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유럽, 한번에_볼건 다 보고싶다】 발칸 하이라이트 2개국 (크/슬) + 동유럽 핵심 4..
# 동유럽에서 문득 낯선 나를 만나다
9월 19일(금) 맑았다. - 혼자 떠나는 이의 설렘은 외딴 낯섦 속에서 오래도록 쿵쾅거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늘 설렌다. 혼자 떠난다는 것은 외로움을 잔뜩 싸서 떠나는 거지만, 그러한 외로움 가득한 짐들 속 어디에는 낯선 흥분과 불안한 기대감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애초 아내가 등을 떠밀듯이 한 번 다녀오라고 선심 쓰듯이 말할 때까지도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듯이 조금은 좀생이처럼 내가 해야 할 일들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잠시라도 매정하게 돌아서야만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살림살이가 아니던가? 머뭇거리는 내 등 뒤에서 아내는 다시금 못을 박듯이 학습연구년을 들먹이며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기에 그건 도시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그래 한 번 다녀오자 하는 다짐이 불쑥 생기는 것이었다. 낯선 것이 두려워져 가는 쉰 살 문지방 앞에서 나름 귀차니즘(?)의 올가미를 풀고 현관 밖을 나서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가지 괜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근사한 삶을 꾸리는 사람들을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라든지, 나의 무디어진 감성을 일깨워 줄 만한 어마어마하게 감동적인 풍광이나 문물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욕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혼자 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의 일상으로부터 잠시 정을 거둬들이고 떠나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낯선 시간 낯선 장소에서 나의 일상을 멀리 건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설레며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잠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네 시간을 훌쩍 넘어 나는 진주에서 인천으로 순간 이동해 왔다. 내가 탈 항공기는 아시아나 ‘OZ541’이었다. 항공기에 올라 탈 때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눈 깜짝할 사이 느닷없이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긴장감은 묘한 아슬아슬함과 함께 흥분을 자아내기도 하니까. 아마도 이런 느낌은 결코 촌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탄 항공기가 만 미터 상공에서 시속 팔구백 킬로미터로 아찔하게 열한 시간을 날아가는 동안 나는 이냥 텅 빈 공중에서 숨 쉬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불고기영양쌈밥’과 ‘삶은 감자치킨’을 한 점도 남김없이 싹싹 쓸어 먹고도 또 ‘카르푸’를 간식으로 먹어 치웠으며, 화장실을 다섯 번 다녀오고, 영화를 세 편 보고, 물을 넉 잔 마시었다. 떠나오기 전 이를 하나 뽑았고 잇몸수술을 하고 난 터라, 무언가를 먹고 난 다음에는 꼬박꼬박 양치를 하고 약을 먹어야 했으며, 졸음에 시달리는 동안 얼마간인지는 정확히는 모르나 꽤 오랫동안 기내의 건조함에 입술을 바짝 태워야 했다.
저녁 다섯 시 무렵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전화기를 켜니, 신기하게도 독일 시각과 한국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전화기 시계를 보고, 손목시계의 시각을 일곱 시간 늦추어 맞추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편리한 것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이후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나라의 이름과 현지에서의 통화 및 문자 요금 안내문자가 날아올 때마다 반복되었다. 우리를 태워갈 버스는 가죽시트가 땡글땡글한 독일산 벤츠사 버스였고, 기사는 슬로바키아 사람이었다. 이름은 시박, 헐, 사람들이 하나같이 깜짝 놀라 응, 뭐지? 하며 길라잡이님을 주목했었다. 전형적인 동유럽형의 두터운 얼굴에 임산부 같은 배가 태산이었다.
드디어 독일산 멋쟁이 버스는 우리가 묵을 숙소 앞에 섰다. 밤 아홉 시 무렵이었고, 뮌헨의 서쪽 근교라는 점이 호텔 이름에서 잘 드러났다. ‘베스트웨스턴호텔’은 ㅁ(미음)자 모양을 하고 기와를 지붕에 이고 있었다. 창문이 지붕에 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다락방 같아 아늑하고 마음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스물네 사람 가운데 남자 셋, 그 가운데 둘은 부자지간이니, 남자는 나 혼자인 셈이었다. 요새는 어디를 가든 온통 여자들 천지다. 석기시대의 여인네들이 저마다의 손에 돌도끼를 들고 워워 소리치며 쳐들어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인천하에서 며칠을 살다가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잠이 잘 오질 않았다. 후!
9월 20일(토) 맑았다가 흐렸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렸다. - 숨만 쉬어도 그대로 음악이 되었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숙소에서 두 시간 정도 달려,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버스를 내렸다. 우리는 걸어서 미라벨 정원으로 들어갔다.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었다는 사백 년 전 이야기는 왠지 나에게는 아찔하게 다가왔다. 사제의 사랑이란 장미꽃 같았으리라. 장미향기만큼 달콤하면서도 장미가시만큼 위험한 일이지 않았을까? 결국 파문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좀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날 무렵이면 천국의 정원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잘츠부르크 성을 바라보며 후문으로 나와 ‘사랑의 자물쇠 다리(마카르트다리)’를 건넜다. 얼마 가지 않아 게트라이데 거리에서 노란색 육층 건물인 모차르트 생가를 만났다.
세기의 작곡가이자 음악의 신동이라 불렸던 모차르트가 태어난 이곳은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이다. 언제나 터져나갈 듯이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길잡이님이 들려주었던 모차르트 이야기는 쾌활함과 애잔함이 혼재해 있었다.
