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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의 개념과 기원
시가는 문학의 여러 부류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양식이다.
그러므로 시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해명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 왔고 또한 그것은 앞으로도 무한히 거듭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의 정의란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은 이와 같이 무한으로 존재한다. 무한히 많은 해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만인이 수긍하고 만족할 만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환경, 그리고 관점에 따른 상위점을 넘어서 주목할 만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란 언어예술이라는 정의다. 시는 전통적으로 과학이나 실용적인 지식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예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형식으로서 한국시가는 원시종합예술(ballade dance)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가는 독립된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음악·무용과 함께 미분화 상태로 있었다.
시가·음악·무용의 삼위일체, 그러한 미분화상태가 시가의 당초성이자 원천이다. 그리하여 원시종합예술은 분화, 발전하여 몸짓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말은 시로 나타났다.
시가의 경우 처음에는 구비문학의 단계를 거치다가 문자 발생 이후에 기록문학으로 정착하였다고 보아진다. 한국시가의 첫출발 또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서력기원 전후로 소급된다.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원시종합예술체인 원시가무(原始歌舞)의 자취와 현존하는 호남지방의 <강강술래>나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 나네>와 같이 고대의 집단예술을 방불하게 하는 민속가무 등을 통하여 그 편린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이때의 예술활동은 주로 집단이 모여 음주가무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농경생활 및 제의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독창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예술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예술관을 집약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시가 또한 제천의식(祭天儀式)이라는 원시종합예술로서의 음악과 놀이와 더불어 그 속에 융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가란 바로 노래요, 놀이요, 또한 제의와 더불어 있다. 결국 한국시가의 첫출발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되어 그 온전한 모습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 초기 또는 그 이전의 시가로는 단 세 편이 있을 뿐이다. 흔히 ‘고대가요’ 또는 ‘상대가요’라고 하는 <구지가 龜旨歌>·<황조가 黃鳥歌>·<공후인 箜篌引>과 같은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도 원래 가사는 망실되고 한역시(漢譯詩)가 전해올 뿐이다.
한국시가는 기원전 한역(漢譯)으로 전하는 노래로 시작되었다. 고대의 부족국가시대로부터 삼국 초기까지, 즉 향가(鄕歌) 성립 이전에는 아직 우리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한역될
수밖에 없었다.
<구지가>·<황조가>·<공후인> 등은 비록 한역으로 된 노래지만 사의(辭意)가 남아 있는 최초의 작품이며, 4행의 형식은 그 뒤 우리 나라 시가의 기본형식을 이룬다. 또한, 이들 노래는 모두 설화적 배경을 가지고 전하여지고 있다.
이 가운데 <구지가>는 독립된 작품처럼 보이나 가락국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고, 국가적인 행사에서 가창된 의식요(儀式謠)라고 짐작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한에 관한 문적에서 원시가무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고, 그 가무가 제의의 주연(奏演)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때 <구지가>는 제의와 결부된 원시종합예술로 파악된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시월제천(十月祭天), 예(濊)의 무천(舞天), 마한의 5월과 10월 제전 등을 거행할 때는 <구지가>와 비슷한 성격의 노래를 불렀으리라고 짐작되나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구지가>의 이러한 제의적 기능과는 달리 <황조가>·<공후인>은 죽음과 고독을 노래한 순도높은 서정시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고 알려진 <황조가>는 작자와 연대가 알려진 최초의 작품이다. <공후인> 또한 서정시로 보이는 작품인데, 일찍이 중국 최표(崔豹)의 ≪고금주 古今注≫에 전하는 것을 ≪해동역사 海東繹史≫에 옮겨놓아서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에서 서정시(lyric)가 현금의 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이었던 것과 같이 <공후인>이 공후로 노래한 것은 흥미로운 대조이다.
한편, 신라 기악의 시초라고 하는 신라 유리왕대의 <도솔가 兜率歌>도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제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던 노래가 뒤에 독립된 것이라고 본다. <도솔가>는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차사는 ‘아으’·‘아야’ 등의 향가에 붙은 간투사(間投詞)요, 사뇌격은 ‘사뇌가(詞腦歌) 격식의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 향가의 원류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노래 형식이 그 뒤 사뇌가와는 다르다는 추정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한시대의 기본적인 시가는 노동요를 포함한 민요라고 보아지며, 이 민요의 형식이 그 뒤 한국시가의 기본양상이 되었다. 고시가→향가→여요(麗謠)→시조(가사)→개화기시가→근대시에 이르는 한국시가의 흐름은 각 시대가 보여준 부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밑바닥에는 민요의 형식체험이 잔영으로 남아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고시가→향가→여요→시조(가사)→개화기시가→근대시 등으로 이어지는 부류의 변이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형하여 나타난 상호관련성이며, 결국 민요형식의 변이인 셈이다. 이렇듯 한국시가의 흐름이란 하나의 주도적 부류가 자동화되어 이에 도전하는 새로운 부류가 출현하는 과정이 되풀이됨으로써 전개되었다.
이는 통시론적이고 역사적인 기술의 대상만이 아니라 구조자체의 공시론적 기술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고시가→향가→여요→시조(가사)→개화기시가→근대시가 지닐 동시적 존재와 통시적 질서를 이루게 될 개성적인 변화를 한국시가 전체성의 지속성 위에서 연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곧 각 부류의 변화를 하나의 체계로 보고 그 체계 속의 변이를 추적하는 것을 말한다.
<구지가>·<황조가>·<공후인> 등과 같이 원가망실(原歌亡失)의 한역시가 아닌 본격적인 시가는 향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고 또한 개인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향가란 넓은 뜻으로는 중국시에 대한 한국의 독특한 시가라고 한다면, 좁은 뜻으로는 이두문자(吏讀文字)를 표현매개로 한 신라의 시가를 말한다.
향가는 물론 신라인의 노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12세기 중엽 고려시대의 정서(鄭叙)가 지었다는 <정과정곡 鄭瓜亭曲>이 향가의 잔영을 지닌 작품으로 이야기되고, 또한 고려왕조 의종이 신하들과 더불어 향가로써 시회(詩會)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향가는 고려왕조의 상당한 시대에까지 창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현존하고 있는 향가로는 신라가 그 독무대이다시피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있는 14수의 신라향가야말로 향가의 백미(白眉)들이다. 신라향가는 그 면모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그 하위부류의 종류가 다양하다. 굿에서 불렀던 주술적인 노래인 <처용가>가 있는가 하면, 설경(說經)의 교훈을 담은 노래인 <원왕생가 願往生歌>가 있는 외에도 순도높은 서정시 <제망매가 祭亡妹歌>가 있다.
또한, 집단으로 부른 민요 <풍요 風謠>가 있는가 하면, 개인에 의하여 창작된 시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가 있다. 전대에서부터 전하여져 온 노래가 있는 반면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즉흥적으로 읊어진 작품이 있다.
특히 <서동요 薯童謠>·<풍요> 같은 초기의 향가는 민요의 정착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형식은 4구체, 즉 4행시다. 신라 귀족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8구체 또는 10구체로 된 개인 창작의 향가가 나타났다. 10구체 향가는 가장 격조높은 서정시로서, 제9행째의 서두에 감탄구가 있어서 제9행과 제10행에서 시상의 비약적 압축을 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9구째의 서두에 감탄구가 오도록 짜인 형식은 민요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의 지속적인 전개를 숭고하게 보여주다가 끝으로 매듭을 짓는 극히 세련된 형식이다.
향가는 10구체에 이르러서 민요와는 다른 세련된 수사와 투철한 시정신을 구비하였는데, 이는 화랑사회의 이상이나 불교사상의 반영이라고 보인다. 향가는 처음에는 민요의 정착으로 출발하여 격조높고 세련된 개인적인 서정시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향가의 작자로는 화랑과 승려를 비롯하여 지극히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까지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하여 향가는 당시에 상하층이 공유하던 문학부류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향가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격조높은 귀족의 시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향가는 고려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선행문화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신라 귀족문화의 전통을 우선적으로 계승하였으며, 고려의 향가는 이러한 현상의 좋은 예가 된다.
고려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은 균여(均如)이다. 혁련정(赫連挺)이 지은 ≪균여전≫에는 11수의 연작시가 전하는데, 이것은 신라의 불교 가찬(加讚)의 기본 전형을 이루는 것으로서, ≪화엄경 華嚴經≫의 수행신심(修行信心)을 그대로 시화하고 대중화하였다는 점에서 서정성은 오히려 부회되어 있다. 이 밖에 고려의 노래로서 향가계로 볼 수 있는 것은 예종의 <도이장가 悼二將歌>와 정서의 <정과정곡>이다.
