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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서문 웬델 베리, 이 시대의 예언자 마일클 폴란
미셀 오바마는 2009년 3월 백악관 앞들 사우스론에 유기농 텃밭을 만들었고 그 몇 주 뒤, <뉴욕타임스> 일요판의 비즈니스 섹션에는 ‘먹거리 혁명, 철을 맞았나?’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가 실렸다. 농업 담당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지난 몇 년 동안 유기농 먹거리 및 로컬푸드의 옹호론자들은 대체로 워싱턴으로부터 무시를 받아 왔는데, 이제 백악관에서 ‘경청해 주는 사람 하나‘를 얻었다“고 평했다.
요즘은 확실히 미국인의 먹거리 생산과 공급 방식을 개혁하고자 애써 온, 흔히 하는 말로 ‘먹거리 운동’에 힘써 온 사람들에게는 설렐 만한 시절이다. 대안적인 먹거리, 즉 지역에서 길렀거나 유기농으로 키웠거나 방목해서 기른 먹거리를 취급하는 시장이 번성하고 있고, 농민이 주도하는 직거래 시장들이 버섯 자라듯이 여기저기서 빠르게 번져 나가고 있다. 아울러 농무부에 기록된 농민의 수가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늘기도 했다. 농무부의 새 장관은 농무부의 역량을 ‘지속가능성’에 집중하기로 했고 얼마 전만 해도 농무부 앞에서 항의 피켓을 들고 섰거나 트랙터로 교통을 마비시키던 활동가나 농민과 회의를 하기도 한다.
말이야 쉽다고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행동보다 말이 많았던 게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놀라운 말도 있었다. 이를테면 당선 직후 버락 오바마는 <타임> 기자에게 “우리의 농업 시스템 전체가 값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산업농업의 단일경작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과 에너지 위기와 건강과 의료의 위기 같은 문제를 점 잇기 하듯 연결 짓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가 웬델 베리를 읽은 적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베리의 생각이 오바마의 입을 통해 표출된 셈이었다. 오늘날 미국인은 먹거리와 농업에 관하여 국가 차원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데, 이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이제 많은 미국인은 값싼 먹거리가 실은 비싼 대가를 치른다거나, 땅과 건강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거나 농사를 바르게 짓지 않으면 사회가 잘 먹고 건강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받들 것이다. 하지만 웬델 베리가 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쓴 이 번득번득하는 에세이 선집의 글들을 보면 오늘 우리가 말하거나 듣고 있는 것들 가운데 그가 이미 힘주어 얘기하지 않은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우리’ 중에는 부끄럽지만 분명 나 자신도 포함된다. 최근에 내가 먹거리나 농사에 대해 쓴 글에 담긴 아이디어나 통찰 가운데 웬델 베리가 농사에 대해 쓴 에세이들에서 이미 생각해 보지 않은 게 과연 있는지 여러분께 한번 묻고 싶다. 어딘가에 혹 한두 가지 있을지고 모르지만,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초라해졌는지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웬델 베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먹거리와 농사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 국민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대화가 실은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되짚어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웬델 베리와 몇 안 되는 그의 동시대인들, 이를테면 프랜시스 무어 라페, 배리 코모너, 조엔 거소 등의 공로도 컸다. 이들 네 저술가는 점 잇기의 탁월한 대가들이었다. 이들은 환원주의 과학에 깊이 회의적이었으며, 생태학을 끌어안을 뿐 아니라 실제 사고를 생태적으로 펼쳐 나가는 면에서도 일찌감치 앞서나갔다.
이들은 햄버거와 석유 값이라는 두 점을, 흙의 생명력과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동식물과 사람의 건강이라는 두 점을 선으로 이어 사고할 줄 알았다. 나는 그런 대화가 1971년부터 진지하게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웬델 베리가 <라스트 호울 어스 카탈로그>에 알버트 하워드 경의 저작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글을 실었을 때이다. 웬델 베리는 1964년에 영국의 이 농업경제학자를 처음 접한 이후 큰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베리의 농업관 중 상당 부분은 하워드의 주요 아이디어를 심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워드는 농업이 숲이나 대초원 같은 자연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며, 과학자와 농민과 의료 연구자는 “흙과 동식물과 사람의 건강 문제를 모두 하나의 큰 주제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앞 문장만큼 웬델 베리의 글에 자주 등장한 것은 없을 터인데, 그 이유는 충분하다.
그것이 가장 환원주의적인 과학자들도 인정하기 시작한 명백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숱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해 주는 길잡이로서 언제나 새롭기 때문이다. 같은 해인 1971년, 라페는 <작은 지구를 위한 식사>를 출간하여 현대의 육류 생산방식을, 특히 풀을 먹어야 하는 소에게 곡물을 먹이는 방식을 세계의 기아 문제, 환경 문제와 연결 지어 보여 주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코모너가 산업농업의 문제를 에너지 위기와 연관 지어, 우리가 산업적인 먹이사슬을 이용해 먹거리를 해결한다면 엄청한 석유를 먹고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 무렵은 거소가 농업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는 먹거리의 건강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영양학계 동료들에게 명확하게 알렸던 때이기도 하다. 값싼 먹거리에 드는 진짜 비용과 건실한 농업의 가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 준 그들의 놀랍도록 풍성한 작업을 돌이켜보며, 나는 격통과도같은 아쉬움을 두 번 느꼈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다. 하나는 그로부터 20여 년 후에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젊은 필자로서, 지금껏 내가 생각보다는 그리 독창적이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심각한 곤경을 피하게 해 주거나 완화해 줄 수도 있었던 경고에 우리 사회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아직 무지했던 1970년대에 웬델 베리가 그토록 예언자적으로 논했던 ‘환경위기’를 지금 우리가 되새겨 봤자 무엇하겠는가? 비만과 2형 당뇨병이 유행병이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이전의 공중보건 문제가 지금에 비하면 손쓰기 쉬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튼 역사는 생태적인 인식을 갖추라는 선각자들의 권유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증언해 줄 것이다. 석유값이 진정되고 지미 카터가 그의 카디건과 자동온도조절장치, 태양광 집열판과 함께 조지아주 플레인스로 귀향했을 때, 우리는 웬델 베리의 도움으로 시작됐던 그 대화의 고리를 경솔히 끊어 버리고 다시 이전처럼 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로널드 레이건은 카터가 백악관 지붕에 설치했던 태양광 집열판을 철거했고, 웬델 베리를 비롯한 선각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국가 정치와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나는 1980년대에 <하퍼스 매거진>의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웬델 베리의 강연문이나 에세이를 잡지에 싣고는 했다. 레이건 시절 베리는 적어도 내가 거주하던 맨허튼의 언론가에서는 흔히 ‘기계파괴 운동가’나 ‘괴짜’취급을 받았고,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대체로 골동품 취급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타자기를 컴퓨터로 바꾸던 시절, 나는 타자기 사용조차 거부하는 웬델 베리의 짧은 에세이를 실어 독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농업’이라는 단어조차 시대에 뒤떨어진 가망 없는 말로 여기던 시절,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유린되어 버린 무언가를 거론해 본들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실제로 나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농업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맨해튼의 어느 편집자도 그런 주제를 시의적절하다거나 관심 가질 만하다고 여기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그런 단어를 피하고 먹거리 얘기를 하는 게 낫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먹거리 문제는 그 시절 사람들도 여전히 가치를 인정하고 관심을 갖는 주제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땅이나 농민의 수고와는 연결 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웬델 베리의 저작을 면밀히 그리고 열심히 읽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그때 나는 텃밭을 일구면서 가졌던 의문에 대한 실질적인 해답을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농장이 아니라 뉴욕 교외의 변두리에 있는 주말 주택의 뒤뜰에서 먹거리를 조금 기르기 시작했는데, 야생동물이나 잡초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고 절감하던 차였다.
