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없다. 주변 모슬렘 국가와 팔레스타인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고 텔레비전에서 캐롤을 들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선 전혀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없다.
끝없이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부족한 앰블란스를 국제 적십자사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나, 정작 필요한 이스라엘이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앰블란스에 그려있는 십자가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유대인 산수책에만 더하기 부호를 십자가(+)로 쓰지 않고 (ㅗ)자로 표시한다.
유대인 어린이가 십자가를 그리지 않도록...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이렇게 닫혀있다.
처음부터 잘못껴진 단추는 박해와 복수로 이여져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 역사를
만들었다.
이스라엘 잡지에는 랍비들의 광고가 자주 실린다. 예수믿지 말고 선교사 조심하라는 광고인데 그 중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지난 1900년 동안 예수에게 빼앗긴 유대인 동족보다 최근 19년 동안 빼앗긴 숫자가 많다”는
경고문이었다. 그렇다.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최근 유대인들이 예슈아(Yeshua)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알게 된 이들의 질문은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져 있었다.
예수님이 예정되었듯이.이방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죽이고 박해하였다.
근대에"홀로코스트"까지 죽이고 박해하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해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말대로 ‘ 그 민족(유대인)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 자녀(이방교회)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요한 11;51,52)’ 영적 장자인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육적 장자인 이스라엘도 역사에서 버려졌고 사라졌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구원이 이방에 이르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넘어졌고, 세상의 화목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버려졌다.(로마 11;11-15)
그런데 이런 성경말씀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을까? 이방인인 우리를 위해. 첫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진 후,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을 향해 교회가 세워지는 30여년의 유대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사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AD 6년 분봉왕 아켈라오(마태2:22)가 죽고, 유대 땅에는 유대인 분봉왕 제도 대신에 로마제국의 직접 통치하의 로마인 총독 제도가 들어섰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14명의 유대총독이 있었는데, 5번째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하면서 사도행전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 후 30년간의 유대그리스도인 역사를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마쳐진다.
특히 23-26장에는 유대땅의 11번째 유대총독으로 AD 52~60년 동안 있었던 벨릭스(Antonius Felix, 행23:24)와 12번 째 유대총독으로 AD 60~62년까지 있었던 베스도(Porcius Festus, 행24:27)에게 한 바울의 설교가 자세히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연대기는 베스도 총독의 재임 기간인 AD 60 년을 적어도 더 지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끝(행28:30)에 로마의 셋방에서 2년간의 바울의 사역이 더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우연히 이스라엘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할 AD 66년 직전에 기록이 마쳐진다.
AD 70 년까지 이어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를 잃고 역사 속에서 떠돌게 될 이 항쟁은 마치 사도 바울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보류된 것처럼.
1차 독립운동
사도행전의 스토리가 끝나는 그 무렵인, AD 66년은 로마의 14번째 유대 총독 플로루스(Florus)가 재임 3년째를 맞는 해였다. 빌립 집사가 사역했고 (행8:40), 이탈리아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행 10:1-48), 사도 바울이 베스도와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로 압송?던 지중해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는 유대 총독이 늘 상주하고 있었고, 유대땅에서 로마로 가는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마지막 총독이었던 플로루스의 폭정으로 인하여 그 가이사랴 항구(행25)에서 봉기가 L.A. 흑인폭동처럼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고, 열심당원들로 인해 그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전직 대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을 중심으로 로마황제를 위하여 정치적으로 매일 드려지던 희생제사를 중단하였다. 한편 현직 대제사장은 유대인 정치권력을 장악한 수구파 평화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인사들과 함께 플로루스 총독에게 열심당원을 진압하라고 원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열심당원들은 오히려 사해바다 앞에 있는 헤롯왕의 요새 마사다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 성에서 로마군대를 완전히 내어쫓고 말았다.
예루살렘 점령으로 인해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로마제국을 대항하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어느편에도 서지 않던 유대인들도 운명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로마제국을 향한 봉기는 AD 54~68 년간 로마의 6번째 황제였던 네로(Nero)가 죽기 불과 2 년 전에 제국의 서쪽 최전방에 접해있는 조그만 속국 유대 땅에서 일어났다. 한편 로마에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복음이 로마인들에게 전파되며 그로 인해 네로(Nero) 황제의 핍박이 심화되어 순교자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로마의 변방 유대땅 가이사랴 항구에서 베스도 총독(AD60-62)에 의해 로마로 압송되어 왔던 사도 바울을 죽이게 될 네로 황제는 그 가이사랴에서 시작되어 일어난 유대의 독립운동을 듣게 된 것이었다.