고전주의를 완성한 모차르트는 대개 밝고 경쾌한 음률들이 기발하게 조화를 이루는 곡들이 많다. 한번 오선지에 던져진 음계들은 그대로 살아서 노래가 되는 것이었다. 천재적인 음악가였다. 아버지는 친절하면서도 다정하게 이끌어 주었고, 아버지의 음악성이 영향을 미친 바가 컸다. 음악가의 집안에서 지대한 지원을 받으며 어릴 때부터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여관집 딸 콘스탄체를 사랑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물아홉 살 때 당대 최고의 음악가 하이든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원인불명으로 서른다섯 살에 죽어, 묘지도 아닌 들판 같은 곳에 시신이 방치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하니 전성기에 비하자면 그의 말년은 참으로 불후하고도 허무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마데우스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얼핏 들은 듯도 하였다. 그의 웃음소리는 온 게트라이데 거리를 매운 사람들의 머리 위에 햇살처럼 퍼지고 있었다.
- 몇 만 년 전의 바다가 올라와 이룩된 동화의 나라, 잘츠커머굿 할슈타트
잘츠커머굿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마을 안길 네거리 고목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창 시끄러웠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전통복을 차려 입은 남자, 결혼식이었다. 맨 앞줄에는 서른 명 남짓한 악대가 서고, 그 뒤에 신랑신부가 탄 오픈카가 서고, 다시 그 뒤에는 한껏 꽃 단장을 한 하객들이 저희끼리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서서, 천천히 행진해 갔다. 음악소리는 한층 밝고 가벼웠다.
다른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타러 가고 나는 혼자 남아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호수가 있는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나는 멀리 걸어가다가 요트들이 넘실거리는 선착장에서 발을 멈추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자꾸만 그 호수들이 정겹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날이 덥지도 않건만 요트를 타던 젊은이들이 호수에 몸을 던져 헤엄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들이 우거진 호숫가 수풀 속에서 장판 같이 매끈한 수면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수면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눈이 부시었고, 멀리 건너편 높은 산 그림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물결 위로 간혹 젊은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유리알처럼 맑게 쏟아지곤 하였다.
잘츠커머굿에서 할슈타트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구절양장이었다. 할슈타트는 조용한 호수마을이다. 나는 벼랑 위에 붙어 있는 예쁜 집들을 올려다보며,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할슈타트의 ‘할’도 소금이라는 뜻인데, 바다가 올라와 만들어진 땅이었기에 예로부터 소금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예전엔 큰 부자 도시였을 것이다. 호숫가 벼랑 위의 집들 아래로 길을 내었는데, 길은 물가를 따라 꼬불꼬불하고 호수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자꾸만 낮아지는 듯했다. 마당이 없는 이곳 집들은 갯바위의 따개비처럼 올망졸망 붙어있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깨나 어깨들을 스칠 만하게 창턱마다 꽃들을 치렁치렁 기르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은 때로 사람의 눈보다 높게 느껴져 동화나 꿈속 마을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가게로 보이는 집들은 앙증맞은 손 글씨로 물건 값을 적어 놓은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두 시간 삼십여 분만에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로 와서 저녁을 먹었다. 이곳 뷔페식당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춤추고 놀았는데, 나는 그들의 신명이 보기 좋아 한참 동안 손뼉을 쳐 주었다. 우리들 등 뒤에서는 백삼십칠 미터 높이의 도도한 블레드 성이 아름다운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블레드 호수는 수정처럼 맑았다. 우리는 플레트나를 타고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갔다. 뱃사공 야네스는 손수 노를 저으며 호수를 애무하였고, 그가 입고 나온 빨강 티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대비되어 불붙는 것 같았다. 우리는 김일성이 아름다운 이곳 풍광에 반한 바람에 며칠을 더 묵어 갔다는 ‘티토의 별장’ 옆을 지나갔다. 별장의 지금 모습은 비록 수수한 호텔에 지나지 않았지만, ‘티토’라는 이름만은 살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소련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유고연방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던 주체적인 배짱남 요시프 브로즈, 최초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그의 별칭이 바로 티토였다. 나는 잠시 그를 위해 묵상했다.
블레드 섬에 도착하자 아흔아홉 칸의 계단을 올라 성모승천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에 소원이나 사랑을 빌면 이뤄진다는 '행복의 종'을 쳐보았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신기 속의 우리 길잡이(손희경)님은 종소리가 잘 들리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아, 나에게는 번개 같은 깨달음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의 기도가 하느님에게 가 닿을 때도 그 응답의 말씀은 결코 내 귀에는 들리지 않겠구나! 나의 기도는 오로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귀에만 들릴 종소리 같은 것이겠구나! 나는 그 순간 오, 하느님, 오, 성모님, 하고 조용히 몇 번을 중얼거렸다.
섬에서 나와 간 곳은 천년 고성 블레드 성채! 프레트나를 타고 앉아 쳐다보았던 그 모습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서 위풍당당하였다. 그 당당함은 너무 아름다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유고인들에게는 건국 영웅 티토의 모습이 저러하였으리라. 나는 잠시 전율하고 다시 우리에게는 만고의 영웅 이순신이 꼭 저러 하였으리라고 눈을 감았다. 성문을 지나 들어간 성안 가장자리에서 나는 맨 먼저 성모승천성당을 건너다보았다. 섬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 아담하게 내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섬을 방문하였을 때 나를 꼭 안아주던 성모님의 포근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더 이상 천국 같은 곳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박물관 이층에서 창틀을 액자로 삼아 블레드 시내 풍경을 내다보았다. 숨이 턱 멎을 것 같은 담박함과 선명함이 눈을 맑게 씻어주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부디 자기가 몰래 훔쳐본 그 천국의 풍광을 사진에 담을 수 없으리니, 이곳 풍광은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가만히 담아갈 일이다. 사진에 담기에는 곧이곧대로 거룩하고 고스란히 깨끗하며 그저 맑을 뿐이니, 당신의 얼 안 깊숙이 먹물이 화선지에 번지어가듯 그렇게 담아야 할 숭고함이었다.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조용히 기도하였다. ‘주여, 다시는 저를 이곳에 데려오지 마소서. 더 이상의 성스러움은 제게 다시는 없겠나이다.’