소로우와 에머슨은 둘 다 잡초를 야생의 표상으로, 텃밭을 자연으로부터의 일탈로 보는 오류를 범했는데, 그 둘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나는 야생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잠식해 들어오는 숲으로부터 내 채소를 지키려고 울타리를 치는 일을 삼갔다. 결과가 어땠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콩밭을 일구기는 했으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작물을 보호할 필요성을 조화롭게 화해시키지 못했고, 결국 농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아가 소로우는 이렇게 선언하기까지 했다. “나에게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동네에 살 것인지 아니면 적적한 습지가 있는 곳에 살 것인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습지 쪽을 택할 것이다.“ 얼마간은 위험스러운 이 선언 때문에 자연에 관한 미국인의 글쓰기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풍경에는 거의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니 우리가 농사나 원예보다는 야생지 보존에 열심이었던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직면한 이러한 소로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이는 웬델 베리였다. 그는 미국인이 갈라놓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 주었다. 베리는 야생지보다는 농장을 교재로 삼아, 나와 자연의 다툼이 연인 사이의 사랑싸움처럼 있을 만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고, 대포를 동원할 것까지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싸움임을 알려 주었다. 그는 야생성을 ‘저 밖’, 즉 울타리 너머 숲으로 부터 텃밭의 한줌 흙이나 콩의 싹으로 옮겨다 주었다. 그가 옮겨다 준 야생성은 보존만이 가능한 게 아니라 경작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라 어엿한 참여자로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의 글을 대부분 찾아 만끽했는데, 나에게 그의 발언은 전혀 골동품같지 않았다. 그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고 유익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텃밭의 울타리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게 있다. 내가 갖고 있던 소로우 문제는 미국의 환경주의 문제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환경주의는 자연을 잘 이용하는 법보다는 자연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을 훨씬 더 강조했다. 마침내 우리는 도시의 먹거리 소비자와 시골의 생산자 사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환경주의자와 농민 사이에도 새롭고 보다 친근한 대화가 이루어지리라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는데, 웬델 베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선구적으로 그 시작을 도왔다는 점에서 공로가 크다.
보존론자가 왜 이럴테면 농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다. 그 이유야 많지만 가장 명백한 것을 들자면, 보존론자도 먹는다는 사실이다.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이 없다는 건 명백한 부조리다. 도시에 사는 보존론자는 자신이 농민이 아니므로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해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 쉽게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지는 않다.
그들 모두 대리로, 즉 남을 시켜서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을 수 있다. 보존론자는 먹거리에 대해 똑같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함께 책임을 지려고 할 때, 먹거리 문제가 자연의 안녕에 대한 그들 본연의 모든 관심사와 직결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에서 우리 모두가 농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즉 이제는 잘 알려진 그의 표현으로 하자면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고 말하게 된 것은 아마 오늘의 먹거리와 농사를 다시 생각하는데 베리가 크게 기여한 바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내용과 더불어 형식면에서도 베리 고유의 것이라 할 만하다. 뜻이 분명한 동시에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거듭해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며, 아주 자명한 사실에도 자꾸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주치게 될 그런 성찰들을 몇 가지 더 소개해 보자.
우리는 땅과 사람을 상대로 한 경쟁에서 이겨 왔으며,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를 끼쳐 왔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에 관하여 현재 우리가 내보일 수 있는 건 식량의 잉여다. 하지만 이 잉여는 그 근원을 훼손함으로써 얻은 것이며, 지금의 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훼손의 부작용을 감추기 위해 이 잉여를 이용한다. -<척도로서의 자연>에서 ‘지속가능’이라는 말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방식의 농업을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장소의 본연과 사람의 본성이 부과하는 조건을 따르는 농업이기 때문이다. -<집중의 어리석음>에서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산업경제는 그 바깥에 있는 모든 이상이나 기준과 결별해 버렸다는 점이다.-<가족농을 옹호한다>에서
태양에 기대는 이 옛날식 농업은 산업경제와는 근본이 판이하게 달랐다. 산업 시대의 기업은 그런 농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농민들은 점점 더 화석연료 에너지에 의존하게 되면서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말았다. 한때는 살아 있는 것들의 이치와 생명과 건강에 중점을 두던 생각이 이제는 기술과 경제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신용이 날씨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농업과 에너지>에서
점점 더 소수의 업자에게만 생산을 집중시키면 과연 청결과 위생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무책임한 생산자와 부패한 검사관이 결탁할 가능성을 높이기만 할 뿐인가? -<위생과 소농>에서
그렇다면 여느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의 정치학은 우리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목소리가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먹거리와 그 원천이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해 왔다. 수동적인 먹거리 소비자로서의 조건은 민주적인 조건이 아니다. 책임 있게 먹어야 하는 이유 하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먹는 즐거움>에서
마지막으로 베리의 최근 글 가운데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2008년 가을 경제 파탄 직후 그가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인 웨스 잭슨과 함께 발표한 기명 칼럼의 일부다. 지난 오륙십 년 동안, 우리는 돈이 있는 한 먹거리를 얻게 되리라 쉽게 믿어 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를 먹여 주는 땅과 일손을 계속해서 업신여긴다면, 먹거리의 공급은 줄어들 것이며, 우리는 이번 종이 경제의 파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농기업들에게 수천억 달러를 주고도 먹거리를 조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대목을 좋아하는 건 그 식견 때문이다. “종이 경제”라는 표현 하나만 해도 경제위기에 관한 백만 마디의 논평만 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훨씬 더 마음에 더는 것은 이 대목이 전하는 아주 행복한 소식이다. 없어서는 아니 될 이 목소리가 곤경의 시기에 여전히 밖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며, 여전히 힘이 된다는 소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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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되살리는 일
살림은 이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집에 있는 남자가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 남자는 가정에 매인 자로서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에 의지해 살자면 남편의 일도 아내의 일도 필요하며, 어떠한 가정도 그 두 가지 일을 제대로 다 돌보지 않고서는 온전할 수 없다고만 하면 될 것이다.
