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
구름처럼 떠도는 시각들
황정산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이다.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있는 자가 이기는 자다.” 중국의 전설적인 무술인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 <일대종사>라는 영화에서는 주인공 엽문이 한 유명한 대사다. 서있는 것은 이기는 것이고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어 결국 수평으로 눕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최후까지 수직으로 서있고자 했던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결국에는 수평으로 눕는다. 황동규 시인의 최근 시편들은 바로 이 눕는 것에 대한 사색을 보여준다.
시들어 가지에 붙어 바래거나
사방에 한바탕 꽃잎 날리거나
꽃은 진다.
녹음이 사방을 녹색으로 칠하면서
생명은 점점 더 넓은 데로 흐른다. 그 흐름 속에
꽃자리에 크고 작은 열매들이 정성껏 앉혀진다.
구름의 옷자락 점차 짧아지고
나무에 단풍이 왔다 간다.
잠깐 한눈팔다 보면 열매 있던 곳이
텅 비었다.
이름 모를 새 하나 길 찾듯 오가다 사라진다.
꽃, 열매, 텅 빔, 이 세 자리를 스쳐간 아찔한 시간의 손길,
어느 한 둘만 느껴보고
삶을 한 눈에 꿰어 봤다 할 수 있겠는가?
― 「아찔한 시간의 손길」 부분
시인이 말한 “아찔한 시간”은 꽃이 지는 시간이며 녹음이 단풍으로 변하는 시간이고 또한 “열매 있던 곳이 / 텅 비”는 시간이다. 그것은 생명이 그 짧은 삶을 마감하며 시들어 가는 시간이다. 그 사라지는 시간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면 온전한 삶을 살았다고 또 그 삶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바로 이 사라짐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렇게 한 삶이 생이 다하여 지거나 눕거나 사라지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음 시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해 주고 있다.
바람이 이는가, 꽃잎들 흩날린다.
벼랑 앞처럼 가파르게 긴장된다.
여기저기 꽃잎 땅에 내려 뒤집히다 말다
꽃길 하나 깔린다.
…(중략)…
독무 멋지게 추다 자리 뜨는 모양새도 춤이 되는
호랑나비는 못되어도
무뎌진 더듬이에 신경 쓰다 꽃비 맞고 황홀해져
새로 날개 비벼 편 나비 되어 날다
꽃길 속에 슬그머니 몸을 누일 수 있을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삶의 짐 다 부려놓고
누워 있는 홀가분한 꽃잎들,
휘몰이 바람 불 때
다들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을까,
날개로 날던, 몸통 채 바람에 날리던?
― 「날개 비벼 펴고」 부분
시인은 떨어져 땅에 깔린 꽃잎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것은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면서 “벼랑 앞처럼 가파르게 긴장된다.”라고 표현하는 구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한 생명이 가장 화려한 시절을 다하고 쓰러져 소멸해가는 과정을 보는 일이기 때문에 슬픈 일이다. 노시인에게 이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 것은 그리 범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화려했던 자신의 젊음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한편 “꽃길 하나 깔린다.”라는 표현에서처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짐 다 부려놓고 / 누워있는 홀가분한” 시간이기에 그러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홀가분함이 꽃잎들로 하여금 누워 수평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바람 한 자락에 하늘로 다시 수직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만든다. 그 날아오름의 순간을 시인은 “날개 비벼 편 나비 되어 날다”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수평으로 눕는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무게를 다 덜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쓰러져 죽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비상을 위한 또 다른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이렇게 나는 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생명의 또 다른 순환의 한 과정이다. 다음 시는 바로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른 잎을 땅에 쏟아 붓다 새파래진 바람 속에
깨알보다 조금 큰 자귀 씨 하나 날고 있다.
눈에 간신히 띌 만큼 작아 마음에 든다.
날 때 된 새끼를 어미 새가 둥지에서 밀쳐버리듯
오랫동안 집이었던 꼬투리가 마음먹고 튕겼겠지.
―(중략)―
가게.
