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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도 다시 한번
최용현(수필가)
‘1960년대 우리나라 영화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면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온다. 유부남과 미혼녀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스토리가 너무 통속적인데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주부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 돌풍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TV에서 드라마 연출을 해오던 정소영이 영화로 전향하여 세 번째로 감독한 작품으로 1960년대 최고의 흥행영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제12회 부일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여우조연상(전계현)을 수상했고, 일본과 대만에 수출하기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선정하는 ‘한국영화 100선’에도 뽑혔다.
서울 인구가 450만 정도이던 시절인 1968년 7월 16일 국도극장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을 개봉했는데, 총 65일간 상영하여 37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왔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최고기록인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의 서울관객기록 36만 명을 넘어선 신기록이었다. 아역배우의 호연(好演)이 결정적인 한몫을 했다.
유치원 교사인 혜영(문희 扮)은 이웃에서 하숙하는 신호(신영균 扮)를 돌봐주다가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어느 날, 시골에서 신호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고, 혜영은 비로소 신호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다. 충격에 빠진 혜영은 ‘선생님을 닮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우겠어요.’라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호는 사업가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한다. 그러나 미혼모인 혜영은 친정에서도 쫓겨나 강원도 묵호의 한 허름한 어촌에서 영신(김정훈 扮)을 낳아 기르며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아들 영신이 자라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혜영은 영신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혜영은 신호를 찾아가 영신을 맡아서 키워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신호의 아내(전계현 扮)는 혜영에게 다시는 연락하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다짐을 받으며 영신을 맡는다. 영신은 아버지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신호와 신호의 아내는 영신을 잘 보살피려고 애쓰지만 영신은 이복형제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자꾸 엄마를 찾는다.
어느 날, 영신은 엄마를 찾아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만다. 신호와 신호의 아내는 영신을 찾아 나서는데, 그날따라 혜영 또한 영신이 보고 싶어서 신호의 집 근처를 배회하게 된다. 밤이 되자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하는데, 그때서야 집 근처에서 비를 홀딱 맞은 영신을 발견한다.
신호는 반가우면서도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영신을 야단치고 때리는데, 때마침 혜영이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다. 영신을 자신이 맡아서 길러야겠다고 생각한 혜영이 영신을 다시 묵호로 데려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속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노골적인 엔딩 자막을 남긴 채.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멜로드라마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처녀가 유부남의 아이를 낳았다면 옛날에는 당연히 그 남자의 소실(小室)이 되고 소실이 낳은 아이는 서자(庶子)가 되거나 아니면 본부인에게 맡겨질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처녀가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임신을 했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십중팔구 낙태를 하러가지 않을까?
그러나 1960년대는 유부남의 아이를 낳은 미혼모와 그 아이가 갈 곳이 없는 시대이다. 영화는 미혼모 혜영의 가련하면서도 꿋꿋한 모성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대부분의 관객인 주부들이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듯 모성애를 느끼며 손수건을 꺼내들고 함께 울었던 것이다. 미혼모에게 남은 것이 눈물 외에 뭐가 있겠는가.
‘미워도 다시 한번’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다음해부터 매년 속편이 나와 총 4편의 시리즈가 되었다. 당시 자료를 보면 1969년 ‘(속)미워도 다시 한번’은 25만4천명, 1970년 ‘미워도 다시 한번(3편)’은 19만 8천명, 1971년 ‘미워도 다시 한번(대완결편)’은 14만 5천명의 관객이 들어와 모두 상당한 흥행을 기록하였으나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다.
김진경 작사, 이재현 작곡의 영화 주제곡 ‘미워도 다시 한번’은 영화 못지않은 빅히트곡인데, 속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한다. 이미자가 오프닝에서 1절을 부르고, 남진이 엔딩에서 2절을 부른다. 1,2절의 가사를 음미해보면 이미자가 여자주인공 혜영을, 남진이 남자주인공 신호를 대변하는 것 같다.
1980년에는 원작을 리메이크한 ‘미워도 다시 한번’80’이 개봉되었고, 1981년에는 속편인 ‘미워도 다시 한번’81’이 개봉되었는데 둘 다 변장호가 감독했다. 2002년에는 김수현 각본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2002’를 개봉하였는데, 원작 영화의 인기에 편승한 집착증이 무서울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설명하든 모두 아류작이 아니겠는가.
출연배우들의 근황을 살펴보자. 신영균은 6~70년대를 대표하는 선이 굵고 카리스마 넘치는 간판배우였는데, 영화인협회장, 예총회장, 국회의원 등을 지냈으며 아흔이 넘었다. 1세대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웠고, 남성 팬이 많았던 문희는 60년대에 절정의 인기를 누리다가 1971년 한국일보 부사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고, 칠순이 넘은 현재 백상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동양적인 고아(高雅)한 미모가 돋보였던 전계현은 아폴로 박사로 불리던 조경철 교수와 결혼하여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2010년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서 살고 있다. 팔순이 넘었다. 영신 역을 맡았던 아역배우 김정훈은 연기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60년대를 풍미했으나 커서는 크게 각광을 받지 못했다.
얼마 전에 김정훈의 인생을 다룬 ‘마이웨이’를 케이블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예순을 앞둔 김정훈이 당시 엄마 역을 하던 문희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왔다. ‘꼬마신랑’에서는 문희와 부부 사이로도 나오지 않았던가. 수화기에서 문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문득 중학교 시절 극장 간판에서 보던 문희의 모습이 떠올라 새삼 그 시절이 울컥 그리워졌다.
첫댓글 어린시절.. 그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영화를 좋아하던 부모님 손잡고 극장으로 가서 봤던 .. 미워도 다시한번..
아마도 그런 환경적인 조건으로 인해 제가 영화매니아가 된듯...
김정훈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을 울렸지요
아주 어린시절 봤던 영화라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어린 나이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엄마랑 함께 울었던 기억이..
제가 30 대 시절에.. 분당에서 살았는데..
우리동네 근처에서 김정훈 씨가 고깃집을 운영하더라구요
중년의 키작은 통통한 아저씨가 되어서요..
감회가 새롭더군요
세월은 모든것을 변화시키는. 마술같은 거지요
부모님이 영화를 좋아하셨군요.
부모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를 좋아하게 되죠.
김정훈은 꼬마 때 워낙 깜찍하게 연기를 잘 해서,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된 건지
커서는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좀 안타까웠죠.
예순이 다 된 김정훈, 그만큼 세월이 흐른 거지요.
나도 그만큼 늙은 거고...
미워도 다시한번 노래도 히트치고 영화는 촌이라 한번보았지만 정말 좋았다는 느낌이 아직도 있어요 요즈음 보면 어떤의식으로 볼까 궁굼하기도 하고
엣날 영화를 요즘에 다시보면 아무래도 내용이 좀 싱겁고 대사도 신파조가 많죠.
그래도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립네요.
좋은 글 .. 정보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