살림은 우선 가정에 관계된 일이다. 즉 농장과 가정을 이어 주는 일이다. 살림은 아내의 일, 즉 가사와 결부된 일이기도 하다. 살림하는 가장노릇을 한다는 것은 아껴 쓰고, 지키고 모으고, 오래가게 하고, 보존하는 일이다. 옛 용법을 살펴보면, 살림은 가장으로서 땅과 흙을, 집안의 식물과 동물을 돌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야 말로 가정에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살림은 우리와 우리가 사는 장소와 세계를 보존 관계로 이어 줌으로써 생명을 지속시키는 모든 활동이다. 우리를 지속시켜 주는 생명의 그물망에 있는 모든 가닥이 서로 계속 이어져 있도록 해 주는 일이다.
그러니 산업농업의 가장 명백한 실패는 아마도 살림의 노력 없이 땅에게 생산만을 강요하려 한 시도의 결과인 듯하다. 농업을 과학이자 산업으로 재편하려 한 시도는 농업으로부터 유구한 살림의 전통을 축출해 버렸다. 살림은 예로부터 농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늘 근본적인 가정적 연관성을 드러내 주고 땅고 그 생물을 이용할 때 복원을 위한 보살핌을 요구하는 요소였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시도는 농사를 자급자족의 경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아마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내가 사는 지역의 농민들은 텃밭과 낙농과 가축과 식육용 동물에만 의존하여 먹거리를 해결하는 생활을 했다. 어려울 때면 특히 이들 농가와 그 농장은 자급자족 경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의 살림과 아내의 가사 덕분이었다. 반면에 산업농업의 방식은 농가가 자신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비경제적’인 일이라 주장했다. 그 결과, 인간사에서 전혀 새롭고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농가 사람들이 자기 먹거리를 전부 사먹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살림을 과학으로 대체하려는 의도는 농과대학 분과의 명칭을 바꾸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를 테면 ‘흙 살림’은 ‘토양과학’이 되어 버렸고, ‘가축 살림’은 ‘동물과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에 대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 무의미한 말장난에 잘 넘어가는 우리의 속성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유기농업의 선구자 알버트 하워드 경의 말을 빌리자면, 흙 살림은 ‘흙과 식물과 동물과 사람의 건강을 하나의 큰 주제’로 이해하는 데 이르는 일이다. 우리는 ‘건강’이라는 말을 살아 있는 생물에만 사용하는데 흙 살림에서도 건강한 흙은, 대부분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생명으로 가득한 야생지다. 흙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서식지이기도 하다.
농장의 가장과 가족과 동식물은 모두가 흙 공동체의 일원이다. 모두가 장소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농가를 ‘노동력’으로, 농가의 동식물을 ‘생산물’로만 본다는 것은 과격하고도 파괴적인 과도한 단순화일 뿐이다. 살림이 없으면 토양과학 역시, 흙에서 살고 비롯되며 흙을 만들고 흙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명의 공동체를 쉽게 무시한다. 마찬가지로 살림이 없는 동물과학은 거의 필연적이기라도 하듯 연민을 망각해 버린다. 우리가 같은 동물로서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갖는 연민 말이다. 동물과학은 우리의 그런 믿음을, 혹은 동물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했다. 그대신 우리를 동물농장으로 인도했다. 그에 비해 가축 살림은 시편 작가가 형상화한 푸른 초장과 맑은 물, 그리고 하느님의 농사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를 다시 그런 것들로 인도한다.
농업은 자연과 인간 공동체 양쪽에 닿은 연과 의무로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 농사를 잘 짓는 일은 동식물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정성을 들이는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의 맥락을 가장 적절히 확장하는 것은 연민이다.
참된 살림은 생존의 첫째 전략으로서 언제나 농사를 농장과 농토에, 농가의 필요와 능력에, 지역경제에 맞추려 노력해 왔다. 모든 야생 동식물은 그런 적응 과정의 산물이다. 농업에서도 한때는 그 같은 과정이 주된 경향이었다. 그런 과정을 무시한 대가는 곧 기아였던 까닭이다.
최근에 우리는 생산성과 유전적. 기술적 획일화와 세계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역적 적응의 필요성을 흐려 버렸다. 이는 연료와 물과 흙이 모두 무한히 공급되리라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여건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테러를 비롯한 온갖 유형의 정치적 폭력, 화학물질의 오염, 자꾸 늘어나는 에너지 비용, 고갈된 흙과 지하수와 물줄기, 괴상한 잡초와 해충과 질병 때문에, 우리는 지역적 적응의 필요성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역의 자연과 수용력과 필요를 묻는 예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역과 농장에 맞는 동식물 품종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농장의 형태는 장소와 그곳의 생명과 일에 대한 농부의 감정에 답해야 한다. 농장의 형태는 다양한 많은 것들을 한데 어울리게 하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그것은 동물의 생명 주기와 번식 주기를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작물과 가축을 균형과 상호부조의 관계에 놓이게 해야 한다. 그것은 생태와 농업경제를, 가족과 이웃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충분히 포괄적이고 복잡하고 통합적이고 지적이고 영속적이어야 한다. 그것의 한계 내에서 유기체나 생태계의, 혹은 인간이 만든 걸작의 완전성을 갖추어야 한다.
농장의 형태는 한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농장은 지형과 기후, 생태계 이웃, 그리고 지역경제의 제한을 받는다. 물론 더 큰 경제, 그리고 농부의 취향과 능력의 제한도 받는다. 진정한 농부라면 농장이 피해야 할 모습을 확실히 알면서 농장의 형태를 가꾼다. 따라서 형태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지역적 적응의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농업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새로이 하고 살리는 일이다. 지금 살림을 되살리는 일은,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한데 단순화되어 버린 대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러자면 생태계의 건강을, 농장을, 인간의 공동체를 농업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다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집중의 어리석음
식육용 동물을 대규모로 한 곳에 집중시키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먹이의 원천과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이를테면 다각화된 농장의 목초지나 외양간 앞마당에서 지내며 먹이를 찾아 꽤 먼 곳까지 가기도 하고 너른 초원에서 풀을 뜯기도 하고 농가의 음식쓰레기를 먹기도 하면서 꽤 자유롭게 다니던 동물들을 동물공장에 옮겨 놓는다고 해 보자. 동물공장의 우리 안에 감금된 동물들은 전적으로 곡물 사료에 의존해야만 한다. 더구나 이 곡물은 생태적 비용을 치르고 대규모 단일경작 방식으로 길러진 것이며, 때로는 아주 먼 곳에서 옮겨 와야 하는 것이다. 동물공장은 에너지 절약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이때에, 번창하고 있는 에너지 소비형 사업이다. 농업의 산업화는 집중과 분리의 경향을 띰으로써, 건강한 생태계와 건실한 농장의 다양성과 균형에 내재된 견제력을 없애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전례 없는 과잉생산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농가의 소득은 감소하고 더 많은 농민이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동물공장은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많은 소규모 가족농장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대체해 버렸고 그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불쾌하고 불건전한 여건에 갇혀 버리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비용을 치르며 늘어난 생산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생산력의 감소라는 대가까지 치러야 한다.
