온전성 모두에 대한 지표가 된다. @ff
"주"
1) 산소의 발견에 대한 고전적 논의에 관해서는, A.N.Meldrum, The Eighteenth-Century Revolution in Science-the first Phase(Calcutta, 1930), 5장을 보라. 우선권 논쟁의 설명을 비롯, 최근에 씌어진 필독의 총설은 Maurice Daumas, Lavoiser, th oricien et exp rimentateur(Paris, 1995), 2__3장이다. 보다 충분한 설명과 관계 서적 목록에 대해서는 T.S.Kuhn, "The Historical Structure of scientific Discovery", Science, CXXXVI(June 1, 1962), pp.760__64를 보라.
2) 그러나 Scheele의 역할에 대한 이와는 다른 평가에 대해서는 Uno Bocklund, "A Lost Letter from Scheele to Lavoisier", Lychnos, 1957__58, pp.39__62를 보라.
3) J.B.Conant, The Overthrow of the Phlogiston Theory:The Chemical Revolution of 1775__89("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Case 2:Cambridge, Mass, 1950), p.23. 이 매우 유용한 팜플릿은 관련되는 증거 논문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4) H.Metzger, La Philosophie de la mati re chez Lavoisier(Paris, 1935);Daumas, op.cit., chap. vii 5) 라부아지에가 의구심을 갖게 된 근원에 대해서는 다음 책에 가장 권위있는 설명이 실려 있다.Henry Guerlac, Lavoisier-the Crucial Year:The Back-ground and Origin of His First Experiments Combustion in 1772(Ithaca, N.Y., 1961).
7) E.T.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2ded.;London, 1951), 358, n.1.George Thomson 경은 비슷하게 적중한 또 하나의 연구자에 대해서 내게 알려 주었다. 설명한 도리가 없이 흐려진 사진 감광판을 보고 놀라며, William Crookes경도 역시 그 발견 길에 올라 있었다.
8) Silvanus P.Thompson, The Life of Sir William Thomson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II, 1125. 9) Conant, op.cit., pp.18__20 10) K.K.Darrow, "Nuclear Fission", Bell System Technical journal, XIX (1940), 267__89.주요 분열 생성물 두 가지 중 하나인 크립톤은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기까지는 화학적 방법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생성물인 바륨은 이 연구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화학적으로 거의 확인되었는데, 그 까닭은 핵 화학자들이 찾고 있었던 무거운 원소를 침전시키기 위해서 방사성 용액에 그 원소를 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넣어 준 바륨을 방사성의 생성물로부터 분리하는 데 실패한 것은, 반응이 거듭 연구된 지 거의 5년이 경과한 뒤에야 다음 보고서를 낳게 만들었다: "화학자로서 우리는 이 연구 결과에 바탕하여... 앞의 [반응]도표에서 모든 이름을 바꾸어 Ra, Ac, Th 대신에 Ba, La, Ce으로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자핵 화학자'로서 물리학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우리는 원자핵 물리학의 모든 기존 경험에 모순되는 이런 비약을 용납할 수가 없다. 이상스런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의 결과를 믿을 수 없게 하는지도 모른다." [Otto Hahn and Fritz Strassman, "Uber den Nachweis und das Verhalten der bei der Bestrahlung des Urans Mittels Neutronen ntstehended Erdalkalimetalle", Die Natrurwissenschaften, XXXII(1939), 15].
11) 라이덴 병의 출현에서의 여러 단계에 대해서는 I.B Cohen, Franklin and Newton: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of(Philadelphia, 1956), pp.50__52에 설명되어 있다.
12) J.S.Bruner and Leo Postman, "On the Perception of Incongruilty:A Paradigm", Journal of Personality, XXIII(1949), 206__23.
13) Ibid., p.218.나의 동료인 Postman은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미리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카드를 보는 것이 아주 이상야릇했다고 말한다. @ff
VII.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Crisis and the Emergence of Scientific Theories
VI절에서 살펴본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 변화의 원인이거나 또는 기여 요소였다. 더욱이 그 발견들이 암묵적으로 그 속에 내포되었던 변화들은 모두 건설적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것이기도 했다. 발견이 동화된 이후, 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의 보다 넓은 영역에 관해 설명할 수 있었거나 또는 이미 알려진 현상들의 일부에 관해 보 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은 기존의 표준 이념이나 방법을 더러는 포기하거나, 동시에 이전 패러다임의 그런 구성 요소들을 다른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성취되었다. 나는 이런 유형의 변천은 정상과학을 통해 성취된 모든 발견과 연관된다고 주장했다. 단 하나 예외는, 세부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측되었던 놀라울 것 없는 발견들이다. 그러나 발견이 그러한 파괴적__건설적 패러다임 변화의 유일한 원천인 것은 아니다. 이 절에서 우리는 그와 비슷하면서 그러나 통상적으로 훨씬 대폭적인 새로운 이론들의 창안으로부터 비롯되는 변동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미 앞에서 과학에서의 사실과 이론, 발견돼 발명은 범주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님을 논의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절과 앞절의 내용이 중복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프리스틀리가 처음에 산소를 발견하고, 라부아지에가 그 다음에 그것을 발명했다는 어이없는 발상은 나름대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산소는 이미 발견으로서 다루었던 주제이다. 우리는 이제 곧 발명으로서 산소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이론의 출현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발견에 대한 이해까지도 확장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복된다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앞절에서 다룬 발견들의 유형은, 적어도 단독으로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뉴턴혁명, 화학혁명, 그리고 아인슈타인 혁명에 버금가는 패러다임 변천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문성이 보다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빛의 파동 이론, 열의 역학이론, 또는 맥스웰의 전자기론에 의해 야기된 다소 소폭적인 패러다임에서의 변화들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이론들이 발견의 추구보다 오히려 그것들의 추구를 덜 지향하는 활동인 정상과학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가?
이상(anomaly)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종류의 현상의 출현에 한몫을 한다면, 그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심오한 인식이 수긍할 만한 이론의 변화 모두에 선수 조건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점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재론의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상황은 코페르니쿠스의 선언 이전에 하나의 스캔들이었다.1) 운동 연구에서의 갈릴레오의 공헌은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비판에서 나타난 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2) 뉴턴의 빛과 색깔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패러다임__이전 이론들 중 그 어느 것도 스펙트럼의 길이를 설명하지 못했음을 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뉴턴의 이론을 대치한 파동 이론은 회절(diffraction)과 편광(polarization)효과를 뉴턴 이론에 관련지으면서 이상 현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표되었다.3) 열역학은 19세기의 두 기존 물리과학 이론의 충돌로부터 탄생하게 되었고, 양자 역학은 흑체 복사 (black-body radiation), 비열(specific heats) 그리고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둘러싼 갖가지 난제들로부터 탄생되었다.4) 더욱이 뉴턴 이론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이상 현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깊숙이 침투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분야들은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태라 묘사하는 것이 어울리는 상황이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패러다임 파괴와 정상과학의 문제 및 기술(techniques)에서의 주요변동을 요구하는 까닭에,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은 대체로 전문분야의 불안정함이 현저해지는 선행 시기를 거치게 된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그런 불안정함은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좀처럼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데서 발생된다. 그리고 기존 규칙의 실패는 새로운 규칙에의 탐사를 향한 전조가 된다.
우선 패러다임 변화에서 특히 유명한 경우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탄생을 살펴보자 그 전구체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가 최초로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 걸쳐 전개되었을 때, 그것은 항성과 행성의 변화하는 위치를 예측하는 데 신통하리만치 성공적이었다. 고대의 체계로서 그렇게 잘 맞는 다른 이론은 없었다. 항성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오늘날까지도 공학의 근사법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행성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은 코페르니쿠스의 것만큼 잘 맞았다. 그러나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서, 놀랄 만큼 잘 맞는다는 것이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행성의 위치와 세차운동(precession of the equinoxes) 두 가지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근거한 예측치는 당시에 얻어진 가장 훌륭한 관측과는 잘 들어맞지 않았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를 좀더 줄여 보자는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들이 수행한 정상 천문학 연구의 주요 과제로 등장하였고, 그런 양상은 천상 세계의 관측(celestial observation)과 뉴턴 이론을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뉴턴의 18세기 계승자들에게 정규적인 연구 주제들을 제공했던 것과 흡사했다. 얼마 동안은 천문학자들에게 이러한 시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 유도했던 과거의 시도들 못지 않게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어느 특정한 모순이 드러나면, 천문학자들은 조합된 원들로 이루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일부 특수 조정을 가함으로써 거침없이 모순점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다수 천문학의 복잡성이 그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증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곳에서 보정된 모순이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가 예사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5)
천문학적 전통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으며, 인쇄술이 없는 상황에서 천문학자들 사이의 견해 교류가 한정되었었기 때문에 이들 어려움은 매우 느리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는 깨닫게 되었다. 13세기 무렵 알폰소10세(Alfonso X)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그에게 의논했었더라면, 신은 훌륭한 충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6세기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공동 연구자인 노바라(Domenico da Novara)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이 전개되었던 바와 같은 엉성하고 부정확한 체계가 자연에 대한 지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의 서문에서 그가 계승한 천문학 전통은 결국 괴물을 창조했을 따름이라고 적었다. 16세기 초엽에는 유럽의 최고 천문학자들 중 차츰 더 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의 패러다임을 그 고유의 전통적 문제에 적용함에 있어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음을 깨닫고 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식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시작하는 데 요구되었던 선행 조건이었다. 그의 유명한 서문은 아직까지도 위기 상황에 관한 고전적 서술의 하나가 되고 있다.6)
물론 정상적인 기술상의 수수께끼__풀이 활동의 붕괴가 코페르니쿠스가 부닥친 천문학상 위기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이에 관한 논의를 확장시키면 달력 개혁에 대한 사회적 압력, 즉 세차 운동이라는 수수께기를 특히 시급한 문제로 몰고 갔던 압력요인 역시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다 완전한 설명을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중세의 비판, 르네상스기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융성, 그리고 여타의 유의미한 역사적 요소들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상의 붕괴가 여전히 위기의 핵심으로 자리할 것이다. 성숙한 과학(mature science)__천문학은 이미 고대로부터 그런 과학이 되었다.__에서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외부적 요인들은 붕괴의 시기, 붕괴가 인지될 수 있는 용이도, 그리고 특별한 관심을 끎으로 해서 붕괴가 최초로 발생하는 영역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유형의 주제는 이 에세이에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경우에는 이런 점들이 분명하다면, 이제 방향을 돌려 두 번째 비교적 다른 사례, 즉 연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의 탄생에 선행했던 위기(crisis)에 관해 살펴보자. 1770년대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화학에서의 위기가 발생했고, 과학사학자들은 그런 요인들의 본질이라든가 상대적 중요성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 두 가지는 일반적으로 일급의 중요성을 띤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기체 화학(pneumatic chemistry)의 융성과 질량 관계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었다. 기체 화학의 역사는 17세기 공기 펌프의 개발 그리고 화학 실험법에서의 그 배치와 더불어 시작된다. 18세기 동안 공기 펌프와 여러 가지 기력장치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화학자들은 공기가 화학반응에서의 활성 성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들__너무 애매해서 도대체 예외가 아닐는지도 모르는__을 제외하고 화학자들은 공기가 유일한 종류의 기체라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 1756년에 이르러 블랙(Joseph Black)이 고정된 공기(fixed air:이산화탄소)는 언제나 보통 공기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 두 가지 기체 시료는 오직 그 불순물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7)
블랙의 연구 이후, 기체에 관한 연구는 가장 뚜렷하게 카벤디쉬(Cavendish), 프리스틀리(Priestley), 셀레(Scheele)의 손에 급진전을 이루었던 바, 이들은 모두 기체의 시료들을 하나하나 구별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전개시켰다. 블랙으로부터 셀레에 이르는 이들 학자들은 모두 플로지스톤 이론(Phlogiston theory)을 신봉하였고, 그들의 실험 장치와 결과 해석에서 자주 그것을 적용하였다. 셀레는 실제로 열로부터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도록 고안된 일련의 정교한 실험을 통해 산소를 얻어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는 매우 까다로운 각양각색의 기체 시료와 기체 성질이었던 까닭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실험실 작업으로는 풀어 볼 가능성이 차츰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화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플로지스톤 이론이 대치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학자들은 그 이론을 일관성 있게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1770년대 초 라부아지에가 공기에 대한 실험을 시작할 무렵까지는 기체 화학자 수효만큼이나 플로지스톤 이론의 수정안도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8) 어느 이론에 있어서 이처럼 수정안이 무성하게 되는 것은 위기 상태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로 그의 서언에서 그것에 관해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체 화학에 대한 플로지스톤 이론의 점증하는 모호성과 감소되는 효용성이 라부아지에를 가로막았던 위기의 유일한 근원은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물체를 태우거나 구울 때 나타나는 무게의 증가에 관해 설명하는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으며, 이것 역시 전부터 오랜 역사를 지닌 문제였다. 적어도 이슬람의 몇몇 화학자들은 어떤 금속은 가열될 때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몇몇 연구자들은 바로 이 사실로부터 연소된 금속은 대기로부터 어떤 성분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17세기에의 그러한 결론은 대부분의 화학자들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화학 반응이 모름지기 성분들의 부피 색깔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화학 반응에서 무게만 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무게는 항상 물질의 양의 척도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소에 따르는 무게 증가는 별개의 현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자연적인 물체(예컨대 나무)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후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대부분 태울 때 그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18세기를 거치면서, 무게__증가(weight-gain)의 문제에 대한 이러한 초기의 반응은 차츰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어 갔다. 더러는 천평이 표준적 화학 기구로 많이 쓰이게 되었던 때문이었고, 더러는 기체 화학의 발달로 인해 반응의 기체 생성물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화학자들은 연소에 의해 무게__증가가 일어나는 경우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동시에 뉴턴의 중력 이론에의 점진적인 동화는 화학자들로 하여금 무게__증가가 물질의 양에서의 증가를 의미함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결론들이 플로지스톤 이론의 포기를 초래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정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플로지스톤은 마이너스의 무게를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또는 플로지스톤이 물체로부터 이탈할 때 불의 입자(fire particles) 또는 다른 무엇이 그 연소하는 물체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외에도 갖가지 설명들이 등장했다. 무게__증가의 문제가 플로지스톤 이론의 폐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이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수 연구의 수효를 점점 늘어나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로서, "무게를 지닌 실체로 간주되고, 그것이 결합하는 물체에서 일으키는 무게 변화에 의해서 [분석되는] 플로지스톤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1772년 초에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1772년은 바로 아케데미 원장에게 라부아지에가 그의 유명한 봉인된 노트를 전했던 해였다. 그 노트가 쓰여지기 이전에 다년간 화학자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던 하나의 문제가 두드러진 미해결의 수수께끼로 부각되었다.9) 플로지스톤 이론은 그 문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고 있었다. 기체 화학에서의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무게__증가의 문제들도 플로지스톤 이론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잘 들어맞는 도구라 믿겨졌고 존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화학의 패러다임은 점차 그 독보적 지위를 점진적으로 상실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 패러다임이 주도한 연구는 차츰 패러다임__이전 시대에 여러 학파들의 각축아래 수행되던 연구를 방불케 했는데, 이런 현상은 위기의 또 다른 전형적 광경이다.
이제 세 번째 마지막 실례로서, 상대성 이론(relativity theory)의 탄생으로의 길을 열어 주었던 물리학에서의 19세기 말의 위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위기의 뿌리 하나는 17세기 말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시절 다수의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들은, 그들 중에서도 라이프티츠(Leibniz)가 가장 심하게, 절대 공간의 고전적 개념을 새롭게 수정해서 고수하는 것에 대해 뉴턴을 비판하고 있었다.10) 그들은 아주 근사하게, 그렇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은 뉴턴의 체계에서는 전혀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간과 운동에 대한 완벽한 상대적 개념이 후에 전개될 상당히 심미적인 매력을 암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순전히 논리적인 것이었다. 지구의 부동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비판했던 초기의 코페르티쿠스 학파처럼, 이들 자연철학자들은 상대론적 체계로의 전환이 관측에서의 새로운 결과를 주리라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도 뉴턴 이론이 자연에 적용될 때 야기되었던 어떤 문제에도 그들의 견해를 관련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의 견해는 18세기 초 몇십 년 사이에 그들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그 후 19세기 말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의 실제에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때 비로소 부활되었던 것이다.
공간의 상대론적 철학이 궁극적으로 관계하게 되는 기술적 문제들은 1890년대까지 아무런 위기를 촉발시키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1815년 이후 빛의 파동 이론의 수영과 더불어 정상과학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만일 빛이 뉴턴 법칙의 지배를 받는 기계적 에테르(ehter)를 통해 전파되는 파동 운동이라면, 천상계의 관측과 지상계의 실험에서 양쪽 모두 에테르를 통한 흐름을 검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천체 관측에 대해서는 오직 광행차의 관찰만이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정확성을 기약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광행차 측정에 의한 에테르__흐름(ehter-drift)의 검출은 정상과학 연구에서의 인식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특수한 장치가 꾸며졌다. 그러나 그 장치로는 관찰에 잡힐 만한 흐름을 검출하지 못했으므로, 그 문제는 실험자들과 관찰자들로부터 이론학자들에게로 이전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반 수십 년 도안 프레넬(Fresnel), 스톡스(Stokes) 등의 여러 학자들은 흐름을 관찰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진 에테르 이론(ehter theory)에 대한 갖가지 명료화된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들 명료화들은, 각각 움직이는 물체는 그것과 함께 에테르의 얼마만큼을 끌고 간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제각기 천상계의 관측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마이클슨(Michelson)과 몰리(Morley)의 실험을 비롯한 지상의 실험에서도 흐름이 검출되지 못했던 결과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었다.11) 다양한 수정 이론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거기에는 아직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서로 관련되는 실험적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모순은 결코 예리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19세기 말의 20년 사이에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 의 점진적 수용과 더불어 바뀌게 되었다. 맥스웰 자신은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를(mechanical eht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던 뉴턴주의자였다. 전기와 자기(magnetism)의 이론에 관한 맥스웰의 가장 초기의 견해는 그가 이 매질에 부여한 가설적 성질을 직접 이용하였다. 그 견해들은 그의 최종 수정안으로부터 탈락되었으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전자기 이론이 뉴턴의 역학적 견해의 어떤 명료화와 양립된다고 믿고 있었다.12) 적절한 명료화를 전개시키는 작업은 그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실제에서 요구되는 명료화를 얻어내기가 엄청나게 힘든 것으로 밝혀졌다. 글쓴이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의 제안이 운동에 관한 기존 이론들에 대해 고조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듯이 맥스웰 이론도 뉴턴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파생되었던 패러다임을 향해 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13) 더욱이 위기가 가장 심각하게 고조되었던 초점은 우리가 방금 고려하고 있던 문제들, 즉 에테르에 대한 운동의 문제들에 집약되었다.
운동하는 물체의 전자기적 거동을 다룬 맥스웰의 논의에서 에테르 끌림(ether drag)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그의 이론 속에 이런 끌림을 도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에테르를 통한 흐름을 검출하기 위한 초기의 일련의 관찰들은 모두 이상 현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1890년 이후, 몇 해 동안 실험적, 이론적으로 에테르에 상대적인 움직임을 검출하고, 에테르 끌림을 맥스웰 이론에 도입하기 위해 길고 끈질긴 시도가 경주되었다. 몇몇 분석가들은 그들의 결과를 모호하다고 생각했으며, 흐름을 검출하는 실험의 경우도 한결같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맥스웰 이론과 에테르 끌림을 연결시키려는 이론학자들의 경우는 여러가지 고무적인 출발을 내디딤으로써 특히 로렌츠(Lorentz)와 피츠제럴드(Fitztgerald)의 연구가 두드러졌으나, 그들 역시 여전히 다른 부수적 현상인 것으로 발견했던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의 난립을 낳게 되었다.14) 아인슈인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1905년에 출현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 그 배경을 둔 것이었다.
이들 세 가지 실례는 거의 전적으로 전형적이다. 각 경우에서 새로운 이론은 정상적 문제__풀이 활동에서의 현저한 실패를 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했다. 더욱이 과학 외적 요인들이 특히 커다란 구실을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붕괴 및 그 징조가 되는 이론들의 양상은 새로운 이론 선언의 십년 또는 이 십년 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새로운 이론은 위기의 직접적 반응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다지 전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붕괴가 일어났던 문제들이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 인식되어 왔던 형태라는 점을 또한 주목하라. 정상과학의 이전의 수행은 그런 문제들이 풀렸거나 또는 거의 풀렸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주고도 남음이 있었고, 이것은 실패에 이르렀을 때 어째서 실패의 의미가 그렇게 심각한가를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다룰 때 실패하는 것은 흔히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라든가 수수께끼는 그 어느 것도 처음 공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실례들은 위기의 역할에 관한 사건을 인상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띤다. 이들 각각의 실례에 대한 해답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해당 과학에서 위기가 없었던 시기 동안 예측되고 있었던 대로였다. 그리고 위기를 느끼지 못하던 상황에서 그 예상들은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유일하고 완벽한 예상은 또한 가장 유명한 사례이기도 한데,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던 경우이다. 만약 그리스 과학이 보다 덜 연역적이고 독단에 위해 덜 지배되었더라면, 태양중심의 천문학(heliocentric astronomy)은 실제 일어났던 것보다 18세기쯤 앞당겨 전개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흔히 논의된다.15)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이다. 아리스탈쿠스의 제안이 이루어졌을 당시에는 압도적으로 더 합리적이었던 더 합리적이었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태양중심 체계가 혹시라도 만족시켰을지도 모를 부족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전반적인 전개, 즉 그것의 승리와 몰락은 둘 다 아리스탈쿠스의 주장이 있은 뒤 몇 세기가 지나서 일어난다. 게다가 아리스탈쿠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뚜렷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다 정교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조차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비해 더 단순하거나 더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로서 얻을 수 있었던 관측 시험은, 이제부터 더 확실히 보게 되겠지만, 그 두 이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만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천문학자들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로 유도한 요인(그리고 천문학자들은 아리스탈쿠스설로 유도할 수 없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당초 혁신을 일으키는 첫째 이유가 되었던 위기의식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천문학의 문제들을 푸는 데 실패했다. 시기가 무르익자 경쟁 이론에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다른 실례는 이와 유사한 완벽한 예상을 가능케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대기로부터의 흡수에 의한 연소의 이론들__17세기에 레이(Rey), 후크(Hooke), 메이요(Mayow)에 의해 진전된 이론들__이 충분히 관심을 끌지 못했던 한가지 이유는 정상과학의 실제에서 이미 인정된 논란점과의 접촉이 없었던 탓이었다.16) 그리고 18__19세기의 과학자들에 의한 뉴턴주의의 상대론적 비판에 대한 장기간의 무시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의 미숙함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과학자들(philosophers of science)은 어느 주어진 수집에 의해 언제나 하나 이상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음을 꾸준히 증명해 왔다. 과학의 역사는, 특히 새로운 패러다임__이전의 단계를 제외하고는 과학자들이 거의 수행하지 않는 작업이며, 하나의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도구들이 패러다임이 정의하는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증명되는 한, 과학은 최고의 속도로 활동하며 그들 도구들을 확신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가장 심도 있게 침투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생산 활동에서처럼 과학의 연장을 만드는 일(science-retooling)도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를 위해 준비되는 일종의 호사스러움이다. 위기들의 의미는 도구를 바꾸어야 할 계제에 도달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ff
"주"
1) A.R.Hall, The Scientific Revolution, 1500__1800(London, 1954), p.16. 2) Marshall Clagett, The Science of Mechanics in the Middle Ages(Madison, Wis., 1959), Parts II-III.A.Koyre는 그의 저서 Etudes Galieennes (Paris, 1939), 특히 I권에서 갈릴레오의 사상에서의 중세적인 요소를 여러가지 제시하고 있다.
3) 뉴턴에 대해서는 T.S Kuhn, "Newtons`s Optical Papers", Issac Newton`s Papers and Letters in Natural Philosophy, ed.I.B. Cohen (Cambridge, Mass., 1958), pp.27__45를 보라. 파동 이론의 서막에 대해서는 E.T.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xtricity, I(2d ed.;London, 1951), 94__109를 보라;W.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rev.ed.;London, 1847), II, 396__466.
4) 열역학에 대해서는, Silvanus P. Thompson, Life of William Thomson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I, 266__81을 보라. 양자 이론에 대해서는 Fritz Reiche, Theory, trans.H.S.Hatfield and H.L. Brose(London, 1922), chaps.i__ii을 보라. 5) J.L.E.Dreyer, A History of Axtornomy from Thales to Kelper(2d ed.; New York, 1953), chaps.xi-xii. 6) T.S.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Cambridge, Mass., 1957), pp.135__43. 7) J.R.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d ed.;London, 1951), pp.48__51, 73__85, 90__120. 8) 그들의 주된 관심은 약간 더 후기에 있긴 하지만, 많은 관련자료가 다음에 실려 있다;J.R.Partington and Douglas McKie, "Historical Studies on the Phlogiston Theory", Annals of Science, II(1937), 361__404;III(1938), 1__58, 337__71;IV(1937), 337__71. 9) H.Guerlac, Lvoisier-the Crucial Year (Ithaca, N.Y., 1961).이 책 전체가 위기의 출현과 최초의 인식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라부아지에에 관하여 상황을 명확하게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pp.35를 보라.
10) Max Jammer, Concepts of Space:The History of Theories of Space in Physics (Cambridge, Mass., 1954), pp114__24.
11) Joseph Larmor, Aether and Matter...INcluding a Discussion of the Influence of the Earth`s Motion on Optical Phenomena(Cambridge, 1900), pp.6__20, 320__22.
12) R.T. Glazebrook, James Clerk Maxwell and Modern Phyusics (London, 1896), chap.ix. 맥스웰의 최종 태도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A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3d ed.;Oxford, 1892), pp. 470 참조.
13) 역학의 진전에서의 천문학의 역할에 관해서는 Kuhn, op.cit., chap.vii를 보라. 14) Whittaker, oop.cit., I, 386__410;II(London, 1953), 27__40. 15) Aristarchus의 연구에 대해서는 T.L.Heath, Arixtarchus of Samos:The Ancient Copernicus(Oxford, 1913), PartII를 보라. Aristarchus의 업적을 무시해 버린 전통적 입장을 극단적으로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는, Arthur Koestler, The Sleepwalkers: A Hostory of Man`s Changing Vision of the Universe(London, 1959), pp.50을 보라. 16) Partington, op.cit., pp.78__85.
VIII. 위기에 대한 반응 The Response to Crisis
그러면 위기(crisis)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있어 필수적 선행조건이라 가정하고, 다음에는 과학자들이 위기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묻도록 하자. 그 대답의 일부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분명한 것으로서, 우선 과학자들이 심각하고 만연된 이상(anomaly) 현상에 부닥쳤을 때 결코 취하지 않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주목함으로써 찾아질 수 있다. 과학자들은 신념을 잃기 시작하고 이어서 다른 대안을 궁리하기 시작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그 패러다임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과학 철학적 어의상으로는 그 의미가 성립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 현상들을 반증 예(counterinstance)로 여기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이런 일반화는 단순히 앞에서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로부터 얻어지는 서술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패러다임의 포기에 관해 후에 검토할 내용이 보다 완전히 드러낼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지위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의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없는 것이 된다. 과학 발전에 관한 사적 고찰에 의해 드러난 과정은 그 어느 것도 자연과의 직접 비교에 의해 허위 증명을 하는 방법론적 틀을 닮은 적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과학자들이 이론을 폐기하는 과정에 그런 경험과 실험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__궁극적으로 핵심적인 요점이 될 것인데__과학자로 하여금 기존의 수용된 이론을 거부하도록 이끄는 판단의 행위가, 항상 그 이론과 세계와의 비교 이상의 것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며, 그 결정까지로 이끌어가는 판단은 패러다임과 자연의 비교 그리고 패러다임끼리의 비교 두 가지를 포함한다.
덧붙여, 과학자들이 이상 현상 또는 반대 예증에 부딪치는 까닭으로 인해 패러다임을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이 논의를 전개하면서 나의 논거는 그 자체로서 이 에세이의 다른 주요 주제들을 예시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의심의 이유들은 순전히 사실적인 것이다. 즉 그런 이유들은 그 자체가 일반적으로 믿겨지는 인식론에 대한 반증이다. 나의 이러한 관점이 옳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기껏해야 위기 형성을 조장하거나, 또는 보다 정확히 표현해서 이미 무르익은 위기를 심화시키게 될 따름이다. 그 자체로는 그것들은 그런 철학적 이론을 반증할 수도 없으며 반증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패러다임의 옹호자들은 이상에 부닥쳤을 때, 우리가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과학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양한 명료화를 궁리하고 분명히 드러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이론을 이모저모로(ad hoc) 수정할 것이다. 이에 관련되는 수정과 자격의 다수는 실상 이미 문헌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들 인식론적 반증이 사소한 자극 이상의 구실을 하게 되다면, 그 까닭은 더 이상 말썽거리가 아닌 범위 내에서 과학의 새롭고 색다른 분석이 출현하도록 그 반증들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과학혁명에서 나중에 관찰하게 될 전형적 양상이 여기에 적용된다면, 이들 이상 현상들은 더 이상 단순히 사실로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학 지식의 새로운 이론의 관점으로부터 그런 것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상황의 진술의 동어반복(tautology)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예컨대 뉴턴 운동의 제2법칙은, 그것을 얻기까지 수세기의 사실적, 이론적 연구의 험로를 거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관찰로도 결코 논박할 수 없는 순전히 논리적 진술처럼 작용하는 것으로 흔히 여겨져 왔던 것이다.1) X절에서 우리는 돌턴(Dalton) 이전에는 지극히 애매한 일반성의 실험 결과였던 화학의 정비례 법칙(chemical law of fixed proportion)이, 돌턴의 연구 이후로는 어떤 실험 연구에 의해서도 교란시킬 수 없는, 화합물의 정의에서의 필수 요소가 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상 현상이나 반증에 직면하게 될 때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일반화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고, 그래도 여전히 과학자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에 남길 리는 거의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위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과학을 포기하고 마는 일도 있었다.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의적인 과학자들은 뒤죽박죽된 세계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하는 경우가 꽤 있다-다른 책에서 나는 그 필요성을 가리켜 과학 연구에 내재된 "본질적 긴장(the essential tension)"이라 표현한 바 있다.2) 그러나 과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반증 사실들 그 자체가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패러다임 폐기인 것 같다. 그것을 통해서 자연을 해석하게 될 최초의 패러다임이 일단 발견되면, 아무런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는 연구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것을 대치하지 않은 채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파기하는 것은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동료들에게 '자기 연장을 탓하는 목수(the carpenter who blames his tools)'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는 적어도 똑같이 효과적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반증 사례들이 부재하는 연구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상과학을 위기에 처한 과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정상과학이 반증에 부닥치지 않기 때문임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앞에서 정상과학을 구성한 수수께끼라고 불렀던 것은 과학 연구의 기틀이 되는 어느 패러다임도 그 문제들을 모두 완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던 극소수(예컨대 기하광학)는 얼마 안 가서 완전히 연구 문제들의 산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신 공학 분야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렸다. 전적으로 기기에 의존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정상과학이 수수께끼라고 보는 문제는 어느 것이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반증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위기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다른 계승자들 대부분이 관찰과 이론 사이의 일치에서 수수께끼로 보았던 것들을 반증이라고 했으며,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 이론의 명료화에서 성공적으로 해결된 수수께끼로 생각했던 것을 반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로렌츠, 피츠제럴드 등이 뉴턴 이론과 맥스웰 이론의 명료화에서 수수께끼라고 보았던 것들을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위기의 존재조차도 그 자체가 수수께끼를 반증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위기의 존재조차도 그 자체가 수수께끼를 반증으로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선명한 분리선은 없다. 오히려 패러다임의 수정안이 분분해짐에 의해서 위기는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허용하게 되는 방식으로 정규 수수께끼-풀이의 규칙을 완화시킨다. 난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과학 이론도 반증에 맞닥뜨리지 않거나, 그런 과학 이론들 모두가 언제나 반증들에 직면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황이 달리 보여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철학의 역사적, 비판적 해명에까지 이르게 마련인데, 그러한 주제들은 여기서는 제외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어째서 진실과 허위성이 사실과 진술의 대결에 의해 특이하고 확연하게 결정된다는 일반화의 예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가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의 이유를 주목할 수 있다. 정상 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보다 가깝게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그런 활은 확증 또는 반증에 대한 시험이나 조사로써 쉽사리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바로 그 존재 때문에 패러다임의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다. 해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의 탓일 뿐이지 과학 이론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 한 수 위의 표현은 "자기 연장을 나무라는 사람은 변변치 못한 목수이다"라는 경구이다. 게다가 과학 교수법이 어느 이론의 논의와 그 실례 적용에 관한 언급을 서로 얽히게 하는 방식은, 주로 다른 자료로부터 끌어낸 확인-이론(confirmation-theory)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할 만한 티끌만큼의 이유라도 주어지면, 과학 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그 적용들을 그 이론에 대한 증거로서 쉽게 받아들인다. 즉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가의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을 수용한다. 학생들에게 달리 무슨 방법 또는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교과서에 주어진 적용 예들은 증거로서 거기에 실린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현재 활동의 기초에서 패러다임을 익히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린 것이다. 만일 적용 예제가 증거로서 서술된 것이라면, 과학자들이 패러다임 풀이를 얻는데 실패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과서가 다른 방식의 해석을 제한하거나 논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저자들을 극단적인 편견을 가진 것처럼 몰게 될 것이다. 그렇게 탓할 만한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면 이제 처음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과학자는 이론과 자연 사이의 일치에서 이상(anomaly)을 인지하게 될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가? 앞에서 방금 논의한 내용은 이론의 여러 적용 예에서 경험된 것에 비해 대단히 엄청난 차이가 나더라도 반드시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언제든지 어느 정도는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장 완강한 차이조차도 결국에는 정상 연구의 실제에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주 흔하게는 과학자들은 기꺼이 기다리려고 하는데, 특히 그 분야의 다른 영역에서 다룰 문제들이 많은 때 그러하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예컨대 뉴턴의 원래 계산 이후 60년 동안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점(perigee)의 운동 예측치는 관찰된 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유럽의 가장 뛰어난 수리 물리학자들(mathematical physicsts)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그 확연한 오차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뉴턴의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 law)의 수정에 관한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들 제안에 아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고, 실제로 주요 이상 현상에 대한 이런 인내는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1750년 크래로(Clairaut)는 적용에서의 수학만이 잘못되었을 뿐 뉴턴 이론은 여전히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3) 사소한 실수도 있을 법하지 않은 경우에서도 (아마도 그 이유는 관련된 수학이 보다 간단하거나 친숙한 것이고, 다른 데서는 잘 맞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대두되고 인지된 이상현상이 반드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뉴턴 이론으로부터의 예측과 소리의 속도 및 수성(Mercury) 운동의 두 가지 관측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 오랫동안 인식되었다는 이유로 뉴턴 이론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었던 사람은 없었다. 음속에 대한 차이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진 열에 관한 실험들에 의해 결국 예기치 않게 풀리게 되었다. 수성의 운동에 대한 불일치는 그 이론이 그 조성에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았던 위기 이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출현과 더불어 사라져 갔다.4) 둘 중 어느 것도 위기에 따른 불안정을 야기시킬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반증 예로서 인정될 수 있었고, 이후에 수행될 작업으로 여전히 미루어 둘 수 있었다.
만일 하나의 이상현상이 위기를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보통 단순한 변칙 이상의 것이라야 한다. 패러다임-자연의 일치(paradigm-nature fit)에는 항상 어디엔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흔히 미리 예상치 못했을 과정들에 의해 생겨나는 시간 문제일뿐, 곧바로 잡혀진다. 주목하는 이상 현상마다 검토하기 위해서 멈추는 과학자라면 일다운 일을 해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상 현상을 집중적으로 탐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는 완벽하게 일반성을 지니는 해답이 없는 것 같다. 앞에서 이미 검토했던 사례들은 특성적이기는 하나 처방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때때로 이상 현상은, 에테르-끌림의 문제가 맥스웰 이론을 수용했던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패러다임의 명시적이고 근본적인 일반화에 대해 문제삼게 될 것이다.5) 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처럼, 명백한 근본적 중요성이 없는 이상 현상이라도 그것이 방해하는 응용들이 특수한 실용적 중요성을 띠는 경우라면__여기서는 달력제작과 점성술에 대하여__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다. 또는 18세기 화학에서처럼 정상과학의 전개가, 이전에는 그저 말썽거리였던 이상 현상을 위기의 근원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무게 관계의 문제는 기체화학기술(pneumatic-chemical techniques)의 출현 이후에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 현상을 특별히 긴급한 문제로 만드는 상황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며, 보통 이들 가운데 여러 요인이 복합 될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컨대 코페르니쿠스를 가로막았던 위기의 하나의 원천은 천문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에 잔재한 불일치를 감소시키느라 헛수고로 일관했던 세월의 기간이었다.
