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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Russian Roulette
1900년 7월 25일, 한일 연합함대가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한러전쟁이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렸습니다. 러시아 극동군의 85,000명 병력은 한국군 제1군, 제2군, 제3군의 즉응병력 64,000명, 그리고 일본에서 보내온 천진주차군 18,000명과 맞붙어야 했습니다. 물론 한국이 페트로그라드에 태극기를 꽂을 것은 아니기에, 전쟁의 목표는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했죠. 평양에 마련된 원수부에서 일행들은 대강의 전쟁목표를 구상했습니다. 영국과의 동맹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적극 개전론을 주장했던 김한립은 “러시아의 극동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지만, 실제로 전장을 경험했던 이진하와 제1군 사령관 이범윤은 현실론을 내세웠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모두 점령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이는 전쟁의 장기화를 불러 대한제국을 늪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송화강-요하 국경선 인정’이라는 제한적인 목표를 단기전을 통해 달성하는 것이 대한제국의 대전략이 되었습니다. 북양정부(일명 ‘북괴’)와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몽골 칸국이 원군을 보내올 가능성이 적다고 분석되자, 육군 총참모장 박태양은 이범윤, 이현 등의 의견을 따라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가 분기되는 하얼빈을 점령하자는 작전안을 제시했습니다. 철도망을 장악한다면 상대의 보급 역시 차단될 것이고, 이는 승리를 위한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었으니 말입니다.
특작과장 이진하 부령의 주도로 러시아군에 “선제공격 금지”라는 거짓 명령서가 뿌려지고 한국군이 여순 인근에 기만상륙을 펼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이 기만작전에 그대로 속아 주력인 서부(봉천) 주둔군을 크게 진격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군 병력이 다수 증원된 중부(하얼빈)전선에서 40,000명 가량의 한일 연합병력이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러시아는 전쟁 승리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14,000명으로 증원된 여순 수비대가 역공을 가해 요동반도에 상륙한 한국군 제1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7,000명 병력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러시아군의 유일한 소득이나 마찬가지였죠.
최신우가 영국 정보인력과의 합작으로 부랴트인 무정부주의자 조직과 접촉해 금화 8만 파운드를 대가로 바이칼호 철도연락선 SS바이칼을 파괴하면서, 러시아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는 유럽 러시아에서 증원병력을 파견하는 데 엄청난 차질이 생긴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프 브론시테인(트로츠키)’이라는 이름의 형벌부대 탈영병 무리를 받아들여 미래에 후방교란을 위한 인재로 사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종전협상을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박태양은 특작과와 제9엽병사단, 장작림의 자경대(또는 마적단)의 적절한 후방교란을 통해 병력을 재배치할 시간을 번 뒤 여순을 점령한다는 작전을 입안, 원수부의 승인을 받아 전방에 하달했습니다. 추가 파견된 35,000명을 포함한 하얼빈의 러시아군 50,000명은 제2차 하얼빈 공방전에서 한일연합군 약 37,000명 병력의 방어를 꺾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가 이 전쟁을 이길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10월 9일, 여순이 함락되고 이틀 뒤 러시아의 봉천 주둔군이 보급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항복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1900년 11월 12일, 러시아 제국의 외무대신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 백작이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한국군 병사들이 험악한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 외무상서 이범진과 일본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는 간단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1. 러시아 제국은 경자조약의 내용을 준수해 대한제국의 신(新)국경을 인정한다.
2. 러시아 제국은 남만주철도 및 국경선 너머의 동청철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대한제국에 양도한다.
3. 러시아 제국은 여순항에 대한 권리를 모두 대한제국에 양도한다.
4.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에게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할양한다.
5. 러시아 제국은 하얼빈 이북 동청철도와 그 연변지역을 군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지역의 경비는 전문치안기관에게 일임한다.
초췌한 얼굴의 람스도르프 백작은 그대로 협정문에 서명했습니다. 이는 동양 국가가 세계 최초로 서구 열강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사례로 기록되었죠. 승리에 고무된 우익 국수주의 단체들이 검은 제복을 맞춰입고 한성에서 가두집회를 벌이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모두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말입니다.
