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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조 유방의 8명 아들의 운명
첫째아들: 제왕(齊王) 유비(劉肥).
제왕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큰아들이다.
한고조 유방이 아직 결혼하기 전에 조씨(曹氏)와의 사이에 유비를 낳았다.
서출이므로 태자가 되지는 못했다.
유비의 모친은 일찍 죽었다.
한고조 유방은 생모가 없는 큰아들을 항상 동정하고 아껴주었다.
모친을 잃은 아이에게 부친의 정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고조가 된 유방은 큰아들에게 봉상(封償)을 크게 내렸다.
한고조 6년에 그를 제왕으로 봉하고 70개의 성을 내린다.
한고조 유방의 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왕에 봉해졌고 영지도 가장 넓었다.
한혜제 유영 2년 입경하여 황제를 배알한다.
황태후 여치는 그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한고조가 넓은 땅을 주었다는 것을 시기해 제왕 유비에게 독주를 내린다.
그것을 미리 알아차린 한혜제 유영(여치의 친아들)이 독주를 빼앗아 마시려고 한다.
쌈짝놀란 황태후 여치는 한혜제 유영의 손을 탁 처 술잔을 떨어뜨린다.
제왕 유비는 숙사로 돌아와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 끝장이다.
여태후가 나를 죽이려 한다.
수하중에 아이디어가 뛰어난 자가 있었다.
그를 불러 의논하니,
"성양군을 황태후 여치의 딸 노원공주에게 헌납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하고 나니 여태후가 기뻐하게 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왕 유비는 13년간 재위하다가 한혜제 6년에 죽는다.
그의 봉국은 일찌기 여씨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가
한문제가 즉위하면서 제왕 유비의 일곱 아들에게 니누어 왕으로 봉해지지 7제국으로갈라진다.
그 후 점차로 중앙에 귀속된다.
둘째아들,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
한혜제 유영은 한고조 유방과 황후 여치 사이의 적장자(嫡長子)이다.
한고조12년 유방이 죽자 17세 유영이 한혜제로 즉위한다.
따라서 황후 여치도 황태후가 된다.
이때부터 한황궁은 죽음의 장소로 악독한 여씨집안의 나라가 된다.
한고조 유방은 황태자 유영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늘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자 유영을 폐위시키고 동생 유여의를 황태자를 세우려고 하였었다.
여치는 장량에게 이 사실을 의논했다.
장량이 계책을 내기를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불러내서 유영을 보필하게 하라고 했다.
'상산사호'가 어떤 인물인지? 사서에 없지만,
유영이 '상산사호'를 불러 옆에 두는 것을 보고 한고조는 유영의 재주가 아주 높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청해도 나오지 않던 세외고인 그를 청해서 하산하게 하였다는데 감탄한다.
그 후로 유영의 태자폐위 생각을 거두게 되었다.
한혜제 유영이 즉위 후 큰 업적은 못이뤘지만, 정치는 비교적 깨끗했고 사회도 안정되었다.
한혜제 유영은 우유부단하고 연약하고 무능했다.
재위기간 동안 계속 모친의 위력과 간섭을 받았으나 항상 순종하였다.
황태후 여치가 다른 형제들을 죽이려고 할 때 지혜롭게 대처해 구해 주었다.
큰 형 제왕 유비는 잘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셋째 동생인 조왕 유여의를 보호하는데는 실패했다.
여태후는 조왕 유여의를 독살시켰고,
유여의 모친 "척희"를 '인치(사람돼지)'로 만들어 토굴에 가두었다.
그런 후 슬며시 황제 유영을 불러 보이게 했다.
황제 유영은 피투성이 괴물이 "척희"임을 알고 기급(氣急)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제대로 황제역할, 사람역할 하지 못하게 된다.
매일 술이나 마시며 어머니 여태후의 악행에 비통해 하다 결국 우울병으로 죽어버린다.
한혜제 유영은 겨우 24살에 재위 7년에 불과했다.
한혜제가 죽은 후,
여태후는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를 황제에 올려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결국 어린 손자를 허수아비로 앉혀놓고 자신이 8년간 실권 황제로 있게된다.
셋째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
한고조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정도(定陶)에서 "척희(戚姬)"를 알게 된다.
"척희"는 수단이 뛰어난 여자여서 금방 귀비에 오른다.
조왕 유여의는 바로 "척희"의 아들이다.
한고조 유방은 황태자 유영이 순박하고 착하여 무능하게 만 보였다.
