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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홍성광 옮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유문화사, 2013).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은 그의 [소품과 부록](1851)을 번역한 것임.
'행복론'은 '소품'에, '인생론'은 '부록'에 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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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행복론 -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머리말
나는 여기서 삶의 지혜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내재적인 의미로 다룬다. 즉 가능한 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기술에 대해 가르치는 지침을 행복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에 따라 행복론이란 행복한 생활을 위한 지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9쪽)
이러한 행복론은 사실 여기에 내재하는 오류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나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49장에서는 그 오류를 질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행복론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나의 철학이 원래 목표로 하는 좀더 높은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밖에 없었다. (9-10쪽)
현재 잠언과 유사한 의도로 집필된 읽을 만한 책으로는 카르다노의 [역경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관해]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 책을 통해 여기서 서술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수사학] 제1권 5장에 간단한 행복론을 끼워 넣었지만, 무미건조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 (10쪽)
제1장 기본 분류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는 인생의 자산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외적인 자산, 영혼의 자산, 신체의 자산이 그것이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숫자만 받아들여, 인간의 운명이 차이 나는 것은 세 가지 기본 규정에 기인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을 이루는 것,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와 예지의 함양이 포함된다.
2.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3.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이러한 표현은 알다시피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즉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견해를 말하는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범주에서 고찰할 수 있는 차이는 자연 그 자체가 인간들 사이에 설정해 놓은 차이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자연이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인간의 규정에 의한 차이, 나머지 두 가지 범주에서 제시된 차이가 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결정적임을 알 수 있다. (11쪽)
*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의 자산 세 부류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8장에 나옴.
* 1이 '인격'이라면, 2와 3은 '운명'이라 칭할 수 있음(15쪽 참조). 1이 '자연'의 영역이라면, 2와 3은 '인간'의 영역이라 하고 있음.
* 1은 제2장에서, 2는 제3장에서, 3은 제4장에서 상술하고 있음. (이상 박희택 주)
에피쿠로스의 수제자인 메트로도로스는 일찍이 '우리 내부에 있는 행복의 원인이 사물에서 유래하는 행복의 원인보다 더 크다(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스트로마타] 제2권 21장)'라는 제목을 글을 썼다. 말할 것도 없이 간의 행복, 그러니까 인간의 전체 생존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거나 거기서 일어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12쪽)
이 모든 일은 현실, 즉 충만된 현재가 물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필수 불가결하고 밀접한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절반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기인한다. (...) 누구나 자신의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어, 자신의 의식 속에만 갇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그를 도와줄 길이 별로 없다. (...) 현상의 핵심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가련한 희극배우에 불과하다. (13쪽)
우리의 행복이 우리를 이루는 것, 즉 우리의 인격에 얼마나 좌우되는지 분명해진다. 반면에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의 운명만,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만 계산에 넣는다. (15쪽)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어진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만 노력을 경주하고, 개성에 맞는 종류의 도야에 힘쓰며, 다른 모든 것은 피하고, 개성에 적합한 신분이며 일, 생활방식을 골라야 한다. (18쪽)
궁핍과의 싸움을 이겨 낸 대부분의 사람도 아직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내면의 공허, 의식의 빈약, 정신의 빈곤 때문에 그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유유상종인 것이다. (19쪽)
제2장 인간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인간의 내면적 모습과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 요컨대 인격과 그것의 가치가 행복과 안녕의 유일한 직접적 요인이다. 다른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21쪽)
운명은 변할 수 있어도 자신의 성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두뇌, 낙천적 기질과 명랑한 마음, 튼튼하고 아주 건강한 신체와 같은 주관적인 자산, 즉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유베날리스, [풍자시] 제10편356)"이 우리의 행복에서 으뜸 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자산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앞에서 든 자산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자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22쪽)