네로 황제는 후에 황제로 오르게 될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이스라엘 반군 진압을 명하였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와 함께 AD 67 년 봄에 갈릴리를 재점령하였는데, 유대독립군 갈릴리 사령관인 요세푸스(Josepus)가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는 후에 베스파시안 장군이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 시민권과 이스라엘 땅에 토지를 하사받기도 했고 AD 70 년 즈음에 유대 전쟁사와 90 년대에 유대역사를 기록하였다. 온건파였던 요세푸스의 투항으로 인해 그를 갈릴리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예루살렘 지도층은 강경파 열심당원들과 유혈충돌에까지 이르게 된다.
베스파시안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군대를 집결시키는 즈음인, AD 68 년 6월 네로 황제가 자살을 하였다. 후임 황제 갈바(Galba)는 69년 1월에 살해되고 오토(Otho)황제가 다시 세워지면서 동시에 게르만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가 또 황제로 선포하며 로마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자, 같은 해 7월에 베스파시안 장군도 최전방 유대 땅에서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12월 20일에 비텔리우스는 로마에서 암살당한다.
그래서 AD 70 년이 시작되면서 베스파시안 장군은 황제가 되어 로마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을 에워싼 로마군대는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맡겨졌다. 70년 봄에 시작된 로마 3개 군단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은 그 해 여름에 함락되었다. 64 년 헤롯왕에 의해 완성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불과 7년 만에 초토화 되었다.
그런데 네로 황제가 자살을 한 후에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 로마 제국은 권력투쟁으로 인해 군부의 힘이 광주항쟁 때처럼 안으로 향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던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성 공격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예루살렘 성내의 유대인 지도층도 온건파와 열심당원간의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유대 땅의 독립전쟁은 우연히 공백 상태가 생기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북쪽 요단강 건너편 10 개의 로마식 신흥도시 데가볼리(Decapolis)중의 하나인 펠라(Pella) 라는 작은 마을로 피신하였다.
네로 황제의 핍박 하에 이방그리스도인들은 순교로 신앙을 지켰으나, 유대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첫번째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에 핍박으로 인해 사도 외에 많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8 ;1)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기 전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누가21:20-21)
예루살렘의 함락은 처참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 (마태 24:2)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성소의 금촛대와 지성소의 보물들이 로마로 옮겨졌고 그때의 예루살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현재의 프랑스 파리에 세워졌다. 끌려간 유대인들은 로마시내를 행진한 후에 검투사로 넘겨져 로마인들의 유희거리로 죽어갔으며 처형되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던 반세겔의 성전세는 베시파시안 황제의 의해 유대인 인두세로 로마의 쥬피터 신에게 보내지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경제적 부담을 넘어 이방신에게 우상숭배를 해야하는 치욕을 겪기 시작했고 나라를 잃었다.
로마의 공격에서 도망해 살아남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배신자로 여겨졌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받아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했기 때문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이다.
2차 독립운동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그때부터 2차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에는 15명의 유대그리스도인 지도자가 있었다. 2차 독립운동은 AD 132 년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에 일어났다.
3년 동안 지속?던 독립은 135년 하드리안 황제가 보낸 당대의 명장 세베루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시몬 바르 코크바(별이라는 뜻)라는 인물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였었는데, 그를 지지하고 그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당대의 영향력있는 랍비 아키바(Akiba)였다. 이것은 민수기에서 따온 메시야의 이름이다.(민 24:17)
그 3 년 동안에 기념 주화가 주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독립의 꿈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50만 명 이상이 학살 당하였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자리에는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자신의 뒷 이름과 로마에 쥬피터 신전이 있는 언덕 이름과 합쳐서 아엘리나 카피탈리나 (Aelina Capitalina)라고 바꾸었다. 이스라엘 땅 이름도 고대에 유대 땅의 적이었던 블레셋의 헬라어 음역인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고 고쳐졌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오늘날까지 이 두 이름의 싸움이 이스라엘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독립운동으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민족적으로 버림받게 되었고, 두 번째 독립운동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종교적으로 끊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랍비 아키바가 독립운동울 주도했던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독립운동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성전이 파괴된 1세기 후부터 이스라엘의 해안도시 야브네(Yavne)에서 랍비들은 날마다 드리는 18개의 기도문에 한가지 기도문을 첨가하였다. 그것은 유대그리스도인을 배신자로 저주하는 기도문이다.
