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면동 |
리 |
지 명 |
내 용 |
군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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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군문 (元軍門) |
원군문 마을은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 당시 청군이 이곳에 군영을 주둔하면서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
고덕면 |
당현리 |
당현리 (堂峴里) |
고려시대 말엽부터 본 부락의 뒷산에 성황당이 있어서 당고개 또는 당밑마을이라 하 여 당현리라고 칭한다. 지금도 부락 뒷산에 당시 존재하던 당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 다. 일설에는 옛날에 고개너머 서당(書堂)이 있어서 글당이라고도 했으며 한자 표기로 집당(堂)자외 고개현(峴)자를 빌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두릉리 |
두릉리 (杜綾里) |
옛부터 마을앞에 큰 언덕 즉 두릉축이 있었다고 하여 두렁이, 또는 두릉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
문곡리 |
문곡리 (文谷里) |
옛날 글을 좋아하는 문사(文士)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문곡 리라고 불리었다. |
동청리 |
동청리 (東淸里) |
동쪽에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며 속칭 동챙이라고도 부른다. |
궁 리 |
궁리 (宮里) |
옛날 이 마을에는 궁전(宮殿)같은 큰 기와집이 있었다 하여 궁리라고 하였다고 하 며, 조선조 말엽에 왕실에서 하사받은 토지가 있었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
방축리 |
방축리 (防築里) |
약 300년 전부터 생긴 마을로써 방축(防築:뚝,방죽)이 있었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도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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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 (松炭) |
송탄은 한일합방전 양성군 여방면(陽城郡 餘方面) 소매면, 진위군 송장면(振威郡 松莊面) 일탄면(一炭面)의 일부였으며, 이를 통합하여 송장면 "송" 일탄면 "탄" 을 합하여 송탄으로 호칭 송탄을 옛날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숯가마로 유명하여 숯고개라 불러 "송탄"이라는 명칭이 발상된 것으로 봄. |
동삭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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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 (東村) |
일명 "영신"이라고도 한다. 원동삭동력에 있어 동촌이라고 또한 옛적에 영신현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내려오는 마을이라 영신마을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대촌(大村)마을이있는데 이곳도 영신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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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 (毛山)마을 |
옛부터 이마을은 잔솔과 풀이 무성관 곳이어서 털모(毛) 자와 산(山)이란 자를 따서모산이라고 불렀다. |
비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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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듸촌 (山稷村) |
산직촌 또는 이곡이라고 하는데 산직촌은 옛날 이곳에 산이 많아 산직이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주어진 이름이고 이 어원이 변하여 "산듸촌"이라고 하며, 광복이전 일본인들이 산을 개간하여 배과수원을 만들었다고 하며 지금도 배과수원 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이곡부락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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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랭이 (裁蘭里) |
옛날에는 자란리(裁蘭里)라 하였고, 자란꽃이 피는 자란산이 있어 산이름에서 딴이름이고 그후 어원이 변하여 재랭이라고 부르며 또한 그곳에 은행나무가 많아서 은성(銀城)이라고 한다 옛부터 안동"권"(安東"權")씨가 대대로 살고 있으며 지금의 평택중학교와 인접하고있다. |
세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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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실 (銀室) |
이곳의 지형이 뱀형을 띄고있는 형국인데다 은행나무가 많았고 골짜기를 이루어 음곡(陰谷)이라 부르다가 은실로 변칭 되었다. |
소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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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벌 |