이런 이유 또는 그 비슷한 여타의 이유로 해서, 하나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또 다른 수수께끼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되는 때, 위기로 그리고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으로의 전이는 시작된 것이다. 이상현상은 그 자체로서 이제 전문분야에 의해 점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그 분야의 가장 탁월한 많은 학자들이 그것에 차츰 더 많은 주의를 쏟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만일 그것이 그래도 풀리지 않는 경우, 학자들 다수가 그 풀이를 그들 연구 분야의 제1주제로 삼게 된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그 분야는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른 양상으로 보이는 것은 더러는 과학적 탐색에서의 새로운 정착점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변화의 원천은 그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가능케 되었던 다수의 부분적 풀이가 지닌 다양한 성격이다. 끈질기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초기의 공격은 매우 긴밀하게 패러다임 규칙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여전히 잘 풀리지 않음에 따라, 그것에 대한 공격은 점차 사소한 또는 그리 사소하지 않은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것들은 제각기 서로 달라서, 어떤 것은 일부 성공적일 것이나, 그 그룹에의해서 패러다임으로 수용될 만큼 만족스런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갈래의 명료화를 거치면서 '점점 자주 그런 것들은 되는 대로의(ad hoc)수정이라고 묘사되기에 이를 것이다',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증적으로 모호해진다.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실제로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합의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미 풀린 문제들의 표준 풀이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각한 경우, 그런 상황은 관련되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인식되는 때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이들(천문학상의) 연구에서 일관성이 도무지 없어서.... 공전 주기의 일정한 길이를 설명조차 할 수 없거나 또는 관찰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은 마치 한 화가가 다양한 모델로부터 멋대로 손, 발, 머리 등의 부위를 합쳐서 화상을 구성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각 부분으로서는 뛰어나게 잘 그렸으나 단일한 신체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각 부위가 서로 조화를 전혀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비교적 수수한 표현에 국한시켜, "그것은 마치 바닥이 그 밑바닥으로부터 거덜나서, 그 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확고한 기초가 아무것도 없는 격이다"라고만 적었다.6) 그리고 파울리(Wolfgang Pauli)는 행렬 역학(matrix mechanics)에 관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논문이 새로운 양자론(quantum theory)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기 몇 달 전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지금 현재 물리학은 다시 극심한 혼돈의 상태이다. 어떻든 간에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며, 차라리 희극배우나 그 비슷한 무엇이 되어 물리학에 대해서는 듣지도 않았더라면 싶다." 그 후 다섯 달도 채 못 되어 파울리가 한 말과 비교한다면, 이 증언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역학의 형태는 내게 다시금 생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분명히 그것은 수수께끼에 풀이를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나는 다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7)
붕괴를 그렇듯이 뚜렷하게 인지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지만, 위기의 결과들은 그것의 의식적인 깨달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 영향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 가운데 두 가지만이 보편적인 것 같다. 모든 위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그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해이해짐에 따라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기 기간의 연구는 패러다임-이전 시절의 연구와 매우 유사하게 되는데, 다만 위기의 연구에서는 견해 차이의 초점이 보다 적으며 보다 명확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위기는 세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 종결된다. 위기를 기존 패러다임의 종말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정상과학은 궁극적으로 위기를 야기시키는 문제를 다루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문제가 현저히 급진적인 새로운 접근에 대해서까지도 완강히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들은 그들 분야의 현상태로서는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딱지가 붙고, 보다 진보된 도구들을 지닌 미래 세대의 몫으로 밀쳐지게 된다. 또는 마지막 방식으로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경우로,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 출현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수용에 관해 잇따른 투쟁이 전개됨에 따랄 위기는 종말을 거둘 수 있다. 위기에 종지부를 찍는 이 세 번째 양식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를 것이나, 위기 상태의 진화와 구조에 관한 이 부분의 언급을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뒷절에서 논의될 내용의 편린을 예상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천이는 옛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에 의해서 성취되는 과정, 즉 축적적 과정(cumulative process)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천이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으로부터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그 분야 패러다임의 많은 방법과 응용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게 되는 재건 사업이다. 그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크게 중복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의 양식에도 역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길 것이다. 그런 천이가 완결되는 때, 그 전문 분야는 그 영역에 대한 견해, 방법, 목적을 바꾸게 될 것이다. 통찰력 깊은 어느 과학사학자는 최근 패러다임 변화에 의한 과학의 재편성에서의 고전적 사례를 고찰하면서, 그런 천이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바 있다.8) 과학적 진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다른 이들은 그런 천이가 시각적 게슈탈트(visual gestalt)에서의 변화와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의 새로 보였던 종이 위의 표시가 이제는 영양으로 보인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9) 그런 비유 관계는 자칫 잘못 이해되기 쉽다. 과학자들은 어떤 사물을 다른 그 무엇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그것을 볼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들을 몇몇 검토했던 바 있다. 게가 과학자는 보는 방식에서 앞뒤로 오락가락하는 게슈탈트(gestalt) 피실험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슈탈트 전환은, 특히 요즈음에는 매우 친숙한 까닭에, 전면적인 패러다임 변동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유용한 기본 원형이 된다.
앞서의 예상은 위기를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에 대한 적절한 전주곡으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특히 이미 발견의 출현에 관한 논의에서 바로 그 동일한 과정의 소규모 수정을 검토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출현은 과학 활동에서의 어느 전통과의 관계를 깨고 전혀 다른 규칙하에서 그리고 전혀 다른 대화의 세계속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전통을 도입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위기는 최초의 전통이 형편없이 어긋나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에 한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표식은 위기 상태의 고찰에 대한 서막 이상은 되지 않으며, 불행히도 그것이 유도하는 질문은 과학사학자의 능력보다도 오히려 심리학자의 재능을 요구한다. 비상적 연구(extraordinary research)란 대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서 이상은 법칙처럼 만들어지는가? 과학자들의 기존 훈련으로는 다룰 재간이 없는 수준에서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만을 깨닫게 되는 때 과학자들은 어떻게 연구를 속행하는가? 이러한 질문들보다 심층적인 고찰을 필요로 하는데, 모두 역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전에 지나간 것에 비해 반드시 더 잠정적이고 덜 완벽한 것이다.
위기가 많이 진전되기 전이나 또는 뚜렷하게 인식되기 이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은, 적어도 발달이 덜 된 상태로는,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많다. 라부아지에의 연구는 이 점에서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의 봉인된 비망록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기탁된 것은 프롤지스톤 이론에서 무게 관계의 고찰이 처음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진 지 1년도 못 되어서였고, 또한 프리스틀리의 논문 출간으로 기체화학(pneumatic chemistry)에서의 위기가 완전히 드러나기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서, 빛의 파동 이론(wave theory)에 대한 영(Thomas Young)의 최초의 설명은 광학(optics)에서 전개 중이던 위기의 맨 처음 단계에서 나타났던 바, 그것은 영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어, 그가 최초로 논문을 발표한 때로부터 10년 내에 국제적인 과학 사건으로 번졌던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을 위기였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 우리는 패러다임의 사소한 붕괴 그리고 정상과학에 대한 패러다임 규칙의 최초 무기력화는 과학자로 하여금 그 분야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말썽거리에 대한 최초의 감지와 가능한 대안에 대한 인식 사이에 개재된 것은 주로 무의식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__이를테면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 그리고 현대의 원자 이론 등__에서는 패러다임 붕괴에 대한 최초의 인식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벌어진다. 그런 것이 일어날 때, 과학사학자는 비상 과학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 적어도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론에서의 뚜렷한 근본적 이상현상에 부닥치게 되면, 과학자는 흔히 우선 그것을 보다 정확하게 분리시켜 그것에 구조를 부여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이제 그것들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어려움에 처한 영역의 어디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것들이 적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정상과학의 규칙들을 종전보다 더 강력하게 구사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과학자는 붕괴를 확대시키는 길,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실험들에서 드러난 것보다 한층 극적이고 또한 보다 시사적인 위기로 만드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도 속에서, 과학의 패러다임-이후 발전의 어느 다른 단계에서보다도, 그런 길을 찾는 그는 과학자 중의 가장 과학자다운 이미지로 비쳐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흔히 아무것이나 무작위로 추구하며, 단지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기 위해 실험을 하며, 본질을 제대로 추론할 수도 없는 결과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비쳐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떤 실험도 이론을 갖는 모종의 유형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므로, 위기에 처한 과학자는 끊임없이 추론적인 가설들을 내세우려고 애쓸 것이며, 성공적인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에 이르는 길을 열게 되고, 실패하는 경우 대수롭지 않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케플러가 화성의 운행에 대한 그의 다년간의 투쟁을 설명한 것, 그리고 프리스틀리가 새로운 기체들이 이것저것 나타난 데 대한 그의 반응을 묘사한 것은 이상현상을 인식함으로써 야기된, 보다 무작위적인 연구 형태의 고전적 실례를 보여 준다.10)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잘 들어맞는 설명은 장이론(field theory) 그리고 기본 입자(fundamental particles) 에 관한 현대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을 필요로 했던 위기가 없었더라면, 과연 중성미자(neutrino)를 검출하는 데 요구되었던 막심한 노력이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 또는, 만약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어느 드러나지 않은 시점에서 확실하게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균등 비보존(parity non-consrvation)의 극단적 가설이 제시되었거나 또는 시험되었을까? 과거 10년간 물리학에서 이루어진 그 밖의 많은 연구에서처럼, 이들 실험은 어느 면으로는 아직도 산만한 일련이 이상 현상들의 원천을 찾고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종류의 비상 연구는 통상적으로, 그렇다고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연구를 수반하게 된다. 나는, 특히 괄목할만한 위기 기간 중에는, 과학자들이 그들 분야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치로서 철학적 분석으로 전향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자일 필요도 없고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정상과학은 독창적 철학을 경원하는 경향이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정상과학 연구 활동이 패러다임을 모델로 삼아 수행될 수 있는 정도에서는 규칙과 가정은 명시적으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V절에서 철학적 분석에 의해 주목했던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들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도)에 대한 탐색이 정신 작용에 대한 전통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전통의 기반을 제시하는 효율적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7세기의 뉴턴 물리학의 출현 그리고 20세기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탄생은 둘 다 당대의 연구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분석의 뒤를 따랐고 또한 수반돼야 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11) 그리고 이들 두 시기에는 이른바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 연구의 진보에서 그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갈릴레오, 아인슈타인, 보어(Bohr) 등의 저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석적 사고 실험법(analytical thought experimentation)은, 위기의 뿌리를 실험실에서는 얻어질 수 없는 명징성을 지니면서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옛 패러다임을 기존 지식에 노출시키도록 완벽하게 계산된 것이다.12)
단독으로 또는 합동으로 이들 비상적과정들이 전개됨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일이 벌어진다. 문제가 생긴 좁은 영역에 과학적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그리고 과학 정신이 실험적 이상현상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도록 대비함으로써, 위기는 흔히 새로운 발견들을 양산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위기의 인식이 산소에 관한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프리스틀리의 연구로부터 어떻게 차이 나게 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산소는 화학자들의 이상 현상에 대한 인식이 프리틀리의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새로운 기체는 아니었다. 또한 새로운 광학적인 발견들이 빛이 파동 이론 출현 이전에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마구 쏟아져 나왔다. 반사에 의한 편광(polarization)처럼, 어떤 현상들은 문제가 생긴 영역에서의 집중적 연구가 빚어낸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였다(이 발제인 이중 굴절(double refraction)에 관한 과학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의 연구를 막 착수하고 있었다.) 다른 현상들은, 회전 디스크의 그림자 중심에 나타나는 밝은 점의 연구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변형하는 것을 도왔던 것이었다. 또 어떤 것들은, 긁힌 자국의 색깔과 두꺼운 판유리의 색깔처럼, 흔히 보아 왔고 전에도 가끔 언급되었던 효과들이었는데, 그 현상들은, 프리스방식으로 이미 잘 알려진 효과들에 동화되어 버렸다.13) 1895년경부터 양자 역학의 출현과 함께 일어났던 여러 가지 발견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비상 연구(extraordinary research)는 이 밖에도 다른 여러 형태와 영향을 나타냄에 틀림없으나, 이 방면에서 우리는 아직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질문들의 발견에서 첫 걸음도 못 디딘 정도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의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앞에서의 언급은 위기가 어떻게 상투적인 틀을 이완시킴과 동시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동에 필요한 증대분의 테이터를 제공하는 가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태는 비상연구가 이상 현상에 부여한 구조에서 그 징조를 드러내는 경우들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을 대치하는 어떤 것을 갖기 이전에, 자신은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 광전 효과(photoelectroc effect), 그리고 비열이라는(specific heats)이라는 이미 알려진 이상 현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볼 수 있었다고 적었다.14) 그러한 구조는 의식적으로 미리 예시되지 않는 일이 더 흔하다.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이후의 명료화를 허용하는 충분한 암시는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때로는 한밤중에, 위기에 깊숙이 잠겨 버린 사람의 정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최종 단계의 성격이 무엇인가는__어느 개인이 현재로서 모두 갖춰진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 고안하는가(또는 자기가 그것을 고안했다는 것을 발견하는가)는__여기서 불가해의 문제로 남게 되며, 또 영원히 그렇게 남을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 가지만 살펴보자. 거의 예외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러한 근본적 창출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아주 젊다든가 아니면 그들이 변형시키는 패러다임의 분야에 아주 새롭게 접한 사람들이다.15) 그리고 아마도 그런 점은 명시적으로 밝혀야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이유는 확실히 이들은 이전의 활동들 때문에 정상과학의 전통적 규칙에 매이는 일은 거의 없고, 특히 이전의 규칙들이 해 볼 만한 게임을 더 이상 정의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대치할 다른 규칙들에 착상하기가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고학혁명으로서, 이제 드디어 우리가 곧바로 접근하도록 준비가 갖추어진 주제이다. 그러나 우선 바로 앞의 세 절의 내용이 그 길을 마련해 준, 겉보기에 포착하기 어려운 한 가지 마지막 성격에 주목하라. 이상(anomaly)의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VI절까지는 '혁명(revolution)'과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란 용어는 동격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몇몇 독자들에게는 미심쩍어 보였을 순환성으로서, 그 중 어느 용어도 '비정상 과학(non-normal science)' 이상의 것을 뜻하지 않은 듯이 보였을 것이다. 실상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그와 유사한 순환성으로서, 그 중 어느 용어도 '비정상과학' 이상의 것을 뜻하지 않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실상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그와 유사한 순환성이 과학 이론들의 특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께름칙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런 순환성은 이제 더 이상 부당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이 절과 앞의 두 절에서는 정상과학 활동의 붕괴에서의 다수의 한계 기준을 끌어냈는데, 그 기준은 붕괴 이후에 혁명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상 현상이나 위기에 직면하는 경우, 과학자들은 현존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면, 그들 연구의 성격도 그에 따라 바뀌게 된다. 경쟁적인 명료화의 남발, 무엇이든 해 보려는 의지, 명백한 불만의 표현, 철학에의 의존과 기본 요소에 관한 논쟁, 이 모든 것들은 정상 연구로부터 비상 연구로 옮아가는 증세들이다. 정상과학의 개념이 의존하는 것은 혁명의 존재라기보다는 이들 증상의 존재이다.
@ff "주"
1) 특히 N.R. Hanson, Patterns of Discovery (Cambridge, 1958), pp.99-105를 보라. 2) T.S. Kuhn, "The Essential Tension: Tradition and Innovation in Scientific Research", The Third (1959) University of Utah Research Conference on the Identification of Creative Scientific Talent, ed. Calvin W. Taylor(Salt Lake City,1959), pp. 162-77.예술가들 사이에서의 비교할 만한 현상에 관해서는, Frank Barron, "The Psychology of Imagination", Scientific American, CXCIX(September,1958), 151-66, 특히 p.160 참조. 3) W. 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rev. ed. ; London, 1847), II, 220-21. 4) 음속에 관해서는 T.S. Kuhn. "The Caloric Theory of Adiabatic Compression", Isis, XLIV(1958), 136-137 참조. 수성의 근일점 (Mercury`s perihelion)의 변동에 대해서는 E.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I, (London 1953), 151, 179 참조. 5) T.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Cambridge, Mass., 1957), p. 138에서 인용. 6) Albert Einstein, "Autobiographical Note",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P.A Schilpp(Evanston, III.,1949),p.45. 7) Ralph Kronig, "The Turning Point", in Theoretical Physics in the Twentieth Century: A Memorial Volume to Wolfgang Pauli, ed. M. Fierz and V. F.Weisskopf(New York, 1960), pp.22, 25-26. 이 논문의 많은 대부분이 1925 년 직전 몇 해 동안의 양자 역학의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8) Herbert Butterfield,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m, 1300-1800(London, 1949), pp.1-7 9) Hanson, op. cit, chap. i. 10) 화성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를 설명한 것은, J.L.E. Dreyer, A History of Astronomy from Thales to Kepler(2d ed.; New York, 1953), pp.380-93.Dreyer의 요약에는 간혹 정확하지 못한 데가 있으나 여기서 필요한 자료로는 손색이 없다. 프리스틀리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저서, 특히 E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London,1774-75)를 보라. 11) 17세기 역학에 수반되었던 철학적인 대응 관계에 관해서는 Rene Dugas, La mecanique au XVII siecle(Neuchatel,1054), 특히 xi장 참조. 이와 비슷한 19세기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같은 저자의 앞선 연구인 Histoire de la mecnaique(Neuchatel, 1950),pp. 419-43을 보라. 12) T.S. 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nges Alexandre Koyre, ed.R. Taton and I. B. Cohen, 1963, Hermann(Paris). 13) 새로운 광학적 발견 일반에 대하여는 V.Ronchi, Historie de la lumiere( Paris,1956), chap. vii을 보라. 이러한 영향 가운데 하나에 대한 초기의 설명은 J.Priestley,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London, 1772), pp.498-520을 보라. 14) Einstein, loc. cit. 15) 근본적인 과학적 연구에서의 젊은 과학자들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일반론은 cliche라 할만큼 흔한 얘기이다. 더구나 과학 이론에 미친 근본적인 공헌들을 기록한 어떤 리스트를 한번 훑어보아도 인상 깊게 확인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일반화는 반드시 체계적인 고찰을 필요로 한다. Harvey C.Lehman(Age and Achievement [Princeton, 1953])은 유용한 데이터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서는 근본적인 제개념화를 포함하는 공헌들을 따로 추려 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연구는 과학에서의 비교적 늦게 나타난 생산성에 수반될 수 있는 특수 상황들__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__에 대해서도 고찰하지 않았다. @ff
IX.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The Nature and Necessity of Scientific Revolutions
이렇게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 에세이에 제목을 부여한 그 문제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혁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에 다룬 절들에서 상당부분 예측되어 왔다. 특히 바로 앞절의 논의에 따르면 여기서 과학혁명이란, 보다 옛 패러다임이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서로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 대치되는 비축적적(non-cumulative)인 발전에서의 에피소드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외에 말해야 할 것이 더 있는데, 그 본질적 요소는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잡힐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째서 혁명이라 불리어야 하는가? 정치적 발전과 과학의 발전 사이에는 엄청난 본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유비 관계가 양쪽에서 혁명을 발견하는 은유(metaphor)를 정당화시키는가?
그러한 유사 관계의 한 측면은 앞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뚜렷해졌음에 틀림없다.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적 조건이다. 더욱이, 분명 그 은유를 제약하기는 하지만, 그런 유비 관계는 코페르니쿠스와 라부아지에의 경우와 같은 주요 패러다임 변화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산소나 X선처럼 새로운 현상의 동화와 연관된 국부적인 패러다임 변화에서도 역시 성립된다. 과학혁명은, V절 끝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들의 패러다임이 그 혁명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혁명 같아 보이면 된다. 그 밖의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초의 발칸 혁명과 같이, 발달 과정에서의 정상적인 일면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자들은 X선을 지식 더미에 단순히 하나 더 추가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패러다임은 새로운 복사선의 존재에 의해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복사 이론 또는 음극선 관을 다루었던 켈빈(Kelvin), 크룩스(Crooks), 뢴트겐(Roentgen) 같은 학자들에게 있어서, X선의 출현은 새로운 다른 패러다임을 창출하게 되면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위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째서 이들 복사선이 정상 연구에서 우선 무언가 잘못된 후에야 발견될 수 있었는가의 이유가 된다.
정치적 및 과학적 발전 사이의 이러한 원천적 유사성의 측면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천적 유사성의 제2의 보다 심오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혁명은 기존 정치제도 자체가 금지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개혁하는 것을 겨냥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혁명의 성공은 다른 제도를 위하여 기존 제도의 일부를 파기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연구하며, 그러는 동안 사회는 기종 제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지 못한다. 이미 앞에서 위기가 패러다임이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을 보았듯이, 당초 정치적 제도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도 위기뿐이다. 수효가 늘어가면서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생활로부터 소원해지고 그 속에서 점점 더 정상궤도를 벗어나데 행동한다. 다음,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제도의 틀 속에서 사회를 재구성하는 어떤 구체적 대안을 밝히게 된다. 그 시점에 이르면 그 사회는 여러 갈래의 경쟁적 진영이나 당파로 나뉘게 되는데, 한 편은 구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다른 한편은 새로운 제도의 수립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진영의 양극화가 발생하면, 정치에의 의존은 무너져 버린다. 그들 진영들은 그 속에서 정치적 혁명이 수행되고 평가되는 제도적 모형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리고 혁명에서의 차이를 조정하는 데 제도 이상의 골격(supra-institutional framework)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의 투쟁에 나선 당파들은 결국 흔히들 무력을 포함한 대중 설득의 기술에 호소해야 하기에 이른다. 혁명은 정치 제도의 진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 왔지만, 그런 역할은 혁명이 부분적으로 정치 외적 또는 제도 외적인 사건들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은 패러다임 변화의 과학적 고찰이 과학의 진화에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함을 목표하고 있다.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제도들 사이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경쟁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것이 그런 특성을 띠고 있는 까닭에, 선택은 단순히 정상과학에 대한 특성적인 평가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결정될 수도 없다. 이유는 선택이 부분적으로 특정 패러다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패러다임이 바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패러다임 선택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패러다임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 그룹마다 제각기그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논증에 그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순환성이 논쟁들을 잘못된 것으로 또는 무력한 것으로까지는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패러다임의 방어 논쟁에서 그 패러다임을 전제로 삼들 사람은, 과학 활동이 자연의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일 것인가에 관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증거는 엄청나게 설득력이 클 수도 있으며, 흔히 그렇게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이 무엇이든 간에 순환적 논증의 상태는 다만 설득의 상태일 뿐이다. 그것은 논적으로 또는 심지어 확률적으로 그 순환에 끼여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끄어들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에는 패러다임에 관한 논쟁의 두 파에 의해 공유되는 전제와 가치는 포괄성이 부족하다. 정치적 혁명에서처럼 패러다임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__해당 집단의 동의보다 상위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이 어떻게 달성되는가를 알아내려면, 자연과 논리의 충격뿐만 아니라 과학자 사회를 구성하는 상당히 특이한 집단 내에서의 효과적 설득의 논증 기교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선택이라는 이 주제가 논리와 실험만으로 확고하게 풀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곧 전통적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을 혁명적인 후계자들과 구별짓는 차이들의 성격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검토를 하는 것이 이 절과 다음 절의 주요 목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런 상이점에 관한 여러 가지 실례를 보았으며, 어느 누구도 역사가 다른 사례들을 다수 제공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예증의 존재보다 실로 미심쩍은__그리고 우선 고려되어야 할__것은 그러한 사례들이 자연의 본질에 대한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폐기가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인간이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과 혼돈 이상의 것을 밝혀 주는 것인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나 새로운 과학 이론의 동화가 그것들보다 구식인 패러다임의 폐기를 강요해야만 하는 본연적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가?
우선 만일 그런 이유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 구조로부터 유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과거의 과학 활동의 어느 부분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출현할 수 있다. 달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현존 패러다임에는 파괴적이겠지만(이들 패러다임은 달에서의 생명체의 존재와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은하계의 보다 미지의 장소에서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새로운 이론은 그것에 선행했던 다른 것과 모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이론이 20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의 현상(subatomic phenomena)을 다룬(그러나 유의미하게 다룬다는 것이지 완벽하게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것에서처럼, 새로운 이론은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현상을 전적으로 다룰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이론은 이전에 알려졌던 것들보다 단순히 수준을 좀더 높인 이론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보다 낮은 차원의 이론들의 전체집합을 별다른 변형이 없이 한데 연결시킨 이론이다. 오늘날 에너지 보존 이론(theory do energy conservation)은 역학, 화학, 전기학, 광학, 열 이론 등 사이에서 바로 그런 연결을 맺어주고 있다. 이런 것 말고도, 옛 이론과 새로운 이론사이에는 서로 양립될 수 있는 관계들이 얻어질 수 있다. 그런 관계들은 전부 과학이 전개되어 온 역사적 과정들에 의해서 예시될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러하다면, 과학의 발전은 원천적으로 축적적일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란,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자연의 한 측면에서 규칙성을 노출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를 대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과학(또는 아마도 보다 덜 효과적인 다른 학문 활동)은 그렇게 완전히 축적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는지 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발전했다고 믿어 왔고, 대부분은 여전히 그런 축적성은 적어도 역사적 발전이 그렇게 자주 인간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더라면 드러내었을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믿는 데에는 그럴 만한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X절에서는 축적으로서의 과학관(view do science-as-cumulation)이, 지식을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 위에 정신에 의해 직접 세워진 구조물인 것으로 여기는 지배적인 인식론과 얼마나 밀접하게 얽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XI절에서는 효과적 과학 교수 기법에 의해 뒷받침되는 바로 그런 발달사관에 대한 강력한 지원에 관해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 이미지의 강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학의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점증되고 있다. 패러다임-이전 시기 후에, 모든 새로운 이론의 동화, 그리고 거의 모든 새로운 종류의 형상의 동화는 실상 이전의 패러다임 파괴와 과학사상(scientific thought)의 여러 경쟁 학파 사이에서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기치 못했던 새로움을 축적적으로 쌓는 일은 과학적 발전의 규칙에 거의 실제 하지 않는 예외라는 것이 밝혀진다.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과학이 그 축적성이라는 우리의 이미지가 제시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과학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활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저항적인 사실들이 우리를 쉽사리 믿기지 않게 한다면, 이미 살펴본 근거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새로움의 누적적 축적은 실제로 드물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적되는 성격인 정상과학이 그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과학자들이 규칙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근사한 개념적 및 기기적 기술로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능력 덕분이다(이것은 기존 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관계에 상관없이, 유용한 문제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이 과학적 발전을 쉽사리 방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기존 지식과 기술에 의해 정의된 문제를 풀고자 애쓰는 사람은 단순히 둘러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도구를 고안하려 거기에 맞게 그의 사고를 끌고 간다. 예기치 못했던 새로움 즉 새로운 발견은 자연에 대한 그의 예측과 그의 도구가 틀린 것임이 밝혀진 경우에만 출현할 수 있다. 그로부터 유래되는 발견의 중요성은, 흔히 그 자체로서 발견의 징후를 보이는 이상(anomaly) 현상의 정도와 완강함에 비례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분명히 이변을 드러내는 패러다임과 후에 이상 현상을 법칙처럼 만들어 줄 패러다임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이다. Ⅵ절에서 검토한 패러다임 파괴를 거치는 발견의 사례는 우리를 단순한 역사적 우발 사건에 부딪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발견이 생겨날 수 있는 이 밖의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논거는 새로운 이론들의 창안에 보다 분명하게 들어맞는다. 원칙적으로 새로운 이론이 전재되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세 가지 종류의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것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서 이미 잘 설명된 현상들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이론 구축에 대한 동기라든가 새 출발의 시점을 제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VII절의 마지막에서 논의한 세 가지 유명한 예측에서처럼, 그런 현상들이 동기나 출발점을 부여할 때에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론들이 수용되는 일이 드물다. 그 이유는 자연은 판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의 현상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 그 본질은 지시되지만 상세한 냉용은 이론의 보다 진전된 명료화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은 것들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과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연구에 집중하는 현상들이지만, 그런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안을 겨냥하기보다는 기존 패러다임의 명료화에 목표를 둔다. 명료화를 위한 이들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에 한해서 과학자들은 세 번째 형태의 현상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것들은 인식된 이상 현상들로서 그 특성적 성격은 기존 패러다임에 동화되기를 강경히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 세 번째 형태의 현상만이 새로운 이론들의 작인이 된다. 패러다임은 이상 현상을 제외한 무든 현상에 대해 과학자의 시각에서의 이론-결정적(theory-determined)인 위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만일 자연 현상에 대한 기존 이론의 관계에서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환기시키게 하려면, 성공적인 새 이론은 어딘가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유도된 것들과는 다른 예측들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있는 경우라면 그 차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동화되고 있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이론은 첫 번째 것을 대치 시켜야 한다. 오늘날, 독립적으로 확립된 이론들을 통해서만 자연에 관계를 맺는 논리적 체계로 보이는 에너지 보존(energy conservation)과 같은 이론조차도, 역사적으로 보면 패러다임 파괴가 없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뉴턴의 역학과 열의 칼로릭 이론(caloric theory of heat)의 최근 공식화된 어떤 결과 사이의 상충이 핵심 요소였던 위기의 국면으로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칼로릭 이론이 폐기된 후에야 에너지 보존 법칙은 과학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1) 그리고 그것은 얼마동안 과학의 일부로 머문 뒤에 그 이전 것들과 모순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보다 차원 높은 형태의 이론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이론이 자연에 관한 믿음에서의 이러한 파괴적 변화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논리적 포괄성은, 잇달아 나타나는 과학 이론들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허용될 만한 관점으로 자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개연성이 없다.
1세기 전이었다면 나는 아마 과학혁명의 필연성에 관한 경우를 이 점에 머물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전개된 주재의 견해는 과학 이론의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는 현대의 가장 유력한 해석이 인정받는 경우에는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은 불행히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초기의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그 후계자들에 의해 범주 상으로 폐기되지 않았던 그런 해석은 수용된 이론의 범위와 의미를 제한시킬 것이기 때문에, 어느 똑같은 자연 형상에 대해 예측해 낸 그 후의 다른 이론과 아마도 모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 이론에 대한 이런 제한된 관념을 보여 주는 경우로서 가장 잘 알려지고 분명한 것은 현대의 아인슈타인 역학과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로부터 파생된 보다 오랜 역학의 관계식 사이의 이론 연구 이론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에 대한 관계에서 설명된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서로 모순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만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것은 소수의 견해로 머물고 있다.2)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반대 의견에 대해 검토해야만 한다.
이들 이견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될 수 있다. 상대론적 역학은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 낼 수 없다,. 뉴턴의 역학은 아직도 대부분의 공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성공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다수의 물리학자들에 의해서도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다 옛 이론의 이러한 이용의 타당성은 여타의 응용에서 옛 이론을 대치한 바로 그 이론으로부터 증명될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소수의 제한 조건이 충족된 모든 적용에서 뉴턴 방정식의 예측들은 우리의 측정 기기만큼 훌륭한 구실을 할 것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예컨대 만약 뉴턴 이론이 그럴듯한 근사적 해를 제공하게 되려면, 고려되는 물체들의 상대 속도는 빛의 속도에 비해 작아야만 한다. 이 조건과 그 밖의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된다면, 뉴턴 이론은 아인슈타인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따라서 뉴턴 이론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특수 경우가 된다.
그러나 반대 의견은 계속되어서, 어떤 이론도 그것은 특수 경우들 중의 하나와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아인슈타인의 과학이 뉴턴 역학을 틀리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뉴턴주의자들의 일부가 뉴턴 이론이 완벽하게 정확한 결과를 준다거나 또는 상대 속도가 매우 빠른 경우에도 뉴턴 이론이 잘 맞는다고 경솔하게 주장했던 까닭에 한 해서 였을 뿐이다. 뉴턴 학파의 그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갖출 수 없었으므로, 그런 주장을 했을 때 그들은 과학의 규범을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뉴턴 이론이 타당한 증거에 의해 뒤받침 되는 참으로 과학적인 이론이 되는 범위에서의 주장은 여전히 성립된다. 그 이론에 행한 엉뚱한 주장들만이__정통 과학의 일부가 되지 못했던 주장들__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잘못된 것을 밝혀질 수 있었다. 이들 원초적 인간성의 무모함을 배제한다면, 뉴턴 이론의 도전 받았던 적도 없었으며 또한 도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어떤 변형은 유능한 과학자의 유력한 그룹에 의해 사용된 어느 이론이든지 공격을 면하도록 만들기에 꽤 충분하다. 이를테면, 결함투성이의 플로지스톤 이론도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현상에 규칙성을 부여하였다. 플로지스톤 이론도 물체가 왜 타는지를 설명했고__그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__금속들은 왜 광석 상태보다 공통성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는가를 설명했다. 금속은 모두 상이한 원소성 토류(earths)가 플로지스톤과 결합된 복합성 물질 이였으며, 플로지스톤은 모든 금속에 공통으로 있으므로 그들에게 공통되는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였다. 덧붙여, 플로지스톤 이론은 탄소와 황 같은 물질의 연소에 의하나 산 (acid)이 생성되는 여러 반응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또한 플로지스톤 이론은 한정된 부피의 공기 중에서 연소가 일어날 때 부피가 감소되는 현상을 설명하였다__연소에 의해 방출되는 플로지스톤은 마치 불꽃이 철사줄의 탄성을 '망치는(spoils)'것처럼, 그것을 흡수한 공기의 신축성을 '손상시킨다(spoils)'.3) 만약 이런 것들이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옹호하는 데 쓰였던 유일한 현상들이었다면, 그 이론은 결코 도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식의 논의는 어떤 영역의 현상에서는 성공적으로 적용되어온 어느 이론에 대해서나 충분히 성립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론들을 구제하려면 그것들의 적용 범위는 손안에 든 실험적 증거가 이미 다루었던 현상들에, 그리고 그런 관측의 정확성에까지 제한되어야 한다.4)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그리고 그 단계는 일단 첫걸음을 내디딘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마련인데), 그러한 제약은 과학자로 하여금 이미 관찰되지 않는 현상에 관해 '과학적으로' 얘기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현재의 형태로서도 그 제약은 그런 연구가 이론에 바탕한 근거의 과학 활동에서 아무런 전례를 제공하지 않은 분야로 들어가거나 또는 정확도를 추구하는 때에는 언제나, 과학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연구에서 이론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러한 금지는 논리상 예외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수용한 결과는 과학이 그것을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연구 전통의 종말이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요점 역시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y)이다. 어느 패러다임에 매이지 않고는 정상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런 공약은 완벽한 전례가 없는 분야들에까지, 그리고 전례가 없는 정확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패러다임은 일찍이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를 전혀 제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패러다임에의 공약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과학뿐만이 아니다. 만일 현존 이론이 과학자를 기존 응용해 대한 관계에만 묶고 있다면, 거기에는 놀라움도 이상 현상도 또는 위기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바로 비상(非常)과학을 향한 조정을 가리키는 표지가 된다. 어느 이론의 합법적인 응용범위에 대한 실증적 제약(positivistic restrictions)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학자 사회에서 어떤 문제들이 근본적 변혁에 이르게 하는가를 말해 주는 메커니즘은 그 기능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이전 상태와 흡사한 어떤 것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모든 구성원이 과학을 수행하기는 하나 그들의 총체적 산물은 도대체 과학을 닮은 경우가 드물게 되어 버리는 상황이다. 유의미한 과학적 진보의 대가는 잘못되어 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책임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곧바로 혁명적 변화의 성격으로 다시 안내할 실증주의자(positivist)의 논증에는 논리적 허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뉴턴의 역학은 참으로 상대론적 역학(relativistic dynamics)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가? 그러한 유도는 과연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 한데 모여 상대성 이론의 법칙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6 15 2^ ^6 15 23^, ... ^6 15 56 1345^으로 표시되는 한 벌의 서술 형태에 대해 상상해 보라, 이러한 서술에는 공간적 위치, 시간, 정지 질량(rest mass) 등을 나타내는 변수(variables)와 파라미터(parameters)가 포함된다. 논리 및 수학의 장비와 더불어, 그것들로부터 어떤 것들은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온전한 한 벌의 서술형이 더 유도될 수 있다. 뉴턴의 역학이 하나의 특수 경우로서 성립됨의 적절함을 증명하려면, 파라미터와 변수의 범위를 제한하게 되는 (u/c)^3456 126^<<1 과 같은 것을 ^6 15 56 24^의부가적 진술에 첨가시켜야 한다. 그 다음 이렇게 확장된 한 별의 서술은, 뉴턴의 운동 법칙, 중력의 법칙 등과 형태가 같은 새로운 한 벌의 ^6 1345 2^ ^6 1345 23^, ... ^6 1345 56 134^로 계산되기에 이른다. 뉴턴의 역학은, 거기에 몇 가지의 제약 조건을 붙임으로써 아인슈타인 이론으로부터 유도된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도는 적어도 이 시점까지의 논의에서 보기에는 눈속임으로 보인다. ^6 1345 56 24^는 상대론적 역학의 법칙들(law of relativistic mechanics)의 특수 경우이지만, 그것들은 뉴턴의 법칙들은 아니다. 또는 적어도 그것들은 아인슈타인의 연구 이전까지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그들 법칙들이 재해석되지 않은 한, 뉴턴의 법칙들은 아니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6 15 56 24^ 묶음에서 공간적 위치, 시간, 질량 등을 나타냈던 변수와 파라미터는 ^6 1345 56 24^조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기서 여전히 아인슈타인의 공간, 시간, 질량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들 아인슈타인 개념의 물리적 지시 대상은 동일한 이론을 지닌 뉴턴 개념의 그것들과 결코 같지 않다(뉴턴의 질량은 보존된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은 에너지로 변화될 수 있다. 상대 속도가 느린 경우라 할지라도 그 둘을 똑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6 1345 56 24^ 묶음에서의 변수들에 대한 정의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가 유도한 진술은 뉴턴의 법칙이 되지 않는다. 만일 그들 정의를 바꾼다면 적어도 요즈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유도(derive)'의 의미에서는, 뉴턴의 법칙을 유도했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우리의 논증은 물론 뉴턴 법칙들이 어째서 잘 맞는 것처럼 보였던 가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이를테면 자동차 운전자가 마치 그가 뉴턴의 우주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시켰다. 이와 동류의 논증은 천체 관측자들에게 지구중심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이용된다. 그러나 그 논증은 아직까지 정작 해야 할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뉴턴의 법칙들이 아인슈타인 법칙의 하나의 한정된 경우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제약에 이르는 경로에서 변화를 겪은 것은 법칙의 형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태 변화와 동시에 우리는 그 법칙들이 적용되는 우주가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구조적 요소들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미 확립된 친숙한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를 뜯어고쳐야 하는 이런 필요성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혁명적 충격에 핵심 되는 요소이다. 지구중심설(geocentrism)로부터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플로지스톤으로부터 산소로, 또는 입자로부터 파동으로 변화보다도 더 미묘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개념적 변환은 이전에 확립된 패러다임의 파괴 못지 않게 결정적으로 파괴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학에서의 혁명적 재배치(reorientations)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사물 또는 개념을 추가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뉴턴으로부터 아인슈타인 역학으로의 천이는 특히 명징적으로 개념적 조직망(conceptual network)__과학자들이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보는__의 변화로서 과학혁명을 기술한다.