지금 우리의 농업은 대체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렇게 된 지 오래다. 지금 우리의 농업은 몹시 유독하다.
너무나도 화석연료에 의존한다. 흙과 땅의 생명력과 물을 무척이나 낭비한다. 우리의 경제생활을 둘러싸고 떠받쳐 주는 자연계의 건강을 마구 해친다. 길든 것과 야생을 가릴 것 없이 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해치기도 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현하자면 농사짓는 사람의 생활과 생계를 지속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땅을 이용하고 돌보는 사람이 번영하지 못하면, 땅도 번영할 수 없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존해 줄 복잡한 ‘지역’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자리 잡고서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농민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농민 인구가 자꾸 줄고 이주노동자 인구는 자꾸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농업이 지속가능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농업 문제는 농업으로 풀자
지금부터 나는 농업에 대한 하나의 접근법을 제시해 보려 한다. 이 접근법은 농업적인 것이고, 적절한 해법을 낳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와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먹거리 생산의 건강을 지키고 증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네 가지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이 네 가지는 농사 본연의 문제이며, 그 궁극적인 해결이 조직이나 시장이나 정책 같은 공적인 장소가 아니라 농장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질적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규모, 균형, 다양성, 질의 문제다.
이 네 가지 문제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도 그 밖의 다른 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규모’의 문제다. 규모를 문제로 삼는다는 건 무언가가 지나치게 클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될 텐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술은 비민주적이고도 비인간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다. 기술은 개별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날 정도로, 그리하여 어쩌면 인간이 만든 제도의 통제력을 벗어날 정도로 확대될 수 있다. 기계가 자꾸 커짐에 따라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억압하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가?
농토의 크기는 농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농토가 너무 크면 효과적인 순환 방목을 하거나, 경작지 침식을 방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체로 지형이 경사질수록 농토는 작아야 한다. 예컨대 안데스의 가파른 산비탈에서는 농경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는 분명 토양을 유실하지 않은 덕분이며, 실제로 안데스의 농민들은 침식을 막는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온갖 수단과 방법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토를 작게 유지하는 일이다. 밭이 작으려면 기술의 규모 또한 작아야 하는데, 그들은 지금도 사람 손이나 소의 힘으로 밭갈이를 한다.
둘째는 ‘균형’의 문제다. 관리가 생산을 따라갈 수 있도록 사람과 땅 사이의 적절한 비용을 구하는 문제다. 이는 확실히 규모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두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는다면, 토양 침식이나 토양 압축 같은 문제도 풀릴 것이다. 균형의 문제를 연구해 보면 한 농장의 수용력, 즉 생산력을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생산할 수 있는 양을 알게 된다. 균형의 문제를 해결하면 농장의 생산이 웬만큼 일정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시장가격의 등락에 따라 농사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농사는 농사가 아니라 산업경제의 모방이니 말이다.
셋째는 ‘다양성’의 문제다. 이는 유일하게 가능한 농적 보완 시스템의 문제다. 한 바구니에 모두 계란만 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연과 상식과 실용성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종류와 종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나라 전체의 농업 차원에서도 종의 다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건실한’ 농업을, 즉 장소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농장을 가능한 한 많이 육성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넷째는 ‘질’의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질’이란 ‘건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먹거리에서 비롯되는 신체의 건강뿐 아니라 경제, 문화, 정신의 건강까지 말이다. 이 모든 건강은 연관되어 있다.
나는 실질적으로 생산의 질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기본적인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며 사는 원칙에 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이는 산업농업 때문에 너무 경시되어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한 원칙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은 농가 주민도 도시민과 다를 바 없이 슈퍼마켓을 애용하는 현실을, 산업농업이 제공해 주는 혜택인 양 홍보하고는 한다. 하지만 시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만 생산하는 사람들은 주로 양적인 관심만 있는 반면, 자기가 생산한 것을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은 양뿐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고심하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네 가지 문제에 생산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네 가지 문제를 적절히 해결한다면 생산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실한 생산은 건실한 농사의 결과일 뿐이니 말이다.
-가족농을 옹호한다
요컨대 내가 제안하는 바는, 농민이 산업경제라는 사기 도박장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농촌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는 농촌에서 이웃과 공동체가 붕괴되거나 상실되는 것을 보고서 그 가치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 없이 살아 보려다가 그들이 우리에게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말해 주는 바, 즉 지역공동체가 살아 있기 위해 ‘지역 센터’나 ‘레크레이션 시설’같은 잡다한 ‘지역사회 개선책’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다시금 듣게 되었다.
지역민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고, 서로 돕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우리는 어떠한 지역사회도 그런 일을 쉽게 혹은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대학이나 농기업에서 내놓은 부와 성장을 위한 그럴싸한 온갖 방법보다는 그런 어려움이나 불완전함에 더 희망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두 번째 과제는 농민이 자신의 농장을 돌아보고서 농장이 구성되고 쓰이는 방식에 잠재되어 있을 수 있는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손실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산업주의가 신봉하는 경쟁이라는 원리에 얼마나 속아 왔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특화라는 것 때문에 다른 특화한 농민과 어떻게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는지도, 규모화라는 것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어떻게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도, 소비경제라는 것 때문에 어떻게 자기 자신과 경쟁하게 되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한 농장의 사람 수와 땅 면적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의존과 독립 사이에도, 소비와 생산 사이에도 적절한 균형이 있다. 한 농가가 그러한 독립을 누린다는 건 가능하고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어떤 농민이나 농가도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의존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의존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그렇게 의존해서 누가 도움을 받느냐의 문제다. 어떤 농가가 이웃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서, 심지어 가족에 대한 의존에서도 벗어나서 농기업에 그리고 채권자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이미 살펴보았듯이 농민과 그 가족은 별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가족과 이웃에게 의존하는 쪽이 훨씬 바람직한 유형의 의존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농장과 그 농가가 생산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어느 정도의 소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불가피한 일이며, 그것이 바람직한지는 그 비율에 달려 있다. 농장이 생산에 비해 소비를 너무 많이 한다면 그 농가는 외부에서 조달되는 물자에 좌우되며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되고 만다. 같은 이치로, 농민이 먹거리를 기르기보다는 사는 게 많은 쪽으로 유도될 경우, 그 농민은 생산자라기보다는 소비자가 되며, 농장 수입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달리 말해 산업화된 교외 지역의 가계경제와는 다른, 농사짓는 생활에 맞는 가계경제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추측이 아니라 증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미국에서 아주 어려운 시기 동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창해 온 소농들의 공동체 사례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미시 말이다. 물론 모든 농민이 아미시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권하는 것도, 아미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양식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아미시의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다.