12세기 고려 중엽의 무신란(武臣亂)을 고비로 신라문화의 계승자인 문신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향가계의 노래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민요적인 속요가 궁중의 노래로 등장하였다.
속가(俗歌)·별곡(別曲)·장가(長歌) 등으로 불리는 고려속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악학궤범≫·≪악장가사≫·≪시용향악보≫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었다.
하지만 <동동 動動>같은 형식의 노래, 즉 <청산별곡 靑山別曲>·<서경별곡 西京別曲>·<가시리> 등 일련의 민요가 고려시대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음은 그 같은 민요의 형식이 비록 고려 때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적으로 단정하는 근거는 못 된다 하여도, 최소한 그 같은 형식의 노래가 고려시대에 있어 매우 우세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논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시가에 관한 민요는 고려 문학의 백미편이다. 따라서, 시가문학사에 있어서 민속문학이 지배적인 시대가 바로 고려시대이기도 하다. 대구(對句)·반복·병렬구조(竝列構造)·후렴을 비롯한 여음(餘音)의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단순성의 매력 등은 고려속요가 민요임을 증언하고 있다.
신라의 향가가 격조높은 서정시로서 주로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를 추구한 노래라고 한다면, 고려속요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삶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의도가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산별곡>·<서경별곡>·<만전춘 滿殿春>·<雙花店> 등의 속요는 대체로 보아 민요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전 시대의 향가나 뒤에 올 시조에서는 볼 수 없는 발랄하고 율동적인 평민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속요는 부역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 남녀의 슬픔(서경별곡), 살길이 없어 방황하는 유랑민의 고민(청산별곡), 순간적이나마 육감적인 사랑을 바라는 마음(만전춘·쌍화점)을 육감적이고 노골적인 시상으로 나타낸다. 고려속요가 후대 유학자들에 의하여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비판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속요 가운데서도 <동동>은 아주 특이한 작품이다. 우선 그것이 현존하는 시가작품 가운데서 최초로 달거리체[月令體]노래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명백히 송도지사(頌禱之詞), 즉 무엇인가를 기리고 무엇인가를 축도하는 노래라는 점이다. 종교적인 송도와 함께 노래된 서정이 매달매달의 세시풍속을 따라서 자연풍물과 인정의 추이를 펼쳐보이는 작품이다.
고려속요가 평민·서민·유랑민의 문학이라고 하면, 경기체가는 문인·귀족류의 문학이라 하겠다. 경기체가는 이른바 고려속요를 형식적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노래이다. 3음보 후렴을 가진 분련체(分聯體)라는 공통점이 이 사실을 말하여준다.
현재 전하고 있는 경기체가는 총 25편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한림별곡 翰林別曲>을 합작한 고려 고종 때의 여러 유학자, <관동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지은 안축(安軸), <상대별곡 霜臺別曲>을 지은 권근(權近) 등 무신정권 이후에 대두된 사대부 출신의 문인들이 대부분이고, <미타찬 彌陀讚>·<안양찬 安養讚> 등을 지은 기화(己和), <기우목동가 騎牛牧童歌>를 지은 말계지은(末繼智訔)과 같은 승려도 있다.
그러나 승려들의 경기체가의 수용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경기체가의 성격은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나 심미안과 연관하여 이해하여야 한다고 본다. 사대부는 경기체가와 함께 시조를 창조하였으며, 초기 사대부문학 부류에서는 경기체가가 오히려 더 중요한 위치를 지녔다.
사대부는 사물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심성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시조가 심성에 치중하여 사물을 심성화한 것이라면 경기체가는 사물에 치중하여 심성을 사물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기체가는 사물을 열거하고 사람의 감정이나 행동도 ‘……경(景)’이라는 말을 써서 사물처럼 관찰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경기체가는 이렇듯 사대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사대부에 의해서 발전된 일종의 귀족시가로서, 앞서 본 고려가요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시조의 양상 또한 어떻게 바뀌어간다고 하여도 시조를 귀족시가로 보는 견해에 이의가 제기될 수는 없다. 당시 새로운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종래의 시가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념적 요구에 알맞은 시조라는 부류를 마련한 것이다.
즉,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이고 사변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종래의 문학, 특히 고려속요 같은 경박한 서정을 “대저다음부족언(大抵多淫不足言)” 등으로 비판하고 군자의 건전한 시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시조가 발생하였다고 하면, 시조는 고려속요의 반명제(反命題, antithesis)로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인의 시선이 밖[景]에서 안[儒敎的理]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왕조의 시가는 왕조 창업의 송축가(頌祝歌)로 시작된다. 송축가는 악장(樂章)이라고도 하며,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고 정치적 이념을 표상한 노래로 된 궁중의례악(宮中儀禮樂)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의 <문덕곡 文德曲>·<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이 초기 악장의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 건국의 송가이다. 한글이 송포된 뒤 ‘가용국언(歌用國言)’하여 건국의 위업을 노래한 총 125장으로 된 이 노래는 조정의 의식에 쓰인 한글로 된 최초의 국가(國歌)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과 더불어 <용비어천가>의 원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한문가사를 짓고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사실, <용비어천가>의 한 장(章)은 중국 사실과 우리의 사실을 비교하여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記≫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악장은 고려속요나 경기체가의 공통적인 형식인 3음보 분련체를 청산하기는 하였으나 문학적 형식은 정비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 가사문학(歌辭文學)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가사는 심미적 성격보다 주제적 성격이 보다 강조된다는 점에서는 경기체가·악장 등과 같은 성격을 가지나, 4음보이며 연의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는 경기체가와 차이가 있고, 형식이 정비되어 있고 음악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악장과 다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사는 시조와 더불어 조선시대 사대부 시가로서 오랜 생명을 지닐 수 있었다. 가사는 원래 나옹(懶翁)의 <승원가 僧元歌> 같은 불교가사에서 비롯되었으나 곧 사대부 시가로 바뀌었다.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 賞春曲> 같은 가사는 자연미를 심성의 문제와 관련시켜 다룬 사대부 시가의 새로운 방향을 마련하였다.
가사와 함께 조선 전기 문학을 대표하는 분야는 시조였다. 시조의 형식체험은 한국 시가 전체를 일관하는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만큼 시조의 형식원리는 우리의 정서를 융합할 수 있는 체험의 보편성이자 종족의 동일성이다.
한국 시가 사상 오직 시조의 정형만이 시형으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시조의 형식이 한국 시가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하는 종족적 동일성과 가장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시조는 고대 시가의 전통 속에서 그 기원을 두고 중세와 근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우리와 너무나 친숙한 자기동일성의 형식으로 이어온 한국의 전통적 시가이다.
물론, 시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민요의 기본이 되는 2행형식에 한 행을 덧붙이고, 3행째의 첫 음보는 결음절(缺音節)로, 둘째 음보는 과음보(過音步)로 하여 시상의 집약적인 응결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3행의 구조는 10구체 향가 제 9·10행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시조는 10구체 향가처럼 웅장한 노래가 아니며 소박하면서 안정감을 가진다. 그만큼 시조는 사대부 유학자들의 미의식에 적합하도록 형성된 우아하고도 안정감이 있는 시형이다. 시조가 고려 말 이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등장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부류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조가 융성하였던 명종·선조·영조 때는 유교가 융성하였던 시기이다. 고려 말에 싹트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를 풍미한 유교적 이념의 존중 경향은 그 뒤에 와서도 이러한 흐름에 약간의 이탈은 있었다 할지라도 그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주의의 구현은 분명 조선시대 시조 중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제재론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시조에 있어서 동일한 주제가 그 모티프를 어떻게 달리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시조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여러모로 뜻깊은 암시를 준다.
가령 고려 말의 회고가(懷古歌), 조선 때의 창업송영(創業頌詠), 중기의 강호가(江湖歌)·도학가(道學歌)·억군가(憶君歌)·충의가(忠義歌) 등은 서로 다른 모티프의 선택에 따라 그 제재와 계기는 시대를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역시 주제는 유교적 윤리이며, 그리고 주제적인 유교적 이념의 시적 변이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그리고 주세붕(周世鵬)의 <오륜가 五倫歌> 등은 사대부의 공통적인 시적 이상을 보여준 극단적인 실례가 된다. 그러므로 조선 때의 시조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독특한 감성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보다 보편성이 있는 선례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례는 유교경전에서 온 것이거나 아니면 이미 있어온 한시문(漢詩文) 내지 고사 등의 형태를 취한 것이기를 요구하였다.