이들 언급은 또 다른 철학적 배경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무엇을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과학자들에게는 폐기된 과학이론과 그 후속 이론 사이의 명백한 차이는 대부분 실제적인 것들이다. 시대에 뒤진 이론은 항상 그 최신의 후속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 목적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형은 뒷궁리의 이익, 즉 보다 최신 이론의 명시적인 지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변형이 옛 이론을 해석하는 데 적용되는 합법적 도구였다고 할 지라도, 그 응용의 결과는 크게 제약받는 이론이 될 것이므로 이미 알려진 것을 재서술할 수 있을 따름일 것이다. 그 경제성으로 해서 그런 재설명은 유용성을 지니겠지만, 연구의 지침으로서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잇달아 나타나는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는 필연적이며 동시에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렇다면 그런 차이들이 어떤 유형의 것인가에 대해 보다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가장 뚜렷한 형태의 차이는 이미 앞에서 누차 설명한 바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우주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특징적 거동에 관하여 서로 다른 사항들을 일러준다. 다시 말하면, 원자의 하부 입자들 (subatomic particles)의 존재, 빛의 물질성(materiality of light), 그리고 열 또는 에너지의 보존 등과 같은 물음에 관해서 그들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 이런 것들은 계승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상당한 차이이며, 그것들은 더 이상의 예증(例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물질 이상의 것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그 까닭은 패러다임이 자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을 생산한 과학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준이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이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과학을 재정의 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 옛날 문제들은 더러 다른 과학 분야로 이관되거나 또는 완전히 '비과학적 (unscientific)'인 것이라 선언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사고해 보였던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더불어 유의미한 과학적 성취의 원형 바로 그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제들이 바뀜에 따라서 단순한 형이상학적 추론, 용어 놀음, 또는 수학적 조작으로부터 참된 과학적 해답을 구별짓는 기준도 바뀌는 일이 흔하다. 과학혁명으로부터 출현하는 정상과학적 전통은 앞서 간 것과는 양립되지 않을(incompatible) 뿐만 아니라, 실상 동일 표준상의 비교 불능이다(incommensurable).
과학의 실제에서 17세기의 정상과학 전통에 미친 뉴턴 연구의 영향은 패러다임 변동의 미묘한 효과를 보여 주는 사례 중 걸작이라 하겠다. 뉴턴이 태어나기 이전, 그 16세기의 '새로운 과학(new science)'은 물체의 에센스(essences of material bodies)로서 표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및 스콜라 학파의 설명을 거부하는 체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돌멩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 "본성(nature)"이 그 돌을 우주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찮은 유어반복의 말놀이-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로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색깔, 맛, 그리고 심지어 무게까지를 포함하는 감각적 외양의 전체 현상은 모두 크기, 모양, 위치, 그리고 바탕 물질의 기본 입자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써서 설명하도록 되었다. 여러 성질들을 기본원자들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마술적 요소에 의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몰리에르(Moliere)는, 아편의 효력은 잠오게 하는 효능 때문에 최면제로 작용한다고 설명하는 의사를 비웃었을 때, 정확하게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17세기 후반에 많은 과학자들은 아편 입자의 둥그런 모양이 그 입자들로 하여금 그 알갱이들이 움직이는 주위의 신경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다.5)
그보다 이전의 시대에는 신비적 성질에 의한 사물의 설명이 생산적인 과학 연구의 불가분의 요소였다. 그렇기는 했지만, 17세기의 역학적-입자적 설명(mechanico-corpuscular explanation)에의 새로운 공약은 많은 과학 분야에 대해 막강한 성과를 나타냄로써, 과학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풀이를 거부해 왔던 문제들을 제거시키고 그 대신 다른 문제들을 제안하게 되었다. 역학에서는, 예컨대 뉴턴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은 신기한 새 실험들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관찰 결과를 일차적인 중성의 입자들의 운동과 상호 작용이 맥락에서 다시 설명하는 시도의 결과였다. 구체적인 설명을 한 가지만 들어 보자. 자연에 대한 역학적-입자적 견해는 과학적 관심을 충돌에 의한 입자의 운동의 변화라는 전혀 새로운 연구 주제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선언하였고, 최초의 추정적 풀이를 제안하였다. 호이겐스(Huyghens), 렌(Wren), 그리고 월리스(Wallis)는 그것을 더욱 확장시켰는데, 일부는 충돌하는 추의 움직임에 관한 실험에 의해서였으나, 대부분은 이미 잘 알려졌던 운동의 특성을 새로운 문제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들이 얻은 결과를 그의 우돈 법칙에 내재화했다. 제 3법칙에서의 동일한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은 충돌에 의해 양쪽이 겪게 되는 운동량(quantity of motion)의 변화들이다. 그것과 똑같은 운동의 변화가 제 2 법칙에 내포된 역학적 힘의 정의를 제공한다. 이것은 17세기 다수의 여러 경우에서처럼, 입자적 페러다임(corpuscular paradigm)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고 또한 그 문제 해결에서의 큰 부분을 담당했던 것이다.6)
그러나 뉴턴의 연구는 많은 부분 역학적-입자적 세계관으로부터 유도된 구체화된 표준들과 문제들을 지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로부터 파생된 패러다임의 영향은 과학에 합당한 문제와 표준에서의 심층적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파괴적인 변화를 나타났다. 중력은 물질의 매 입자쌍 사이의 본유적 인력이라고 풀이되면서, 스콜라 학파의 '떨어지려는 경향(tendency to fall)'이란 용어가 그러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신비적 성질이었다. 그러므로 입자설의 규범이 영향을 발휘하는 반면에, 중력에 대한 역학적 설명에의 추구는 "프린키피아(principia)"를 패러다임으로 인정한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뉴턴은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8세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의 명백한 대안이란 중력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뉴턴 이론을 배격하는 것이었으며, 그 대안 역시 널리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들 견해 중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프린키피아"가 없이 과학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그 연구를 17세기 입자설의 규범에 따르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점차로 중력은 참으로 '본유적인(innate)'것이라는 견해를 받아 들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그런 해석이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 결과는 스콜라 철학의 규범으로의 진짜 복귀(퇴보와 똑같은 것은 아니)였다. 물질에 본래 내재하는 인력과 반발력은 물리적으로 비환원성인 물질의 일차적 성질(primary properties)로의 크기, 모양, 위치, 그리고 운동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7)
그 결과로 물리과학의 규범과 문제 영역에서 나타나게 된 변화는 다시 한 번 필연적이었다. 1740년대까지, 예컨대 전기학자들은 1세기 이전에 몰리에르의 상대로서 의사 선생이 겪었던 조롱을 당하지 않으면서 전기적 유체의 끌어당기는 '힘(Virtue)'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에 따라서 전기적 현상은, 점차 오로지 접촉에 의해서만 작용을 나타낼 수 있는 역학적 전기소(mechanical effluvium)의 영향이라고 간주했던 것과는 다른 규칙성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서로 떨어진 위치에서의 전기적 작용(electrical action-at-a-distance)이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에 연구의 주제가 되었을 때는, 오늘날 이른바 유도에 충전이라고 하는 현상이 그 효과 중의 하나로서 인식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어쩌다 관찰되는 경우, 전기적'대기(atmospheres)'의 직접 작용 때문이라거나 또는 어느 전기 실험실에서나 있게 마련인 누전의 탓으로 돌려졌다. 유도 전류 효과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이어서 라이덴 병(Leyden jar)에 관한 프랭클린(Franklin)의 분석에 관건이 되었고, 따라서 전기에 대한 새로운 뉴턴식의 패러다임 출현에 관건이 되었다. 물질의 본유적 힘에 대한 탐사의 정당화에 의해 자극된 과학 분야는 역학과 전기학만이 아니었다. 화학적 친화력(chemixal affinities)과 치환 계열(replacement series)에 관한 18세기 문헌의 대부분도 역시 뉴턴주의(Newtonianism)의 이런 초역학적(supramechnical) 관점으로부터 유도된다. 다양한 화학종 사이에서의 이렇게 구별되는 인력을 믿었던 화학자들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들을 꾸몄고, 새로운 종류의 반응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 데이터와 그런 과정에서 전개된 화학적 개념이 없었더라면, 라부아지에의 후기의 연구 그리고 더욱이 돌턴의 연구는 이해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8) 허용되는 문제, 개념, 그리고 설명을 다스리는 기준에서의 변화는 과학을 변형시킬 수 있다. 다음절에서 그런 기준들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 대해서 제안할 것이다.
이어지는 패러다임들 사이에 이처럼 사소한 차이를 보이는 다른 실례들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거의 어느 시대의 어느 과학의 역사에서든지 찾아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두 가지의 간단한 실례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화학혁명 이전에 화학이 안고 있던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화학 물질의 성질에 관해 설명하고, 화학 반응을 거쳐 일어나는 이들 성질들의 변화에 관해 설명하는 일이었다. 소수의 기본적 '원리(principles)'-그 중 플로지스톤 이론도 하나였다.-의 도움으로 화학자는 왜 어떤 물질은 산성이며, 또 어떤 것은 금속성, 연소성 등등인가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 방향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 바도 있었다.
이미 앞에서 플로지스톤설을 이야기하면서 왜 금속들은 서로 그렇게 비슷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산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개혁은 결국 화학적 '원리들(principles)'로부터 벗어났고. 따라서 화학으로부터 약간의 사실 적 그리고 상당한 잠재적 설명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런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 기준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19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화합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은 화학 이론에 대한 유죄 판결은 아니었다.9)
또한 다시, 맥스웰(Clerk Maxwell)은 19세기 빛의 파동 이론의 지지자들과 뜻을 같이 함으로써, 빛의 파동이 물질 에테르를 통해 전파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하는 역학적 매질(mechanical medium)을 고안하는 것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학자들 다수에게 하나의 표준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맥스웰 자신의 이론인 빛의 잔자기 이론(electronmagnetic theroy)은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매질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그 이론은 분명히 예전에 여겨졌던 것보다 설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초기에는 맥스웰 이론이 널리 배격되었다. 그러나 뉴턴 이론과 마찬가지로, 맥스웰 이론은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고, 패러다임의 지위로 올라서게 됨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몇십 년간은 역학적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맥스웰의 주장이, 물론 단호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더 말뿐만인 허구로 들리게 되었고, 그런 에테르 매질을 고안하려는 노력은 포기되었다. 과학자들은 이제, 대치되고 있었던 것을 밝히지 않은 채 전기적 '변위(displacement)'에 대해 논하는 것을 더 이상 비과학적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또 다시 새로운 문제와 기준의 출현이었으며, 이것은 결국에 가서는 상대성 이론의 탄생에 커다란 구실을 했던 것이다.10)
과학자 사회의 합법적 문제와 기준에 대한 관념에서의 이들 특성적 변동은, 그것들이 항상 방법론적으로 낮은 차원으로부터 보다 높은 어떤 형태로 일어난다고 가정할 수 있다며, 이 에세이의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경우 그것들의 결과는 역시 축적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부 과학사들이 과학사(history of science)는 과학의 성격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꾸준히 성숙시키고, 갈고 닦는 것의 끊임없는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11)
그렇기는 하지만, 과학에서의 문제와 기준의 축적적 발전의 경우는 이론 축적에서의 경우보다 그 달성이 더욱 힘들다. 18세기의 대부분 과학자들에 의해서 포기되었다, 중력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합당치 않은 문제로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본유적 힘에 대한 반대는 그리 비과학적인 것도 아니요, 어떤 경멸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판단을 허용하는 외적인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기준의 몰락도 아니요 기준의 제기도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채택에 의해서 요구되는 변화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런 변화는 그 이후 다시 역전되었고, 또 다시 역전될 수 있었다.20세기에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의한 인력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런 특정 관점에서 과학을 볼 때, 그 설명은 아인슈타인의 계승자들의 관점보다는 뉴턴의 전임자들의 관점과 더 비슷한 기준과 문제로 과학을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제기된 양자 역학의 전개는 화학혁명에서 유래했던 방법론적 금기를 뒤엎었다. 화학자들은 지금 그들의 실험실에서 사용하고 만들어 낸 물질에 대해 색깔, 상태, 기타 성질을 설명하려고 하며, 그것은 크게 성공적이다. 이와 비슷한 역전은 전자기 이론에서까지도 일어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은 뉴턴 이론과 맥스웰 이론의 양쪽에서 도입된 비활성이며 균질인 바탕(substratum)이 아니다.공간의 새로운 성질 가운데 일부는 한때 에테르의 탓으로 돌렸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젠가 전기적 변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인식적 기능으로부터 규범적인 기능으로 옮겨 강조한다면, 앞의 사례들은 패러다임이 과학적 활동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주로 과학 이론에 대한 매체로서의 패러다임의 역할을 검토하였다. 그런 역할에서 패러다임은 과학자에게 자연이 내포한 그리고 내포하지 않은 실체에 대해 일러주고, 그들 실체가 작용하는 방식에 관해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 정보는 그 상세한 내용이 성숙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지게 되는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연은 무작위로 그 베일이 벗겨지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까닭에, 그러한 지도는 과학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해 관찰이나 실험 못지 않게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것들이 구체화하는 이론을 통해서 패러다임은 연구 활동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임을 밝혀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다른 관점에서도 고학의 구성 부분이 되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바로 요점이다. 특히 우리가 마지막에 든 실례는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에게 지도뿐만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적 방법과 기준을 모두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데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 그리고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이 타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관찰은 우리를 이 IX절이 출발했던 요점으로 되돌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서로 겨루는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이 정상과학의 준거가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을 규칙적으로 제기하는 이유에 대해 최초의, 명시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두 학파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인가에 관하여, 불완전한 것에 못지 않게 의미 깊게 의견을 달리하는 한에서는, 그들은 각각의 패러다임이 지닌 상대적 장점을 논의하면서 서로서로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적 순환 논쟁이자 각 패러다임은 그것이 자체로서 지령하는 기준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 적수에 의해 지령되는 기준을 몇 가지 갖추지 못한 것도 드러날 것이다. 어느 경우나 패러다임 논쟁을 특징짓는 논리적 접근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다른 이 문제를 풀어 낸 적이 없었던 것과 그리고 두 가지 패러다임이 풀어 내지 못한 문제들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닌 까닭에, 패러다임 논쟁에서 항상 다음 질문이 개입된다. 어느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보다 의미가 있는가? 서로 겨루는 기준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가치관에 대한 이런 질문은 총괄적으로 정상과학의 외곽에 위치한 기준에 의해서만 답해질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패러다임 논쟁을 가장 확실하게 혁명적으로 만드는 외부적 기준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준과 가치보다 더욱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또한 문제거리가 된다. 나는 지금까지 패러다임들이 과학을 구성한다는 것만을 논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패러다임이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을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ff "주"
1) Silvanus P. Thompson, Life of Wklliam Thomson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2) 예컨대 Philosophy of Science XXV(1958), 298 에 실린 P.P.Wiener의 논평을 참조. 3) Jzmes B.Conant, Overthrow of the Phlogiston Therory(Cambridge, 1950), pp.13-6;J.R.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d ed;London,1951), pp.85-88. 플로지스톤 이론에 기여에 관해 가장 완벽하고도 공감적으로 설명한 것은 H.Metzger, Newton, Stahl, Boerhaave et la dectrine chimique(Paris, 1930), part II이다.
4) 전혀 다른 유형의 분석을 거쳐 얻어낸 결론인 R..B.Braithwaite, Scientific Explanation(Cambridge, 1953), pp.50-87. 특히 p.76과 비교하라.
5) 일반적인 입자론(corpuscularism)에 대해서는 Marie Boas, "The Establishment of the Mechanical Philosopy", Osiris, X(1952), 412-431을 보라. 맛에 입자 모양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위의 문헌의 p.493 참조. 6) R.Dugs, Ls mecanique au XVIP siecle(Neuchatel, 1954), pp.177-85, 284-98,345-56. 7) I.B.C, Franklin and Newton: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menl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 of(Philadelphia, 1956), chaps. vi-vii. 8) 전기에 관해서는 주 7)의 viii-ix장 참조. 화학에 대해서는 Metzger, op. cit, part I참조. 9) E.Meyerson, Identity and Reality (New York, 1930), chp. X. 10) E.T.Whittaker, A Historu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Ⅱ(London, 1953), 28-39. 11) 과학의 발전을 이런 프로크루테스(Procrustes)의 침대에 맞추려는 기발하고 지극히 최신식의 시도에 대해서는 C.C.Gillispie, The Edge of Objectivity: And Essay in the History Scientific Ideas (Princeton, 1960)를 보라. @ff
X.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Revolutions as changes of World View
현대적인 사료 해석의 관점으로부터 과거 연구의 기록을 훑어본다면, 과학사들은 패러다임의 변화할 때 세계 그 자체의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질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유도되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채택하고 새로운 영역을 들여다보게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기간 동안에 과학자들은 이전에 연구했던 곳에서 친숙한 기기를 써서 관측하면서 새롭고 색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전문가 사회가 돌연, 이전의 친숙한 대상들도 달리 보이고 미지의 것들과도 섞여 있는, 다른 행성으로 옮겨지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꼭 이런 형태의 일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면, 지역적인 이동은 없다. 연구실 바깥에서의 일상 생활은 예나 마찬가지로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활동의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과학자들이 그런 세계를 다루는 일은 오직 그들이 보고 행하는 것을 통해서인 마큰,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 있은 후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반응하고 잇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과학자 세계에서의 이러한 변형에 대한 기본 원형으로서, 시각 게슈탈트(visual gestalt)에서의 친숙한 전환의 증거들은 매우 시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혁명 이전의 과학자 세계에서 오리였던 것이 혁명 이후에는 토끼로 둔갑한다. 처음에는 위쪽에서 상자의 외부로 내려다보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아래쪽으로부터 그 내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와 같은 변형들은 대체로 보다 점진적이고 거의 어김없이 비가역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적 훈련에 공통되는 부수물이다. 등고선 지도를 보면서 학생은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을 보지만, 지도 제작자는 지형에 관한 그림을 본다. 기포상자(bubble-chamber)사진을 보면서 학생은 혼란스럽게 끊어진 선들을 보지만, 물리학자는 낯익은원자 핵 내부의 사건들의 기록을 읽어 낸다. 그러한 시각적 변형은 숱하게 거친뒤에서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이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세계는한편으로는 환경의 본질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본질에 의해서단번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경, 그리고 학생이 추구하도록 훈련받았던특정 정상과학의 전통에 의해 연합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정상과학의 전통이변화하는 혁명의 시기에는 과학자 자신의 환경에 대한 지각 작용은재교육되어야 한다.- 과학자는 어떤 친숙한 상황에서 새로운 게슈탈트를 보는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한 후의 그의 연구 세계는 여러 가지 형태에서이전에 그가 살아왔던 세계와 같은 표준으로 비교할 수없게(incommensurable)보일 것이다. 상이한 패러다임에 의해 주도되는 학파들이항상 서로 얼마간 엇갈리게 마련인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유형에 있어서 게슈탈트 실험은 지각 작용 변형의 본질만을 설명해 줄 따름이다. 게슈탈트 실험들은, 패러다임의 역할 또는 지각 작용의 과정에서 이미 동화되었던 경험의 역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심리학 문헌들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고, 그 중 많은 부분이 하노버 연구서(Hanover Instituer)의 선구적 업적에서 유래되고 있다. 상을 거꾸로 만드는 렌즈의 안경을 쓴 피실험자는 처음에는 온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다. 초기에는 그의 감각 기관은 안경 없이 기능하도록 훈련되었던 때처럼 작용하게 되고, 따라서 극도의 방향 상실에 이르러 당사자는 심각한 위기에 부딪친다. 그러나 피실험자가 대개 시각이 몹시 혼란해지는 과도기를 거친 뒤, 새로운 세계를 다룰 줄 알기 시작한 후에야, 그의 시야 전체는 거꾸로 뒤집어진다.그 뒤에는 물체들이 다시 안경을 쓰기 전에 있었던 것처럼 보여진다.이전의 이상 시야가 그 장에 동화 작용하여 시야 자체를 변화시킨 것이다.1)비유적일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 거꾸로 보이는 렌즈에 익숙해진 사람은 시작에서의 혁명적인 변형을 거친 것이다.
VI절에서 논의된 이상한 카드 실험에서의 피실험자들은 이와 매우 흡사한 변형을 경험하였다. 카드를 오래 살펴보고 그 세계에서 이상야릇한 카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들은 이전의 경험이 마련해 주었던 카드 형태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부가적인 범주를 경험하게 되자, 피실험자들은 카드를 식별해 낼 만한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첫눈에 이상스런 카드를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여러 실험에서도 실험용으로 제시된 물체들의 크기, 색깔들이 피실험자가 이전에 받은 훈련과 경험에 따라 달리 지각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2) 이러한 사례들이 실린 풍부한 시험 문헌을 훑어보면, 패러다임과 같은 그 무엇이 지각 작용 자체의 우선 조건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visual-conceptual experience)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그러한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는, 윌리엄 제임스(Willian James)의 표현처럼 "꽃이 피고 벌이 윙윙거리는 혼동(a bliimin 'buzzin' onfusion)"만이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서 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앞서 말한 유형의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핸슨(H.R. Hanson)은 형태에 관한 실물 시범을 이용함으로써, 여기서의 나의 관심사인 과학적 신념에서와 똑같은 결과를 일부 밝혀 내었다.3) 다른 동료들은, 만일 과학자들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지각 작용의 변동을 자주 경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사는 보다 훌륭하고 논리 정연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는 점에 되풀이하여 주목해 왔다. 그러나 심리학적 실험들이 시사적이기는 하지만, 그 실험들은 그 상황의 성격상 그 이상의 것은 될 수 없다. 심리학적 실험들은 과학의 발전에 핵심이 될 수 있는 지각 작용(perception)의 특성들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과학 연구자들이 행하는 세심하고 조절된 관찰에 그러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실험들의 본질 자체가 그러한 요점의 직접적인 논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역사적인 사례가 이들 심리학적 실험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면, 우리는 우선 역사가 제시하거나 제시하지 않는 증거의 유형들에 주목해야 한다.
게슈탈트 시범의 피실험자는 똑같은 책이나 종이를 손에 쥐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지각을 되풀이해서 바꾸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환경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점점 그 주의를 형체(오리나 토끼)로가 아니라 자기가 보고 있는 종이의 선들에 집중시키게 된다. 마침내 그는 어떤 형체를 보지 않고도 그 선들만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가 정말로 보는 것은 이 선들이지만 그것들을 번갈아 가며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전에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카드 실험의 피실험자는 자신의 지각이 바뀌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득 당하게 되는데),왜냐하면 외부의 권위자로서 실험 자는, 그가 무엇을 지각했든 지간에 상관없이, 그에게 내내 검정색 하트 5를 보고 있었다고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모든 심리학적 실험에서처럼, 양쪽의 실험에서 모두 시범의 효과는 이런 방식으로 분석 가능한 것에 의존한다. 시각의 전환이 증명될 수 있는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대신의 지각 작용의 가능성에 대한 결론은 내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관찰의 경우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다. 과학자는 자신의 눈과 기기를 통해 본 것 이외에는 의존할 수 가 없다. 만일 그의 시각이 바뀌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보다 높은 권위의 근거가 존재한다면, 곧 그 권위는 그 자체가 과학자에게는 데이터의 원천이 될 것이고, 과학자의 시각 작용은 문제들의 원천이 될 것이다(피실험자의 행동이 심리학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과학자가 게슈탈트 실험의 피실험자처럼 자신의 지각을 되풀이하여 바꾸어 볼 수 있다면, 똑같은 유형의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빛이 '때로는 파동이고 때로는 입자'였던 시대는 위기의 시대__무언가 잘못되어 있던 시대__였고, 그 위기는 파동 역학이 개발되고 빛은 파동과 입자와는 다른 자체로서의 실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므로 과학에 있어서 지각 작용의 전환이 패러다임 변화를 수반한다면, 우리는 과학자들이 직접 이러한 변화들을 입증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코페르니쿠스 주의로 전향한 사람은 달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제까지는 행성을 보고 있었으나 지금은 위성을 보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말투에는 한때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옳았었다는 의미가 내포될 수도 있다. 새로운 천문학으로의 전향자는 그런 말 대신 "나는 한때 달을 행성이라고 생각했지만(또는 달을 그렇게 보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유형의 진술은 과학 혁명이 발생한 후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만일 이것이 통상적으로 과학적 시각의 변환 또는 그 같은 효과를 지닌 여러 정신적 변형을 위장시킨다면, 우리는 그 변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기대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과학자가 종래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간접적인 행동 상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는 데이터로 돌아가서 그러한 변화를 믿고 있는 과학사 학자가 과학자의 세계 속에서 어떤 유형의 변형들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알아보자. 윌리엄 허쉘 경(Sir William Herschel)의 천왕성(Uranus) 발견은 그 첫 번째 예로서, 이상한 카드 실험과 아주 비슷한 사례이다 1690년부터 1781년 사이에 적어도 17회에 걸쳐 유럽 최고의 몇몇 관측자를 비롯한 많은 천문학자들이 지금의 천왕성 궤도 자리에서 별 하나를 보았다. 이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한 관측자는 실제로 1769년에 나흘 밤을 연달아 그 별을 보았으나, 그 정체를 알려줄 수 도 있었을 별의 운행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12년이 지난 뒤 바로 그 물체를 처음 관측하면서, 허쉘은 자신이 손수 만든 훨씬 개량된 망원경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적어도 별 모양으로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뚜렷한 원반 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으므로, 그는 판정을 미루고 더 자세히 조사하게 되었다. 조사한 결과, 별들 가운데서의 천왕성의 운행을 밝혀 내게 되었고, 따라서 허쉘은 자기가 새로운 혜성(comet)을 보았다고 공표 하였다! 관측된 운행을 혜성 궤도에 맞추려는 부질없는 시도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렉셀(Lexell)은 그 궤도가 행성인 것 같다고 제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4) 그 주장이 수용되다, 천문학자의 세계에는 몇 개 줄어든 항성과 하나가 늘어난 행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관측되었다 말았다 했던 천체가 1781년 이후에는 달리 보여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상한 카드 실험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종래의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지각 작용의 범주(항성 또는 혜성)에 더 이상 들어맞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행성인 천왕성을 볼 수 있도록 한 시각의 변환은 이미 관측된 이 물체의 지각에만 영향을 미쳤던 것 같지는 않다. 그에 따르는 결과는 보다 광범위했다. 증거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허쉘에 의해 야기된 소규모의 패러다임 변화는 1801년 이후 천문학자들이 여러 소행성들(minor planets, 또는 asteroids)을 급속히 발견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 크기가 작았던 까닭에 소행성들은 허쉘을 놀라게 했던 이상 현상으로의 확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성을 더 찾아낼 준비가 된 천문학자들은 표준 기구를 써서 19세기의 전반 50년 동안 20개의 행성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5) 천문학사에는 과학적 지각에서 패러다임이 유발한 변화에 대한 각기 다른 사례들이 많이 있으며, 그 중 몇 가지는 좀더 확실해 보인다. 예를 들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처음 제안된 후 반 세기 동안 서구 천문학자들이 종래에는 불변이라 여겼던 천상 세계에서 변화를 처음 목격했던 것이 우연일 수 있을까? 그들의 우주관에서 천상 세계의 변화를 배제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훨씬 앞서서 이미 하늘에서의 많은 신성(new stars)들의 출현을 기록해 놓았다. 또한 망원경의 도움 없이도 중국인들은 갈릴레오와 당대의 학자들이 발견하기 수세기 이전에, 태양 흑점의 출현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았다.6) 단지 태양 흑점과 신성만이, 코페르니쿠스 직후의 서구 천문 학계에서 파악한 천상계 변화의 유일한 사례들은 아니다. 실오라기같이 단순한 것을 비롯한 전통적인 천문 기구를 사용하면서, 16세기 말기의 천문학자들은 그 이전에는 불변의 행성과 항성에게만 허용되던 공간에서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혜성들을 계속 발견하고 있었다.7) 옛 대상을 옛 기기로 관측하면서 천문학자들이 그토록 쉽고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보았다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천문학자들이 전과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그들의 연구는 마치 그런 경우였던 것처럼 반응했다.
앞서 말한 사례들은 천문학으로부터 선택되었는데, 왜냐하면 천체 관측 기록들은 흔히 비교적 순수한 관측 용어로 쓰인 어휘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라야만 과학자들의 관찰과 심리학자들의 피실험자 관찰 사이에 완전한 유사성 같은 어떤 것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유사성(parallelism)을 크게 강조할 필요는 없으며, 우리의 기준을 이완시킴으로써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다'라는 동사의 일상적 용법에 만족할 수 있다면,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학적 지각 변화에 대한 많은 사례에 이미 접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지각(perception)'과 보기(seeing)'의 용도를 확장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명시적 방어를 요구하게 될 것이나, 우선 과학 활동에서의 그 응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기학의 역사로부터 나온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사례를 잠깐 다시 살펴보자. 17세기에 걸쳐 이런저런 자기소(effluvium) 이론에 따라 연구가 진행되던 시절에, 전기 학자들은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대전체(electrified bodies)로부터 알갱이들이 튀어 오르고 떨어지고 하는 것을 거듭 관찰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것은 17세기의 관측자들이 보았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보다 그들의 지각 작용의 기록을 더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같은 실험 장치 앞에 앉아서 현대의 관측자는 정전기적 반발(역학적이거나 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을 보게 될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보통 무시되는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혹스비(Hauksbee)의 대규모 장치로 그 효과가 크게 확대되기까지는 정전기적 반발이 그 자체로 관찰되지 못했다. 그러나 접촉 대전 뒤의 반발은 혹스비가 보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반발 효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형태 변화에서와 상당히 비슷하게도, 그의 연구를 거침으로써 반발은 갑자기 전기 작용의 가장 기본되는 특질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때 설명되어야 할 것은 인력이었다.8) 18세기 초반에 볼 수 있었던 전기적 현상들은 17세기에서보다 더 미묘하고 다양한 것이었다. 또는 다시, 프랭클린의 패러다임에로의 동화 이후, 라이덴 병을 바라보고 있던 전기학자는 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장치는 콘덴서(condenser)였는데, 콘덴서로서는 병 모양도 또는 유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두 개의 전도성 피막__그 중 하나는 원래의 장치에는 없었던 것__ 이 흔한 것이 되었다. 글로 논의되고 또 그림 설명으로 점차 입증되고 있듯이, 그 사이에 비전도체를 끼우지 않은 두 개의 금속판이 이런 부류의 원형이 되었다.9) 동시에 다른 유도 효과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이 이루어졌으며, 그 밖에 다른 효과들도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변환은 천문학과 전기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화학사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와 비슷한 시각 변형을 일부 살핀 바 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dephlogisticated air)를 보았던 곳,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곳에서 산소를 보았다. 그러나 산소를 보는 것을 깨닫는 데 있어서, 라부아지에는 또한 여타의 다른 친숙한 물질들에 대한 그의 견해의 변화를 거쳐야 했다. 예를 들면 프리스틀리와 당대의 학자들이 원소성의 흙을 보았던 곳에서 그는 화합물의 광물을 보아야 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이 밖에도 다수이다. 산소를 발견한 결과로서 최소한 라부아지에는 자연을 달리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달리 보았던(saw differently)' 가설적인 고정된 자연에 의지하지 않을 때, 자연계의 경제성의 원칙(principle of economy)은 우리로 하여금, 산소를 발견한 후 라부아지에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연구를 했다고 말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런 생소한 표현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제 곧 다루겠지만, 우리에게는 우선 그런 용도에 부합되는 사례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갈릴레오 연구의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이나 사슬에 매달린 이런저런 무거운 물체가 완전히 멈추어 설 때까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보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무거운 물체는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높은 곳으로부터 보다 낮은 곳의 자연스런 정지 상태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터였으므로, 흔들리는 물체란 그들에게는 단지 어려움을 겪으며 떨어지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 물체는 사슬에 묶인 상태이므로 만곡선의 동작을 거쳐 상당히 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소 낮은 위치의 제자리에 멈출 것이었다. 그 반면에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물체(swinging body)를 바라보면서 진자(pendulum)를 생각했는데, 그것은 거의 무한하게 거듭해서 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하는 물체였다. 이 진자의 움직임을 본 갈릴레오는 진자의 다른 성질들을 중심으로 다수 구축해 냈다. 예컨대, 진자의 성질들로부터 갈릴레오는, 빗면을 따라 내려오는 운동에서의 수직 높이와 최종 속도 사이의 상관 관계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무게와 낙하 속도 사이의 무관성에 대한 그의 유일하게 완벽하고 확고한 이론을 이끌어 냈다.10) 이들 모든 자연의 현상을 그는 이전에 그것들이 보여져 왔던 방식과는 상이하게 보았던 것이다.
