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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 물이 좋아 황금어장인 섬[ 利水島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위치하고 물이 좋아 황금어장인 섬
으로 면적은 0.384km2, 해안선 길이는 5km이며 인구는 1백여 명이다. 관광명소로는 옥포랜드와 덕포해수욕장 · 대금산 등의 관광지와 장목진객사 · 구영등성 · 구율포성 · 이수도패총 등의 유적지가 있다.
이수도 개요
이수도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0.384km2, 해안선 길이 5km, 인구는 1백여 명 정도이다. 거제시 장승포항에서 북쪽으로 11km, 거제도 시방리 해안에서 동쪽으로 600m 해상에 위치한다.
멸치잡이 권현망(權現網)이 들어와 마을이 부유해지자 바닷물이 이롭다 하여 ‘이로운 물의 섬’이라는 뜻으로 이수도라 붙였다고 한다. 이수도는 이물도, 학섬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육지에서 남강물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물이 좋아 건너편 시방 사람들은 이수도까지 와서 물을 길어다 먹었을 정도였다. 이수도는 거제의 동쪽에 있는 섬으로 거제 대금산에서 내려다보면 한 마리의 학이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제도의 시방마을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지도를 보면 이수도는 경남 거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부산과 이수도와의 직선거리는 매우 가까워서 불과 60km 정도 되지만, 차량으로 오면 통영과 진주를 거쳐야 하기에 2시간 10분 걸린다. 그러나 지난 2010년 12월 개통된 거가대교를 통해 자동차로 달려오면 50분 정도로 단축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게다가 대전과 통영간 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서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서 포화 상태인 남해고속도로의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부산과 거제와 통영, 남해, 여수, 목포로 이어지는 남해안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수도는 시방마을 선착장에서 도선을 타면 약 10분 정도 들어간다.
이수도 절경
출처 : 지적정보마당
이수도 둘러보기
이곳에 들어오기 전, 시방 선착장 부근에 볼거리가 하나 있다. 바닷가의 멋진 돌담집인데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온 집이다. 건축 분야에 무관한 분이 9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일만여 개의 돌을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쌓아서 만든 성처럼 생긴 집이다. 주위에서는 이곳을 매미성이라고 부른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인해 큰 피해를 본 다음, 돌로 옹벽을 쌓으면서 지금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정교하게 생긴 이 매미성은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성곽처럼 요새 같았다. 집 주인의 집념이 대단하다. 사람이 어떤 일에 몰두하고 정열을 쏟으면 불가한 일도 가능하다는 걸 말해주고,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시방마을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새롭게 집을 건축하고 산다. 아무래도 거가대교의 건설로 부산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기에 부산과 창원 등지에서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펜션도 운영하고 있다. 거가대교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곳이 거제도이며 이수도도 마찬가지이다.
도선을 타고 이수도에 들어가면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많다. 이곳 방파제는 왼쪽 즉 북방파제는 외해 쪽에 삼발이들이 심어져 있지만, 짧은 오른쪽 즉 남방파제는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순수한 방파제다. 그래서 남쪽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배도 북방파제 쪽에 접안해 있고 남방파제에는 거의 없다. 집들은 물양장에서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축대 위에 집들이 층층이 있다. 집들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이곳은 구릉이 많고 평지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본토 쪽으로 뻗은 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완만한 만입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나머지는 모두 암석해안으로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물양장에서 오른쪽 즉 남방파제로 이어지는 서쪽으로 향한다. 마을에서 벗어난 길인데 이곳에 ‘이수도1길’이라는 팻말이 있다. 집은 거의 찾기 힘들고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물양장의 연장선이다.
시방으로 향하는 도선
물양장에서 만난 주민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대형 물탱크가 두 개나 있다. 아직도 이 물탱크는 사용되고 있는 간이상수도 취수원이다. 이수도는 물이 풍부하여 섬의 이름도 ‘이로운 물의 섬’이지만, 지금은 바다를 통해 들어온 남강물이 상수도로 연결되어 취수를 하고 있다.
이곳 마을회관은 해안 쪽이 아닌 골목길 안쪽에 위치해 있다. 붉은 벽돌로 된 2층짜리 건물이다. 옆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들어갔다가 돌아보고 나오면 칠성상회 뒤편이다. 다시 마을회관 앞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이수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이수도교회가 아담하게 서 있다. 약간 더 가면 이수도 동쪽 바다와 거가대교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 정상에는 사슴농장이 있는데 수풀이 많이 우거진 탓에 가 보지는 못하고 내려왔다.