이러하듯 시조에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도(道)는 근간(根幹)이요, 문(文)은 지엽(枝葉)이라는 이른바 ‘도선문후(道先文後)’라는 관점이며, 이것이 조선시대 시인들의 시조의 방법이며 인식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황·이이와 더불어 맹사성(孟思誠)·이현보(李賢輔) 등의 시세계가 유교적인 안빈낙도나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 소재는 자연이나 그 사상은 유교라고 한다면, 정철(鄭澈)·윤선도(尹善道) 등 전부는 아니지만 그 일부분의 시조가 반대로 구체적인 현실감각을 보여주고 있음은 주목되는 바이다.
그만큼 자연과의 동화를 통해서 윤리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편, 자연에 머무르지 못하고 정계에의 복위를 염원하는 연군(戀君)의 노래도 불렀다.
송순(宋純)은 사대부시인의 한 사람이지만 그 뒤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루어 조선 후기 문학에의 길을 열었다. 한편, 황진이(黃眞伊) 같은 기녀들이 시조시인으로 등장하면서 현실감각을 긍정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것 또한 조선 후기 문학과 맥락을 같이한다.
조선시대의 유가적 청교주의(淸敎主義)가 고려속요의 인간적 성정에 대한 강렬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하면, 반대로 조선 후기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평민가사와 사설시조는 유가적 청교주의의 반발로 나타났다는 것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평민가사와 사설시조는 선행하는 양반가사나 유학자 시조의 변형이 아니라 선행하는 양반가사나 유학자 시조와 대립되는 현실주의적 사고의 지속이며 그 변용이다.
평민가사는 일반적으로 길어졌으며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가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연행가 燕行歌>와 같은 기행가사, <북천가 北遷歌>·<만언사 萬言詞> 등의 유배가사 또한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함께 농촌 사대부 부녀들의 규방가사, 평민의 해학적 가사 등도 성행하여서 가사의 영역은 더욱 확대되었다. 평민가사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부가 愚夫歌>·<용부가 庸婦歌> 등과 같은 해학적인 작품이다.
시조에서도 평민가객의 참여가 일반화되었으며, 김천택(金天澤)이 ≪청구영언≫을 편찬하는 등 여러 시조집이 평민가객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조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사설시조이다.
평시조의 전아한 형식을 파괴하고 보다 자유로운 율격을 지닌 사설시조는 평민의 생활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윤리적 규범을 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록, 사설시조가 단명하였고 산문문학의 발달과 그 세력 때문에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그것은 다음에 올 자유시의 기초를 닦게 하여준 내적 배경임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설시조의 배경이 되는 실학정신이 근대에로의 전환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소멸되었던 것과 같이, 사설시조 또한 산문화가 시의식으로 다듬어지지 못하고 개화기 시가에 의하여 부정된 것이다.
19세기 말에 서구의 충격과 외세의 침략이 비롯되면서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개항 이후 밀려드는 서구문화의 이입과 함께 빚어진 신·구의 갈등적 상황에서 개화기 시가는 형성되었다. 이렇듯 개화기는 심각한 역사적 격동기이었으므로 이러한 단계의 시가는 심미적 차원에서보다 오히려 그 시대적 성격이 무엇보다 강조되었다.
≪독립신문≫·≪대한매일신보≫·≪경향신문≫·≪대한민보≫ 등에 실린 애국독립가·개화가사·창가·시조·한시·신체시 등 개화기 시가는 주로 공적인 감정, 이른바 개화의식의 고양이라는 시대정신을 작품의 현실성에 우선하였고, 그것이 3·4조 내지 4·4조와 같은 이미 있어온 관습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만큼 3·4조 내지 4·4조 리듬의 반복은 시대정신과 사상을 가창하기에 가장 알맞은 그릇인 셈이다.
그 그릇을 통하여 개화기시가는 자주독립이나 문명개화, 일본침략에 대한 저항 등과 같은 개화의식을 고양하고 그것을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다. 그러기에 개화기 시가는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신문≫에 실린 <애국가>·<독립가> 등을 비롯하여 <동심가>·<애민가>·<성절송축가> 등 애국독립가는 주로 자주독립·애국(충군)·단결(동심·합심·일심)·교육·문명개화·부국강병 등을 주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의식은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고 구호적인 추상성으로 착색되어 있다. 그만큼 직설적이고 웅변적이다.
비록, 애국독립가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제로 나타나 있다 하여도 그것은 내면의 필연성에서 오는 시인의 표현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시대적 요청에서 제작된 것이며, 개화기의 정신적 분위기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부응이었다.
따라서, 이미 있어온 감정의 공적 반응양식인 4·4조의 2행련대구(二行聯對句)에 따라 노래되었고 역시 시적 표현과는 거리가 먼 서술조를 면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개화가사·창가·신체시 역시 애국독립가 유형과 같이 한결같이 드러내주고 있는 특징은 시상이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고 야망과 저항, 그리고 계몽 등이 구호적인 추상성으로 일관하여 자연이나 개인적 생활에서 우러난 예술적 정서의 형상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개화가사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4·4조의 음수율로 된 600여 편의 작품과 그 밖의 개인문집에 있는 개화기에 쓰여진 가사들이다. 시평(時評) 및 풍자성을 띤 기사에 이르기까지 4·4조의 가사형식으로 된 ‘사회등가사(社會燈歌辭)’에 나오는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그 추종세력에 대한 규탄과 저항은
≪독립신문≫의 가사와 다른 내용을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형식상으로는
≪독립신문≫의 애국독립가와 다름이 없다.
이 점은 창가도 예외는 아니다. 창가는 애국독립가 유형에서 분화한 것으로 가창을 전제로 한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 분련법에서 애국독립가의 2행련에서 4행련으로 변화한 것이 창가의 일반적인 성격이며, 4·4조의 음수율이 7·5조, 8·5조, 6·5조를 주축으로 악보가 붙여져 있는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에 의하여 7·5조가 시도되었을 때 실은 7·5조가 4·4조와 같이 일반대중의 삶의 체험에서 솟아나오는 자발적인 리듬은 아니었다.
창가의 음수율은 대부분 음절수가 고정되어 있다는 일본시의 수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하듯 최남선이 시도한 7·5조는 그의 8·5조, 6·5조 등과 같이 밖에서 온 것임은 그 뒤 그것이 하나의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너무나 단기적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최남선의 이러한 시도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과 같이 애국독립가나 개화가사에 비하여 획기적이고도 전환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최남선 자신도 7·5조, 8·5조, 6·5조의 창가형식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시조를 선택하였다. ‘조선심(朝鮮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주의를 강조했던 그가 시조에 귀의하기 전에 7·5조의 시인이었다는 점은 지극히 시사적이다.
개화기 시가는 이와 같이 개화기의 시대적 요청에 충실한 형태인 이상, 그 감각은 개인적이고 반사회적인 현실감각이 아니라 기성적이고 공적인 경험으로 일관되어 있다.
애국독립가·개화가사·창가가 보여준 현실은 그 시대를 일관하는 명제나 구호, 또는 의식적인 문학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뒤 신체시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신체시는 근대정신의 소산으로 그 주창 또한 전통과 인습을 타파하고 서구문화를 수용하려는 시대적 요청의 반영이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구작삼편 舊作三篇>은
바로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 시가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이 시상이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고, ‘산’과 ‘바다’의 객관적 등가물(等價物)은 조선주의의 고취라는 미리 정해진 선험(先驗)에 압도당하고 있다.
민족과 국토에 바치는 찬가가 잠재적인 것보다 먼저 외부의 관념의 자극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단적인 예증이다. 따라서, 최남선의 시의 관심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그 밑바닥을 밝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완결의 미학이었으며, 그 내용과 방법은 기성적인 표현논리에 의하여 추상적인 개념 내지 장르의식의 결여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시에 근대적이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없는 논리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1920년대의 시는 개화기 시가와 비교하여볼 때 그 방법과 인식의 관점에 상당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 이전의 계몽적 교훈주의와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의 극복인 것이다. 개화기 시가의 경우 그 주류를 이루는 골격은 어디까지나 개체적인 현실의 구조가 아니라 관념적이며 일반적이며 공적인 구조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시는 개화기 시가와는 다르게 현실을 응시하는 개체적인 눈[眼]을 보여준다. 자아의 발견 및 강조, 에로스적 충동, 그리고 과거에의 회귀와 같은 도피의 모티프 등 1920년대 시의 특징을 이루는 이러한 구체의 눈이 낭만적인 형식으로 나타난 것은 우연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낭만적인 움직임은 19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현상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단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학지광 學之光≫·≪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청춘 靑春≫ 등에 실린 최남선·이광수(李光洙)·현상윤(玄相允)·최승구(崔承九) 등의 1910년대의 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소수에 그쳤고, 또한 몇몇 사람의 산발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시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이들은 일단 근대시의 전사(前史)에 포함시키는 것이 상례이다.