평택은 유명한 평택평야가 있고 광활한 곡창지대이다. 조선조 임진왜란 선조 정유년(1597년)에 왜군은 전라도 남원 전주를 짓밟고 충청도 공주를 휩쓴뒤 수도함락을 위해 평택 소사벌로 진군하려는 것을 조.명 연합군이 신속 하게 기상천외한 작전 으로 원숭이를 이용한 공격으로 이에 왜군진중 일대는 혼란을 일으켜 패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둔것으로 소사벌의 대회전은 평양 싸움보다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
신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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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高棧) |
이 마을 전면에는 높은 통복교가 있어 부락에서 보면 높은 다리가 섰다하여 높을 "고(高)"자와 다리"잔(棧)"자를 따서 동명(洞名)했다. |
유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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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동 (柳川洞) |
유천동 마을은 동남향으로 안성천이 유유히 흐르고 버드나무의 숲이 울창하여 생긴 이름이다.옛날 한때는 양성현에 속하였고 진위군 병남면에 편입되어 있어 "진위당 버드나무 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이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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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마을 |
1609년에 출생한 인조병자호란때 척화신으로 삼학사중 한사람인 추담 오달제(秋潭 吳達濟)와 1482년 출생한 선종때 대정치가이며,성리학자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 빛나는 두사람의 충의 열사가 자라난 곳으로 "이충마을"(二忠마을)이라 칭함. |
지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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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성 (蔚城)마을 |
어느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성을 쌓았다는 곳이라하며 도한이 근처에 태미산이 있는데 그산을 비롯한 자그마한 산들이 마냥 울타리처럼 삥둘러쳐져 있어서 울성리라 불리우 게 됐다고도 하며, 마을의 형성은 약 1500년으로 보고 있다. 건너마을 또는 작은마을 이라 부르며 고증할길은 없으나 고로들의 구전되는 바에 의하면 승군(僧軍)이 배치됐 던 일과 장터가 있었다하여 "장터거리"라고도 했고 대장간이 있었다고 전한다 |
칠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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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괴마을 |
공동우물이 옛부터 있었고 그 주변에 7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그 우물과 느티나무의 신령으로 7명의 장사가 태어 났었고, 이로 인하여 일곱칠(七) 느티나무괴(槐)를써 칠괴마을이라 전해옴. |
통복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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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촌 (洛村)부락 |
즐거운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낙촌"이라 하였고, "점촌(店村) 이라 하였는데 이 점촌이란 구한말때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이 은거하면서 웅기를 구워만들어 살아왔다는데서 점촌이라 불렀다. 그외 지역은 대개는 야산지대로 광복이전에는 일본 사람들의 과수원과 전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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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거리 (東三巨里) |
지난날에는 동삼거리라하여 지금의 구 우시장 근처에 몇집이 살고 있었다. 동쪽으로세갈래 길이 있었다하며 또 서쪽으로 세갈래길이 있었는데 여러집이 살고있어 서삼거리라 하였다. 평택의 농산물의 집산지로 발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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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리 (新德里) |
지금의 평택초등학교 앞 제방너머에 있다.제방은 도로가 됐지만 이 제방은 광복이전때 쌓은 것이다.신덕리는 일명 신덕포 (新德浦)라고 했다.평택읍 당시의 유일한 포구(浦口)로서 광복이후 까지도 소금,새우젓,기타 해산물이 배로 들어 오는가 하면 곡물도 선착하였던 곳이기 때문에 주막도 생기고 상점도 있어 흥청대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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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월 (倉越) |
창월은 소작료로 받은 곡물을 뱃터에서 수용하는 관계로 큰 창고를 지었고 이로인하여 노무자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주거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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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복동 (通伏洞) |