- 꿈속에서 본 듯한 이국 방앗간 마을에서 요정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다.
까다로운 크로아티아 국경 검문을 지나, ‘요정의 머릿결’이라는 뜻을 지닌 마을 라스토케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쉼 없이 떨어지며 온통 물빛뿐이요 온통 물소리뿐이니, 이냥 물의 나라요 이냥 물의 천국이었다. 하얗게 부셔지면서 종일 쏟아지는 물살 위에 기둥을 세우고 살림집이나 물레 방앗간을 지었다고 한다. 자국인들은 휴양소로 숙박까지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게 하였다. 멀리서 사진 속에 담아보는 마을은 손톱만한 요정들이 금방이라도 날아와 짓궂은 장난이라도 걸어올 것 같았다. 요정이라 하면 우리에게는 아마 장난 끼 많은 아기 도깨비 정도나 될까?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에 들었던 크로아티아 국기의 체크문양 이야기는 다소 우스웠다. 베네치아의 총독과 내기 장기(체스)를 두어 자유를 얻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플리트비체 호수는 국립공원이었다. 비가 많이 온 바람에 호수의 물이 불어 곳곳에 나무다리가 물에 잠기었고, 배를 타는 곳까지 걸어갈 수 없겠다는 길잡이(손희경)님의 판단에 따라, 우리는 애초 계획과는 달리, 78미터 폭포까지만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 아래까지 가는 길에도 물이 넘쳐 양말과 신발을 벗어 들고 지나야 했다. 그곳에는 폭포수가 날리어 내도록 비를 맞는 것 같았다. 물은 발이 시리도록 차갑고 투명하여, 지상의 물 같지 않았다. 신선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신선함이 온몸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쉬움이 더욱 여운을 남기는 곳이었다.
9월 22일(월) 온종일 흐릿하였다. - 크로아티아의 심장 자그레브에서 민족의 영웅 요시프 옐라치치를 만나다.
시박이 일방통행 도로를 잘못 나서다 반대편 차량에 밀리면서, 좁은 길을 한참을 후진한 뒤, 출발하였다. 우리는 자그레브 대성당 광장에서 엠마를 만나, 백 미터에 이르는 쌍둥이 첨탑을 지닌 자그레브 대성당(성 스테판 성당)과 성당 입구의 황금 마리아상을 보면서 해설을 들었다. 성당은 1102년에 완공된 이래 전쟁, 지진, 화재 등으로 온갖 수난을 당하였고 지금도 복원공사 중에 있었다. 첨탑은 네오고딕 양식이라고 하는데, 외관은 바로크 양식이 묻어나고 있었다.
성당을 잠시 둘러보고 난 후 우리는 엠마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접어들었다. 성실한 설명과 안내로 우리 길잡이님을 감동시킨 그녀는 시골에서 유학 온 대학생으로 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돌락 시장을 만났다. 울긋불긋한 파라솔의 빛깔들이 아직도 고운 머릿속 그림으로 남아있는 풍경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한창 꽃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고운 파스텔 톤의 외벽과 붉은 지붕을 한 건물들이 늘어선 라디체바 거리를 따라 조금 경사진 거리를 오르던 끝에 투구를 벗어 든 기마상을 만났다. 그 곁으로 아치형의 돌문이 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스톤게이트다. 13세기 그라덱 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이 성문은 17세기 대화재 이후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대화재가 났을 때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지만 오로지 성모마리아 그림만 온전하게 되면서 스톤게이트는 전 세계 가톨릭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성문 바로 안쪽에는 성모님의 그림을 모신 제단이 있었다. 경사진 길을 조금 더 올라 간 오른쪽에 마르코 대성당의 지붕문양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깨어진 관계 박물관(정말 특이하지 않은가? 난 박물관 이름에 반해 버렸다)’ 앞을 지나 로트르슈차크탑에 이르니 자그레브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로트르슈차크는 도둑의 종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있던 종을 도둑맞으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오스만투르크 군대를 대포 한 방으로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요즘도 매일 정오에 대포를 쏜다고 한다. 자그레브를 사랑한 시인의 동상을 지나 우리는 옐라치치 광장으로 내려갔다. 광장 중앙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당시 총독을 맡았던 반 옐라치치 백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반 옐라치치는 헝가리로부터 크로아티아의 자유와 주권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농노제를 없애는 데 성공한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이라 한다. 광장 한편에는 만두셰바츠 분수가 있는데, 자그레브라는 도시의 이름 또한 ‘물을 떠 준 곳(자그리바)’이라는 뜻으로 군인에게 물을 떠 준 ‘만다’라는 처녀의 전설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 헝가리의 마자르족에서 흉노족을 거쳐 한무제의 장건에 이르기까지
또 한 번의 엄격한 국경검문을 지나 헝가리로 가는 동안, 우리의 길잡이님은 훈족이 유럽역사에 미친 영향과 한나라 장건이 13년 동안의 고초를 겪으며 개척한 비단길 이야기들을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처럼 펼쳐 보여 주었다. 창 바깥은 산 같지 않은 구릉 곳곳에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러한 그림 뒤에는 파란 하늘이 맑고 투명하였다. 일곱 마자르 족이 단결하여 세웠다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다패스트로 가는 길은 아련하면서도 구수한 옛 이야기 속으로 빨려 가듯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부다패스트에 접어들었을 즈음 길잡이(손희경)님은 헝가리의 천재 피아니스트 리스트를 소개했다. 체르니가 처음 리스트의 연주를 보았을 때의 놀라움, 신적인 연주솜씨로 대중의 우상이 되었던 리스트의 인기, 고향에 돌아왔을 때 빠져들었던 헝가리 민속음악과 그로 인한 영감으로 작곡한 헝가리 광시곡들에 얽힌 일화는 또 다른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길잡이님은 헝가리 사람들의 체형에 주목하여 주변국 사람들보다 허리가 길어 보이지 않느냐고 하였고, 긴 허리야말로 말을 달리며 뒤돌아 활을 쏘는 기사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부다패스트는 자살찬가 ‘글루밍 선데이’의 레조 세레즈가 생각나게 하고, 최근에 보았던 ‘그랜드부다패스트호텔’이라는 영화도 생각나게 했다.