한편, 그간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이번 전쟁을 총괄한 미하일 리하초프 대공은 그 야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의 패배가 그리 큰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했죠. 아무튼 그의 과감한 행동으로 러시아는 북만주를 획득했고, 내외몽골과 준가르 지역을 독립시켜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넣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리하초프 대공은 극동 부왕직을 사임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했습니다. 중앙정계에 뛰어든 그는 역시 도시귀족들과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진정한 애국자”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마침 세르게이 비테 등을 위시한 개혁파들의 압박을 받던 차르는 기다렸다는 듯 리하초프와 그의 측근들을 내각에 등용했고, 비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실각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미래가 산산조각나는 동안, 신규영토를 관리할 남만주총독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무려 대한제국 기존 총인구의 7할에 육박하는 거대한 영토임을 감안해, 한성은 유화적인 통치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문관 가운데 총독을 선임하기로 했죠. 그 결과 이현이 초대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이 인선은 차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나, 몇 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14. 개와 늑대의 시간
1901년, 흥선대원왕을 이어 수년간 내각수상을 역임하던 어윤중이 추밀원장에 임명되며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더 이상 거대정당 입헌자유당을 관리하기 어려워진 어윤중과 당 원로들은 김옥균에게 수상직을, 박영효에게 총재직을 각각 분배했습니다. 그러나 탕평의 정치를 바랬던 원로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당내 최대파벌 ‘보국회’의 수장이기도 했던 김옥균과 이를 곧 물려받게 될 박영효는 다가오는 1903년 총선거 이후 ‘입헌내각’을 수립하겠다는 야심찬 선언을 내뱉었습니다. 즉,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번 총선에서 승리하는 자가 앞으로의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것이었죠.
입헌자유당의 간사장이 된 최신우는 주로 진보적인 도시 부르주아 및 민족주의적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받는 성심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부총재로 임명된 김한립은 특유의 합리적 계산으로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복지 확대와 대외 팽창주의, 적극적 사회개혁을 강령으로 삼는 사회민주연합을 이끌었죠. 그런가하면 동아전쟁과 한러전쟁의 영웅 박태양은 전역신청서를 제출, 그의 명성을 이용해 당내 우파이자 최대계파였던 보국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명예욕은 군인으로서의 책무보다 우선순위가 높았습니다. 보국회, 사회민주연합, 성심회는 약간의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공격적 대외정책, 즉 ‘제국주의’를 공통분모로 하여 연합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반독점법 등으로 대표되는 시장관리주의(김한립은 이를 ‘질서자유주의’로 명명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참정권 확대와 아동노동 금지, 노동시간 상한제 등 온건한 개혁을 합의했죠.
선거의 화두가 대외전략으로 향하자, 신민당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극우 국민당이 대놓고 입헌자유당의 내부경쟁에 개입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상황에서는 신민당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죠. 망명한 친오빠 이유하의 당내 영향력을 이용해 신민당의 선거전략 총괄자가 된 이진하는 현상유지적 대외정책과 과감한 사회개혁,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을 선호하는 민생위원회를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당외인사이자 남만주 총독으로서 지나친 팽창주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그리고 개입경제와 진보적 사회정책을 선호하던) 이현은 공공연하게 민생위원회의 중역들과 손을 잡고 있었고, 영수 이회영이 신민당 당수 손병희와 연합을 선언하면서 일명 ‘평화연합’이 탄생했습니다.
국민당이 결국 독자노선과 선명성 강화를 선택하고 당 원로들의 일명 ‘입헌자유당 관리위원회’가 양 연합 모두의 기회주의적 작태를 비난하고 나서면서, 선거전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대의 재벌이자 황립척식주식회사의 회장, 프로테스탄트적 배금주의자이자 노란 머리의 한국인 허도순(영어명 허버트 도슨) 역시 과열되는 선거판을 목격하고 중도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애국협회, 평화연합, 국민당, (정통)입헌자유당의 4파전으로 선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선거전은 대단히 난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서로를 전쟁광과 사대주의자, 탐관오리와 배신자, 서민혐오자와 공산주의자로 비난하는 네거티브 공작은 기본이었습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평화연합이 남만주 중국계 주민들과 노총 및 농협의 인원들을 동원해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지역별 선거장에 난입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질 수 없었던 애국협회 또한 박태양을 지지하는 간도 주민들과 재향군인회 회원들을 동원해 평화연합의 인원들과 선거장을 둘러싼 대난투극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추태는 국민당과 입헌자유당 잔류파들에게 어부지리를 선사해주었죠.
