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세습-경험의 학교2
어릴 적 나는 개천에서 용 난 신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었다. 우리 집 가훈은 ‘하면 된다’였다. 근대화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개천에서 용 난 신화 이야기가 싹 사라졌다. 밀레니엄을 지내며 우리사회는 세습사회가 되버렸다. 용의 신화 대신 부동산은 물론 정치, 경제, 교육 모든 분야에서 강남 불패 신화가 유포 되었다. 부의 세습이 아니라 계급의 세습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부를 거머쥔 계급이 정치, 문화, 교양 등 모든 것 또한 거머쥐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능력의 범위까지 세습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밀레니엄 이후 한국 세습사회에서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 불평등하게 살다가 죽는다. 한동안 횡행했던 갑질의 횡포가 능력의 과잉이 만들어낸 세습사회의 질환이라면, 고도의 자살은 능력의 결핍이 만들어낸 세습사회의 질환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은 소유의 경제적 차이였다, 하지만 세습사회에서 계급은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 주인과 노예로 나뉘게 되었다.
일반학교를 나와 대안학교에서 이런저런 친구들을 만났다. 내 기준으로는 대안학교를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일반학교를 거부한 대안의 학교로서 대항학교 성격을 가진 대안학교와,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일반학교에 대한 보완학교 성격을 가진 대안학교다. 서울에 있는 비인가 대안학교의 경우 마을 안의 대안학교로서 애초 대안학교를 선택해 초등부터 중등 고등으로 성장한 중산층 전문직 부모의 자녀들이 다닌 경우였고, 지방에 있는 인가 대안학교의 경우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좀 더 자유롭고 배려 받을 수 있는 보완학교의 성격이 강한 경우였다. 경제적으로도 서울의 고학력 전문직 부모들과 달리 다양한 일반 직업군을 가진 부모들이 많았다. 대안학교에서 적은 인원의 학생을 만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학생과 가정의 이런저런 사정을 알게 되는 게 더 많다.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한 두 유형의 학생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터 나는 부와 결합된 세습사회에서 계급의 세습이 학생의 자아 정체성 및 능력의 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경험의 세습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정체성과 능력은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환영받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학생과 환영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정체성과 능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개체의 정체성은 환경을 경험하며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개체의 능력은 변화시킬 수 있는 환경의 질과 범위에 의해 측정된다.
부모가 사회적 부와 지위를 지닌 학생의 경우는 발달이 늦고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부모가 학생에게 맞는 환경과 경험을 제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결국 개인교습을 붙이든 유학을 가든 어떻게 해서 부모가 원하는 루트를 가도록 만든다. 아이들은 해외여행이니 어학연수에 익숙하고 불가능보다 가능한 것들과 실패 가능한 실험을 할 시간과 돈의 여유를 부여받았다. 반면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가정이 불완전한 경우 아이의 자아 정체성도 손상되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할 수도 없다.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 설사 그런 기회가 와도 자기 자신을 못 믿고 지레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소위 정체성과 능력의 세습이 전부가 아니다. 경험의 세습이 일어난다. 경험의 과잉과 빈곤이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두 유형의 아이가 스마트폰이나 게임 중독에 빠졌다고 생각해보자. 앞의 경우는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과 기회가 여전히 대기하고 있지만, 뒤의 경우는 경험의 빈곤이 더욱 악화된다. 그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그리고 무능감으로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환경이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의 한계가 아이 내면의 경계를 이미 확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맹자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해서 맹자에게 좋은 환경과 경험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비록 가난하더라도 어머니가 맹자에게 물려줄 만큼 높은 소양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문화와 교양은 물론 태도와 경험의 세습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더욱 계급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부와 권력 뿐 아니라 문화, 교양, 태도, 자아, 능력, 경험 모두 세습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애초 꿀 수 있는 꿈의 성격도 둘은 전혀 다르다. 꿈과 상상도 경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불가능한 꿈이란 없겠지만, 다른 쪽은 애초 불가능한 꿈은 꾸질 않는다. 최대한 눈앞에 보이는 좁은 현실적 꿈만 꾸게 된다. 계급이 내면화된 꿈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경험의 과잉이 아니라 경험의 빈곤이다. 경험의 양적 질적 다양성과 차이는 객관적인 환경의 영역이라고 해도,빈곤한 경험 속에서 건강한 정체성과 유능감을 갖으며 꿀 수 있기는 어렵다. 세계의 크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 학생에게 세계는 좁은 지역이 절대 아니다. 서울은 물론 호주, 미국, 유럽 등 전세계가 그의 세계다. 다른 학생에게 세계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 전부일 수 있다. 또한 학생은 세습사회의 저주에 걸려 계급의 장벽을 뚫지 못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교육의 결정적 순간이 배움의 동기를 찾고 의욕을 갖고 결심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살아갈 이유와 동기가 있고 세상을 의욕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가능의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의 경우는 이것이 어렵지 않다. 소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하지만 불가능의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는 교육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와도 외나무다리 같이 좁은 길을 가야 한다. 자기식대로의 방법을 신뢰하고 뚝심 있게 나아가기에는 정체성과 능력이 너무 약하다. 경험의 한계가 이미 세계의 한계는 물론 능력의 한계도 만들었다. 두더지들의 연대가 있지 않으면 작은 정체성과 작은 능력으로 좁은 세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인정한다면, 정체성과 능력의 평등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의 평등, 세계의 평등을 우리가 먼저 실현해야 한다. 경험의 평등, 세계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장 두더지들의 연대가 필요하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의 사회적 평등을 성취해야 한다. 경험의 학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