1910년대의 이러한 낭만적 움직임처럼 극소수에 의한 산발적인 활동이 아니라, 다양하고도 집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이후, 그것도 192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10년대 자유시형은 근대시의 대두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조짐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개화기 시가류의 시풍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한편으로는 관념적 형식에 집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여 혼미와 저조의 양상을 보이던 이 시대는 그 이전의 신체시를 전환시켜 한걸음 근대시로 접근시킨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1910년대 시에 있어서 낭만적 형식의 전환은 그것이 비록 부분적인 것에 그쳤다고 할지라도 1920년대 근대 시단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근대시단의 기반을 결과적으로 마련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1920년대 자유시형 역시 1910년대 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시는 아니다. 그것은 일본을 거쳐서 간접 수입된 서구시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개지역인 일본의 근대시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김억(金億)·황석우(黃錫禹)·주요한(朱耀翰)·박영희(朴英熙)·박종화(朴種和) 등의 초기시에 뚜렷이 드러난 바가 있다.
이러하듯 초기 자유시형은 우리의 형식체험으로 생활화되지 않았다. 그만큼 1920년대 초의 자유시형은 한국시의 내적 배경으로서 전통적인 경험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자유시’에서 ‘우리’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사설시조와 같은 것이다. 사설시조에서는 우리 삶의 형식으로서 자유시형의 변화를 스스로 창조하였고, 1920년대 초의 자유시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자유시형은 처음부터 갈등과 진통을 심각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서구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전통적 경험을 외면할 수 없고, 또한 서구적 경험과의 완전한 동일화도 불가능한 갈등, 이른바 두 가지 문화 속에 살면서도 어느 문화에도 동일화할 수 없었던 소속감의 상실을 1920년대 초의 시는 전체로 체험하고 있었다. 1920년대 시에 자주 나오는 슬픔·눈물·꿈·죽음 등 자아의 강조 및 노출은 소속감의 상실과 그 회복을 지향하는 낭만적 전략이라고 보아지는 것이다.
주요한의 <불놀이>를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최초의 반응은 지나친 감정의 용솟음이다. 감정의 용솟음은 이광수의 이른바 자유연애론에 대응됨과 동시에 1920년대 시의 공통점이다.
홍사용(洪思容)의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박종화의 <밀실로 돌아가다>, 박영희의 <유령의 나라> 등의 시에 나타난 공통적인 감정은 한결같이 감정의 용솟음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이전의 시가에서 매몰되었던 자아의 발견 및 그 감정의 한 반영이라고 보아진다.
그러기에 <불놀이>를 비롯한 1920년대 시의 지나친 감정의 용솟음은 ‘감상적 낭만주의’인 점에서는 오히려 한국시의 근대적 시발점을 알리는 봉화가 되어준다. 사실 1920년대 시에 있어서 지나친 감정의 용솟음 및 감정의 고조된 소리의 시가 앞에 본 것처럼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조≫·≪페허≫·≪창조≫·≪장미촌≫·≪금성≫ 등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공통적인 발상이며 절규이다.
1920년대 초기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낭만적이고 개아적(個我的)인 세계가 1920년대 중반을 계기로 자유시건 경향시건 그 상위를 넘어서 현실적이고 상호 텍스트성을 기반하는 공적(公的)인 세계로 바뀌면서 시가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은 중요한 변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정치를 비롯한 시대와 사회의 모든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한국시는 1920년대 초 낭만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표현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paradigm)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만큼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한국시는 현실적 상상력으로 착색된 모방의 시 일변도였다.
시조부흥 등 전통적인 형식을 통한 자기회복을 도모한 민족주의 계열의 시는 물론, 김석송·이상화·김동환(金東煥) 등의 경향파 시인들은 말할 것 없고, 새로 등장한 임화(林和)·박세영(朴世永)·박팔량(朴八陽)·권환(權煥)·이찬(李燦)·박아지(朴芽枝)·김창술(金昌述) 등의 프로시(pro詩)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낭만적 상상력에서 현실적 상상력으로의 변모는 이 시기의 공통점이다.
프로시의 경우,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운동의 볼셰비키화로 전환한 이래 리얼리즘 성향의 시는 종래의 경향적인 성격에서 계급적인 시각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정치구호에 가까운 아지 프로시들이 그 후 문단의 지배적인 담론(談論)으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객관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기보다 정치적 구호의 직설적 번역이나 극단적인 도식성과 관념성에 빠진 이른바 ‘뼈다귀시’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특히, 시조가 전통적 시의 형식으로 자각되고 민요의 가치가 역설되는 한편 ‘조선심’·‘조선혼’을 강조한 시조부응운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은 일제의 지배 아래 점차 쇠퇴해가는 전통적 문화를 재인식하고 되살리자는 문화운동의 일부분이었고, 또한 카프계열의 문학인들이 주장한 ‘프로시’에 대한 민족문학의 방향을 내세우자고 한 움직임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소월(金素月)·한용운(韓龍雲)의 시에 나오는 낭만적 반어가 근대지향적 요소인 신선한 비애감 및 여성지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국근대시의 변화를 검토할 때 한 단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나친 정론성 일변도로 나아갔던 당시 프로시에 대한 반명제로서 의식적인 심미의식의 발로와 시의 자율성에 대한 자각이 몇 사람의 의욕적인 시인에 의하여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은 한국시사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 후반 이래의 ‘카프’ 중심의 리얼리즘 문학이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상대적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1935년 카프 지도부가 정식으로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1930년대 후반은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카프 내의 자성과 변모의 기운이 발아한 것은 물론 프로문학의 압도적인 위세에 눌려 있던 여타의 문학적 경향들이 전경화(前景化)되면서 시의 양상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서 내면화 심리주의 성향을 지향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만주사변(1931)에서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확대된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가중된 우리 민족에 대한 온갖 수탈과 정치적 억압, 그리고 이에 따른 문학에 대한 탄압은 1930년대 문학의 성격을 특징 짓는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세계로부터의 격리와 주관성의 중시, 즉 내면화의 간접화 방식이다. 내면으로 후퇴함으로써 오히려 외면의 실상(허위)을 밝히는 기법이다. 그리하여 30년대 시인들은 역사와 현실을 정면에서 다루기 어려워 풍자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거나 기교와 형식문제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문학을 ‘부조화의 시편’이라고 정의한 것은 임화이고, ‘위장된 메타포의 문학’이라고 지적한 것은 김기림(金起林)이다.
직접 카프에 소속되어 있었고 계급의식에 기초한 시를 발표했던 임화·권환·박세영·이찬 등의 프로시조차 그 이전과는 다른 내면화 혹은 주관화의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은 물론, 그 어느 때보다 시의 순수성을 강조한 ‘시문학파(詩文學派)’의 심미적 탐구나 기법의 혁신과 시형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상(李箱) 등의 심리적 경향, 그리고 김기림 등 ‘구인회(九人會)’ 중심의 모더니즘 성향조차 동일한 패턴에 속한다.
1930년대 후기는 이들의 모더니즘 성향이 서정주(徐廷柱)·오장환(吳章煥)·유치환(柳致環) 등의 생명파와 백석(白石)·이용악(李庸岳) 등의 현실 탐구와 함께 한국현대시사상 크게 평가되는 시기이다.
다양한 시 편력 과정 중에서 임화의 1930년대 시는 서사 계열의 시와 감정시 계열의 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카프 진영의 대표적 시인 즉, 리얼리즘 시인으로서의 임화이고, 다른 하나는 서정시인로서의 임화이다. <네거리의 순이(順伊)>·<우리 오빠와 화로(火爐)>·<어머니> 등 이른바 ‘순이(順伊)’계열의 시편들은 김기진(金基鎭)에 의해 ‘단편서사시’라 명명된 바 있는 서사 계열의 작품이다.
단편서사시란 극적 구성방법과 서간체 형식을 통한 계급적 전망을 노래한 시다. 그런 만큼 화자나 청자를 여성으로 설정하여 여성적 담론 형식을 채택한 것이 특색이다.
<현해탄> 계열의 시편은 그 동안 프로시에서 외면되어 온 서정성을 회복하려는 자기 반성이라고 할 만하다. <향수>·<눈물의 해협(海峽)> 등에 와서 우리는 리얼리스트 임화와는 전혀 다른 서정시인 임화를 보게 된다.