아슬아슬하던 선거의 판세를 결정지은 것은 주요 도시들에서 열린 이현과 박태양의 공개 토론회였습니다. 단 한 번도 중앙정계의 ‘대단한 인물’들이 모여 설전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한국 민중들은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전쟁영웅 박태양의 연설에 매료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언급하며 자주의식을 고취하는 발언은 그야말로 결정타나 다름없었죠. 결국 총 200석 중 69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된 애국협회 측에 내각 구성권이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다시 입헌자유당 잔류파에게 손을 내밀었고, 여성참정권, 아동노동 금지 등 최소한의 사회복지제도와 민권개혁을 단행하고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시장환경 관리에 입각한 자유시장경제를 확립한다는 조건으로 연정협상은 극적 타결되었습니다.
애국협회가 다시 입헌자유당으로 복당하면서, 과반을 간신히 넘는 의석이 충족되어 사상 최초로 입헌자유당 단독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세금을 1원 이상 납부하는 가구의 18세 이상 남성과 25세 이상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간선제의 폐해가 무력집단들의 난투극으로 변한 데 대한 성찰로서 직선제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수상으로는 김옥균의 후계자이자 보국회의 수장 박영효가 임명되었죠. 김한립은 부수상, 박태양은 전쟁상서, 최신우는 외무상서, 서재필은 내무상서, 이완용은 문교상서, 유길준은 법무상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단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보다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가지게 된 것과 별개로 총선거 기간 중 있었던 각종 자극적인 수사들과 흑색선전, 선거 난투극은 이 ‘민주적 체제’를 그 무엇보다도 극단주의와 대중영합주의에 취약한 틀로 변모시켰습니다. 정치계의 아웃사이더로 남아있던 극우 국민당이 무려 전체의 1/4에 달하는 50석을 획득하며 주류로 올라섰고, 이는 극우 정치깡패들의 활동범주를 대단히 높여주었습니다. 기세등등해진 이 정치깡패들은 연일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에 난입해 야만적 폭력을 행사했고, 악에 받힌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을 지켜줄 준군사조직을 창설하면서 상잔행위를 벌여댔습니다. 극우와 극좌의 공격을 모두 방어해내야 하는 입헌자유당 내각은 사법경찰을 국가헌병대로 개편하여 그 무장의 수준을 군대에 준하는 급으로 확충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개화를 향해 달리던 한성은 회탁의 도시가 되어갔습니다.
15. The Great War
대한제국이 이후 어떻게 되었나를 살펴보기 전에, 세계의 향방을 먼저 논해보도록 합시다. 한러전쟁 이후 러시아의 동원 및 보급역량이 생각보다 형편없음을 눈치챈 영국은 “과연 독일을 전력으로 돕는 것이 합당한가”의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독일은 독일대로 매우 과감한 전쟁계획을 입안했기에, 이 고민은 더욱 깊어졌죠. 이는 1911년 발칸 전쟁이 대전쟁으로 확전될 때 영국이 초기에 참전을 거부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발칸 연맹(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그리스)이 민족주의적 열망을 담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자, 이들의 협공에 고전하던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호출했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위기에 봉착한 세르비아가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도데카니사 제도의 보호를 명목으로 (남티롤 및 달마티아 수복을 원하던)이탈리아가 반-오스만 발칸연맹의 편을 들고 나섰습니다. 이에 당연히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참전하면서 대전쟁이 발발하고야 말았죠.
영국이 “영독동맹조약에는 각자의 타 동맹국을 원호하여 벌이는 전쟁에 대한 참전의무조항이 없다”는 논리를 이용해 중립을 지키는 동안, 동맹의 배신에 분노한 독일은 아쉬운 대로 슐리펜 계획을 발동했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동시에 침공하며 무서운 속도로 파리를 우회공격했고, 정말로 프랑스가 42일만에 항복할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와 바리케이트의 도시 파리는 쉽게 돌파당하지 않았고, 전선은 그대로 파리를 기준으로 고착되어 수 년에 걸친 잔혹한 참호전을 예고했습니다. 오히려 병력을 적게 배치한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는 결과가 나타났죠.
