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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색 소 폰 (Saxophone)
목차
색소폰의 발명과 재즈에서 필수 악기가 되기까지
원로 재즈색소폰 주자들에게 롤모델이 되었던 미국의 재즈맨 (나이 순)
색소폰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대중음악 악단(경음악단)의 등장과 색소폰 (1930년대)
연주인들의 작곡계 진출
색소폰의 유명 연주자는 과연 누구때부터였을까 - 서영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색소폰의 전성시대 열리다 (1945 해방 직후부터)
엄토미
길옥윤
이봉조
또 다른 유명 연주자
(신지철, 김안영, 이정식, 김석성, 강철구,최태국,최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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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소폰의 발명과 재즈에서 필수 악기가 되기까지
색소폰은 1840년대 초 벨기에의 악기제조가 아돌프 삭스(Adolpf Sax 1814~1894)에 의해 발명된 이래 처음에는 베이스 색소폰
을 만들고 서서히 음역별로 만들어 전세계에 보급된 정말로 새롭고 매력있는 악기이다.
색소폰 발명 후 한동안 미국의 재즈계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1920년대 초, 즉흥연주에 능한 뛰어난 실력으로 루이 암스트
롱(Louis Armstrong 1901~1971) 과 쌍벽을 이루며 활동했던 클라리넷의 시드니 베셰(Sidney Bechet 1897~1959) 가 당시에 유행
하던 뉴올리언스(=딕시랜드)재즈에서 트럼펫이나 트롬본에 비해 볼륨이 적은 클라리넷이 싫어서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었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 재즈 색소폰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후 재즈 색소폰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테너색소폰의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1904~1969)가 미국의 재즈빅밴드
창시자라로 일컬어지는 플래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1897~1952-Piano) 과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함께 하면서
색소폰 주자가 빅밴드의 솔리스트로서 악단을 빛낼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아주 매력적인 색소폰의 재즈연주기법을 창안
해 냄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악기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트럼펫과 트롬본, 클라리넷 등이 재즈연주의 인기있는
악기였었기에 색소폰의 등장은 새로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리라.
빅밴드에서의 솔리스트라 함은 그 악단에서 즉흥연주의 최고연주자를 말하는 것이다. 빅밴드 중흥시대였던 1930~50년대의 악단
들은 각 섹션의 개성있는 리더(1st 주자)와 솔리스트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였기에 거기에 따라 뛰어난 연주자들도 많
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개인기 위주의 4~6명의 소편성 악단인 캄보(Combo)밴드로 활동하는 등 재즈의 역사를 만드는 명연주
자가 계속 이어졌다.
♬ 국내 원로 색소폰 주자들에게 롤모델이 되었던 미국의 재즈맨 (나이 순)
시드니 베셰 (Sidney Bechet 1897~1959) 소프라노 색소폰, 클라리넷
콜맨 호킨스 (Coleman Hawkins 1904~1969) 테너 색소폰
베니 카터 (Benny Carter 1907~2003) 앨토 색소폰
벤 웹스터 (Ben Webster 1909~1973) 테너 색소폰
레스터 영 (Lester Young 1909~1959) 테너 색소폰
찰리 파커 (Charlie Parker 1920~1955) 앨토 색소폰
폴 데스몬드 (Paul Desmond 1924~1977) 앨토 색소폰
아트 페퍼 (Art Pepper 1925~1982) 앨토 색소폰
존 콜트레인 (John Coltrane 1926~1967) 테너 , 앨토 색소폰
스탄 게츠 (Stan Getz 1927~1991) 테너 색소폰
소니 롤린스 (Sonny Rollins 1930~ ) 테너 색소폰
웨인 쇼터 (Wayne Shorter 1933~ ) 테너, 소프라노 색소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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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소폰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우리나라에 색소폰이라는 악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대한제국군악대를 창설하게 되면서다.
당시 내부대신 민영환의 지시로 동생 민영찬(후에 주프랑스 대사)이 독일로 가서 주한 독일대사와 미리 약속이 되어있던 독일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 (Franz von Eckert 185912~16) 와 만나서 협의 - 50개의 악기와 악보 외 필요 부품들을 구입해 들여
오게 되는데 이때의 악기편성에
소프라노 색소폰 1개,
테너색소폰 3개,
바리톤 색소폰 1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다음 해인 1901년2월에 입국하여 군악대를 편성하고 지도하기 시작했으니 색소폰 연주의 첫 주자는 대한
제국군악대 대원이 해당되겠다.
그후에 어느 정도 두각이 나타난 색소폰 연주자의 자취로는 1927년 YMCA에서 공연한 재즈 연주부분에서 홍난파(1897~1941 작
곡,피아노,바이올린)가 리드하는 "코리안 재즈밴드"의 색소폰 주자 백명곤(첼로, 만돌린, 앨토색스 - 독일,일본 유학시 악기 배움)
의 모습이 보인다. 백명곤은 당시 호남의 갑부집 자제로 음악을 좋아했기에 YMCA 재즈공연 2년 전인 1925년 상하이(상해)에서
색소폰,트럼펫,밴죠 등을 구입해 와서 홍난파와 의기투합 "코리아 재즈밴드"를 구성, 재즈를 연주했다고 한다.
1927.03.02.종로 YMCA에서 "코리아 재즈밴드" 가 연주한 재즈공연이 국내 재즈 역사상 최초의 연주회로 알려져 있다.
위의 사진으로 봐서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올리언스(=딕시랜드)재즈의 밴드 편성과 비슷하다.
그 시절에는 미국에서도 전기 기타가 없었기때문에 비교적 음량이 큰 밴죠(Banjo)를 사용했었다.
또 하나의 자취는 1901년 창설된 대한제국군악대의 한국인으로서는 제2대 군악대장이었던 백우용(1883~1936 -클라리넷)이
1927년 단성사에서 연주를 의뢰 받아 대한제국군악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악단을 편성했었다. 당시는 외화를 상영할때, 무성영화
이다보니 무대 아래에서 배경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하게 되어 있었고 필름이 올때 BG용 악보가 따라 왔는데 그때 편성
에 색소폰 악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성사에서는 1918년부터 무성영화를 상영- 배경음악 연주악단이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 시절 국내에서의 색소폰은 악단에서 중요한 악기가 아니었고 평범하게 합주에 편성되는 그런 악기였던 것 같다.
이 시절에는 국내 가요도 막 걸음마를 배울때였기에 대중음악 연주자가 별로 두각을 나타낼 상황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대중음악 악단(경음악단)의 등장과 색소폰 (1930년대)
1922년 근대극 정통파인 新劇운동단체 土月會가 생기고 또 대중적인 新派의 통속극系가 생기면서 정통극과 통속극으로 나누어
져 활동하게 된다. 1925년부터는 배우들중에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을 비롯, 인기배우 이애리수,이경설,신은봉 등이 막
간가수로 혹은 레코드 취입가수로 활약을 했는데 이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단성사에서 주로 공연을 하던 "취성좌"는 악극단(현재
의 뮤지컬팀과 비슷함)을 조직하게 되고 이왕직악대 대원이었던 雅樂師 10명과 전수린(바이올린)김교성(클라리넷)현익섭(피아
노)윤기항(더블베이스)의 洋樂師등 모두 15인조악단이 합류하게 된다.