왜 그런 시각의 변환이 일어났을까? 물론 그것은 갈릴레오라는 개인의 천재성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그런 천재성은 흔들리는 물체를 보다 정확하게 또는 객관적으로 관찰함에 있어 발현된 것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술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지각 작용도 갈릴레오 못지 않게 정확하다. 갈릴레오가 90도에 이르기까지의 진폭(amplitude)에서는 진자의 주기(pendulum`s period)가 진폭에 무관하다고 보고했을 때, 진자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로 하여금 지금 거기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칙성을 보도록 이끌었다.11) 오히려 그의 시각 변환에 관련됐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중세의 패러다임 변환에 의해 주어진 지각 작용의 가능성을 천재가 이용한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완벽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로서 길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임페투스 이론(impetus theory)의 관점에서 운동을 분석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그 이론은 무거운 물체가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까닭은 그 운동을 시작하게 한 투사자(projector)에 의해서 그 속에 내부적인 힘이 불어넣어진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던 중세 후기의 패러다임이었다. 임페투스 이론에 가장 완전한 체계를 부여해 준 것은 14세기 스콜라 학파의 장 뷔리당(JAean Burodan)과 니콜 오렘(Nicole Oresme)으로서, 이들은 진동 운동(oscillatory motions)에 대한 갈릴레오의 관측 일부를 앞서 관측했던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인물들이다. 뷔리당은 진동하는 줄의 운동을 줄에 충격이 가해질 때 임페투스가 최초로 주입되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그 다음에 임페투스는 줄의 장력(tension)의 저항과 맞서 줄의 위치를 변환시키는 데 소모된다. 그 다음 장력이 줄을 되튕겨 놓으면서, 운동의 중간 점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임페투스를 불어넣는다. 그런 후에 임페투스는 다시 장력에 맞서 줄을 반대 방향으로 변위시키며,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대칭적 과정으로 그렇게 계속된다. 14세기의 더 나중에 가서 오렘은 흔들리는 돌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분석을 도식화했으며, 이는 이제 보면 진자에 대한 최초의 논의인 것으로 보인다.12) 그의 이 같은 견해는 분명히 갈릴레오가 처음 진자에 접근했던 방식과 아주 비슷하다. 적어도 오렘 그리고 갈릴레오의 경우에도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로부터 운동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임페투스 패러다임이 창안되기까지는 과학자들은 진자를 보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진자는 패러다임에 의해 유발된 게슈탈트 전환(paradogm-induced gestalt switch)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에 의해 실체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또 라부아지에를 프리스틀리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것을 시각 변환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종류의 물체를 바라보면서 그 사람들은 참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보았던 것일까? 그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연구를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타당한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더 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앞에서 개관한 역사적 사례들을 모두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훨씬 통상적인 방식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독자들은 분명 패러다임과 더불어 변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환경 및 지각 장치의 성격에 따라 영속적으로 고정되는 관찰에 대한 과학자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는 둘 다 산소를 보았던 것이나 그들은 관찰들을 달리 해석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는 둘 다 진자를 보았으나, 서로가 보았던 것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우선, 과학자들이 기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런 지극히 통상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되었다던가 또는 순전히 실수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데카르트에 의해 창안되고, 동시에 뉴턴 역학으로서 전개되었던 철학적 패러다임의 요체가 된다. 그 패러다임은 과학과 철학의 쪽에 크게 기여하였다. 역학 자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패러다임의 철저한 이용은 달리는 성취되지 못했을 근본적인 이해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뉴턴 역학의 사례가 역시 예시하듯이, 과거의 가장 놀라운 성공조차도 위기가 무한히 뒤로 지연될 수 있음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철학, 심리학, 언어학, 그리고 심지어 예술사 영역에서의 연구는 모두가 한결같이 전통적 패러다임이 다소 빗나간 것이었음을 시사함을 일러준다. 적응에 대한 그런 실패는 여기서 우리들의 주의가 대부분 필연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과학의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도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들 위기를 조장하는 주제 가운데 어느 것도 지금까지 전통적 인식론적 패러다임(epistemological paradigm)에 대한 유효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으나, 그 주제들은 그런 패러다임의 일부 특성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제시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때,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박 상태의 낙하 현상을 보았고 갈릴레오는 진자를 보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야기되는 곤란한 점들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절의 서두에서는 바로 그런 어려움이 보다 더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세계가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지는 않지만, 그 이후의 과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는 적어도 이것들과 유사한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하리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과학 혁명 동안에 일어나는 일은, 개별적인 안정된 데이터의 재해석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데이터들이 양론의 여지없이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다. 진자는 떨어지는 돌이 아니며 산소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과학자들이 이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는 그 자체가 서로 다른 것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과학자 개인 또는 과학자 사회가, 속박된 낙하 운동으로부터 진자로, 또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로부터 산소로의 이행을 성취한 과정은 해석과 흡사한 과정이 아니다. 해석할 수 있는 고정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과학자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 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언급은, 과학자들에게 관찰 결과와 데이터를 해석하는 특성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길릴레오는 진자에 대한 관찰 결과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떨어지는 돌에 대한 관찰 결과를, 뮈센브뢰크(musschenbroek)는 충전된 병에 대한 관찰 결과를, 그리고 프랭클린은 콘덴서에 대한 관찰 결과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들 해석은 각기 어떤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정련하고, 확대하고, 명료화하는 것을 겨냥하는 작업인 정상 과학의 부분들이었다. Ⅲ절에서는 해석이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여러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그러한 사례들은 과학 연구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전형이다. 그 사례들의 각각에서 과학자는 수용된 패러다임에 바탕 해서 데이터가 무엇인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기기를 써야 하는가, 그리고 그 해석에는 어떤 개념이 관련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주어지면, 데이터의 해석은 패러다임을 탐사하는 작업에서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 작업은__그리고 이것은 앞앞 단락에서 다루었는데__패러다임을 정련시켜 줄 수 있을 뿐 수정하지는 못한다. 패러다임들은 도대체 정상 과학에 의해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정상 과학은 궁극적으로 이상 현상들의 인지 그리고 위기로 인도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심사숙고와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비교적 돌발적이고 비구조적인 사건에 의해 끝을 맺게 된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눈에서 비늘이 걷혔다(scales falling from the eyes;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전에는 모호하던 수수께끼에 '넘쳐 드는(inundates)'그런 '번득이는 섬광(lightning flasg)'에 관해 자주 말하게 되며, 그리하여 수수께끼의 구성 요소들을 최초로 해결 가능한 새로운 방식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든다. 다른 예에서는, 관련되는 깨달음이 꿈속에서 얻어진다.13)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용어의 어떤 일반적인 의미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되는 이들 직관이라는 섬광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한 직관은 옛 패러다임과 더불어 얻어지는 변칙적이고 또한 통합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직관들이,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경험의 특정 항목들에 논리적 또는 단편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직관은 그런 경험의 많은 부분을 모아서, 그 이후 그것들을 하나 하나씩 옛 패러다임이 아닌 새 패러다임에 연결시키게 될, 꽤 다른 경험의 한 묶음으로 변형시킨다.
이러한 경험상의 차이가 무엇이 되는가를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그리고 진자의 얘기로 되돌아가자. 그들의 상이한 패러다임과 그들의 공통된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은 그들 각자에게 무슨 데이터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속박된 낙하 운동(constrained fall)을 관측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는 돌의 무게와 운동에서 그것이 올려진 수직 높이, 그리고 그것이 떨어져 정지하기까지 걸린 시간 등을 측정할 것이다(아니면 적어도 논의할 것이다__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측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매질의 저항과 더불어 이런 것들은, 낙하 체를 다룸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과학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적 범주들이었다.14) 그것들에 의해 인도된 정상 연구는 갈릴레오가 발견했던 법칙들을 생산해 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다만 흔들리는 돌(swinging stone)에 대한 갈릴레오의 생각을 낳게 한 일련의 위기 국면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다른 경로를 따라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한 위기들과 그 밖의 지적인 변화의 결과로서,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부유하는 물체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연구는 매질을 필수적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임페투스 이론은 운동을 대칭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는 갈릴레오의 관심을 운동 원형의 형태 쪽으로 돌려 놓았다.15) 그런고로 그는 무게, 반지름, 이동 각도 그리고 흔들리는 주기만을 측정했는데 이것들은 바로 진자에 관한 길릴레오의 법칙을 낳도록 해석될 수 있는 데이터들이었다. 사실 해석은 거의 불필요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갈릴레오의 패러다임이 주어지면 진자와 같은 규칙적인 운동은 접근하기가 매우 쉬웠다. 진자의 주기가 진폭과 전혀 무관하다는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해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발견은 갈릴레오로부터 비롯된 정상 과학이 뿌리 뽑아야 했던 것이며, 우리가 오늘날 자세히 기록하기가 꽤 힘이 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게는 존재할 수 없었던(그리고 사실상 자연에 의해 어디에서도 정확히 예증되지 못하는)규칙적 현상들이, 갈릴레오가 했던 것처럼 흔들리는 돌을 보았던 사람에게는 즉각적 체험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들은 흔들리는 돌에 대한 논의를 기록했던 적이 없으므로, 아마도 그런 실례는 너무 환상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패러다임상으로는 그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들은, 보다 간단한 경우, 즉 특별한 속박 없이 낙하는 돌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낙하하는 돌을 관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과정(process)보다는 오히려 상태의 변화(change of state)를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운동의 의미 있는 척도들은 움직인 전체 거리와 경과한 전체 시간이었으며, 이것들은 우리가 오늘날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평균 속도라고 불러야 할 것을 제공하는 파라미터들이었다.16)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은 그 본성에 의해 그 최종의 정지 위치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운동이 일어나는 도중의 어느 시점에서의 의미 있는 거리 파라미터를 운동의 시발점으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운동의 최종 지점까지의 거리로 보았다.17) 그러한 개념적 파라미터들은 그의 유명한 '운동의 법칙(laws of motion)'대부분에 내포되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임페투스 패러다임을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형상의 강도(latitude of forms)라고 알려진 이론을 통해서, 스콜라주의적 비판은 운동을 다루는 이런 사고 방식을 변화시켰다. 임페투스에 의해 움직여지는 돌은 그 시발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더 임페투스를 획득했다. 따라서 정지 점까지의 거리가 아니라 시발점으로부터의 거리가 의미 있는 파라미터가 되었다.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속도 관념은 스콜라 학파에 의해 두 갈래로 분화되어 갈릴레오 이후에 곧 오늘날의 평균 속도와 순간 속도의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들 개념이, 그 일부를 이루었던 패러다임을 통해서 고찰될 때, 떨어지는 돌은 진자와 마찬가지로 거의 한 눈에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들어내 보였다. 돌들이 균일하게 가속되는 운동에 의해 떨어진다는 사실은 갈릴레오가 최초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18) 더욱이 그는 빗면(inclined plane)에서의 실험을 행하기 이전에,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정리를 그 결과들의 여러 가지와 함께 이미 전개시킨 바 있었다. 그 정리는, 자연에 의해서 그리고 갈릴레오와 당대의 학자들을 길러낸 패러다임에 의해서 결정 지워진 세계 속에서, 천재가 깨닫게 되는 새로운 규칙성의 틀 가운데 또 다른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 살면서도 갈릴레오는, 그가 원한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에 관해 그렇게 보았었던가를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돌에 대한 갈릴레오가 경험한 직접적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직접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에 대해서__즉 패러다임이 일시에 그들의 규칙성을 드러내는 것을 부각시키는 지각 형태들(perceptual features)에 대해서__그토록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는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그들 형태들은 분명히 패러다임에 대한 과학자의 공약에 따라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들은 과학 연구를 진전시키는 것으로 평가되는, 있는 그대로의 데이터 또는 맹목적 경험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직접적 경험은 유동적인 것으로서 미루어 두어야만 할 것 같고, 그 대신 우리는 과학자가 그의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구체적인 조작과 측정에 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는 아마도 분석은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부터 더욱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중립적 관찰-언어(observation-language) 견지에서 행해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관찰 언어는 과학자가 보는 것을 전달하는 망막 영상에 일치하도록 고안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방식들의 하나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다시금 경험이 영구적으로 안정화되는 영역을 되찾기를 기대할 수 있다__그러한 영역에서 진자와 속박된 낙하 현상은 서로 다른 지각 작용인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돌의 관찰에 의해 얻어진 명확한 데이터를 서로 달리 해석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이 확고하고 중립적인 것일까? 이론이란 주어진 데이터에 대해 인간이 붙여 놓은 해석에 불과한 것일까? 지난 3세기 동안 서양 철학을 거의 주도하다시피 한 인식론적인 관점은 즉각적으로 분명히 그렇다라고 못박는다. 나는 진전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완전히 철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중립적인 관찰 언어를 도입하므로써 그것을 기능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들은 현재 내가 보기에는 전망이 없는 것 같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행하는 조작과 측정들은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the given)'이라기 보다는 '공들여 수집한 것(the collected with difficulty)'들이다. 그것들은 과학자가 보는 그 무엇이 아니다__적어도 그의 연구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고 그의 주의가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다 기본적인 지각 용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들이며, 그것들은 오로지 수용된 패러다임의 유익한 정련화의 기회를 기약한다는 이유에 의해서만 정상 연구의 엄밀한 탐사 대상으로 선정된다. 조작과 측정은 부분적으로 그것들을 유도해 내는 직관적 경험에 비해 훨씬 더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구체적인 실험 조작들을 수행한다. 진자에 관해 실행되어야 할 측정은 속박된 낙하 운동의 경우에 관련되는 측정들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산소의 성질을 구명하는 데 필요한 실험들은,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의 특성을 고찰함에 있어 요구되는 조작과는 같을 수가 없다.
순수한 관찰-언어에 관해 말하자면, 아마 앞으로는 그러한 경우를 기대하는 우리의 희망은 여전히 지각과 정신의 이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심리학 실험은 그러한 이론으로는 거의 다룰 수 없는 현상들을 급격히 증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심리학 실험은 그러한 이론으로는 거의 다룰 수 없는 현상들을 급격히 증식시키고 있다. 오리-토끼 (duck-rabbit)실험은 동일한 망막 영상을 받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음을 입증한다. 거꾸로 보이는 렌즈는 서로 다른 망막 인상을 받은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심리학에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보여 주는 증거들이 대단히 많으며, 그로부터 제기되는 의구심은 실제적인 관찰-언어를 제시하려는 어떤 시도도 아직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잇는 순수한 지각 용어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접근한 그러한 시도들을 살펴보면, 이 에세이의 주요 주제의 몇 가지를 크게 강화시키는 하나의 공통되는 특성이 드러난다. 그런 시도들은 처음부터 현행 과학이론이나 일상적인 의견 교환으로부터 취합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가정하며, 그 다음에는 그 패러다임으로부터 비논리적이고 비지각적인 용어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의견교환의 몇몇 영역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상당한 정도로 수행되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유형의 노력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의 결과는 자연에 관한 수많은 예측을 구체화시키기는 하지만, 이들 예측이 빗나갈 경우에는 기능하지 못하는 언어__과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들과 마찬가지인__가 된다. 넬슨 굿먼(Nelson Goodman)은 그의 저서 "외관의 구조(Structure of ppearance)"의 저술 의도를 진술하면서바로 이 점을 언명했다.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현상들 이외의'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능한'경우 즉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했을는지도 모르는 경우의 개념은 지극히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19) 이렇듯이 이미 완전히 알려진 세계를 표현하는 데 국한된 언어는 어느 것도 '주어진 것 (the given)에 대한 순수한 중립적, 객관적 기록을 완수 해 낼 수 없다. 철학적 고찰은 그런 명을 다할 수 있는 언어가 어떤 것이 될 것인가의 힌트조차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산소와 진자(그리고 아마도 원자와 전자)를 그들의 직접적 경험의 기본 요소로서 다루고 있을 때, 그들은 과학의 실제에서 뿐 아니라 원리에 있어서도 옳은가를 적어도 의심은 해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이 구현된 종족적, 문화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적 경험의 결과로서 과학자의 세계는 행성과 진자, 콘덴서와 화합물 광물, 기타 다른 여러 대상들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들 지각 대상에 비하면, 미터 자 측정과 망막 영상은 둘 다 과학자가 자신이 하는 연구의 특수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정할 때에 한해서 경험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정교한 구성 개념들이다. 이것은 예컨대 과학자가 흔들리는 돌을 바라보면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 진자들이라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는다(우리는 이미 다른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도 속박된 낙하 현상을 볼 수 있었음을 주목한 바 있다). 그것은 흔들리는 돌을 바라보는 과학자가 진자를 보는 것보다 원리상 더 기본적인 성격의 경험을 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대안은 어떤 가설적인 '고정된(fixed)'시각이 아니라, 다른 패러다임을 통하여 흔들리는 돌을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들어 준 시각이었던 것이다.
과학자이거나 일반인이거나 세계를 단편적으로 또는 요소 하나하나로 보도록 익히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이 모든 것은 보다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개념적 그리고 조작상의 범주들이 미리 구비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__예컨대 초우라늄 원소를 더 발견한다거나 또는 새로운 집이 눈에 띄는 경우 등__과학자와 일반인은 모두 경험의 흐름으로부터 전체 영역을 분류해 낸다. 어린아이가 '엄마(mama)'라는 단어를 처음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모든 여성에게로, 그 다음에 드디어 자기 어머니에게로 옮겨 가는 것은 단순히 '엄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또는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를 배우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 아이는 한 여자를 제외한 다른 모두가 자기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아기의 반응과 기대와 믿음__사실상 그에게 지각된 세계의 많은 부분__이 거기에 따라 변화한다. 마찬가지 얘기로, 태양에 대해 그 전통적 명칭인 '행성(planet)'이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행성'이 무엇을 뜻하는가 또는 태양은 무엇인가만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태양뿐 아니라 모든 천체가 종전의 방식과는 전혀 달리 보이게 되는 세계 속에서 유용한 구별을 해내는 것이 지속될 수 있게끔 '행성'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앞서 제시된 다른 실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 대신 산소를, 리이덴병 대신 콘덴서를, 또는 속박된 낙하 운동 대신 진자를 보았던 것은, 관련된 숱하게 많은 화학적, 전기적, 역학적 현상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전체적인 시각 변환에서 단지 한 부분에 불과하였다. 패러다임은 일시에 경험의 광대한 영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조작적 정의 또는 순수한 관찰 -언어에 대한 탐색이 시작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이 이처럼 결정되어진 이후의 일이다. 어떤 측정 또는 어떤 망막 인상이 진자를 진자로 만드는가를 묻는 과학자나 철학자는 이미 그것을 봄과 동시에 진자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진자 대신 속박된 낙하 운동을 보았다면, 그의 질문은 제기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자를 보았으나, 소리굽쇠(turning fork)나 진동 저울(oscillation balance)을 보았던 방식으로 그것을 보았더라면, 그의 질문은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그 질문들이 정당하고 때로는 놀랄 만큼 유익하기는 하지만, 망막 인상이나 특수한 실험조작의 결과에 대한 질문들은 지각상 그리고 개념상 이미 일정한 방식으로 세분화된 세계를 전제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질문들이 정상과학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것들이 패러다임의 존재에 의존하며 패러다임 변화의 결과로서 다른 대답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을 마무리하기 위해, 망막 영상 문제는 여기서 접어 두고, 다시 과학자에게 그가 이미 보아왔던 단편적이지만 구체적인 지표들을 제공하는 연구실 작업으로 주의를 국한시키자. 그러한 연구실 작업이 패러다임과 더불어 변화되는 한 가지 방식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관찰되었다. 과학혁명 이후에는 많은 과거의 측정과 기작이 무의미하게 되고 다른 것들에 의해 대체된다. 과학자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에 적용했던 것과 동일한 시험들을 모두 산소에 적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변화들은 총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그때 무엇을 지각하게 되든 간에, 혁명 이후의 과학자는 여전히 똑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혁명 이전에는 그것들을 달리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의 많은 부분과 실험 기구들의 대부분은 역시 이전의 것들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서, 혁명 이후의 과학은 혁명 이전의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기기로 행해지고 같은 용어로 기술되는 똑같은 기작을 변함없이 다수 포함하게 된다 만일 이렇듯 지속되는 기작들이 어딘가 변화했다면, 그 변화는 그것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관계에서든가 또는 그것들의 구체적인 결과들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예를 하난 마지막으로 소개하면서, 이들 두 가지 유형의 변화가 둘 다 일어난다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돌턴(Dalton)과 그 당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조작이 다른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에 연결될 때에는 자연의 규칙성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때때로 낡은 조작 방법이 그 새로운 역할에 의해서 상이한 구체적인 결과를 낳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유럽의 화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모든 화학종(chemical species)을 이루는 기본 원자들은 상호간의 친화력(forces of mutual affinity)에 의해 결합된다고 믿었다. 그런고로 은 덩어리는 은의 입자(corpuscles)사이의 친화력 때문에 한데 뭉친 것이었다(라부아지에 이후까지 이러한 입자들은 그 자체가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알갱이들로부터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바로 이 이론에 의하면, 은이 산(acid)에 녹는 (또는 소금이 물에 녹는)이유는 산의 입자들이 은의 입자들을 (또는 물의 입자들이 소금의 입자들을) 이들 용질 입자 상호간에 잡아끄는 것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구리와 산 사이의 인력(copper-acid affinity)은 은에 대한 산의 친화력보다 컸기 때문에, 구리는 은용액에 녹아서 은을 침전시킨다고 믿었다. 그 밖의 다수의 현상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18세기 동안,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y)의 이론은 훌륭한 화학 패러다임으로서, 화학 실험법의 설계와 분석에 널리 그리고 때로는 성공으로 적용되었다.20)
그러나 친화력 이론은, 돌턴 연구의 동화 이래로는 이상스럽게 보이는 방식으로 물리적 혼합물과 화학적 화합물을 구분하고 있었다. 18세기의 화학자들은 두 종류의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다. 혼합에 의해서 열, 빛, 발산 그리고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한편, 혼합물의 입자들이 육안으로 또는 기구를 써서 분리, 구분될 수 있는 경우,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중간적 성격의 수많은 경우__물에 녹은 소금, 합금, 유리, 대기 중의 산소, 기타 등등__이런 어설픈 기준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들의 패러다임에 의해 인도되면서,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이 모든 중간 영역을 화학적이라 간주했는데, 이는 그것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속의 소금이나 질소 중에 섞인 산소는 구리를 산화시켜 얻는 결합과 마찬가지의 화학적 결합의 한 실례로 여겨졌다. 이처럼 용액(solution)을 화학물(compounds)로 간주하는 견해는 매우 완강했다. 게다가 화합물의 생성은 용액에서 관찰되는 균질성을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만일 산소와 질소가 공기 중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섞여 있기만 한 것이라면 보다 무거운 기체, 즉 산소가 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할 것이다. 공기를 혼합물이라고 보았던 돌턴은 산소가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원자론의 동화는 궁극적으로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상(anomaly)을 탄생시킨 것이었다.21)
사람에 따라서는 용액을 화합물이라고 보았던 화학자들이 그들의 후계자들과 달랐던 점은 단지 정의에 관한 문제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정의를 단순히 관례적인 편의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것은 아니다. 18세기에는 혼합물(mixture)과 화합물(compound)이 조작상의 실험에 의해서 완전히 구별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화학자가 그러한 검증을 모색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용액을 화합물로 만드는 기준을 추구했을 것이다. 혼합물-화합물의 구분은 그들의 패러다임의 일부__ 그들이 연구 영역 전체를 보았던 방식의 일부-였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화학의 축적된 경험보다 우선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특정 실험적 검증보다도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학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되었던 다른 한편에서, 화학적 현상들은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동화로부터 출현된 것들과는 상이한 법칙을 예시하고 있었다. 특히 용액이 여전히 화합물이라고 생각되었던 동안, 그렇게 많았던 화학 실험은 그 자체로서 일정 성분비의 법칙(law of fixed proportions)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18세기 말에는 몇몇 화합물들이 그 구성 성분들의 무게로 볼 때 성분비가 통상적으로 일정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몇 가지 종류의 반응에 대해서 독일 화학자 리히터(Richter)는 현재의 화학 당량의 법칙(law of chemical equivalents)에 포함되는 보다 진전된 규칙성까지도 주목하고 있었다.22) 그러나 제조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화학자도 이들 규칙성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으며, 거의 18세기 말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규칙성을 일반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리나 소금 수용액에서처럼 확실한 반대 실례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친화력 이론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화학자 영역의 범위를 재개념화하지 않고서는 일반화란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프랑스 화학자 프루스트(Proust)와 베르톨레(Berthollet) 사이의 유명한 논쟁에서 그 결과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전자는 모든 화학 반응이 일정 성분비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실험적 증거를 수합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주장의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논쟁은 전혀 결론이 날 전망이 없었다. 베르톨레가 성분비에 있어 달라질 수 있는 하나의 화합물을 보았던 곳에서, 프루스트는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만을 보았기 때문이다.23) 이 논쟁에는 실험도 정의상 관례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근본적으로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 돌턴이 끝내 그의 유명한 화학적 원자론(chemical atomic theory)으로 이끌게 된 연구를 수행하던 시절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연구의 최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돌턴은 화학자도 아니었고 화학에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물에 의한 기체의 흡수와 대기에 의한 수분의 흡수라는 물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던 기상학자였다. 다른 전공 분야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더러는 그 전공에 대해 스스로 한 연구 때문에,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당시의 화학자들과는 상이한 패러다임을 갖고 접근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체의 혼합물이나 또는 물에서의 기체의 흡수를 친화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물리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용액의 관찰된 균질성(homogeneity)은 하나의 문제거리였으나, 그는 그의 실험 혼합물 속의 다양한 원자들의 상대적 크기와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문제가 풀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돌턴이 결국 화학으로 돌아선 것은 이들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처음부터 그가 화학이라 여겼던 반응들의 제한된 영역에서, 원자는 1대1 또는 다른 간단한 정수비로만 결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24) 이 자연스런 가정은 그로 하여금 기본 입자들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케 했으나, 또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동어반복으로 만들었다. 돌턴에게는 성분들이 일정한 비율로 대입되지 않는 반응은 그 어느 것도 사실상(ipso facto)순수한 화학적 과정이 아니었다. 일단 돌턴의 연구가 받아들여지자, 그의 연구 이전에 실험으로는 확립될 수 없었던 법칙이, 어떠한 한 벌의 화학적 측정으로도 뒤엎을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어쩌면 과학혁명의 가장 완벽한 사례가 될지도 모르는 이 사건의 결과로서, 동일한 화학적 조작이 화학적 일반화에 대해서 종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관련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돌턴의 결론들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았다. 특히 비르톨레는 결코 설득되지가 않았다. 이 주제의 성격을 고려하건대, 그가 설득돼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화학자들에게 있어,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프루스트의 패러다임이 미흡했던 부분에서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돌턴의 패러다임은 혼합물과 화합물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 이상의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만약 원자가 간단한 정수비로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면, 기존의 화학 데이터의 재검토는 일정 성분비 법칙뿐만 아니라 배수 비례법칙의 예증까지고 드러내 줄 것이다. 화학자들은 예컨대 탄소의 두 가지 산화물은 무게로 각각 산소 56%와 72%를 포함한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탄소 무게 1이 산소 무게 1.3이나 2.6과 결합한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과거의 실험조작의 결과들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자, 2:1이라는 비율이 눈에 곧 띄게 되었다. 잘 알려졌던 여러 반응들과 그 밖의 새로운 반응들의 분석에서도 이런 관계가 나타났다. 게다가 돌턴의 패러다임은 피히터의 연구를 동화시키고, 완전히 일반화시키는 것을 가능케 했다. 또한 그것은 특히 결합 부피(combining volumes)에 대한 게이-뤼삭(Gay-Lussam)의 실험을 비롯한 새로운 실험을 제안해 주었고, 그런 실험들은 화학자들이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다른 규칙들도 내놓게 되었다. 돌턴으로부터 화학자들이 취했던 것은 새로운 실험적 법칙이 아니라 화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그 자신은 그것을 '화학 철학의 새로운 체계(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라고 불렀다.', 이것이 유용하다는 것이 매우 급속히 판명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의 구식 화학자들 중 소수만이 그것에 저항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25) 그 결과 화학자들은 화학 반응이 이전의 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됨에 따라 한 가지 전형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다른 변화가 발생했다. 여기저기서 화학의 숫자상 데이터 바로 그것이 변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돌턴이 처음에 그의 물리 이론을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아서 화학 문헌을 처음 뒤적였을 때, 그것에 적합한 몇 가지 반응 기록을 발견해 냈으나, 그것에 적합치 않았던 다른 기록들을 발견하는 것도 피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구리의 두 가지 산화물에 대한 프루스트 자신의 측정은 원자론에 의해 정해지는 2대 1이 아니라 1.47대 1이라는 산소 무게비를 얻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돌턴의 비율을 얻어낼 수 있었을 만한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26) 말하자면, 그는 훌륭한 실험학자였으며, 혼합물과 화합물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돌턴의 것에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 그리고 패러다임이 없이 수행된 측정이 왜 그렇게 어떤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드문가를 말해 주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화학자들은 증거를 바탕으로 간단히 돌턴의 이론을 수용할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증거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이론을 받아들인 이후까지도, 결국 그 후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자연을 조화시키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이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잘 알려진 화합물들의 백분율 조성비까지도 달라졌으며, 데이터 자체도 변화되었다. 이것이 혁명 이후 과학자들이 상이한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고 말하게 되는 마지막 의미이다.
@ff "주"
1) 그 원래의 실험은 George M. Stratton, "Vision without Inversion of the Retinal Image", Psychological Review, IV(1897), 341-60, 463-81이었다. 보다 최신의 총설은 Harvey A. Carr, An Introduction to Space Perception (New York, 1935),pp.18-57에 실려 있다. 2) 예를 들어 다음의 Albert H. Hastorf, "The Influence of Suggestion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timulus Size and Perceived Distance", Jounal of Psychology, XXIX(1950), 195-217; Jerome S. Bruner, Leo Postman, and John Rodrigures, "Excepdtions and tdhe Perception of Color", American Journal of Psychology, LXIV(1951), 216-27 을 참조하라. 3) N.R. Hanson, Patterns of Discovery (Cambridge, 1958), chap. i. 4) Peter Doig, A Concise History of Astronomy (London, 1950),pp.115-16. 5) Rudolph Wolf, Geschichte der Astronomie (Munich, 1877), pp. 513-15,683-93. 특히 주목할 것은 Wolf 의 해석이 이런 발견들을 Bode 법칙이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었는가이다. 6)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III(Cambridge, 1959), 423-29,434-36. 7) T.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Cambridge, Mass., 1957), pp. 206-9. 8) Duane Roller and Duane H.D. Rolle, The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Electric Charge(Cambridge, Mass., 1954), pp.21-29 9) VII절의 논의, 그리고 주 9)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지시하는 서적 참조. 10) Galileo Galilei, Dialogues concerning Two New Sciences, trans. H. Crew and A. de Salvio (Evanston, Ill., 1946), pp. 80-81, 162-66. 11) Ibid, pp. 91-94, 244. 12) M.Clagett, The Science of Mechanics in the Middle Ages(Madison, Wis.,1959),pp. 537-38, 570. 13) [Jacques] Hadamard, Subconscient intuition, et logique dans la recherche scientifique (Conference faite au Palais de la Devouverte le 8 December 1945[Alencon, n,d.}), pp. 7-9. 수학적인 새로운 창안에만 국한되기는 했으나,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은, 같은 저자가 쓴 The Psychology of nvention in the Mathematical Field (Princeton, 1949)이다. 14) T.S.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nges Alexander Koyre, ed. R.Taton and I.B. Cohen, Herman(Paris). 15) A. Koyre,Etudes Galileennes (Paris, 1939), I, 46-51; "Galileo adn Plato",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IV(1943), 400-428. 16) 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ges Alexandre Koyre 주 14)의 인용문 참조. 17) Koyre Etudes...., II, 7-11. 18) Clagett, op .cit, chaps.iv, vi, and ix. 19) N. Goodman, The Structure of Appearance (Cambridge, Mass. 1951), pp. 4-5. 이 문구는 더 자세하게 인용할 필요가 있다.:"가령 1947년도 월밍턴(Wilmington)의 거주자 가운데 체중 175-180파운드인 사람들만이 그리고 그들 모두가 붉은 머리 색깔을 갖는다면, '월밍턴의 붉은 머리, 1947년 거주자'는 '175-180파운드 사이의 월밍톤의 1947년 거주자'와 구조상의 정의에서 결합될 수 있다..... 이들 서술부의 어느 하나만이 적용될 어떤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이 문제에 아무 관계가 없다....일단 우리가 거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결정하고 나면.. 그 이상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왜냐하면 '가능한' 경우,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는지도 모르는 경우라는 개념은 아주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20) H. Metzger, Newton, Stahl, Borehaave et la doctrine chimique(Paris, 1930), pp.34-68. 21) Ibid., pp. 124-29, 139-48. 돌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Leonard K.Nash, The Atomic-Molecular Theory("Ha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Case4; Cambridge, Mass., 1950),pp. 14-21. 22) 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 (2d ed. ; London, 1951), pp. 161-63. 23) A. N. Meldrum, "The Development of the Atomic Theory;(1)Berthollet`s Doctrine of Variable Proportions", Manchester Memoirs, LIV (1910), pp. 1-16. 24) L.K. Nash, "The Origin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Isis XLVII(1956), 101-16. 25) A. N. Meldrum, "The Development of the Atomic Theory: (6) The Reception Accorded to the Theory Advocated by Dalton", Manchester Memoirs, LV(1911), 1-10 26) 프루스트에 대해서는 "Berthollet`s Doctrine of Variable Proportions", Manchester Memoirs, LIV(1910), 8 참조. 화학적 조성과 원자량 측정에서의 점진적 변화에 대한 상세한 역사는 아직 씌어져야 할 상태이지만, 거기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Partington,op.cit.에 실려 있다.
XI. 혁명의 비가시성 The Invisibility of Revolutions
우리는 아직도 과학혁명이 어떻게 끝맺음을 하는가를 묻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혁명의 존재와 성격에 관한 확신을 강화하는 마지막 시도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예증에 의해 혁명을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해 왔으며, 그 실례들은 지루할 정도(ad nauseam)까지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들의 대부분은 친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정된 것으로서, 통상적으로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에의 부가물로서 간주되어 왔다. 어떤 예증들을 추가하든지 간에 그런 똑같은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예증들을 추가해 보았자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 혁명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는가에 대해서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고 본다. 과학자나 일반인이나 양쪽 다, 창조적인 과학 활동의 이미지를 대부분 과학혁명의 존재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위장시키는__더러는 중요한 기능적인 이유로 인해__권위적 원천(authorivtative source)으로부터 얻게 된다. 그 권위의 성격이 인식되고 분석될 때에 한해서 역사적 사례들이 충분히 효과적인 것이 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 점은 나의 주장에 대한 결론을 맺는 마지막 절에 가서야 충분히 전개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분석은 아마도 신학(theology)을 제외한 모든 다른 창의적인 지적 추구로부터 과학 활동을 가장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성격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게 시작할 것이다.
권위의 원천으로서, 나는 교과서를 모델로 한 대중 서적들과 철학적 저작들의 두 가지와 아울러 주로 과학 교과서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 세 가지 범주들 모두가__최근까지만 해도 연구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과학에 대한 정보의 유의미한 원천은 달리 없었다.__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이미 명료화된 일단의 문제들, 데이터, 이론, 그리고 가장 빈번한 경우로는 그것들이 쓰여진 시기의 과학자 사회에 공약되어 있는 일련의 특정 패러다임에 관해 논의하게 된다. 교과서들 자체는 당대의 과학적 언어의 어휘와 구문을 전달하는 것을 겨냥한다. 대중화 서적들은 일상 생활의 것에 보다 가까운 언어들 써서 이들 동일한 응용들을 서술하기 위해 시도한다. 그리고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은, 특히 영어 사용권의 경우, 바로 그 과학 지식의 완결체의 논리 구조(logical structure)를 분석한다. 보다 완전한 고찰을 한다면 이들 세 장르의 실제적 차이점들이 반드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유사성이다. 이들 세 종류는 모두 과거의 과학혁명들의 안정된 결과 (outcome)를 기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의 정상과학 전통의 기반을 드러낸다. 그것들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그 저술들은, 그런 기반이 전문 분야에 의해 우선 어떻게 인식되고 다음 단계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교과서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체계적으로 오류를 빚게 될 충분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II절에서 교과서나 이에 해당되는 저작들이 크게 의존하는 것은 과학의 어느 분야에서나 첫 패러다임의 출현에 예외 없이 부수되는 상황임을 보았다. 이 에세이의 마지막 절에서는 그런 교과서들에 의한 성숙한 과학(mature science)의 지배가 그 발달 양식을 다른 분야의 경우와는 현저히 차이나게 만든다는 점에 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분야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일반인과 전문가들의 과학 지식은 둘 다 교과서 및 교과서로부터 유도된 몇몇 다른 종류의 문헌에 근거하게 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러나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서 언어, 문제 구조 (problem-structure), 또는 정상과학의 기준 등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랄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다시 쓰여져야 한다. 요컨대 교과서들은 매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바뀌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쓰여진 교과서들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 버리고 만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 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자신의 분야의 역사에 대한 과학자의 감각을 절단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음 단계로 그것들이 제거해 버렸던 것들에 대한 대치물을 제공하기 위해 전진한다. 특징적으로 과학 교과서들은 서론의 장에서나 또는 더 흔하게 이전 시대의 거장들에 대한 산발적 인용에서,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러한 인용들로부터 학생들과 전문가들은 양쪽 다 오랜 세월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참여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느끼게 되는 교과서-유도적 전통(textbook-derived tradition)은 사실상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과학 교과서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들)은, 명백하며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교과서와 그것이 함축하는 역사적 전통은 매 과학 혁명이후에 다시 쓰여져야 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쓰여짐에 따라, 과학이 다시금 대체로 매우 축적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도 이상할 바가 없다.
물론 그 분야의 과거가 현재의 유리한 지위를 행해 선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과학자 그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과거 지향적으로 쓰려는 유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또한 항상 그러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역사를 다시 쓰려는 유혹을 보다 강렬하게 느끼는데, 그 까닭은 더러는 과학 연구의 결과가 탐구의 역사적 맥락에의 의존을 뚜렷이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며, 더러는 위기와 혁명기를 제외하고는 과학자의 지위가 매우 안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현재에 대해서든 과거에 대해서든 간에, 보다 역사적인 세부 사항또는 제시된 역사적 세목에 대한 보다 강한 얽매임은 인간의 특성, 과오, 혼돈에 작위적인 지위만을 부여할 것이다. 과학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폐기하게 된 것을 어째서 존중하는 것일까?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는 태도는, 다른 종류의 사실적 항목들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전문분야, 즉 과학 전문 분야의 이데올로기에 깊숙히 그리고 기능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것 같다. 화이트헤드(Whitehead)가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다'라고 적었을 때, 그는 과학자 사회의 비역사적 기질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과학은 다른 전문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웅을 필요로 하며 영웅들의 이름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영웅들을 잊는 대신에,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잊거나 또는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과학사(history of sciece)를 직선적 또는 축적적으로 보도록 만든 끈질긴 경향인데, 그것은 심지어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뒤돌아보게 만든다. 예를 들면 돌턴의 화학적 원자론의 전개에서 양립할 수 없는 세 가지의 설명은 모두 훗날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결합비(combining proportions)와 같은 화학적 문제들에 그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문제들은 그것들의 해결과 더불어 비로소 그에게 떠올랐던 것 같고, 그것도 그의 창의적 연구가 거의 다 완성될 무렵이었다.1) 돌턴의 설명 전체가 빠뜨렸던 것은 이전에는 물리학과 기상학에 국한되었던 일련의 질문과 이루었던 일이며, 그 결과는 그 분야에로의 방향의 재배치였고, 그것은 화학자들에게 옛 데이터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옛 데이터로부터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르쳤던 재배치이다.
또는 다시, 뉴턴은 갈릴레오가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중력이라는 힘이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운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사실상 갈릴레오의 운동학 법칙(kinematic theorem)은 뉴턴 자신의 역학적 개념(dynamical concepts)의 기반 요소에 포함시켜 볼 때 그런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런 종류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낙하 물체에 대한 그의 논의는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균일한 중력gravitational force)에 대해서는 커녕 힘 자체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2) 갈릴레오의 패러다임하에서는 제기될 수도 없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갈리레오의 공로로 돌림으로써, 뉴턴의 설명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꼈던 해답에서 뿐 아니라 운동에 대해 제기되었던 질문에서의 작지만 가위 혁명적인 재공식화(reformulation)의 영향을 보이지 않게 가려 버리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적 발견 이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갈릴레오로, 그리고 갈릴레오로부터 뉴턴 역학으로의 전이에 관해 훨씬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질문과 해답의 공식화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변화이다. 그러한 변화들을 감추어 버림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선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교과서의 경향은 과학적 발전의 가장 의미 깊은 일화들의 핵심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보이지 않게 숨겨 버린다.