한편 아시아에서는 중화제국의 수상 풍국장이 1912년 5월 중화민국을 정벌하기 위해 대대적 남진을 선포하며 약 1년 4개월간의 호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중화민국의 목숨줄을 유지하기 위해 도합 15만명의 병력을 보냈죠. 양측이 모두 소득없는 공방전을 벌이고 북양정부가 점점 심한 분열양상을 보이면서, 양측은 휴전에 동의했습니다. 특히 중화제국 황제이자 공자의 후손 연성공인 공령이가 1913년 9월 후계 없이 사망하면서 양측은 명목상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합치되 광동의 민국정부가 북경 북양정부의 권위를 존중하는 형태로 교전행위를 중지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이 ‘일단’ 중지되었지만, 유럽에서의 전쟁은 오히려 더 확전되었습니다. 1913년 10월 프랑스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의해 영국 상선 ‘캐니언 호’가 격침되면서 자유당 로이드 조지 내각이 참전을 결정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마지막으로 미국에게 참전을 타전해보았지만, 평화를 공약으로 이제 막 집권한 우드로 윌슨은 프랑스의 애원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참전은 한국과 일본에게 참전의무를 만들었고, 양국 모두 국민여론이 팽창주의를 원하는 상황에서 두 동양 열강은 곧바로 협상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일본은 인도차이나에 상륙해 사이공을 함락시켰죠. 그러나 한국은 레프 트로츠키의 연해주 봉기를 은밀히 지원하는 것 외에는 크게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그때 당시의 시각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북만주와 시베리아로 진격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무너졌습니다. 1914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대규모 항명을 벌이며 니콜라이 2세가 퇴위,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지속하며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던 케렌스키 대통령은 실질적으로 그 어떠한 권력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와 전방 병력의 항명사태가 발생하며 그대로 실각했습니다. 7월 5일, 빅토르 체르노프가 이끄는 사회혁명당의 무장조직이 페트로그라드의 겨울궁전을 습격하면서 임시정부가 와해되고 러시아 인민공화국이 성립한 것이었죠. 체르노프는 혁명세력 내 비주류계파이던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의 사회민주노동당 등과 합작해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동맹국 측은 러시아에게 핀란드, 발트, 폴란드, 백루테니아, 우크라이나, 캅카스에 이르는 엄청난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러시아를 반동주의자의 손에 다시 넘겨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인민공화국 정부는 요구를 거절하고 ‘대조국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영국과 독일을 위시한 동맹국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곧 무너질 줄 알았던 프랑스는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고, 이제 그나마 끝난 줄 알았던 동부전선이 제2막을 예고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러시아의 좌익 혁명세력과 구체제의 장군들이 협력해 대조국전쟁을 선포했으니, 아주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겠죠.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인민공화국은 중요성이 떨어지는 레나 강-바이칼 호 이동의 동시베리아 영토를 포기하며 한국 및 일본과 종전협정(도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동맹국은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무려 2년을 더 싸워야 했습니다.
1915년 7월 17일, 드디어 프랑스가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항복이 곧 프랑스인 전체의 항복은 아니었죠. 노동총연맹(CGT)이 주도하는 좌익 반군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화가 치밀어 쓰러질 지경인 영국과 독일은 반란 진압에 영 힘을 쓰지 못하는 클레망소 내각을 갈아치우고 조제프 조프르 원수를 옹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대육군의 수장 조프르는 질서회복정부를 선언, 마치 1871년 때와 같이 독일군과 협력해 좌익 반군을 무참히 도륙했습니다. “그럴 힘이 있었다면 차라리 독일군과 더 싸워보지 그랬냐”고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달 뒤 이탈리아 역시 항복했습니다. 곧 서부전선을 종결짓는 상수시 조약이 체결되었죠. 프랑스는 10만명 이상의 병력과 전함 및 잠수함 보유를 금지당했고, 알제리를 비롯한 유럽 외 모든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막대한 배상금은 덤이었죠. 뿐만 아니라 칼레에서 로렌에 이르는 국경지대의 비무장을 강제받았습니다. 조프르의 군사정부는 시작부터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고, ‘누구도 원치 않는 정부’이자 ‘실패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베네토 지역과 식민영토를 상실하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어서 끝내야 했기에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를 아예 무효화하자는 급진적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렇게 1916년 2월 21일, 서부전선이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동부전선의 종결은 그로부터 약 여섯 달 뒤인 1916년 8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영국과 독일의 전쟁수행역량은 바닥나고 있었고,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무수한 인구에 힘입어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 거의 800만에 육박하는 대기록을 달성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이미 내부로부터 붕괴 위기에 처해 전선에서 이탈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측은 스톡홀름에서 강화조약을 체결, 러시아가 드네스트르강 이서 지역의 모든 이권과 주권을 포기하고 핀란드, 쿠를란트,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종전에 동의했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이미 1,500만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킨 뒤였지만 말입니다.