1.가족과 공동체를 지킨다. 2.이웃과 함께 농사짓는 방식을 고수한다 3.요리, 농사, 가사, 주택에 관한 기술을 대대로 이어 간다 4.기술의 이용을 제한하여,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태양광, 풍력, 수력 같은 무료 에너지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5.농장을 작은 규모로 제한하여, 이웃과 의좋게 농사를 짓고 저출력 기술을 최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6.앞서 말한 방식들로, 비용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한다 7.자녀가 가족을 떠나지 않고 공동체를 지키며 살도록 교육한다 8.농사짓기를 실용적인 기술이자 영적인 수양으로 존중한다 이런 원칙을 따르는 사회는 경영자나 주주나 전문가에게 착취당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농업과 에너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점은, 농업이 생물에서 비롯되는 태양에너지에 기대다가 기계에서 비롯되는 화석연료 에너지에 의존하는 쪽으로 변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낭비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태양에너지의 낭비다. 동력뿐만 아니라 성장력으로서의 에너지도 낭비했다. 땅의 소유 단위는 점점 더 커지고 농민의 수는 줄어들면서 더 많은 농토가 피복 작물 없이 남겨지게 되었다. 이는 가을과 초봄에 농토에 쏟아지는 햇빛이 피복작물의 잎에 붙들려 토양과 사람에게 유익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날수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낭비되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에너지와 능력의 낭비다. 산업농업은 사람을 기계로 대체해 버린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농업의 기능을 익혀 농작업을 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지금 미국에는 쓸모없고 무력한 신세가 되어 정부의 보조를 받아야하는 사람들이 수백만인데, 그렇게 되는 동안 사람의 손과 보살핌이 부족해 흉하고 황폐해진 땅은 너무 많다. 게다가 건강을 잃고서 거의 마찬가지로 쓸모없고 무력한 신세가 되었으나 복지 혜택을 못 받는 사람 또한 수백만이다. 지금 우리는 뱃살에다 유용한 잠재 에너지를 얼마나 많이 저장해 두고 있는가? 그런 에너지가 의료비만이 아니라 다이어트나 약이나 운동기계에 쓰이는 비용의 형태로 우리에게 요구할 대가는 또 얼마인가?
셋째는 동물 에너지의 낭비다. 살아 있는 말의 힘을 버릴 뿐만 아니라, 감금식 사육 때문에도 낭비를 한다는 뜻이다. 알아서 풀을 뜯어먹고 잘 살도록 되어 있는 동물에게 먹이를 공급하느라 우리는 왜 화석연료 에너지를 쓰는가?
넷째는 토양과 토양 건강의 낭비다. 이제는 농사지어야 할 땅 면적에 비해 농민의 수효가 너무 줄었기 때문에 온갖 기계적 방편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손쉬운 방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으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리라 믿을 이유도 없다. 농부가 심고 거두는 때를 지키면서 어마어마한 면적을 감당해야 한다면, 속도가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땅이 아니라 기계가 관심과 기준의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땅 면적은 자꾸 넓어져서 돌려짓기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물길을 갈아엎어 버리고, 또 지형에 따라 밭을 계단식으로 만들거나 곡선으로 밭갈이를 하는 경우는 점점 더 줄어든다. 그토록 넓은 땅을 수확하자니 가을에 피복작물을 심을 겨를이 없는 것이다.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
이제 우리는 기계적 원리가 아니라 생물학과 생태학의 원리에 토대를 둔 농업을 그려 보아야 한다. 알버트 하워드 경과 웨스 잭슨은 그런 기준의 변화에 대해 소상하게 논증한 바 있다. 두 사람은 농사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의 생태계를 좌우하는 자연법칙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가능한 한 다양성을 높이면서 동식물을 함께 기르는 농사를 하고, 땅의 생산력을 보존하고, 배설물 등을 순환시키고 피복작물을 길러야 한다. 혹은 러셀 스미스가 70년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농사를 땅에 맞추어”지어야 한다. 기술이나 시장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지만, 그보다는 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길든 세계와 야생 세계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사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를 짓는 장소의 건강이다. 농민은 왜 보존론자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건실한 농민은 왜 보존론자일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농민은 인간의 경제가 자연과 만나는 접점에서 살고 일한다. 이 접점은 보존의 필요성이 가장 명백하고 시급한 장소다. 농민은 농사를 농장에 맞춰 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도록 하며, 자연의 힘과 쓸모를 변치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농민은 미래세대가 그 부담을 져야 하는 생태적 적자를 늘리는 것이다. 실제로 생태적 적자를 늘리는 농민이 있기는 한데, 그런 사람들은 지금 내가 말하려는 농민이 아니다. 보존론자에게 파괴적인 방식의 농사를 지지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위생과 소농
이제 유행처럼 되어 버린 레저나 풍족함과는 별도로, 작은 농장의 작은 경제를 파괴하는 가장 큰 주범은 위생이라는 교의다. 나는 깨끗함이나 건강함을 반대할 뜻은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깨끗함과 건강함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난 삼사십 년 동안 농장의 생산방식을 지배해 온 위생법의 타당성과 정직성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새로운 위생법은 늘 더 많이, 더 비싼 경비를 요구하는가? 왜 항상 소규모 생산자의 생존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았는가?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깨끗할 수는 없는가?
나는 과학자도 위생 전문가도 아니며, 그런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도 없다. 내가 목격하고 생각한 바를 말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놀랍도록 짧은 기간 동안에 내가 사는 시골 지역의 소규모 낙농업이 전부 소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역의 모든 작은 낙농장이, 우유와 유제품을 취급하는 지역의 모든 작은 도소매상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아 왔다. 식료품점들이 지역의 농민들이 생산한 계란 취급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것도, 소량의 가금류를 사고파는 시장이 전부 폐쇄 된 것도 목격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중개인과 대리인과 검사관이 자꾸 늘어나게 만드는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소비자는 이 모든 난관을 다 극복하고 어떻게 자신의 취향과 필요를 생산자가 알게끔 할 수 있는가? 소규모 생산자를 망하게 함으로써 생산비와 소매가격을 높이지 않고서는 ‘개선’이라는 걸 할 수 없어 보이는 이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점점 더 소수의 대규모 업자에게만 생산을 집중시키면 과연 청결과 위생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무책임한 생산자와 부패한 검사관이 결탁할 가능성을 높이기만 할 뿐인가?