이 악단이 대중음악을 위한 악단으로는 첫 악단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연주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1900년 초기의 대한제국군악대→ 이왕직악대 등의 연주 위주 활동에서 극장무대로 옮
겨 수입외화인 무성영화의 배경음악 연주 그리고 연극단체의 막간연주 등으로 이동하게 된다.
1927년 일본 레코드회사가 한국에 들어오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도 레코드회사를 만들어 1930년대에는 드디어 국내에서 우리의
대중음악이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래 사진은 연주자가 누구인지는 잘모르겠으나 편성을 보면 미국의 교향악단 비올라 출신 재즈밴드 리더이며 "재즈의 왕" 이란
별칭이 붙었던 폴 화이트먼 (Paul Whiteman 1890~1967)이 편성했던 심포닉재즈밴드가 잠시 인기있던 시기인 1920년대의 재즈
밴드 편성(트럼펫,트롬본,클라리넷,밴죠,피아노,더블베이스,드럼)과 비슷하다. 바이올린2명, 아코디온 그리고 클라리넷이 색소폰
을 겸하고 밴죠가 기타를 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편성은 당시 국내 연주계로서는
대단히 새롭고 현명한 방법으로서 우리나라 유행가와 재즈연주를 함께 연주하기 좋도록 편성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여성 바이올린, 여성 아코디언 주자 등이 이채롭다. (당시에 여성 연주자가 있었다는것이 신기하다.)
남여칠세 부동석의 우리나라가 현대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세대의 등장으로 구습이 무너져 가는 초기이기에 용감한 여성
들이 과감히 사회로 나온 것이리라.
193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시발점에서부터 황금기가 펼쳐지면서 레코드사 마다 취입가수가 인기리에 활동하게 되
고 이 철의 오케(Okeh)레코드사(1932년 설립-1936년부터 자체녹음실 완비-음반제작은 일본)를 필두로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레코드사들은 신간 레코드의 홍보를 위해 경음악단을 구성하고 가수와 연극배우를 내세워 악극단을 경쟁적으로 운영하게 되었
다.
악극단은 전국을 순회하며 가수의 신곡을 홍보하고 공연을 하다보니 대중들의 호응이 좋아지고 악극단 자체만으로도 흥행가치가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연주자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게 되니 그에 따라 각 악기들의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
어졌다 하겠다.
연주인들의 작곡계 진출
레코드사에 소속되어서 작곡,편곡,연주 등의 음악활동이 활성화되니 자연히 연주만 하던 사람도 작곡과 편곡에 관심을 갖고 참여
하게 되었다. 악기가 좋아서 악기연주만 하다가 어떤 기회에 작곡을 해서 히트가 되면 회사에서 대우도 달라지고 명성도 올라가
니 작곡분야가 매력있었다. 유명 연주자(악단장)들은 대부분 작곡도 겸하게 되면서 레코드사에서 스타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곡을 해서 발표하면 무조건 히트하는 것이 아니니 그 히트의 가능성은 예나 지금이나 예단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
다. 연주는 뛰어나지만 그가 작곡한 곡이 히트되지 않는 경우의 유명 연주자도 많았다.
이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두가지는 비슷하게 다른 음악적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기의 유명 악단장 겸 작곡가는
김해송 (1911~1950? Guitar 지휘,작곡,가수)
박시춘 (1913~1996 Guitar, 지휘,작곡)
손목인 (1913~1999 Accordion, 지휘,작곡)
※ 여기에서 손목인은 오케레코드사 소속의 작곡자 겸 악단지휘자로 있을 때인 1939년, 무용수 겸 가수인 김능자(金綾子)
에게 베니 굿맨 악단에서 히트한 "Sing Sing Sing"을 편곡하여 노래를 취입했었다. 이 곡은 트럼펫의 명수로 알려져
있는 루이 프리마(Louis Prima 1910~1978 미국, 가수,작곡가,트럼펫,악단장)가 1936년 작곡, 1937년 베니 굿맨악단
에서 발표한 곡이다. 이 곡의 작업에는 트럼펫의 해리 제임스와 드럼의 진 크루파 등이 레코딩에 가담했으며 플레처 핸
더슨이 편곡을 담당한 스윙시대 최고의 명곡이다. 그런데 이곡이 미국에서 레코딩된 2년 후인 1939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수 노래로 취입을 했다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하겠다.
# 색소폰의 유명 연주자는 과연 누구때부터였을까 - 서영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악기 연주 능력의 기록은 레코드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주자 위주의 연주곡은 별로 인기가 없었고 오직 가수의
노래만이 대중들에게 어필되었었다. 그러다보니 가수 반주때, 간주나 후주에 몇소절 솔로 연주하는게 고작이었다.
미국에서의 재즈는 처음부터 연주 위주로 발전했기에 레코드사업 초기와 재즈 발생 초기의 시기가 비슷하니까 그 시절
재즈의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음반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연주자들의 기량이 잘 나타나 있어 후세 음악 학자들이
재즈연주자 사료(史料)정리에 정확성을 기할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하다보니 너무나 안타깝다.
또 우리나라 가요 발생 초기인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편곡과 녹음연주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절의 연주는 일본인의 것이 대부분이고 간혹 우리 연주자가 일본에 가서 녹음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 우리의 연주
가 어떤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레코드판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기때문이다.
다행히 음악을 좋아하고 색소폰도 불줄 아는 이 철이 1932년에 오케(Okeh)레코드사를 설립하고 1936년에는 녹음시설을 갖춘
스튜디오를 확보하면서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직접 편곡하고 연주하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각 악기의 스타플레이어가 점차로 나타나게 된다.이 시절 유명한 인기 악단장들은 대부분 작곡을 겸한 유명 연주자였
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주만 잘 하는 것으로는 유명해지기도 힘들거니와 대중음악 역사에서도 자연히 거론되지가 않았다. 언론에
서 자주 다룰수 있는 어떠한 흥미있는 기사꺼리가 자주 이어져야 인기가 높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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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테너색소폰의 서영덕(徐永德 190?~1950?)에 대해서는 오케레코드에서 작곡 및 편곡을 담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작곡 활
동을 했지만 뚜렷한 히트곡이 없었고 일본 군가를 작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이 친일파 명단
에 들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대동아전쟁 말기 군가를 작곡했다는 것과 위문공연 등이 해당 된것 같다.
예술인, 연예인들은 사실 본인들이 음악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 정치성을 띠고 하는 일은 아닐찐데..... 참으로 안타깝다.
추측컨데 그 시절 일본에서 최고로 유명한 종합예술단체인 덴카쓰(天勝)예술단에서 어린 시절부터 인물과 무용기술이 뛰어나 현
대무용과 발레를 익히며 예술단의 중심무용수로서 1924년 일본,미국 등 해외공연등의 활동을 한 국내 최초의 현대무용가 배구자
(1905~2003)가 1930년에 일본에서 수년간 배구자 가극단(레뷰단)으로 활동했었고 국내에 다시 들어와1935년에 연극전용관
인 동양극장을 설립하고 자신의 극단을 중심으로 운영하게 된다.(~1939)
그 극단에서 악단의 지휘와 편곡을 책임진 악장 서영덕에 대해 그의 테너색소폰 연주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몇군데에서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1930~40년대에 그의 연주자로서의 명성이 꽤 높았던 것 같다.
배구자 가극단이 레뷰단으로 인기가 있었다는데 레뷰(Revue)단이란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던, 순수예술에서 벗어나 대중
들이 좋아하는 각국의 무용을 비롯 여러 형태의 시사풍자 등의 흥미 위주의 공연을 하던 종합예술단체였다.