모든 전쟁이 마무리되었지만, 패전국은 물론이요 승전국들조차 승리의 기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고, 국가의 역량이란 역량은 모두 바닥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문명의 선도자를 자임했던 유럽 세계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잿더미를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존자’들 중에서도 그나마 나은 쪽과 아예 가망도 없는 쪽은 따로 있었습니다. 전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였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2세를 이어 새로 보위에 오른 ‘카이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그의 오랜 숙원 중 하나인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때마침 일어난 헝가리 국수주의자들의 반란은 호르티 미클로시를 포함한 헝가리계 군부로 하여금 황제의 개혁에 찬성하게 만들었고, 독일계 역시 몇 차례의 쿠데타 시도를 황제의 ’빨갱이 친구들‘이 진압하면서 ’중부 유럽의 연방‘이 성립하였습니다.
반면 후자에 속하는 오스만 제국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영국과 독일은 가망없는 술탄을 버리고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모두 마무리된 1917년, 바그다드 협정이 체결되며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습니다. 비록 여러 토후 가문들이 각자의 자치권을 향유하는 형태였지만, 하심 가문을 중심으로 뭉친 단일 아랍 왕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밸푸어 선언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강제추방되어 유럽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 전쟁의 패배자는 유럽 전체, 승리자는 미국, 한국, 일본 등 “운좋게도 유럽에 붙어있지 않는 행운을 누린”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사상, 새로운 세계가 모두를 반기게 되겠지요.
16. 대단원: Moral Hazard
1903년부터 1911년까지 총 8년간 이어진 박영효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극우 국수주의자들과 극좌 사회주의자들의 양면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국민당이 후원하는 극우 정치깡패들이 노동권 투쟁 현장을 급습하고, 다시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 결성된 전위대가 그들에게 반격해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났습니다. 전쟁상서 박태양은 ‘군을 정치에 개입시킬 수 없다’며 계엄령 선포를 끝까지 반대했지만, 참다못한 황제 이준이 1906년 박영효 수상에게 계엄령 선포를 종용한 끝에 약 14개월에 걸친 계엄정국이 이어졌습니다.
투쟁을 주도하던 신민당 중앙당 서기 이진하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국민당 총재 이용익이 실각하는 상황에서, 이 아수라장은 드디어 소강상태를 맞았습니다. 햇수로 5년째 외무상서를 지내던 최신우는 계엄이 해제됐음에도 반국가단체의 준동을 ‘끝까지 추적해 분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안방첩국”이 외무성 산하에 창설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첩기관을 외무성 관할로 둔다는 결정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러시아, 북양 괴뢰정부 등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이었지만, 그 수는 너무나도 뻔했습니다. 특히 군부와 내무성, 법무성의 반발이 매우 심했죠.
최신우의 가장 큰 정적인 내무상서 서재필은 그의 전횡을 가만히 두고보지만은 않았습니다. 입헌자유당 중역들과의 ‘사법거래’로 피선거권을 회복한 이진하가 보안국 요원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어떻게든 습격을 피한 그녀가 다시 투쟁 강도를 높이겠다며 내각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박영효와 그 심복 서재필, 그리고 당내 최대파벌 보국회는 황제를 움직였습니다. 황제 이준은 최신우에게 봉조하의 지위를 내리고 궤장을 하사해 그를 궁내대신 겸 추밀원 의원으로 봉했습니다. 이는 대단한 명예였으나, 최신우에게는 사실상의 유배나 마찬가지였죠.