앞의 예들은, 각각 단일한 혁명의 맥락에서, 혁명 이후의 과학 교과서에 의해 정규적으로 완결되는 역사의 재정립의 시작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그 완성에는 위에서 예증된 왜곡 역사적 왜곡 해석의 반복 이상의 것이 수반된다. 그들 잘못된 해석들은 혁명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려 버린다. 과학 교재에 실린 아직 눈에 보이는 자료의 배열은 혁명의 기능을 부정하게 될 과정__만일 그런 과정이 있다면__을 묵시적으로 시사한다. 왜냐하면 교과서란 학생들로 하여금 당대의 과학자 사회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익히는 것을 겨냥하므로, 교과서는 현행 정상과학의 다양한 실험, 개념, 법칙,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다루게 된다. 교수법으로서의 이런 제시 기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역사적인 과학적 저작의 성향, 그리고 위에 거론되었던 수시로 발생하는 계통적 왜곡 해석과 연관지어 볼 때, 다음과 같은 강렬한 인상이 압도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과학은 한데 통합되어 현대의 기술적 지식의 총체를 구성하게 된 일련의 개별적 발견과 발명에 의해 현재 과학의 상태에 이르렀다. 교과서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시초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패러다임들 속에 구현된 특정 목표들을 향해 진력해 왔던 것이 된다. 흔히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에 비유되듯이, 과학자들은 당대의 과학 교과서 속에 제공된 정보 더미에 또 다른 사실, 개념, 법칙 또는 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전되어 온 방식이 아니다. 현대의 정상과학에서의 수수께끼들은 대부분 가장 최근의 과학혁명이 완결되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 중 극히 소수만이 그것들이 현재 일어나는 속에서 과학의 역사적 시초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다. 보다 앞서 간 세대들은 그들 나름의 기기와 해결의 규범을 갖고 그들 고유의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변화를 거쳤던 것은 단순히 문제들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과서 패러다임이 자연에 일치시키는 사실과 이론의 전체 조직망 구조가 변동을 겪은 것이다. 예컨대 화학적 조성이 일정하다는 사실은 화학자가 활동했던 어느 세계 속에서 실험에 의해 발견해 낼 수 있었던 단순한 경험적 사실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돌턴이 도중에 그 경험을 변화시키면서 전반적으로 이전의 화학적 경험에 일치시켰던 관련 사실과 이론의 새로운 체계 속에서의 한 요소__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가결의 요소__인 것인가? 또는, 마찬가지 논리로서, 일정한 힘에 의해 생겨나는 새로운 체계 속에서의 요소__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가결의 요소__인 것인가? 또는 마찬가지 논리로서, 일정한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정한 가속은 역학을 다루는 연구자들이 항상 추구해 왔던 단순한 사실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그것은 뉴턴 이론의 맥락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 이론만이 그 질문이 제기되기 이전에 주어졌던 전체 정보로부터 대답될 수 있었던 것인가?
여기서 이 질문들은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 발견 사실들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질문들은 교과서가 이론으로서 제시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암묵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 이론들은 '사실들에 일치(fit the facts)'되지만, 이전부터 접할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전의 패러다임하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들로 변형시킴으로써만 그렇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론들 역시 항상 존재해 왔던 사실에 부합되도록 단편적으로 진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론들은 이전의 과학 전통의 혁명적 재공식화로부터 일치화된 사실들과 더불어 출현하게 되는데, 이전의 전통 속에서는 지식을 매개로 하는 과학자와 자연 사이의 관계가 새 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가지 예를 들면, 교과서의 서술이 과학적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초보적인 화학 교과서는 어느 것이나 화학 원소의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 이런 개념이 도입될 때면 거의 언제나 그 기원은 17세기 화학자 보일(Robert Boyle)에게로 돌려지고 있는데,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의 저서 "회의적 화학자(sceptical Chymist)"에서 요즈음 사용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원소(element)'의 정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일의 공헌에 대한 언급은 초보자로 하여금 화학은 예컨대 설파제(sulfa drug)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덧붙여 그것은 과학자의 전통적 임무 가운데 하나가 이런 종류의 개념들을 창안해 내는 것임을 일러준다. 과학자를 양성하는 교육적 병기고의 일부로서 보일의 공헌을 인용한 것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학적 활동의 성격에 대해 학생과 일반인 모두를 오해로 이끄는 역사적 과오의 양상을 다시 한번 보여 주게 된다.
보일에 따르면__그는 확실히 옳았다__그의 원소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전통적인 화학적 개념의 부연 설명에 불과했다. 보일은 다만 화학 원소 따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정의'를 내놓은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보일의 공헌에 대한 교과서의 해석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3)물론 데이터에 대한 다른 여러 해석 착오보다 더 사소할 것도 없지만, 그런 잘못은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은 이런 종류의 오류가 복합되어 다음 단계로 교과서의 기술적 구조(technical structure) 속에 자리잡게 될 때 끼치게 되는 과학에 대한 인상의 문제는 사소하지가 않다. '시간', '에너지', '힘' 또는 '입자'와 마찬가지로, 원소의 개념은 전혀 창안되거나 발견되지도 않는 그런 종류의 교과서 구성 요소이다. 특히 보일의 정의는 적어도 그 이전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그 이후로는 라부아지에를 거쳐 현대의 교과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고적부터 현대적 원소 개념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일의 경우와 같은 언어상의 정의에는 그 자체로서 고려될 때 과학적 내용이 별로 들어 있지 않다. 그런 정의는 의미가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특수화된 것(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이 못 되며, 그보다는 교육상의 보조물에 가깝다. 그것들이 지시하는 과학적 개념은 교과서나 다른 체계적 저술 내에서 여타의 과학적 개념들, 처리과정, 그리고 패러다임 응용례 등과 연관될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원소의 개념과 같은 개념은 그 배경 맥락과 분리해서는 거의 창안될 수 없다. 더욱이 일단 맥락이 주어지면, 그 개념들은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이므로 별로 창안을 요할 것도 없어진다. 보일과 라부아지에는 둘 다 중요한 방식으로 '원소(element)'의 화학적 의미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개념을 새로 창안한 것이 아니었고, 그 정의로서 사용되는 언어의 공식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연구 주제의 맥락 내에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을 창안해내거나 명료하게 재정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정의(definition)'를 포함한 보일의 연구에 있어서 그의 역사적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원소'와 화학적 조작 및 화학적 이론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 개념을 이전과는 매우 다른 수단으로 변형시켰고, 그 과정에서 화학과 화학자의 세계를 아울러 혁명을 비롯한 여타의 과학혁명들은 반드시 그 개념에 현대적인 형태와 기능을 부여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러나 보일은 이들 각 단계에 수반되는 과정 그리고 기존 지식이 교과서에서 구체화될 때 그 과정에 나타나는 변화의 두 가지에 대한 전형적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한 교육 형태는 과학의 다른 어느 측면보다도 강하게, 과학의 성격 그리고 과학 진보에서의 발견과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결정지어 왔다.
@ff "주"
1) L.K. Nash, "The Origins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Isis XLVII(1956), 101-16. 2) 뉴턴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Florian Cajori (ed.), Sir Isaac Newton`s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and His System of the World (Berkeley, Calif., 1946), p.21. 이 문구는 다음 참고 문헌에 실린 갈릴레오 자신의 논의와 비교되어야 한다. Dialogues concerining Two New Sciences, trans. H. Crew and A. de Salvio (Evanston, (III., 1946), pp. 154-76. 3) T. S. Kuhn, "Robert Boyle and Structural Chemistry in the Seventeenth Century", Isis, XLIII(1952), 26-29. 4) Marie Boas, Robert Boyle and Seventeenth-Century Chemistry (Cambridge, 1958)는 여러 군데에서 화학 원소라는 개념의 출현에서 보일이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ff
XII. 혁명의 해결 The Resolution of Revolutions
우리가 방금 논의했던 교과서들은 과학혁명이 일어난 후에서야 만들어진 것들이다. 교과서들은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에 대한 기반이다. 교과서의 구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한 단계 빠뜨렸다.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그 이전의 것을 대체하게 되는 과정은 무엇인가? 발견으로든 이론으로든 간에, 자연에 관한 새로운 해석은 우선 어느 개인 또는 소수 개인의 정신에서 나타난다. 과학 그리고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처음 익히는 것은 바로 그들이며, 천이를 일으키게 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 전문 분야의 대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지 않은 두 가지 상황에 의해 성숙된다. 언제나 그들의 관심은 위기를 조성하는 문제들에 강력하게 집중되어 왔다. 더욱이 통상적으로 그들은 위기가 닥친 분야에 극히 생소한 젊은 학자들인 까닭에 대다수 당대 학자들에 비해 옛 패러다임에 결정된 세계관과 법칙들에 대해 다소 약하게 얽매여 왔다. 그 전문분야의 전체 또는 관련된 소그룹을 자신들의 과학과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엇이 그 그룹으로 하여금 정상 연구에서의 전통을 버리고 다른 전통을 버리고 다른 전통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이런 질문 등의 긴급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것들이, 정립된 과학 이론들의 시험 (testing), 확증(verification) 또는 오류입증(falsification) 등에 대한 철학자의 탐구에 과학사학자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재해석 방법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상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수수께끼의 해결자일 뿐 패러다임의 검증가는 아니다. 어느 특정 문제의 풀이를 찾는 동안 과학자는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접근법을 피해 수많은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게 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가 패러다임을 검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과학자는 오히려 마치 논술된 문제와 실제상의 또는 상상의 장기판을 자기 앞에 놓고 해결책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체스를 두는 사람과 흡사하다. 이러한 연습의 시도는, 체스를 두는 사람에 의해서건 과학자에 의해서건, 그 자체로서의 시험일 뿐이지 게임과 규칙 등에 대한 시험은 아니다. 그것들은 패러다임 자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패러다임 검증(paradigm-testing)은 주목할 만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거듭된 실패가 위기를 초래한 뒤에라야 비로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조차도 위기 의식이 패러다임의 대안적 후보를 출현시킨 뒤에라야 일어나게 된다. 과학에 있어서는 시험 상황이, 수수께끼에서 그러하듯이, 단순히 단일 패러다임과 자연과의 대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검증은 과학자 사회에 충실하려는 두개의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경합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 공식화는 사실입증(verification)에 대한 가장 흔한 현대의 두 가지 철학적 이론에 대해 뜻밖의 그리고 아마도 유의미한 유사 관계를 드러낸다. 과학이론의 사실입증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추구하는 과학 철학자는 아직 까지 매우 드물다. 어떤 이론도 관련되는 시험에 모두 접해 볼 수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그들은 이론이 입증되었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에 비추어 그 이론의 개연성(probability)에 대해서 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유력한 학파는 바로 손안에 있는 증거를 설명해 내는 상이한 이론간의 능력을 비교하도록 된다. 이렇게 이론 사이의 비교를 고집 하는 것은 새로운 이론이 수용되어지는 역사적 상황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사실 입증에 대한 미래의 논의가 지향하게 될 하나의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가장 통상적인 형태로서, 개연론적 사실입증 이론(probabilistic verification theory)들은 모두가 Ⅹ절에서 논의된 순수한 또는 중립적 관찰-용어들에 의지한다. 한 가지 개연성 이론은 주어진 과학 이론을 같은 관찰 자료 더미에 일치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론과 비교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이론은 주어진 과학 이론이 통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시험을 상상 속에서 구성해 볼 것을 요구한다.1) 분명히 그러한 구성의 몇 가지는,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간에, 특이한 확률성의 계산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나, 이러한 구성의 몇 가지는,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간에,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미 강조했듯이, 언어상 또는 개념상의 과학적 또는 경험적으로 중립의 체계가 있을 수 없다면, 교대하여 일어나는 시험과 이론의 제안된 골격은 이런저런 패러다임-근거의 전통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렇게 제한됨으로써 그 구조는 가능한 경험들 또는 가능한 이론들에 모두 접근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개연성 이론들은 그것들이 그것을 확실히 밝히는 것에 못지 않게 시실 입증상황을 감추어 버린다. 그것들이 강조하듯이, 그런 상황은 이론들 사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증거들 사이의 대비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이론과 관찰은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실입증은 마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도 같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실제적 대안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뽑아 낸다. 여전히 여타의 대안들이 남아 있는 경우와 데이터가 다른 종류의 것인 경우, 그 선택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인가의 여부는 유용한 질문이 못된다. 그것에 대한 대답 등을 찾는 데 쓰일 도구 등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들의 이런 전반적 구조망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이, 사실입증 과정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칼 포퍼(Karl R. Popper)에 의해 전개되었다.2) 그는 그 대신 오류입증(falsification), 즉 테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류입증이 그 결과가 부정적인 까닭에, 정립된 이론의 폐기를 불가피하도록 몰아 간다. 분명한 것은 오류입증에 매겨진 역할은 이 에세이가 이상경험(anomalous experience), 즉 위기 유발에 의해 새로운 이론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경험에 부여한 역할과 매우 흡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 현상의 경험이 오류입증의 경험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나는 후자의 오류입증 경험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앞서 되풀이하여 강조되었듯이, 어느 주어진 시기에 당면하게 되는 수수께끼를 모두 풀 수 있는 이론은 없다. 이미 얻어진 풀이들 또한 완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반면에 어느 시기에든 정상과학을 특징짓는 수수께끼들의 대부분을 정의하는 것은 기존 데이터-이론일치(data-theory fit)의 미결정성과 불완전성이다. 만일 그런 일치의 어느 실패가 언제나 이론 거부의 근거가 된다면, 모든 이론들은 어느 때에나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단 한 번의 심각한 실패가 이론 폐기를 정당화한다면, 포퍼 학파는 '비개연성(improbability)'이나 '오류입증 정도(degree of falsification)'에 대한 어떤 규준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이론을 전재시킴에 있어 그들은 다양한 개연론적 사실 입증이론의 지지자들을 괴롭혔던 그런 난관들의 조직망에 당면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난관들은 과학적 탐구의 기초 논리에 대한 만연되고 상반된 견해들의 양진영이 둘 다 크게 대별되는 두 과정을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했음을 인식함으로써 많이 피할 수 있다. 포퍼의 이상 현상 경험은 그것이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경쟁 후보들의 출현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과학에 중요하다. 그러나 오류입증은 분명히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현상 또는 오류입증 사례의 출현과 더불어 또는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입증이라 불리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르는 결과적이며 개별적인 과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옛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연론자(probabilist)의 이론 비교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입증과 오류입증의 결합된 과정에서이다. 나는 그러한 두 단계 공식화는 훌륭한 사실 같음(verisimilitude)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사실입증과정에서의 사실과 이론 사이의 일치(또는 불일치)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터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과학사학자들에게는 사실증명이 사실과 이론의 일치를 확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론들은 모두 사실과 일치되었지만, 그러나 대체로 그러했을 따름이다. 어느 개별적 이론이 사실과 부합되는가 또는 얼마나 잘 부합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더 이상의 정확한 대답은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질문들은 이론이 총괄적으로 또는 쌍으로 다루어질 때 제기될 수 있다. 두 가지의 실제적이며 경쟁적인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과 더 잘 부합되는가를 묻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예컨대 프리스틀리의 이론이나 라부아지에의 이론 어느 것도 기존의 관찰 사실들과 엄밀히 일치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보다 합당하다는 결론을 맺는 데 10년 이상을 망설였던 당대의 학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화는 패러다임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을 그 실제이상으로 쉽고, 친숙해 보인다. 만일 단 한 계열의 과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면, 즉 그 내부에서 그들 문제에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들의 해결을 위한 한 계열의 기준만이 존재한다면, 패러다임의 경쟁은 각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과 같은 어떤 과정을 밟아 어느 정도의 관례적으로 해결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조건들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다. 경쟁적인 패러다임의 주창자들은 언제나 적어도 조금씩은 서로 엇갈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이 그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경험적 가정을 시인하려 하지 낳을 것이다. 화합물의 조성(composition)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프루스트와 베르톨레처럼, 그들은 부분적으로 각자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논의하게 마련이다. 과학과 그 문제들을 보는 데 있어서, 서로 상대방을 자기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를 원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입장이 증명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이 어째서 상대방의 관점에 완전히 접촉할 수 없는가의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 이유들은 총괄적으로 혁명 이전과 이유의 정상과학 전통에서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고 표현되었으며, 우리는 여기서 그것들을 간단히 요약하기만 하면 된다. 일차적으로 경쟁적인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은 흔히 패러다임의 어느 후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의 항목에 대해 의견이 상치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그들의 기준이나 정의도 동일하지 않다. 운동 이론은 물질 입자간에 작용하는 인력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운동 이론은 단순히 그러한 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한가? 뉴턴의 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카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그 질문에 대한 후자의 대답을 암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널리 거부되었다. 그리고 뉴턴의 이론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에 따라 하나의 질문이 과학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 해결되었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한 질문이다. 또는 19세기에 널리 퍼진 상태에서, 라부아지에의 화학 이론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금속은 어째서 그렇게 서로 비슷한가의 질문, 즉 플로지스톤화학이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까지 해 놓았던,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라부아지의 패러다임에로의 전이는, 뉴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와 마찬가지로, 허용되는 질문뿐만 아니라 완성된 풀이까지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멸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화학 물질의 성질에 대한 질문들은 그것에 관한 몇 가지 해답과 더불어 다시 과학에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일 표준상의 비교 불능성 이상의 것이 개재되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옛 것들로부터 탄생된 것이므로, 그것들은 보통 전통적 패러다임이 이전에 사용해 왔던 개념적이며 조작적인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차용한 이 요소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 내에서 옛 용어, 개념, 실험은 서로서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두 경쟁적 학파들 간의 오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공간이 '휘어 있을(curved)' 리가 없기 때문에__공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__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비웃어 넘겼던 보통 사람을 보고 단순히 틀렸다거나 잘못 생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 이론을 유클리드 식으로 전개하려 들었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도 틀렸던 것은 아니었다.3) 이전에 공간이 의미했던 것은 반드시 평평하고 동질적이고 균등성이며, 물질의 존재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뉴턴 물리학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그 요소를 공간, 시간, 물질, 힘 등으로 하는 전반적 개념상의 조직체계가 변형되어야 했고, 다시 전체로서 자연에 놓여져만 했다. 그러한 변형을 거쳤거나 또는 거치는 데 실패했던 사람들만이 자기들이 무엇에 대해 동의했고 동의하지 않았는가를 정확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라는 분수령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의사 소통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로서,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회전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돌았다고 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단순히 틀렸거나 또는 대단히 틀렸던 것도 아니다. 그들이 '지구'에 의해 의미했던 것에는 이미 고정된 위치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지구는 움직여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혁신은 단순히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고, 필연적으로 '지구'와 '운동'의 의미를 둘 다 바꾸어 버렸다.4) 그런 변화가 없이 회전하는 지구라는 개념은 미친 소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변화들이 이루어지고 이해되기에 이르자, 테카르트와 호이겐스는 둘 다 지구의 운동이 과학으로서 핵심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5)
이들 실례들은 경쟁적 패러다임들을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한 성격의 제3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잘 설명할 수가 없는 점은,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서서히 낙하하는 속박된 물체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운동을 되풀이하는 진자를 다룬다. 한 쪽에서는 용액이 화합물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혼합물이다. 한 쪽은 평평한 형태에 다른 한쪽은 곡면 형태의 공간에 포함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어느 것을 본다는 뜻은 아니다. 양쪽이 모두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는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또 서로 다른 관계에서 그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 그룹의 과학자들에게는 증명될 수도 없는 법칙이 다른 그룹에게는 직관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경우가 생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서 충분히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변동(shift)이라 불러온 개종(conversion)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것들 사이의 천이 (transition)이기 때문에, 경쟁적인 패러다임 사이의 천이는 논리에 의해 또는 가치 중립적 경험에 의해 강제되어 한 번에 한 걸음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게슈탈트 전한(gestalt switch)에서와 같이, 그것은 일시(반드시 한 순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에 일어나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러한 전위(transposition)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그 대답의 일부는 그들은 그런 전위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그가 죽은 지 거의 1세기가 지나도록 소수의 전향자밖에 얻지 못했다. 뉴턴의 연구는 "프린키피아(Principia)"의 출간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특히 대륙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6) 프리스틀리는 산소 이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켈빈 경 역시 전자기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 밖에도 그런 예는 계속된다. 개종의 어려움은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자주 주목을 받아 왔다. 다윈의 그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의 마지막 부분의, 유난히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귀절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 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리 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갖고 미래를 바라본다―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 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7) 그리고 플랑크는 그의 "과학자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에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서글프게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다."8)
이런 사실과 그 비슷한 여러 사실들은 너무 흔하게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그런 사실들이, 과학자들은 단지 인간에 불과할 따름인지라 엄정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간주되었다. 나는 이 문제들에 있어서는 증명 또는 착오의 어느 것도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conversion experience)이다. 특히 정상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이 일생에 걸려 벌리는 저항은 과학적 기준의 위반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지표가 된다. 저항의 근원은 결국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 줄리라는 확신, 즉 자연이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틀 속으로 맞춰진 다는 확신에 있다. 사실상 때때로 그렇게 되듯이. 혁명기에는 그런 확신은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확신은 또한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다. 바로 그 확신은 정상과학 또는 수수께끼 풀이의 과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전문 사회가 보다 낡은 패러다임의 잠재적 전망과 정확성을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다음 단계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게 되는 연구를 통해 난관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길이란 정상과학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이 불가피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패러다임 변화가 증명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논증도 무관하다거나 또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정신을 바꾸도록 설득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변화를 일으키는 테 한 세대가 걸리기도 하지만, 과학자 사회는 다시 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들로 계속 전향해 왔다. 더욱이 이들 개종들은 과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 특히 나이가 많고 보다 노련한 과학자들은 무작정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견해를 움직이는 쪽으로 접근될 수 있다. 최후의 저항이 사라지고 난 뒤, 전문가 사회 전체가 다시금 단일한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 아래 연구를 수행하기까지는 개종이 한 번에 몇 가지씩 발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개종이 어떻게 유발되며 어떻게 저항 받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 것은 설득의 기술에 대한 물음이거나 또는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논증과 반대 논거에 대한 물음인 까닭에, 우리의 질문은 이전에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유형의 연구를 요하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대단히 부분적이고 인상적인 성격의 개괄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은, 증명보다 오히려 설득력에 관해 묻게 되는 때에는 과학적 논증의 성격에 관한질문에 단일하고 획일적인 대답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런 고찰 결과들과 부합된다. 과학자들은 각각 온갖 종류의 이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게 되는데. 보통 한번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수용하게 된다. 이들 이유 가운데 몇 가지__예를 들면 케플러를 코페르니쿠스주의자로 전향시킨 태양숭배사상__는 전적으로 확실한 과학 영역의 왜곡에 속하는 것이다.9) 그 밖의 다른 이유들은 과학자의 생애와 성격의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개혁자와 그 스승들의 국적이나 이미 쌓은 명성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10)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이 질문들을 달리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 사람 저 사람을 개종시키는 논거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단일 그룹으로서 조만 간에 재형성될 과학자 사회의 성격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마지막 절로 미루어 두고, 여기서는 패러다임 변화를 둘러싼 싸움에서 특히 효과적이라 입증된 논증의 몇몇 유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가장 유력했던 유일한 주장은 그들이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이끌고 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경우에는, 흔히 이 주장은 있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주장이 진전된 영역에서 그 패러다임은 난관에 처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 난관은 거듭 탐사되어 왔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들은 되풀이되어 허사로 드러났다. '결정적 실험들(crucial experiments)'__두 가지 패러다임을 특히 날카롭게 구분시켜 줄 수 있는 실험들__이 새로 패러다임이 미처 창안되기도 전에 인식되어 왔고 시험되어 왔다. 그렇게 하여 코페르니쿠스는 오랜 세월 동안 말썽거리였던, 1년의 길이라는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주장했고, 뉴턴은 지상계의 역학과 천상계의 역학을 조화시켰노라고 주장했으며, 라부아지에는 기체의 정체(gas-identity)와 중량 관계의 문제들을 해결했노라고 주장했고, 아인슈타인이 수정된 운동의 이론과 부합되는 전기역학(electrodynamics)을 탄생시켰노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경쟁 상대보다 훨씬 우월한 양적인 정확성을 나타내는 경우에 특히 성공할 확률이 크다. 프톨레아이오스 이론으로부터 얻어진 모든 계산에 대한 케플러의 루돌핀(Rudolphine)도표의 수리적 우월성은 천문학자들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으로의 개종에서 주된 요인이었다. 수리천문학적 관측의 정량적 예측에서 보인 뉴턴의 성공은, 그 분야의 보다 합리적인 정성적인 경쟁 이론들을 물리치고 그의 이론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이유였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플랑크(Planck)의 복사 법칙과 보어(Bohr)의 원자모형에서 이루어진 획기적인 정량화의 성공은, 물리과학의 전반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이 해결한 것 이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그 이론들을 받아들이도록 단기간에 납득시켰다.11)
그러나 위기를 야기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충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떳떳하게 주장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비해 더 정확할 것도 없었고, 직접적으로 달력의 개량에 기여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 발표된 후 여러 해 동안, 빛의 파동 이론은 광학의 위기에서 주된 원인이었던 편광효과(polarization effects)를 해결함에 있어 그 적수 였던 빛의 입자설만큼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때로는 비상 연구를 특징짓는 보다 느슨한 연구의 수행은 위기를 야기한 문제에 초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패러다임 후보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흔히 그렇듯이 그 분야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증거가 유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다른 영역에서는, 만일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것이 통용되었던 동안에는 전혀 의문시되지 않았던 현상들의 예측을 허용하게 되는 경우, 특히 설득력이 강한 논증이 전재될 수 있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행성들이 지구와 유사하며, 금성이 위상(phases)을 나타내며, 우주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활함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하였다. 그 결과, 그의 죽음 이후 60년이 지나, 돌연 망원경을 통해 달의 산들과 금성의 위상 현상, 그리고 전에는 예측하지도 못했던 무수한 별들이 나타났으며, 그러한 관측 사실들은 새이론에로 많은 전향자들__특히 비천문학자들__을 끌어들이게 만들었다.12) 파동 이론의 경우에는 전문가 사회의 개종을 일으킨 주된 근원이 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프레넬(Fresnel)이 회전 원반의 그늘 중심에 흰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을 때, 프랑스 학자들의 저항은 졸지에 그리고 거의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은 프레넬로서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였으나, 당초 그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푸아송(Poisson)은 엉뚱하지만 필연적인 프레넬 이론의 결과임을 증명해 보였다.13)그것들의 충격적 영향 때문에 그리고 처음부터 새 이론에 "끼워 맞춰진(built into)" 것이 아님이 매우 명백했기 때문에, 이것들과 같은 논증은 특히 설득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수성의 근일점(mercury`s perhhelion)의 운동에서 잘 알려진 이상(anomaly)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단한 승리감을 느꼈던 것이다.14)
이제까지 논의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든 논증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경쟁 패러다임의 상대적 능력에 바탕한 것이었다. 과학자들에게는 그러한 논거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의미 있고 설득력 있는 것이다. 앞의 실례들은 그 강력한 호소력의 원천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곧 되돌아가 살피게 될 이유들로 해서, 그것들은 개별적으로나 총괄적으로나 강제성을 띠지는 못한다. 다행히도 또 다른 종류의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완전히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적절한 것이나 심미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감각에 호소하는 논증들이다__새로운 이론은 옛것에 비해 '보다 간결하고(neater)', '보다 적합하고(more suitable)', '보다 단순하다(simpler)'고 얘기된다. 아마도 이런 논거들은 수학에서 보다 과학에서는 덜 효과적일 것이다. 대부분의 새 패러다임의 초기 형태는 미숙한 것이다. 그 심미적인 호소력이 완전히 갖추어질 수 있을 때에는, 과학자 사회의 대다수가 다른 방식을 통해 설득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고찰의 중요성이 때때로 결정적으로작용하는 수가 있다. 그러한 심미적 요소를 통해 새로운 이론으로 이끌리는과학자의 수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패러다임의 궁극적 승리는 바로 그 소수에 의존할수가 있다. 만일 그들이 그 패러다임 후보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해서 채택하지않았더라면,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는 과학자 사회 전체를 이끌 만큼 충분히 전개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보다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고찰의 중요성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 논쟁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최초로 제안될 때, 이는 그것이 당면한 문제들 가운데 소수만을 풀어 낼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그런 풀이들도 아직은 매우 미흡한 상태이다. 케플러의 출현이 있기까지,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작성된 행성 위치에 대한 예측을 거의 개량시키지 못하였다.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공기자체(the air itself entire)'로 보았을 때 그의 새 이론은 새로운 기체들의 종류가 늘어남에 따라 제기된 문제들, 즉 프리스틀리가 매우 성공적으로 반격을 가했던 요점에 대해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프레넬의 흰 점과 같은 경우들은 극히 드물다. 통상적으로 명백히 결정적인 논거들이 전개되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수용되고 탐사된 이후 훨씬 지나서의 일이다__지구의 자전을 입증하는 푸코(Foucault) 진자나 빛이 물 속에서 보다 공기 중에서 더 빠르게 운동한다는 것을 보여 준 피조(Fizeau)의 실험이 모두 그러했다. 그것들을 생산하는 일은 정상과학의 일부이며, 그것들의 역할은 패러다임 논쟁에서가 아니라 혁명 이후의 교과서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교과서가 집필되기 이전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보통 새로운 패러다임의 반대자들은 위기에 처한 영역에서조차도 그것이 그 전통적 적수인 패러다임보다 거의 우월한 점이 없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문제들을 더 잘 다루기도 하고 몇몇 새로운 법칙들을 밝혀 놓기도 한다. 그러나 옛 패러다임도 이전에 다른 도전들에 대응했듯이, 그 패러다임들은 그러한 도전에 만족되도록 명료화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티코 브헤(Tycho Brahe)의 부분 수정된 지구 중심의 천문학 체계, 그리고 플로지스톤 이론의 후기 수정안은 둘 다 상당히 성공적인 것이었다.15) 더욱이 전통적 이론과 과정의 옹호자들은 거의 어김없이 그 새로운 적수 패러다임으로는 풀지 못하나 그들의 관점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는 문제들을 선정해 낼 수 있다. 물의 조성이 밝혀지기까지, 수소의 연소반응은 플로지스톤 이론에 유리하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위배되는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그리고 산소 이론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탄소로부터의 가연성 기체의 제조를 설명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플로지스톤 학파가 그들의 견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지적했던 현상이었다16 위기에 처한 영역에서조차도, 논증과 반대 논증(counterargument)의 균형은 때로는 참으로 그 우열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영역 밖에서는 흔히 균형은 결정적으로 전통 쪽에 기울게 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로부터의 지상계에서의 운동에 대한 전통 이론을 대체함이 없이 그것을 파괴시켜 버렸다. 뉴턴도 중력에 대한 옛 전통적 설명에 대해 마찬가지 파괴를 일으켰으며, 라부아지에는 금속의 공통성에 대해 그러한 결과를 빚는 등 그 밖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요컨대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처음부터 상대적 문제 해결 능력만을 검토했던 완고한 사람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과학은 극소수의 주요 혁명만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서 패러다임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이라 칭한 것에 의해 형성된 반대 논증들까지 덧붙인다면, 과학은 혁명이라고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러다임 논쟁에 대체로 그러한 견지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이 상당히 타당하기는 하지만, 그 논쟁들은 참으로 상대적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논의의 핵심은 어떤 경쟁 패러다임도 완전히 풀었다고 주장하지는 주장하지 못하는 다수의 문제들에 대해 과연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에 필요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결정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되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문제 해결에 의해 제공되는 증거가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흔히 생긴다. 즉, 그는 옛 패러다임이 소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는 것만을 아는 상태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것이 당면한 다수의 주요 문제들에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종류의 결정은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행되는 위기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과학자들은, 곧 도깨비불이라고 밝혀지고 또 그렇게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을 따르기 위해, 문제 해결의 확고한 증거를 부인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선택된 특정 패러다임 후보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그 근거가 합리적이거나 궁극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근거가 아울러 존재해야 한다. 무언가가 적어도 몇 명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제안이 올바른 궤도에 올라 있음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이고 불분명한 심미적인 고찰뿐일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대부분의 명확한 기술적 논증(technical arguments)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에 그런 고찰들에 의해 믿음을 바꾸어 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도 또는 드 브로이(De Broglie)의 물질 이론도 처음 제안되었을 때에는 의미 있는 설득력의 근거를 많이 갖추지 못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로 심리적 근거에서 사람들을 끌고 있으며, 이런 호소력은 수학 분야의 이방인으로서는 느끼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궁극적으로 어떤 신비적인 심미주의(aesthetic)를 통해 성공을 거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만으로 과학 전통을 폐기하는 과학자는 매우 드물다. 그런 태도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으로 판명되는 일이 잦다. 그러나 하나의 패러다임이 승리를 거두려면 초기에 우선 몇몇 지지자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들은 확고한 논증이 이루어지고 증식될 수 있을 정도까지 그 패러다임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논증들조차도 그것들이 나타날 무렵에는 각각으로서 결정적인 것은 못 된다.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인 까닭에, 여러 가지의 논거를 거쳐가면서 결국 많은 과학자를 설득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설득할 수 있거나 설득시켜야 하는 단일한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일어나는 일은 단일 그룹의 개종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의 신념의 분포에서 점차로 전이가 증대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는 당초에는 지지자도 거의 없고 지지자의 동기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이 유능한 경우에는 패러다임을 개량하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과학자 사회가 어떤 것이 되는가를 보여 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진행됨에 따라, 만일 패러다임이 투쟁에서 승리를 거둘 운명이면, 설득력 있는 논증들의 수효와 강도가 증강될 것이다. 그에 따라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개종하게 될 것이고, 새 패러다임의 탐사 작업이 계속될 것이다. 그 패러다임에 기초한 실험, 기기, 논문 그리고 서적 등의 수효가 점차 불어날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이 효과적임에 납득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게 되면서, 결국 소수의 나이 많은 저항자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조차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사학자는 역사에서 항상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틴 비합리적이었던 사람들__이를테면 프리스틀리__을 만날 수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의 저항을 가리켜 비논리적 또는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껏해야 과학사학자는 전문 분야가 온통 개종된 후에도 계속 버티는 사람은 사실상(ipsofacto)과학자이기를 거부한 것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ff "주"
1) 개연성의 확인 증명 이론에 이르는 주요 경로에 관해 간명하게 추린 것이 다음에 실려 있다. :Ernest Nagel, Principles of the Theory of Probability, Vol.I, No. 6, of International Encyulopedia of Unified Science,pp. 60-75. 2) K. R.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Neew York, 1959), 특히 i-iv장. 3) 휘어진 공간의 개념에 대한 비전문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Philipp Frank, Einstein, His Life and Times, trans. and ed. G.Rosen and S.Kusaka(New York, 1947),pp.142-46. 유크리드 공간 내에서의 일반 상대성의 증가를 보존하려는 시도 가운데 몇 가지는 다음에 실려 있다. C. Nordmann, Einstein and the Universe, trans. J. McCabe(New York, 1922), chap.ix. 4) T.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Cambridge, Mass., 1957), chaps. iii, iv, and vii. 태양 중심설이 철저히 천문학적 주제 이상이었던 내용이 이 책의 전반적인 테마이다. 5) Max Jammer, Concepts of Space (Cambridge, Mass., 1954), pp. 118-24. 6) I. B. Cohen, Franklin and Newton : 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of (Philadelphia, 1956), pp.93-94. 7)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authorized edition from 6th English ed. ;New York, 1889),II, 295-96. 8) Max Planck, Scientific Autobiography and Other Papers, trans. F. Gaynor (New York, 1949). pp. 33-34. 9) 케플러의 사고에서 태양숭배사상이 어떤 구실을 했는가는 다음 책에 실려 있다. E. A. Burtt, The Metaphysical Foundations of Modern Physical Science(rev.ed. ;New York, 1932), pp.44-49. 10) 명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고려해 보라:레일레이 경(Lord Rayleigh)은 그의 명성이 확고해진 시기에 전기역학의 몇몇 패러독스에 관한 논문을 British Association 에 제출하였다. 논문이 처음 제출되었을 때, 자칫 실수로 그의 이름이 빠져 버렸고, 그 논문은 처음에는 어떤 "역설가(paradoxer)" 의 연구라 하여 거부되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저자의 이름이 삽입되자, 그 논문은 톡톡히 사과를 받으면서 기꺼이 수락되었다.{R. J. Strutt, 4th Baron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Third Baron Rayleigh (New York, 1924), p. 228]. 11) 양자론에 의해 발생된 문제들에 관해서는 F. Reiche, The Quantum Theory (London, 1922), chaps. ii, vi-ix을 보라. 이 문단에서의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는 XII절 앞 부분의 주 참조. 12) Kuhn, op. cit., pp. 219-25. 13) E. 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2ded.;London, 1951), p.108. 14)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ibid., II(1953), 151-80. 그 이론이 수성의 근일점의 운동에 대한 관찰과 꼭 들어 맞았을 때 아인슈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는 다음 참고문헌에서 인용한 편지에 실려 있다:P. A. Schilpp(ed),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vanston, III., 1949), p. 101. 15) 기하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것과 완전히 동일했던 브라헤의 체계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J. L. E. Dreyer, A History of Astronomy from Thales to Kepler(2d ed. : New York, 1953), pp. 359-71. 플로지스톤 이론의 최종안과 그 성공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J. R. Partington and D. Micke, "Historical Studies of the Phlogiston Theory", Annals of Science, IV(1937), 113-49. 16) 수소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는 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d ed.; London 1951), p. 134를 참조. 일산화탄소에 대해서는 H. Kopp, Geschichte der Chemie, III(Braunshcweig, 1845), 294-96을 보라.