이런 것을 볼때, 각 나라의 무용곡등을 연주하려면 국내 가요와는 전혀 다른 많은 곡들을 접해야 했을 것이고 그런 곡들을 특히
재즈풍 음악 등을 서영덕은 막힘없이 멋드러지게 연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41년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우리나라 순수예술인(클래식) 들로 조선음악회를 조직하여 조선교향악단 연주
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클라리넷을 연주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클라리넷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서영덕은 KBS전속경음악단(18인조) 의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니 그의 능력이 짐작된
다. [서영덕의 이름은 그와 함께 KBS전속경음악단에서 피아노와 편곡을 담당했던 황문평(1920~2004 작곡가,음악계 저명인
사) 선생의 저서를 통해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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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소폰의 전성시대 열리다 (1945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에 색소폰연주자로 1901년에 대한제국군악대의 색소폰 연주자가 있었다는 것 → 1925년에 백명곤이 상하이에서 색소
폰을 구입해 들여와서 연주를 했다는 것 정도의 기록은 있지만 색소폰 연주를 뛰어나게 잘 했다고 칭찬하는 기록은 서영덕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은 그를 근래의 색소폰 명인의 첫 인물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이 그 옛날 색소폰 관련 신문기사나 레코드 표지 등을 전부 확인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은 할 수는 없지만...)
서영덕(徐永德 190?~1950?) 다음 세대가 아마도 엄토미(엄재욱 1922~2002) 세대인 것 같다. 이 시대는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20대의 젊은 음악도들이 미군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미국의 재즈를 즐기고 탐닉하던 세대이기도 하다. 비교적 단순한 우리 가요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세계인 재즈의 오묘하고 무궁함에 이끌려 재즈 레코드를 듣고 그대로 흉내내며 더 배우고 싶어하
던 열망의 세대이기도 했다.
대동아 전쟁때는 일본정부가 적대국인 미국 음악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어떤이는 중국의 국제도시인 상하이에서 연주활동을 또
는 일본땅에서 연주활동을 하면서 국내보다 앞선 음악세계를 접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이 귀국 길에 오르게 되며 국내에
는 이때부터 대중음악인들 중 진보적인 층에서는 대부분 재즈에 열광했다. 그때에 국내에 미군 1개군단(77,000여)병력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내국인들도 미군 클럽을 드나들며 미국의 팝송과 재즈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하지만 재즈를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악보도 이론서적도 스승도 없을때이니 도저히 그들의 궁금증을 풀 길이 없었다.
그냥 구할수 있었던 것은 미군들에게 노래 배우라고 나누어 주는 얇은 팝송 책인 Hit Kits 가 고작이었다.
그 시절 연주인들의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해방 직후에 국내 악단이 (국내에서는 유명한) 미군 클럽에 가서 우리 식의 음악을 계속 연주하니까 클럽지배인이 미국
악보를 주면서 다음 올때에는 이것을 연주해 달라고 했는데 그 곡이 In the mood(글렌 밀러 악단 최고 히트곡) 였단다.
며칠동안 악단이 모여서 연습을 열심히 해 가지고 그 클럽에 가서 자랑스럽게 연주를 했더니 이게 무슨 곡이냐고 되묻더란다.
그러면서 쥬크박스(Juke box-동전을 넣고 선곡해서 듣는 기계)에서 그 곡을 골라 들려주는데 악보와는 전혀 Feel이
달라서 이해를 할 수 없었단다. 결국은 연주를 포기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것은 바로 악보의 맨 위에 적힌 Bounce"8" Medium Swing 에서 바운스 8을 이해 할 수 없었기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 시절의 대선배님들의 실패담이 있었기에 그 몇년 후 1950년대에는 아주 쉽게 편히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윙음악에서 8분음표에 바운스를 넣게되면 악보와 다른 표현이 나온다는 것을 그 시절에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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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세분의 색소포니스트는 한국의 대중음악 연주자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당시에는 대단히 앞장서서
연주활동을 한 대단한 스타플레이어였고 현재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위치에서 활동 한 분들이다.
이분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5년 간격의 선후배이시다.
본 카페지기(서봉석)는 방송프로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이분들을 대하며 연주생활 속에서 느낀 부분들을 이 내용 속에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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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토미 (1922~2002-본명 엄재욱嚴載郁-Clarinet & Ten.Sax.악단장,작곡가)
출생: 1922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읍 어대진면
학교: 1936년 경성재동공립보통학교(서울소재 재동초등학교의 전신)졸업
1941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서울소재 경복고등학교의 전신)졸업
1943년 경성음악전문학교(1937년에 세워진 사립학교로서 서울대학교음악대학의 전신)졸업 (바이올린 전공)
음악경력
1943~ 손목인의 CMC악단에서 활동 (재즈의 매력을 이해)
1943~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上野)의 클럽악단에서-클라리넷과 테너색소폰, 바이올린 주자로서 활동
(일본과 연합군과의 대동아전쟁 중이지만 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중음악 과 재즈를 배운듯)
1945~ 엄토미와 그악단 (해방 직후 귀국하여 국내 댄스홀과 미군클럽에서 활동-
-이 시절은 美軍政시기였기에 1948년까지 3년간 미군 1개사단 병력이 주둔-
-미군클럽에서 엄토미의 재즈연주때에는 미군들에게 대단한 환호를 받음)
1958~ 미8군쇼에서 잠시 활동 후 국내 클럽과 일반 극장무대에서 "엄토미와 그 악단" 리더로 활동
1961~ KBS-TV 프로그램에 엄토미악단 고정출연
1962~ 영화 "월급쟁이"의 음악을 맡아 영화녹음.
1967~ 조선호텔 프린세스 나이트클럽에서 활동 중 교통사고로 뇌를 다침.
1968~ TBC-TV 프로그램에 엄토미악단 고정출연
1990~ 국내 원로연주인 동호회악단인 청송회악단에서 봉사활동
1995~ 재즈클럽 "야누스"등에서 재즈밴드 활동
#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대중음악인으로서 드물게 엘리트코스를 밟아오신 분으 로서 50~60년대에 김광수
악단(라틴탱고)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국내 최고의 악단장으로서 스윙재즈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멋쟁이 신사이면서
지적인 최고급 연주인으로서 대단한 인기 속에서 활동을 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미8군쇼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다시 일반 클럽으로 옮겨서 활동하게 된다.
송민영(트롬본)최상룡(트럼펫)과 함께 연주계 3대 멋쟁이 악단장의 한사람으로서 인기스타였다. 이들은 당시 18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연주 실력이 뛰어난데다가 또한 최고의 미남 들이어서 일류 영화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들은 당대의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송민영(재즈피아니스트 안일선)
최상룡(미스코리아 진 김미정)
엄토미(가수 겸 패션모델 모니카 유)
그는 1967년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이후로 안타깝게도 연주기량이 떨어져 그 현란했던 클라리넷과 테너색소폰의 매력을 잃고 말
았다. 1940~50년대에 국내 재즈 즉흥연주의 선구자라고 할 정도로 재즈의 Bebop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하드비밥을 연주할 정도
로 재즈를 자유롭게 구사했었다고 재즈이론가 이판근은 회고한다.
그의 음악적 재능에 영향을 받은 후배 연주자로는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 김희갑 등이 있다.
