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前回)의 동경만에서 영화촬영을 마치고 곧 바로 내려온 곳이 시즈오까현(靜岡縣). 시미즈( 淸水)항이었다. 일본의 랜드마크이자 표고 3,770M로 유명한 후지산(富士山)이 있는 곳. 그 산이 마치 눈 앞에 보이는 淸水(시미즈)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Dock(船渠)에 올렸다. 이로써 모든 일이 끝난 것이다.
조선소에서 보이는 후지산(받은 사진)
여기서는 육상에 내릴 것도 없이 그대로 선내에 머물다가 밤늦게 버스편으로 시미즈(淸水)를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약 350km 떨어진 오사카[大阪] 국제공항에서 부산행 비행기를 타도록 수배되어 있었다. 단, 선장(船長)과 기관장(機關長)은 2~3일 더 머물며 새로운 선주(船主)를 위해 조언해주도록 했다.
모두가 들뜬 기분이었다. 승선 중 의외로 작업 수당들이 많았기에 호주머니들이 두둑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마지막 쇼핑을 하러 시미즈(淸水) 시내를 갔다왔다 하는 등 부산한 오후 시간들이었다. 그것도 선물들의 내용이 가장 좋고 잘 맞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늘 좀 꾸물대던 냉동사(냉동기관을 전담하며 적합한 면허장이 필요한 직책임) 김x식 군이 선원수첩을 분실했다고 일등항해사가 보고한다. 선원들에게 선원수첩은 바로 여권(旅券)이고 신분증명서이기도 하다. 이것 없이는 외국 출입이나 상륙은 물론 본국의 입국도 불가능하다. 출발 3시간 전이었다.
“뭐라꼬? 허허허”. 저절로 허파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웃음이다. 아마도 기가 찬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승선할 때부터 약간 모자라듯 느껴지더니, 정말로 끝까지 말썽을 부린다. 선원수첩 없이 어떻게 귀국할 것인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야 영사관을 찾아가 적절한 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지만… . 비상이 걸렸다.
전선원이 조를 짜서 선내 온갖 곳을 훑고 뒤집어 까집고 털어도 없다. 어디어디를 갔었는지 일일이 물어 함께 시내도 가보고 타고 다닌 시내버스 종점 주차장에도 갔었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경비 겸 그날의 운항기록을 점검하는 늙수그레한 영감님의 친절한 안내로 그가 타고 온 버스까지 뒤지고 앉았다던 자리까지 훑었다. 없다. 부득이 본사 구보(久保) 공무감독에게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리 없잖소. 일단은 오늘 밤 일행과 함께 오사카로 보내고, 손x하 일등항해사의 책임으로 오사카 영사관에 가서 사정을 얘기해보기로 합시다”.
그렇게 모두는 떠났다. 기관장과 나는 짐을 들고 조선소 기숙사로 옮겼다. 허전했다. 1년반 동안 낡았지만 정이 들었고 나를 정신적으로 또 아프리카에서부터 유럽까지 여러 외국항에서의 많은 경험과 식견을 쌓게 해준 애선(愛船) ‘히로시마마루(宏島丸)’였다.
아무도 없는 배를 혼자서 한 바퀴 돌았다. 선교(Bridge)에서부터 내 침실을 거쳐 영욕이 얽힌 휴게실도 식당도 둘러보았다. 생사(生死)를 같이한 1년 반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며 사라져 갔다.
그런데 식당의 큼직한 냉장고 위에 그렇게도 찾던 김x식의 선원수첩이 거기에 얹혀있다.
“이런 등신 같은 친구! 여기다 얹어두고 없다고 온갖 지랄을 하다가 갔구나. 아이구 이 자슥아! 확실히 네가 좀 모자라기는 하는구나.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내 입에서 저절로 나온 소리였다.
욕을 하면서도 반가웠다. 보내놓고도 염려가 앞섰는데… . 한밤중이지만 구보 감독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잠결에 구겨진 목소리지만 그도 웃으며 잘됐다고 하고는 내일 아침 일찍 미우라[三浦] 통신국장을 택시로 오사카 공항으로 수첩을 가지고 보내잔다. 적어도 350km나 되는 거리다. 신(神)에게 감사를 드리고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푸근한 잠을 잤다.