명랑함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건강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알다시피 무절제와 방탕, 격하고 불쾌한 감정의 동요, 과도하거나 지속적인 정신적 긴장을 피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 실외에서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자주 냉수욕을 하며, 식이요법 등을 통한 건강 관리에 힘써야 한다. (23-24쪽)
우리의 행복은 명랑한 기분에 크게 좌우되고, 명랑한 기분은 건강상태에 크게 좌우된다. 동일한 외부 사정이나 사건이라 해도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튼튼할 때와 병 때문에 짜증 나고 불안한 기분일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을 비교하면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다"라는 에픽테토스의 글도 그런 의미다. 대체로 우리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건강해야 모든 것이 향유의 원천이 된다. (24-25쪽)
명랑함이 건강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게 건강한데도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유기체의 원래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성질 때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대부분의 경우는 민감성과 재생력에 대해 감수성이 다소 정상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경우에는 감정의 기복, 주기적인 과도한 명랑함, 우세한 우울감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천재에게도 정신력, 즉 감수성의 과도함이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이든 정치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탁월한 인간은 모두 우울한 것 같다"고 하면서 탁월하고 뛰어난 모든 인간은 우울하다고 지적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25쪽)
* '유기체의 원래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성질'을 '기질'이라 칭할 수 있을 것임. (박희택)
건강과 부분적으로 비슷한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주관적인 장점이 사실 직접적으로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간접적으로 타인에게 주는 인상으로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지라도 그러한 장점은 매우 중요하다. (...) 아름다움은 미리 우리의 환심을 얻는 공개적인 추천장이다. (28쪽)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8쪽)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은 심지어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외부로부터 필요한 것이 더 적어지고, 다른 사람이 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는 비사교적인 인간이 된다. (30-31쪽)
궁핍함에서 벗어나 겨우 한숨 돌릴 만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심풀이와 사교를 추구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일념에 어떤 것에도 쉽게 만족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고독한 상태에서는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왕족이 입는 진홍색 옷을 걸친 멍청이는 자신의 애처로운 개성이라는 떨쳐 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한숨짓는다. 반면 재능이 뛰어난 자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환경을 자신의 사상으로 채우고 활기차게 만든다. 그 때문에 세네카가 "모든 어리석은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에 시달린다([서간집])"고 한 말이나, "바보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는 예수스 시락의 격언은 그야말로 진리를 꿰뚫는 표현이다. 따라서 정신이 빈약하고 천박한 사람일수록 사교적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독과 천박함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1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1)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평범한 사람들은 단지 시간을 보낼 생각만 하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활용한다. 빈약한 두뇌를 지닌 사람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 다름 아닌 의지를 위한 동기의 매개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2쪽)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의 것이다([에우데모스 윤리학] 제7권 2장)"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34쪽)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당시 2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매우 고독한 생활을 하던 데카르트에 대해, 고작 한 편의 논문과 입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로 그를 알고 있었음에도 "데카르트 선생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처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현명한 발언이었다. (35쪽)
인간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신의 내부에서 발원한다는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우 올바른 지적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권 7장, 제7권 13-14장)에서 모든 향유란 어떤 행동을, 즉 어떤 힘의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런 행동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두드러진 능력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사하는 데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스토바에오스도 소요학파의 윤리학에 대해 서술하면서([윤리학 선집] 제2권 7장) 그대로 사용했다. 예컨대 행복이란 바라던 바대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일에서 덕을 따르는 활동이라면서, 좀 더 짧은 표현으로 덕이란 기교의 완벽성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힘의 본래적인 사명은 사방에서 그를 죄어 오는 궁핍과 싸우는 것이다. (36-37쪽)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정의는 45쪽에서 다시 언급됨. (박희택)
