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인 흠을 받쳐준 당신의 언어에는 이제 받침이 보이지 않는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흠집
이광
하자나 결함 같은 비난투 말보다는
아쉬움 묻어나는 흠이란 말이 낫다
그 뒤에 집이 붙으면 애틋하게 눈이 간다
어쩌다 찍히거나 일그러진 다음에는
주류에서 밀려 나와 사뭇 달리 받는 대접
실수는 다들 겪는 일 그때 맡은 역할 같은
흠 없이 사는 길이 어디엔들 있으려나
멍들고 깨어져도 부끄러움 갖지 말자
상처는 살아있음의 증거
머물 집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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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트럭에서 사과 한 박스를 싸게 샀는데 1/3이 흠이 있었다. 가격 대비 그만한 흠쯤이야 무시해도 되었겠지만, 왠지 사과를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 트럭을 볼 수 없었다. 사과를 사서 흠집 난 사과에 대해 사과만 받으면 그가 하는 사과에 혹 흠이 있어도 받아들이려 했다. 완벽한 사과나 흠집 있는 사과나 사과의 결은 내가 결정하리라 여겼지만, 가격 대비 싼 것은 그 흠집마저 구매하는 거라고 여기는 것으로 끝냈다. 내 숱한 흠이 회자하는 것이 시인의 말처럼 ‘살아있음의 증거’들을 채집하는 복 받은 일이 됨을 이제 알게 되고 인식의 수위가 한층 오르는 느낌이다.
‘하자나 결함’은 나라는 나무에 열리는 과실을 파먹는 해충 같은 것이라고 여기면 타인의 그것들도 해충으로 부를 수 있지만 대체로 남의 ‘하자와 결함’에 더 눈이 가고 지적해서 털어내라고 하거나 털어내 주는 척한다. 그렇게 오지랖 떨 때 시인이 꺼내든 ‘아쉬움 묻어나는’ ‘흠’이라는 ‘더 나은’ 단어로 “연고” 처방을 내리며 상처에 붙이는 밴드 같은 ‘집’을 덧대어 ‘흠집’이라는 대체어로 추가 감염을 막는 묘수가 생각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찍히거나 일그러진’ 모습, 즉 흠을 보거나 보이는 것은 ‘대접’하거나 ‘대접’ 받는 것으로 갈리는 자본주의적 생태계의 ‘주류’와 비주류의 계층 이동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수’라는 덫에 되도록 걸려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은 먹이사슬의 목숨 같은 규율이다.
‘애틋한’ ‘흠집’이란 말에 일말의 강박관념마저 왜 갖고 살았는지, 왜 그리 부끄러워했는지 괜히 손해 보고 본전도 못 건진 느낌인데 외려 ‘흠’이 많을수록 심장이 살아 파닥이고 있음의 “표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한 집 한 집에 복제되어 들어가 우리는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눈과 몸과 흠이 머무는 집을 지을 내 건폐율은 내 표피의 몇 퍼센트일까?
나의 파인 흠을 받쳐준 당신의 언어에는 이제 받침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