헝가리 평야의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야경이 아름다운 도나우강을 경계로 언덕 쪽의 구시가 부다 지구와 반대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패스트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부다패스트에 도착하자마 우리 일행은 한국식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한국에서 유학 온 의대생 양동주의 안내를 받았다. 영웅광장은 헝가리 건국 천 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삼십육 미터 높이의 중앙 첨탑 위에는 헝가리의 수호천사 가브리엘이 서 있고, 아래로는 아라파트 족장을 비롯한 일곱 부족장의 기마동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 이중 십자가를 든 헝가리의 건국영웅 성 이슈트반 대왕을 기리며
이어 우리 버스는 겔레르트 언덕을 올라갔다. 상인들이 한국말로 손님을 부르는 계단을 지나 성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중십자가를 들고 있는 헝가리 최초의 국왕 성 이슈트반 동상이다. 이중십자가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동시에 지녔던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바로 그 동상 앞에는 도나우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어부의 요새가 있었다. 이곳은 어부들이 적의 공격을 막았던 요새로, 1902년 완성되었다는데, 거기서 바라본 세체니 다리는 왠지 너무 멀고도 가냘프게 보였으며 지쳐 있는 듯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멀리 헝가리 평야지대까지 보인다고 하니 옛 마자르 족의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듯도 하였다.
거기서 조금 위쪽으로 보이는 교회가 마차시 교회이다. 13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후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마차시 왕 시대에 88미터 탑이 세워지면서부터 이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합스부스크가의 프란츠 요세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렸고, 헝가리의 멋쟁이 작곡가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직접 작곡, 지휘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이웃한 부다 왕궁은 13세기 몽고 침입 이후 벨라 4세가 에스테르곰에서 피난 왔을 때 지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고려무신 최씨집권기 즈음이 되니, 당시 몽고군의 기세를 가늠할 만도 하다.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 국립도서관 등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곳에서 자유 시간 동안 왕궁 안을 쏘다니다 길을 잃었다.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갔던 길로 돌아 나왔다. 아마도 그때 길잡이(손희경)님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부다패스트를 떠나며 듣는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과 그에 이어지는 유키 구라모토의 가녀린 피아노 연주 가락은 먼 동방에서 온 나그네의 쓸쓸함을 더욱 애절하게 하였다.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지금 어딘가로 다시 떠나야 한다는 객창감은 노랫가락의 마디마디에 실려 한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세 시간 남짓 달린 버스는 비엔나의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길잡이님이 마이크를 잡고 베토벤이 살았던 곳임을 일깨워 주었다.
베토벤은 사람들에 의해 자주 모차르트와 견주어진다. 고전주의의 절정에 올랐던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고전주의의 형식을 깨면서 낭만주의를 시작한 음악가이다. 모차르트와 달리 장중하고 무거운 음률들을 많이 썼고, 그의 표정은 늘 고뇌에 쌓인 듯했으며 그의 악보는 도대체 몇 번을 다시 고쳤는지 알 수 없을 만치 지저분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음악가였다고나 할까. 아버지가 억압적으로 음악을 가르치고, 열다섯 명이나 되는 여인들과 사귀었으며, 하이든의 제자였으나 끝내 그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점, 그러나 영광스러웠던 말년 생활 등은 베토벤이 얼마나 모차르트와는 다르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쉰일곱 살에 죽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에서 엄청난 납 성분이 검출된 일화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마라토너 황영조와 이봉주가 떠올랐다. 타고난 체격조건을 갖춘 황영조와 체격의 불리함을 노력으로 이겨내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던 이봉주! 이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눈다면 ‘타고난 사람’과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든 평범한 자들의 신이었던 살리에르가 외치던 그 한 마디가 떠올랐다. “주여, 왜 갈망만 주시고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 쉔부른 궁전에 피어난 꽃,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우라
비엔나를 구경시켜 줄 길잡이(최경렬) 뒤를 쫄래쫄래 따라 갔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아름다운 샘’ 쉔부른 궁전이었다. 처음에는 소박한 별장 정도로 지을 생각이었으나 마침 그 무렵 짓고 있었던 베르사이유 궁전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화려하게 지었다고 전한다. 궁전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했다.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연주를 끝내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을 비롯하여 궁전 내부를 둘러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라는 한 여성의 인생을 들었다. 그 중에 시장에서 원숭이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이를 잡히는 그림은 참으로 낯설면서도 재미있는 풍속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림처럼 날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들려주는 길잡이의 현상학적 분석은 참으로 냉혹하였다.
16세기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 합스부르크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카를 6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소유권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을 겸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적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외교술을 보여줌으로써 나약한 여성이 아닌 한 명의 뛰어난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명백히 입증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남편 프란츠 슈테판은 당시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선남선녀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슈테판은 밝고 친화력이 있는 성격으로 카를 6세도 썩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어느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유능하고 힘 있는 군주였지만 막상 가정으로 돌아오면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아내였다. 그녀는 평생을 두고 남편을 대단히 사랑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16년간 상복을 벗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는 10명이었으며, 막내딸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함으로써 200여 년간 적으로 살았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했다. 오스트리아의 선화공주인 셈이었다.
- ‘키스’는 결코 벨베데레 궁전을 떠나지 않는다.