인간은 각자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내면에서 우세한가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한다. 첫 번째는 재생력과 관련된 향유다. 먹고 마시기, 소화, 휴식, 수면 욕구가 이에 속한다. (...) 두 번째는 육체적 자극과 관련된 향유다. 산책, 뜀박질, 레슬링, 무용, 검도, 승마 및 각종 운동 경기와 심지어 사냥이나 전투, 전쟁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정신적 감수성과 관련된 향유다. 탐구, 사유, 감상, 시작, 조각, 음악, 학습, 독서, 명상, 발명, 철학적 사고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세 종류의 향유가 지닌 가치, 등급, 지속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찰을 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겠다. (38쪽)
정신적 감수성이 우세하면 인식 작용을 본질로 삼는 향유, 이른바 정신적 향유가 가능해지며, 정신적 감수성이 우세할수록 정신적 향유가 커진다. (39쪽)
* 자연은 인간의 지성에서 모든 소산의 정점이자 목표에 도달해, 자연이 산출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가장 복잡한 것을 제공한다. (...) 전체 자연계에는 지력의 등급이 높아 감에 따라 고통을 느끼는 능력도 향상되므로, 마찬가지로 가장 지력이 높은 사람이 고통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다. (39쪽 주)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람은 의지를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단순히 인식만으로도 매우 강렬한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런 관심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 평범함 사람들은 일신의 안녕과 관계되는 사소한 이해관계에 얽매어 온갖 종류의 보잘것없는 것을 추구하며 어리석게 살아간다. (...)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람은 생각이 매우 풍부해, 언제나 활기차고 의미 있는 생활을 한다. 몸 바쳐 일할 가치 있고 재미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런 일에 종사하겠지만, 그는 자체적으로 가장 고상한 향유의 원천을 지니고 있다. (40-41쪽)
우리의 실제적인 현실 생활은 열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진다. 하지만 열정에 의해 움직이면 곧장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그 때문에 의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지성을 부여받은 자만이 행복하다. 그들은 실제적인 생활 말고도 지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인 생활은 지속적으로 그들을 아무런 고통 없이 활기차게 일에 매진하도록 해준다. (...) 평범한 사람은 인생의 향유에 관련해 자신의 바깥에 있는 사물, 즉 소유물이나 지위, 여자와 자식, 친구나 사교계 등에 의존한다. (...) 정신력이 탁월하지 않지만 그래도 평범한 수준을 약간 넘어서는 사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부류의 사람은 가령 취미로 그림 연습을 하거나 식물학, 광물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학 같은 실용 학문을 추구해 자신의 향유 대부분을 거기서 발견할 것이고, (...) 그런 점에서 그의 무게중심이 이미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예술에서의 단순한 취미로는 아직 창조적 능력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단순한 실용학문은 서로에 대한 현상의 관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그 속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런 것에 전적으로 몰두 할 수 없어서, 그의 삶은 이외의 다른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잃을 정도로 그런 실용 학문과 혼연일치가 되지 못한다. 최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올라 흔히 천재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만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정신적으로 탁월한 사람만이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전반적이고 절대적으로 자신의 주제로 삼고, 그 후 개인적 성향에 따라 예술, 시문학, 철학을 통해 그런 것에 대한 심오한 견해를 피력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천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생각, 작업에 몰두하기를 원해, 고독을 환영하고 자유로운 여가를 최고의 재산으로 여기며, 다른 모든 것은 없어도 되고 있으면 오히려 때로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사람에게는 무게중심이 완전히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지적인 면에서 자연의 은총을 매우 풍부하게 받은 자가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42-44쪽)
외부로부터 필요한 것은 소극적인 선물, 즉 자유로운 여가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생에 걸쳐 매일 매 시간 그 자신 자체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할 게 없다. 자신의 정신의 발자취를 전 인류의 가슴에 새기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에게 행복과 불행은 한 가지로만 결정된다. 즉 소질을 완전히 발휘해 자신의 작업을 완성할 수 있느냐, 방해를 받아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모든 것은 하찮게 여길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자유로운 여가를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5쪽)
누구에게든 자유로운 여가는 그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여가에 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7장)"고 말하고, 디오니게스 라에르티오스도 "소크라테스는 여가를 인간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칭송했다([철학사] 제2권 5장 31절)"고 보고한다. 철학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선언한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7-9장)의 말도 그와 같은 취지의 표현이다. 나아가 그가 [정치학](제4권 11장)에서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능함을 펼칠 수 있 는 삶이다"라고 기술했는데, 이것을 철저히 해석하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신의 탁월함을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본래적인 행복이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재능을 받아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그 재능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라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괴테의 말도 같으니 취지의 표현이다. (45-46쪽)
