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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유교 문화유산 베스트 27
저자는 다르지만, 출판사가 같아서 아마도 《우리나라의 불교 문화유산 베스트 27》과 같은 의도로 집필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 송명석은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뒤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심이 적고 이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고 아름답기까지 한 궁궐과 서원, 정자와 제사 등 유교문화와 유교 유적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궁궐】
우리나라의 대표 궁전인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왕들이 정무를 보던 곳(현재의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이다.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군자가 영원토록 큰 복을 누린다.’는 의미를 가진 정궁 즉,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정치 장소인 정전과 편전은 앞쪽에,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침전은 뒤에 배치했다. 광화문에서 교태전에 이르는 주요 전각들을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배치했으며, 근정전을 중심으로 음양오행 사상으로 동서남북에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신무문을 두었다. 이는 4계절을 의미한다. 광화문은 ‘도덕적으로 다스려져 덕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의미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의 각오를 나타내기도 하는 이름이다.
임란 이후에는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했는데, 경복궁이 유교적 질서를 반영했다면 창덕궁은 그 질서를 벗어난 듯이 보인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지어졌고 정문인 돈화문은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큰 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돈화는 ‘왕이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청덕이나 돈화 모두 유교의 덕치를 나타낸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우람한 회화나무 세 그루가 반기는데 복이 들고 큰 학자가 나온다고 하여 궁궐과 양반집에서 회화나무를 심었다. 회화나무 아래 3정승이 모여 정사를 보았다고 하는 주나라의 이야기가 전하고, 서양에서도 같은 의미인 학자수(scholar tree)라고 불리는 것이 회화나무다.
조선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신분제 사회로 궁궐에도 건물의 품격과 이름을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사용하는 건물에, 업무공간이나 세자의 거처는 ‘당’이라고 불렀다. 전이나 당의 부속건물은 ‘합’혹은 ‘각’이라 했으며 왕실의 주거공간과 관리들의 업무공간에는 ‘재’나‘헌’을 붙였고, 연회나 휴식 공간에는 ‘루’나‘정’을 붙였다. 건물의 이름만으로 건물의 격과 쓰임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이유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유교의 이념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경복궁의 정궁 근정전은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런데 하물며 정사와 같이 큰일이겠습니까. 선유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라고 정도전이 말한 것으로 보아 임금의 근면을 환기시킨 것이다. 강녕전은 『서경』에 나오는 오복 중 셋째인 강녕을,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은 ‘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룬다.’고 한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또 교태전은 왕비의 생활 공간답게 계절마다 꽃이 피는 아미산이라는 화단은 만들고 굴뚝에도 문양을 넣어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종묘는 여러 차례 중건되어 16칸으로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부속건물로는 악공들이 준비하는 악공청, 향·축문·폐를 보관하는 향대청,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제례 그릇을 보관하는 전사청, 왕과 세자가 머무는 재궁, 공민왕의 신당 등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종묘에 왜 고려왕을 모셨을까?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데는 이유가 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에 양위받는 형식으로 조선을 건국했다. 당시 백성들은 고려 왕실에게 향수를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양위의 형식을 갖추었다 해도 유교적 명분과 백성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고려를 계승했다는 명분과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공민왕의 신당을 지은 것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2001년에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유네스코 인구 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제례를 봉행한다.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종로도서관, 시립 어린이 도서관 등 공공건물이 있고 율곡과 신사임당의 동상 및 단군성전, 활터인 황학정 등이 있어서 공원으로 친근하다. 부산도 사직동이 있지만, 사직은 토지신과 곡신을 말한다. 농경신을 말할 때 직은 후직이라 하는데, 후직(后稷)은 중국 요임금이 농사를 관장하는 제후로 봉한 벼슬로서 후직은 주나라 희씨의 시조이며 오곡을 관장하는 농신이기도 하다. 사직단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지청제, 전염병이 돌면 치병제, 중춘과 중추, 동지에 제사를 지냈다. 이는 농업의 신인 신농과 후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농단이나 선농제와는 성격이 달랐다.