@ff XIII. 혁명을 통한 진보 Progress through Revolutions
앞절까지의 내용은 이 에세이에서 다룰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과학적 발전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 도식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것이 제대로 결론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만일 이러한 설명이 과학의 지속적 발전의 본질적 구조를 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와 동시에 특이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어째서 앞에서 묘사한 과학 활동은 예컨대 예술, 정치 이론, 또는 철학이 변천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전진해 나가는가? 어째서 진보는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활동들만을 위해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된 특별 조건이란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통상적인 대답은 이 에세이의 내용에서 부인되어 왔다. 우리는 대안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물음으로써 그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물음의 일부는 전적으로 어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라는 용어는 확실한 방식으로 발전이 일어나는 분야에만 쓰인다. 이 성격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이런 저런 현대의 사회과학들이 참으로 과학인가에 관한 되풀이되는논쟁에서이다. 이들 논쟁은 오늘날 서슴없이 과학이라 분류되는 분야들의 패러다임__이전 시대에서 그 유사성을 갖는다. 전체를 통틀어 그것들의 표면적 주체는 그 난감한 용어의 정의이다. 사람들은 예컨대 심리학은 이러저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특성들은 한 분야를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시키는 데 불필요하거나 충분치 않다고 반박한다. 이런 싸움에는 흔히 막중한 노력이 투입되고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기도 해서,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이유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진다. '과학'의 정의 (definition)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 정의가 어느 사람에게 그가 과학자인가 아닌가를 말해 줄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자연과학자나 예술가들은 그 용어의 정의에 신경을 쓰지 않는가? 이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실제로 제기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나의 분야는 예컨대 물리학과 같은 방식으로 진전되지 못하는가? 기술이나 방법, 또는 이념에서의 어떠한 변화가 그것을 그렇게 진보되도록 만드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들을 정의에 일치되도록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다. 더욱이 자연과학으로부터의 전례가 적용된다면, 그것들은 정의가 발견될 때가 아니라 현재 그들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는 그룹들이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업적에 대하여 합의를 이룰 때, 더 이상 고려의 원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학자들이 그들 분야가 과학이냐 아니냐에 관해 사회과학의 다른 여러 분야의 학자들보다 논쟁을 덜 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이 과학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합의를 이룬 것이 경제학이기 때문인가?
더 이상, 단순히 의미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관점은 과학 그리고 진보의 관념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전환 명제이다, 고대에서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나 수세기 동안 회화(painting)는 확실히 누적적 발전을 하는 분야로 간주되었다. 그 기간 동안 화가의 목표는 묘사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플리니(Pliny)와 바자리(Vasari)같은 비평가이자 역사학자들은, 보다 완벽한 자연의 묘사들을 가능케 했던 명암법을 거쳐서 원근법으로부터 나온 일련의 창안에 경의를 표하며 기록하였다. 2) 그러나 과학과 예술 사이의 작은 틈이 느껴지게 된 것 역시 그 시기로서,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몇 해 도안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훗날에 이르러서야 범주상 명확히 구별지어진 분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던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2) 더욱이 그런 꾸준한 교류가 중단된 이후까지도, '예술'이라는 용어는 역시 발전적이라고 여겨졌던 기술과 공예에 대해서도 회화와 조각에나 마찬가지로 계속 적용되었다. 회화와 조각이 그 목표로서의 묘사를 명백히 부인하고 원시적인 모델로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간극이 현재의 깊이만큼 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다시 한번 분야를 바꾸어서 과학과 기술 사이의 심오한 상이성을 보는 데 있어서의 우리의 어려움은 진보가 두 분야 모두의 뚜렷한 속성이라는 사실과 일부 관련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전하고 있는 어떤 분야든지 과학이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문제점을 부각시킬 뿐이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제 문제로 남는 것은, 어째서 발전이 이 에세이가 서술한 기술(techniques)과 목표를 갖고 수행되는 과학 활동에서 그처럼 현저한 특징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하나 속에 여러가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여기서 그 각각을 개별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것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것들의 해결은 과학 활동과 그것을 수행하는 과학자 사회 사이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표준적인 견해의 반전에 일부 의존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결과라고 여겨져 왔던 것을 원인으로서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과학적 진보(scietific progress)', 그리고 심지어 '과학적 객관성(scientific objectivity)'이라는 어구는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런 중복성의 한 측면이 방금 제시된 바 있다. 그것이 과학이기 때문에 어느 분야가 발전을 이룩하는 것인가, 아니면 발전을 이룩하기 때문에 그것이 과학인 것인가?
이제 정상과학과 같은 활동이 어째서 발전할 것인가를 묻고, 정상과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몇 가지를 상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해 보자. 보통 성숙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일 패러다임으로부터 또는 밀접하게 연관된 패러다임의 한 벌로부터 연구를 수행한다. 서로 다른 과학자 사회가 똑같은 문제들을 고찰하는 겨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그룹들은 몇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건 비과학자들이건 간에 어느 단일 과학자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적인 창의적 작업의 결과는 바로 발전이라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진보를 기록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 밖의 창의적 분야들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진보를 보여 준다. 교의를 설파하는 신학자나 칸트의 무상명령(Kantian imperatives)에 관해 논하는 철학자는 그의 전제들을 공유하는 그룹에 대해서만이라도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창의적인 어느 학파도 한편으로는 창의적 성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그룹의 총체적인 업적에의 부가가 아닌 활동의 범주를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비과학 분야가 발전한다는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각 학파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각각 서로 다른 학파의 발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Aristotelianism)가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에 관한 이러한 의구심들은 과학에서도 역시 일어난다. 다수의 경쟁 학파가 존재하는 패러다임-이전 시대를 통틀어, 학파 내에서를 제외하면 발전의 증거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것은 II절에서 설명한 개인이 과학을 수행하는 시기에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의 연구 활동의 결과가 과학에 부가되지 않는다. 또한 한 분야의 기초적 교의가 다시 한번 논쟁거리가 되는 혁명의 시기에는, 반대되는 패러다임의 이런저런 것이 채택되는 경우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거듭해서 표출된다. 뉴턴주의(Newtonianism)를 거부했던 이들은 그 이론이 물질에 내재하는 본유적 힘(innate forces)에 의존함으로써 과학을 중세의 암흑 시대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실험실의 원소를 택하기 위해 화학적 '원소'의 개념을 배격하는 것은 유명론에 도피하려는 사람들에 의한 화학적 설명의 거부라고 보았다. 보다 완곡하게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이와 비슷한 감정은 또한 양자 역학의 유력한 확률적 해석에 대한 아인슈타인, 봄(Bohm)과 그 밖의 여러 학자들의 반대에 깔려 있었던 근거로 보인다. 요컨대 발전이 분명하고 동시에 확실해 보이는 것은 종상과학 기간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는 과학자 사회는 그 연구의 결실을 다른 방식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상과학에의 맥락에서, 발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단순히 관찰자의 시각에 달려 있다. 과학적 발전은 여러 타분야에서의 발전과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기에서 각각의 목표와 기준을 묻는 경쟁적인 학파의 부재는 정상과학 사회의 진보를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대답의 일부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앞에서 일단 공통된 패러다임의 수용으로 과학자 사회가 그 최초의 원칙들을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회의 관심을 끄는 현상의 가장 미묘하고 가장 비전의 것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음을 보았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그 그룹이 전반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효율성과 능률을 증대시킨다. 또한 과학에서의 전문 활동의 여러 성격들은 매우 특수한 이런 효율성을 더욱 증진시킨다.
이들 성격 중 일부는 성숙한 과학자 사회가 일반인과 일상 생활의 요구로부터 유례없이 고립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유리(insulation)가 완전했던 적은 없다.__우리는 지금 유리의 정도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창의적인 활동이 그렇듯이 배타적으로 그 전문 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공표되고 또 그들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전문 사회는 다시 더 없다. 가장 난해한 시인 또는 가장 추상적인 신학자라 할지라도 박수에는 신경을 덜 쓸는지 모르나, 자신의 창조적 작업에 대한 대중의 인정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관심이 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필연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과학자는 그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공유하는 청중인 동료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까닭에, 과학자는 단일한 한 벌의 기준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다른 그룹이나 학파가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하나의 문제를 처리한 후에는 보다 이질적인 그룹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 비해 더 빨리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 사회로부터의 과학자 사회의 유리는, 과학자 개인에 의해 풀릴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한 문제들에 그의 주의를 집중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공학자와 다수의 의사들과 대부분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자는 그 해결이 시급히 요청되고 그것들을 푸는 데 소용되는 수단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해서 문제들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과학자들과 다수의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차이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드러난다. 자연과학자들이 거의 그렇지 않은 데 비해, 사회과학자들은 흔히 연구 문제의 선택에 있어 주로 해결책의 강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견지에서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__예컨대 인종 차별의 결과라든가 경기 순환(business cycle)의 원인 등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러면 어느쪽 그룹이 더 빠른 속도로 문제들을 해결하리라 예상하리라 예상할 수 있을까?
보다 큰 사회로부터의 유리의 결과는 전문 과학자 사회의 또 다른 특성, 즉 비결을 전수하는 교육의 성격에 의해 대폭 강화된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이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 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런 형태의 교육이 매우 오랫동안 수행되어 온 것을 변명하는 대신, 우리는 이 방법이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효과적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정상과학적 연구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거의 완벽하게 대비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또 다른 임무__정상과학을 통한 유의미한 위기의 형성-에 대해서도 잘 대비되어 있다.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 과학자는 물론 그렇게 잘 대비된 상태가 못 된다. 만연된 위기가 덜 경직된 교육의 실제에 반영될지라도, 과학적 훈련은 쉽사리 새로운 접근법을 발견해 낼 인물을 양성하도록 잘 짜여져 있지 못하다. 그러나 누군가__보통 젊은 학자거나 그 분야에 신진인 인물__가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를 들고 나오는 한, 경직성으로 인한 손실은 오직 개인에게만 일어날 뿐이다. 그 변화가 영향을 미치는 세대에 이르게 되면, 개인적인 경직은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패러다임으로부터 옮겨갈 수 있는 집단과 양립하게 된다. 특히, 바로 이러한 경직성이 과학자 사회에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민감한 신호를 보내 줄 때 양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상 상태에서 과학자 사회는 그 패러다임이 규정하는 문제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있어 굉장히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더욱이 그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발전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만큼 이해하는 것은 과학의 진보라는 문제에서 제 2의 주요부를 부각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방향을 돌려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을 통한 발전에 대해 묻기로 하자. 어째서 진보는 과학혁명에서도 역시 확실하게 보편적인 부수물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다시금 과학혁명의 결과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를 물음으로써 이것은 명확해질 것이다. 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는 한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 그룹이 그 승리의 결과를 진보 이하의 무엇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틀렸고 상대편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의 결과는 발전이어야 하며, 그들은 자기들 사회의 미래의 구성원들이 과거 역사를 똑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XI절에서는 그것을 성취시키는 기술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고, 우리는 이제 막 전문 과학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성격으로 되돌아 왔다. 과학자 사회가 과거의 패러다임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전문적 연구에 적합한 주제로서의 그 패러다임이 구체화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과 논문들도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과학 교육에서는 예술 박물관이나 고전 도서실에 상응하는 어떤 것도 이용하지 않으며, 그 결과는 그의 분야의 과거에 대한 과학자의 인식에서 극적인 왜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창조적 분야의 종사자들 이상으로, 과학자는 그 결과가 그의 분야를 현재의 유리한 지위로 곧장 이끌어 주는 것이라 보게되며, 또한 그는 그 결과를 발전이라고 본다 과학자가 그 분야에 머물러 있는 한,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언급은 필연적으로, 성숙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은 오웰의 "1984년"의 전형적 인물처럼, 그 사회에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다시 쓰여진 역사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시사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 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떤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정의(in the sciences might makes right)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해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은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과학자 사회의 본질적 특성들은 무엇인가? 분명히 이런 특성은 엄청나게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 영역에서는 지극히 시험적인 일반화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과학 그룹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다수의 필수 요건은 이미 놀랄 만큼 확실히 드러나 있다. 예컨대 과학자는 자연계의 거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덧붙여, 그들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그 범위상 전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문제들은 세부적인 문제들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를 만족시키는 해답은 단순히 사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풀이로서 수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공유하는 그룹은, 전반적으로 사회로부터 무작위로 끌어내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정의된 과학자의 전문 동아리 사회가 된다. 아직도 쓰여지지 않았다면, 과학적 생애에서의 가장 강력한 규칙들 중 하나는 과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국가 원수 또는 일반 대중을 향한 호소의 금지를 들 수 있다. 특출하게 유능한 전문가 그룹의 존재의 인정과 전문적 업적에 대한 전폭적 조정자로서의 그 역할의 수용은 시사하 바가 더욱 심오하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는 훈련과 경험에 의해, 게임의 규칙을 가진 또는 명료한 판단을 위한 상응하는 기초를 갖춘 유일한 소유자로 보일 것이다. 그들이 평가에 필요한 어떤 기본 바탕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것은 과학적 성취의 양립 불가능한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인정은 필연적으로 과학에서의 진리가 하나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과학자 사회에 공통적인 특질의 이러한 일부 성격은 전적으로 정상과학의 실제로부터 끌어냈던 것이며, 또 그랬어야만 한다., 그것은 보통 과학자를 훈련시키는 목표가 되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들은 그러한 사회를 다른 모든 전문가 그룹으로부터 구별시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 원천이 정상과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들은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패러다임 논쟁 기간 동안 그 그룹이 보이는 반응의 여러 가지 특이한 성질들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유형의 그룹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발전이라고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런 인식이 중요한 측면에서 자기 충족적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해결되는 문제의 수효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성취의 단위는 해결된 문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과학자 그룹은 어느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풀렸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그러한 관점을 채택하려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자연은 그 자체가 우선 이전의 업적들이 문제성을 띤 것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전문 분야의 안정 상태를 깨뜨려야 한다. 더욱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서 패러다임의 새로운 대안이 부상했을 때라고 할지라도,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매우 중요한 조건들이 합치되지 않는 한 그것을 수용하기를 꺼릴 것이다. 첫째, 새로운 패러다임 대안을 여타의 방식으로는 대처될 수 없는 두드러지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여야 한다. 둘째,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선행 패러다임을 통해 과학에 조성되었던 구체적인 문제해결 능력의 상당히 큰 부분을 보전하리라 기약되어야 한다. 그 자체를 위한 새로운 혁신이란 다수의 다른 창조적 분야에서처럼 과학 분야들에서 절실한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들은 거의 또는 전혀 그 선행 패러다임들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보통 과거 업적의 가장 구체적인 부분들을 많이 보전하며, 항상 부가적인 구체적 문제-풀이들이 출현을 허용한다.
여기까지의 논의가 문제 해결 능력이 패러다임 선택에서의 독특하거나 또는 명료한 근거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어째서 그런 종류의 기준이 있을 수 없는가의 이유들을 여럿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전문가 사회가 정확하고 상세하게 다룰 수 있는 수집 자료를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 과정에서 과학자 사회는 손실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흔히 몇몇 구식 문제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더욱이 혁명은 자주 과학자 사회의 전문적 관심의 영역을 좁히고, 그 전문성의 정도를 높이며, 일인과 과학자 그룹을 포함한 다른 그룹과의 의사 소통을 저해한다. 가학의 깊이는 확실히 깊어지게 되지만, 그 폭은 그렇게 넓어지지 못할 것이다. 폭이 확장된다면, 그 폭은 어느 독자적 단일 전문 분야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주로 과학의 전문 분야들의 다변화에서 현저하게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개별적인 과학자 사회가 받는 영향 또는 기타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학자 사회의 성격은 과학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들의 목록과 각각의 문제 해결의 정확도가 둘 다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한다. 적어도 그것이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길만 있다면, 그 전문가 사회의 성격은 그러한 보장을 제공해 준다. 과학자 집단의 결정보다 더 상위인 기준이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바로 앞의 문단들에서는 과학에서의 진보라는 문제에 대한 보다 세련된 해결의 모색에서 추구돼야 할 방향들을 제시했다. 아마 이 방향은, 과학적 진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 유형의 발전이, 그러한 활동이 존속하는 한 필연적으로 과학 활동을 특징짓게 될 것임도 동시에 보여준다. 과학에는 다른 유형의 발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들이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점점 더 진리에 가깝게 인도하고 있다는 관념__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__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 놓을 때까지 이 에세이에서의 '진리(Truth)'라는 용어가 베이컨으로부터 인용된 의미로서만 언급되었음을 주목할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되었던 경우조차도, 그것은 단지 과학 활동에서의 양립될 수 없는 규칙들이 혁명기를 제외하고는 공존할 수 없다는 과학자의 확신의 원천으로서만 쓰여졌는데, 혁명기의 경우 전문 분야의 주된 임무는 오직 한 가지만을 남겨두고 모든 규칙 계통을 제거하는 일이 되다. 이 에세이에서 묘사된 발전의 과정은 원초적인 초기 단계로부터의 진화의 과정__뒤이어 계속되는 단계들이 자연에 대해 점점 더 상세히 세련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특징지워지는 과정__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이나 앞으로 더 얘기할 내용의 어느 것도 과학의 발전이 무엇인가를 향한 진화의 과정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하게 이 공백이 많은 독자들을 혼돈 시킬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과학에 그런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과학자 사회에서 어느 주어진 시점의 지식 수준으로부터, 진화의 견지에서, 과학의 존재와 그 성공 양쪽에 관해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가? 그것은 과학에는 자연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진리에 부합되게 하는 하나의 설명이 있으며,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합당한 측정이란 우리를 그 궁극적 목표에 얼마나 근접시켰는지를 나타내는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가? 만약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what- we- wish- to-know)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 -from- what- we -do - 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동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가 이 미로의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런 대안적 견해가 야기시킬 결과에 대해 아직 세부적으로 상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제안된 개념상의 전환이 바로 1세기 전 서구에서 발생했던 현상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두 경우에서 천이에 대한 주요 저해 요인이 동일하게 때문에 특히 도움이 된다. 다윈이 1850년에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그의 진화 이론(theory of evolution)을 처음 출판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species)변화의 개념도 아니었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아니었다. 인간의 진화를 비롯한 진화를 가리키는 증거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되어 왔으며, 진화의 개념은 이전에도 제안되었고 널리 퍼져 있었다. 진화의 개념 자체는 특히 종교 집단들로부터의 저항에 부닥쳤지만, 그것은 다윈주의자들(Darwinians)이 직면했던 가장 큰 난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 어려움은 다윈 자신의 발상과 매우 가까운 견해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었다. 다윈 이전 시대의 유명한 진화 이론들__라마르크(Larmarck), 쳄버스(Chambers), 스펜서(Spencer), 그리고 독일의 자연철학자들(Naturphilosophen)의 이론들__은 모두 진화를 목표 - 지향적 과정(goal -directed process)으로 간주하였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당시의 식물군, 동물군에 대한 '개념(idea)'은 최초 생명의 창생으로부터 어쩌면 신의 정신 속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러한 개념이나 계획은 전체적 진화 과정에 방향을 설정했고 길잡이가 되었다. 진화적 발전에서의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출발에서부터 존재했던 계획의 보다 완전한 실제화였던 것이다.4)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목적론적 성격의 진화론(teleological kind of evolution)의 붕괴는 다윈의 제안에서 가장 의미 깊고 가장 수용하기 곤란한 문제였다.5) "종의 기원"은 신이나 자연 그 어느 것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s)의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사람의 눈이나 손과 같이 놀랄 만큼 잘 적응된 기관들도 원시적인 태초로부터 출발한 그러나 목표 없이 꾸준히 진행되었던 과정의 산물이었다__그 기관들은 이전에는 지고의 조물주와 예정된 계획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논거가 되었던 것이었다. 생존을 위한 유기체들 간의 단순한 경쟁의 결과인 자연선택이 고등 동식물과 더불어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믿음은 다윈 이론에서 가장 난해하고 혼돈스러운 측면이었다. 특정한 목표가 없는 터에 '진화(evolution)', '발전(development)', '진보(progress)'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용어들은 갑자기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기체의 진화를 과학적 개념의 진화에 관련시키는 유비(analogy)는 너무 지나치게 비약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절의 주제들에 관한 한,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절에서 혁명의 해결이라고 묘사되었던 과정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미래의 과학을 수행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찾으려는 갈등에서 빚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정상 연구의 시기에 의해 리된 그러한 일련의 혁명적 선택들의 알짜 결과가 우리가 현대 과학 지식이라 부르는 놀랄 만큼 잘 적응된 장치들이다. 그 발전과정에서 연속되는 단계들은 명료성과 전문성의 증대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생물학적 진화가 그러했으리라 상상하는 바와 같이, 과학 발전의 전과정은 설정된 목표, 영구적으로 고착화한 과학적 진리의 혜택이 없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데, 그 설정된 목표에 대해서는 과학지식의 발전에서의 각 단계는 보다 훌륭한 모범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의 논의를 따라온 독자는 누구나, 왜 진화과정이 들어맞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과학이 가능하려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왜 과학자 사회는 다른 분야가 다다르지 못하는 확고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하는가? 어째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계속적으로 거쳐가면서 줄곧 여론의 일치를 루어야 하는가? 어째서 패러다임 변화는 항상 이전에 알려졌던 것들보다 어떤 의미에서든 더 완벽한 도구를 만들어 내야 하는가?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첫 번째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답변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에세이를 시작했을 때나 마찬가지로 미해결 상태이다. 특별해야 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 사회만이 아니다. 과학자 사회가 그 일부를 이루는 전체 세계 역시 상당히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특질들이 무엇이라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처음보다 더 알게 된 바가 없다. 그러나 그 문제__인간이 알 수 있으려면 세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__는 이 에세이에서 새삼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서 대답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증거에 의한 과학의 성장과 양립할 수 있는 자연에 관한 그 어떤 개념도 여기서 전개되었던 과학의 진화적 관점과 양립될 수 있다. 이 견해는 또한 과학 활동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도 양립 가능한 것인 만큼 아직도 미결인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그것을 적용할 만한 강력한 논거가 존재한다.
@ff
"주"
1) E.H. Combrich, Art and Illusion: A Study in th Psychology of Pictorial Representation (New York, 1960), pp .11-12. 2) Ibid., p.97; and Giorgido de Santillana, "The Role of Art in the Scientific Renaissance," in Critical Problems in the History of Science, ed. M. Clagett(Madison, Wis.,1959), pp. 33-65. 3) 과학사학자들은 유난히 충격적인 형태로 이런 맹목성에 직면하는 수가 많다. 과학 분야로부터 과학사로 넘어오는 학생 집단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 가장 가르칠 만한 대상이다. 그러나 또한 통상적으로 처음에는 가장 난처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과학도들은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옛날 과학을 그 당시의 맥락에서 분석하게 하는 일이 각별히 어렵기 때문이다. 4) Loren Eiselley, Darwin`s Century : Evolution and the Men Who Discovered It (New York, 1958), chaps. ii, iv-v. 5) 다윈 학파가 이 문제와 투쟁한 유명한 얘기를 특히 예리하게 파헤친 것이 A. Hunter Dupree, Asa Gray,1810-1888(Cambridge, Mass., 1959), pp. 295-306, 355-83에 실려 있다. @ff 후기__1969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도 어느덧 칠 년이 지났다.1) 그 동안 나는 비판의 소리와 스스로의 더 깊은 연구로, 이 책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의 견해가 달라진 게 거의 없으나, 이제는 쓸데없는 어려움과 잘못된 해석을 낳은 이 책의 초기의 정식화가 지닌 성격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한 오해들은 일부 내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궁극적으로 이 책의 개정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 주는 근거를 얻게 되었다. 2) 그리고 동시에 나는 요구되는 수정의 개요를 잡고, 몇 가지 되풀이되는 비판에 대해 언급하고, 내 자신의 견해들이 현재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에 관한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환영한다.3)
나는 당초 원문의 주요 난제 가운데 몇 가지는 패러다임의 개념에 관한 것으로 집중되고 있으므로, 후기에서의 논의는 그것들로부터 시작한다.4) 곧 이어 나오는 소절에서는, 나는 그 개념을 과학자 사회의 관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쪽이 바람직함을 제안하고,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지적하며, 그에 따르는 분석적 분리와 유의미한 결과들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전에 이미 결정된 과학자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고찰함으로써 패러다임이 추구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고려해 본다. 이런 과정은 곧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패러다임'이란 용어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으로,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은 그런 집합에서 한 유형의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형이나 또는 예제로서 사용되어, 정상과학의 나머지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의 기초로서 명시적 규칙들을 대치할 수 있는 구체적 수수께끼 - 풀이를 나타낸다. 사회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첫 번째 의미는 아래 소절 2의 주제가 된다. 소절 3에서는 실례가 될 만한 과거의 성취로서의 패러다임에 치중한다.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패러다임'의 두 번째 의미는 둘 중에서 보다 심오한 것이고, 내가 그 이름으로 논의했던 주장은 이 책이 불러일으킨 논쟁과 오해의 주요 원천이 되었는데, 특히 내가 과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에 대해서 그러하다. 이 문제들은 소절 4와 5에서 고려된다. 소절 4에서는 '주관적ubjective)'이니'직관적(intuitive)'이니 하는 어휘가, 내가 공유된 실례에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했던 지식의 구성 요소들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논한다. 그런 지식은, 본질적 변화 없이는 규칙과 기준을 써서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체계적이고 시간의 검증을 겪은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교정할 수 있는 성격을 띤다. 소절 5에서는 그런 논증을 두 가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문제에 적용시키는데, 간단히 결론짓자면 엄청나게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상이한 언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의사 소통 문제가 해석의 문제로서 분석되도록 요구한다. 나머지 세 가지 문제는 결언을 맺는 소절 6과 7에서 논의된다. 소절 6에서는 이 책에서 전개된 과학판(view of science)이 철두철미하게 상대주의적(through-and-through-relativistic)이라는 비난을 살펴본다. 소절 6은 나의 논증이, 비평자들의 언급처럼, 서술적 양식과 규범적 양식사이의 혼동으로 참으로 헤맨 것인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소절 7은 별도로 하나의 에세이가 될만한 토픽들에 관해 간명하게 논평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즉 이 책의 주요명제들이 과학 이외의 분야들에도 얼마만큼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의 정도를 다룬다.
1. 패러다임과 과학자 사회의 구조(Pardigns and Community Structur)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일찍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도입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순환성을 띠고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며, 또한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과학자 사회는 어느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순환성(circularities)은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나는 이 후기의 뒷부분에서 비슷한 얼개의 논변을 옹호할 것이다), 여기서의 순환성은 참으로 어려움의 원천이다.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들에 우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형성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한다. 패러다임들은 그 다음, 주어진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세밀히 검토함으로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이 책을 다시 쓰는 것이었더라면, 그것은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 관한 논의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을 것인데, 이 주제는 최근 들어 사회학적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고, 과학사 학자들 역시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예비적인 결과는, 그 중 대부분이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으나, 그 탐색에 요구되는 경험적 기법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일부 결과는 이미 얻어졌고 나머지도 반드시 진척되리라고 믿어진다.5) 과학 활동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다양한 전문분야에 대한 신뢰가 적어도 대충 결정된 구성원 그룹 가운데 분포되어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들의 사회적 제휴에 관한 물음에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그들의 소속 확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수단이 발견되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예비적인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대신에, 나는 이 책의 앞 부분의 장들에 다분히 깔려 있는 과학자 사회의 직관적 개념에 관해 간단히 밝혀보려고 한다. 그것이 요즈음 과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많은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는 개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과학자 사회는 과학 전공분야의 종사자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다른 영역의 경우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유사한 교육과 전문적인 전수를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동일한 기술적 문헌의 내용을 흡수했으며, 그것으로부터 다수의 동일한 교훈을 얻어냈다. 그런 표준적인 문헌의 범위는 대개 과학적인 주제 내용의 한계를 긋게 되며, 각 집단마다 통상적으로 그 고유의 주제를 갖는다. 거기에는 과학에서의 학파, 다시 말해서 양립되지 않는 관점에서 동일주제에 접근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 비하면 과학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드물다. 그들은 항상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경쟁은 대체적으로 곧 끝난다. 따라서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후계자 양성을 비롯한 공유하는 일련의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고유적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도 자처하고, 남들도 그렇게 간주한다. 그런 그룹 안에서 의사 소통은 비교적 완전하며 전문적 판단에서도 비교적 의견이 잘 일치된다. 그런가 하면, 상이한 과학자 사회의 주의는 상이한 주제에 집중되는 까닭에 그룹 노선 사이의 전문적 의견 교환은 때때로 곤란해지는 경우도 생기고 흔히 오해를 낳기도 하며, 진행되는 과정에 미처 예기치 못했던 상당한 의견 차이를 빚어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과학자 사회는 물론 다양한 수준으로 존재한다. 최고의 세계적인 규모는 모든 자연 과학자들의 사회이다. 이보다 단지 약간 낮은 준위에서 주요 과학 전문 그룹들이 존재한다. 바로 물리학자, 화학자, 천문학자, 동물학자 등등의 과학자 사회가 그것이다. 이렇듯이 몇 갈래로 묶으면,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의 소속은 주변을 제외하고는 쉽게 확립된다. 가장 높은 수준의 주제, 전문 학회의 회원, 그리고 구독되는 잡지는 일반적으로 매우 충분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의 그룹은 몇몇 주요 더 작은 집단(major subgroups)으로 나뉠 것이다. 유기화학 그 외 고체 물리학자, 고에너지 물리학자, 전파 천문학자 등으로 나뉠 것이다. 경험적인 문제들이 출현하는 것은 그 다음의 보다 낮은 수준에 국한된다. 요즈음의 실례를 든다면, 그 그룹에 대한 공적인 인정에 앞서 어떻게 파지 그룹(phage group)이 분리되었을까?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학자는 전문 분야 학회에 참석하고, 출간에 앞서 초고라든가 교정쇄를 배포하는 일에 의존하게 마련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서신 왕래와 인용문헌 중의 연결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비롯한 공식적, 비공식적 의견 교환 매체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6) 내 견해로는, 적어도 현재의 상황과 역사의 보다 최근의 기록에 관해서, 그 작업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진다. 전형적으 그것은 아마도 백 명,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밑도는 숫자의 집단을 파생시킬 수 도 있다. 개별적으로 과학자들, 특히 가장 유능한 학자들은 동시이거나 또는 잇달아서 보통 그런 그룹의 여러 곳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유형의 과학자 사회는 이 책이 과학지식의 생산과 확인의 주역으로서 소개한 기본 단위들이다. 패러다임이란 그런 그룹들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이렇듯이 공유하는 기본 요소의 성격과 관련짓지 않고서는 이 책의 앞에서 설명한 과학의 여러 가지 성격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원래 원고에서 그런 성격들이 따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과학의 다른 성격들은 쉽사리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곧장 패러다임으로 화제를 돌리기에 앞서,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만 관련지을 필요가 일련의 주제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들 성격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과학 분야의 발달에서 패러다임-이전 시대로부터 패러다임-이후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내가 앞에서 지칭했듯이 그러한 II이행은 절에서 간략히 설명했던 바로 그런 변환이다. 천이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갈래의 학파들은 주어진 분야의 지배를 놓고 겨루게 된다.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성취의 자취를 따라서 다수의 학파는 대폭 줄어들어 보통 하나로 수렴되며, 보다 효율적인 양식의 과학활동이 시작된다. 효과적 방식의 과학활동이란 일반적으로 비전의 성격을 띠며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를 지향하는데 이는 그 구성원들이 그 분야의 기초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때에만 가능하게 되는 한 그룹의 연구를 뜻한다.
성숙으로의 그런 천이의 성격에 대해서는, 특히 현대의 사회과학의 발달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로부터, 이 책에서 다룬 것보다 훨씬 더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그런 이행이 패러다임의 우선적 획득과 반드시 관련되지 않아도 된다는(나는 지금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것을 지적하면 도움이 될 듯 하다. '패러다임-이전(pre-paradigm)' 시대의 학파들을 비롯한 모든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내가 총괄적으로 '하나의 패러다임' 이라 지칭했던 유형의 기본요소들을 공유한다. 성숙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변화를 거치는 것은 패러다임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성격이다. 그 변화를 거친 뒤라야 정상의 수수께끼-룰이 연구가 가능해진다. 앞에서 하나의 패러다임 획득과 연관지었던 진보된 과학의 여러 가지 속성을 이제 나는 그런 종류의 패러다임 획득 결과를 논할 것인데, 그런 유형의 패러다임은 도전해 오는 수수께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 풀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참으로 총명한 전문가들이 성공할 것을 보장해 준다. 그들 자신의 분야(또는 학파)가 패러다임들을 갖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용기를 얻은 사람들만이 중요한 그 무엇이 변화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적어도 과학사학자들에게는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과학의 주제 내용과 과학자 사회간의 이 책에서의 암묵적인 일 대 일의 확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되풀이해서, 예컨대 '물리광학', '전기', '열' 등이 연구의 주제 내용을 명명해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의 논지가 허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대안은 이들 모든 주제가 물리학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학자인 나의 동료가 여러 번 지적했듯이, 그런 유형의 확인(identification)은 통상적으로 검증(examination)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이전에는 물리학 집단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이전에 분리되어 존재하던 두 부분의 집단, 즉 수학과 자연철학(physique experimental)사이의 합병에 의해 형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단일하고 광범위한 과하자 사회의 주제 내용인 것이 과거에는 다원적 집단들 사이에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예컨대 열과 물질의 이론 같은 보다 좁은 범위의 주제는 오랜 세월 도안 어느 단일 과학자 사회의 특수 영역이 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과학과 혁명은 둘 다 과학자 사회에 기초한 활동이 변화하는 사회 구조를 우선 벗겨 보아야 한다. 첫 번째 경우인 정상과학에서는 패러다임이 과학의 주제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한 그룹의 종사자들을 다스린다. 패러다임-지향형 또는 패러다임-파괴형 연구에 관한 어떠한 고찰도 우선 책임이 있는 집단 또는 집단들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학 발전에 대한 분석이 그런 방식으로 접근되는 경우, 결정적인 주의를 요하는 초점들이었던 몇 가지 난관이 제거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여러 비평자들은 물질의 이론(theory of matter) 을 지적하여, 내가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과학자들의 충성이 모두 한결같다고 지나치게 과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물질 이론들은 지속적인 불일치와 논쟁을 낳은 주제였음을 지적한다. 나는 그러한 표현에는 동감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반대 - 예제(counter -example)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질의 이론들은 적어도 1920년경까지는 어느 과학자 사회를 위한 특수 영역 또는 주제 (subject matter)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수의 전문가 그룹을 위한 수단이었다. 상이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때로는 서로 다른 수단을 택하였고, 다른 집단의 선택에 대해 비판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의 이론은 어느 단일 집단조차도 그 구성원들이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유형의 토픽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의에 대한 필요성은 과학자 사회가 수행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19세기 전반의 화학은 그런 점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과학자 사회의 몇몇 기본적 수단들-일정비례, 배수비례, 기체 반응의 법칙들-은 돌턴의 원자론의 결과로서 보편적 성질로 받아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 화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이들 수단에 근거해서 수행하면서, 때로는 격렬하게 원자의 존재에 대하여 의견의 불일치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밖의 다른 난점과 오해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풀릴 것이라고 믿는다. 더러는 내가 선택한 사례들 때문에, 그리고 더러는 연관되는 일부 독자들은 필자가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 또는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주요 혁명에 우선적 내지는 전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과학자 사회 구조에 관한 보다 명확한 묘사는 내가 부각하려고 노력했던 상당히 다른 인상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혁명이란 그룹 공약에서의 모종의 재정립을 포함하는 특이한 유형의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규모의 변화라야 하는 것은 아니며, 가령 25 명 이하로 구성된 어느 단일 집단 외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까닭은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의 문헌에서 거의 인식되지 않거나 논의되지 못한 이런 형태의 변화는 이렇듯 소규모로 규칙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축적적 성격에 반하는 혁명적인 변화가 반드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수정은 앞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그 이해를 촉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여러 비평자들은 위기, 즉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공통적 각성이, 초판이 의미했던 것처럼 그렇게 한결같이 혁명에 선행되고 있는지의 여부에 회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나의 주장에 중요한 그 어느 것도 위기가 혁명에 절대적인 필수 요건임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위기는 단지 통상적인 서막으로서, 다시 말해서, 정상과학의 경직성이 영원히 도전받지 않은 채로 계속되지 않음을 보증하는 자체 보정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혁명은 다른 방식으로 유도되기도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런 일은 드문 것 같다. 덧붙여 나는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 관한 적절한 논의의 부재가 위에서 모호하게 감추었던 점을 여기서 지적할 것이다. 위기란 그것을 겪고 그리고 때로는 그 결과로서 혁명을 거치게 되는 그 과학자 사회의 연구에 의해 발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 현미경 같은 새로운 기기 또는 맥스웰의 법칙이 하나의 전문 분야에서 생겨나서 그것들의 동화가 다른 분야에서 위기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2. 집단 공약의 집합으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s as theConstellation of Group Commitments) 이제 패러다임으로 이야기를 돌려서 그것들이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논의해 보자. 나의 원래 텍스트는 더 이상 모호하거나 중요한 질문을 남겨 놓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이 책의 핵심되는 철학적 요소들을 명명한다는 나의 확신에 공감하는 한 동조적인 독자는 부분적 분석 색인 을 마련하였으며, 패러다임이란 용어가 적어도 스물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7)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차이들이 대부분은 형식상의 일관성의 결여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즉 뉴턴의 법칙들은 때로는 패러다임이고, 때로는 패러다임의 부분들이며, 때로는 패러다임적으로 쓰인다), 그것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제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편집 성격의 작업이 이루어지면, 용어의 사용상 전혀 다른 두 가지 용도가 남게 되는 데, 그 둘은 분리를 요한다. 보다 광범위한 의미가 이 소절의 주제가 된다. 또 하나의 의미는 다음 소절에서 고려하기로 한다.