* [정치학]의 표현은 36쪽에서도 언급하였음. (박희택)
정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를 소원하게 만든다. 그들은 일반인이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 수백 가지 일을 진부하게 여기고 참지 못한다. 그래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상의 법칙이 어쩌면 이 경우에도 효력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실은 가장 행복하다는 주장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는데 실제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삶의 행복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조차 이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발언을 한 것이 있으니, 나는 독자에게 미리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생각이 없다. "행복의 첫째 조건은 분별력이 있는 것이다([안티고네] 1328행)."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유쾌한 삶이다([아이아스] 550행)." (47쪽)
속물 그 자체와 관련해, "진정한 욕구가 없으면 진정한 향유도 없다"라는 이미 언급한 원칙에 따라 그는 정신적 향락을 누리지 못한다. 인식과 통찰을 위한 아무런 충동이 없고, 인식과 통찰에 대한 충동과 매우 유사한 미적 향유에 대한 충동도 없으므로 그의 생활은 활기를 띠지 않는다. (...) 속물이 즐길 수 있는 현실적 향유란 감각적 향락뿐이다. (...) 정신적 욕구가 부족해 정신적 향락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무료함을 달랠 수 없다. (...) 감각적 향락이 금방 고갈되기 때문이다. (48쪽)
제3장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행복론의 위대한 교사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올바르고 훌륭한 구분이다. 첫째는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욕구이다. 이것은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을 야기한다. 따라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욕구뿐이다. 그것은 충족시키기 쉽다. 둘째는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성적 충족의 욕구다. (...) 이러한 욕구는 충족시기가 좀 더 힘들다. 셋째는 자연스럽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사치, 호사,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다. 이것은 끝이 없고 충족시키기가 무척 어렵다. (51쪽)
부자들의 막대한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반면, 부자들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자신이 이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명성도 마찬가지다. (52쪽)
변화무쌍한 우리의 소망과 다양한 욕구의 대상을 언제라도 충족시켜 주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다른 재화는 단 한 가지 소망, 한 가지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 돈만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다. 돈은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욕구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욕구 전반에 소용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은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재난이나 사고에 대비한 방호벽으로 보아야지, 세상의 즐거움을 얻게 해주는 허가증이나 그럴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53-54쪽)
물려받은 재산이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경우는 마침 그런 사람이 보다 높은 종류의 정신력을 타고나 돈벌이와 그다지 관계없는 일을 추구하는 경우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이중의 혜택을 받은 셈이라서, 자신의 창조적 재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 학문을 철저히 연구해 적어도 그것을 진흥시킬 가능성조차 개척하지 않는 자는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 해도 빈둥거리며 그저 밥만 축내므로 경멸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행복해질 수도 없다. 궁핍을 면한 대신 인간적 비참함의 또 다른 극인 무료함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 자는 차라리 궁핍해서 바쁘게 일했다면 훨씬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57쪽)
제4장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타인의 의식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는 상관없다. 우리 역시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얕은지, 개념이 협소하고 신조가 천박한지, 견해가 왜곡되고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점차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런 자가 하는 말이 자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되자마자, 모두가 하는 말이 때때로 얼마나 하찮게 들리는지 경험으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형편없는 인간들이 위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견해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그들에게 지나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62쪽)
우리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며,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수단, 즉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것이다. 명예, 영화, 지위, 명성은 그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방금 말한 본질적인 자산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것을 대체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본질적인 자산을 위해 그런 것들을 아무런 미련 없이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현실적으로 자신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62쪽)