생지生地에 내리면 살다가 죽고
사지死地에 들면 죽었다 살 것이네.
― 「자귀 씨 날다」 부분
씨가 바람에 날려 멀리 가는 것은 생명의 자기 확대 과정이다. 씨가 새로운 삶을 위해 멀리 날아가는 것은 “꼬투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죽음이 곧 새로운 생명의 안착을 위한 것임을 꼬투리를 알고 씨를 “마음먹고 튕겨”낸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고 죽은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생지에 내리”든 “사지에 들”든 별로 상관할 바는 아니다. 살다가 죽건, 죽었다 살 건 모두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삶의 고통도 또 그 끝에 오는 죽음의 과정도 아름다운 초월의 과정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 시는 바로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싸락눈 흩뿌리다 갓 멎은 아침
동회로 돌아가는 길모퉁이
커다란 새의 마른 날개 죽지 같은 어깨 귀밑까지 올리고
밀차 뒤에 서 있는 야쿠르트 아줌마
억지로 띈 미소처럼 떨고 있다.
스웨터 껴입고 모자 눌러쓴 나도
같이 동영상에 잡힌 새처럼 떨었다.
밀차 앞으로 간다.
아줌마가 올렸던 날개 내려 밀차 뚜껑을 열자
하얀 김 한 줄기
밧줄처럼 빙빙 몸을 꼬며 올라온다.
가만, 장갑 벗은 김에
밧줄 잡고 공중에 오르는 세勢 한번 취해볼까?
― 「체감온도 영하 20도」 전문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기온은 온대 지방에서 살아 온 우리에게는 극심하게 가혹한 환경이다. 시인은 그것을 “동영상에 잡힌 새처럼 떨었다.”라는 참신한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새는 날 때 비로소 새로서의 존재 가치를 갖는다. 그의 날개는 날기 위해 발달했고 그의 뼈는 날기 위해 속을 비웠다. 하지만 동영상에 잡힌 새는 그 몸짓이 아무리 우아하고 아름답더라도 파르르 떠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가혹한 삶의 조건이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고 우리의 꿈마저 짓밟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 겨울 혹한에서마저도 삶을 위해 밀차를 끄는 아쿠르트 아줌마가 바로 그다. 아줌마가 밀차의 뚜껑을 열자 따뜻한 삶의 열기가 솟아오른다. 그것은 이 모든 가혹한 현실을 뛰어 넘어 저 높은 곳으로 수직으로 오르려는 사다리이고 밧줄이다. 시인은 바로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물론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세 한번 취해” 보는 몸짓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세가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시인은 믿는다.
황동규 시인은 이런 몸짓의 가장 매혹적인 형태가 바로 시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가을꽃도 비 개이면 새 색 꺼내놓네.
시의 무늬 탁탁 튀게 짜시게.
올해는 단풍도 전과 달리
살고 죽는 일 나 몰라라 타고 있네.
새 시구詩句는 약포에 들러
사약의 잔뿌리라도 조금 구해
몽혼주夢魂酒 한 병 재놓고 짜시게.
― 「시가 사람을 홀리네」 부분
시인의 눈에 올해의 단풍은 가장 아름답게 타고 있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 “살고 죽은 일 나 몰라라 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초월을 그려내고 의미화하는 것은 결국 시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짜시게”라는 특별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살고 죽는 일을 모를 정도로 초월적인 태도를 가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도 초연해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반대로 시인은 그것을 구태여 “짜다”라는 말로 얘기하고 있다. 시쓰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시 한 수가 “사약의 잔뿌리”가 되어 결국 꿈과 죽음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정신의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이제 여든이 되고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지 60년째 되어가는 말 그대로 원로시인이다. 앞서 살펴 본 최근 시들을 보면 이런 ‘노년’과 ‘원로’라는 말에 걸맞게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의 시적 이력의 무게만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시와 시어에 대한 모색과 탐구가 여전히 진지하고 예리하다. 후배 시인들을 각성하게 만드는 그의 시적 작업들에 경외심을 금할 수 없다.
황정산 |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등단. 저서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