현지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벨베데레 궁전은 18세기 초 오이겐(유진이라고도 부른다고) 왕자가 지은 것으로 거장 힐데브란트가 건축을 맡았다고 전한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손에 넘어가면서 벨베데레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황실의 그림전시장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 역시 궁내 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예쁜 그림을 온전히 가져가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마음의 망막 위에 새겨가는 일이 더 종요로움을 잘 알면서도 늘 이 모양이다. 우리는 궁전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길잡이님이 입장권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잠깐 스핑크스 조각상 앞에서 머물렀다. 여자의 상반신을 하고 있는 스핑크스는 젖가슴 부분이 새까매져 있었다. 이 또한 기복을 빙자한 본능표출의 놀이공간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올라 왼쪽 방으로 들어가려니 먼저 온 관광객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키스’가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응, 뭐지?’ 했지만, 아,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황금색의 늪, 묘하면서도 기막힌 디자인 같은 구도, 이상야릇한 색감과 분위기가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남자는 강하고도 곧은 목선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뚱이가 만들어내는 라인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고 있지 않은 네모꼴에 가까웠고, 짙은 검푸른 빛으로 된 크고 작은 직사각형의 무늬로 수놓은 듯했다. 이에 비해 남자의 완강함에 지배당하면서도 끌려가고 있는 여자는 우선 목이 90도 가까이 꺾인 채로 남자의 얼굴을 향하여, 더 정확하게는 남자의 입술을 향하여 사로잡힌 채 곧 부러질 듯이 아슬아슬하게 온 그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을 이루는 선은 비엔나 근처를 지나치는 도나우강의 물줄기처럼 부드럽게 흘러 다녔고, 온통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금빛무늬들이 그녀가 성적 볼모가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근처에 해당하는 하의에는 수십 개의 꽃무늬가 울긋불긋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자의 뇌리가 느끼고 있는 키스의 날카로운 쾌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곧은 선 안에 어두침침한 색감으로 시작하여 금빛 배경 속으로 그 본능적 지배욕과 음탕함을 잔뜩 숨기고 있었고, 여자는 부드러우며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남자에게 사로잡힌 채, 질식할 것만 같은 목 꺾임으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살아있는 죽음으로 살아있었고,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절정 속에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바깥 테두리 선은 어쩌면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이들 둘은 서로를 향하여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릎으로 서서 서로를 애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길잡이의 설명이 간략하게 끝나고 다른 그림으로 옮아가고 있음에도 나는 꼼짝 없이 키스 앞에 서 있었다. 서양인 남녀가 가시버시 ‘키스’ 아래에 키스하는 풍경도 감상하면서 잠시 흐뭇하였다.
- 뜻밖의 매혹, 에곤쉴레의 구렁텅이에 빠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에밀리플레게(연인), 아담과 이브, 신부 등을 감상한 다음, 길잡이의 설명은 에곤쉴레 방에서도 계속되었다. 클림트의 제자로도 잘 알려진 에곤쉴레는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 탓이었는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클림트를 만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점차 클림트적인 초기 화풍에서 벗어나 다다른 곳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들로 독특하게 구성한 그만의 작품세계였다. 특히 그가 그린 여인과 소녀들은 다소 선정적인 누드화들이 많았으며, 그와 관련하여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한때 클림트의 후계자로 이름이 나기도 하였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그도 같은 병으로 나흘 만에 죽음으로써, 스물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그림은 불편하였다. 칙칙한 색감과 거칠기 그지없는 선들은 그로테스크한 끔찍함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찡그리게 한다. 에곤쉴레의 작품 앞에 서면 발걸음을 서성거리게 댄다. 오래 보고 있지 못하는 불편함과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없는 흡입력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이라는 그림 앞에서 망연자실하였다.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아내가 스페인 독감에 걸린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이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에곤쉴레는 삶을 전쟁터로 보았고, 사람을 전쟁이 남긴 잔학함의 희생양으로 본 것 같다. 전쟁 같은 삶과 주검 같은 사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나 죽은 사람 같았고, 실낱 같은 숨을 쉬기 시작할 것 같기도 한 주검 같았다. 음울하고 침통한 죽음의 긴 터널 속에서 만난 사람들 같았다. 에곤쉴레의 어두운 색감들과 거친 터치는 내 가슴의 어딘가 금간 틈 사이로 흘러 들고 있었다. 뜻밖의 감동은 나를 놀래게도 하였지만 동시에 기쁘게도 하였다.
- 최초의 순교가 남긴 거룩한 신앙심, 성 슈테판 성당
성 슈테판 성당은 빈 대교구의 성당으로 오스트리아의 혼이며 빈을 상징하는 최대 고딕건축물로, 성당이름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슈테판 성인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성당의 정문 위에는 예수님을 가운데 모신 두 천사를 돌로 새겨 놓았고, 입구는 서쪽으로 나 있는데, 신도들이 앉은 자리가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당내부에 들어서자 높고 우아한 아치들이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들이 붐볐기 때문 제단이 보이는 장소를 찾기도 힘들었다. 나는 왼쪽으로 걸어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곧 미사가 시작될 모양으로 성가대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성당 벽 쪽으로 마련된 자리에 와서 앉기 시작했다.