그러나 여기서 놀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1978년도)에 벌써 시미즈(淸水)라는 조그만 소도시의 시내버스가 타코메타(Tachometer)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은 타코메타란 말도 그때 처음 들었지만 무작정 찾아간 버스정류소 사무실에서 만난 영감님이 친절하게도 나를 쇼파에 앉히고 따뜻한 차 한잔을 놓고는 차근차근히 물었다. 버스를 탄 장소와 대강의 시간 등을… . 그리고는 무엇인가 동그란 돋보기 밑에 끼워둔 역시 동그란 종이를 돌리면서 찾더니 몇 호 버스라고 하며 지금 차고 어디쯤 주차중이니 가보라며 직원을 불러 열쇠를 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들여다보란다. 김 군이 탔다는 버스가 차고를 출발, 그가 내리고 탔다는 우체국 앞에는 몇 시 몇 분부터 몇 분 몇초간 정차했다는 것부터 이 버스가 회차(回車)할 때까지 장소, 운행속도, 정차와 발차시간 등등이 선명하게 그래프로 기록되어 있다.
깜짝 놀랐다. 버스기사는 승 · 하차 할 때 이 카드를 받아 들고 출발전에 끼우고 내릴 때 빼내어 사무실 담당자에게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기록에서 위반이 발견되면 고과(考課)에 반영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버스를 탓을 경우 장거리이거나 시내버스이건 운전기사들이 차분하고 여유 있게 과속없이 운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전운행을 위한 필수적인 장비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선진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관광회사를 경영할 때 유럽대륙을 달리는 버스에도 그 타코메타가 있었다. 국가나 국적을 막론하고 달리는 차들은 현장 교통경찰의 통제를 받았다. 순찰바이커를 탄 경찰이 의심스러우면 차를 세우고 타코메타를 요구하고 확인했다. 출발부터 그 시간까지의 운행기록이 담겼으니 더 말로 할 것이 없었다.
반면 우리나라 차량들의 과속은 세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총알택시'도 있었다. 일반 버스들은 물론 특히 관광버스들은 거의 무법적일 만큼 과속으로 질주하는 차 속에서 관광객들이 뛰고 굴리며 고성방가로 관광의 묘미(?)를 만끽한 시절이 있었다. 그 재미가 없으면 관광했다는 의미가 없다고까지 했다. 이 습성은 아마 지금도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지만 관광협회나 교통경찰에서도 문제였다. 대형사고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카텐으로 가려진 버스 안에는 시내 일류 고급유흥업소를 뺨칠 만큼의 음향시설이며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운전사의 개인 부담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야 고객을 유치할 있다고 했다.
한때는 고속도로 순찰대에게 적발되면 회사는 물론 운전기사까지 중벌금형이 부과됐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한참 열이 올랐을 때 운전기사가 왱~하고 울리면 삽시간에 자리에 앉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했다. 기사가 미리 순찰자를 보았거나 끼리끼리의 연락으로 낌새를 알면 취하는 조치였다.
결국 타코메타를 달자는 의견이 협회에서 여러 번 나왔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아마 지금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문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문화 이전에 이성(理性) 아니면 국민성의 문제일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첫댓글 반갑다 히로시마마루!!
[히로시마마루를 대면하고 싶다]했더니 바람새의 급한 성깔을 어찌 알고 후딱 올려주었네요.ㅎㅎㅎ
친우 늑점이랑 1년 반 생사고락을 한 히로시마마루.
아름다운 후지산.
허파에서 바람 새어 나오게 한 선원수첩 분실.
일본 특유의 친절한 아저씨의 타코메타 열람.
등 등은 뒷전이고
바람새 역시 히로시마마루를 여기 저기 살피고 있습니다.ㅎ
고물배가 무사고로 귀항하게 되어 역시 기쁩니다.ㅎㅎ
가족들에게 줄 선물 가득 안고 귀국하는 모습을 그리며
바람새 역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우째 연만하신 할매가 늦은 밤 주무시지도 않고.... . 고맙슴다만 무리하지 마세요. 그 미소, 보이는 듯 함다. ㅎㅎㅎ 부산넘
워메. 벌써 23시가 지났네.
눈팅만 하고 자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나서리....
내일 다시 오고, 침실로 가야쥐이~~~
좋은 글 감동적입니다. 방방곡곡을 다니시고 견문을 넓히시고.. 우리 민족, 국민은 감정에 무게를 너무 두고, 일본 사람은 예의, 합리적인 면에
무게를 더 두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좀 더 합리적인 생활, 사고로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