마을회관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물양장이 나온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중 하나다. 이 길 입구 왼쪽에 새마을기와 함께 ‘이수마을’ 표지석이 있다. 아주 오래된 것 같다. 그 부근 즉 긴 방파제 입구에 별도의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수(利水)마을’로 여기에는 영문표기도 있다.
이수마을 표지석
방파제 가는 길목 입구는 양쪽으로 적재물과 함께 컨테이너 등으로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막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은 1미터는 족히 될 난간에 그 앞에는 삼발이들이 심어져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방파제 중간지점에 도선대기실이 있다. 주민들보다는 낚시꾼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본격적인 낚시꾼들의 세상이 나타난다.
황금어장터인 이수도 바다
이수도 근해는 대구의 산란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까운 이곳에서 일본 사람들이 멸치 권현망을 가지고 들어와서 부자 섬이 되었다고 한다. 우수한 어업기술과 동력선, 자금을 앞세워 일본인들은 한국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약탈해갔다. 우리나라 어민들은 일본인 선주에게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섬과 바다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바다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지만, 1953년 12월에 와서야 수산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점차 수산 분야의 행정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수도는 다른 섬들과 달리 위치가 좋아서 어선어업을 많이 하였다. 1950년 해방이 된 이후부터 1970년까지 대구의 어획량이 풍성해서 부자 섬으로 불렸다. 박영기 어촌계장은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돈을 마대자루에 넣어 숨겨놓을 정도로 부자 말을 들었다’면서 ‘다른 마을이 대단히 부러워할 정도로 장목면의 세금을 대부분 이수도에서 부담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지금은 화려했던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 대구는 냉수대의 어족으로 추운 바다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의 동해에서 여름에 찬 바다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겨울에는 한류를 따라 남해까지 회유한다. 겨울에 대구는 남해의 연안에서 산란을 하는데 그 주요 산란지는 진해만이다. 이수도는 진해만의 입구에 있는데 대표적인 대구잡이 마을이다.
12월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가 산란을 하기에 이때 잡히는 대구가 가장 맛이 좋다. 이수도 주위는 황금어장터로 대구, 갈치, 청어, 멸치 등 다양한 생선이 많이 잡히는 곳이다. 이수도는 해방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대구잡이가 풍어를 이루어서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마을로 이름이 났다. 이수도는 한때 장목면에서 가장 풍요로웠다고 한다. 대구잡이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 섬의 최고 인구는 93가구 552명(1973년)이었다고 한다. 생활이 넉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업 기술의 발달과 남획, 부산과 마산, 진주 등의 도시에서 생활하수와 공장폐수가 흘러들어서 연안 바다가 오염되어 점차 어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섬을 떠나고 학교도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폐교되었다.
어족자원의 회복을 위해 1981년부터 거제시는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 사업을 하였으나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대구 한 마리가 20만원 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점차적으로 2006년 겨울부터 서서히 대구가 다시 잡히기 시작하였다.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최근 몇 년 사이 대구 어획량이 크게 늘어나는 등 이수도가 대구 산란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제 대구는 겨울 바다의 효자산업으로 자리매김하여 어부들에게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이수도 주민들의 삶
이수도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이 말은 고기들이 이곳을 거쳐서 진해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의미이다. 마을 주민들은 황금 어장터에서 잡은 생선을 배에다 싣고 통영, 진해, 마산, 부산 등의 수협에서 팔거나 횟집과 식당 등에 개인적으로 판매한다.
1960년대 갓 잡아온 멸치를 부인들이 다라에 이고 새벽같이 고현장이나 장목장에 나가 팔았다. 장날이 아닐 때에는 그 무거운 멸치를 이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다니면서 팔았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시절에 보리나 쌀로 맞바꾸기도 했다. 보리와 쌀을 가지고 다시 그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게 당시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이수도 사람들은 멸치를 젓갈로 담아 김장용으로 팔기도 하였다. 과거의 이수도의 생활권은 마산이었다. 잡은 물고기를 어선으로 마산까지 운반한 다음, 지게로 지고 어판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수도의 학교, 해상 콘도 시설로
물양장 앞에 학교가 있는데 지금은 학교가 아닌 다른 시설이 들어서 있다. 제법 넓은 운동장에는 잔디가 깔렸다. 마을 쪽 즉 동쪽에 건물이 있다. 학교 건물의 교실은 아예 새로 숙소로 조성한 것으로 ‘이수도어촌체험마을’이라는 간판이 가운데 옥상에 걸려 있다.
