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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모자상봉
고등학교 이 학년 2학기 때였다. 평소처럼 학교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는데, 고함이 열람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성학아! 합격했다, 성학아 합격했다!”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다.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로 달려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하시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소리로 “성학아 합격했단다!”하시며, 울먹이며 나의 등을 와락 껴안는다. 온몸이 땀과 열기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도서관의 모자(母子) 상봉, 심야 도서실을 울린 고함! 다 큰아들을 껴안고 흑흑 흐느끼는 어머니, 당황하여 쩔쩔매며 서 있는 나는, 영문을 몰라 바라보는 눈길에 둘러싸여 짧은 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한밤중에 울리는 고성과 흐느낌에 놀라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웅성거리며 모자 곁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시선과 마주치자 무안스러워 고개도 못 들고 가만히 어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제자리로 돌아가서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뒤로하여 정적 속에서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따스한 손을 감싸 쥐었다.
우리 집은 면 소재지에서 십 리 이상 떨어진 시골 농촌이었다. 일 년 내내 경찰이 순찰 한 번 안 하는 두메산골이다. 면내(面內)에서는 관공서 등에만 전화가 있고, 마을에는 공동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다. 모친은 자전거를 탄 경찰이 마을에 나타나서 성학이를 찾자 더럭 겁부터 나더라며, 경찰채용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두근두근 경찰에 놀란 것보다 더 놀라셨단다. “등록만기가 내일인데 아직까지 등록을 하지 않고 있으니 보고해야 한다. 등록 여부를 알려 달라고 하더라. 시험은 보았느냐?”하시며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신다. “경찰채용시험에 응시하였으나 합격 여부는 몰랐다.”하며, 여름방학 때 도서관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문의 경찰공무원 채용시험 공고를 보다, “응시자격과 시험과목, 병역(兵役) 등 조건이 유리하여 응시하였다.”라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씀드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열차통학을 하였다. 당시에는 학생들의 등·하교시간에 맞추어 통학열차가 운영되고 있었다. 멀리 곡성, 압록, 구례의 학생들이 순천에 있는 중·고교에 통학하며 공부하였다. 구례구역 옆에 ‘내구역’이 있었는데 농촌인구 감소로 폐쇄되었다. 새벽의 칼바람을 맞고 눈비를 피하며 역에 가면 기차가 연착하여,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기다리다 오는 차를 타고 출발한다. 순천에 도착하면 책가방과 도시락, 교련복을 챙겨 헐레벌떡 뛰어 가도 지각하여 벌 받은 때가 엊그제 같다. 나의 소년기에는 면내에 중학교가 없어 진학을 못했는데, 요즘은 학생이 줄어들어 학교가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어 안타깝다.
자친(慈親)께서 도서관에 오신 날은 순천 시내에 셋방을 얻어 자취할 때였다. 모친(母親)께서는 온종일 일하시다 집에서 내구역까지 오리(五里) 이상을 걸어가, 여수행 막차를 타고 가다 순천역에서 하차하셨을 것이다. 고무신을 끌고 언덕을 오르며 골목을 돌고 돌아 자취방에 도착하셨겠지. 자식이 없자 다시 어둠을 헤치고 허둥지둥 헉헉대며 학교 도서관에 오셨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있는 그 많은 학생을 상대로 일일이 아들을 찾을 수가 없자 대뜸 ‘‘성학아!’’하고 소리쳤을 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한시바삐 합격 소식을 알리려 했으나 내가 없어 기다리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무작정 ‘순고도서관’을 찾아가서 학생들을 향하여 내 이름을 불렀단다. 오뉴월 뙤약볕에 꺼멓게 그은 얼굴, 후줄근한 모양새의 볼품없는 촌부(村婦)가 갑자기 나타나 도서관에 턱 버티어 서서, 전혀 주눅이 들거나 굽힘 없이 열람실이 터져라 “성학아!”하고 외친 그 큰 힘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 이 일을 겪은 뒤부터 현재 있는 자리를 수시로 가족에게 알리며 주변을 정리 정돈한다.
이튿날 호적등본 등 여러 서류를 갖춰 등록하고, 경찰종합학교에 입교하기까지 달포를 더 다니다 학교를 자퇴하였다. 정든 교정, 의지와 지조를 상징하는 교화(校花) 매화와 기상과 진취를 표상하는 교목(校木) 은목서의 긴 숲길을 터벅터벅 걸어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지금은 학제에도 없는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다 군에 입대하였다. 사실은 정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대학을 간다 하면 얼빠진 녀석이라 비난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한번은 땔감을 해오다 허기져 지게를 도중에 세워두고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가서 지고 온 일도 있었다. 허약체질이라 등짐품앗이는 가급적 피했다. 제대 후에는 ‘지게만은 벗어나자!’하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제대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 가능할까. 소원을 이루는 것이 쉽진 않겠지. 지게를 면하고 가난을 벗어나려면 무엇을 할까를 매일매일 생각하며 제대를 기다린 것이다. 대학을 못 간다면 헛된 몽상이 될 것이기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사람 구실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려면 대학을 가야 하였으나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길을 찾자는 각오로, 휴전선의 철책을 붙잡고 북녘을 향하여 ‘배우자, 대학을 가자, 꿈을 이루자!’하며 굳은 맹세를 하였다.