1960년대 초에는 미8군쇼에서 가수로 활약하던 16세 연하의 모니카 유와 결혼을 한다.
모니카유는 한국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한 살 아래인 남동생이 미남가수 유주용이다. 모니카 유는 이국적
인 혼혈 미인이어서 영화배우로서 또 패션모델 로서 60년대에 인기가 높았었다. 1960년대 중반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모니카 유
의 취입 음반은 대부분이 엄토미악단과 녹음한 것이다.
1962년에 뷔너스레코드에서 발매된 엄토미와 리듬에이스 의 "리듬의 향연"은 가수반주가 아닌 재즈 연주 위주의 음반으로서 한
국재즈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박성건의 "한국재즈음반의 재발견" 에서 인용함)
그는 또한 60년대 인기배우였던 엄앵란의 숙부이기도 하다. 엄앵란의 아버지이자 그의 형인 엄재근도 테너색소폰 주자로서 유명
한 악단장이었다.
엄토미는 당시 최고의 인기 악단장이었기에 레코드사로부터 작곡 의뢰도 많이 받았다.
남인수 (무정백서,사랑의 수화`)
신세영 (추억의 40계단)
현 미 (미움도 사랑, 마음의 고향, 여자의 마음)
최희준 (비가 오면, 그 여자, 눈동자)
유주용 (학사주점)
오기택 (검은 꽃의 블루스, 우리 마을 순이, 팔각정 엘레지)
최숙자 (서낭당 비가, 소공동 밤 열시, 옥색고무신)
J시스터(내 마음 한없이) 등에게 곡을 주어 음반을 많이 취입했지만 크게 히트한 곡이 없어 대중들에게는 작곡가로서의
기억이 남지 않게 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재즈싱어 박성연의 "야누스"에서 옛날 전성기를 생각하면서 재즈를 연주했고 90년대 이후에는 원로연주인의 모임인
청송회악단에서 사회봉사로서 연주활동을 하다 2002년5월22일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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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옥윤(吉屋潤 요시아 준 / 본명 최치정=崔致楨 1927~1995 테너색스,악단장,작곡가)
출생 : 평안북도 영변군 - 7남매중 둘째아들 (남동생 둘이 어릴 때 사망하여 막내 남동생과 나이 차이 많음)
학력 :1939~ 평북 영변보통학교 - 평양시 종로소학교 졸업
1944~평양시 평양고등보통학교 (5년제) 졸업
1949~서울대학교치과대학 제3회 졸업 (1944~ 경성치과전문학교전문부 입학-1946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흡수) (전공과목을 제쳐놓고 악단생활에 몰두하다보니 치과대학 학점이수를 못해 1년 늦게 졸업함)
1971~미국 뉴욕의 Manhattan School of Music 에 입학하여재즈 수학.
1981~경희대학교 치의과대학원 석사(논문:관악기연주자의 치열과교합상태에 관한 연구)
음악경력
1946~ 서울치대 재학중 치대 선배 김영순(트럼펫-후에 베니김쇼 단장)과 함께 미군클럽과 국내클럽에서 연주 활동
(후에 박춘석,노명석등과 Hot Pop을 결성하여 클럽에서 활동)
1950~ 재즈를 배우러 일본으로 밀항, 클럽에서 활동하며 테너색소폰으로 재즈 수학-일본 재즈맨이자 영화음악의 거장인
오자와 히데꼬(小澤秀夫)를 사사. 이 시절 스승이 일본식 예명을 吉屋潤(요시아 준)으로 지어줌.
1955~ 일본에서 "Crew Cuts Band" (Combo)로 전국연주경연대회 우승, 이후 NHK-TV, TBS -TV등에 자주 출연.
1960~ 길옥윤과 도쿄스윙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
1962~ 국내에서 첫 작곡 발표(현 미 의 "내 사랑아")
1966~ 귀국하여길옥윤밴드로 연주 활동 - 연주자로서는 국내 처음인 리사이틀을 시민회관 에서 보난자빅밴드와 협연
1966~ 인기가수 패티김과 결혼 / 1972 이혼
1970~ 재즈 중흥운동의 일환으로하모니클럽(재즈빅밴드 구성)을 만들어 각 방송 순회연주
1974~ 동경세계가요제에 출전(패티김-사랑은 영원히)입상
1981~ 태양음반주식회사 설립(박춘석과 공동으로)
1981~ KBS-2 라디오 "재즈이야기" 해설과 선곡작업.
1983~ 서울예전 대중음악과 주임교수(학과장 김희조교수의 국악과 내에 처음으로 대중음악 관련 학과를 신설함)
※ 실용음악이라는 용어는 그 후에 정성조교수 시절 만들어짐.
1984~ 한국음악저작권협회 12대 회장
1984~ 미국 LA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아리랑을 재즈버전으로 즉흥연주 - 현지 언론에서 극찬
19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 작곡 참여
1989~ 서초동에 재즈클럽"창고" 운영 및 연주
1992~ 일본 아카사카(赤阪)에서 클럽 운영 및 연주
1995~ 폐암에서 척추로 전이되어 별세
1995~ 사후에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추서
작품: 4월이 가면, 서울의 찬가,사랑이란 두글자,사랑은영원히, 이별(이상 패티김) 제3한강교, 당신만을 사랑해,감수광,
(이상 혜은이) 외 수많은 히트곡 작곡.
# 평양고등보통학교(현재의 중고교통합)시절 밴드부에 가입,기타,피아노,클라리넷,트럼펫 등 을 접하게 되었고 누나 한분
이 국내 최초의 여성 물리치료사이면서 피아노를 잘 쳤기에 학창 시절 자연스레 음악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본인은 음악대학을 가고싶어 했지만 조부(한의사)와 부친(공의=公醫)이 의사이시다 보니 아들도 의사로 대성하도록
강권하여 할수 없이 서울로 와서 경성치과전문학교(1946 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통합)에 입학하 게 된다. 그 당시 서
울치대에는 전공과는 다르게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즐겨하는 학생들이 많았었고 틈만 나면 음악서클에서 활동했다고 한
다. 다행(?)하게도 치대1년 선배이며 음악서클 악단장인 김영순(金榮淳=베니김-트럼펫-서울치대 제1회 졸업생)의 권
유로 미군 클럽에서(당시는 1945년부터 3년간 美軍政시기라 미군1개 군단병력이 남한 주둔) 아르바이트 겸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때부터 재즈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때는 클라리넷과 기타를 주로 연주하면서 재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악기인 테너색소폰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행히도 미군클럽에서 만난 미군중에 훌륭한 재즈맨이 있어서
그를 통해 재즈 테너색소폰에 맛을 들이게 된다.
이즈음 치대 학생중에는 피아니스트가 없어 수소문해서 찾은 인물이 경기중학교 재학생인 박춘석(1930~2010)이었다.
길옥윤은 전공인 치과 학업에는 마음이 없고 음악활동에만 전념하다 보니 100개의 치아를 뽑아야하는 임상실습의 학
점 부족으로 1년 뒤인 1949년에 졸업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재즈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지만 마땅히 가르쳐줄 스승이 국내에는 없는지라 고심하던 중,
임근식(팝 피아니스트- kbs교향악단초대지휘자 임원식의 형) 이 소개장을 써 주어서 그것을 갖고 청운의 꿈을 이루려고
1950년 1월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다. (이 시절에는 일본과 국교가 단절되어서 정상적인 한일간의 교통편이 없었다)
당시에 그의 친형이 일본 유학 후 일본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때여서 형의 도움으로 일본에 무사
히 도착하여 임근식이 소개해 준 당시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이며 재즈맨인 오자와 히데꼬(小澤秀夫)를 사사하여 재즈
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면서 한편 요시노밴드의 단원으로서 활동, 일본의 대중음악과 재즈를 아울러 학습하게 된다.
