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란 존재는 우리의 삶의 근원이며, 무한한 짐이며, 바다며, 삶의 원천이다.
말아톤은 그 엄마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라고 만 말하면 너무 재미 없는 이야기가 되겠지?
수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영화.
먼저 우리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우리 나라는 사회란 것이 부재한다. 자폐아는 철저하게 가족의 품 속으로 가두어진다. 하나의 사회에서 동등한, 혹은 정상이라는 이름의 등급을 획득하지 못하면 항상 유폐된다. "자폐"란 단어는 유폐와 이어진다. 이러한 한 개체의, 독특한 개체의 유폐는 자본이라는 거대하면서도 미세한 그물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전체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굳이 푸코의 언급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행태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의식에 '정상적임'으로 등록되어 있다.
공장에 갖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의 계열 속에 등기된 수많은 초원이들. 그들은 사회에 의해서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이라는 또 하나의 격자에 의해 단순노동의 기계로 등기된다. '그나마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인가?' 이는 국가 혹은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의해 배제되면서도 자본이라는 또 다른 격자에 의해 재 등록되는 현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가능성= 존재의 가치이기 때문에.
주체, 혹은 존재라는 것.
라깡에 의하면 주체라는 것은 끝임없이 분열되고, 지연되고, 오인된 존재이다.
엄마. 그녀는 초원이에게 거대한 대지이자 또한 기댈 언덕이며, 유일한 안식처이다. 반면 엄마는 거대한 매트릭스다. 그녀가 겪는 수많은 고통과 자의식, 피해의식, 불안 등등은 사회가 폐기처분해버린 의무가 자연스럽게 가족 혹은 엄마라는 한 개인에게 전이된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가족이라는 작은 틀보다, 더 큰 범위에서 그들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한국사회라는 것이 선재한다. 따라서 초원이 엄마가 아들에게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사회라는 가치의 기준에서 시작하여 엄마 개인의 욕망까지 고스란히 투여된 결과이며,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는 가치체계에 기인한다.
우리의 문제적 인물 초원. 그는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다섯살의 정신상태를 지닌 그에게는 의식보다, 정신에 의한 것보다 육체가 선행한다. 냄새를 맡고, 중얼거리고....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육체에 각인된 격자에 의해서 움직인다.
학습도, 감정 표현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는 철저하게 엄마라는 거울에 의해 자신의 의식을 만들어간다. 아니, 엄마에게 의해서 허용된 것만 행동이 가능하다. 그러면 인간은 의식적인 동물이며, 거울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에만 존재의 가치를 가지는가? 혹은 존재가 가능한가?
문제는 초원이의 행동이 정상인의 코드에는 등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데 있다. 사회 전반에서 일반적이거나 익숙하지 않는 존재는 외부로 밀려난다. 따라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며 비존재가 된다.
감응하는 존재.
살아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외부의 가치척도에 의해서만 그 존재 가치의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하는가. 중요한 것은 오히려 초원이가 보여준 그 표정의 변화가 아닐까?
'달리는 초원이'는 자폐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수많은 정상인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감응자이다. 달리는 동안 그를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완주의 메달도, 엄마의 즐거워하는 웃음도, 주변에서 보이는 찬사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달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표정변화가 드러내듯 끊임없이 주변의 자연과 공감하는 되기의 존재이다. 달리는 초원이는 자폐라기 보다는 외부로, 자연으로 열려있는 개방된 존재인 것이다.
코치와 물을 나누어먹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달리는 심장은 주파수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같이 달리는 코치와 초원이의 주파수는 같아진다. 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가두는 엄마를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다.
세렌게티 국립공원.
얼룩말은 초원의 우기가 찾아오면 새끼를 낳고, 이제 어미 얼룩말은 새끼에게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멘트다.
그런데, 오히려 이 말을 거듭해서 들을 때, 야생의 국립공원과 인간의 사회는 다시 포개어지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더욱 더 무시무시한 야만적 국립공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이 약한 얼룩말 새끼는 무자비하게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단순히 인간적 감정에 기초한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다. 노자는 "자연은 불인하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오히려 인간이 살아가는 잔혹한 세렌게티에는 끊임없이 그 존재들을 자본의 권력으로 가두고, 죽음조차 유예시키며 그들의 피를 조금씩 빨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세렌게티 속의 모든 존재는 목에 빨대를 꽂고 끊임없이 피를 빨리는 꽃사슴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