우리의 온갖 걱정과 근심, 안달과 성화, 불안과 긴장 등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견해와 관계있는 것으로, 불쌍한 죄인들의 생각처럼 불합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투와 미움도 대부분 앞에서 말한 근원에서 생긴다. 우리의 행복은 마음의 안정과 만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명예욕이라는 동기를 합리적인 한도로 억제해서 지금의 50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즉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몸속의 가시를 빼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럽고 타고난 불합리함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현자도 가장 떨쳐 버리기 힘든 것이 명예욕이다([역사])"라고 말했다.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67쪽)
은둔 생활이 마음의 안정에 대단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들의 이런저런 견해에 계속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흔히 말하듯 "할 가치가 있는 일은 행하기가 어렵다." (67-68쪽)
인간 본성의 어리석음에서 주로 세 가지 싹이 나온다. 명예욕, 허영심, 자긍심이 그것이다. 허영심과 자긍심의 차이는 다음 사실에 근거한다. 즉 자긍심은 어떤 점에서 자신이 압도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것에 관한 확고한 확신임에 반해,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려는 소망이다. 허영심에는 그 확신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희망이 수반된다. 자긍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부에서 출발하는 직접적인 높은 평가인 반면, 허영심은 그러한 것을 외부에서 간접적으로 얻으려는 노력이다. 허영심은 말을 많이 하게 만들지만, 자긍심은 과목하게 만든다. (68쪽)
자긍심은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긍심의 가장 고약한 적은, 말하자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른 삶의 갈채를 받으려고 애쓰는 허영심이다. 남의 갈채를 바라는 이유는 그것을 토대로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긍심의 전제 조건은 이미 자기 자신을 아주 확고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69쪽)
세상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긍심은 민족적 자긍심이다. 민족적 자긍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사실로 자랑할 만한 개인적 특성이 부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수백만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굳이 손에 넣으려고 할 턱이 없다.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70쪽)
인간이 타인과 맺을 수 있는 상이한 관계에서, 타인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즉 그를 좋게 평할 수 있는지에 따라 몇 가지 종류의 명예가 생겨난다. 이러한 관계는 주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관계, 그런 다음에는 자청해서 책임을 떠맡는 일의 관계, 마지막으로는 성적 관계다. 이 세 가지는 시민적 명예, 직무상의 명예, 성생활의 명예와 상응한다. (73쪽)
명예는 어떤 의미에서는 소극적인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명성과 대비된다. 명예란 이것의 주체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성질에 관한 견해가 아니라 대체로 누구에게나 전제되는 성질, 그러니까 이 주체에게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성질에 관한 견해일 뿐이다. 따라서 명예란 이것의 주체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님을 말해 준다. 반면에 명성은 그 장본인이 예외적인 인물임을 말해 준다. 명성은 일단 획득해야 하는 반면, 명예는 단지 잃지 않기만 하면 된다. 명성이 없다는 것은 무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수동적인 성질을 띠는 반면, 명예가 없다는 것은 치욕이므로 능동적인 성질을 띤다. (74-75쪽)
중세에 비로소 생겨나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에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아니, 거기서도 극히 일부분, 즉 사회의 상류 계층과 그들을 본받으려는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기사적인 명예 또는 체면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나는 그들의 원칙을 하나의 사회 규범이나 기사적인 명예의 거울로서 특별히 서술하고자 한다. (83쪽)
1) 명예는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견해가 아니라 오로지 그러한 견해의 표명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이때 진술된 견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물며 그러한 견해가 근거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83쪽)
2) 남자의 명예는 그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하는 것, 그에게 뜻밖에 일어나는 일에 기인한다. 처음에 논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예의 원칙에 따르면, 명예는 오로지 그가 직접 한 말과 행동에 달려 있는 반면, 기사적인 명예는 다른 사람이 한 말과 행동에 달려 있다. (84쪽)
3) 이러한 명예는 인간이 그 자체로 어떤 존재인지, 또는 그의 도덕적 성질이 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온갖 현학적인 문제와는 하등 관계없다. (87쪽)
4) 모욕을 당하는 것이 치욕이듯, 모욕하는 것은 명예다. 예컨대 상대편에게 진리, 정의, 이성이 있다 해도 내가 모욕하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없다. 정의와 명예는 내 쪽에 있다. 반면에 상대방은 명예를 회복하기 전까지 명예를 잃는다. 명예의 회복은 정의나 이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 총을 쏘거나 칼로 찔러서 하는 것이다. (88쪽)
5) 명예에 관한 한 견해 차이가 있을 경우 어느 누구에게나 호소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정은 신체적 폭력, 즉 금수성의 법정이다. 모든 난폭함은 사실 금수성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9쪽)
6) 하나의 약속, 즉 "명예를 걸고!"라고 말하면서 한 약속만은 어기면 안 된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약속은 어겨도 된다는 추정이 성립한다. (90쪽)