【서원】
우리나라 최초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옛 집터에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짓고 안향의 제사를 지낸 것이 시작이었다. 안향은 고려 충렬왕 때 주자학(성리학)을 처음 들여와 소개했다. 서원은 양반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기능으로 확대되어 갔고 1550년(명종5) 이황에 의해 크게 성장했는데, 국가지원을 요청하여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친필편액과 서적, 노비 등을 내려받았다. ‘소수’는 ‘내적 수양을 통해서 유학의 정신을 이어가고, 무너진 학문을 다시 닦는다’는 뜻이다. 사액서원의 의미는 자못 큰데, 지방에서 세운 서원의 역할과 기능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원은 향교와 무엇이 다른가? 성균관과 향교는 유학 발전에 공이 많은 중국의 성현이나 문묘에 배향된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반면, 서원은 배향자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설립되어 그의 정신과 학문을 기리고 따랐으며, 성리학 연구와 자기 수양을 목적으로 했다. 그 지역의 성리학 발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을 배향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성리학자만을 모셨다. 성균관과 향교가 과거시험의 합격을 목표로 했다면 서원은 자기 수양과 성리학 탐구를 목표로 했고, 배향자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었다.
서원에서도 향교와 마찬가지로 유학서 입문서인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등 사서오경을 일반적인 교육과정으로 삼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고 배웠다. 하지만 선조 대에 이르러자 사림이 중앙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고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두고 붕당이 발생했는데 이로써 서원의 역할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붕당은 학연을 내세워 세를 불려 나갔으며, 17세기 한때 전국적으로 서원이 1,000개소가 넘었다고 한다. 이에 1871년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으면서,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헐어버리게 했다. 47개 중에는 서원이란 명칭을 가진 것이 27개소, 사당이란 명칭을 가진 것이 20개소였다.
소수서원 등 9개 서원이 지난 2019년 7월 19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미 ‘서원의 현판’에서 살폈던 적이 있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에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들통나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리나 흘러가다 멈춘 곳이라 하여 ‘피끝마을’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때 죽은 억울한 넋이 밤마다 울음소리를 내자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죽계천 바위에 ‘敬’자를 새겨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90년이 흘러도 밤마다 울음소리를 내던 ‘억울한 넋’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들의 억울함은 풀렸을까? 붉은색‘敬’자가 튀어서인지, 퇴계가 썼다는 ‘白雲洞’이란 글자도 외롭고 작게 느껴진다.
[도동서원]
‘공자의 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가진 「道東書院」은 대구시 달성군에 있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하는데, 2002년 답사갔을 때는 상세한 내력을 모르고 갔다가 공부한다고 했었지만 지금 다 잊었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으로 퇴계 이황과 외증손녀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설립하였고 선조 40년(1607) 사액 되었다. 병산서원과 더불어 공간미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성균관 등 교육기관마다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여기도 있다.
김굉필이 관직에 나갈 때는 이미 40세로 중종 25년(1495)이었다. 그러나 5년 만에 관직 생활은 끝났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고 여기서 조선의 도학정치 시조라고 평가받는 조광조에게 성리학을 전수했고 김안국, 김정국, 이장곤, 이연경 등도 제자로서 그의 실천적 학문을 계승해 중종대 사림의 주역이 되었다. 김굉필은 2년 뒤 다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가 1504(연산군10) 갑자사화 때 51세 나이로 참형 당했다. 그의 신도비에는 초연한 도학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는데 “형을 당하는 날 목욕을 하고 관복을 깨끗이 입었다. 걸음을 옮기다 신발이 벗겨졌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형을 당하면서는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신체의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이것마저 다치게 할 수 없다’며 수염을 입에 물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초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중종 12년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2년에는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남계서원]
咸陽의 藍溪川邊에 있는 灆溪書院은 1552년(明宗7) 白雲洞書院에 이어서 두 번째로 賜額받은 書院이다. ‘藍溪書院’이라는 扁額도 明宗의 親筆이다. 正門역할을 하는 風詠樓에는 연꽃 등 꽃무늬가 아주 많은데, 연꽃은 佛敎의 象徵이기도 하지만 君子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屛山書院의 晩對樓 옆에는 400년 된 배롱나무가 있듯이 여기 明城堂(밝게되면 정성스러워 진다)을 감싸는 것도 배롱나무다. 베롱나무는 淸廉潔白한 선비(士)를 뜻한다. 高麗말 性理學이 들어왔으나 朝鮮初期는 朱子 理氣論과 心性論에 바탕을 둔 道學이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金宏弼과 鄭汝昌에 이르러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둘은 金宗直으로부터 學文을 배웠다. 김굉필은 정여창보다 네 살 아래지만 둘은 莫逆한 사이였고 學問的 性向도 같았다. 慶北 達城君 求智面에 있는 ‘二老亭’은 이 두 사람을 記念하기 위하여 지은 亭子다.
