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화
조각가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목각인형 하나를 발견했어.
무심코 줏어 들고 집으로 돌아온 조각가는 탁자위에 올려놓고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조각 하나 달랑 걸친 둔탁한 인형은 예리한 감성을 지닌 조각가에게는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볼품없는 작품이었다.
조각가는 다시 목각인형을 다듬기 시작했고
그 둔탁한 목각은 몰라보게 변모되기 시작했다.
며칠후 조각가의 탁자위에는 도저히 믿어지기 않을만큼 아름다운
여인상이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조각가의 탁자위에는 또 다른 조각이 여러개 있었고
그건 모두 여인상들이었다.
어느날 밤 장난기 많은 요정이 나타나 별이 달린 노란막대를 "탁" 치면서
그동안 막혔던 여인상들의 말문을 열어 주었다.
조각들은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모두 조각가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여인상들!
먼저 말문이 터진 향나무조각이 말을하기 시작했다.
난 그분이 어릴 때부터 정원에서 손수 키우던 향나무야!
그는 나에게 정성껏 물을 주었고, 나를 영원히 그의 곁에 두기 위해서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켜 준거야.
그분이 나를 만들 때의 따스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어.
그의 하얀 손이 내 아름다운 가슴을 통증없이 부드럽게 조각했고
이멋진 엉덩이도 만들어 주었잖아!
그분은 아마 나에게 가장 깊은애정을 가지고 있을걸?
그 예기가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도톰한 대리석 조각이 질세라 한마디했다.
그분은 나의것,
나의 찬란한 태양이야!
너무 눈이 부셔서 감히 바라볼 수가 없었어.
찌르르 내 심장까지 파고들던 그 눈빛!
불타오르던 그의 혈기와 열정으로 나같은 돌덩이를
이토록 아름답고 매끈한 피부를 만들어 주지 않았겠어?
나는 그의 강렬한 눈빛과 입김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걸작품이란 말이지!
아 !
내몸을 적시던 그의 땀방울과 숨결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누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는 청동의 여인상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분이 처음 나를 찾아 왔을 때,
단번에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예감했었어.
아니나 다를까 그 많은 쇳덩이중에 나를 선택했고,
나는 그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서 예까지 온거야.
나야말로 그분이 선택한 운명이지 않니?
거듭되는 시행착오로 그의 내면의 갈등은 참으로 나를 아프게 했고,
내가 탄생하는 그날 그의 환한 웃음과 탄성은,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둘겨져 만신창이가 된 내 육체의 고통을 순식간에 잊게 해 주었지.
나야말로 그의 고뇌와 열정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명작이란다.
"후후"
보라구 이멋진 에스라인의 몸매와 각선미를~
찰흙으로 만든 점토 여인상도 지지 않았다.
나야 말로 그의 사랑을 듬뿍받고
탄생한 최고의 걸작이지!
한낱 고령토의 부스러기였던 나에게,
따스한 물을 부어 그의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반죽하고
주물리기를 수십번, 수백번,
그의 땀방울과 나의 세포가 뒤엉키어 하나가 되었을 때의
그 황홀함과 쾌감으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고 ,
지금도 내몸엔 그의 향기로운 체취와 땀이 배어 있단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유약을 발라 이토록 신비스런 빛깔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는 나에게 생기를 불어준 신이란다.
목각인형은 조용히 그녀들을 지켜보았고 실제로 눈에비친
그 조각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구석 한켠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채광이 들지 않는 어두운곳에서 삼나무로 만들어진 조각이
흑흑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커다랗게 균열이 있었고 다리는 하얗게 부식되어 있었다.
삼나무여인상이 울먹이며 말을했다.
나는 그의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작품이란다.
내가 완성되던날, 그는 나를 부등켜안고
드디어 내 꿈을 이루었노라고 탄성을 질렀지.
푸른 동맥이 비칠듯한 가녀린 팔과 다리,
소녀의 청순한 이미지를 담은 얼굴에 오똑한 콧날을 세운후,
마지막으로 동공을 만들어 주었을 때,
나는 벗은 나의 모습으로 인해 그를 바라 볼 수가 없었어.
삼나무소녀상은 더이상 말을 못하고
또다시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어둡고 후미진 곳에는,
조각가의 실패작들이 균열이 나고 부서진채
허망한 눈빛으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깨긋이 손질해 줄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채 하루 속히 조각가의 테이블위에
다시 올라가게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목각인형은 속으로 울기 시작했다.
자기만을 사랑해주고 볼품없으나마 있는 그대로 아껴주었던
예전주인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움직일수 없는 목각인형은 이미 주인이 되어버린 조각가의
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역시 볼품없는 자신의 몸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빚어준,
조각가의 따스한 손길을 잊을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조각가는 또 하얀빛을 띄는 규암덩이를
작업실로 들고 들어왔고 밤새워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빛은 빛이났고 뜨거워진 가슴은
또다시 예전처럼 열정을 토하기시작했다.
조각가의 정원에서
낮잠을 자던 요정은 밤낮으로 수선거리는
여인상들의 수다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녀들의 말을 빼앗아 가기로했다.
순식간에 말을 잃어버린 여인상들은 그날 이후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열심히 작업하는 그를 조용히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하는 그를 여인상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손에서 탄생될까?
하는 기대감과 질투의 눈빛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예외없이 작업시간이 길어진 조각가는 갈수록 지쳐있었고,
하얗고 부드러운 손은 점점 거칠어져갔다.
어느날!
조각가의 작업실에는 하얀규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상하게도 그조각에서는 신비로운 빛이 흘러 나왔다.
그 아름다운 빛은 방안 구석 구석마다 비추기 시작했고,
구석지고 후미진곳에 버려진채, 균열이가고 부식된 여인상들에게도 비춰지기 시작했다.
다투며 서로 잘났다고 우기던
여인상들은 그 빛을 받는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조각가는 더이상 여인상을 만들지 않았다.
빛을 발하는 그형상을 만드는 동안에
조각가의 가슴에도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에는 더없는 온유함과 평화가 서려있었다 .
그가 수많은 여인들의 형상을 빚고 있는 동안에 신은 한 인간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아있는 조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