임화·박세영 등과 마찬가지로 한때 프로문학에 동조했던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崗) 또한 이념시의 반명제로 내면을 노래하였다. 신석초는 서구의 상징시와 동양의 고전을 함께 저울질하면서 <바라춤>과 같은 새로운 감각의 시를 썼고, 윤곤강은 이념시의 길이 막히자 현실에 대한 자신의 울분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였다. ≪대지 大地≫(1937)·≪만가 輓歌≫(1938) 등의 시집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찬의 1930년대 후반의 시편(<대망>(1937))이나 권환의 1930년대 후기 시집 ≪윤리≫·≪자화상≫에서 드러난 세계 역시 감상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로 나타난 것은 당시 시단 전체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김동환의 시에 등장한 잦은 <꽃> 또한 이제 이데올기로 물든 문명의 ‘꽃’(≪三人詩歌集≫(1929))이 아니라 약산 영대와 산과 들에 핀 고향의 ‘진달래’(≪海棠花≫(1942))다.
뭐니뭐니 해도 1920년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한 자유시와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사회주의 시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서 출발한 움직임은 ‘시문학파’와 모더니즘의 시다. 1930년대 초 ‘시문학파’의 움직임이 보여주듯이 계급주의 문학과 대타적인 입장에서 시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미적 자율성을 강조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시문학파’가 지향한 시형식 및 언어의 세련, 그리고 심미적 탐구는 1920년대 시의 감상주의가 외면했던 한국시의 새로운 ‘서부(西部)’의 개척만이 아니라, 지나친 정치성·목적의식 일변도의 당시 프로시와의 직접적 대립에서 비롯한다.
슬픔이나 눈물을 ‘촉기(燭氣)’로 극복한 김영랑(金永郞)의 시작(詩作)을 비롯하여 박용철(朴龍喆)의 체험의 용해와 ‘변용(變容)’, 정지용(鄭芝溶)의 시의 연금술 내지 ‘위의(威儀)’ 등 이미지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정지용의 시방법은 발상이나 기교가 1920년대 시가 생각한 바와 같은 감정의 무절제한 유로나 영감의 소산처럼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니다. 1920년대 시의 지나친 감정의 용솟음에 대한 지양이며 그에 대한 철저한 통어(統御)이다.
<선취 船醉>·<다리아 Dahila>·<바다>·<홍춘 紅椿> 등 ≪시문학≫지에 실린 시편들은 그만큼 1920년대 시인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지적할 수 있는 탄식, 슬픔 등 비이성적인 감정의 과격한 반응과 관념에 반기를 들고 감정의 지적 절제로서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한 ‘시의 위의(威儀)’를 실천한 작품이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어 불리는 일련의 실험적 경향들이 나타난다. ‘지적 절제’로서 시를 구제한 정지용을 비롯하여 김기림·김광균(金光均)·신석정(辛夕汀)·장서언(張瑞彦)·장만영(張萬榮) 등의 이미지즘, 이상(李箱)과 그를 따른 ≪삼사문학 三四文學≫의 시를 주축으로 하는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과 유사성을 가진 시, 또한 서정주의 초기 시편들은 모더니즘 범위 안에 묶을 수 있다.
이들은 시를 대하는 방법과 태도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서구시의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면서 한국시의 주지적(主知的)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김광균의 시에서 사물의 인상을 구상화하는 심상의 언어를 사용함과 함께 그렇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회화성이 그렇고, 김기림의 시에서 우리는 형이상적 의장 및 유럽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게 되는 것도 그렇다.
이상의 전위적인 실험이나 강렬한 생명의 약동을 강렬한 관능과 대담한 리얼리즘을 실천한 생명파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생명파의 경우, 모더니스트 시인들이 도시와 현대문명을 강조하고 주지적인 실험적 경향에 몰두함으로써 만들어낸 시세계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은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고 형상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김광균은 또하나의 이미지스트(imagist)·모더니즘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마치 한 폭의 산뜻한 그림 앞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너무나 선명하리만큼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다.
김기림의 시는 첫 작품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부터 ‘새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다. 특히 시집 ≪태양의 풍속≫이나 ≪기상도≫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과 심취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서구 지향, 문명 지향이 그가 생각한 모더니즘임은 물론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노래가 아니라 인식이다.
시는 스스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짓는 것이다.
1920년대 전반기의 시가 감상에 집착하였을 때, 그는 단연코 시의 건강성으로서 ‘명징한 지성’을 강조하였다. 모더니즘의 주창자, 또 옹호자로서 그가 거부하고 부정한 것은 이른바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이었다. 이미지를 통한 조소성, 관념의 감각화 등 시의 건강성을 실천한 시가 다름아닌 ≪태양의 풍속≫ 시편이며, 장시 ≪기상도≫이다.
1930년경에 <12월 12일>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등장한 이상은 <오감도 烏瞰圖>·<이런 시(詩)>·<거울>·<꽃나무>·<지비 紙碑> 등 새로운 형태의 시를 써서 당시 시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기존의 시문법과 관습에 대한 반칙이라는 점에서 그 일탈의 정도가 매우 강력하고 급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그 누구보다 전위적이다. 다다이즘·초현실주의·형식주의 등을 섞은 첨예한 모더니즘의 시를 한꺼번에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그는 형태 파괴자요 새로운 형태나 문체의 실험자다.
인간의 정감을 경시하고 감각적 표현에 치중하던 모더니즘을 극복하면서 나타난 일군의 시들은 ≪시원≫·≪시인부락≫·≪시건설≫·≪낭만≫·≪자오선≫·≪맥≫·≪시향≫ 등을 통한 백석·서정주·유치환·김상용(金尙鎔)·김광섭(金珖燮)의 시편들이다.
백석은 시인과 자연이 하나라는 신화적 인식을 통하여 독특한 토착적인 공간형식을 작품의 구조로 삼았다. 시적 대상은 한결같이 고향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등 토박의 의식으로 점철된 토착적인 민속 삶이다.
시집 ≪사슴≫에 있는 <가즈랑집>이나 <여우난골족> 등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고향 주변에 흩어져 있는 토속성의 전승이나 속신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는 평북지방의 독특한 방언을 구사하여 향토적인 색채가 짙은 소리 울림이 그 특색이다.
제재만 토착적인 데서 취한 것이 아니라 가락과 사설 또한 토착적이다. 그만큼 백석의 시가 시일 수 있는 가장 주된 시성(詩性)은 일상언어 중 토속성과 서민성 그리고 지역성을 언표화하는 사투리에 있었다.
서민적인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이용악도 백석과 비슷하나, 그가 백석과 다른 점은 리얼리스틱한 현실 속의 삶을 다루고 있는 점이다. 시집 ≪분수령≫·≪낡은 집≫으로 대표되는 그의 전반기의 시는 주로 민족 현실과 빈궁의식, 그에 대한 당시 조선 민족의 절망적인 반응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시집 ≪오랑캐 꽃≫의 시편들은 그 이전에 비하여 현실(외면) 보다 개아적인 세계(내면), 환유의 원리보다 은유의 원리가 강조된다. ≪오랑캐 꽃≫에 실린 시편들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그가 절필하고 귀향하기까지 씌어진 작품이다. 이렇듯 이용악 역시 당대 지배적인 담론인 모더니즘 성향의 내면지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생명파’ 시는 주로 1936년 창간된 ≪시인부락≫ 동인들, 서정주·함형수(咸亨洙) 등과 ≪생리≫라는 동인지의 유치환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생명파’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도시문명 보다는 생명의 본질과 고독, 고뇌 등을 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그들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과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 것은 물론 김영랑·박용철 등 순수 서정주의와도 성격을 달리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고뇌를 육성 그대로 표출하면서 약동하는 생명의 상태를 통해 인간원형을 탐구하는 것이다. 즉 생명파문학은 모더니즘의 주지적 방법이 생명성이 결여된 형태이며 시문학파의 시도 기교주의에 매몰된 것으로 파악한 후에 시도된 것이다.
‘생명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시야말로 참된 시이며 의식적 인위적 기교에 의한 시작은 시가 아니다(≪生命의 書≫ 序文)’고 강조한 것은 유치환이다.
서정주의 경우, ‘고열한 생명상태의 표백’은 무엇보다 관능과 허무의 황홀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보들레르(Baudelaire,C.P.) 등 프랑스의 퇴폐주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집 ≪화사집 花蛇集≫은 관능적, 육체적 정열이 낳은 것이다. 천형의 병을 앓는 문둥이를 다룬 시가 <문둥이>라면 종신형을 사는 죄수를 다룬 시는 <옥야 獄夜>이다. 이렇듯 초기 서정주에 있어서 성과 원죄는 야성적인 심미의 대상이다. 아니, 치열한 생명의 불길 그 자체다. 기독교 신화마저 낯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함형수는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에서 죽음을 넘어선 삶의 의지를 노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 ㅅ 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1·2행과 같이 작중화자 ‘나’는 자신의 무덤에 차가운 비석이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고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말한다. 차가운 비석을 의미한다고 하면 해바라기는 항상 태양을 향하여 환한 얼굴을 돌리는 정열의 상징이다.