1490년 科擧에 及第한 정여창은 世子인 燕山君의 스승이 되었다. 연산군은 名分과 道德을 重視하고 곧고 强直한 그의 학문적 성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4) 戊午史禍 때에 咸境道 鍾城으로 7년간 流配되었다가 1504년 4월 1일 유배지에서 死亡했다. 55세였다. 流配地에서 著述한 여러 권 著書는 대부분 불태워졌고 일부만 남아 鄭逑의 「文獻公實記」에 전한다. 죽은 그해 10월 甲子士禍 때 剖棺斬屍되었으며 中宗反正으로 伸冤되어 右議政에 追贈되고 光海君 때부터 ‘東方五賢’으로 불렸다.
[옥산서원]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유학자 이언적 사후 20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1573년(선조6) 사액 받았다. 이언적은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아들인 이응인을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그를 실제 강계 유배지 등에서 가깝게 모신 아들은 서자인 이전인이었다. 그는 이언적이 경주향교 교관이었던 시절에 기생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로 효성이 지극했다. ‘無潛溪 無晦齋(무잠계 무회재)’라고 할 정도로 ‘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다’는 이 말은 그가 평생 아버지 학문을 드러내고 알리는 데 바쳤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강계 유배 중 사망하자 시신을 직접 짊어지고 6개월이 걸려 운구해 왔으며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래서 이언적의 후손은 본가의 이응인을 중심으로 한 양동파와 독락당과 옥산서원 중심의 이전인의 후손인 옥산파로 나뉜다.
[도산서원]
우리나라 지폐 중 최고액인 5만원 권에는 신사임당, 1만원 권에는 세종대왕, 5천원 권에는 율곡, 1천원 권에는 퇴계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율곡과 어머니 신사임당 두 분이 모델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를 아직도 서인이 지배하고 있다는 억부(억보의 경상도 방언)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이이를 배향한 파주의 자운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1969년 복원되었으나 멋이 그저 그래서인지 찾는 사람도 없는 반면, 성리학이라면 떠오르는 이항을 배향한 도산서원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더 많이 박혀있어서인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퇴계는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46세 무렵 낙향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는 260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의 사상은 영남학파를 형성하고 주리론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가 되었으며, 퇴계 문집이 임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 유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연산군 7년(1501)에 태어나 70세인 1570년(선조3)에 세상을 떠났는데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자명을 남기고는 비석은 세우지 말고‘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라고 했다. 이미 70을 넘긴 나는 오늘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해 보면서 ‘자명(自銘)’을 본다.
生而大癡 태어나면서부터 몸시 어리석었고 *癡어리석을치
壯而多疾 장성하여서는 병도 많았네
中何嗜學 중년에는 어쩌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嗜즐길기
滿何叨爵 말년에는 어쩌다 벼슬에 올랐던고 *叨탐낼도 *爵벼슬작
學求猶邈 배움은 추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邈멀막
爵辭愈嬰 관직은 사양할수록 얽히누나 *작사유영
進行之跲 세상에 나아가면 실패가 많아 *넘어질겁
退藏之貞 물러나 숨으려는 뜻 굳혔다네
深慙國言 나라의 은혜에 몸시 부끄럽고 *慙부끄러울참
亶畏聖言 성인의 말씀 참으로 두려워라
有山嶷嶷 높고 높은 산이 있고 *嶷산이름억
有水源源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는데
婆婆初服 벼슬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니
脫略衆訕 뭇 비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네 *헐뜯을산
我懷伊阻 나의 마음 저들이 몰라주니 *아회이조
我佩諭玩 내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아패유완
我思故人 내 옛사람을 떠올려보니
實獲我心 실로 내 마음을 얻었거니
寧知來世 어찌 후세 사람들이
不獲今兮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憂中有樂 근심 속에 즐거움이 있고
樂中有憂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는 것을
乘化歸盡 조화를 타 삶을 다하고 되돌아가니
復何求兮 다시 무엇을 구하랴
[덕천서원]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그가 죽은 4년 뒤인 1576년(선조9)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 ‘덕산서원’이었으며 도산서원·옥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임란으로 소실되어 1602년(선조35) 중건되었고 1609년(광해군 원년)‘덕천서원’으로 사액되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6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조식은 55세 때인 1555년(명종10)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고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면서 “대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선왕의 고아일 뿐이다”면서 당시 문정왕후와 명종에 대해 직설적으로 표현한 상소를 올렸다. 