속명 통복갯벌 동네가 생겼다하여 "통복갯"으로 불렀다. 그리고 통복천이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기 때문에 통복동이라 하였고 평택의 중심상가로 발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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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복천 |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고성 산루에서 발원하여 칠곡저수지 를 거쳐서 동삭동 서재를 통과, 통복교를 흘러 안성천으로 서류하는 약12KM에 달하는 소하천으로서 원곡천 또한 서재천 통복개천으로 부른다.서재천에는 평택읍 당시의 상수도 집수암거가 최초로 설치되었다. 한편, 동남쪽 용이
동에 있는 "배다리"저수지에서 흐르는 개울이 이곡 부락을 통하며 통복천의 지류가 된다. |
평택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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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동 |
옛적에 평택동은 평야지대로 못이 많고 질펀하여 황무하였던 곳이었다. 장마철 홍수가나면 서해안의 조수에 물이 밀려 밀물이 빠지기가 더디어 더욱 웅덩이로 변했다. 이러한 못으로된 지역을 개척해서 주민이 차츰 늘어나면서부터 넓은들이란 뜻에서 평(平)자와 못(澤)자를 따서 평택으로 부르게 되었다. 1946년 대홍수를 겪고나서 철도남쪽 통복동 일대에 있던 구시가지를 옮기는 기운이 싹트고 6.25동란이 일어난후 구시가지는 전화(戰火)로 초토화되어 1952년 부터 시가지 개발계획에 따라 평택리가 형성되어 1986년 1월1일 시승격 에 따라 평택동으로 부르게되었다. |
팽성읍 |
객사리 |
객사리 (客謝里) |
고구려시대 현청(지금의 군청)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감(원님,사또등) 이 유숙하고 있었으며 벼슬아치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 관청을 찾아오는 양반들을 위하여 접대하는 객관(客官)을 세웠던 곳이었기에 객사리라고 전해 내려 오는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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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 (南山里) |
이 마을은 고을 관청의 남쪽 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남산리라고 하였으며,1리(里)는 약 200년전 진주강(姜)씨가 정착하고 봉화정(鄭)씨가 많이 들어 왔다고 전해지며 2리(里)는 해방후 새로이 25세대가 입주하여 정착한 마을이다 |
추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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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말 |
백제때 하팔현에 속한 마을로 군용마(軍用馬)를 사육하여 바쳤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추팔리 (秋八里) |
전설에 의하면 여덟개 고을에서 물이 흘러와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풍년을 뜻하는 가을추(秋)자와 물길을 의미하는 팔(八)자를 따서 부른 마을 이름이다. |
노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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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와리 (老瓦里) |
백제 하팔현때 동면으로, 또 아산현 동면으로 있었던 마을로써 그후 노연리(老連里) 라고도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서 노련의 노(老)자와 와야동의 와(瓦)자를 따 서 지어진 이름이다. |
양천 (良川) |
1950년대 7월에 수해로 인하여 평궁리에 살던 소정남씨가 이곳에 최초로 집을 짓고 차츰 마을이 형성되어 새동네라고 했고 물맛이 좋아 양천(良川)마을 이라고 한다 |
와야리 (왜골) |
1800년경에는 충청도 천안군에 예속하였다가 1880년경에 진위군 동면 와야리로 되었으며 그후 1900년경 경기도 평택 부용면 와야리로 바뀌어 내려온 마을이다. 옛날에 봉(奉)씨네 들이 와가(瓦家) 다섯채를 짓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와(瓦)자를 따서 와야골,와야동,왜골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평궁리 |
내월 (內越) |
상궁리(上宮里)라고 하며 속칭 내월 동네라고 한다. 일제시대 땅을 측량할 때 상궁 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상평 (上坪) |
상당히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병술년 큰 홍수때 마을이 황폐되어 원래 주 민들은 떠나가고 그 후에 재건된 마을이다. 이 곳은 원초마을로써 원상궁리(元上宮里) 였으나 1932년 평궁리로 되었고, 지리적으로 위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평(上坪)이라 고 불리어진 이름이다. |
신대 (新垈) |
상궁리(上宮里)에서 따로 떨어져 새로 생긴 마을임을 뜻한다 |
평궁리 (坪宮里) |
행정구역 명칭변경으로 인하여 상평리(上坪里)의 평(坪)자와 상궁리(上宮里)의 궁(宮)자를 따서 평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궁리 |
신궁리 (新宮里) |
신흥마을과 하궁(下宮)마을 가운데에 이어져 있으므로 행정 구역 개편시 신흥리(新興 里)의 신(新)자와 하궁리(下宮里)의 궁(宮)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
두리 |
누촌 (樓村) |
약 180년전 평택현 당시에 누정(樓亭)이 있었다고 하여 누촌 으로 불리었다고 하며, 산의 지형이 다락처럼 생겼다고 하여 다락말로도 부르고 있는데 다락이라는 어원도 누정(樓亭)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
