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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음미하고 싶을 때,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처럼
하루를 마감하고 싶을 때,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칵테일 한 잔을 나눠 마실 때......
이런 순간을 상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에겐 진한 재즈음악이 들리는 듯하군요.
최고로 멋진 순간을 더 로맨틱하게,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재즈의 묘미겠죠?
며칠 전 재즈 음반들을 뒤적거리다 라이브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나더라구요.
그래서 친구 한 명을 불러 곧장 가로수길로 달려갔습니다. 언제고 생생한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가로수길의 재즈 바 'JASS'로 말입니다.
‘JASS’는 가로수길에서 매일 끊이지 않고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재즈 바인데요. 다른 재즈 바도 있긴 하지만, ‘JASS’처럼 항상 공연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날처럼 불시에 연주가 듣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아 저는 주로 ‘JASS’를 찾는 편이죠.
이날도 ‘JASS’에서는 해랑밴드라는 재즈밴드의 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아가씨에게서 흘러나오는 농염한 목소리와, 바닥부터 빈틈없이 채우며 올라오는 연주소리는 주문하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을 돌부처로 만들어 놓더군요.
20세기 초는 재즈의 시대였습니다. 엘비스 프레슬 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죠. 재즈는 블루스에서 기원한 흑인 음악이기도 했지만 재즈의 황금기였던 30년대를 통과하면서부턴 기성세대와 백인 중산층들이 즐겨 듣는 스탠더드적인 면모를 풍기게 되었죠. 이때부터 유명한 백인 재즈 싱어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도 했구요. 이 시절에는 블루스 느낌이 강한 재즈보다는 좀 더 팝 냄새가 물씬 나는 음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는데요. 서정적이면서 감미롭고 편히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싱어들의 중저음 목소리를 덧입자 재즈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는데요. 이러한 싱어들의 창법을 크룬(croon)이라고 합니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편안하게, 주로 로맨틱한 감성의 곡들을 부르는 창법을 뜻하죠. 여려 보이기만 하던 해랑밴드의 보컬 해랑이라는 여자 분도 여기에 해당 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크룬 창법의 대표주자였던 재즈 싱어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백인들이 부르는 재즈음악은 재즈의 정체성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인종차별과 박해에 따른 설움이 묻어나는 흑인 싱어들과는 달리,
백인 싱어들의 음악은 엔터테이너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로 인해 변방에 있던 재즈가 스탠더드 뮤직이 되었고, 재즈는 1950년대까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 장르가 되었죠. 그 중심에 프랭크 시나트라가 있었습니다.
뉴저지 출신의 백인으로 크룬 창법의 대표주자였던 그는 미국 의회가 주관하는 가장 큰 영예의 미국의회금메달까지 받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는데요. 당시 재즈 뮤지션들이 엔터테이너의 성격이 강했던 만큼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이력이 있는, 가장 미국스타다운 별이었습니다.
그는 재즈와 스탠더드 팝 사이를 넘나들며 재즈의 대중적 보편화를 만들어냈던 재즈의 초창기 멤버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이 즐겨 부르는 팝송 ‘My way’ 역시 그의 노래죠. ‘My way’가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의 청춘과 로망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한 걸 보면 재즈 대중화에 앞장섰던 그의 영향력은 우리나라까지 밀려들어온 것 같네요.
물론 이만큼 영향력이 있던 데에는 출중한 실력이라는 밑바탕이 있기 때문이었겠죠. 그의 낮고 짙은 목소리, 깊은 성량과 호흡 등은 여전히 재즈 보컬리스트 후배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하는데요. 특히 선율에 흔들리지 않은 채 완급조절을 하며 곡을 이끌어나가는 그의 탁월한 호흡은 아직까지도 그가 재즈 싱어로서 최고로 손꼽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다른 싱어의 얘기를 해볼까요?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서 대적할 라이벌조차 없진 않죠. 크룬 창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싱어, 그 이름도 유명한 냇 킹 콜입니다. ‘L-O-V-E’, ‘Unforgettable’, ‘Quizas, Quizas, Quizas’. 이름만 들어도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이 명곡들은 모두 냇 킹 콜의 노래입니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로맨틱한 감성의 소유자인, 이 유명한 흑인 싱어는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는데요.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빌 에반스 역시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할 정도였으니, 그의 음악적 면모와 진정성이 여러모로 두드러져 보이는 것 같네요.
그의 음악은 영화 주제가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 등장했던 ‘Quizas, Quizas, Quizas’겠죠. 흑인 재즈 싱어가 풀어낸 라틴 계열 음악으로는 최고 정점을 찍은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유의 섬세한 중저음 톤으로 진행되는 곡은 언제나 듣는 사람을 색다른 시공으로 이끌어 가죠. 이것이 바로 재즈만의 기이한 마력이기도 하구요. 재즈 싱어이자 엔터테이너로서 프랭크 시나트라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 냇 킹 콜은 때때로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흑인들 내에서도 스탠더드 팝을 추구한다는 이유 때문에 백인의 노예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재즈의 진가를 보여준 그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하죠.
이렇듯 재즈 시대의 황금기에 활동했었던 천재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로서 쟁쟁한 라이벌 관계였던 두 사람. 둘에게는 창법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전여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두 사람의 딸들이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사실이죠. 킬빌 주제가로도 유명한 ‘Bang Bang’을 부른 낸시 시나트라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이자, 60년대의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와의 듀엣곡인 ‘Something Stupid’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싱어죠.
냇 킹 콜의 딸 나탈리 콜 역시 유명한 재즈 뮤지션이 되었는데요. 그녀는 냇 킹 콜의 사망 이후 ‘Unforgettable’라는 곡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혀 재 녹음하여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녀들인데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쳤고 아버지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의 싱어로 거듭난 걸 보면, 프랭크 시나트라와 냇 킹 콜이
다시 한 번 대단하다고 느껴지네요. 최고의 능력은 다음 세대에서도 최고의 소리를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이날 ‘JASS’에서는 ‘White Christmas’가 마지막 곡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진한 재즈 음악에 마가리타 한 잔, 다비도프 한 모금이 더해지니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다비도프 연기 사이로 전해져 오는 그들의 음악은, 재즈가 선사하는 마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간 친구 역시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무대만 바라보고 있더라구요. 녀석도 시공간을 넘나들게 한다는 재즈의 매력이 흠뻑 빠진 듯 했습니다.
‘JASS’는 훌륭한 공연뿐만 아니라 그 공간 자체로도 재즈의 느낌을 마구 풍기는 곳입니다. 사장님이 소호에서 직접 공수해왔다는, 곳곳에 붙은 재즈 그림들과 공연이 한창일 때면
그 누구보다 무대에 흠뻑 빠져있는 스텝들의 표정을 보면 ‘JASS’가 어떤 의미의 공간인지 알 수 있죠.
이날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 참이나 재즈의 여운에 빠져있었는데요. 마가리타 몇 잔을 더 시키고 다비도프를 쉼 없이 피우며 프랭크 시나트라와 냇 킹 콜의 행보까지 전부 되짚은 뒤에야 그곳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아쉬움이 남았던 건 역시나, 재즈의 마력 때문이겠죠? 멋진 그 순간을 좀 더 멋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도 재즈 음악을 틀어 보세요. 시공간을 넘나든다는 그 재즈가 그 순간을 최고로 만들어 줄 겁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느끼다! 머라이어 캐리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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