강원도 화천 백암산의 최전방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제7528부대 5연대 1대대 본부중대 통신병으로 복무하던 중, 때죽나무의 흰 꽃이 늘어진 오후의 어느 날 개울물에 멱 감고 이 잡다 흰깨 같은 이가 너무 많아 속옷 채로 불태웠다. 톡 톡 콩 볶는 소리를 내며 타는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다.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야당권과 대학생들의 저항이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다. 북괴의 침투 징후가 농후하다고 부대에서는 “갑호비상이다,”하며 불철주야 철책 경계근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일이 결과적으로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난 계기이다. 말로만 들었던 연대다, 고대다 하는 유명 대학교 재학생들이 데모주동자로 강제 징집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전방 전투중대에 배치되었다. 예하중대에 배속된 우수한 대원을 차출하여 대대본부로 전입시켰다. 친하게 지냈던 정화태는 고려대에 재학 중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연수를 기다리다 징집되었다.”라고 하였다. 나이도 서넛 위이며 학력이 월등한 그들이 하급자가 된 셈이다. 내가 꿈꾸던 대학생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의지가 생겼다. 이들과의 생활을 통하여 지난 세월과 장래의 암담한 처지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다.
당시는 육군 상병이었다. “허 상병님, 허 상병님”하며 상급자로 대우했으나 초라한 학벌에 스스로 위축되었다. 데모주동자라며 전방에 배치된 졸병(?)들이 선임자 대우를 하나, 제대 후에 근무처로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면 반갑다고 “어서 오세요,”하기는커녕 “없어요! 돌아가세요,”하며 문전박대를 받을 팔자가 서글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며, ‘나도 하면 되겠다!’하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나의 장래에 대하여 동전의 양면과 같은 절망과 희망을 본 것이다.
입대동기생들은 고대한 제대라며 희망에 부풀어 두 달 전부터 제대복을 구하여 다림질 하고 군화에 광을 내고 또 내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난 제대가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나의 굳은 결심을 깊게 각인시키기 위해 제대 일주일을 남겨두고 삭발을 하였다. 제대 이삼 월 전부터 기르며 다듬어온 머리이다. 제대 후에 장래를 개척할 때 시련을 이겨내자는 징표로 삭발을 단행한 것이다. 속내를 모르는 동료와 하급자는 “머리가 돌았다.”하며 수군수군, 비아냥거리는 것이 심장을 찔렀다. 포부와 꿈을 키웠고 청춘과 한을 불태웠던 군대이다. 화천의 ‘사방거리’를 자수성가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을 기약하며 평생 잊지 못할 명예제대의 성취와 감격을 고이 간직하였다.
1974년 11월에 귀향하였다. 고향집을 들어서며 둘러보니 아래채 헛간에 듬직한 새 지게가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사에 솜씨 좋은 가친(家親)이시다. 지겟등태와 밀삐는 손수 만든 것으로, 밀삐는 볏짚을 세 뼘 가량 촘촘히 땋아 끝을 한 발 정도 침을 손바닥에 퉤퉤 뱉어 축여가며 꼭꼭 비벼 꼰 새끼로 지겟다리에 단단히 묶여 있다. 누가 봐도 탐낼만한 내 눈에 쏙 드는 지게다. 전에는 ‘지게가 안 좋다’고 투정하면 아버지는 “다음에 보자!”하여 얼기설기 시늉만 지게인 것을 사용한 나다. 짐짓 ‘무슨 지게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제대허면 줄려고 큰맘 먹고 장만했다.”하시며 대견해 하신다. 그토록 오매불망(寤寐不忘)했던 제대가 지게 선물로 물거품 된 순간이다. 영광의 지게선물!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처량한 신세에 눈물만 글썽거렸다. 제대 후에는 ‘지게질은 안 하겠다’라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겨울철 땔나무를 새끼로 멜빵을 만들어 지게 대용으로 사용하며 각오를 되새겼다. 마을에 “군대 가서 미쳤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억장이 무너지고 피가 끓는 분을 삭였다. ‘석삼년을 참아야 한다.’하며, 월왕 구천은 빼앗긴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와신상담을 겪었으나, 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을 교훈으로 삼았다.