이렇게 일단락이 나는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톤을 쥔 부수상 김한립과 내무상서 서재필, 법무상서 이완용은 문제의 보안방첩국을 지켜보며 다른 마음을 품었습니다. 최신우는 확실히 선을 넘었지만, 정보부문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안국은 마치 잘 벼려진 보검과 같았죠. 그렇게 1910년, 보안방첩국은 대신급 부처, 중앙정보부로 오히려 확대개편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쟁이 벌어져 박태양을 수상으로 하는 전시내각이 편성, ”북괴(북양정부)와 야만 러시아를 정벌하고 동아 전체를 대한의 발밑에 두어야 한다”는 민족적 열망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영웅 박태양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한의 현재 역량으로는 ‘서쪽의 동맹국들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습니다. 중국 전선은 민국의 숨을 붙여놓는 데 그쳤고 북만주에서도 지루한 소강상태만이 이어졌습니다. 흥분한 대중들은 자신들이 그리도 찬양했던 영웅 박태양을 ‘무골장군’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죠. 정치에 환멸을 느낀 박태양은 1915년 1월 김한립에게 수상직을 넘겼고, 정계에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수상직에 오른 김한립은 박태양이 자신에게 시한폭탄을 넘겼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은 도쿄 조약에서 분명 동시베리아의 이권 일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받아가는 동안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성화를 부렸죠. 업보였습니다. 대중영합주의와 제국주의, 공세적 민족주의라는 폭탄에 불을 당긴 것은 다름아닌 자신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박태양과 최신우, 이현 등이 자리를 떠난 상황에서 독박을 쓰기는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행동했습니다.
1916년 4월, 국가보안법이 가결됩니다. 이제 정부는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으로 민간인을 사찰하고, 영장 없이 그를 구금해 ‘고급 심문기술‘을 시현하며, 명확한 법적 기준 없이 원하는 모든 이에게 법의 철퇴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제2의 계엄정국을 우려한 대부분의 의원들은 열화와 같이 이 법안을 찬성했습니다.
그렇게 대한의 민주주의는 죽었습니다. 우레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한 이유하가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삭 스테인베르크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한다”라는 칼럼을 발표해 외부에서 맹공을 가하는 동안, 김한립은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명목으로 의회해산을 선언했습니다. 1916년 말 치러진 총선에서는 입헌자유당이 무려 7할의 의석을 차지하며 서재필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김한립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사이, 남만주 총독 이현은 무려 16년간의 임기를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황척 회장 허도순, 그 돈밖에 모르는 파렴치한의 얼굴을 계속 마주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했죠. 따라서 그는 옛 동지 박태양에게 직을 넘기고 한성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16년만에 마주한 한성 정계는 생각보다 더 어지러웠습니다. 궁내부 대신 최신우는 조용히 사라질 마음이 없었고, 따라서 일명 “콘클라베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한 승친왕 이우를 이준의 양자로 입적시킨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이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황실과 내각을 동시에 독점해 권세를 계속 휘두르려는 술수였고, 이는 1903년 총선거에서 희대의 부정선거 공작을 주도했던 이현마저 분노하게 할 정도의 사기극이었습니다. 이에 이현은 당국의 추적을 피해 제자들과 도피중이던 김영천과 비밀리에 접선했고, 그의 사위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요? 이 접선으로 인해 중정은 김영천의 위치를 파악하고 말았습니다.
한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이 총성은 단말마로 끝났지만, 그 영향마저 짧은 폭음으로 끝날 지는..
글쎄요. 모르겠군요?
Fin.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 관람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근시일 내로(Hopefully 이번주 내로...) 시즌 2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렌지파일 이게 그 병주고 약주고..아니 사후약방문인가(??)
시즌 2 캐릭터 컨셉은 귀여운 쾌락주의자라는 영 이상한 컨셉이 나왔네요...
그런데 대한제국의 교육 시스템도 현실처럼 6-3-3 시스템인가요?
그리고 엔딩곡 하나 추천... 제 기준에는 시즌 1 엔딩곡으론 이게 어울리는 것 같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kTggiJVD7FA
PLAY
@돈이 곧 진리 무려 4-8입니다(…)
독일식 그룬트슐레-김나지움 시스템을 그대로 베껴온 흔적이죠. 소학교 4년은 의무교육, 이후 농사를 시키거나, 직업학교를 보내거나, 보통학교를 보내거나 할 수 있습니다.
(...)
맙소사..
이거 원본이 혹시 상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