유대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에 걸친 독립운동으로 인해 이렇게 자기 동족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 속에서 버림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남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이방 땅에서 헬라그리스도인들을 섬기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할 때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AD 313 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말에 콘스탄틴은 한 가지 법령을 더 제정했는데 유대인에게 세례를 주는 사제는 사형이라는 법령이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짐승과 같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대 명절을 지킬 수도 없었고, 할례도 금하였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건물과 책들은 사라져야 했다.
그때부터 교회는 유대의 뿌리를 스스로 잘라버리고(로마11:17)
철저히 헬라화되기 시작했고 이방 종교와 혼합되면서 더 이상 유대적 요소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에 유대 디아스포라 기념관이 있다. 시대 별로 성전이 파괴된 후부터 나라를 잃고 떠돌았던 방랑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인데 거기에 유일한 이방인 조각상이 있다. 그것은 4세기 소아시아의 안디옥 교회의 명설교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는 초대교회 교부의 형상이다.
그 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독교의 초기에 그것은 유대적 기독교였다.
그때 로마 제국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 사회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
시리아의 안디옥에선 유대인과 유대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함께 예배를 준비했다.
그런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AD 344-407)이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으로부터 분리되라고 꾸짖었다."
유대 디아스포라의 한 부류인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요한 크리소스톰으로 인해 이방교회에 빼앗겼다는
아픔이 담긴 글이다.
3 세기까지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소아시아 안디옥에서 토요일은 복음서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울처럼 유대인의한 분파로서 회당에 갔다. 그리고 주일에는 헬라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모였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러 숫적으로 우세해진 헬라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영적 형제인 이방교회와 육적 형제인 유대인 회당 사이에서 한 가지만 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교회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그리스도인들은 그때부터 유대적 뿌리로부터 끊어졌고, 철저히 헬라적 토양의 교회에서만 존재하게 되면서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요즘의 선교학에서 말하는 용어로 그들의 신앙이 유대인으로서 자기 고유의 유대문화에 토착화(Indigeousity)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2001년 봄에 돌아가신 유대그리스도인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믿었을 때 내 동족 유대인들은 가상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세례를 받으러 루마니아 정교회에 갔을 때 사제는 내게 개를 풀어주었다. 유대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에서 이중 고난을 받으며 그렇게 사라졌었다. 예수를 따랐기 때문에 자기 민족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육적인 교회로부터 또한 무시 당하였다.
이방인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기 위해.
또한 이방교회는 유대인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거부해 왔기에, 유대적 뿌리로부터 스스로 잘려져 헬라화 되어
자라왔다. 뿌리를 잃고 시한부 꺽꽃이 꽃이 된 셈이다.
유대인이 주께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교회 성극이나 그림을 보면, 예수님 묻힌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정 모습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보초를 세워달라는 대제사장들의 요청에 빌라도는 이렇게 답하였다.
“ 너희에게 파수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마태 27:65)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 무덤을 지킨 자들은 로마군병이 아니라 레위지파의 유대인 성전 파수꾼이었다 !
이 모습은 최근에 개봉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에 나오는 유대인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무심코 로마병정의 모습에 익숙한 것일까? 로마병정에 익숙한 만큼 사도행전의 주역이 었으면서도 역사 속에 조용히 사라져 버린 유대 그리스도인의 아픔에는 소홀한 우리의 역사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
초대 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대부분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진다. 2세기 예루살렘을 제외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있는 곳은 가이사랴 뿐이었다. 한 두 세기가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내의 기독교 공동체는 점점 늘어나서 욥바,
세바스테, 아스글론, 가자등에는 외부에서 온 기독교인이 정착 한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유대인에 의해 미님(Minim, 종류, 분파의 뜻으로 이단을 가리키는 말)으로 불렸다. 오리겐에 의하면 5세대에 걸친 미님은 15만 명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에비온파가 있었는데 마태 복음만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 메시야임은 인정하지만 신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초기의 유대 크리스챤의 한 분파는 유대인도 받아 주지 않았고, 기독교인도 인정해 주지 않자 결국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가이사랴에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세워 가는 곳이 되었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왜 유대인이 버림을 받았는지 논증했고, 이에 대해서 유대인은 탈무드와 미드라쉬를 사용하여 유대교의 담을 쌓아 나갔다.