태자 유영이 저렇게 순박하고 유약하여 어떻게 강한나라로 이끌수 있을까? 늘 걱정했었다.
반대로 셋째 유여의는 부친을 닮아 강단이 보였고,
그의 모친인 "척희"도 수단이 좋아 태자로 올리려 노력했다.
한고조 유방도 "척희"와 깉은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황태자를 폐하는 것은 국가대사이다.
황제인 자기 혼자 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대신들과 의논하다보니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장량 또안 반대 해 여황후에게 그 계책으로 세외고인 '상산사호'를 모셔오게 한다.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고조는 할 수 없이 유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희"와 함께 조나라로 가도록 한다.
한고조 유방이 황후 여치가 조왕 유여의 모자를 괴롭힐까? 걱정되어,
황후 여치의 편 사람 주창을 조나라 국상(國相)으로 보냈다.
한고조 유방이 소천한 후,
황후 여치는 "척희"를 원수로 생각허고 조왕 유여의를 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잡아 조왕을 입조하게 한 후 참초제근(斬草除根)하고자 했다.
황태후가 된 여치의 뜻을 주창이 잘 파악했다.
3번이나 불러도 모두 거절한다.
독기를 품은 황태후 여치는 우선 주창을 황궁으로 부른 후, 다시 조왕 유여의을 불렀다.
유여의는 할 수 없이 장안으로 간다.
여태후는 악독했으나 한혜제 유영응 마음이 선량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로 방법으로 동생을 보호해 준다.
태후 여치는 성밖에서 먼저 손쓰려고 했다.
한혜제 유영이 그 사실을 눈치체고 동생을 보호하려 친히 성밖으서 맞이함으로써 실패한다.
그 후 늘 동생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생활 했다.
그리하여 여치가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호랑이도 조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한혜제 유영은 일찍 일어나서 활을 쏘는 습관이 있었다.
14살 된 어린 동생이 곤히 자고 있어 깨우지 않고,
동생을 황제의 침궁에 남겨두고 나갔다 돌아오니
이미 조왕 유여의는 일곱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조왕 유여의의 모친 "척희"는 여태후가 '인치'를 만들고 결국 죽였다.
넷째아들,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
대왕 유항은 한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모친은 박(薄)씨이다.
여러 대신들이 여씨집단을 공멸시킬 때,
그는 참가하지 않고 그저 관망하기만 한다.
대신 주발(周勃), 진평(陳平)등이 논의하기로,
황제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대왕 유항이라고 결론을 내려,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렀다.
대신들이 모두 백전노장에 궤계가 많은 자들이라 쉽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왕 유항은 참가하지 않았다.
대왕 유항의 곁에는 모두 담이 작고 조심스러운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 중 중위장 송창이란 사람이 있었다.
송창은 대왕에게 장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한다.
대왕 유항은 모친 박씨와 협의하고,
다음으로 점을 쳐 보기도 하고,
사람을 장안으로 보내어 허실을 정탐하여,
확실하다는 것을 안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장안으로 가는데 송창은 대왕 유항과 함께 가마에 앉아서 가는 영광을 누린다.
송창은 이때부터 관운이 활짝 열리게 된다.
대왕 유항이 역사상 그 유명한 한문제가 된다.
재위기간 동안 개혁개방 정책을 일련목연하게 취했다.
대내적으로 농업개혁을 시행하고,
두번에 걸쳐 세금감면을 시행해서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친히 농사를 지어 모범을 보여 농업생산을 증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법제 개혁에서 육형과 비방요언죄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한다.
조직인사 개혁에서 사람들을 잘 쓰고, 건의를 잘 받아들이며, 인재들을 많이 등용한다.
생활 개혁에 있어서도 황제 자신이는 근검절약하고 스스로에 엄격했다.
자신은 자주 기운 옷을 입고 다녔고,
황후와 비빈들에게 치마가 땅에 끌리지 못하도록 짧게 입도록 하였다.
재정과 도시건설 개혁에 있어서도 비용을 절약하고,
아무렇게나 돈을 낭비하지 않았고,
이미지 공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장례제도 개혁에 있어서 후장을 반대했다.
자기의 부장품도 금,은,등 귀금속은 일체 쓰지 못하게 하고 모두 도기로 하도록 하였다.
한문제 유항은 유흥거와 유장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의가 제기한 대제후의 영지분할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중앙집권과 서한의 통일에 기여한다.
대외적으로 그는 한나라와 남월 및 흉노의 관계를 잘 처리했다.
동시에 변방의 역량을 강화하였다.
한문제 유항은 재위23년만에 미앙궁에서 병사한다.