두리 (頭里) |
약 100년 전에 마을이 생겼는데 마을입구에 있는 산이 와우 형(臥牛形)으로 소의 머리와 같다하여 머리를 머래로 불렀으며 한자 표기로 두리(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
신호리 |
신호리 (新號里) |
호치(虎峙)부락의 호(虎:한자표기는 다름)자와 신촌(新村) 부락의 신(新)자를 합하여 행정구역 개편때에 신호 4개의 리(里)로 구분되었다. |
호치 (虎峙) |
속칭 범고개,범치말로 불리는데 옛날에 산이 울창하여 범이 나타났다고 하여 범고개 즉 호치(虎峙)라고 했으며 어원이 변하여 호틔라고 한다 |
근내리 |
근내리 (近乃里) |
마을 모양이 그네모양 같다고 하여 그네리라고 이름 하였으며 한자 표기로 근내리(近乃里)로 쓰게된 동기이다. |
석봉리 |
석봉리 (石峰里) |
옛부터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은 안성천(安城川)의 하류
이며 서해안의 갯벌이다. 홀로 떨어진 자그만한 산봉우리가
바다 물결을 타고 앉아 있는데 그 산봉우리에는 검은(黑) 돌이
있다하여 고려시대부터 생긴 이름으로 검은돌이라고 했다고
하며 한자로 흑석리(黑石里)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흑자를
빼고 돌 봉우리라는 뜻으로 석봉리(石峰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
원정리 |
원정리 (院井里) |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 예종때 이 곳에 탑상골이 있어서 원정사((院井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약 500년전 조선 성종때에 온양방(方)씨 17대 선조가 정착하게 되어 절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도 하며, 물맛이 좋다하여 원정 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방씨 집성촌이며 수령 350년 가량 되는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방씨 선조가 자손들이 잘되기를 기원하며 나무를 심을때 보리씨앗 서말을 넣고 심었다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 |
도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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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리 (棹頭里) |
옛날에는 서해안의 연안에 접한 초생지대이다. 지금은 간사지를 간척하여 광활한 옥토로 변한 곳이다. 이마을 정운봉(鄭雲鳳) 옹의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동명(洞名)이 돈두정리(頓頭亭 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취가 없지만 평택현지의 기록에는 서면(西綿)에 정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서해 경관이 좋은 곳으로 바다로 왕래하는 중국의 사신들도 이 정자에서 쉬어갔다고 하였으며 이 마을 동구(洞口)에는 높은 바위벼랑이 있는데 이 바위를 돈두암(敦頭岩)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행정 구역 개편때 지리적 측면에서 서해 바다 조수가 드나드는 곳으로 돛대배가 왕래하므로 돛대도(棹)자와 돈두암의 두(頭)자 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
말랭이 |
말랭이란 언덕바지를 형용하는 말로 언덕마을이라는 뜻으로 쓰여진 이름이다. 행정 구역 개편때에 도두1리에서 4리로 분리 되었다. |
신흥 (新興) |
속칭 암기원동네라고도 부르는데 갯벌을 간척하여 암기원 들, 즉 전답을 만들면서 생긴 마을로 새로 흥하라는 뜻에서 불리 어진 이름이다. |
함정리 |
서원말 (書院) |
옛날에는 경정리(鯨井里)라고 하였는데 등같은 고래가 나타 났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서원말이라 한 것은 조선시대 포의사(褒義祠)라는 서원이 있었던 마을로유명하다. 서원말은 후대 사람들이 선말이라고 불리어져 온다. |
함정리 (咸井里) |
옛날에는 함정촌(咸井村) 또는 함등촌(咸登村)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초엽에 경정리(鯨井里)와 함등촌(咸井村)을 합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신대리 |
병창 (새터) |
새터라고 불리우며 6.25때에 강원도 철원군 주민들이 경북 영천(榮川)을 통과하여 이곳을 정착지로 하고 간사지를 간척 하여 터전을 잡았다고 새터라고 한다. |
신대리 (新垈里) |
조선시대 말엽에 마을이 형성되어 새터라고 불렀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한자 표기로 새신(新)자와 집터대(垈)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
본정리 |
본정리 (本井里) |
백제때는 아술현(牙述懸)에, 신라때는 직산(稷山)땅에, 조선 시대에는 평택현에 속하 였으며 속칭 새나리 또는 신나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행정구역 개편시 본언리(本堰 里),경정리 (鯨井里) 일부가 합쳐져 본(本)자외 정(井)를 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
노양리 |
계양 (桂陽) |
500년된 노목(老木)이 있어 계양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
노산 (老山) |
일명 노하리(老下里)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서해 아산만의 연안에 있는 포구(浦口)로서 소금과 해산물의 선착장으로 큰 창고가 자리잡고 있었고 어부들의 왕래가 흥청대어 자못 번성한 곳으로 가구가 수백호에 이르 렀다고 하며 시집 온 새 각시가 집을 잃을 정도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어란(魚卵)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며, 노산 (老山)이란 산에 붉은 꽃이 만발했다고 하여 꽃동산이라고 부르는 데 지금은 레이다기지(K-6)가 서 있다. |