오장환(吳章煥)은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한 이래 주로 ≪시인부락≫· ≪자오선≫의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하였다. <성벽>과 <헌사 獻詞>로 대표되는, 비애와 퇴폐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초기의 모더니즘 지향의 시가 <나 사는 곳>·<병든 서울>과 같은 리얼리즘의 세계로 귀의한 것은, 자기 동일성의 열망이자 자기 회복인 것이다. 이러한 시적 변모는 과거로부터의 전승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탈향 지향성으로부터 다시 고향에 귀의하는 귀향 의지라고 할 만하다.
유치환의 경우, <깃발>과 <그리움>으로 대표되는 감정의 시편과 <바위>·<생명의 서(書)>로 대표되는 의지의 시편은 처음부터 동행하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려는 비정의 세계 못지 않게 그리움의 세계, 애련의 정서가 그 바탕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의지와 감정은 적어도 청마(靑馬:유치환)에게 있어서는 서로 다른 측면이 아니라 결국 하나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애정이 간절할수록 반생명적인 것을 노래해야 했고, 생명을 열애하기 위하여 도리어 자기학대, 자기모순의 과정이 청마의 이른바 허무의지의 진면목이었던 셈이다.
노천명(盧天命)도 <장날>·<남사당> 등의 시가 보여주듯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곳의 풍물과 관련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전원에 대한 애착과 고향상실성은 이 시대 시인들의 정신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김광섭과 함께 이 시기에 활동한 김상용·장만영·김현승(金顯承) 등의 시 역시 공통점은 상실을 통한 고향회복이다.
자연파(청록파)는 이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삶의 고뇌 자체를 노래하기 보다는 고뇌에 찬 세계를 벗어나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물론 그것은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 속에만 나타나는 이상향이었다. 그 뒤 그들의 시집 이름이 된 ≪청록집 靑鹿集≫, 즉 푸른 사슴이라는 것 부터가 실재하지 않는 상상적 동물이다. 이들의 관심은 자연이었다.
박목월(朴木月)이나 조지훈(趙芝薰)의 자연은 상징이나 환유적 삶의 한 외형이라고 하면 박두진의 자연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만큼 박목월의 내면화된 자연은 서정적인 긴장으로 이루어졌고, 조지훈에게서는 선적인 분위기와 전통적인 것에의 향수가 짙게 풍겼고 박두진(朴斗鎭)은 성서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모든 갈등이 해소된 자연의 세계를 희구하고 있었다.
성서는 박두진 시에 있어서 그 자체로 종교적 텍스트이고 문학적 텍스트이다. 또한 역사적 텍스트이다. 그러나 ‘청록파’의 진정한 활동은 광복 이후가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강점으로 시작된 대륙침략이 1939년에 이르러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그들의 식민지 정책은 더욱 가혹하여 갔다. 강력한 전시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철저한 국어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결과 1941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같은 해 ≪인문평론≫·≪문장≫도 폐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사실상 한국시는 일제의 탄압 아래 완전히 중단되어버렸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육사(李陸史)와 윤동주(尹東柱)는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시를 씀으로써 마침내 수난을 당하고 만다. 한용운(韓龍雲)이 불교적 바탕 위에서 시를 썼다고 하면 이육사는 유교적 교양을 토대로 하여 시를 쓰면서 거기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기풍의 강렬한 상황의식을 담았다.
<광야 廣野>·<절정 絶頂> 등 이육사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억압되고 축소된 당시의 한계적인 상황하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려는 강렬한 초극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광야>에서 창세기적인 신화, 개벽신화에 기대어서 민족의 대지 혹은 민족이라는 대지 그 자체가 재생되기를 희구하고 있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숨막히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슬픈 천명’의 시인 윤동주는 어두운 시대에 처해서도 자신의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 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그러한 내면의지와 시대정신은 윤동주 사후에 출판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간도 출신인 그는 날카로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던 시인이기 때문에 이육사의 경우처럼 흔히 저항시인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가 관심을 기울여 탐구한 주제는 부단한 자아성찰에 의한 윤리적·심미적 자기완성이었다.
광복 후 한국시 50년은 넓게는 분단의 소재사요, 좁게는 6·25전쟁의 소재사다. 남북분단의 실마리를 1945년 8·15광복에서 찾는다면 이의 줄거리를 6·25전쟁에서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분단의 양분적 현상과 그로 인한 6·25전쟁체험으로 해서 한국사회와 문화의 총체적 변혁에 끼친 영향은 그만큼 큰 것이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총체적 변혁은 격동의 사회와 문화의 변혁으로 경험되면서 한국시에도 그것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시는 다른 장르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총체적 변혁과 발맞추어 왔다.
분단의 이념적 양분화 현상과 그로 인한 이념적 속박은 오늘날 한국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문학적 모티브의 하나다. 분단과 대립이 계속되는 한, 시에 나오는 주제는 그 새로운 시대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극복이라는 절대 명제와 그 여파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시 또한 분단의 서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광복 직후는 시의 시대가 아니라, 비시(非詩)의 시대, 아니 정치적 혼란과 파쟁의 시대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해방의 감격 때문에 주관적 감정이 앞서서 자기 체험을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시적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좌우의 격렬한 대립, 이념과 순수의 와중, 거기서 시인이라 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만큼 시의 심미적 성격보다 이념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점은 중앙문화협회에서 나온 ≪해방기념시집 解放紀念詩集≫이나 조선문학가동맹의 ≪3·1기념시집≫의 시도 마찬가지다. 좌우의 상위를 넘어서서 대부분의 시가 해방의 감격,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새조선의 건설, 계급의식의 고취 등 감격과 희망, 그리고 선동의 언어로 얼룩져 있었다.
더구나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시인일수록 그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성으로 해서 공식성과 의도의 노출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 이들 시의 일반적 특징이다.
3인칭 대명사가 ‘나’ 또는 ‘우리’의 1인칭으로 바뀌고 시와 시인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시와 시인이 분리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성에 맞서 시의 독자성을 내세운 것은 박두진·박목월·조지훈의 ≪청록집 靑鹿集≫에 와서다. 이어 모윤숙(毛允淑)의 <옥비녀>, 유치환의 <생명의 서>, 서정주의 <귀촉도>, 김용호(金容浩)의 <해마다 피는 꽃> 등 시집이 나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시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가운데 하나는 전쟁의 충격 앞에서 전쟁의 허무와 비극성을 노래하고 그것을 통한 인간성으로의 고양이다.
전쟁의 극한상황을 직접 다룬 이영순(李永純)의 ≪延禧高地 연희고지≫, 유치환의 <보병(步兵)과 더불어>, 조지훈의 <역사 앞에서>나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에게 촛점을 맞춤으로서 전쟁의 참상과 비극성을 노래한 구상(具常)의 <초토(焦土)의 시(詩)>, 전쟁의 파괴력과 후유증을 또 다른 시각에서 다룬 전봉건(全鳳健)의 <풍선기 風船期> 등은 각각 그 수법이나 시적 관점의 상위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전쟁을 겪고 난 인간의 각성과 최악의 조건 하에서 인내와 사랑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용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상은 <초토의 시>를 통하여 전쟁의 참상과 함께 비극적인 전쟁에 대하여 항변하였고, 그 뒤 박봉우(朴鳳宇)와 신동엽(申東曄)은 <휴전선>과 <진달래 산천>에서 분단의 피맺힌 한과 아픔을 ‘휴전선’과 ‘진달래’로 노래하였다.
이런 점에서 조향(趙鄕)·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김규동(金奎東) 등 ≪후반기 後半期≫ 동인들의 모더니즘 지향 역시 전쟁에 의해 막힌 의식의 심층적 탐색이라는 점에서 6·25전쟁의 체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울한 도시적 서정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에서 노래한 조병화(趙炳華)도 마찬가지다.
6·25전쟁 이후 군사적, 경제적 지원체제가 촉매가 되어 서구시와 접촉하게 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서구적인 경험을 통하여 ≪후반기≫ 동인들은 종래의 전통적 서정시와 이데올로기 시에 반기를 들고 주지적·감각적 기법 등 다양한 방법적 실험을 통해 시의 영역을 내면으로 확대해 나갔다.
한국시의 서정적 자각이 내면의식의 추구로 전환된 것은 전후 한국시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특색으로 지적된다. 물론 이러한 내면에의 전환은 역사적으로 반드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계문학적인 성격을 띤 쉬르레알리즘의 물결은 1930년대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 시인들은 이를 계승하면서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발전시켰고, 그 대표적 시인이 김현승(金顯承)·김춘수(金春洙)·송욱(宋稶)·전봉건·신동집(申曈集)·김종삼(金宗三)·문덕수(文德守)·김광림(金光林)·성찬경(成贊慶) 등이다.