그의 아들 태자 유계가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한경제 이다.
한문제 유항과 한경제 유계의 통치를 묶어서 '문경지치'라고 부른다.
태평성대의 대표적인 시기가 이때이다.
다섯째 아들, 양왕(梁王) 유회(劉恢)
유회는 처음에 양왕에 봉해 졌다.
기원전 180년 유우(劉友)가 죽은 후,
조왕(趙王)으로 고쳐 봉해진다.
왕에 봉해질 때는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이제 나이가 든 후에 돌연 조왕으로 고쳐 봉해지니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요한 이유는 조(趙)가 그에게는 불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의 두 조왕이 모두 비명에 갔다.
그는 흉다길소라고 느낀다.
여태후는 다시 그에게 친정동생 여산(呂産)의 딸을 왕후로 삼으라고 명한다.
이 여씨왕후는 여태후의 힘을 믿고 함부로 행동했였다.
아예 조왕 유회를 무시했다.
조왕 유회로 하여금 다른 왕비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뿐아니라,
딸을 만나는 것까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심복을 파견하여 조왕 유회의 행동을 감시했다.
조왕 유회는 참고 또 참았지만 그도 남자였다.
결국 여왕후와 한번 부닥치게 된다.
여왕후는 고모 여태후 못지 않게 악독한 여인이었다.
몰래 조왕 유회의 첩과 딸을 죽여버린다.
거의 드러내놓고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왕 유회는 아주 비통해하며 절망 한다.
그는 어느날 밤 자기의 허리띠를 풀어서 목을 걸고 죽음을 선택한다.
황태후 여치는 이 소식을 듣고는 아주 기뻐한다.
이는 바로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다.
유씨들 왕을 하나 죽여버리면 왕위자리가 하나 더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후 조카인 여록(呂祿)을 조왕에 봉한다.
그렇지만 조왕의 악운은 성씨가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여록도 앞의 조왕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여섯째 아들,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
유우는 처음에는 회양왕에 봉해진다.
조왕 유여의가 주살당한 후, 태후 여치는 유우를 조왕이 책봉한다.
그리고 여씨집안의 여인을 그에게 보내어 왕후로 삼게 한다.
유우는 이 여씨왕후에 대하여 무덤덤한 감정 뿐이었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여씨왕후는 높고 황홀한 집에 살게 하고 자신은 좋아하는 후궁들과 잘 지냈다.
결국 여씨왕후는 화가나서 친정으로 돌아가고,
여태후에게 자기 남편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자질하게 된다.
모반은 최대의 범죄이다.
태후 여치가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조왕 유우를 장안으로 불러서 구금하고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
조왕 유우는 꼼짝없이 산채로 굶어죽었다.
임종시에 그가 지은 시가 있다.
제여용사혜유씨위(諸呂用事兮劉氏危)
박협왕후혜강수아비(迫脅王侯兮强授我妃)
아비기투혜무아이악(我妃旣妬兮誣我以惡)
참녀난국혜상증불매(讒女亂國兮上曾不寐)
아무충신혜하고기국(我無忠臣兮何故棄國)
자결중야혜창천거직(自決中野兮蒼天擧直)
어차불가회혜녕소자재(於嗟不可悔兮寧騷自財)
위왕이아사혜수자연지(爲王而餓死兮誰者憐之)
여씨절리혜탁천보구(呂氏絶理兮託天報仇)
일곱째 아들,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
유장은 한고조 유방의 하룻밤사랑의 산물이다.
이전에 조왕은 장오(張敖)였다.
한고조 유방이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오는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비(妃)를 유방에게 헌상했다.
사실 당시는 잠시 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방은 아주 능력있는 남자여서 하룻밤만에 명중시켜 하루의 경작으로 수확이 있게 되었다.
조비가 회임을 한 것이다.
바로 이때 조나라의 국상인 관고(貫高)가 모반을 일으키니,
장오도 연루되게 된다.
그리하여 온 집안 사람들이 구금된다.
조비는 여황후의 총애를 받는 심이기(審食其)를 통하여 여태후에게
그녀가 황제의 골육을 가졌음을 알린다.
여황후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묻어두고 말아버린다.
조비는 희망이 없다고 보고 유장을 낳은 후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린다.
한고조 유방은 이 아이가 가련하게 생각되어, 여황후에게 주어 양육하게 한다.
여황후는 그에게 비교적 잘 대해주는 편이였다.
두 살때 바로 회남왕에 봉해진다.