소크라테스는 자주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때때로 폭행을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의연히 견뎌 냈다. 한번은 그가 발길에 차였을 때 끈기 있게 참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노새에게 차였다고 해서 노새를 고소하겠는가([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제2권 21장)?"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저 사람은 당신을 모욕하고 비방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더니, "아닐세.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세([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제2권 36장)"라고 대답했다. 스토바에오스([사화집] 제1권 317-330쪽)가 남긴 무소니우스의 긴 글로 미루어 보면 고대인이 명예훼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재판에 의한 명예회복 말고는 다른 것을 알지 못했고, 현명한 사람들은 이러한 명예회복마저 거부했다. 고대인은 뺨을 맞더라도 재판에 의한 명예회복밖에 알지 못했음을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보면 알 수 있다. (93쪽)
타인과의 평화로운 교제를 중시하는 시민적인 명예는 우리가 타인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에 완전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는 반면, 기사적인 명예는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 주려는 데 있다. (96쪽)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비난을 받아도 의연히 무시할 것이며 그래야 마땅하다. 반면에 인간의 명예의 원칙은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예민함을 드러내, 자신이 받지도 않은 상처에 피로써 보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자신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남이 자신을 공박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리니 말이다. 그에 따라 명예훼손을 당해도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면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이 부족해 아무렇지 않은 경우에는 현명함과 교양을 발휘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분노를 숨길 것이다. (100쪽)
명성과 명예는 쌍둥이다. 그렇지만 제우스의 자식인 디오스쿠로이 중에서 폴룩스가 불사신이고, 카스토르는 죽어야 할 몸이었다. 이처럼 명성은 불후의 것이고, 명예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최고 등급의 명성, 즉 참되고 진정한 명성에 한하는 이야기다. 여러 종류의 덧없는 명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예는 같은 사정에 있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 명성은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명예는 누구나 자신에게도 공공연하게 부여해도 되는 특성을 띠는 반면, 명성은 아무도 자신에게 부여해서는 안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명예는 우리에 관한 소문이 전달되는 범위에 한정되는 반면, 명성은 우리에 관한 소문이 전달되는 범위를 넘어 명성 자체가 도달되는 범위까지 멀리 펄진다. 명예는 누구나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명성은 예외적인 인물만 요구할 권리가 있다. 매우 뛰어난 업적이 있어야만 명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업적은 행위이거나 작품이다. (111쪽)
명성을 얻는 길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다. 행위의 길을 가도록 해주는 것은 주로 위대한 가슴이고, 작품의 길을 가도록 해주는 것은 위대한 두뇌다. 두 가지 길에는 각기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 중요한 차이를 들면 행위는 일시적이지만 작품은 지속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고귀한 행위라도 단지 일시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지만, 천재적인 작품은 오래 살아남아,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고 정신을 고양시키며 온 시대에 두루 영향을 끼친다. (111-112쪽)
특히 글로 된 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름과 기억이 남아 있지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호라티우스는 아직도 살아 움직이며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다]는 [우파니샤드]와 함께 현존하지만, 그 시대에 일어나 온갖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112쪽)
* 124쪽으로 연결하여 읽을 것. (박희택)
작품의 명성은 이렇게 확실한 것이어서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다. 그런데 창작자가 명성을 체험하느냐 하는 문제는 외부사정과 우연에 달려 있다. 작품의 수준이 높고 까다로울수록 그런 경우가 드물게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세네카는 [서간집]에서 비길 데 없이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물체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처럼 공적에 명성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명성도 때때로 공적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따라온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 다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질투가 침묵을 명할지라도 시샘도 호의도 없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 시대의 무뢰한과 마찬가지로, 세네카 시대의 무뢰한들 사이에서도 음흉한 침묵과 무시를 통해 열등한 것을 두둔하고 좋은 것을 대중에게 숨기기 위해 공적을 억압하는 기술이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의 무뢰한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무뢰한도 질투심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114-115쪽)
무릇 훌륭한 것은 모두 서서히 숙성해 가듯이 명성도 대체로 오래 지속되는 것일수록 뒤늦게 나타난다. 사후에 얻은 명성은 씨앗 단계에서 매우 천천히 자라는 참나무와 같다. 일시적인 가벼운 명성은 빨리 자라는 일년생 식물과 같으며, 그릇된 명성은 순식간에 자라랐다가 금세 베어지고 마는 잡초와 같다. 이렇게 되는 현상은 어떤 사람이 후세에, 즉 인류 전체에 속할수록 당대에는 낯설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가 창작한 것은 당대에만 특별하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자체가 아닌 인류의 일부라는 의미에서만 당대에 속하는 것이라서 그 시대 고유한 색에 물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시대는 그의 존재를 낯설어하며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114쪽)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업적은 대체로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을 지닌 자가 나타난 그런 업적에 공감해서 명성을 얻게 해줄 때까지 오랫동안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런 업적은 그렇게 확보한 권위를 바탕으로 나중에 그런 명성을 계속 유지한다. 결국 누구든 자신과 동질의 종류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5쪽)