문덕수가 시방법에 있어서 쉬르레알리즘과 가까웠다는 점과 신동집, 성찬경의 경우 토마스(Thomas,D.M.)와 연관성을 갖되 특히 신동집이 그 카멜레온적 색소 중에서 영미의 이미지즘에 보다 많이 염색되었다는 점, 그리고 김춘수가 릴케(Rilke,R.M.)의 후기시와 그 친근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1950년대 시가 전후비평을 보여준 것처럼 서구적 모더니즘으로 경도된 것은 또 하나의 1950년대 시가 갖는 역사적 국면이다.
그만큼 1950년대에 등장한 시인의 경우 대개가 모더니즘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서구적 모더니즘에 대한 자기반성은 다름 아닌 이동주(李東柱)·정한모(鄭漢模)·김윤성(金潤成)·김관식(金冠植)·박용래(朴龍來)·한성기(韓性祺)·이형기(李炯基)·홍윤숙(洪允淑)·김남조(金南祚)·박재삼(朴在森)·구자운(具滋雲)·박성룡(朴成龍)·천상병(千祥炳)·박희진(朴喜璡)·함동선(咸東鮮)·조영서(曹永瑞)·조병철(曹秉喆)·허영자(許英子) 등이 보여준 1950년대의 시다.
전통적 서정을 통한 자기회복의 움직임은 1950년대 시가 거둔 또 하나의 성과다. 그리고 이것은 1930년대의 ‘시문학파’와 앞 세대의 ‘청록파’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문화적 각성과 전통의식의 구체화이다.
‘청록파’나 미당의 시형과 서정은 단순하고 소극적인 서정과 시형의 전통성으로 얘기되기 쉽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서정과 시형은 외형 아닌 시적 발상의 구조가 대상이 되어 준다.
청록파나 미당의 시는 감각이 감상을 압도하고 있다. 감상이 자연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시조 이래의 자연 서정시의 오랜 전통이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자연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1950년대 시인에 와서 청록파나 미당의 초기시와는 다른 차원으로 적극적으로 자연을 쇄신한다. 자연은 삶의 현실, 삶의 현장 그 자체가 된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서정은 전후 물질적 결핍과 실의의 시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시작되는 1960년대는 무엇보다 정치적 억압과 불안의 시대다. 이 시대는 분명 시의 시대라기보다 산문의 시대, 아니 물량화의 시대였고, 경제성장의 시대였다.
이 더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이룩된 경제성장의 산물인 전파매체의 급격한 신장, 팝송 디스크의 범람과 FM방송의 보편화, 직접, 간접의 각종 스포츠의 산업주의 선풍, 그리고 사치성 소비재 산업과 레저 산업의 거대화는 전례없는 현상으로서 문학에 상품화 내지 물량화를 드러내었다.
거기다 정치와 사회가 국민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회현실에 관심을 가진 시와 사회현실과 관계 없이 시의 자율성을 옹호한 시 모두 다같이 산문의 시대, 물량화의 시대 속에서 비인간화해 가고 있는 현실의 이모저모를 헤아리면서 아울러 그 비인간화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사화집≫·≪현대시≫·≪신춘시≫ 동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은 4·19혁명을 전후하여 크게 고조되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김수영(金洙暎)의 <시여, 침을 뱉아라>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격앙된 비판정신에서 그 하나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분열된 상황을 온몸으로 끈덕지게 밀고 나간 대표적 시인은 김수영이다. 그는 시를 통하여 삶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거부와 저항의 포즈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가 내세운 최대의 시적 주제는 자유였다. <거대한 뿌리>·<말>·<풀> 등에 그러한 자유의 명제가 집약되어 있었다.
그의 시가 그 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상실과 회복의 역설적 인식에 있었다. 그 인식을 통하여 시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
반대로 김춘수의 ‘무의미 시’ 또한 시를 의미차원과 존재차원에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김춘수는 김수영과는 매우 다른 시인이다. 하지만 시적 주제가 자유라는 점에서는 양자는 동일하다.
이승훈(李昇薰)·이수익(李秀翼)·오세영(吳世榮)·이건청(李健淸)·박의상(朴義祥)·김영태(金榮泰)·이유경(李裕憬)·허만하(許萬夏)·오탁번(吳鐸藩)·김종해(金鍾海) 등 ≪현대시≫ 동인들은 시를 현실과의 아날로지(analogy, 유추)에서 찾지 않는다. 내면세계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시가 이해된다. 시의 존재론을 현실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다.
신동문(辛東門)·신동엽·이성부(李盛夫)·최하림(崔夏林)·조태일(趙泰一)·정희성(鄭喜成)·권일송(權逸松) 등의 시가 현실과 연관되는 사회를 지시하는 관련성 내지 지향성을 갖고 있다면, ≪현대시≫ 동인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구해진 것이다.
하지만 비록 바깥과 안의 차이는 있을 망정 양자가 다 같이 시의 타자 지향성을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이러한 지향성 내지 관련성을 끊어버린다. 그만큼 시는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객체가 되고 의미는 그 언어체계 내지 기호조직 안에 있게 된다.
1960년대에 이어 1970년대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 시의 현실적 성격이 강조된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정치적 격동과 경제성장의 시기임을 실감케 해준다. 더구나 유신과 독재정권, 그리고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로 특징지워진 인간 소외와 물신적 가치관이 이러한 성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을 한 마디로 그 특징이나 경향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분명한 것은 그 의식과 지향이 그 어느 때보다 상당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1960년대에 이어 자기정의(自己定義)를 위한 상상적 노력과 이 땅의 어제와 오늘의 삶을 응시하는 현실탐구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물량화와 몰서정적인 위기의 공간 속에서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인간과 세계의 회복을 위하여 모든 상상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가꾸어 왔다. 특히 이 시대의 삶의 현장을 탐구한 시들은 대체로 비판적 안목으로 사회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박한 시대의 갑갑한 삶을 살고 있다는 괴로운 인식이 이 시대 시의 구체적 표현이다.
이른바 정치적인 폭력, 빈부의 격차, 계층의 갈등, 농촌의 궁핍화, 공동체의 파괴와 이에 따르는 인간 관계의 왜곡이 이 시대 시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소재로 나타났다.
김지하(金芝河)·고은(高銀)·신경림(申庚林)·황동규(黃東奎)·김명인(金明仁)·오규원(吳圭原)·정현종(鄭玄宗)·강은교(姜恩喬)·조태일·양성우(梁性祐)·최승호(崔承鎬)·정진규(鄭鎭圭)·고정희(高靜熙)·김용택(金龍澤)·박노해 등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때 김지하의 <오적 五賊>, 신경림의 <농무 農舞>, 고은의 <만인보 萬人譜> 등 사회현실에 강한 관심을 보여준 일련의 시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지하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를 <오적>이라고 풍자하고 야유하면서 시를 통한 사회참여를 강력히 실천하였다.
고은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 서정에서 출발하였지만 1960년대 1970년대 정치적 격동기에 정치시인으로 변모하였다. 신경림 또한 초기의 서정성에서 농촌의 궁핍한 현실을 그들의 시점에서 노래하면서 그는 의식적으로 전통적인 가락에의 귀의를 시도하였다.
시가 이렇듯 전통적인 가락과 같은 구체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시가 갖는 현실비판이 오히려 소설의 경우보다 독자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행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시 가운데 이야기 시가 많아진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특히 강력한 사회적 관심을 보여준 시일수록 더욱 그렇다.
가령, 황지우(黃芝雨)·정동주(鄭棟柱)·최승호(崔承鎬)·하재봉(河在鳳) 등 1980년대의 시가 보여준 시의 산문화 내지 이야기화가 바로 그것이다.
메시지 그 자체보다는 관련 상황이나 기호 체계와 관련될 때 시는 그만큼 쉽게 전달되고 호소력 또한 배가될 것은 이 경우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적 노력이 한결같이 긍정적인 측면만을 가꾸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부 차원의 일방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이 실상 몰서정적인 상황 속에서 어둠으로 꾸려지고 있음을 현실 탐구의 시가 부단히 상기시켜 온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뜻에서 1970년대가 생성 배경이 된 1980년대 민중시의 형성과 전개는 그 공과에 대한 쟁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차피 시는 삶의 한복판에 있지 않으면 안 되고 현실의 음영을 똑바로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라는 점에서 평가에 결코 인색할 수 없다.