농사와 기술과 경제와 정치 사이의 연결고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며, 가장 분명한 것 하나는 그것이 식품의 생산에 끼치는 영향이다. 아마도 지금 시스템의 가장 큰 오류는 대규모 기술에 적합하지 않은 땅과 그런 기술을 쓸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을 생산으로부터 배제한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이 시스템은 그런 ‘주변적’땅과 사람의 잠재적 생산력을 무시하고 있다.
-척도로서의 자연
농토와 농민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번영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생산성만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생산성이라는 유일 기준을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라는 기준이다. 그러한 노력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자연이라는 기준은 생산성이라는 기준처럼 단순하거나 쉬운 게 아니다. ‘자연’은 생산성이라는 저울이나 잣대처럼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자연 아닌 곳에서 농업이 있을 수는 없다. 자연이 번영하지 못한다면, 농업도 번영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도 안다. 자연은 바깥의 어떤 안전한 곳에서 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런 별개의 장소가 아니다. 자연을 이용하는 동안, 우리는 그 속에 있으며 그 일부다. 자연이 번영하지 못하면 우리도 번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농업의 마땅한 척도는 세계의 건강이요 우리의 건강일진대,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세계의 ‘단일한’ 척도인 것이다.
자연을 인간 경제생활의 척도로 받아들이면 그러한 자유로움이 절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경제가 다시 만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경제도 자연도 추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척도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지역 차원의 현명한 방식이 필요해진다. 이를테면 특정 농장을 아무 농장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특정 장소에 대한 특정 지식은 중앙집권적 권력이나 권위의 권한을 벗어난다. 자연, 즉 특정 장소의 본연을 척도로 삼는 농업은 농민이 잘 알고 사랑하는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하는 이웃과 더불어 잘 알고 사랑하는 연장과 방법을 사용하여 돌봐야 함을 뜻한다.
-<흙과 건강>에 대하여
그러는 한편 ‘유기농 운동’이라고 표방되었던 하워드의 사상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말았다. 유기농업은 이해되고 처방된 바 대로 흙속에 부식질을 조성함으로써 작물을 더 건강하게 하고 유독한 화학물질을 쓰지 않았다. 그런 유형의 농업에 대해 반대할 것이야 없겠지만, 지나치게 단순화된 유기농업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농업은 농장을 생물학적이고 경제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농업과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연관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기농업에 대한 지금의 공식적인 정의에 따르면 한두 가지 작물만을 기르는 거대한 ‘유기’농장도 존재할 수 있다. 가축도 목초지도 없고, 산업기술과 산업경제에 철저히 의존하며, 거름과 에너지를 전부 밖에서 들여오는 거대 유기농장 말이다. 이런 식의 특화와 지나친 단순화야말로 알버트 하워드 경이 평생 글과 행동으로 맞서던 대상이었다.
지금 이 운동에서, 적어도 표방하는 바를 따르는 그 일부는 그런 지나친 단순화와 그로 인한 산업적 거대주의에 대해서는 확실히 반기를 들고 있다. 이제는 일부 식품 기업도 일부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보다 작은 가족농장만이, 아미시 사람들의 농장 같은 곳만이 하워드의 기준이 요구하는 다양성과 세심한 보살핌을 허락해 준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워드의 기본 전제는, 농업의 과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과정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에 숲이던 장소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그 농장은 체계적으로 숲과 닮아야 하며, 농부는 숲을 연구하는 학생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연은 실용과 경제를 우선시하는 세계의 궁극적인 가치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자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자연의 맥락은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그에 비해 농업의 맥락은 우선은 자연이며, 다음은 인간의 경제다. 그렇다면 농업과 그 자연적.인간적 맥락 사이의 조화는 건강일 것이며, 건강은 하워드의 한결같은 기준이었다. 그가 추구한 바는 언제나 “흙과 동식물과 사람의 건강 문제를 모두 하나의 큰 주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농장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즉 요즘 하는 말로 ‘지속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면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농장은 모든 과정에서 하워드가 “되돌림의 법칙”이라고 부르던 것을 준수해야 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농업은 어떤 쓰레기도 만들어 내지 않으며, 흙에서 난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 성장은 부식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유기물의 분해 과정에서 우리는 잎에서 일어나는 생성 과정의 역을 보게 된다“
한 나라의 농업이 지닌 의무는 인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며, 이 의무는 먹는 사람들에게도 먹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워드는 이러한 의무를 자기 작업상의 의무로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더구나 그는 이 의무가 농민들의 작업에도, 과학자인 자신의 작업에도 엄연한 한계를 부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한계란 첫째로 농사도 실험도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허용한도를 넘어선다거나 자연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둘째로 작업이 지역공동체의 생계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학자는 작업에 임하기 전에 작업이 행해질 장소와 작업의 수혜자가 될 사람들에 의해 잘 알아야 한다. 하워드가 사고와 작업을 통해 일찌감치, 그리고 조용히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농업의 산업화로 인한 생태적, 경제적 실패 때문에 우리 역시 그렇게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 때보다 반세기도 전에 말이다. 우리가 예상한 바대로 인도에서 그는 과학자로서 받은 교육과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활용했다. 하지만 그는 그 나라 농민들로부터도 배운 바가 있었으며, 그들을 자신의 ‘선생’으로 존경했다. 그는 땅에 대한 그들의 앎을, 부지런함을, ‘정확한 눈’을 높이 샀다. 그는 그 농민들의 경제적. 기술적 여건도 자신의 작업 범위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 경솔한 혁신 때문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농민들을 망칠 수 도 있음을 알았다.
-뿌리에서 시작되는 농업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도끼로 뿌리를 내리치는 사람이 하나라면 가지를 내려치는 사람은 수백이라고 어디엔가 쓴 바 있다. 그는 이 말을 비유로 한 것인데, 현대 농업과 그 과학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농업은 더욱더 산업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지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농업에 대하여 피상적인 지식마저도 부족한 실정이며, 농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 대부분 또한 지표면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산업농업을 정당화하는 전제는 전문화의 경계가 엄격한 틀 속에서 작동하는 환원주의적 과학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농업, 즉 전문 분야들의 집합체로서의 농업은 마냥 합리적이고 유익해 보이기만 했다. 단, 효율성과 생산성은 적절한 기준이라고, 보살핌은 과학으로 지력은 화학으로 간단히 환원할 수 있다고, 유기체는 기계일 뿐이라고, 농업은 자연에 대하여 아무 의무도 지지 않는다고, 농업에는 농업적인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농업은 ‘값싼’ 화석연료에 안심하고 의존해도 된다고 가정했던 한에서 말이다.