위에서 방금 논의했던 기법에 의해, 특정 전문가 사회를 구분한 다음에는, 이런 유용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구성원들은 그들의 전문가 사회의 충족과 그들의 전문적 평가의 상대적 합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을 공유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이 책의 초판은, 그 답변인 하나의 패러다임 또는 한 벌의 패러다임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논의될 용법과는 달리, 이런 쓰임에 대해서는 그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스스로 하나의 이론 또는 한 벌의 이론들을 공유한다고 말할 것이며, 그 용어가 이런 용도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다시 쓰일 수 있다면 내게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에서 요즈음 쓰이고 있듯이, '이론(theory)'은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보다 성격과 범위에 있어서 훨씬 더 제한된 구조를 내포한다. 그 술어가 현재의 함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것을 채택한다면 혼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목적으로 나는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를 쓸 것을 제안한다 : '전문분야'라고 붙인 것은 특정 전문분야 종사자들의 공통적인 소유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행렬'이라고 붙인 것은 각기 고도의 명세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유형의 규칙적인 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초판이 패러다임들, 패러다임의 부분들, 또는 패러다임적인 것으로 만든 '그룹 공약의 대상들(object)가운데 대부분 또는 모두가 전문분야 행렬의 성분을 이루며, 그런 것들로서 그 요소들은 온전한 하나를 형성하여 총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한 조각의 모두 (all of a piece)인 것처럼 논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철저한 리스트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나, 전문분야 행렬 성분들의 주된 유형에 주목하는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접근의 성격을 밝힘과 아울러 나의 다음 요점에 대한 기틀을 마련해 줄 것이다. 나는 중요한 유형의 성분 하나에 대해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라 명명할 것인데 그 배경은 그룹 구성원들에 질문 또는 이견이 없이 전개된, (x) (y) (z) 파이 (x, y, z)와 같은 논리적 형태로 표시될 수 있는 표현을 의중에 둔 것이었다. 그것들은 전문분야 행렬에서의 형식적인 또는 쉽게 형식화할 수 있는 성분들이다. 때로는 그것들은 이미 기호 형태로 발견되는 것들이다. f=ma 또는 I=V/R가 그런 예이다. 또 어떤 것들은 보통 단어로 표현된다. '원소들은 일정한 무게비로 결합한다' 또는 '작용은 반작용과 같다' 등의 경우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더라면, 그룹 구성원들이 그들의 수수께끼-풀이 활동에서 논리적 및 수학적 조작의 막강한 테크닉을 소속시킬 수 있는 요체가 없었을 것이다. 분류학(taxonomy)의 실례는 정상과학이 몇 가지 안 되는 그런 표현을 갖고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위력은 그 종사자들이 그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의 수효에 따라 상당히 일반적으로 증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일반화는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만, 그룹 구성원들에 대한 그 것들의 기능은 그뿐만이 아닌 경우가 흔하다. 때로는 그러하다. 예컨대 줄-렌즈(Joule-Lenz) 법칙은^6 1235 24 126^이다. 이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H, R, 그리고 I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들 일반화는 단지 그들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열, 전류 그리고 저항의 작용에 대한 어떤 것을 그들에게 일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앞부분에서의 논의가 시사하듯이 기호적 일반화는 그와 동시에 제2의 기능을 나타내는 일이 상례인데. 그런 기능은 과학철학자에 의한 분석에서 예리하게 분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f=ma 나 I=V/R 처럼, 기호적 일반화는 일부는 법칙들로서 작용하나, 또 일부는 그것들이 전개하는 몇몇 기호들의 정의로서 기능을 나타내기도 한다. 더욱이 그것들의 분리 불가능한 입법적 및 정의적 위력 사이의 균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천된다. 다른 맥락에서 이런 점들은 다시 상세하게 분석될 것인데, 그 까닭은 어느 법칙에 대한 공약의 성격은 어느 정의에 대한 언질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법칙들은 점진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러나 동어반복으로서 정의는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옴(Ohm)의 법칙의 수용이 요구했던 것 중의 일부는 '전류(current)'와 '저항(resistance)'을 둘 다 재정의 하는 일이었다. 만약 이 용어들이 이전에 의미했던 것을 그대로 의미했었더라면, 옴의 법칙은 옳은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어째서 옴의 법칙이, 예컨대 줄-렌즈 법칙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리도 격렬하게 반대를 겪었는가의 이유가 된다.8) 아마도 이런 상황은 전형적인 것 같다. 나는 요즈음 모든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전에는 어느 부분에서 동어반복의 위력이었던 일반화의 포기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인슈타인은 동시성(simultaneity)이 상대적임을 증명했던 것인가 아니면 동시성의 개념 그 자체를 바꾸었던 것인가? '동시성의 상대성(relativity simultaneity)'이란 어구에서 역설(paradox)을 느끼는 사람들은 무조건 틀린 것이었는가?
다음은 전문분야 행렬의 제2형태의 성분에 관해 고려할 차례인데, 이는 초판에서 '형이상학적 패러다임metaphysical paradigms)' 또는 '패러다임의 형이상학적 부분(metaphysical parts of paradigms)'이란 제목으로 많이 얘기했던 바 있다.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신념들에 대한 공유된 공약을 떠올린다. 열은 물체의 구성 요소들의 운동 에너지이다. 지금 책을 다시 쓴다면, 나는 그러한 공약을 특정 모형에서의 믿음이라고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발견적인(heuristic) 다양성도 포함하도록 범주 모형을 확장할 것이다. 전기회로(electric circuit)는 정류-상태 유체 역학계(steady-state hydrodynamic system)로 간주될 수도 있다. 기체 분자는 미소한 탄성의 당구알이 무작위 운동을 하는 것처럼 운동한다. 그룹 공약의 강도는 사소하지 않는 결과와 아울러 발견적인 것으로부터 존재론적인 모형까지는 폭을 따라 다양하게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모형은 유사한 기능을 갖는다. 그 중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그룹에게 바람직한 또는 허용될 만한 유추와 비유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은 무엇이 설명으로서 채택될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그것들은 미해결의 수수께끼 명부의 결정에 있어서 그리고 각각의 중요성 평가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발견적 모델조차도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는__보통공유하기는 하지만__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미 19세기 전반 동안에 화학자 사회의 일원이 되는 데 원자에 대해서 꼭 믿어야 할 필요는 없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전문분야 행렬에서 제3종 요소를 가리켜 나는 여기서 가치관(values)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보통 그것들은 상이한 과학자 사회에서 기호적 일반화나 모형의 어느 경우보다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며, 그런 가치관들은 자연과학자들에게 한 동아리로서 집단의 의미를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것들은 어느 때이고 항상 적용하고 있지만, 특히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특정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위기를 확인해야 할 때, 또는 후에 그들의 분야를 수행함에 있어 양립되지 않는 방식들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다. 아마도 가장 깊숙이 간직된 가치는 예측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측들은 정확해야 한다. 정량적인 추론이 정성적인 것보다 바람직하다. 허용할 수 있는 오차의 한계가 어떻든 간에, 예측은 주어진 분야에서 한결같이 만족되어야 한다. 기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전체 이론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가치들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수수께끼-공식화와 풀이를 가능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그것들은 간단하고, 이치가 정연하며, 수긍이 가고, 당시 전개되는 있는 다른 이론들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지금 나는 위기의 원천과 이론선택의 요인을 고려하는 데 내부적, 외부적 일관성과 같은 가치들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점이 초판의 약점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가치도 존재한다__이를테면, 과학은 사회적으로 유용해야 한다(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따위)__하지만 앞서의 설명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시사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공유된 가치의 한 가지 성격은 각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문분야 행렬에서의 다른 어느 종류의 성분보다 엄청난 정도로, 가치관은 그것들의 적용에서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다. 정확도의 판정은 비교적, 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시대가 달라지더라도 쉽사리 변치 않으며 어느 특정 그룹에서의 구성원 각자에 따라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단순성, 일관성, 개연성 따위의 판정은 흔히 개인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옛 양자론에서 정상과학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던 내용이 보어(Bohr)와 그 밖의 다른 학자들에게는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저절로 풀리라 예측될 수 있었던 난점이었을 따름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가 적용되어야만 하는 경우들에서, 오로지 서로 다른 가치들이 흔히 서로 다른 선택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은 다른 것에 비해 더 정확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수긍이 덜 가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도 다시 옛 양자론이 실례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가치관은 과학자들에게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공약은 심오하고 또한 과학을 이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적용은 그룹의 구성원들을 구별짓는 개성과 경륜의 특성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은 여러 독자들에게, 공유된 가치관의 작용에서의 이런 특성은 내 입장의 주요 취약점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에 공유되는 그 무엇이 서로 겨루는 이론들 사이의 선택 또는 통상적인 이상(anomaly) 현상과 위기를 야기하는 이상 현상 사이의 구별 등의 주제에 관해 획일적인 동의를 얻게 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성과 불합리성까지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자주 비난받고 있다.9) 그러나 그런 반응은 가치 판단에 의해서 어느 분야에서나 나타나는 두 가지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첫째로, 어느 그룹의 구성원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가치를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유된 가치관은 그룹 행동의 중대한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가치론(value theory)이라든가 미학(aesthetics)에 관한 특이한 철학적 문제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 표현이 일차적인 가치였던 시기에는 모두 비슷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조형 예술(plastic arts)의 발달양식은 그런 가치가 폐기되었을 때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10) 일관성이 일차적인 가치가 되지 않게 될 경우, 과학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상상해 보라, 둘째로, 공유된 가치관의 적용에서의 개별적인 가변성은 과학에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가치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항들은 또한 예외없이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요체들이 기도 하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안하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느 누구도 이상 현상들이나 위험부담이 큰 새로운 이론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혁명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에서 과학자 사회는 개별적인 선택을 좌우하는 공유된 규칙에 보다는 오히려 공유된 가치에 의존하는 편이 위험을 분산시키고 연구 활동에 대한 장기적 안목의 성공을 확고히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전문분야 행렬의 제4종의 요소로 방향을 돌리고자 하는데, 이는 여타의 유형으로서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논의하게 될 마지막 유형일 따름이다. 이 요소에 대해서는 '패러다임'이란 술어가 언어학상으로나 자전적으로나 꼭 들어맞을 것이다. 이것은 당초 내가 그 단어를 택하도록 이끌었던, 한 그룹의 공유된 공약의 성분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자체의 수명을 다한 것 같으므로, 여기서 나는 '표준예(examplars)'라는 말로 대치할 것이다. 이 용어의 사용에서 내가 의미하는 내용은, 실험실에서든 시험 문제에서든 또는 과학 교재의 장 말미에서든 간에, 과학교육의 시작에서부터 학생들이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인 문제풀이들이다. 그러나 이들 공유된 실례에는 최소한도 정기 간행물에서 볼 수 있는 기술적 문제-풀이의 일부가 추가돼야 하는데. 그것들은 과학자들이 교육 과정을 밟은 뒤의 연구 생활에서 당면하는 것들이며, 또한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를 실례로서 보여 주는 것들이다. 전문분야 행렬의 다른 어떠한 성분보다도, 여러 벌의 표준예 사이의 차이는 그 과학자 사회에 과학의 미세구조(finestructure)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물리학자는 모두 동일한 예증들을 배우는 것에서 출발한다. 빗면, 원추형의 추, 그리고 케플러의 궤도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부척(vernier), 열량계(calorimeter), 그리고 휘트스톤 브리지(Wheatstone bridge) 같은 기기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학자의 수련이 진전됨에 때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기호에 의한 일반화는 점차로 서로 다른 표준예들에 의해 설명된다. 고체-상태와 장(場) 이론의 물리학자들은 양쪽 다 슈뢰딩거(Schrodinger) 방정식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다 기초적인 적용만이 양쪽 그룹에 공통될 뿐이다.
3.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s as Shared Examples)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은 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라 여기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표준예는 전문분야 행렬의 어느 유형의 성분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과학철학들은 실험실이나 과학 교재에서 학생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며, 그 까닭은 그런 것들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하는 몇몇 규칙을 익히지 않는 한, 학생은 문제를 전혀 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학지식은 이론과 규칙 속에 내장되어 있다. 문제들은 그것들의 적용에서 숙련되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인식적 함의를 그렇게 편재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지를 펴 왔다. 학생들이 문제를 많이 풀고 난 뒤에는, 더 많이 풀어내는 것에 의해 능란한 솜씨만을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 시작에서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문제를 푸는 것은 자연에 관한 일관성 있는 사항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표준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이미 배운 법칙과 이론은 경험적인 내용을 거의 지니지 못할 것이다.
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이제 기호 사용의 일반화로 잠깐 되돌아가기로 한다. 널리 공유된 하나의 범례로서, 일반적으로 f=ma 로 나타내는 뉴턴 운동의 제2법칙을 보자. 이에 상당하는 표현을 주어진 전문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말하고 받아들인 것을 알게 된 사회학자나 언어학자는, 추가적인 고찰이 없다면, 그 표현 또는 그 식의 각 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사회의 과학자들이 그 식을 어떻게 자연에 관련시키는가에 대해서 크게 깨우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의문 없이 그것을 인정하고 논리적, 수학적 조작을 도입하기 위한 열쇠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의미와 적용 같은 문제에 관해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은 상당한 정도까지 동의하게 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사실은 그들의 이후의 대화로부터 곧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올지 모른다. 어느 시점에서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는가? 주어진 실험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들은 어떻게 해서 관련되는 힘, 질량, 그리고 가속도를 골라낼 줄을 알게 되었는가?
실상 그런 상황의 이런 측면에 관해서는 아주 드물게 주목되거나 또는 전혀 주목된 일이 없지만, 학생들이 배워야만 하는 그 무엇은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논리적, 수학적 조작이 f=ma 에 직접 적용되는 경우와 다르다. 그 관계식은 검토해 보면 하나의 법칙-개요(law-sketch), 또는 법칙-도식(law-schema)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학생이나 연구중인 과학자가 한 문제 상황으로부터 다음의 것으로 넘어감에 따라, 이 조작들이 적용되는 기호적인 일반식이 달라지게 된다. 자유낙하(free fall)의 경우, f=ma 는 mg=md2s/dt2 으로 된다. 단진자(simple pendulum)에 대해서는 이 관계식은 mgsinΦ=-mld2Φ/dt2 으로 변형된다. 상호작용하는 조화 진동자(harmonic oscillators) 한 쌍에 대해서는 그것은 두 개의 방정식으로 쓰여지는데, 첫 번째 식은 m1d2s1/dt2+k1s1=k2(s2-s1+d)가 된다. 그리고 자이로스코프(gyroscope)처럼 복잡한 경우에서는 또다시 다른 형태가 되어서, f=ma 라는 식에 닮았는지조차 알아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렇긴 하지만, 학생이 이전에 당면하지 않았던 다양한 물리적 상황에서 힘, 질량, 가속도를 확인하는 것을 익히노라면 그 학생은 그 관계식들을 상호 관련짓는 f=ma 의 적절한 수정식을 고안하는 것도 깨우치게 되는데, 보통 이런 변형식은 글자 그대로의 동등한 것을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형태가 된다. 학생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아냈을까?
과학도와 과학사학도 양쪽에 모두 친숙한 현상이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학도는 으레 그들 교재의 한 장을 독파했고 완전히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의 끝에 실린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는 여러 군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통산적으로 그런 난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학생은, 자기 교수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그의 문제를 그가 이미 부닥쳤던 문제처럼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유사성을 파악하고 구별되는 두 가지 이사의 문제들 사이의 유비 관계를 파악하게 되므로, 학생은 기호를 서로 관계짓고 그것들을 이전에 효과적이라고 증명된 방식으로 자연에 적용케 할 수 있다. 법칙-묘사, 예컨대 f=ma 는 하나의 도구로 작용함으로써 학생에게 어떤 유사성을 탐색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며, 그 상황이 느껴지게 되는 경험의 통일적 형태를 신뢰해 준다. 내 생각으로는, f=ma 또는 그 밖의 기호 일반화에 관한 주제처럼, 다양한 상황들을 서로 닮은 것으로 보는 능력은 학생이 연필과 종이를 쓰든 설비가 잘된 실험실에서든 간에, 예제를 풂으로써 얻게 되는 주요 성과라고 본다. 그 문항수에서는 개인차가 크게 벌어질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문제-풀이를 완결하고 나면, 학생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서에게 닥치는 상황을 그 전문가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경험 형태로 다루게 된다. 그 학생에게는 그런 상황들이 그의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당면했던 것과는 더 이상 동일하지가 않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사물을 보는 데 시간의 흐름과 그룹이 승인한 방식에 동화된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유사성 관계(similarity relations)의 역할은 또한 과학자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문제를 풀 때 그것을 이전의 문제-풀이에 본따서 해결하며, 기호 일반화에의 의존은 극히 미미한 것이 상례이다. 갈릴레오는 빗면에서 굴러내리는 공은 어느 기울기의 제1경사면에서 그와 똑같은 수직 높이까지 공을 되돌림만큼의 속도를 얻는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그 실험적 상황을 점-질량(point-mass)을 갖는 진자로서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호이겐스(Huyghens)는 물리적진자의 진동에서의 중심(center of oscillation)에 대한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진자의 벌어진 모양이 갈릴레오의 점-진자들(point-pendula)로 구성되고, 흔들리는 어느 점에서나 점-진사 사이의 결합이 순간적으로 끊긴다고 상상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결합이 끊긴 뒤에는 각각의 점-진자는 자유롭게 흔들릴 것이지만, 각각 그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그것들의 총괄적인 무게중심(collective center of gravity)은, 갈릴레오 진자의 경우처럼 벌어진 진자의 무게중심이 낙하하기 시작했던 높이까지만 올라갈 것이다. 드디어 베르누이(Daniel Bernoulli)는 구멍으로부터의 물의 흐름을 호이겐스의 진자에 유사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미분소의 시간 간격 동안 탱크와 분출구에서의 물의 무게 중심의 하강을 결정해 보라. 다음에는 뒤이어 물의 각 입자가 그 시간 간격 동안 얻은 속도로 가능한 최고 높이까지 따로따로 상승한다고 가정하라. 그러면 각 입자의 중심의 상승은 탱크와 분출구에서의 물의 중심의 하강과 같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드디어 오랫동안 탐구되었던 유출속도(speed of efflux)가 즉각 도출되었던 것이다.11)
동일한 과학 법칙이나 법칙-개요의 응용에 대한 주제에서처럼, 이 실례는 문제들로부터 서로 동류의 것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터득한다는 표현에 의해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실례는 유사성 관계를 터득하는 동안에 얻어지고, 그 이후 규칙이나 법칙에서보다는 오히려 물리적 상황을 보는 관점의 방식에서 구현되는, 자연에 대한 일관적인 지식을 내가 언급하는 이유를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보기로 들었던 세 가지 문제는, 모두 18세기 역학자에 대한 표준예로서, 자연의 한 가지 법칙만을 전개시킨다. '활력의 원리(principle of vis viva)'라고 알려진 이 법칙은 보통 이렇게 기술된다. '실제의 하강은 잠재적 상승과 동일하다.' 이 법칙을 베르누이가 응용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논리적인 귀결이었는가를 시사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본 그 법칙의 문자 그대로의 서술은 사실상 별 위력이 없다. 그 단어들을 알고 그런 문제들을 모두 풀 수는 있으나 현재 다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물리학 전공의 요즈음 학생에게 그 법칙을 주어 보라, 그 다음, 모두 잘 알려진 단어들이긴 하지만, 문제들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런 단어들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보라, 그 사람에게 이 일반화는 그가 '실제의 하강(actual descents)'과 '잠재적 상승(potential ascents)'을 자연의 요소로서 인식하는 것을 깨우쳤을 때에 한해서 작용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법칙에 선행되어 자연이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상황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유형의 깨우침은 전적으로 문자상의 수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어들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실례들과 더불어 과학도에게 단어들이 주어질 때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과 용어들은 함께 더불어 터득된다. 다시 한 번 폴라니(Michael Ploanyi)의 유효적절한 표현을 빌면, 그런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묵시적 지식(tacit knowledge)'으로서, 그것은 과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얻는 것보다는 오히려 과학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서 터득되는 지식이다.
4. 묵시적 지식과 직관(Tacit Knowledge and Intuition) 묵시적인 지식과 공존하는 규칙의 거부에 대한 이런 언급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내는데. 그런 문제는 나에 대한 비평자들(critics)에게는 잘 납득되지 않고 주체성과 불합리성이라는 비난의 근거를 제공했던 것 같다. 어떤 독자들은 내가 과학을 논리와 법칙보다는 오히려 분석할 수 없는 개별적 직관에 머물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거이다. 첫째로, 만일 내가 도대체 직관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그 직관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것들은 성공을 거둔 그룹의 구성원들이 지닌, 시험을 거치고 또한 공유된 소유물로서, 초보자는 그룹-회원이 되기 위한 준비의 한 부분으로서 그런 직관들을 수련을 통해 얻게 된다. 둘째로, 그런 직관은 원칙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 초보적인 수준에서 직관의 성질들을 조사하도록 고안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써서 현재 실험중에 있다.
그 프로그램에 관해서 지금 여기서 논의할 만한 것은 없으나,12) 그것을 언급하는 것만도 나의 가장 핵심적인 요점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공유된 표준에 속에 깔려 있는 지식에 관해서 말할 때, 그것은 규칙, 법칙 또는 확인 기준에 내장되어 있는 지식보다 덜 체계적이라거나 덜 분석적인 배움의 양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만약 처음에 표준예으로부터 추상화되고, 그 뒤에 그 표준예 대신 기능을 나타내는 규칙들을 써서 재구성되는 경우 그 의미가 잘못 해석되게 마련인 배움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혹은 같은 요지를 달리 표현한다면, 주어진 상황을 이전에 보았던 어떤 것 비슷하게 그리고 또 어떤 것과는 다르게 인식하는 능력을 표준예로부터 터득한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신경-대뇌 매커니즘의 용어에 의해 잠재적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과정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해명이 그 본질상 '무엇에 관련지어 비슷한가?'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하나의 규칙에 대한 요건이며, 이 경우에서는 특정 상황들을 유사성의 무리로 묶는 기준에 대한 자격을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제한 조건(또는 적어도 완전한 한 벌의 조건)을 찾아내려는 유혹은 이 경우에는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것은 체계가 아니라 특정 유형의 체계이다.
이런 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여기서 잠깐 본론을 벗어나기로 한다. 무엇으로 이어지는가가 지금 내게는 확실해 보이지만, 초판에서 '세계는 변화한다'와 같은 문구에 꾸준히 의존했던 것은 그것이 항상 변화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유아론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거의 비슷한 자극을 받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만일 응시한다고 가정하면, 자극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극을 보지는 않는다. 자극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이론적이며 추상적이다. 오히려 자극은 감각을 가지며, 결코 앞의 두 사람의 감각이 똑같다고 생각해야 할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회의론자들(sceptics)은 아마도 1794년에 돌턴이 그것을 서술하기 전까지는 색맹이 어디에서도 주목되지 않았던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신경적인 과정은 자극(stimulus)의 접수와 감각(sensation)의 인식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것에 관해 확실하게 알려진 몇 가지 사항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다. 똑같은 자극이 전혀 다른 감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극으로부터 감각까지의 경로는 일부 길들이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조절된다. 서로 다른 과학자 사회에서 자라난 개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마치 서로 다른 사물을 본 것처럼 행동한다. 만일 우리가 자극을 감각과 일 대 일로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현실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집단, 즉 그 속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자극을 수용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상이한 감각을 갖는 두 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는(in some sense)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perceptions)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극의 존재를 가정하며,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유아론(solipsism)을 둘 다 피하기 위해서 지각의 불변성을 가정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느 가정에 대해서도 나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첫째, 우선 자극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채워지며, 그리고 이런 것들은 각 개인 마다 또는 각 그룹마다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들이 동일 그룹에 소속되고, 그에 따라 교육, 언어, 경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감각이 같아도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성립된다. 달리 어떻게 해서 그들의 의견 교환의 완전함과 그들의 환경에 대한 행동상의 반응의 공통성을 우리가 이해한단 말인가? 그들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자극을 처리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룹의 구분화(differentiation)와 전문화(specialization)가 시작되는 곳에서 우리는 감각의 불변성을 입증할 만한 유사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단순한 편협함이, 우리로 하여금 자극으로부터 감각까지의 경로가 모든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동일하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제 표준예와 규칙으로 되돌아가서, 그 양태가 얼마나 예비적이든 간에, 내가 제안하고자 노력해 온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전체적 문화권이거나 그 속의 한 전문 분야의 세분화된 집단이거나 간에, 어느 그룹의 구성원들이 똑같은 자극에 직면했을 때 똑같은 것을 보는 것을 배우는 기본적 기술 가운데 하나는 상황의 실례들에 접함으로써이고, 실례들은 그 그룹에서 앞서 간 사람들이 서로 동류의 것으로서 그리고 다른 상황과는 틀리는 것으로서 보는 것을 이미 배워왔던 그런 실례들이다. 이 비슷한 상황들은 바로 그 개체의 연속적인 감각적 표상일 것이다__이를테면 그것이 어머니라면, 그녀는 결국 눈으로 보아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버지나 누나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자연 가족(natural families)에서의 구성 요소들의 직각도 될 수 있어서, 예컨대 한편으로 백조 다른 한편으로 거위를 구별하는 것과 같다. 또는 그런 상황은 보다 전문화된 그룹의 구성원들에게는 뉴턴 경우의 실례들이 될 수도 있어서, 말하자면 기호식 f=ma 의 변형으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이는 과학의 법칙-묘사가 적용되는 상황들과는 달라지는 상황이 된다.
우선 현 시점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엇인가가 일어난다고 인정하고 보자. 우리는 표준예로부터 터득된 것이 규칙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표현은 매력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어느 상황을 이전에 부닥쳤던 경우들처럼 보는 것이 물리적, 화학적 법칙으로 완전히 다스려지는 신경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다. 이런 의미에서, 일단 그렇게 하는 것에 우리가 익숙해지면, 유사성의 인식은 우리 심장이 뛰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체계적이라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비교는, 인식 과정이 우리가 조절할 능력이 없는 과정으로서 수의적이 아닐 수도 있음을 또한 시사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때는 그것을 규칙과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생길 것이다. 이런 말로써 그것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대안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 이를테면 어느 규칙을 벗어났거나, 기준을 잘못 적용했거나, 또는 사물을 이해하는 어떤 다른 방식을 시험해 왔거나 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13 내 견해로는 그런 것들은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없는 유형의 일들이다.
아니면 보다 정확히 표현해서, 그런 것들은 우리가 어떤 감각을 지니게 되고 무엇인가를 감지하기 이전까지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다음 흔히 우리는 기준을 추구하고 그것을 활용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해석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감지 그 자체에서는 하지 않은 여러가지 대한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는 신중한 과정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보아 왔던 것이 무엇인가 이상할는지도 모른다(앞에 서술된 이상한 카드놀이를 기억해 보라). 모퉁이를 돌면서, 집에 계시리라 생각했던 시간에 어머니가 시내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자. 자기가 본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우리는 갑자기 외친다. "그건 어머니가 아니었어. 어머니는 붉은 머리니까 말야!" 그 가게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 여인을 다시 한번 보고, 어째서 그녀를 어머니로 여길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다시, 가령 얕은 시냇물 바닥에서 무엇을 잡아먹고 있는 물새의 꼬리 깃털을 본다고 하자. 저게 백조인가 아니면 거위인가? 우리는 눈으로 모았던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서 예전에 보았던 백조와 거위의 깃털과 그 꼬리털을 비교하는 것이다. 또는 어쩌면 으뜸가는 과학자가 되어서, 우리는 이미 쉽게 감식할 수 있는 자연계의 과의 구성 요소에 대한 어떤 일반적 특징(이를 테면 백조의 흰 빛깔)을 알아내려고 한다. 다시 우리는 이전에 이미 감지했던 것을 잘 생각해 보면서, 주어진 과의 구성 요소들이 공통으로 갖는 성질을 찾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숙고하는 처리 과정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기준과 규칙을 찾아내고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임 갖고 있는 감각을 해석하고, 주어진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든 간에, 가기 관련된 과정들은 결국 신경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편으로 감지를 조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심장의 고동을 조종하는 바로 그러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조절된다. 그러나 그 계가 세 가지 경우 모두 에서 동일 법칙을 만족시킨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경 장치가, 감지에서처럼 또는 우리 심장의 고동에서처럼, 해석에 있어 똑같은 방식으로 조작되도록 짜여진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반론을 펴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의, 그러나 그 이전은 아닌, 전통적인 시도에 대해서인데. 즉 지각 작용을 하나의 해석적 과정으로서 지각 이후 행동의 무의식적 해석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론이다.
지각의 온전성을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물론 과거 경험의 대부분이 자극을 감각으로 변형시키는 신경 계통에서 구체화된다는 점이다. 적절하게 짜여진 지각의 메커니즘은 존립 가치를 지닌다. 서로 다른 그룹들의 구성원은 동일한 자극에 부닥쳤을 때 서로 다른 지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지각이든지 아무것이나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환경에서 늑대와 개를 구별할 수 없는 그룹은 존속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의 원자 핵물리학자 그룹도 알파 입자와 전자의 궤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로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룹이 사용하는 검증을 견디어 낸 것들만이 대를 물릴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은 그룹 안에서 보고 깨닫는 방식이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극으로부터 감각으로의 경로에 내포된 자연에 관한 경험과 지식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역사에 걸쳐 그 성공 때문에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식(knowledge)'이란 잘못 사용한 단어일는지도 모르나, 그것을 사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자극을 감각으로 변형시키는 신경과정속에 짜여져 있는 그 무엇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전수되어 왔다. 그것은 시험(trail)에 의해서 어느 그룹의 당시 환경에서 그 역사상의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효율적임이 밝혀진 것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앞으로의 교육을 거치면서, 또한 환경에 잘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은 지식의 특징이며, 그것들은 내가 어째서 그 낱말을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야릇한 용법인데, 그 이유는 또 다른 특징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에 직접 접근하는 방법이 없으며, 그런 지식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규칙이나 일반화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런 접근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규칙은 감각이 아니라 자극에 관련될 것이며, 그리고 자극은 정교한 이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자극에서 감각에 이르는 경로에 내포되어 있는 지식은 암묵적인 채로 남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서론에 불과하며 모든 세부 사항에서 옳아야 할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대하여 방금 논의한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아마도 직접 검증은 아니겠지만, 실험적 조사를 거쳐야 하는 시각에 대한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관찰과 지각에 관해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책의 대부분에서 이루어졌듯이, 은유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우리는 전자(electron)들을 보는(see) 것이 아니라 그 자취를 보거나 또는 안개상자(cluod chamber)에서 증기의 기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전류는 전혀 보지 못하고 대신 전류계나 검류계의 바늘을 본다. 그러나 앞에서, 특히 X절에서, 나는 마치 우리가 전류, 전자, 장과 같은 이론적인 실체를 지각했던 것처럼 일관해 왔다. 마치 표준예들의 검토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을 터득한 것처럼 얘기했고, 그런 경우들에서도 마치 관찰의 이야기를 기준과 해석의 이야기로 대치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표현해 왔다. '보는 것(seeing)'을 그것들과 같은 맥락으로 옮기는 비유는 그런 주장에 대한 충분한 그거가 되기 어렵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것은 보다 정학한 양식의 논술을 기하기 위해 장차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할애될 수 있는 지면으로 보나 현재로서 내가 이해하는 정도로 보나, 둘 다 미흡한 까닭에 여기서는 비유를 삭제할 수가 없다.14) 그 대신 나는 간결하게 그것을 지지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물방울을 보거나 또는 눈금을 가리키는 바늘을 보는 것은 안개상자 실험과 전류계에 생소한 사람에게는 초보적인 지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전자나 전류에 관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요구된다(또는 그밖에 외부적 권위의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기들에 대해 배웠고 그것들을 쓰는 예증적 경험을 쌓은 사람은 그 입장이 전혀 달라지며, 그가 그것들로부터 받은 자극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는 그 만큼에 해당하는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추운 겨울날 자기가 내뿜은 숨의 증기에 대해서는 그의 감각도 일반인의 것과 똑같을지 모르지만, 안개상자 실험을 관찰할 때에는 그는 물방울을 보는(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것이 아니라 전자, 알파 입자 등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그렇게 한다면, 그런 궤적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입자들의 존재에 대한 지표로서 해석에서의 기준이 되지만, 그러나 그 경로는 물방울을 설명하는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과는 다르며 더 짧아질 것이다.
또는 과학자가 바늘이 가리키는 눈금을 읽기 위해 전류계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의 감각은 보통 사람의 것과 같을 것인데, 특히 그가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계량기 눈금을 읽은 적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전체 회로의 맥락에서 계량기를 본(여기서도 흔히 글자 그대로) 것이며, 그 계기의 내부 구조에 관해서도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에게는 바늘의 위치가 하나의 기준이지만, 과학자는 계량기가 어느 값을 가리키는가만 결정하면 된다. 반면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바늘의 위치는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것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내부 및 외부 배선의 전체 설계를 검토하고, 전지와 자석으로 실험하는 등의 여러가지의 일들을 해야 한다. '보는 것(SEEING)'의 문자상 사용에서보다 못지 않게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해석은 지각 작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이 두 과정은 동일하지 않으며, 지각 작용이 해석에서 완결 짓도록 남겨 두는 것은 그 이전의 경험 그리고 훈련의 본질과 양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5. 예증,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 그리고 혁명(Exemplarsm, In c ommensurability and Revolutions) 방금 논의한 내용은 이 책의 요지를 한 가지 더 밝혀 주는 기초를 제공한다. 서로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incommensurability)에 대한, 그리고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택에 관해 논쟁하는 과학자들에게 미치는 그 영향의 중요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그것이다.15)X절과 XII 절에서 나는 그런 논쟁에 참석한 분파들이 양쪽이 모두 의존하는 실험적 또는 관찰적 상황들의 어떤 측면을 달리 보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상황을 논의할 때 쓰는 어휘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연에 관련시키고 있음에 틀림없고, 그들의 의사 소통은 부분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어느 이론의 다른 것에 대한 우월성은 그 논쟁에서 증명될 수가 없는 그 무엇이다. 그 대신 내가 주장한 것은 각 분파는 설득에 의해서 다른 편을 전향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철학자들만은 나의 논의에서의 이들 부분의 의도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내가 다음의 믿음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16)동일 표준상 비교불능한 이론들의 옹호자들은 도대체 서로 의견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론-선택(theory-choice)에 관한 논쟁에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이유들에 의해 선택되어져야 한다. 신비스러운 모종의 통각 작용이 현실적으로 도달된 결론에 이르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이 책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도 이런 왜곡된 해석을 낳은 문장들 때문에 비합리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우선 나의 견해를 되새겨서 고려해 보라, 내가 분명히 하고자 하는 요점은 간단한 것이며 과학철학에서 오랫동안 친숙했던 것이다. 이론-채택을 둘러싼 논쟁은 논리적 또는 수학적 증명과 완전히 유사한 형식으로 틀이 잡힐 수가 없다. 논리적 또는 수학적 증명에서는 추론의 전제와 규칙은 출발점으로부터 명기된다. 결론에 관해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경우, 계속되는 논쟁에서의 분파들은 그들의 밟아 온 자취를 하나 하나 되돌아보면서 각 단계를 그 이전의 규정에 비추어 점검한다. 그런 과정의 종말에서 그 중 누구인가는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전에 수용된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을 자인해야 한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그는 의존할 것이 없어지고, 이 다음으로는 적수의 증명법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는 대신 만약 그 양쪽이 규정된 규칙의 의미 또는 적용에 관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 또 이전의 그들의 의견 일치가 증명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함을 깨닫는 경우라면, 그 논쟁은 그것이 과학혁명에서 불가피하게 택하게 되는 형태로 지속된다. 그러한 논쟁은 전제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증명의 가능성에 이르는 서막으로서 설득에 의지하게 된다.