※ 이 시절 미국에서는 지금은 재즈스쿨로 유명한 버클리음대도 학원 규모로 시작한지 5년 정도 밖에 안 되었기에 재즈
이론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이었겠지만 미국 내에서 활동하던 일본 재즈맨들이 본국과 교류하면서 미국의 재즈를 빨
리 받아들인 일본 재즈의 수준은 한국보다 이론적으로나 실연적으로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앞서 있었다.
워낙 재능이 뛰어난 그인지라 3년 후인 1953년 부터는 자신의 악단 "Crue Cuts Band" 를 조직하여 클럽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전국연주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게 된다. 일본 연주자들도 출연하기 힘든 NHK와 TBS 등의 TV에 출연하
게 되면서 요시아 준(길옥윤의 일본 발음)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도 높이게 된다.
(여기에서 악단 이름인 Crue cuts 란 말은 당시 미군들에게서 유행했고 일본과 한국에서도 청년들에게서 유행했던 일
명 “스포츠가리“ 라고 불리워지던 헤어스타일의 명칭이었는데 악단 모두가 그 헤어스타일을 했기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상위그룹에서 활동하면서 귀국의 기회를 찾아 보았지만 힘들었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밀항자 신
분이였기에 어려웠을 것이다. 도일 10년만인 1960년에는 길옥윤과 도쿄스윙오케스트라를 이끌고 10년만에 귀국하여
공연을 했지만 이때에는 재일교포 입장이라 한국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1962년에는 부친상을 당해 일시 귀국했었고 이
때에 미8군쇼 대행기관인 화양(한국흥행주 식회사)의 휴게실에서 연주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재
즈즉흥연주에 관한 워크샵을 가져 호평을 받았다. 당시 그의 연주는 국내의 그것보다 굉장히 앞선 것이어서 연주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연주계의 현실은 재즈에 대해 어떠한 이론적인 배경도 없이 각자 뛰어난 감각으로 레코드를 듣고 흉내를
내며 또 드물게는 일본에서 만든 재즈이론서적을 힘들게 구해서 보며 스스로 개척해 나가던 시절이어서 일본에서 체계
적으로 배운 그의 즉흥연주와 연습 과정이 너무나 부럽기만 했던 것이 그당시 참석했던 연주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는 공연을 할때면 언제 어디서나 공연 전에 악기를 꺼내서 항상 스케일 연습과 톤 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무대에 오르
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은 후배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는 습관이었고 기초를 定石으로 배운 사람들만
이 할 수 있는 좋은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 후 길옥윤은 이봉조의 걸출한 테너색소폰 연주를 보고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매력있게 처리하는 멜로디를 들
으니 과연 국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고 국내파라고 과소 평가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고 또한 재즈파 이정식의 테너색소
폰 즉흥연주를 들으며 대단한 수준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즈음 이봉조와 열애 중이던 가수 현 미에게 자
신이 작곡한 "내 사랑아"를 발표케 함으로서 국내 가요계에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것이 1962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봉조와 현 미는 번역가요 "밤안개" 의 빅히트로 일약 최고 스타가 되는 행운을 맞게 된다.
그는 국내에 정착하고 싶어 하던 차에 국내에서는 제3공화국이 탄생했고 김종필이 정치인으로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
해 일본을 왕래할 때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 인연으로 귀국의 길이 열리고 1966년 국내에 정착하게 된다. 김종필은
1966년12월 워커힐호텔에서의 길옥윤- 패티김 결혼식 날 주례를 맡아 주기도 했다.
1966년 봄에는 국내에서 연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길옥윤 리사이틀"을 개최하여 많은 연주인들의 자
긍심을 올려주기도 했다. 보난자빅밴드(리더: 앨토색스 안희주) 의 반주로 진행되었으며 이날 공연 중에는 연애중이던
패티김의 축하편지 내용과 "4월이 가면"의 노래가 테이프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해 겨울 패티김과 결혼 후에는 작곡가
와 인기가수와의 커플 히트곡이 계속 이어졌다.
이 시절에는 미8군에서도 "패티김 쇼"를 만들어 장교클럽에서의 활동을 함께 했고 KBS-TV에 "패티김 쇼" 고정 프로
로 항상 함께 출연했다. 길옥윤은 이러한 쇼에서 자신은 혼자서도 스타 대우를 받는 인물인데 패티김 쇼를 하면 자신은
단순히 반주자에 불과하다는 섭섭함이 깔려있었다고 한다.
1970년을 전후해서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을 비롯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당시 20대의 젊고 유능한 재즈맨인 정성조
(테너색소폰과 플루트) 신관웅(피아노)등 후에 국내 재즈계를 이 끌어 갈 후배들과 함께 재즈를 연주하며 국내의 재즈
발전에 텃밭을 가꾸어 놓는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즈중흥운동의 일환으로 하모니클럽을 창설했고 그 의미로 빅밴드연주로 방송사를 순회하며 홍보를 했
으나 운영난으로 안타깝게도 흐지브지 되고 말았다.
길옥윤은 작곡가로서 패티김과 함께 한 세월이 그의 첫번째 전성기였고 1972년 이혼 후 인 1974년에 동경세계가요제
에도 함께 출전하여 동상을 차지한다. 그 이후 작곡가로서 침체상태가 계속되다가 1976년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꺼
야"를 시작으로 길옥윤- 혜은이 컴비의 힛트곡이 롱런하게 되며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1년 박춘석과 태양음반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었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대중음악연주인이 넘나들지
못했던 대학교수의 지위(서울예전에 대중음악과 첫 시도)도 개척을 했고 KBS라디오 재즈프로그램의 고정 해설자 역할
도 하는 등 대중음악연주인들의 활동무대를 넓히며 자긍심을 갖게 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겠다.
88올림픽 준비단계에서 올림픽주제곡을 한국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이봉조,김강섭 등을 비롯한 유명 작곡가들과 함께
강력히 주장하는 등 우리 대중음악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1992년 길옥윤은 마셜공화국 국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과거 국내에서 가수 매니저를 하다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지 용이라는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일찌기 마셜공화국과
교역을 하며 그 나라 대통령(당선 전에 협조부분이 있었음)과 친분을 쌓게 된다. 1986년에 독립된 인구 약 6만명의 섬나
라 신생국가에서 國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지 용씨는 길옥윤에 의뢰, 길옥윤은 마셜을 왕래하며 3/4 박자의 "마셜이
여 영원하라" 라 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마셜공화국 국가를 작곡하게 되었다. 지 용 씨는 그 후에도 2000년대 초부터 한
국에서 악단 지도자를 선정. 마셜공화국에 입국시켜 거주케 하면서 마셜공화국 국립윈드오케스트라를 지도케 하였다.
그는 마셜공화국에서 거주하며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노력했고 수년간 마셜 국립악대를 운영한 친마셜 인사였다.)