아무리 팔심이 세다 해도 가벼운 물체를 던져서 멀리 날아가 세게 부딪히게 할 정도의 움직임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 물체가 가까운 곳에서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은 낯선 힘을 받아들일 자신의 물질적 내용물이 없기 때문이다. 멋지고 위대한 사상이나 천재의 걸작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머리가 형편없고 빈약하거나 모자란다면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 시대의 현자들이 이런 사실을 이구동성으로 한탄하고 있다. 예컨대 예수스 시락은 "바보와 이야기하는 것은 잠자는 자와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런 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문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햄릿은 "익살맞은 말도 바보의 귀에서는 잠들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또한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듣는 자의 귀가 일그러져 있으면 조롱을 받는다([서동시집])." 또한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애쓴 보람도 없이 다들 아무 반응이 없다고 슬퍼하지 말라! 늪에 돌을 던진다고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니([속담풍])." (116쪽)
명예에는 대체로 공정한 심판자가 있어서 어떤 질투에도 명예가 손상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명예는 누구에게나 미리 신용 대부로 주어져 있다. 그런 반면 명성은 질투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쟁취해야 한다. 월계관을 씌워 주는 곳은 대단히 비호의적인 심판관으로 구성된 법정이다. 명예는 우리가 모두와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하려고 하지만, 명성은 그것을 얻는 사람이 생겨날수록 입지가 좁아져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나아가서 작품으로 명성을 얻는 어려움은 그러한 작품을 읽는 독자의 수와 반비례한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오락을 약속하는 작품보다 교훈을 주는 작품이 명성을 얻기가 훨씬 어렵다. 명성을 얻기가 가장 어려운 저작은 철학 책이다. 철학 책이 약속하는 교훈은 한편으로 불확실하고,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이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명성을 얻을 만한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작품 자체에 대한 애정과 즐거움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성을 얻어 격려를 받을 생각을 했다면, 인류는 불멸의 작품을 거의 또는 전혀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18-119쪽)
명성이란 본래 어떤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과 비교한 데서 생기는 것이다. 명성이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상대적인 가치만 가진다. (...)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을 만하게 해주는 것이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값진 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체고, 명성은 사물의 우연한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20-121쪽)
* 참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게 해주는 요소, 즉 공적 그 자체에 있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공적이 생기게 해주는 신조와 능력에 있는 것이다. (123쪽)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명성을 얻을 만한 자는 훨씬 중요한 것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비록 명성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는 중요한 것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으로 자신을 위로하면 된다. (...) 후세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몇 세기 동안이나 간직되어 음미할 만한 사상이 자신에게서 생겨난다는 사실이 커다란 행복이다. 이 같은 행복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 (123-124쪽)
명성이란 어떤 것의 징후, 단순한 반사광일 텐데, 실제로 그런 것을 갖지 않은 거짓 명성의 소유자는 그저 명성만 얻었을 뿐이다. (...) 가장 진정한 명성, 즉 사후의 명성은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은 명성을 얻게 해준 위대한 자질 자체에 있다. 또한 자질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열성을 다해 종사하고 싶은 일을 행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124-125쪽)
* 112쪽과 연결하여 읽을 것. (박희택)
행복은 사상 그 자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먼 미래의 더없이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이 사상을 숙고하는 일에 몰두하며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사후 명성의 가치는 그 사상의 공적에 있다. 이러한 공적이 그 자신이 받는 보수인 셈이다. 그런데 명성을 얻게 해주는 작품이 또한 동시대인의 명성도 얻는지 여부는 우연한 상황에 좌우되므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독자적인 판단력이 없고, 특히 대단하고 까다로운 업적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언제나 남의 권위를 추종하며, 높은 명성은 그것을 얻은 100명 중 99명의 경우 단순히 신의성실에 기인한다. 그 때문에 동시대인이 이구동성으로 갈채를 보내더라도 사유하는 두뇌를 지닌 사람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125쪽)
명성과 젊음을 한꺼번에 갖는다는 것은 죽을 운명인 인간에게 너무 과분하다. (...) 명성을 여름에 자라지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늦배에 비유할 수 있다. 노년이 되면 함께 늙어 가지 않은 작품에 청춘의 힘을 온통 쏟아부었다는 사실보다 더 멋진 위안이 되는 것은 없다. (126-127쪽)
우리와 무엇보다 가까운 학문에서 명성을 얻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그러기 위해 여기서 다음의 규칙을 세울 수 있다. 학문의 명성으로 나타나는 지적인 우월성은 언제나 어떤 자료의 새로운 조합에 의해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는 매우 상이한 종류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자료 자체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을수록 자료의 조합에 의해 크고 넓은 범위의 명성을 얻을 수 있다. (...) 널리 알려진 자료일수록 새로우면서도 올바른 방식으로 조합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