여씨들이 유씨집안의 자손들을 없앨 때,
유장은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대체로 그의 모친이 여황후와 싸우지 않았던 점도 있고,
여기에 어려서부터 여황후를 어머나로 알고 자랐던 탓도 있을 것이다.
여씨집단들이 아무리 독하더라도 기른 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외에 유장은 나이가 어려서 여씨들에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여씨집단들이 죽고, 그가 성장하게 되자,
그는 옛날 일들을 복수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심이기를 때려죽여 버린다.
그리고 심이기를 죽여야할 세가지 이유를 말한다.
당시 한문제 유항이 막 등극하였으므로 유장의 죄를 묻지 않고 흐지부지해 버린다.
그리하여 유장은 무서운 것이 없게 된다.
유장의 나이가 어려서 몰라서 그렇 수도 있다.
강호의 험악함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자주 문제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가서 사냥을 하곤 했다.
봉국으로 돌아온 후에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천자의 예의와 위엄을 갖추고자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흉노, 민월의 우두머리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꾀하기도 한다.
한문제 유항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그의 왕위만 폐지한다.
촉의 땅으로 유배를 보낸다.
그런데 그는 유배가는 도중에 죽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한가지 설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 설은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는 설이다.
어쨌던 24살짜리 유장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여덟째 아들, 연왕(燕王) 유건(劉建)
유건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몸매나 얼굴모습이 아들들 중에서 가장 한고조 유방을 닮았다.
그리고 가장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한고조 유방은 그를 매우 사랑해 연왕에 봉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사냥도중에 미친 여우에게 긁혀 광견병이 유건에게 전염시켰다.
나중에 그는 광견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연왕 유건은 아직 어려서 정식으로 왕후를 맞이하지도 못했다.
연왕 유건도 부친처럼 결혼도 하기 전에 자식은 하나 두었다.
연왕 유건이 죽은 후,
여태치는 여씨들로 하여금 천하를 나눠갖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아직 강보에 쌓인 유건의 아들을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유건은 후손이 끊긴다.
그러다보니 작위도 없어지고, 연나라는 여씨집단의 천하가 되고 만다.
한고조 유방의 여덟 아들중에서
두 명이 황제고, 6명이 왕으로 고귀하기 이를데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맞아들 제왕 유비와 한문제 유항이 정상적으로 천수를 마친 것일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여씨들에 의하여 직접, 간접으로 죽임을 당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황후(皇后) 여치(呂雉)의 사랑에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한(怨恨)도 맺어 있었던 모양이다.
<여치(呂雉)의 일생>
여치의 부친은 여공교(呂公喬)이 패현(沛縣)으로 옮겨왔을 때,
패현현령과 사람들을 만나는 축하연회에 유방도 참석했다.
여공은 그가 반드시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딸을 그에게 아내로 주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20 살이 안 된 여치는 이렇게 열다섯 살이나 많은 유방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어질고 총명한 여치가 갓 시집와서 보니,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유방은 사흘이 멀다 하고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 생활을 위해서 여치는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봉양하고, 유방의 사생아 유비(劉肥)까지 보살피며 혼자 모든 집안을 책임졌다. 한번은 유방이 범인을 압송하다가 술에 취해 실수로 범인이 도주하게 된다. 할 수 없이 몸을 숨기게 되었다. 여치는 수시로 먼 길을 오가며 고생스럽게 먹을 것과 옷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서 여치는 유방과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낳았다. 바로 나중에 한혜제(漢惠帝)가 된 유영(劉盈)과 노원장공주(魯元長公主)이다. 기원전 206년에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한왕 유방은 초왕(楚王) 항우와 교전하여, 한군(漢軍)이 대패하고 말자, 여치 일가는 초군(楚軍)의 포로로 잡혔다가, 3년이 지나서 한·초가 강화를 맺어서야 석방되었다. 수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다가 여치는 마침내 유방 곁으로 돌아 왔지만, 그때 유방 신변에는 이미 대단히 총애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척(戚)부인이다. 척 부인은 여치보다 어려서, 늘 유방을 곁에서 모셨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황제로 한고조가 되고 조강지처 여치는 황후로 책립된다. 그들 사이 아들 유영또한 태자에 책봉된다. 