이수도는 위치상 거제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외해로 연결된 섬이다. 일 년 내내 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서 중고교를 통학하는 학생들은 큰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학교는 바로 태풍이 밀려오는 맨 아래 바닷가 남쪽에 위치하여 태풍 때마다 큰 피해를 입어왔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교사, 사택, 운동장의 절반이 대파되고 유실되어 다시 복구를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87년 셀마, 1995년 페이, 2003년 매미 등으로 담장과 교사, 운동장 등이 큰 피해를 입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모든 것이 다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수도는 대한해협으로 탁 트인 광활한 바다로 거침이 없다. 이수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이 없어서 항상 태풍의 길목에 서 있다. 그래서 태풍이 닥칠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태풍은 농작물과 바다의 양식장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만, 한편으로 바다를 뒤집어엎어서 오물을 쓸어가 버리는 등 바다를 정화시킨다. 그리고 바다를 풍년으로 들게 만들어준다. 참으로 조물주의 기묘한 섭리가 엿보인다.
이수도분교는 1940년 5월 간이학교로 설립되어 1944년 3월에 정식 개교했다. 총 56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분교는 2004년 3월 제42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현재 이수도의 어촌체험마을 숙소로 변모했다. 콘도식 민박시설로 리모델링하여 대형 객실 2개, 소형 객실 2개로 최대 8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새롭게 꾸민 것이다. 시설과 전망이 좋은 바닷가에 자리잡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운동장 주변에는 체육시설 등의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2008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성한 어촌계 사업이다.
언덕 위에 있는 해상콘도 주위의 바다 밑에는 수많은 어초들이 숨겨져 있다. 고기의 집인 이 어초 근처에서 낚시를 하면 감성돔과 볼락, 우럭, 도다리, 노래미 등이 잡힌다. 폐교 옆으로 해안길이 있다. 이 길 오른쪽에는 난간과 함께 삼발이가 심어져 있다. 이 길에도 그물들이 널려 있다. 그물을 수선하는 작업을 하는지 옆에 재봉틀이 있다. 이수도에는 베트남 사람이 제법 들어와 있다. 3개 동의 해상콘도 관리업무도 외주를 준 것으로, 외국인이 청소 등의 관리를 하고 있다.
그물을 손질하는 외국인 노동자
이수도 바다에 설치된 해상콘도
바다에 떠 있는 해상콘도가 이수도의 새로운 명물로 부상되고 있다. 이수도는 2001년부터 3개의 해상콘도가 운영되고 있다. 해상콘도는 바지선 위에 취사와 급수가 가능한 현대식 숙박시설이다. 콘도 내부에는 TV와 냉장고, 수세식 화장실 등이 갖추어져서 육지와 별 다름이 없다. 특히 처음 이용하는 사람을 고려해 육지에서 5m 정도 지점에 만들어 놓았다. 콘도 주변에는 인공어초를 만들어 다양한 고기가 서식할 수 있게 했고, 어류 종묘를 꾸준히 방류하고 있다. 고급어종이 잡히고 주위 경관이 뛰어나 가족 단위의 주말 관광객들의 나들이로는 그만이다. 이수도의 경우 해상 콘도를 1년에 500만원씩 받고 불하해 주어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거액의 마을 기금을 모으고 있는 모범적인 마을이다.
해상콘도
이수도의 당산과 동제
이수도에는 오래전부터 매년 정월 초아흐렛날 마을의 당산나무에서 지내오던 동제가 있었다. 과거 마을 뒤편에 당산나무가 있어 거기에서 당제를 지내왔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당산나무가 죽어서 장소를 옮겼다. 새마을운동에 따라 미신 타파 일환으로 한동안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최근 들어서 마을 기금을 마련하여 이장의 주도하에 다시 지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마을 북동쪽의 언덕 위에 새 당산나무를 정하고 거기에 조립식 건물로 제당을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고 있다. 과거의 동제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 분위기 속에 지내왔으나 현재는 조용하게 진행된다고 한다. 마을 당산제가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무렵, 이수도 밖의 대금산 스님을 모셔와 지내왔다고 한다. 요즘은 장목의 장흥사 스님을 모셔와 지내고 있다. 이때 마을 기금으로 이장은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여 상을 차린다.