양쪽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교회는 이제 유대인을 대항할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355년 황제가 된 율리안은 헬라의 종교를 신봉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약속했다. 이일은 기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성전 재건은 예상치 않았던 천재 지변으로 중단되고 기독교인의 승리로 끝난다. 3세기 중엽 랍비 예후다가 나시(지도자)가 되면서 나시는 로마의 승인을 받은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시는 성전 파괴 이전 산헤드린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행사 할수 있었다. 기독교인에게 나시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결국 42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시를 폐지하여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는 사라지게 된다.
유대인에 관한 로마의 법률 (콘스탄틴부터 테오도시우스까지)
콘스탄틴 황제(324-337)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교회는 공적인 단체로 인정을 받고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는 종교 였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고 유대교는 계속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호하고 유대인으로의 개종은 금지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거주가 금지되었으나, 일년 중 하루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예루살렘 방문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나중에 제정된 법과 비교할 때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만을 갖는 듯하나 결과적으로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유대인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히고 경쟁자인 기독교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대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8년 지금까지의 법을 종합화하였다.
이러한 모든 법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동일하지 않았으나, 이방인으로부터의 분리 조항은 유대인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으므로 지도자적인 유대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
모슬렘(640-1099)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의 모슬렘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슬렘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은 팔레스타인을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는 티베리야를 수도로 하는 우르둔(Jund Urdunn)으로, 중앙과 남부는 람레를 수도로 하는
필라스틴 (Jund Filastin)으로 구분되었다.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를 이어 모슬렘의 세 번째 성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으로는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모슬렘 제국은 우마이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파티미드(Fatimid 975-1171) 왕조가 통치를 하였으며 파티미드 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은 이슬람 제국의 몰락과 십자군의 진출로 이어졌다.
초기 모슬렘 시대에 팔레스타인 내의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모슬렘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이러한 모슬렘이 20 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 이전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이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게 되었다.
십자군 (1099-1291)
모슬렘의 통치하에 있는 성지를 해방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팔레스타인을 기독교의 성지로 회복시켜 나갔다. 일부 유대인은 파티미드계 모슬렘과 함께 십자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지는 파괴되었다. 12세기 후반이 되자 유대인 거주지는 아코, 가이사랴, 아쉬켈론의 해안 도시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구가 있는 해안 도시는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요인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야와 사페드에도 고립된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 십자군은 정치와 경제적 이득권때문에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이 퇴색되어 갔고, 이집트에 거점을 둔 모슬렘인 맘룩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를 손에 넣었다.
맘룩 (1291-1517)
맘룩은 악고,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 도시를 파괴하였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무역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경제적으로 쇠퇴해 갔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도 황폐한 채로 남겨졌으며 148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오바디야는 예루살렘의 4천 가구 중 유대인 70여 가구는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람레, 나불루스(세겜), 가자는 이 시기에 비교적 번성한 도시였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문화권에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으나, 교육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교회는 파괴되고, 모슬렘 사원이 건설되었다.
15세기 악화된 경제 사정과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정했다.
오스만 터키 (1517-1917)
오스만 터키의 술탄 셀림 1세는 시리야,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고 헝가리, 흑해 연안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모슬렘 제국을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은 행정적으로 예루살렘, 가자, 나불루스, 사페드의 4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터키 제국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사페드에는 카발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이주하여 사페드는 유대 신비주의의 본거지가 될 것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로 인구가 늘어났다.
16세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는 그곳에 유대인 3백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7세기 샤브타이 쯔비에 의한 메시야 운동이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말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은 1200명이었는데, 18세기가 되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천여 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빈곤했고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보내 주는 기부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9세기말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하여 전체 인구 45만 명중에 유대인은 24,000명이었고 과반수 이상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터키는 모슬렘의 대 제국이라는 자만심으로 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과 외세의 침입이 계속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중동의 질서에 끼여들자 터키는 흔들거린다. 1917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가지만, 유대인 사이에 시온주의가 확산되어 이스라엘 회복의 꿈이 번져 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
4세기에서 9세기까지 유럽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중세의 유대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유대교 사상의 발전과 사상가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벨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벨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벨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벨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