그 후 유방의 총애를 다 받아온 척부인은 밤낮으로 통곡하며 유방에게 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낳은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조정대신들은 분분하게 반대를 표시했다. 여치는 장량(張良)을 찾아서, 장량에게 그녀를 도울 의견을 구했다. “폐하께서는 전쟁이 힘들게 되었을 때면 확실히 제 의견을 따라 주셨지만, 지금은 제가 아무리 말씀드려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상산사호(商山四皓)-상산(商山)에 은거하는 뜻이 크고 인격이 높은 선비 네 사람)을 중시하시는데, 만약 그들이 태자를 보좌한다면, 유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 황후 여치는 사람을 시켜 태자의 친필 서신을 보내 '상산사호'에게 산에서 하산하기를 청했다. 서기전 195년에 한고조 유방은 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감지하고, 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이 더욱 강열해졌다. 여러 대신은 죽기로 간언을 올렸지만 여전히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 번은 조정 연회에서, 한고조 유방은 태자 신변에 있는 '상산사호'를 눈여겨보고 곧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초청은 회피하더니, 도리어 내 아들은 따르고 있는 거요?” 네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지식인을 경시하는데, 태자께서는 인효(仁孝)로 공경하여, 천하사람 모두가 태자를 위해 힘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고조 유방은 태자에게 인재가 이미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여 태자를 바꿀 생각을 단념해 버렸다. 강인한 성격을 가진 황후 여치는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고 나서 자기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시작하여 사람 죽이기로 위엄을 세웠다.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그때 이미 폐위되었는데, 그녀는 한고조 유방이 정벌전쟁을 나간 틈을 타서, 소하(蕭何)의 계책으로 한신을 죽여 버려서 다른 공신들을 겁먹게 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이어서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폐위시키고, 황후 여치의 권고에 따라 한고조 유방은 그 몸의 살을 잘게 다져 육장(肉醬)을 만들게 했다. 한고조 유방이 제위에 있었던 8년 동안 황후 여치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반란을 진압하여 할거 하고 있던 세력에게 타격을 가하여 한 왕조의 정권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기가 권력 장악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서기전 195년에 한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한혜제 유영이 즉위하자, 황후 여치는 대권을 혼자 쥐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한고조 유방의 총비들을 구금하고, 총애를 받지 못한 비빈들은 궁 밖으로 쫓아냈다. 많은 비빈 중에서, 가장 여치의 눈에 가시는 척부인이엇다. 척부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살해한 뒤에, 척부인의 두 다리를 자르고 두 귀를 불에 그슬리고, 독약을 먹여 벙어리를 만들고 측간 속에 던져놓아, '인체(人彘: 사람돼지)'를 만들었다 죽였다. 서기 192년에 태후 여치는 아들 한혜제 유영에게 자신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가 낳은 11살 난 여식, 즉 한혜제 유영에게는 생질녀고 태후 여치에게는 외손녀인 장(張)씨를 황후로 삼게 했다. 한 혜제 유영은 대단히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응했다. 서기 188년에 한혜제 유영이 병사하자, 태후 여치는 어린 손자를 황제로 세우고 여씨집안의 사람들에게 조정의 권세를 쥐어주었다. 이때부터, 태후 여치는 조정에서 권세가 하늘을 찌르듯이 높았다. 여태후는 유공(劉恭)을 태자에 책립하여 자기가 조정에 나와 정무를 통제하고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다. 자기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녀는 제후왕과 정치의 반대파에게 타격을 가하고, 총신(寵臣)을 중용하고 당파를 양성하여 조왕(趙王) 유우(劉友)와 양왕(梁王) 유회(劉恢)을 죽이고, 여씨 가족 십여 명을 왕과 제후에 봉했다. 이러한 테후의 일련의 방법은 유씨 종실과 대신의 격렬한 반대를 야기했다. 나중에 어린 황제 유공(劉恭)은 다른 데서 여치가 자기의 모친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원망하며 자기가 성년이 되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여태후는 공포감을 느껴 곧 유공의 제위를 폐하고 그를 죽이고 상산왕(常山王) 유의(劉義)를 황제로 삼아 그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개명했다. 서기 180년에 병이 든 여태후는 임종하기 전에도 여전히 여씨 천하를 마음에 두었다. 병이 위중해졌을 때, 그녀는 군권 전부를 여씨들 수중에 두고, 게다가 유조까지 남기고, 각 제후에게는 풍성한 상을 천하에는 대사면을 내렸다. 여태후가 죽은 뒤에, 그녀가 육성한 여씨 외척과 유씨 황족 집단 사이에 투쟁이 발생했는데, 최후에 황족 집단이 승리를 획득했다. 여러 대신은 어린 황제 유홍을 폐위하고, 외가 쪽이 강대하지 않은 유항(劉恒)에게 제위를 계승시켰는데, 바로 이분이 한문제(漢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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