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면 포산리葡山里 유래
마을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을 때에 산에는 산머루- 이지역 말로는 구머리라 하는데 산머루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논과 밭이 있기는 하나 물을 댈 수 가 없기 때문에 논농사가 짓기가 어려웠다. 본래는 진보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 화매동(花梅洞)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포산리라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마을의 특징]
이 마을에는 원님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마디로 하여 이 마을에 옛적 원님이 앉았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사연은 원터 마을에서 풀이한 이야기로 가름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구머리ㆍ머루산ㆍ포산(葡山)
1914년의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진성현에서 석보면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 곳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개척한 마을로서 주위의 산에 구머리(머루)가 매우 흔해서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조현만(62) 제보). 머루산을 한자로 뒤쳐서 포산으로 한 것이다. 구머리는 머루에 대한 이 고장의 말이다.
*봇골ㆍ복골ㆍ복곡(伏谷ㆍ洑谷ㆍ福谷)
복골은 화전민이 개척한 마을로 논밭을 일구어 농토를 마련할 때 논을 만들기는 했으나 워낙 산간 지방이어서 논에 물을 댈 만한 저수지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보를 많이 만들어서 논에 물을 대었다. 이로 인해서 봇골ㆍ복골로 불리우고 있다(조현만(62) 제보).
장구매기 북쪽에 있다. 물을 가두어 논밭에 대기 위하여 만든 간이 못을 이르러 보(洑)라한다. 보가 있는 골짜기가 바뀌어 봇골 혹은 복골이 되었으니 결국 소리가 닮아서 그리 굳어져 쓰인 것이다.
*원터(院一)
포산동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는 이 곳에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곳이 원터라 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 근처 고을의 원님이, 부인이 있는 영해의 속실로 가는 도중에 앞이 훤히 트인 이 곳에 앉아서 잠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 때 고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서 온 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님은 이 곳에 앉아 들을 바라보면서 가뭄을 걱정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결에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어르신네 내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몇 달 전의 큰 비로 원님이 앉아 계신 뒷산에 산 사태가 났는데, 그 때 내 뼈들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묻혔습니다. 흩어진 내 뼈를 찾아 한 곳에 묻어 주시면 비를 내려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원님은 여우가 가리킨 곳에서 그 뼈를 찾아 거두어 양지 바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 후에 가뭄은 걷히고 비가 내려서 풍년이 들게 되자 주민들은 원님이 앉아 있던 곳을 원터라고 불렀다 한다(신현부(51) 제보).
여기 원터는 광제원(廣濟院)을 가리킨다.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세운 것인 만큼 병 치료뿐만 아니라 가뭄을 함께 걱정한 계기가 되었으니 사람들로서는 기억할 만한 장소가 된 것이다.
*작은구머리ㆍ장구매기
구머리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작은 구머리라고 하는데, 이 마을은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구매기라고도 부른다(우상술(66) 제보). 구머리의 구머-구매는 소리의 비슷함으로 생겨난 마을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아래몰ㆍ아리몰
어그랫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관곡에서 나오는 하천 어귀 위쪽에 위치한 훌무골과 화매를 합쳐 옷몰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에 위치한 절골ㆍ평지마ㆍ사기점을 합쳐 아랫몰이라 부르고 있다(김성규(62) 제보).
*웃몰
어그랫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그랫골을 사이에 두고 위쪽에 있는 마을은 웃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몰이라 한다(신근환(62) 제보).
*흘무골ㆍ흘뭇골ㆍ토곡(土谷)
처음의 이름은 본 마을과 같이 꽃매라고 불렀지만,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돌은 적고 흙으로만 되어 있는 골짜기란 까닭으로 흘무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옛날 이 못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 가면서 꼬리로 옆에 있는 바위에 현(玄)자를 쓰고 올라 갔다고 하여 현무골(玄武一)이라고 하기도 했다(박춘엽(50) 제보).흙을 이 지역에서는 '흘'이라고 하는 바 흙이 많이 모여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풀이할수 있다. '뭇'은 많다 혹은 모여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니 흙살이 좋은 마을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토곡은 흘뭇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림이다. 현무는 거북이를 가리킨다. 거북이는 물신을 섬기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용도 따지고 보면 물신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신(神)의 우리말은 '검'(『新字典』)이니 검은 현(玄)의 검 또한 물신을 떠 올림에 족하다고 하겠다.
*평지마ㆍ평촌(坪村)
이 곳 역시 옛날 이름은 화마(花馬)라고 했는데, 이 고장에 가뭄이 심하여 논에 물을 대기가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보를 만들고 보의 물이 잘 흘러 들어 가도록 벌판을 깍아 내려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 이름도 평평한 마을, 즉 평지마라고 고쳐 불렀다 한다(김의웅(51) 제보).
*화마(花馬)
화마를 본래 우리말로 보고 풀이를 하면 '곶마'이니 '곶'은 두드러져 튀어 나온 곳을 이름이요, '마'는 마을이라 함을 고려하면 화마는 결국 두드러져 다소 높은 마을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자의 적기로 볼 때 꽃 화(花)는 글자의 뜻을 따온 것이며, 마(馬)는 한자의 소리를 따 온 것으로 풀이된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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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마리, 구머리, 쌔배따, 쬐메, 길메기, 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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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70) 석보면 포산리(葡山里)가 궁금니껴?
포산(葡山)는 머리(머루)가 디게 많은
깊은산속 마실이라꼬
포산(葡山)이라 카니더.
석보면 중심지 마실(원리리)에서 볼때
디게 먼(遠)데 있는 마실이라꼬.
멀다라꼬 카다 머리로 파생되어
포산이라 켔따 카기도 하고.
높은 산에 있는 마실이라꼬
꼭때기를 뜻하는 마리(마루)가 파생되가꼬
포산이라 켔따 카기도 하니더.
그리고 산 꼭대기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습지가 잘 발달 되어 있어가꼬
논농사를 지을수도 있는 데시더.
본새는 진보군 동면 땅이었지만
1914년 행정구역 바꿀때
지금의 포산(葡山)이 맹글어 지면서
석보면에 속하게 됬니더.
(구머리ㆍ머루산ㆍ포산)
산꼴티중 꼴티에 있는 마실로
마을회관 있는 중심지 마실 이시더.
근바 구머리(머루)가 쌔배따 케가
구머리라꼬 카니더.
머리(머루)를 여서는 구머리라꼬 카고
포산(葡山)은 머루산을 한자로 쓴거시더.
(봇골ㆍ복골ㆍ복곡)
화매캉 삼의 중간에 있는 쪼메한 마실로
화전민이 맹근 마실이시더.
깊고 깊은 산꼴짝이어서 논밭에 물 댈
저수지가 달부 없어
쬐메한 보(洑)를 많이 맹글어 물을 확보후
물을 댈수있께 되었따꼬
보꼴(伏谷ㆍ洑谷ㆍ福谷) 혹은 봇꼴(복꼴)
이라 카게 된니더.
(원터)
원집이 있었떤데라꼬 원(院)터라 카니더.
천주교 성지가 있는 근바로
옛날 걸어디닐때는
여어를 지나가야 영해로 갈 수 있는
길메기(길목)였니더.
(작은구머리ㆍ장구매기)
구머리 북서쪼구 영덕군캉 이사지는
영양군 최남단 지역이고
쬐메한 구머리라꼬 작은구머리라 카니더.
마실모양은 짱구(장구)가꺼러 넓었따
오목했다가 또 넓어지는데라케가
장구매기라꼬 켔따 카기도하고.
작은구머리가 발음하기 좋꺼러
바끼어 장구매기라 카게됬따 카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