길옥윤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오가며 자신의 음반사업에 몰두했었으나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게되고 1989년 서초
동에 "창고"라는 이름의 재즈클럽을 운영,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과 연주하며 시름을 달래다가 또 영업이 부실, 장소
를 옮겨 "온실"이라는 재즈클럽을 운영했었으나 또 실패를 거듭하게 되며 건강도 나빠지고 빚쟁이의 등쌀에 국내에 있
을 수가 없다 보니 1992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하게 된다.
연주와 작곡만 하며 음악가로만 지냈다면 건강도 유지되고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그였지만, 음악과 연관된 사업이
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사업에 손을 댄 것이 화근이었다.
일본에 가서도 동경 시내 아카사카(赤阪)의 "한일관" "윤클럽" 등에서 운영 및 연주를 겸하여 생활하면서 건강은 더욱
더 나빠졌고 클럽 운영도 힘들어지고 - 한국과 일본에서 일류음악인으로 알려진 그가 동경의 작은 클럽에서 소일한다
는 것이 너무나 그의 격에 안 맞는 초라한 모습이어서 주위의 지인들이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당장 한국에 가고 싶지
만 빚에 쪼들리는 그의 입장에서 갈 수도 없고....
음악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에 문화선진국의 대중음악 스타일을 실제로 보여 줌으로서 당시 새롭고 발
전적인 연주의 형태를 보급 발전시킨 공이 크 다고 하겠다. 당시 국내에서 최고로 이름을 날린 이봉조와는 색소폰과 작곡 두가지
에서 강력한 라이벌로 서로 경쟁적으로 노력한 것이 결국 국내 대중음악의 연주와 가요 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색소폰의 경
우, 길옥윤을 노블한 음색이라고 한다면 이봉조는 섹시한 음색의 소유자로서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왔고 특히 후배 연주자들이 닮
고 싶어 하는 서로 다른 그들만의 연주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재즈를 처음 배울때 당시의 최고 연주자에게서 지도를 받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주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길옥윤은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귀국한 후 대중음악 분야에서 서구풍의 멋진 노래를 많이 만들었고 또한 격조 높고 품위있게
처신하면서 대중음악인의 위치를 격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수많은 히트곡과 수준 높은 연주활동으 로 대중음악계
에 한 획을 그었던 그가 안타깝게도.....
암으로 투병중 자신이 패티김과 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지막 염원을- 이남기 SBS예능국장(전 KBS쇼PD, 후에 SBS보도본부장,
SBS미디어홀딩스사장, 청와대 홍보수석 역임)이 나서서 주선함으로서 1994년6월18일 SBS-TV의 특집생방송으 로 "길옥윤 이별
콘서트"를 갖게 된다. 이날 그는 휠체어를 타고 객석 맨앞 테이블에 앉아서 헤어진 前부인 패티김의 정성어린 히트곡 열창 모습을
보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와 고마워하는 모습에서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995년 3월21에 별세하여 연예협회장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사후인 1995년10월25일에는 서울시에서 그가 남긴 "서울의 찬가" 작곡의 업적을 기려 세종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노래비를 세웠
다. 제막식에는 황문평 건립추진위원장을 비롯 패티김과 미망인 전연란과 딸, 막내동생 최치갑, 어릴적 친구 김재순 전 국회의장,
김강섭 KBS관현악단 명예단장, 김의재 서울시부시장, 김우석 서울시문화관광국장, 서울치대 후배인 배우 신영균 예총회장,
이상우 예총 부회장, 작가 한운사, 석현 연예협회이사장, 노래비 제작 조각가 황현수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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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조(李鳳祚1932~1987 경남 남해 -테너색소폰, 작곡가, 악단장, 서예가)
[음악경력]
경남남해군창선면 출생 1932
진주중학교(6년제-옛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50
한양공과대학 건축과 (입학1952 - 중도 휴학-졸업1958) (한양대학교는 1959 종합대학으로 승격)
서울시청건설국 근무(1961 퇴직)
김광빈악단 / 김광수악단 (1957)
미8군 공연단체 Summer Time Show, Holywood Show 밴드리더 (1958~1963)
MBC주최 전국경음악경연대회 -이봉조악단 -대상 수상(1963)
TBC-TV경음악단 단장(1964~1980)
KBS-TV관현악단 단장(1981~1987 재직 중 별세)
한국연예협회 연주분과위원장(1970~1971)
일본 동경세계가요제 입상-안개-정훈희(1970)
그리스 국제가요제 입상 -나의 별-현미(1973)
칠레 국제가요제 입상-무인도-정훈희(1974)
서울올림픽문화행사 공연분야준비 자문위원(1987)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2)
[작품]
밤안개, 맨발의 청춘, 안개, 무인도, 꽃밭에서, 나의 별, 떠날 때는 말없이, 종점, 몽땅 내 사랑, 애인, 철없는 아내,
별아 내 가슴에, 내 마음 나도 몰라 외 다수
[스토리]
그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얼마 후 진주로 이사를 했고 진주에서 자랐다. 집안에 음악 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으나 집에 낡은 피
아노가 하나 있어서 심심하면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도레미파를 익혔단다.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이 인연이 되
어 그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된듯하다. 진주고등보통학교(일본식 명칭으로 현재의 진주고등학교-우리나라에 고등학
교제도가 도입된것이 1951년이고 1945년 해방 후에는 진주중학교)를 다닐때에는 자연스럽게 취미로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접하
게 되고 당시에는 교내는 물론이고 인근의 학교까지에서도 색소폰 잘 부는 미남학생이라고 알려졌었다고 한다. 진주중학교 6학
년을 졸업하고 곧 6.25전쟁(1950)을 맞게 되자 제주도로 피란을 가서 공군정훈실 문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제주 피란시절인 1951년에는 서울에서 이화여대에 다니다 제주도로 피란 온 노전숙(1930~ ~2013)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 후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서 중학생 시절 배운 색소폰을 활용, 부산의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기도 했고 1952년 부산에
가교사를 짓고 수업하던 한양공대 건축공학과에 입학을 했다.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색소폰연주도 하면서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1953년7월에 휴전이 성립되고 8월에 부산의 임시정부청사를 서울로 환도하면서 얼마 후 상경한다.
기왕 악기를 붙들었으니 잘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 당시 최고의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1922~2002)의 연주를 연구하며 배우며
클럽활동을 계속했다. 연주계에서는 색소폰 잘 분다고 소문이 나 있었고 그동안 휴학중이던 대학교에 복학 후,
피란 시절 제주도에서 만난 노전숙과 1957년2월 서울의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두사람 사이에 1남3녀를 두게 된다.
미국의 재즈스타 스탄 게츠(Stan Gets 1927~1991 테너색스)를 모방하며 한동안 연습에 미쳐 있었던 시기가 있었고 20대 중반이
었던 이 시기에 그는 연주인들간에 색소폰 잘 분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인기악단인 김광수(바이올1921~1993)
악단에 스카웃되어 한동안 클럽음악 활동을 했다. 1958년 6년만에 한양공대를 졸업하게 되고 서울시청건설국에 취직이 되어 서
울시에서 관여하는 건축공사 현장에서 건축기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밤에는 클럽에서 음악활동을 하는등 밤낮으로 두가지 일을
병행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미8군연예대행업체인 (주)한국흥행(화양) 안찬옥사장의 제안을 받고 미8군쇼 밴드리더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미8군쇼는 국내의 젊고 유능한 대중음악인의 총집합체였다.