대학가기는 어려웠다. 고교 입학부터 장애에 부딪혔다. 군대생활 하며 염려하고 우려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듬해 6월 모내기 철이 되었다. 이모작 논에서 벤 보릿단을 지게질하다 발바닥에서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흥건히 젖은 고무신을 발가락이 밀리며 미끄러져 나오다 걸려 넘어져 원한과 울분, 설움으로 점철된 제대선물 1호가 박살이 났다. 엄친(嚴親)은 “군댈 제대한 놈이 장개 갈 나이에 대학 간다고!”하시며 말리셨다. 보고 있는 책을 빼앗아 던지며 “일하러 가자!”하시며 끌고 가려 하신다. 곁에 계신 모친은 본체만체하시나, 제대하고 ‘대학을 가겠다,’라고 말할 때 “잘했다, 큰아들 못 갤 친 것이 가슴에 맺혔다”하시며 격려해준 분이시다. 부자간의 갈등을 대하는 어머니는 비통한 현실을 한탄하다 화병이 생기셨단다. 우여곡절 끝에 고입검정고시를 거쳐 스물여섯 청년으로, 전남 순천에 있는 순천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기약 없는 꿈과 응어리를 간직한 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입학한 고등학교를 눈물을 삼키며 도중하차(途中下車)한 것이다.
경찰관으로 재직 중 정년을 이삼 년 앞두고부터 나름대로 심사숙고하였다. 남자의 후반생을 어떻게 맞을까 걱정이 많았다. 동료 선배들이 퇴직 후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퇴직금을 날렸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다. 현직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희소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하여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 가난한 농촌 살림에 많은 동생과 함께 대학공부도 쉽진 않았을 것이다. 7남매의 장남이다. 동생들도 이젠 결혼하고 장성해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경찰직을 선택하여 천직으로 삼았으며, 열악한 근무환경을 이겨내며 별 탈 없이 직무를 수행하였다.
뒤돌아보면 힘겨운 삶이었지만 잊지 못할 순간들도 많았다. 군대의 옛 전우들, 휴전선의 철책선, 그리운 어머니. 꼭두새벽에 일어나 기차시간에 맞추어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해주시며 잔소리 한마디 안 하신 분이시다. 부친(父親)의 성화와 마을 사람들이 미쳤다는 조롱을 “두고 보자!”하는 오기로 참아 내셨다.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가용 돈을 쪼개 “책 사 공부해라!”하시며 정성과 사랑으로 독려해 주셨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본다. 그때 도서관에 내가 없었다면 모친은 어떠하셨을까? 그 후 언젠가 이 일을 물으니 대답은 안 하시고 “늦게 핵교에 들어갔는데 졸업을 해야 할 텐데, 졸업은 해야 할 텐데!”하시며 빙긋이 웃으신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방송대학에서 그 말씀을 되뇌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신묘생(辛卯生) 철부지가 신묘년(辛卯年)의 환갑을 맞았다. 인생의 후반기에 방송대와 연분을 맺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현재 하는 일이 바른가를 반문하며 자부와 긍지를 느낀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향기 있는 삶을 살려 한다. 방송대학에서 꿈을 이루며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응어리를 다독이고 있다.
방송대의 지난 일 년은 참으로 알차고 유익하였다. ‘대학영어’에서 <창조적인 정신>을 배웠다. ‘인간과 사회’에서 <역할>을 익혔다. ‘인간과 과학’에서 새로운 앎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 ‘글쓰기’에서 「글을 읽고 이해하며 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즉, 문식성(文識性)의 중요함을 알았다. 고급의 문식성과 정보 문식성 또한 그러하다. 특히 신경숙의 『기억에 남은 얼굴·동생에 바친 큰오빠의 ‘청춘’』이란, 짧은 수필 한 편은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글 중의 큰오빠가 되어 대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었다. 구입한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 관련 참고서와 자료, 법전 등을 통하여 대학생활에 필요한 교양과 전공지식을 학습하였다.
창조적인 정신은 무엇일까? ‘괴짜’의 정의라며 “남이 보는 대로 보지 않고, 남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며, 남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언젠가 읽은 한구절이 생각난다. 역할의 의미를 음미해 본다. 나는 자식이요 두 가아(家兒)의 애비며, 가부(家夫)이고 가장(家長)이다. 머지않아 조부(祖父)도 될 것이다. 숙명적인 관계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역할이 없다. 여기에 대학생을 추가하여 직분을 다하려 한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학년을 마쳤다.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든다. ‘시작이 반이다’하는 속담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 긴 시간 철부지의 인생 역정을 반추해 보았다. 스물넷에 군대를 제대하였고, 스물여섯에 고교를 입학하였으나 자퇴, 스물일곱에 경찰공무원에 임용되어 정년퇴직하였다. 이순(耳順)에 방송대와 인연을 맺어 대기만성(?)을 꿈꾼다.
***추신
<글쓰기> 과제물 예시로 자전적 에세이 한 편을 올립니다.
200자 원고지 32매 분량이며 대학신문에 투고할 요량으로
쓴 글입니다. 괜히 쑥스럽군요. 너그럽게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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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찰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하신 허성학님(현: 경남 법학과3년)의 글 입니다.
참 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방송대학교에 큰 인재되시는 분이 오셨군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