이러한 농업을 주창한 사람들은 요컨대 인간의 의지는 우주에서 지고하고, 유일한 법칙은 기계의 법칙뿐이며, 물질세계와 그 ‘천연자원’은 무한하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인정을 받든 말든, 우리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그리고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신화인 ‘전쟁’의 뿌리가 되었다. 지금은 과거로만 여기는, 인간이 무지몽매하던 시대에, 우리는 자연의 신성함을 시인하고 자연을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같은 어머니로 공경하는 길을 찾아냈다. 우리는 자연을 대할 때 기도나 속죄, 능숙한 솜씨나 검약, 경계나 돌봄으로써 관계를 이어갔다. 그런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는 용익권이나 청지기이란 개념을 낳았다.
그러다 그 뒤 우리는 ‘자연과의 전쟁’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정복하고 갖은 ‘불법적 상해’를 가해 건강하고 풍요로운 자연의 비밀을 쥐어짜 내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런 야심을 우리는 ‘계몽’이나 ‘진보’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듯, 이 전쟁은 결국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종잡을 수 없는 사업이었다.
이제 우리는 놀라운 사실 두 가지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자연과 전쟁 중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더없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 중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대적하는 동시에 대적당하고 있으며, 양측의 희생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증거만 봐도,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가 이길 가망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연에게 행사한 어마어마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번번이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우리가 자연에게 더없이 처참한 도발을 할 때에도, 지금처럼 대대적인 서식지 파괴나 멸종 사태가 유행병이 되다시피 한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패배하고 있다. 결국에는 자연보다 우리가 손실을 감당할 여력이 적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는 토양 침식이나 기이한 질병이나 잡초나 해충의 확산을, 자연의 법칙을 어긴 데 대한 자연의 직접적인 응징으로 보아야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승리를 거둘 때 공포스러울 정도로 평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만들어 낸 오염물질을 받아주지 않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만든 오염구덩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자연 덕분에 우리는 위대한 스승들이나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이미 말해 준 바를, 그리고 생태학자들이 우리에게 다시 말해 주고 있는 바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즉 어느 한 존재의 맥락이란 그것 이외의 모든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이제 우리 중에는 한 지역의 농업을 평가하고자 한다면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지역의 물 문제부터 알아보면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다.
우리는 물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흙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점점 알아 가고 있다. 흙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흙이 물을 얼마나 잘 머금는가? 흙 밑으로 물이 잘 빠지는가? 흙 속에 부식질이 얼마나 있는가? 흙의 생물학적 건강성은 어느 정도인가? 흙이 악천후에 노출되는 빈도나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흙 속 얼마나 깊은 곳까지 뿌리가 내려가는가?
우리가 자연에 맞서 벌이는 전쟁으로 물과 흙의 건강이 파괴되고 어쩔 수 없이 농업의 건강과 우리 자신의 건강도 파괴되어 우리가 경제적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른 가능성은 딱 하나뿐이다. 자연을 쳐부수려는 우리의 시도로 지속적이거나 인간적으로 견딜 만한 경제를 수립할 수 없다면, 자연과 조화롭고 협력적인 관계를 이루며 살려고 애써야만 할 것이다.
-먹는 즐거움
먼저 나는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는 주장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먹는다는 건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것으로 시작되는 먹거리 경제의 한 해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하지만 먹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먹거리를 농산물이라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신을 ‘소비자’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수동적인 소비자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것을, 혹은 원하도록 설득당한 것을 산다. 값은 주로 달라는 대로 지불한다. 그리고 구입 대상의 질과 가격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들은 주로 무시한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 말이다. 얼마나 싱싱할까? 얼마나 불순물이 적거나 깨끗할까? 얼마나 위험물질이 없을까? 얼마나 멀리 운반돼 온 것이며, 운반비는 가격에 얼마나 포함돼 있을까? 제조비나 포장비나 광고비는 얼마나 포함돼 있을까? 식물이 제조되거나 ‘가공’되거나 ‘미리 조리’되었을 경우, 그 질이나 가격이나 영양가는 얼마나 영향을 받게 될까? 대부분 도시 쇼핑객들은 먹거리는 농장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것이 어떤 농장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농장인지, 농장이 어디에 있는지, 농사에 어떤 지식이나 기술이 이용되는지 알 지 못한다. 그들은 농장이 계속해서 무얼 생산해 내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치 않는 듯하나, 어떻게 혹은 어떤 난관을 극복하고서 그럴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먹거리는 다분히 추상적인 관념, 즉 알거나 상상하지 못하는 무엇이며, 적어도 식료품점 진열대나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먹는 사람은 먹는 행우가 불가피하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불가피하게 농적인 행위임을, 그리고 어떻게 먹는냐에 따라 세상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크게 달라짐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간단히 이해하고 규정하는 최선의 방법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목록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먹거리 생산에 가능한 한 참여한다. 뜰이 있거나 베란다나 볕드는 창가에 화분이라도 있다면, 먹거리를 기른다. 자기 집 주방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퇴비로 만들어 거름으로 이용한다. 먹거리를 조금이나마 직접 길러야만 흙에서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음식으로, 찌꺼기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아름다운 순환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직접 기르는 먹거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질 것이며, 그 이모저모를 다 알 것이다. 먹거리의 이력을 다 알게 되면 그 진가를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둘째,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요리를 직접 한다는 건 자신의 내면과 생활에서 부엌살림과 알뜰살림 솜씨를 되살리는 일이다. 집에서 해먹으면 더 싸게 먹을 수 있고, 어느 정도의 ‘품질 관리’가 가능하다. 자신이 먹는 것에 첨가된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된다.
셋째, 사야 할 먹거리의 원산지를 안 다음, 집에서 가장 가까이서 생산된 먹거리를 산다. 모든 지역사회가 가능한 한 제 먹거리의 원산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러 면에서 이치에 맞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소비자가 먹거리에 대해 알고 영향을 행사하는 가장 확실하고 참신하고 쉬운 방법이다.
넷째, 가능한 한 지역의 농부나 텃밭 주인이나 과수원 주인과 직거래를 한다. 앞에서 제안한 사항들의 이유가 여기에도 다 적용된다. 더구나 그런 직거래를 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진 부담으로 번영을 누리는 도소매상, 운송업자, 가공업자, 포장업자, 광고업자 같은 이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다.
다섯째, 자기 보호의 차원에서, 산업화된 먹거리 생산의 경제와 기술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배운다. 먹거리에 첨가되는 먹거리 아닌 게 어떤 것들이며, 그런 첨가물에 대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얼마나 되는가?
여섯째, 가장 모범적인 농사나 텃밭 가꾸기와 관련된 것들을 배운다. 일곱째, 먹거리 종이 생기고 자라는 과정에 대해, 가능하면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운다.
마지막 항목은 특히 나에게 중요한 점 같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야생 동식물의 생활상 못지않게 길들여진 동식물의 생활상으로부터도 멀어져 버렸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길들여진 동식물들도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으며, 그런 그들에 대해 안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사나 가축 돌보기, 원예, 텃밭 가꾸기 같은 일들은 잘만 하면 복잡하고 그럴듯한 기술이어서,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크다.