미8군쇼는 주로 오후에 공연차량이 출발하게 되고 매일 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울시청 근무도 계속 이어갔으나 차츰 쇼단체
의 일이 바쁘게 되고 쇼밴드리더로서의 인기가 높아지고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1961년2월에는 서울시청을 사직하고 음악
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 시절 그는 미8군쇼의 공연활동에서 머물지 않고 활동범위가 더 넓은 국내의 대중음악계에 관심을 갖게되
면서 대중가요 작곡과 방송국에도 관심이 가게 된다.
※ 1960년대 초 방송 계통에는,
KBS라디오에는 김광수악단(1958~1961→김인배악단 1962~1963 →김강섭악단 1964~1995)
MBC(문화)라디오에는 여대영악단(1963~1969 MBC-TV경음악단장으로 이동 1969~1978)
DBS(동아)라디오에는 노명석악단(1963~1980)
RSB(라디오 서울TBC의 전신)라디오에는 김광수악단(1964~1968) 등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광수,노명석은
음악계의 대선배이지만 김인배,김강섭은 동년배이고 여대영은 후배이지만 방송계에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 1960년을 전후하여 미8군쇼에는 대단히 뛰어난 테너색소폰의 스타연주자들이 있었다. 당시 미8군쇼에는 색소폰 연주
로 가장 유명했던 파피쇼의 김안영(1932~2010년대에 미국에서 별세)과 스프링 버라이어티쇼의 밴드리더이자 국내 재
즈계의 원조 이정식(1932~1970) 등이 이봉조와 함께 대표적인 테너색스 주자로서 밴드리더였는데 이봉조는 이정식과
친구이지만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 실력을 인정, 그를 부를때는 이센세이(李先生의 일본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62년에는 같은 미8군쇼의 무용수 겸 가수인 현 미에게 미국팝송 "It's a lonesome old town"을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개작하여 "밤안개" 라는 곡목으로 발표를 했는데 이것이 대히트하면서 현 미는 솔로가수로서 인기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이봉조
는 작곡가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어 인기 연주자로서 또 작곡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절 이봉조는 현 미와 동거중이었고 후에 아들 둘을 두었다.
1963년에는 MBC라디오에서 주최하는 전국경음악경연대회에서 이봉조악단이 대상을 받게 되고 1964년에는 삼성계열의
TBC(동양방송)에 TV방송국이 개국하면서 TBC-TV전속경음악단 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60~70년대 드라마 주제가,가요,영화음악,국가의 주요 공연행사 등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인기가수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
다. 가수 현 미와 커플이 되어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가 되면서 인기의 고공행진을 이어갔다.1970년대 초에는 이봉조쇼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고 테너색소폰 독주곡집도 수차례 출반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던 1960년대 가요계에 재즈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요스타일을 개척한 작곡가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곡이 1964년 발표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인기 영화 "맨발의 청춘" 주제가이다.
이 곡은 최희준의 노래로 불리워졌는데 전주,간주에 블루스케일을 인용한 이봉조의 색소폰 연주가 또한 일품이었다. 미국 갱 영
화 속 뉴욕의 할렘가 으슥한 골목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의 블루스적인 표현이 정말로 새롭게 닥아왔다.
본인도 이곡을 처음 들었을때의 느낌은 미국의 유명한 재즈맨이 레코딩한 것처럼 그 당시에는 정말로 멋있게 새로운 감각으로
연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연주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귀국한 연주계 선배인 길옥윤과 테너색소폰과 작곡 등 공통된 분야에서 쌍벽을
이루며 국내 대중음악계를 이끌어 왔다. 더구나 길옥윤과 패티김, 이봉조와 현 미의 연예인 커플로서도 경쟁적으로 다수의 신곡
을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그동안 이태리에서 유명했던 상레모가요제를 본따서 기획한 범세계적인 가요경연 프로그램 동경가요제(1970 정
훈희 -안개), 그리스가요제(1973 현 미- 나의 별), 칠레가요제(1974 정훈희- 무인도) 등 세계적인 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함으로서
우리나라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주역이기도 했다.
그가 당시 색소폰을 잘 불던 여러 연주자들과 다른 점은 재즈를 바탕으로 한 기본적인 실력은 모두가 다 갖추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재즈의 요소를 인용하여 우리 가요에 접목시킬 수 있는 남다른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앞섰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매력있는 색소폰 플레이 스타일(멜로디 처리와 해석에서 오는)은 그후에 그의 스타일을 흉내내는 후배 연주자들이
많을만큼 그의 색소폰 연주는 우선 톤이 좋았고 파워풀하고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또한 붓글씨의 명인으로서 다재다능한 타고난 藝人이었다.
그의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1964년 TBC-TV 악단장으로 부임해서 TBC가 KBS로 통폐합되기 직전까지 6070의 약 20년동안의
음악인생은 우리나라에서 연주인으로서, 악단장으로서, 작곡가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왔다고 하겠다.
구수한 화술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음악생활과 그 外的인 면에서도 폭넓은 생을 살아서 政財界의 거물
급 인사들과도 친분이 많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압구정동에 "봉"이라는 클럽을 직접 운영하며 그의 팬들과 음악을 통해서 교분
을 나누기도 했다. 이 클럽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에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켜 1987년 8월31일 KBS 재직중에 별세하게 된
다.
그는 1980년12월 언론사통폐합때 KBS로 옮긴 이후에도 피로를 자주 느끼는 등 건강이 좋아 보이지않았다. 평소에 담배는 무척
많이 피웠으나 술은 별로 안 마시는 편이었지만 "봉"클럽을 운영하면서 음주의 기회가 자주 생기게 된 것도 건강에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의 장례는 순천향병원장례식장에서 5일장으로 치루었으며 대학로에 있는 예총빌딩 근처의 마로니에공원에서 한국연예협회장
으로 영결식을 치루었다.
연예협회의 이상우이사장과 KBS-TV관현악단 김강섭단장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TBC시절 음악조력자로서 항상 함께 했던 김용선의 지휘로 TBC-TV시절부터 함께 했던 단원들을 중심으로 빅밴드를 구성하여 뜻
있고 의미있는 영결식 조악을 연주했다.
영결식을 마친 후 대형 영정사진을 앞세운 지프 뒤로 운구차량과 조문차량이 뒤따랐으며 그의 정든 방송출연무대였던 KBS별관
(방송통합 직전 TBC에서 새로 지은 방송 사옥)에서 노제를 치룬 후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에 가서는 트럼펫 단원들이 진혼곡을 연주하고................. "이봉조단장님 고이 잠드소서"
악단에서는 단원들이 2년 후인 탈상때까지 고인의 기일에 천안공원묘지를 참배했었다.
그의 사후에 그의 고향 진주에서는 이봉조가요제가 2006년6월9일 晉州城址에서 진주MBC 주최로 MBC예술단과 인기가수들의
출연으로 성황리에 처음 열렸었으며 그 후부터 진주가요제에는 이봉조 포함 진주 출신 연예인들을 함께 기리는 지역가요제로 성
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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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소프라노 색소폰은 별로 보이지를 않았었는데 1960년대 후반에 길옥윤이 소프라노 색소폰
스트레이트스타일(직관형(直管型)을 가끔 TV에서 선을 보였고 같은 시기 이봉조는 커브드스타일(曲管型)의 소프라노
색소폰을 선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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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유명 연주자
위에 소개한 엄토미, 길옥윤, 이봉조 이외에도 색소폰 자체로만 본다면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은
연주자는 이분들 외에는 없다고 보아진다. 이분들에게는 다른 연주자들에게 없는, 인기의 요소가 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
기때문이다. 인기요소중 가장 큰것은 이들이 작곡가로서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것과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릴수 있는 인기스타
이기에 따라다니는 스캔들도 한몫했다고 하겠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다는 것과 연주자들간에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연주자들간에 인정 받았던 뛰어난 실력자 몇분을 소개하고저 한다.