뿐만아니라 “높은 벼슬아치는 빈둥거리며 뇌물을 모아 재산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고…”라 하여 조정 신하들까지 신랄히 비판했는데 이토록 꿋꿋한 기개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당시는 임꺽정 일당이 활개 치던 세상으로 조식은 이미 섞을 대로 섞은 것이 조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지러운 현실을 도피하며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학문적 지표는 경과 의로서 철저한 자기 수양을 통해 올바름을 실천한 것이었다. 경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 실천하라는 신념은 곧 제자들에게 가르쳐졌다. 정인홍 등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임란으로 피폐한 조선을 복구하기도 했다. 1501년에 태어난 조식과 이황은 완벽하게 동시대 인물이다. 하지만 조식은 경상우도를, 퇴계는 경상좌도를 대표하며 쌍벽을 이루었으나 편지 왕래만 있었을 뿐 둘은 만난 적은 한 번도 없고, 관직에 나간 퇴계와 달리 남명은 벼슬을 한 적이 없다 1571년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경상도에 70년을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 버렸다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조식은 1년 뒤 떠났고 광해군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산서원]
서애 류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병산서원 뒤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라는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셋째 아들 류진이 심었다고 전하는 베롱나무가 서 있다.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진다고 하여 흔히 백일홍이라고 하는데 수령 400년에 이른다. 베롱나무는 나무껍질이 없이? 마치 겉과 속이 같은 모습으로 청렴결백하고 고결한 선비를 닮았다고 하여 서원이나 정사(精舍) 등에 많이 심는다.
황희, 이원익, 김육, 채제공과 더불어 조선의 5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류성룡은 임란 전에 권율과 이순신을 선조에게 추천하고, 1590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좌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거쳤다. 서애는 퇴계 문하로서 조목, 김성일 등과 함께 수학했는데 퇴계 영향으로 성리학에는 밝았으나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부인하며 불교의 선학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란 때 인식과 실천을 강조하는 등 그의 대처 방법을 보면 어느 정도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척의 대상이던 양명학은 斯文亂賊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과 실학자 이익 등에서 유연하고 다양한 사상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볼 때 류성룡 역시 젊었을 때 제한적이나마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추측하게 한다.
【정원, 누각, 정자】
우리나라의 정원은 중국, 일본과 달리 자연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위압감이 전혀 없는 건물을 배치해 선비의 단아함과 꼿꼿함을 드러냈다. 계곡 지형과 개울, 바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또 사계절이 뚜렷한 것을 이용하여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스스로 그러하듯 원래 있는 그대로 자연에 동화되고 천인합일을 꿈꾸었는데, 이렇게 정원과 누, 정이 발달한 것은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연 속에서 만물의 이치를 발견하고 스스로 수양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 유유자적한 생활을 동경한 데도 원인이 있어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학문 연마와 심신을 수양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성리학적 즐거움도 빼놓을 수는 없다.
정원 등에 사용되는 건축물은 구분하여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❶ 누樓 : 다락집이나 누각이라 하고 보통 2층이다. 사방이 탁 트이고 행사나 놀이를 위해 지었다. → 영남루, 촉석루, 태화루
❷ 정亭 : 전망 좋고 경치 좋은 곳에 휴식과 풍류를 위해서 → 동호정, 군자정, 합강정
❸ 각閣 : 연대나 단상 위에 격식 있고 높다랗게 짓는다 → 청풍각
❹ 당堂 : 방과 방 사이의 큰 마루를 가리키나, 방이나 대청이 있는 별당건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 다산초당
❺ 대臺 : 흙이나 돌로 축대를 높이 쌓아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었다 → 낙천대, 을밀대
❻ 원園 : 넓은 뜰과 숲이 우거진 곳에 지었다 → 소쇄원
❼ 헌軒 :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방이나 사랑채에 붙인다 → 매실헌
도연맹의 〈귀거래사〉에는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휘돌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있다. (岫산봉우리수) 조선 영조시대 도연맹처럼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류이주는 운조루를 짓고,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며 소박한 여생을 보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인데 마당을 중심으로 口자 형태로 좌측채와 우측채는 물론 부엌과 광 모두 2층 다락이 있다. 이런 공간배치는 호남지방의 일반적 형태가 아니라 경상도 지방의 가옥구조인데 그것은 류이주가 본래 경북 안동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고, 집은 99칸이라 불렸으나 1776년부터 7년 대공사를 거쳐 창건 당시는 85칸이었으나 지금은 63칸만 보존되어 있다.