성 슈테판 성당의 거대하고 길쭉한 창문들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고 차분하였다. 나는 동쪽으로 향하여 배치된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왼쪽에는 키 작은 촛불들이 기도하는 신도의 옆모습 은은히 비추며 흔들리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촛불대와 성녀 소화 데레사 수녀님의 초상화 사이에 서서 어둑한 성당 내부와 숭고한 소슬천장과 그곳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성당 안은 어둑했지만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지배하고 있었다. 성녀의 맑고 온화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좋은 기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프라하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길잡이님은 이 곳 성당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기에 성가대 생활을 하였고,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슈테판 성인은 오히려 죽음으로써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리라는 그 분의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 비엔나에서 프라하까지 세 시간 삼십 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오는 길에 길잡이님은 체코와 프라하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란쿤데라, 프란츠 카프카, 안토닌 드보르작, 체 게바라, 이안 후스, 이안 네포무츠키 등이었고, 그와 관련된 세계사를 망라하고 있었다. 68혁명과 프라하의 봄, 미소 이념대립의 냉혹한 빙하기, 100년을 앞질러 살았던 종교개혁자, 길잡이님의 유럽사 ‘폭풍지식’은 한도 끝도 없어서 내도록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덕택에 우리는 무게 있고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이 잠시 일상을 떠나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여행의 의미 또한 여행에서 접한 많은 삶들을 제 삶에 비추어 얻는 깨달음에 있을 것이었다. 길잡이(손희경)님은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곳에 얽혀 있는 사람과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하였고, 일상에 두고 온 것들을 간절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은 낙엽처럼 가벼웠지만, 그들의 바스락거림은 내 심금을 울리고, 그 울림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다.
- 총을 든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 머물렀던 프라하의 아파트는 어디쯤인가 ‘변신’, ‘성’, ‘심판’ 등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 이야기도 좋았고, 민족주의 음악가 안토닌 드보르작의 음악 이야기도 좋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잡아 흔들었던 이야기는 체 게바라였다. 가요계의 거장 비틀즈와 함께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인으로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던 사람이었다.
체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극히 가난했거나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르헨티나의 백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실제 1953년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에 체의 피는 너무 뜨거웠다. 그 해 여행하는 동안 남미 혁명가들에게서 감명을 받은 체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가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언젠가 체가 프라하의 한 아파트에 머물 때 썼다는 시다. "휴대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비틀즈의 노래를 듣는다./저 음표 어딘가에/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이유가 숨어 있으리라("비틀즈"중)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성공 이후에도 눈앞에 열린 권력의 열매를 따먹기를 거부하고 순수한 초심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불과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르트르가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던 만큼, 그는 죽은 뒤에 오히려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국가 권력에 묶여 있었던 세계의 모든 비권력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태양처럼 떠 있었고, 전 세계의 독재와 압제 하에서 일어났던 여러 혁명 속에 그의 이름은 깃발이 되어 휘날렸다. 전 세계에 '체 게바라 열풍'이 몰아쳤으며 프랑스의 68혁명에서 그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이후 이념은 사라져도 게바라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는 일평생을 그가 처한 상황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맞서 싸웠다. 바로 부조리와의 싸움이었다. 그가 지향하는 바가 비록 그 시대의 삶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의 싸움방식은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부족한 자원 속에서 효율적인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는 총을 들었지만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의 평전을 처음 읽었던 그날 밤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실적이 되어라.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어라.”
- 카를교 위에서 프라하의 밤 풍경을 보다
버스에서 내려 쫄랑쫄랑 길잡이(손희경)님 뒤를 따라 밤거리를 걸어간다. 밤거리는 벌써 쌀쌀한 가을 냄새에 젖어 있었다. 가스등은 희미하고 은은하게 중세시대부터 거기에 있어온 것 같은 돌길을 비추고 있었다. 유럽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한국만큼 밤거리가 밝고 화려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은근한 멋을 잃어버린 것이다. 너무 빤한 사실만 존중 받는 사회, 은은한 진실이 외면당하는 나라, 한 번쯤 반성해볼 일이다.
카를 4세의 동상 앞에서 바라본 카를교는 훨씬 더 어둑하게 어둠 속에서 숨바꼭질 하듯이 은밀한 멋이 있었다. 다리 양쪽 난간을 따라 세워진 동상들은 어둠에 가리어 그 형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실루엣 뒤로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의 불빛들은 황홀하였다. 이 풍경을 한 해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고 간다 하니 놀라운 일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동상 앞으로 갔다. 성인인 듯 머리 위에 다섯 개의 별 모양으로 후광이 달려 있는 동상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안 네포무츠키 신부님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왕비 소피아의 고해내용을 묻는 왕 바츨라프 4세에게 끝내 침묵했던 네포무츠키 신부님, 왕은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자르고 발에 돌을 달아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에 던졌다. 그때 강물 위에 별 다섯 개가 떠올랐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분의 일생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비엔나에서 이곳으로 오는 버스에서 들었던 바로 그 성인이시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가며 그분의 발치를 만지며 기도하였다. 사람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니 사람은 기도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의 길잡이를 따라 카를교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어제와는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 카를 4세 동상 앞을 지나 골목길을 걸어 구시가 광장으로 나왔다. 아침나절의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눈이 부셨다. 미인은 민낯도 아름다운 법이다. 블타바 강물은 흙빛이었으나 왠지 반짝이는 느낌이 있었고, 다리 난간에 선 동상들 하나하나 프라하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우리는 이안 후스 동상 앞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의 성경번역자 위클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주장하였던 선지자였다. 후스는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 당하여 콘스탄트 공회에서 화형을 당했지만 100년 후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 오백 년 된 시계는 아직도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열 시 오분 전, 프라하가 가장 자랑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인 오를로이 천문시계 아래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구시청사 한쪽 벽면에 30m 크기로 만들어진 천문시계가 매시 정각을 알리는 타종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서라 한다. 우리도 수신기에서 들려오는 길잡이님의 목소리를 따라 갔다.