노양리 (老陽里) |
계양(桂陽)마을과 인처리(仁處里),노산리(老山里.老下里)의 두 마을이 행정구역 개 편으로 노(老)자와 양(陽)자가 합하여져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
노성리 |
노성리 (老成里) |
1934년 행정구역 명칭변경시 신성(新成)부락과 노중(老中) 부락을 합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두정리 |
대농곡 (大農谷) |
속칭 두곡(斗谷)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이 마을에는 이도 사(李道師)라는 분이 살았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농사는 천하지대본인데 이곳은 농사 짓기에 가장 좋은곳"이라 하여 대농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미군기지(K-6)가 들어서 있다 |
두정리 (斗井里) |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대농곡(大農谷,斗谷마을)마을과 월정(月井)마을을 합하여 두정리라고 하였다. |
월정 (月井) |
농고지라고도 하는데 마을의 앞뒤산이 반달형으로 보인다고 하여 월(月)자와 마을의 우물맛이 시원하다고 하여 정(井)자를 쓰게된 마을이다. |
석정리 |
서근보 (西斤甫) |
옛날에는 동네앞에 포구가 있어서 선박이 왕래 하였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석근리 |
석교 (石橋) |
속칭 흙다리라고 불렀다. 흙다리라고 부른 것은 동네 앞에 큰길이 있어서 길손들의 왕래가 잦았으므로 흙으로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석근리 (石斤里) |
행정구역 개편시 석교리(石橋里)의 석(石)자와 서근보 (西斤甫)의 근(斤)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
대사리 |
대사리 (大沙里) |
조선시대 초엽에 형성되었다는 마을로서 포구(浦口)였기 때문에 모래가 많았다고 하여 전해지는 이름이다. |
안정리 |
서정자 (西亭子) |
옛적에는 누각(樓閣)이 서쪽에 있었다고 하여 서정자라고 했으며 속칭 일곱집매(집 이 일곱개가 있었다고 함)라고 불리 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군사 시설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k-6 미군기지가 되어 있으며 도시 개발로 날로 번성하고 있다. |
안정리 (安亭里) |
행정구역 변칭변경 때에 안현(鞍峴)마을의 음표기 안(安)자와 서정자(西亭子)마을의 정(亭)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
안현 (鞍峴) |
이 마을은 마을의 위치가 말이 안장없이 달아나는 형상이라고 하여 속칭 길마재 또는 길마재고개라고도 부른다. |
동창리 |
동창리 (東倉里) |
동쪽에 창고가 있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서면 소재지로 서면(西 面) 내리(內里)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 때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고려때 염(廉)정승이 태어났다고 하여 염소말이라고도 전해진다. |
내리 |
내리 (內里) |
옛날에는 백제국 하팔현(河八縣)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였으며, 읍내에 있다하여 전해지는 이름이다. |
대추리 |
대추리 (大秋里) |
뜻은 확실하지 않으나 옛날에는 혼지머리(混池頭)라고 불렀 으며 행정구역 개편시 갯 벌과 평야의 광활한 토지에서 가을 추수때 수확이 풍성함을 뜻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
송화리 |
개화 (開花) |
이 마을은 옛날에 진달래꽃이 수를 놓은 듯 피었다고 하여 불리어진 마을 이름이다. |
송중 (松中) |
송화리의 원초마을로서 속칭 큰말이라고도 부른다. 이웃한 3개 마을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큰 동네라는 뜻에서 연유 되었다고 한다. |
송하 (松下) |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속칭 신당골로도 불리는데 소나 무숲이 우거져 있는 마 을의 아래마을이라고 하여 송하리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
송화리 (松花里) |
조선시대에 생긴 마을로써 속칭 송호동이라고도 불렀으며 송중리(松中里),송화리(松花里),개화리(開花里)의 세 마을이 행정구역 개편시 송(松)자와 화(花)자를 합하여 지은 이름이다. |
합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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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 |
속명 신기(新基) 또는 "배미"라 한다. 약 1910년 그 근처에 소사(素沙)장터가 있어 주민이 모여 들어와 부락을 형성하고 신기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바닷가로 돌출한 산봉우리에다 배를 매어 두어서 "배미"라고도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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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터 |
원래 조씨가 토작하여 살았다하여 조가터(趙家垈)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천지개벽때 떠내려왔다는 유명한 되박산이 있고, 통미마을에서 원인모르는 불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또 옛날 이곳까지 배가닿고 조개가 많이 잡힌다하여 조개터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