책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의 하나로 경북 봉화에 있는 청암정을 꼽았다. 아직 가보지 못해 아쉽다. 자연석 위에 T자형으로 지어진 정자는 동쪽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 대청마루를 하고 있는 부분과 서쪽 정면 1칸, 측면 2칸의 마루방과 누리마루 형태로 거북등 모양의 바위 위에 세운 활주의 길이가 모두 달라서 이상한 듯 운치를 더한다고 한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이 1507년(중종2)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삼척부사를 역임하였고, 42세 때인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자 낙향한 1526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나중에 복직되었으나 1547년(명종2)‘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71세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되고 1591년(선조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청암정의 현판은 남명 조식의 글씨이고, 전서체인 청암수석(靑巖水石)은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이 썼다.
청암정 전경과 현판
【제사】
요즘은 고조부까지 지내는 ‘4대 봉제사’를 모두 지내는 집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우리집도 그렇지만 명절의 차례까지도 생략하거나 모아서 지내는 등 간소화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제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유교문화다. 제천祭天의식에서 비롯된 제사는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지만, 정형화된 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유교는 효의 뿌리를 제사라고 보았다. 또 효를 확대시켜 충을 이끌고자 했으며, 나의 존재와 신분의 근본은 조상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인식이 제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가문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제사는 종교와 달리 우상숭배도 내세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는 따져봐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통해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효의 관념을 충이라는 관념으로 확대하여 국가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18세기까지는 부모의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은 자녀들이 균등하게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으나 딸을 상속에서 제외하고 적장자를 중심으로 계승되면서 변화가 있었는데, 오늘날과 같이 큰아들 중심 제사가 이루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제사의 종류와 제사 지내는 법은 가가호호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성균관, 향교】
유교는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유입되어 그에 따른 교육기관이 생겼는데,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고려 충선왕(1308년)때 국자감을 개칭한 것이다. 조선시대도 성균관을 그대로 이었으나 태학, 반궁, 근궁 등으로도 불렸다. 고구려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이 성균관이 된 것이다. 서울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었다면, 지방에는 향교를 지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성균관과 향교는 강의실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로 나뉜 기숙사, 도서관인 존경각, 배향인물을 모시는 문묘로 구성되는데,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정신적 지주를 배향(配享-신주를 모심)하는 곳으로 왕이 문묘에 나가는 것을 행학(幸學), 참배하는 것을 알성(謁聖)이라고 하였는데, 알성을 기념해 과거시험을 치르던 것은 특별시험인 알성시라고 했다.
문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유교의 규범이 되어 종묘제례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제사였고 매년 봄, 가을(2월 8월 상정일-처음의 丁日) 두 차례 실시하는데, 이때의 문묘제례악과 팔일무는 중국에서도 사라진 원형으로 남은 중요무형문화재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4현과 민손, 염경, 염옹, 재여, 단목사, 염규, 중유, 언언, 복상, 전손시 등 공자의 수제자 10명, 주돈이·정호·정이·소옹·장재·주희 등 송나라 6현 등 공자 문하 72현, 한·당·송·원나라 22현, 그리고 우리나라 최치원·설총·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흔·김장생·김집·조헌·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18현을 모셨는데, 공자 등 4현은 대성전에 모시지만, 여타 공자 문하와 우리나라 18현은 행랑을 뜻하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모셨다.
아무튼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고, 향교는 임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교육적 기능은 점차 약해져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 청소년 예절교육, 한문교실, 지방의 문화를 알리는 문화교실 등으로 지방문화 발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지역의 전통문화를 잇는 요람으로 부활한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