≪창작과 비평≫을 비롯하여 ≪실천문학≫·≪시운동≫·≪오월시≫·≪시와 경제≫·≪공동체 문학≫·≪르뽀시대≫·≪삶의 문학≫ 등 1980년 이후 창간된 무크지에 참여했던 1980년대 시인의 시가 그렇다. 특히 광주항쟁 이후 대부분의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사회현실의 정직한 추적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회현실의 경직성은 그만큼 자기분열과 상실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타났고 그러한 요인의 파헤침과 변용을 통하여 자기회복과 자기정의를 꾀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두드러진 추세의 한 보기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있어서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현상은 거개의 시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기동일화의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는 주변인(周邊人)에 대한 반응(反應)으로 점철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느 사회에도 어느 집단에도 뿌리 내리고 살 수 없다는 소속감의 상실로 운명지워진 사람들, 그것이 다름아닌 주변인들이다.
사람 사이의 교환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붕괴, 나날이 착잡해져 가는 현대 생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공동체적 유대의 상실과 공동체험의 쇠퇴는 이 시대의 주변적 경험들이다.
박남수(朴南秀)·조병화·천상병 등은 말할 것 없고 민영(閔暎)·이태수(李太洙)·박해수(朴海水)·김명수(金明秀)·이동순(李東洵)·강통원(姜通源)·문충성(文忠誠)·한기팔(韓箕八)·엄원태·한광구(韓光九)·김혜순·윤석산(尹石山)·허수경 등 그리고 박남철(朴南喆)·김언희·나기철(羅基喆)·곽재구(郭在九)·송찬호 등과 같은 근자의 시인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시가 환기하는 자기상실, 자아위기는 여기에 따라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삶의 실현과 직접적으로 무관하듯이 보이는 서정주의 <노래>나 돌을 편력하면서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박두진의 <수석영가 水石靈歌>, 김남조의 신앙적 체험조차 이러한 노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김광규의 자기상실과 왜소화 과정이나 정현종·이성복의 낯설음의 리얼리즘이, 조정권(趙鼎權)·안수환(安洙環)·정대구(鄭大九)·이기철(李起哲)·허만하·김승희(金勝熙)·홍영철(洪榮鐵)·홍신선(洪申善)·조창환(曹敞煥)·이성선(李聖善)·남진우(南眞祐)의 끊임없는 상기 작용이, 정호승(鄭浩承)의 가난한 삶의 구제와 정한이, 각각 그 수법이나 시적 관점의 상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자기회복, 자기인식이었다.
김춘수·김광협(金光協)·신대철(申大澈) 등의 일련의 유년시절의 탈색도 성격은 다르지만 자기회복, 자기응시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에서 묶을 수 있다.
또 민간전승의 소재전통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서정주를 비롯하여 내면세계의 탐색을 거듭하는 박이도(朴利道)·유안진(柳岸津)·최하림·박정만(朴正萬)·조재훈(趙載勳)·이명수(李明洙)·기형도(奇亨度)·노향림(盧香林) 등, 심지어는 죽음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자신으로 회귀하는 박재삼·김종삼·황동규·강은교의 시 역시 최승자(崔勝子)와 마찬가지로 자기회복, 자기응시라는 점에서 그만큼 주변적 의식의 시적 대응을 이루는 도피모티프 내지 낙원상실의 이미지로 대부분의 시가 착색되어 있다.
더구나 죽음을 완강히 거부하면서도 삶을 사는 허영자(許英子)의 <꽃을 찾아서>, 이승을 인식함으로서 저승을 본 구상의 <석등 石燈>과 같이 인간은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것을 묻게 된다.
한계성이 주어짐으로써 삶의 긴장이 생긴다. 황동규의 <풍장 風葬>과 같이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가 가장 순수한 ‘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규원(吳圭原)의 시조차 관습적인 기준과 어긋나고 일탈된 논리와 그의 독특한 역(逆)의 서정으로 인간의 모순을 향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이미 시적 구제였던 셈이다.
특히 산업화 내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도시와 고향, 그 어디에도 동일화 할 수 없다는 소외의식은 주변인적 열등감의 기본적인 토운을 이룬다. 김광림·강우식(姜禹植)·이가림(李嘉林)·정희성(鄭喜成)·감태준(甘泰俊)·임영조(任永祚)·양왕용(梁汪容) 등의 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시가 사적인 경험이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울림의 양식인 이상, 시인은 과거의 한 시대, 인물, 사물을 조준하여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있음을 김초혜(金初惠)·송수권(宋秀權)·이승하(李昇夏) 등의 시와 임보(林步)·김규화(金圭和)·정의홍(鄭義泓)·박진환(朴鎭煥)·강희근 등의 <진단시 震檀詩>에서 보게 된다.
특히 송수권의 <향설매 香舌梅>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려서 파멸한다는 이미 있어 온 <발치설화 拔齒說話>의 모티프를 역전하고 있다. 매혹적인 것이 파멸의 함정을 감추고 있다는 당시의 유교적 계교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낭만적 사랑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삶의 결을 이렇듯 겨레의 공동체적 공유 현장 속에서 상상하고 변용하고 있는 한, 그것은 근자의 기존시에 대한 우상파괴 작업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형식 해체운동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을 통하여 1990년대의 새로운 시 장르 기술의 가능성의 암시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한국시에 있어서 두고두고 천착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시가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논의를 모두 시가연구에 일단 포함한다면 시가연구사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진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문학연구가 근대적인 학문으로 되면서 가장 먼저 관심을 둔 분야가 시가분야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시조 분야의 연구로부터 시가연구가 출발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1922년에 안확(安廓)의 ≪시조문학사 時調文學史≫가 계기가 되어 시조에 관한 많은 논문이 나오면서 국문학연구는 시조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었다.
1930년에는 시가연구를 근대적인 학문으로 다지자는 세대가 등장해서 그 동안의 논란을 사적으로 체계화하자는 업적이 이어져 나왔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이다.
시가연구의 본격적인 전개는 1945년 이후에 이루어진다. 조윤제의 ≪국문학사 國文學史≫와 백철(白鐵)의 ≪조선신문학사조사 朝鮮新文學史潮史≫가 그러한 흐름을 거쳐 이루어진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러나 ≪국문학사≫와 ≪조선신문학사조사≫는 제목 그대로 시가만을 단독테마로 다룬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의 김동욱(金東旭)의 ≪한국가요의 연구≫, 정병욱(鄭炳昱)의 ≪시조문학사전 時調文學辭典≫은 전공분야를 세분하면서 다룬 연구성과이기에 시가연구는 개괄적인 정리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는 시가연구의 모습은 여러모로 달라졌다.
심재완(沈載完)·이명구(李明九)·김종우(金鍾雨)·최진원(崔珍源)·정한모(鄭漢模) 등이 이어온 일련의 연구와 연구업적 또한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심재완의 ≪역대시조전서 歷代時調全書≫와 정한모의 ≪한국현대시문학사 韓國現代詩文學史≫는 사실연구의 교과서적 전범이 되어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종래의 사실연구에서 가치연구로 시각을 돌린 점이다.
1970년 이후의 한국시가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 한국시가를 보는 시야의 협애성, 말하자면 이론의 불비상태에 대한 자기 반성과 아울러 한국시가의 독자적인 시야의 개척이라고 본다.
1960년대의 일련의 연구는 종래의 단선적이고 실증적인 역사주의의 극복과 한국시가가 지닌 독자적인 문법을 드러내는 데 바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시가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다각적인 모색이 거듭되고 또한 한국시가의 독자적인 이론이 강조되었다.
물론 이러한 모색과 강조가 국부적인 시각보다 체계적인 원근법과 관련된다고 할 때, 그 방면의 이론적인 내면화는 의외로 빈약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가연구의 방법론적 다원성과 전통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자각 그 자체만으로도 종래의 거의 일방적이고 경색되었던 시가연구에 대한 자기반성이라고 할 만하다.
텍스트를 부분으로 해체하지 않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의미 생성을 파악하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시 텍스트에 대한 사상적인 해석도 학문적 담론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국사학의 새로운 성과와 관련하여 시가문학을 새롭게 투시하는 노력이 있었고, 서로 상반되는 텍스트 차원과 콘텍스트 차원의 복합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1970년대 이후 오늘날의 시가연구를 위한 귀중한 출발점이 되어 준다. 대학에서의 국문학 연구와 문학비평의 밀접한 제휴를 갖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시연구와 마찬가지로 고전시가연구에 있어서도 시학과 해석학이 강조되고, 시작품을 그 자체로 자율적인 객체라고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표면보다 심층, 변이보다 원형, 통시적인 것 보다 동시적인 것, 일회적인 현상보다 반복적인 것, 경험적인 것 보다 선험적인 것 등에서 후자 쪽을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고전시와 근대시를 일관된 체계로 파악하고 기술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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