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83)
이가리二加里 뒷길
닭장 곁에서 맨드라미꽃이 까만 씨앗을 품고 있는 정오. 비닐 대야 밑바닥에는 지친 면 러닝셔츠 두 벌 구정물처럼 구겨져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그물처럼 널려 있는 바닷가
초록빛 갯내가
기진한 나팔꽃 덩굴처럼
돌담에 붙어 있을 뿐
꿈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런 마을이었다.
- 허만하(1932-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문학동네 포에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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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오지도 않은 눈이 소설 대설 동지에 가장 춥다는 소한에 대한까지 다 넘기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 지나 우수를 향해 가는 길에 연달아 내리는군요. 입춘 추위라는 말이 있기는 있나 보더라고요. 지난주에는 엄청 추웠습니다. 저 북쪽에 산다는 친구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기는 하지만요, 다 제 사는 곳에서 제 사는 만큼 느끼고 사는 게 사람이니 웃거나 말거나지요. 이 눈, 바닷가 ‘이가리’에도 내렸을까요. 내린 건 몰라도 아마 쌓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시를 읽다가 지명에 확 끌렸습니다. 시인이 시 어느 곳에서도 시의 ‘이가리’가 우리가 사는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이가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자까지 똑같으니 저는 시의 ‘二加里’가 제가 알고 있는 ‘이가리’려니 하고 단박에 기억 속에 빠졌습니다. 시의 풍경이 언젠가 제가 택배 받으러 갔던 집 풍경과 거의 같아서였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난 해안로와 바닷가 사이 비탈길을 내려서서 들어서는 그 집 마당에도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닭장이 있었습니다. “맨드라미꽃이 까만 씨앗을 품고 있는” 계절은 아니어서 “맨드라미꽃”은 볼 수 없었지만, 여름에는 분명 그 “닭장 곁에” “맨드라미꽃”이 피어 있었을 겁니다. 그림이 확 그려졌습니다. “1914년 백암동 이지로포, 그리고 소동과 청진의 일부를 합하여 이가리라 하였다.…… 도씨와 김씨, 서씨가 세거하였던 마을로서…… 이지로포ㆍ이기리진ㆍ이가리. 옛날 두 기생이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터를 잡고 늙도록 마을을 개척하면서 살았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 전하기도 하며, 도씨와 김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하여 각각 집성촌을 일구었는데 차츰 번성하면서 서로 합하여 한 마을이 되었다 하여 이가리라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정월보름이면 김씨터주와 도씨골목 신위에 제사를 지내고 4년마다 용왕제 굿을 한다.”(이상 포항시청 홈페이지에서 발췌) 그러고보니 오늘이 정월대보름이네요. 혹 용왕제 굿을 하려나요. 요즘에는 ‘이가리 닻 전망대’로 유명해져서 이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하고요. 이번 주 금요일 12회로 종영하는 <나의 완벽한 비서>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11회차에 여기 ‘닻 전망대’가 나오더군요. 포항은 얼마 전부터 여러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졌는데, 청하도 그중 한 곳입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인 구룡포가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겠지만, 청하도 못지않습니다. <갯마을 차차차>가 이곳에서 촬영되었지요. 이가리의 면 소재지인 청하시장은 ‘동진시장’으로 등장했고요, 이가리 지나 청진리에는 여주인공이 운영하던 ‘윤치과’가 있었습니다. 이 청진리를 지나 있는 흥해읍 오도리에는 ‘사방기념공원’이 있고, 기념공원을 둘러 산등성이를 오르면 정상에 드라마에서 남주인공이 살던 배가 떡하니 바다를 보고 서 있습니다. 언젠가 산행을 갔다가 마주친 이 배를 요즘은 자주 떠올립니다. ‘산으로 간 배’ 어수선한 정국 상황이 제 연상을 도왔을 겁니다.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이가리. 아무 곳이든 아무 책이든 가다가 읽다가 제가 아는 지명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시집에서 ‘이가리’를 만나서 확 끌린 건 아마 제가 아는 곳이리라 여겨서일 겁니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애초 1999년에 출간된 시집인데, 2023년에 복간되었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졌어도 날이 다시 풀려서인지 지금은 쌓인 눈이 다 녹아 띄엄띄엄 보이네요. 그래도 혹 모르니 오가는 길 조심은 하셔야겠지요. 연달아 내린 눈에 오랜 가뭄으로 마른 땅 해갈이 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50212)
첫댓글 청마 유치환를 단심으로 좇는 허만하 시인이지요.
부산에 사시지요.
청마의 지음(知音) 이영도 시인에 관한 허만하 시인의 책을 통독한 적이 있고 집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이가리 시를 썼네요.
보광님의 묘사와 같이 포항의 이가리인 것 같기도 한데요, 부산에서 오셔 보고 쓰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 기억이 조금 혼선이 있기도 한 것 같은데요.
지금 검색해보니...
허만하의 책은 [청마 풍경]이고,
이영도 연구서는 박옥금의 책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같은]인 듯해요.
두 권 다 집 서가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