비교적 친숙한 이 명제에 관한 그 어느 것도, 설득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이유들이 궁극적으로 그룹에 대해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선택의 이유들이 과학철학자들이 보통 열거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확도(accuracy), 단순성(simplicity), 성과(fruitfulness) 등등이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그런 이유들이 가치관으로서 작용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그것을 같이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달리 적용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그 이론들의 상대적인 성과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면, 또는 그들이 이르는 범위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어느 쪽이 비과학적인 것도 아니다. 이론-선택에 대해서는 중간적인 산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적절히 적용되어 그룹의 각 개인을 동일한 결론으로 유도해야 하는 체계적 결정과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효한 결론을 성립시키는 것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개인들이라기보다는 전문가 사회이다. 어째서 과학이 지금과 같이 진보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굉장히 매력 있는 토픽이기는 하지만, 각 개인을 어느 특정 선택까지 이르기 위해 걸어온 길과 개성을 낱낱이 벗겨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룹의 구성원 대다수가 궁극적으로 그 밖의 결정적 논거보다 어느 한 벌의 논변을 찾을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공유된 가치관의 어느 특정 전문가 집단이 공유한 특정 경험과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가의 방식에 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과정은 설득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심오한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상황을 달리 지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에서 같은 어휘를 쓰는 두 사람은 단어를 달리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내가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견해라고 이름 붙인 관점을 갖고 논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함께 나누기를 바라고, 더구나 감히 설득되리라고 희망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예비적인 대답조차도 그 난점의 본질에 관해 더욱 명시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적어도 일부는 그것은 다음의 형태를 취하리라고 본다. 정상과학의 실제는, 표준예들로부터 얻어지는 대상과 상황을 유사성 무리로 분류하는 능력에 의존하게 되는데, 여기서 유사성의 무리는 그런 분류가 "과연 무엇으로 보아 비슷한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원시적이다. 그러면 어떤 혁명에서든지 하나의 핵심적 성격은 유사성 관계의 어느 부분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동일 부류로 묶었던 대상들이 혁명 후 서로 다른 조로 분류되며,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난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과 이후의 태양, 달, 화성, 지구에 관해 생각해 보라. 갈릴레오 이전과 이후의 자유낙하, 진자 운동, 행성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변경된 분류에서도 대부분의 대상은 계속해서 함께 묶이게 되므로, 조의 명칭들은 대체로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하부 단위에서의 이동은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의 조직망에서 심각한 변화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금속을 화합물의 무리로부터 원소의 무리로 옮긴 것은 연소에서, 산성에서, 그리고 물리적, 화학적 결합에서 새로운 이론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순식간에 그런 변화들은 화학 전반에 걸쳐 퍼져 나갔다. 그러므로 놀랄 것도 없이 그런 재배치가 진행되는 때, 그들의 대화가 이전에는 완전히 이해되는 듯이 진행되었던 두 사람은 돌연 똑같은 자극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진술과 일반화로서 반응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려움은 그들의 과학적인 대화의 모든 영역에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런 문제들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이론의 선택이 가장 핵심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둘러싸고 가장 조밀하게 몰릴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처음에는 의견 교환에서 확연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언어적인 것은 아니며, 그런 난점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술어의 정의를 규정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가 없다. 난점들이 그것에 대해 몰려 얽힌 단어들은 더러는 예증에의 직접적인 적용으로부터 알려지게 되었던 까닭에, 대화의 단절에 처한 당사자는 "나는 다음 기준에 따라 결정된 방식으로 '원소'(또는 '혼합물',또는 '행성' 또는 '속박되지 않는 운동')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며, 그들 이론 양쪽 또는 그 이론들의 경험적 결과 양쪽에 적합한 중립적 언어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 차이의 일부는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영되고 있는 언어들의 적용보다 우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 단절을 겪은 사람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치는 자극은 동일한 것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신경 장치도 같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짜여져 있다. 게다가 경험의 가장 중요하지만 미소한 영역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경 프로그래밍조차도 거의 똑같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직전이 과거를 빼고는 그들이 하나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그들의 일상적 세계와 대부분의 과학적 세계 그리고 언어는 모두 공유의 것이다. 공통되는 것이 주어진 만큼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에 관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기법은 그리 간단하거나 편안하지도 않으며 과학자의 정규적 병기창의 일부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그런 기술이 무엇인가에 관해 참으로 깨닫는 경우가 드물며, 또 과학자들은 개종을 유도하거나 스스로 개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그런 기교를 더 오래 사용하는 일도 매우 드물다.
간단히 표현해서, 대화 단절에서의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다른 언어 사회의 구성원이라 여기고, 그 다음에 번역가가 되는 일이다.17) 그룹 자체 안의 그리고 그룹 상호간의 대화 사이의 차이 자체를 하나의 연구 주제로 잡는다면 그들은 첫째로, 각 집단 안에서는 별 문제 없이 사용됐으나, 그룹 사이의 논의에서 말썽의 초점이 되는 술어와 어법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그런 난점을 제기하지 않는 어법은 그 소리대로 번역하면 된다). 과학적인 의사 소통에서 난제가 되는 영역을 골라내게 되면, 그들의 문제거리를 더욱 밝히려는 시도로서 자신들이 공유하는 일상적 어휘들에 의지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언어로 나타낸 반응에 다른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보고 말할 것인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비정상(anomalous)의 거동을 단순한 오차 내지 착란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을 충분히 억제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서로서로의 행동을 꿰뚫어 예측하게 된다. 각자 남의 이론을, 그리고 그 논리적 결과들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터득할 것이며, 동시에 그 이론이 적용되는 세계를 자기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익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사학자가 시대에 뒤진 과학 이론을 다룰 때 규칙적으로 수행하는(또는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 된다.
만일 이루어진다면, 번역은 대화 단절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견해가 안고 있는 강점과 결함이 무엇인가를 대리해서 경험하도록 한다. 그런 까닭에 번역은 설득을 휘하거나 개종을 위해 양쪽으로 막강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설득조차 성공할 필요는 없으며, 만약 성공한다고 해서 그것은 개종을 수반하거나 또는 개종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두 경험은 같은 것이 아닌데,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와서야 완전히 깨닫게 된 중요한 차이점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그에게 나 자신의 견해가 우월하다는 것, 따라서 그 자신의 것을 대치해야 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이다. 그 정도쯤은 번역과 같은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흔히 이루어진다. 번역이 없이는 어느 과학 그룹의 구성원들에 의해 얻어진 설명과 문제-진술 가운데 다수가 다른 이들에게는 모호해 볼일 것이다. 그러나 각 언어 집단은 출발로부터 보통 몇 가지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데, 이런 연구 결과는 양쪽 그룹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는 글귀로 서술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의 술어를 써서 다른 집단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 만일 새로운 관점이 당분간 견디어 내고 계속 성공을 거두게 되면, 이런 방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연구 결과는 그 수가 불어나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과만으로 결정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견해의 옹호자들이 어떻게 성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배워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분명히 옳다. 그런 반응은 특히 그 전공 분야에 방금 입문한 사람들에게서 쉽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어느 한쪽 그룹의 특수한 어휘와 공약을 아직 습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그룹이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어휘로 서술된 논증은 보통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데, 적어도 상반되는 출현에서 거의 최후 단계까지는 결정적이 못 된다. 전문분야에 이미 수용된 견해들 가운데서, 번역에 의해 허용된 보다 확장된 비교에 얼마간 의지함이 없이 설득되는 것은 거의 없다. 치러야 할 대가는 흔히 대단히 길고 복잡한 문장들임에도 불구하고('원소'라는 용어를 빌지 않은 채 진행되었던 프루스트와 베르톨레의 논쟁에 관해 생각해 보라), 추가적인 많은 연구 결과는 한 과학자 사회의 언어로부터 다른 것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 더욱이 번역이 진행됨에 따라 각 집단의 일부 구성원들은 대리적으로, 이전에 모호했던 진술이 어떻게 해서 반대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설명으로 보일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의 이용 가능한 설득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번역이란 두려움을 주는 과정이며, 그리고 그것은 정상과학에서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 위에 논쟁이 덮침에 따라서, 그리고 도전 뒤에 도전이 성공적으로 응전됨에 따라서, 맹목적인 완강함만이 결국에 가서는 연속되는 저항에 관한 이유가 된다.
그렇게 되면, 역사학자와 언어학자 양쪽 모두에게 오랫동안 친숙한 번역의 제2의 국면은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어느 이론 또는 세계관을 자기의 고유 언어로 번역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낯설었던 언어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전환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만한 이유가 꽤 그럴듯하더라도, 어느 개인이 일부러 선택에 의해 한다든가 하지 않아도 되는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번역을 배우는 과정의 어디에선가 그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결론이 맺어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언어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는 그렇지 않으면, 예컨대 그들의 중년기에 상대론이나 양자역학에 처음 직면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새로운 견해에 완전히 설득 당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재화하지 못한 채 그 견해가 구축하는 세계에서 편안할 수가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은 지적으로 자기 선택을 완료한 것이지만, 그것이 유효하게 되어 요구되는 개종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론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생소한 환경에서 이방인으로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오직 거기에 원주민들이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대안이 된다. 그의 직업은 원주민들의 것에 기생하는 셈인데, 왜냐하면 그는 그 사회의 장래 구성원들이 교육을 통해 습득할 지적 요소들의 좌표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의 통일적 전체의 게슈탈트 전환에 비겼던 개종경험(conversion experience)은 혁명의 과정에서 심장부를 이룬다. 선택을 위한 훌륭한 이유들은 전환의 동기를 제공하며, 전환이 일어나기 쉬운 풍토를 조성한다. 덧붙여, 번역은 신경적 재프로그래밍에 관한 입력의 요점을 제공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불가해일지라도 그것이 전환의 바닥에 흐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훌륭한 이유라든가 번역의 그 어느 것도 이런 집단적 개종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과학적 변화의 본질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설명해야 할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6. 혁명과 상대주의 (Revolutions ans Relativism) 방금 약술한 입장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가 특히 나를 비판한 사람들 중 다수에게 문제거리가 되었다.18) 그들은 나의 견해를,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절에서 전개된 바로서, 상대주의적 입장이라고 보고 있다. 상이한 이론들의 옹호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__문화권(language-culture) 집단의 구성원과 마찬가지이다. 유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그룹이 다 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문화와 그 발달에 적용될 때 그런 입장은 상대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과학에 적용되는 경우 그것은 그렇게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 세력이 보는 데 실패했던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상대주의(mere realtive)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하나의 그룹으로서 또는 그룹들 속에서 볼 때, 발전된 과학의 종사자들은 근본적으로 수수께끼-푸는 사람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론-채택의 시기에서 그들이 전개하는 가치관은 그들 연구의 다른 국면으로부터 유도되기는 하지만,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수수께끼를 설정하고 풀이하는 증명된 능력은 가치 상충의 경우에서, 과학자 그룹의 대다수 구성원에게 가장 뚜렷한 기준이 된다. 다른 어느 가치와도 마찬가지로 수수께끼-풀이 능력은 적용에서 모호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활용으로부터 이끌어내는 판단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탁월하게 만드는 어느 과학자 사회의 행위는 그렇게 않은 사회의 것과는 전혀 딴판이 될 것이다. 나는 과학에서 수수께끼-푸는 능력에 부여되는 높은 가치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원초적인 자연철학과 수공업에서의 그들의 공통된 원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과학 전문분야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진화의 계통수를 상상해 보라. 기둥으로부터 어느 가지의 끝까지 결코 접히지 않는 그 계도를 따라 그려진 선은 후예에 의해 연결되는 이론의 계통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 이론들의 원점 근처에 너무 가깝지는 않은 점들을 골라 어느 두 가지 이론을 고려해 보면, 별 상관없는 관찰자라도 보다 최신 이론으로부터 그 이전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의 항목을 고안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가장 유용한 것들 가운데 몇을 들어보자. 예측, 특히 정량적 추론의 정확성, 비전과 일상적인 주제 사이의 균형, 그리고 해결된 다수의 상이한 문제의 수이다. 이것들은 과학 활동에서 역시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목적에 덜 활용되는 것으로는 단순성, 전망 그리고 다른 전공과의 조화 등의 가치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항목들은 아직은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이 완결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일 완결된다면 그 다음 과학의 발전은, 생물학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 방향이 하나이며 비가역적인 과정이 된다. 그 이후의 과학 이론들은 그것들의 적용되는 흔히 상당한 차이가 나는 환경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이전의 것들보다 더 좋은 이론이 된다. 이는 상대주의자의 입장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과학의 진보를 확신하는 신봉자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과학철학자와 일반인 양쪽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진보의 개념과 비교해 보면, 이 입장은 핵심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하나의 과학 이론이 보통 그 먼저 것들보다 우수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수수께끼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보다 나은 도구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방식으로든 자연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를 더 잘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자주 듣는 말로서, 연속되어 이어지는 이론들은 갈수록 진리에 더욱 근접하거나 또는 진리에 점점 더 가깝게 근사적으로 된다고 한다. 명백히 이와 같은 일반화는 수수께끼-풀이와 이론으로부터 유도된 구체적 예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ontology)에 관한 것이고, 그 이론이 어떠한 실재 (entity)로 자연을 채우는가, 그리고 '참으로 거기에 (really there)' 무엇이 존재하는가 사이에서의 조화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전체 이론에 적용되는 '진리'의 개념을 구하는데 그 밖의 다른 방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방식은 그런 구실을 못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참으로 거기에'와 같은 어구를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서 이론과 무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이론의 존재론과 자연에서의 그 '실제(real)' 대응물 사이의 부합이라는 개념은, 이제 나에게는 원칙적으로 착각하기 쉬운 성격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과학사학자로서 나는 그 견해의 비개연성에 감명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나는 뉴턴의 역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보완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수수께끼-풀이의 도구로서 뉴턴의 이론을 향상시킨 젓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의 승계에서 존재론적 진전의 시종일관된 방향성을 볼 수가 없다. 그 반대로, 그렇다고 전체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더 가까운데, 이는 아인슈타인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뉴턴이론에 근접한 것보다는 더 가깝다. 이런 입장을 상대주의로서 묘사하려는 유혹은 이해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그 표현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해서, 만일 그 입장이 상대주의(relativism)이라면, 나는 상대론자(relativist)가 과학의 본질과 발전에 관해 설명하는 데 요구되는 그 어떤 것을 잃는다고 볼 수가 없다.
7. 과학의 성격(The Nature of Science) 이제 나의 초판의 원문에 대해 빈발하는 두 가지 반응을 간단히 논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첫 번째 것은 비판적이고 두 번째 것은 호의적 반응인데, 나의 생각으로는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계속 얘기해 왔던 것에 관계되지도 않고 또한 상호간에 연관되지도 않지만, 두 가지 반응이 다 상당히 널리 퍼져 있으므로 적어도 얼마만큼은 나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판을 읽은 몇몇의 독자들은, 내가 서술적(descriptive) 그리고 규범적(normative) 양식의 사이에서 되풀이해서 왔다갔다하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런 이행은 특히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로 시작되어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나는, 자주 쓰여진 문장에서 두드러졌다. 어떤 비평에서는 내가 서술(description)을 처방(prescription)과 혼동하고 있어, 다음의 유서 깊은 철학적명제를 위배했다고 비판한다. '이다'는 -이어야 한다'를 의미할 수는 없다.('Is' cannot imply 'ought').19)
실제로 그 명제는 상투어처럼 되어 버려서, 이제는 어디에서도 더 이상 존중되는 원칙이 되지 못한다. 당대의 많은 철학자가 규범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이 구별되지 못하도록 혼합된 중요한 문맥들을 찾아내었다.20) '이다'와 '-이어야 한다' 는, 그 동안 여겨졌던 것처럼, 항상 별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 입장이 이런 국면에 대해 혼동된 듯 싶었던 것을 밝히는 데 현대 언어 철학의 미묘함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과학의 성격에 대한 관점 또는 이론을 제시했는데, 과학의 다른 철학사상과 마찬가지로, 이론은 과학자의 활동이 성공적일 경우 과학자들이 마땅히 행동해야 하는 방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다른 이론보다 좀더 옳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드시 어느 다른 이론보다 좀더 옳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복되는 '-이어야 한다'와 '-임이 당연하다'에 대한 합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바꿔 말해서 그 이론을 신중하게 다루려는 일련의 이유는 그들의 방법을 개발해 왔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선택해 왔던 과학자들이 실제는 이 이론이 그들에게 해야 할 것을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나의 서술적 일반화는 그 이론에 대한 증거인데, 그 이유는 이 일반화도 역시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과학의 본질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 이 일반화는 비정상적 거동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논증의 순환성은 결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 관점의 논리적 결과들은 당초 그 견해가 거기에 쏠렸던 관찰들에 의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기 이전에도, 나는 그것이 제시하는 이론의 일부가 과학적 행동과 과학 발전의 탐구에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후기와 초판의 비교는 그것이 그런 역할을 지속해 왔다는 것을 시사 할 것이다. 단순히 순환성의 견해가 그런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 책에 대한 마지막 한 가지 반응에 대하여, 나의 대답은 좀 다른 유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반가움과 만족스러움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까닭은 이 책이 과학에 대해 밝히는 것보다는 과학 이외의 많은 여타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책의 주요 명제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며, 그 입장을 확장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를 위축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아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이 책이 과학의 발전을 비축적인 단절들에 의해서 매듭지어지는 전통에 묶인 시대의 연속으로서 묘사하고 있는 한에서는, 그 명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 주제들이 다른 분야들로부터 빌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 음악, 미술, 정치 발전, 그리고 다른 여러 인간 활동을 연구하는 사가들은 오랫동안에 걸쳐 그들의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해 왔다. 형식, 취향, 그리고 제도적 장치에서의 혁명적인 단절로 나뉘어진 시대 구분은 그들의 표준적 수단 가운데 군림해 왔다. 만일 내가 이러한 개념들에 관하여 처음으로 발상한 것이라면, 이는 주로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발달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던 과학에 적용함으로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구체적 성취, 표준예로서의 패러다임의 개념은 이차적인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컨대 미술에서의 양식 개념을 둘러싼 말썽 많은 난점들은, 만일 회화가 어떤 추상적인 양식 규범에 따라 제작된다기보다는 서로서로 본을 따서 완성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21)
그러나 이 책은 또한 다른 유형의 요점을 밝히고자 하는데, 그것은 이 책의 많은 독자들에게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측면이다. 과학의 발전은 흔히 그렇게 여겨 왔던 것보다 더 가깝게 다른 분야에서의 발전을 닮을 수 있으면서도, 또한 전혀 다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과학이 적어도 그 발전에서어느 시점 이후의 다른 분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은,발전 그 자체가 무엇이든 간에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 차이들을 검토하고 그 차이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발전된 과학에서 서로 경쟁하는 학파들이 없다거나 또는 상당히 드물다.(이제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는 것에 대해 위에서 반복하여 강조한 것을 생각해 보라. 또는 어느 주8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유일한 청중이고 그 사회의 연구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가 되는 정도에 대해 다룬 나의 표현을 상기해 보라. 또는 과학 교육의 특이한 성격에 관해서, 목적으로서의 수수께끼-풀이에 관해서, 그리고 과학자 그룹이 위기와 결단이 시기에서 전개하는 가치체계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 이 책은 이와 똑같은 유형의 다른 특징들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 중 어느 것도 과학에만 독특한 것일 필요는 없으나, 고학 활동을 구별짓는데 연관되고 있다.
과학의 이 모든 특징에 관해 아직도 알아내야 할 부분이 대단히 많다. 이 후기의 서두를 과학자 사회의 구조를 연구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에 의해 시작했으므로, 이제 다른 분야에서의 상응하는 집단에 의한 그와 비슷한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교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과학적이건, 아니건 간에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회원을 뽑으며, 어떻게 회원으로 뽑히게 되는가? 그 과정은 어떤 것이며, 그 그룹의 사회화 단계들은 무엇인가? 그 그룹은 그 목적으로서 총체적으로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개별적이건 총체적이건 간에, 어떤 탈선까지를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탈선을 어떻게 조정하는가? 과학의 보다 철저한 이해는 이뿐만 아니라 이렇듯 심각하게 필요로 하는 영역은 다시 없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과학지식은 본래적으로 한 그룹의 공통되는 성질이거나 반면에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지식을 창출하고 또 사용하는 과학자 그룹들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
1) 이 후기를 처음 준비하게 되 것은 한때 내 학생이자 오랜 친구인 동경 대학의 나카야마 시게루 박사가 이 책의 일본어 번역판에 후기를 넣자고 한 제안 덕분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디어와 아울러 그것의 결실을 기다려 준 인내에 감사하며, 또한 이 후기를 감사하며, 또한 이 후기를 영어판에 싣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 2) 이 수정판에서 나는 체계적인 재집필을 시도하지는 않았고, 몇 개의 오자를 고친 것 이외에 골라 낼 수 있는 잘못을 범한 두 문구만을 수정하는데 그쳤다. 그것들 중 하나는 pp. 50-58에 나온 18세기 역학의 발달에서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의 역할을 설명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pp.129__130에서 위기에 대한 반응에 관한 고찰이다.
3) 내가 최근에 쓴 에세이 두 가지에는 또 다른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Reflection on My Critics", in Imre Lakatos and Alan Musgrave(eds.), Criticism and the Growdth of Knowledge(Cambridge, 1970) "Second Thoughts on Paradigms", in Frederick Suppe(ed.), The Structure of Scientific Theories(Urbana, Ill., 1970 or 1971), 다음부터는 위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것은 "Reflections"라 약칭하고, 그것이 실린 책은 "Growth of Knowledge" 라 표시하기로 한다. 두 번째 에세이는 "Second Thougths"라 부르기로 한다.
4) 내가 패러다임을 최초로 제안한 것에 대해 특히 수긍이 가도록 비판한 내용에 대하여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Margaret Masterman, "The Nature of a Paradigm", in Growth of Knowledge :Dudley Shaper,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Philosophical Review, LXXIII(1964), 383-94.
5) W.O. Hagstrom, The Scientific Comkunity (New York, 1965), chaps. iv and v; D. J. Price and D. de B. Beaver, "Collaboration in an Invisible College." American Psychologist, XXI (1996), 1011-18; Diana Crane, "Social Structure in a Group of Scientists: A Test of the 'Invisible College' Hypothesi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XXXIV(1969), 335-52; N.N. Mullins, Socail Netwroks among Biological Scientists, (Ph, D, diss., Harvard University, 1966), and "The Micro-Structure of an Invisible College: The Phage Group" (1968년 보스턴에서 열린 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연례 회의에서 발표된 논문).
6) Eugene Garfield, The Use of Citation Data in Writing the History of Science (Philadephia: Institue of Scientific Information, 1964); M. M. Kessler, "Comparison of the Results of Biblographic Coupling and Analytic Subject Indexing", American Documentation, XVI (1965), 510-15. 7) Masterman, op.cit. 8) 이 에피소드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T. M. Brown, "The Electric Current in Early Nineteenth-Century French Physics",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I 1969), 61-103, and Morton Schagrin, "Resistance to Ohm`s Law", American Journal of Physics, XXI(1963), 536-47. 9) 특히 다음을 참조하라. Dudley Shapere, "Meaning and Scientific Change", in Mind and Cosmos : Essays in Contemporary Science and Philosophy,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Ser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III(Pittsburgh, 1966), 41-85; Israel Scheffler, Scinece and Subjetivity(New York, 1967); the essays of Sir Karl Popper and Imre Lakatos in Growth of Knowledge. 10) XII 절 첫머리의 논의 참조. 11) 이 보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ene Dugas, A History of Mechanics, trans. J. R. Maddox(Neuchatel, 1955), pp. 135- 36, 186-93, and Daniel Bernoulli, Hydrodynamica, sive de viribus et motibus fluidorum, commerntariiopus academicum(Strasbourg, 1738), Sec. iii. 18세기 전반에 걸쳐 문제-풀이를 다른 것에 본뜸으로써 역학이 발달된 정도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Clifford Truesdell, "Reactions of Late Baroque Mechanis to Success, Conjecture, Error, and Failure in Newton`s Principia", Texas Quarterly, X (1967), 238-58. 12) 이 주제에 대한 자료는 "Second Thoughts"에 실려 있다. 13) 만일 모든 법칙이 뉴턴의 법칙과 같고 모든 규칙이 십계명 같았더라면, 이런 점은 밝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법칙을 깨뜨린다'는 말은 난센스일 것이며, 규칙의 거부는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교통 법규와 그 비슷한 여러 법칙은 깨어질 수 있어서 이 문제는 쉽게 혼동을 일으킨다.
14) "Second Thoughts"의 독자를 위해, 다음의 숨은 얘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계의 과의 구성요소들을 곧바로 알아맟추는 가능성은 신경처리 과정 뒤에, 구별하려 하는 과들 사이에 비어 있는 지각력의 공간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거위로부터 백조에 이르는 범위의 물새에 대하여 감지되는 연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특수한 기준을 도입해야만 할 것이다. 관찰할 수 없는 실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요지가 성립된다면, 그 다음에는 경우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몇 가지 안 되는 기준으로 하는 한 벌의 규칙이 없더라도 그러하다. 그런 요점은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개연성의 필연적 결과를 제시한다. 이론적 실체는 치환에 의해서 어느 이론의 존재론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규칙들이 없게 되면, 이런 실체들은 제거할 수 없다. 다음 단계로 그 이론은 그런 실체들의 존재를 요구한다.
15) 이에 수반되는 주안점은 "Reflections"의 v절과 vi절 참조. 16) '주 9)'와 "Growth of Knowledge"에 Stephen Toulmin 이 쓴 에세이. 17) 번역에 관련된 국면은 대부분 이미 고전이 된 자료인 W. V. O. Quine, Word and Object(Cambridge, Mass., and New York, 1960), i장과 ii장에 수록. 그러나 콰인은 같은 자극을 받는 두 사람은 같은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번역자가 번역하려는 언어가 적용되는 세계를 서술할 수 있어야 하는 범위에 관해 거의 말할 것이 없다. E.A. Nida, "Linguistics and Ethnology in Translation Problems", in Del Hymes(ed.), Language and Culture in Society (New York, 1964), pp. 790-97참조. 18) Shaper,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and Popper in Growth of Knowledge. 19) 여러가지 보기 가운데 하나는 "Growth of Knowledge"에 실린 P.K. Feyerabend의 논문이다. 20) Stanley Cavell, Must We Mean What We Say? (N.Y., 1969), chap.i. 21) 과학에 대하여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를 보다 확장시켜 논의한 것뿐만 아니라 이점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조하라. T.S.Kuhn, "Comment(0n the Relation of Science and Arta)", Comparative Studies in Philosophy and History, XI(1969), 403-12.
@ff 역자 해설
I
20세기의 현대사상 가운데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의 과학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패러다임 명제가 실린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ce Revolutions)"는 1962년 그 초판의 출간과 동시에 열광적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광범위한 영역에서 '쿤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과학 변천 및 발전에 관한 이론은 특히 과학철학 분야에서 심각한 논쟁을 유발시켰고,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아가 사회과학분야에 더욱 심오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쿤의 이론이 기본 골격을 갖추게 된 배경은 어떠한가? 1922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태어나, 1943년 물리학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수석 졸업한 쿤은 과학 연구 및 개발 연구소(OSRD)에서 2년간 일한 뒤, 모교 대학원 물리학과로 되돌아가서 장학금(NRC)으로 학위과정을 밟는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언에서 자서전적으로 술회하고 있듯이, 그는 화학자이면서 과학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교의 코넌트(James Conant) 총장이 개설한 비자연과학계열 대상의 자연과학 개론 강의를 거들게 도면서 과학의 역사적 측면에 관해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쿤의 과학사에 대한 관심은 1948년 하버드 대학 '주니어 펠로우(junior fellow)'에서와 1951년 하버드 대학 교양과정 및 과학사의 강사, 조교수 경력을 거치면서 과학사상의 혁명적 변화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십여 년 간의 철학,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분야의 폭 넓은 독서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과학혁명의 이론은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 의 업적으로 학문적 역량을 널리 인정받게 된 쿤은 1956년 버클리 대학으로 옮겨 과학사과정의 개설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 고등 연구센터(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roral Sciences)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생활한 것을 계기로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창안에 이르게 된다. 그 시절 그는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그 분야의 주제나 방법의 본질에 관한 공공연한 논란이 빈번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자연과학자들의 과학 활동에서 그런 종류의 근본적 문제들에 관한 논란이 덜하다는 사실과의 차이를 바로 과학연구에서의 패러다임의 역할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이란 뜻의 단어이다. 과학지식의 발전 이론에 이 용어가 도입된 것은, 어느 측면에서는 언어학의 영향을 보여 주는 셈이다. 쿤의 견해에 따르면, 학생들이 과학 교육에서 습득하게 되는 것은 흔히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인 과학적 개념의 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용어들이 사용된 예제들을 푸는 표준방법에서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과학 연구가 수행된다는 실제 과학의 특성에 주목함으로써, 과학 활동을 어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표준형으로부터 여러가지의 변형들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비유하게 된 것이 '쿤의 패러다임의 출현'을 낳았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떠오른 패러다임이란 개념은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 집필에 필수불가결의 기본 요소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생각은 에세이로 옮겨 질 수 있었다.
II
쿤의 과학관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변천 및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요지를 둠으로써, 과학의 진보가 축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의 발전 모델에 의하면, 과학혁명(sciendtific revolution)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축적적인 변화의 에피소드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혁명에 의해 과학이 변화한다면 그런 혁명들 사이에는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활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어느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anomaly) 현상들의 빈번한 출현에 의해 위기(crisis)에 부딪침으로써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이 된다. 정상과학은 과학자 사회의 전형적 학문 활동의 형태로서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쿤의 이론에서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사실상 패러다임의 본질은 명확히 규정하고 완벽하게 정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다만 여러가지 구성 요소로 기술될 수 있을 따름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과학 분야의 기본 이론과 법칙, 개념, 지식 등이 그 요소를 이루는데, 과학도들은 실례 문제-풀이로부터 패러다임을 익히게 되므로 이런 예제들도 그 요소가 된다. 기본 법칙을 적용하는 표준적 방법, 법칙들과 자연현상을 연관시키는 데 필요한 실험기술과 장치 또한 패러다임의 구성요소로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정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들도 패러다임의 기본 요소를 이룸으로서, 예컨대 이론의 정확성, 간결성, 체계성 등을 중시하는 그 분야의 가치관, 과학자 사회의 공유된 개념, 관습까지도 패러다임에 포함된다.
패러다임은 이렇듯이 정의되기 힘든 개념인 까닭에 과학도들은 명문화된 규정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에서 은연중에 터득하게 된다. 특히 교육 과정에서는 과학 연구의 과정에서 은연중에 터득하게 된다. 특히 교육 과정에서는 과학 연구의 결과를 평가하는 그 분야 과학자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쿤의 과학지식 이론에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정상과학에서는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비판적 질문, 예컨대 기본 이론의 성립 여부에 관한 논의 등은 제기되지 않는다., 정상과학의 출현은 그 분야가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며, 패러다임의 부재는 과학 이전의 단계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 사회과학의 제분야가 과연 과학의 자격을 얻었는가에 관한 논란이 제기된다.
쿤의 분석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안주하여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연구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첫째로 패러다임의 틀 속에서 자연 세계 현상들의 본질에 대한 사실 탐구, 둘째로 기본 이론들로부터 예측되는 결과를 직접 관찰한 사실과 비교, 설명하는 작업, 셋째로 예측과 사실 사이에 부합되는 정도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의 수정, 보완 및 명료화 작업으로 분류된다.
정상과학은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에 비유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푸는 사람들이 확실한 해답이 존재함을 알고, 풀이를 얻는 데 필요한 규칙과 지침을 터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적 연구에서 패러다임의 기본 이론과 상치되는 결과를 얻는 경우에는, 이론의 성립여부가 의심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능력 여부가 의문시되는 것이 상례이다. 성급하게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과학자는 마치 '연장을 탓하는 목수격'이 된다.
그러나 그 과학자 사회가 더 이상 설명해 낼 길이 없는 기본 이론과 모순되는 이상 현상들이 누적되는 경우 정상과학은 위기를 맞게 되며, 그 반응은 과학연구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기존 패러다임에 기초한 활동과 판단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급기야 새로운 이론 체계들이 나타나며 과학자 사회는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 때 연구 방법과 현상을 지각하는 관점에서의 대규모 재조정이 수반되며, 개념 체계 역시 재구성의 과정을 겪게 된다. 쿤은 이것을 가리켜 과학혁명이라 일컫는다. 과학자는 그가 속한 분야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 세계의 어느 측면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전향을 의미하며, 이렇듯이 새로운 기반으로부터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과학혁명을 통해서 지식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은 논리적 기준에 의해 비교할 수 없는 동일 표준상 비교불능성(incommensurability)을 띤다. 하나의 이론 체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것의 개념, 법칙, 가정들을 포함한 패러다임 전체를 믿는 것을 의미하므로, 따로 분리시켜 비교한다거나 새로운 체계에 의해 옛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쟁적인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기준을 전제로 하는 까닭에 논증의 설득력은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쿤은 과학혁명을 정치혁명에 비유하면서,정치혁명의 목적은 기존 제도를 파괴하는 방법을 통해 정치적 제도를 개혁하는것이므로 정치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과학혁명에서도 경쟁하는 패러다임사이의 선택은 양립 불가능한 생활 양식 사이의 선택이며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없는 성격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 선택은 과학자가 이론 체계의 간결성,사회적 필요성, 문제 해결 능력 등의 요소 중 어느 것에 우선성을 부여하는가하는 개인적, 주관적 이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쿤은 이런 전환을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 또는 종교의 개종(conversion)에 비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III
쿤의 과학관은 철학 분야에서 가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이 발표될당시 과학철학 내에서는 이미 제기되고 있던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적 과학철학에 대한문제점들의 해결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과학 이론의 인식론적이해에 있어 이론의 내용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정적, 비역사적고찰로부터 탈피하여 이론의 발견, 변천, 수용에 걸친 동적, 실제적 접근이불가피하다는 견해가 대두되어 있었던 까닭에, 쿤 이론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뜨겁게 가열된 비판과 이론의 배경을살펴보건대, 쿤의 용어를 빌자면, 이들 논란의 주된 원인은 양진영이 서로 다른패러다임을 신봉하는 탓이라 여겨진다.
쿤의 이론은 역사적, 실제적으로 과학 활동이 어떻게 수행되는가에 대해경험적, 사회적 측면에서 타당한 설명을 제시한 다음에 규범적 결론을 끌어내고있다. 그 반면에 철학 쪽의 비평세력은, 현실 속의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규범에의해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의미에서의 과학 발전을 설정함으로써, 경험적 근거를무시한 채 분석적, 논리실증적 관점에서의 엄밀하고 명시적인 설명을 요구한 측면이매우 강하다. 이렇듯이 대비적인 두 시각에서 바라보는 한, 갈등은 불가피한 것으로보인다.
한편 쿤 이론은 과학사학자, 과학사회학자, 과학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평소의 과학 활동에서 체험한 특성들이 쿤에 의해 구체적으로 체계화됨으로써,쿤의 기본 개념들은 과학사적 인식과 설명에 요긴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구조, 규범, 제도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출발점이제공됐기 때문이다.
쿤의 이론에 대한 반응은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더욱 열광적이었다. 당초그의 이론에서의 혁명적 불연속성에 관한 발상은 정치, 문화, 음악, 미술 등의역사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인데, 이제 쿤의 발전 이론은 그들 분야로 되돌아가지식 변천에 관한 모델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쿤 자신은 이러한 원용에 관련하여,과학과 달리 다른 분야들은 단일 패러다임에 합의하여 비판 없이 세부적인문제-풀이 활동을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한 바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이외 쿤의 그 밖의 저서로는 "The Copernican Revolution: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Cambridge,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57)와 "The Essential Tension:Selected inScientific Tradition and Change"(Chicago:University of Chicage ress, 1977)이있고, 공저로는 T. S. Kuhn, J. L. Heilbron, P. Forman, eds., "Sources for theHistory of Quantum Physics"(Philadelphia, Pa.: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1967)와 T. S. Kuhn, Alan L. Porter, eds., "Science, Technology, and NationalPolicy"(Ithaca, N. Y.: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등이 있다.
IV
쿤의 이론은 아직까지 진화 과정에 있다고 평론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우선, 언어학자 매스터먼(Margaret Masterman)에 의 해 분석되었듯이, 패러다임의의미가 자그마치 스물 두 가지로 쓰였을 만큼 모호하다는 비판에 대해, 쿤은1970년 증보판 후기에서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을 새로이 제안하는것에 의해 보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의를 불문하고 패러다임이란 용어는매우 친숙하게 널리 퍼져 사용되고 있다. 쿤의 이론에서는 또한 상이한 패러다임사이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과 그들 사이의 선택에 관한 설명 등이 특히공격을 많이 받은 부분이다. 쿤(1964년 이후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교수, 1979년 이후 MIT의 언어학 및 철학과 교수)은 현대의 대표적 사상가답게매우 설득력 있는 반론을 펴오고 있으나, 논리적 분석의 엄밀성에서는 아직도 완전한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이 쿤 이론의 중요성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그것은 과학과 과학 활동의 본질에 내재한 원천적 모호성, 즉 그것들 자체가명시적 요소뿐만 아니라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묵시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엄밀하게 분석할 수 없는 요소들이라는 이유로 관심의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과학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경시하는극단적 입장에 선다면, 결국 과학의 본질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포기하는 길밖에안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어쩌면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제시하는 혁명적인 결론가운데 하나는, 과학도 인간의 여타 활동과 유사한 방식에 의해 변천하는 것이며,통상적으로 과학의 특성이라고 간주되었던 객관적, 논리적, 경험적, 가치중립적성격들이 타분야에 견주어 볼 때, 그 정도가 더한 것은 사실이나 본질적으로는크게 다를 바 없다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쿤은 1987년, 만 65세를 맞으면서 다시 새로운 책의 집필에 진력하고 하고 있다."과학혁명의 구조"의 서언에서, 과학지식의 발전과 변천에 관한 그의 논의를전개함에 있어 지면의 제약을 받았다고 술회했던 만큼 앞으로 출간될 그의 새 책은,그의 사상의 변천을 보여줌과 동시에 쿤 혁명을 완결시키리라 믿어지기 때문에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