프라하 천문시계는 1490년 두 명의 시계공과 한 명의 수학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완성된 시계가 너무 아름다워 당시 동유럽의 귀족들이 시계공 하누쉬에게 자기 나라에도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프라하 시의회는 천문시계를 독점하기 위해, 새벽에 장정 다섯 명을 보내어 그의 양팔과 양다리를 포박하고 불에 달군 인두로 눈을 빼앗아 버렸다고 한다. 이후 슬픈 마음을 안고 마지막으로 탑에 올라간 하누쉬가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는 그대로 작동을 멈추었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 400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는 이 시계의 작동법이나 퍼포먼스의 의미에 대한 설명보다도 이 시계에 담겨있는 사랑에 폭 빠져버렸다. 두 개의 시계 판 가운데 아래쪽 시계 판은 시곗바늘 없이, 모든 것이 그림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가운데는 프라하의 마크가 그려져 있고, 그 주변의 작은 열두 개의 원은 황도 12궁을 나타내며, 그 위의 큰 그림은 농경의 단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씨 뿌리고, 타작하고, 추수하는 등의 체코의 농경사회를 월별로 나타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침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이번 달의 별자리이며, 이번 달에 체코의 농민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을 배려해서 만든 그림판 달력이라는 설명 부분에서 나는 아, 하고 감탄하고 말았다. 그것은 왕과 귀족을 위해 만들었던 위쪽 판이 기호와 숫자로 이루어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 시기면 우리에게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던 1443년과 때가 비슷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닮았다고 생각하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 몸보다 아꼈던 옛 지도층 사람들의 사랑이 느껴졌다. 요즘 우리 정치인들이 새삼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 프라하 광장을 지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다.
체코가 낳은 또 하나의 거장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68혁명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체코슬로바키아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이야기는 나에게 낙엽 하나가 바람에 날리다가 진득한 진흙 위에 달라붙게 된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만 살아가던 젊은 외과의사 ‘토마스’,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사비나’, 진지하고 진실한 사랑을 갈구했던 순수 처녀 ‘테레사’.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드라마가 나에게는 왜 낙엽과 바람과 진흙 같이 여겨졌을까? 이 소설은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다. 어처구니없는 번역이었다.
프라하 광장을 지나갈 때 나는 줄곧 소설과 영화의 장면이 헷갈리면서 자꾸만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소련제 탱크의 견고함과 육중함, 쇠 비린내는 참을 수 없는 구토를 일으키면서 숨통을 틀어막았다. 가차 없이 깨고 부수면서 돌진하는 소련제 철갑탱크의 무지막지함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비인간적 만행을 잘 보여 준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제 몸의 자유 의지가 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왠지 나에게는 줄리엣 비노쉬보다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레나 올린의 연기가 훨씬 더 삶에 도전적으로 보였고 공감되었다. 특히 사비나의 깨어진 거울조각 예술은 자유를 빼앗긴 자들의 내면이 어떠하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이곳 프라하 광장에서 우리의 광주를 똑똑히 보았지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도 탱크 같은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 걸고 대항했던 자랑스러운 민주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목도할 뿐이다.
-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롬로프까지 바흐와 헨델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프라하를 떠날 무렵 길잡이(손희경)님은 웬 일인지 바흐와 헨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찰즈부르크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교해 주었던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신나는 이야기였다. 바흐와 헨델은 1685년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똑같이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음악적 기질과 성향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바흐는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극히 문법적이고 이지적이며 궁전을 중심으로 한 경건하였고, 복잡한 수법인데도 불구하고 영혼의 약동과 정서가 풍기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숭고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면서도 장엄한 감동을 주는 음악은 바흐뿐이다. 베토벤이 그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 극찬한 이후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흐와는 달리, 헨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였고, 생생한 리듬은 성악 같으며, 주제의 조화로운 발전, 색채적인 하모니와 선명한 멜로디는 그를 추종할 작곡가가 없었다. 헨델은 또 당시 귀족 중심의 음악 풍토 속에서도 대중들을 위한 음악을 많이 만들어 그의 폭넓은 음악세계를 보여 주었다. 헨델은 바흐와 달리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말년에는 영국인으로 귀화하여 영국의 음악가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이다.
- 시간이 빗겨간 작은 중세마을, 체스키크롬로프
버스를 내린 곳에 체스키크롬로프의 안내지도가 있었다. 지도를 보니, 마치 우리나라 하회마을 보는 것 같아 묘한 동질감을 느꼈지만, 그러한 느낌은 다소 시시한 것이었다. 우리는 찻길을 건너 몇 분을 절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줄을 서서 걸어갔다. 얼마쯤 가니, 아치형 교각으로 웅장하게 버티어 선 삼층 짜리 건축물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밑으로 지나갔는데, 이곳이 말하자면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었는데, 이름이 ‘망토의 다리’라고 했다. 이 길도 옛날에는 해자였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다리는 서쪽 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스비치코바’의 맛은 매력적이었다. 달콤하고 황홀한 첫 키스 같은 맛이었다고나 할까? 같은 식당에서 2유로에 맛본 흑맥주 한 잔 또한 매혹적인 깊은 맛이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식당 문 밖으로 나오자 보헤미안 길잡이가 우리를 안내했다. 오르막길을 따라 스보르노스티 광장까지 올라갔다. 이 광장은 구시가의 중심으로 중세 분위기가 남아있었고, 주변에는 후기 고딕양식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상점과 카페가 가득하고, 길거리에는 관광객로 붐볐는데,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길잡이는 그곳의 패스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1715년 삼위일체 기둥을 세워 페스트가 사라진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였다고 한다. 반대편으로 돌아보니 현재 시청사로 쓰고 있는 건물 벽에는 네 가지 종류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곳을 다스렸던 영주들의 문양(비텍, 로젬베르그, 에겐베르그, 슈바르젠베르그)이라고 했다.