먹는 즐거움은 ‘포괄적인’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식도락가의 즐거움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채소가 자란 밭을 알고 그 밭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라는 작물의 아름다움을 기억할 것이다. 이를테면 잘 가꾸어진 밭에서 새벽 빛 속에 이슬 머금은 작물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기억은 먹거리를 대할 때 절로 연상되며, 먹는 즐거움 중 하나다.
먹는 즐거움의 참으로 중요한 일부분은, 먹거리의 원천인 생명과 세계를 정확히 의식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먹는 즐거움은 우리 건강의 가장 유효한 기준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즐거움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는 도시 소비자라면 꽤 넉넉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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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먹는 일을 정의롭게 하는 일
현존 작가 중에 웬델 베리 이상으로 농업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려 온 인물이 있을까? 생태 문제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많은 작가들에겐 사상의 북극성과도 같은 존재인 그는, 수십 년 동안 고향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업과 문명에 관하여 방대하고 체계적인 저술 활동을 벌여 온 예술가이자 농부다.
<포이즌우드 바이불>로 너무나 유명한 소설가 바바라 킹솔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에겐 우리 삶의 바위투성이 해협을 건너가는 데 도움과 가르침을 주는 선지자가 있다. 내 경우에 가장 힘든 가시밭길은 너무나 물질적인 세상에서 영적인 가족을 부양하는 일인데,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진다. 웬델 베리라면 어떻게 할까?“
웬델 베리가 말하는 ‘좋은 삶’이란 건강한 농촌 공동체에서 적정 기술을 이용하여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며, 이웃과 땅을 보살피고 살리며, 건실한 먹을거리를 즐기는 삶이다. 그 반대로 산업농업, 삶의 산업화, 무지, 오만, 탐욕, 그리고 이웃과 자연에 대한 폭력의 세계다. 그의 소설 작품들은 모두가 그런 좋은 삶이 가능한 상상의 농촌 ‘포트윌리엄’을 다각도로 그려 낸,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연대기를 이루는 작업이었다. <심층경제>로 유명한 환경 저술가 빌 매키븐은 말한다. “그의 소설을 읽노라면 농부가 되었으면 하는, 자신이 직접 일구고 자신을 일구어 준 땅에서 늙었으면 하는, 그 땅과 이웃 관계를 아이들에게 물려줬으면 하는 꿈을 조금이나마 꾸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웬델 베리의 수많은 에세이의 소설 중 농업과 먹거리에 관한 글들을 추린 선집을 번역한 것이다. 소설은 비록 장면 스케치에 가까운 분량들이지만 그의 스타일과 성향과 역량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이 선집은 소설과 에세이가 어우러져 있어 신선한 느낌을 주며, 작가의 세계를 더 넓어면서도 밀도 있게 보여 주는 장점을 갖는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가 건실한 농업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는 에세이들로서 이론에 가깝다면, 2부는 건실한 농부를 탐방하고 쓴 에세이들이 주를 이루는 실제라고 할 수 있으며, 3부는 건실한 먹거리를 따뜻하게 나누는 소설 장면들과 먹는 즐거움을 논하는 에세이를 담은 상상이라 할 수 있겠다.
웬델 베리의 에세이의 소설을 하나의 주제로 묶은 이 독특하고 기발한 선집은 결국 먹거리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길러 먹느냐의 문제를 통해 보는 한 권의 문명비판서다. 그러면 왜 하필 ‘먹거리’인가? 우리는 한 생물로서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먹는 문제의 중요성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래세대의 생존 기반을 허물며 번창해 온 산업문명의 지배하에 살아오면서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먹거리의 소중함과 신성함에 너무나 둔감해졌고,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헤매며 허랑방탕 살아가는 탕자가 되어 버렸다.
작가는 이 책의 마지막 에세이 <먹는 즐거움>을 맺으면서 인용한 시를 통해 해답의 열쇠를 보여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우리가 먹는 것 치고 “하느님의 몸”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 무슨 말인가? 하느님을 먹다니?
답은 한살림운동을 이끄셨던 생명운동의 대부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해 주신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태복음 2장과 누가복음 2장에는 엄청난 일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필이면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오셨단 말인가! 인간들의 집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 구유에 오신 것은 짐승의 먹이로 오신 것입니다. 인간 세상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몽땅 해결을 하러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하늘을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에도 먹이고 입힌다는 말씀인데 하느님께서 날짐승 하나, 풀 한 포기에게도 빠뜨림이 없이 섬기신다는 뜻이요, 먹이와 입는 것이 되어 주신다는 뜻이요, 풀 한 포기,새 하나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서 (.....)세상의 밥으로 오신 것을 말해 주십니다.
하느님으로서의 밥, 생명으로서의 밥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나라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되나니라”했고,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몸으로서의 밥, 피로서의 포도주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 한 그릇, 쌀 한 톨에 담긴 진리를 진실로 깨우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뜻이다. 만물에 깃드신 하느님의 몸을 먹는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다는 게 이천식천의 이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얼 어떻게 먹고 있는가? 풀 먹고 살아야 할 소를 집단으로 좁은데 가두어 놓고 곡물은 말할 것도 없고 동족의 내장을 갈아 먹이다가 광우병을 일으켰다. 인간의 욕심대로 유전자를 조작한 쌀과 밀과 옥수수를 겁도 없이 잘도 팔고 먹는다. 핵무기 제조와 결코 무관치 않은 원자력발전소가 터져 바다와 강산이 수만 년이 지나도 회복할 수 없도록 오염되고 있다. 우린 그렇게 기르고 그런 데서 난 걸로 먹고 있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게 아니라 괴물이 괴물을 먹는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그대로의 건강한 먹거리를 기르고 먹는다는 것, 즉 먹는 일을 정의롭게 하는 것은 인간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일이며, 곧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다. 낙원은 도시도 아니요 밀림도 아닌 농촌인 만큼, 농촌을 건강하게 되살리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 가야 할 바른 길일 것이다. 평생을 누구보다 성자처럼 살다 가신 작가 권정생 선생의 글은 내게 언제나 성서 같은 울림을 준다. ‘예수는 십자가의 못 박히기 전날, 저녁 먹는 자리에서 빵을 떼어 주며 “이건 내 살이야” 했고,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건 내 피다”라고 했다. 사실은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뒤에 있어질 자신의 살과 피의 갈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하느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것은 백번 옳은 말씀이다. (.....) 오히려 짐승들의 삶은 사람보다 정직하고 순수하다. 그들은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종교 이상으로 하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 (.....)하느님나라의 백성을 위하고 인간구원을 바란다면 자연을 가꾸고 농촌을 지키는 농사꾼이 되는 게 좋을 것이다. (.....)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
2011년 9월 이한중
<온 삶을 먹다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 / 웬델 베리 지음 / 이한중 옮김 / 낮은산 펴냄 > 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