신지철 (Ten.Sax.) -1950~60년대에 즉흥연주와 멜로디 처리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 연주인들에게 인정받는 색소포니스트
였다. 엄토미와 동시대 연주자로서 활동했으나 지금의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하는 물질을 습관적으로 가
까이 한 관계로 더 이상 음악사적으로 뛰어난 업적도 못 이룬채로 연주계에서 사라진 정말로 안타까운
스타 연주자였다.
김안영 (Ten.Sax. 1932~ ? 미국에서 별세) - 미8군쇼인 Show Boat 쇼와 Poppy쇼의 밴드리더로서 쇼단체 중에서 최고의
테너색소포니스트라고 알려져 있었다. 미국의 재즈맨 스탄 게츠를 즐겨 연주했고 서울대법대 출신 가수
최희준이 대학생시절이었던 1959년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이 적을 두고 있던 Show Boat쇼에 입단
시켜서 가수로 데뷰를 시켜준 악단장이기도 하다. 나이 30이 넘어 해병대에 입대해 군예대밴드리더로서
월남전에 참전, 한국군 장병들을 위문하며 가수사병도 함께하는 군예대의 대장직을 수행했다.
미국으로 이민 후에는 음악을 접고 사업을 했었다
이정식 (Ten.Sax. 1932~1970) - 교향악계의 원로인 비올라 이재옥 서울음대 교수의 아들로서 음악성이 뛰어났다. 국내 재
즈계에서 1950~60년대에 최고의 리얼재즈 선구자라고 불리워진다. 재즈 즉흥연주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즈의 Tension 과 Chord 스케일에 의한 즉흥연주
기법을 독학으로 체계화했다고 일컬어진다. 이 이정식세대가 바로 우리나라의 재즈 제1세대인 것이다.
1950년대 후반의 Mode Jazz를 탐닉했고 존 콜트레인을 연구하며 프리재즈에 속하는 무한대의 즉흥연
주를 즐겨 연주하던 대단한 수준의 재즈맨이었다. 1950년대 후반 김호길악단에서 활동했고 미8군쇼인
Spring Vareity 쇼에서 밴드리더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 중반에는 전쟁중인 베트남의 미군쇼단을 거쳐
홍콩의 클럽에서 재즈를 연주하기도 했다.(해외활동기간 3년) 1970년 38세의 나이로 별세한 관계로 그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않은 잊혀진 전설 속의 재즈맨이 되었다. 이정식의 영향을 받은 재
즈맨들이 바로 트럼펫의 강대관, 재즈이론가 이판근, 테너색스의 김수열 피아노의 손수길 등이다.
김석성 (Ten.Sax. 1933~2014) - 미8군쇼 밴드리더로서 실력파로 알려져 있는 연주자였다. 스탄 게츠의 멜로디 처리 스타
일을 본따서 재즈의 멋이 듬뿍 베인 멜로디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1971년 KBS관현악단에서 바리톤색소폰으로 활동하던
중 1972년 미국으로 이민, 시애틀에 정착 후 레스토랑을 경영했으며 KBS열린음악회 초기인 1993년에는 미국에서 일시 귀국
그의 멋진 톤으로 솔로를 선보여 갈채를 받기도 했다.
강철구 (Alto.Sax. 캐나다에서 별세) - 미8군쇼 A-Train 쇼 밴드리더로서 편곡에 능했고 미8군쇼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을
일반 가요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분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는 태국에서 푸미폰國王의 재즈색소폰 스승
으로서 오랜동안 머물기도 했다. 이후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최태국 (Ten.Sax. 미국에서 별세) - 미8군쇼 Spring Variety 쇼의 밴드리더로 재즈에 기초하는 멋진 연주로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에는 미국 하와이에 정착, 연주활동을 했었다.
최인재 (1934~현재. Ten.Sax.) - 미8군쇼에서 1950년대말 그만의 독특한, 부드러우면서도 파워풀한 톤으로 듣는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드는 멜로디 처리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DBS, KBS 등의 방송음악과 레코딩세션으로 활동을 많이
했다. 1960~80년대의 국내 가요음반에서는 그의 테너색소폰에 의한 전주, 간주 솔로가 거의 70% 이상이 될 정도로 그 시대에
앞서가는 신선한 연주로 각광을 받았다.
최인재(예명:최석재崔晳在) 색소폰 독주곡 음반도 수차례 출반했다. 은퇴후에는 경찰악대 출신들의 연주모임인 경우회의 무궁화
악단에서 리더로서 활동하던 중 2000년대 초 뇌졸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었지만 어느 정도 회복되었었으나 근래에는 노쇠현
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명예욕이 별로 없기에 뛰어난 실력에 비해 대중들에게 어필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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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는 글
♬ 대중음악 연주계의 어제와 오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과거 유명 연주자들은 사실상 재즈를 바탕으로 1930년대 부터 미국의 이름난 재즈맨들의 음반을 듣고
흉내 내면서 자생 성장했다고 하겠다. 클래식음악과 국내의 가요와는 전혀 다른 ,그 새롭고 매력 있는 재즈와 한국의 옛 가요음악
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까 고민하며 우리 가요계에 정착,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보여진다.
1950년대 들어서서는 미군의 장기 주둔으로 인해 미국의 대중음악을 수시로 접하면서 재즈에 대한 이론서적이나 편히 들을 수
있는 음향장비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국의 재즈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세련된 음악을 듣고 그와
비슷하게 연주하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이어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DNA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에 다행스러운 것은, 1980년대 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에 대중음악 전공의 실용음악과 설립을
필두로 그 이후 1990년대에는 국내 대학교에 대중음악 전공학과의 신설이 확산되고 거기에 맞춰 재즈 교육의 최고봉인 미국 보
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을 비롯한 선진국의 음악대학에서 재즈를 수학한 엘리트들이 국내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 엄청난
발전을 하게된 것도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의 크나큰 수확이라 하겠다.
가끔 TV에서 연주자 경연대회에 출전하는 멤버들을 보면 악기연주의 기본인 음정, 박자. 테크닉 등은 이미 초월했고 감정표현 내
지 창의력, 팀웍, 관중흡인력 등을 중점적으로 가리게되는 그런 수준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래고 또 놀랜다. 하지만 이 뛰어난 고
급 인력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우리나라에서 관악기 연주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1930~40년대 가요의 탄생과 악극단 성행 및 8.15직후 미군 3년간 주둔 시기에 재즈를 처음 들어보며 접해보던 악단 연주활동
1950~60년대 미군의 대병력 국내 주둔 시기에 미8군연예대행기관(1958~)에서의 본격적인 재즈와 팝음악 연주활동
1970~80년대 국내 라디오(1948~) 및 TV(1961~)방송사의 개국과 방송전속악단의 활동
1980~90년대 국내 재즈밴드의 활성화 와 재즈 유학생 증가 및 각 대학교의 대중음악과목 신설 등 교육저변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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