이수도의 전설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盾石)
이수도와 마주해 있는 언덕 마을은 시방(矢方) 흔히 ‘살방’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활을 쏘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수도와 시방은 학과 활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서로 겨누고 막아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두 곳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비석에 얽힌 사연부터 등장한다.
이야기는 조선 말엽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수도는 주변이 황금어장이고, 물도 풍부하여 시방보다 훨씬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수도에 일본인 어장이 생기면서 돈의 흐름이 좋아졌고, 시방보다 진해와 마산, 부산으로 가는 뱃길이 유리하여 번성을 누렸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회유하는 어족자원이 줄어들면서 점차 어획량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시방에 비해 고기도 덜 잡히고 살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여건을 보자면 이수도가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자 이수도 사람들이 시방을 질시했고 더 잘 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도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수도의 학이 시방의 화살에 맞아 죽는 형국이라 방패에 해당하는 비석을 세워 막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대로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의 화살을 막는 방시순석(防矢盾石)을 마을 뒷산에 세웠다. 그러자 정말 이수도는 부자가 되었고, 이번에는 시방마을이 쇠락해져 가는 것이었다. 이수도에 비석이 서고부터 시방이 가난해졌다 하여 시방사람들은 이수도의 비석을 부수려 했으나, 이수도 사람들이 시방사람들을 섬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그동안 다정하게 지내오던 두 마을은 이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심 끝에 시방에서는 이수도의 비석을 뚫을 수 있는 쇠화살을 쏜다는 뜻의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방시만노석(防矢萬弩石)이다. ‘만노’란 쇠로 된 화살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처지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이수도에서 쇠화살을 막을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盾石)을 원래의 방시순석 위에 덧세웠다. 이후, 더 이상 어리석은 싸움을 뒤풀이하지 않으려는 일단의 깨우침과 함께 화해가 이루어져 오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풍수지리 사상에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과 연결된 사례다. 이수도는 어획량이 줄고 자녀교육과 교통 의료 문화 등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젊은이들이 섬을 떠나자 자연히 노령화가 되었다. 반면에 시방마을은 거제대교의 연결과 거가대교의 개통 등 교통이 월등히 좋아져서 그전보다 사는 것이 여유로워졌다.
예전에는 곧이곧대로 풍수지리설을 믿었다. 이 풍수지리설은 우주 중에서도 지구에는 일정한 기(氣)가 있는데 그것 중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기가 있는 곳을 길지라 한다. 그래서 집이나 묘 등을 만들 때 방향과 산의 모양 등의 자연 형상과 지리가 인간사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어 신라 말기에 활발해졌고 고려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비석이야기는 가난했던 시절에 서로 잘 살아 보려고 하는 경쟁심이 묘하게 뒤섞여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마을 간의 처절한 갈등은 흥미진진한 설화로 남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제는 마을을 알리는 데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이수도의 전설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盾石)
이수도 옥포대첩기념공원(玉浦大捷記念公園)
이곳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첫 승전한 옥포해전을 기념하고 충무공 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유서 깊은 옥포만에 조성한 기념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기념탑과 참배단, 옥포루, 기념관, 이순신 장군 사당 등이 있다.
1957년 6월 12일에 기념탑을 세웠으며, 1963년에는 옥포정을 완공하였다. 1973년에 옥포조선소가 들어서면서 기념탑과 옥포정을 아주동 탑곡마을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주변이 협소하여 1991년 12월부터 현 위치에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높이 30m의 기념탑과 참배단 · 옥포루 · 팔각정 · 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1996년 6월에 개원하였다. 이중 ‘충(忠)’자를 형상화한 참배단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다. 전시관에는 옥포해전 당시의 해전도 등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옥포루는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팔각 정자이다. 공원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제례행사가 거행되며, 6월 16일을 전후하여 약 3일간 옥포대첩기념제전이 열린다. 인근에는 옥포랜드와 덕포해수욕장 · 대금산 등의 관광지와 장목진객사 · 구영등성 · 구율포성 · 이수도패총 등의 유적지가 있다.
이수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