이어 이발사의 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체스키 크롬로프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체코의 말발굽’이라는 뜻이라 한다. 블타바 강이 이곳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모양이 말발굽 모양을 닮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만도 300곳이라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발사의 다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상과 이안 네포무츠키 신부상이 양쪽 난간에 서 있었다. 이발사의 다리에 얽힌 이야기는 참으로 애절하다. 옛날 체스키라는 아름다운 마을에는 이발사가 살고 있었는데 이발사의 딸은 체스키 마을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왕이 그 딸의 외모에 반하여 결혼하기로 했다는데, 얼마 후에 그 딸은 누군가에게 죽은 채로 발견된다. 광분한 왕은 마을사람들을 의심하여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이발사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기가 딸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이 이발사를 성인으로 추모하면서 이 다리를 하나 만들고,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발사의 아픈 가슴이 절로 느껴지는 이야기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왕의 장인이 될 뻔했으니, 그 살인범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러나 이발사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미련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대한 미움마저 내던져 버린 채, 선선히 제 목숨을 던져 무고한 사람들을 구한 것이었다. 성인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인가?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거리가 ‘라트란’거리다. ‘도둑’을 뜻하는‘란트란’거리를 지나 좁은 고샅길 계단을 따라 몇 분을 올라갔다. 붉은 아치형의 나무꽃 문양이 있는 문을 지나 우리는 체스키 성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은 옛날 해자였던 곳으로, 적의 침입을 막거나 영주가 죄수를 죽일 때 쓰던 곳이라 한다. 아직도 곰을 기르고 있었다. 벽화가 그려진 성 안과 정원이 꾸며진 성 안을 차례로 구경하면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 정원이 있는 성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전망대처럼 만들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풍광이 마치 원색의 물감으로 색칠을 한 것처럼 산뜻하고, 마을의 집들이 색종이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각지고 깔끔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한결같다. 망자의 다리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산언덕의 계단을 걸어 700년 역사의 그림 같은 고성을 빠져 나왔다. 나는 마치 꿈결 속을 잠시 거닐고 나온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는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버스를 달려, 독일 테네스버그에 닿았다. 높다란 교회 종탑이 있는 조용한 시골 호텔 앞이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하였고, 마을은 고즈넉했다. 저녁을 먹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겨우 아홉 시인데도 마을은 어둑어둑하였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도 흐릿하고, 소리라고는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뿐이었다. 옛날 우리 시골 마을의 적막함 속으로 돌아가듯이 포근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로텐부르크의 본명은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로 ‘타우버 강가의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남쪽 버스주차장에서 내려 슈피탈 문으로 들어갔다. 슈피탈 문은 17세기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입구가 낮고 좁아 볼품없었다. 다소 미로 같은 길을 따라가니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성벽 위 회랑이 나왔다. 회랑의 길목은 좁고 어두웠으며 마침 현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 바람에 비좁기 그지없었다. 회랑이 끝난 곳에서 계단으로 올라서니, 비로소 길잡이님의 목소리가 수신기에서 들렸다. 오르막길의 거리 곳곳에는 기념품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 등……. 꽃으로 장식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반 거리인데도 영화 세트장 같기도 하고 장난감 도시 같기도 하여 몽롱한 꿈속같이 느껴졌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귀여운 간판들이 많아, 어디를 보나 정겨웠고 로맨틱하였다.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니 마르크트 광장이 나타났다. 마르크트란 시장(마켓)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여서 독일 어느 도시에 가나 있으며, 중심 광장에 시장이 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시청사, 시청사 탑, 시의원 연회관, 게오르그 분수, 야곱교회 등이 둘러 자리하고 있었다.
시청사 첨탑의 ‘술 마시는 시장(마이스터 트룽크) 시계’는 아름다운 이 도시를 지킨 시장을 기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도 한때 잿더미로 변할 뻔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독일을 뒤흔든 30년 전쟁 때, 가톨릭군의 지휘관 틸리 백작이 로텐부르크를 점령했는데, 그곳에 살던 소년이 그 지역의 와인을 권했다. 그 와인 맛에 감탄한 백작이 큰 잔"(3.2리터짜리)에 부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키는 자가 있으면 이 도시의 약탈과 파괴를 포기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이에 당시 시장이었던 누쉬가 나서서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며칠 동안 잠만 잤다는 것이다. 결국 틸리는 약속대로 관용을 베풀어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틸리는 처음부터 이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할 생각이 없어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길 맞은편에는 줄무늬 벽과 지붕을 한 건축물 아래 성 게오르크 분수대가 있었다. 로마 황제 근위대 기사 게오르기우스는 로마 영토인 시레나 왕국에서 처녀를 잡아먹던 용(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 그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나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온 몸을 찢겨 순교하였다 한다. 유럽에서 말 탄 기사가 창으로 용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보면 게오르크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두어 시간 광장을 중심으로 둘러본 나는 시내로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내려왔다. 길잡이(손희경)님이 기다리는 지버스 탑을 지나 처음 들어왔던 슈피탈 성문을 통하여 나온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허무하고 씁쓸하였다. 이곳이 여행지다운 여행지로서는 마지막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나, 아직 이 자리에서 맴돌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잠시 떠나왔을 뿐, 삶이란 것은 그냥 던져버릴 수는 없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이 시작되었을 때 서먹했던 사람들끼리 정이 들어갈수록 우리의 여행일정은 점점 끝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그때그때 더 충실하게 보고 듣고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이후 네 시 즈음에 공항에 닿아 표를 끊고 짐을 부치고 일곱 시가 되어 우리를 태운 항공기는 날아올랐다. 한국을 떠나 올 때 덤으로 얻었던 일곱 시간을 다시 반납하고 25일에서 26일로 앞질러 날아와 인천에 도착한 시각은 열두 시 이십 분이었다. 열 시간 삼십 분 만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마셨던 2유로짜리 에스프레소의 쓴 맛이 아직 내 입술에서 지워지기 전이었다. 그날 내 항공기 좌석표에는 ‘OZ542 55C’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