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교동도 교동읍성, 덕진진, 초지진을 다녀와서
-강화도 내 대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이유와 경기 수영 위치에 대한 고찰
20080636 류우찬
<답사를 시작하며 일어난 호기심>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50분 간격으로 있는 배를 타고 교동도에 도착했을 때, 경기 수영에 관한 유적 중 교동 읍성을 들리게 되었다. 충청 수영(충남 보령)과 전라 좌․우 수영(전남 여수, 장흥), 경상 좌․우 수영(부산, 경남 사천) 모두가 내륙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왜 경기수영만이 교동도에 설치되어 있었는지에 대해 탐구해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 것이다. 교동도에서 나와 강화도 덕진진에 도착하여 덕진 포대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덕진 포대가 조선의 수군 전술의 변화와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 2004년도 화제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전라 좌수군의 주 전술이 습사(襲謝 : 빠르게 화살을 쏘는)를 기반으로 하였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천자총통(조선 태종때 만든 화승포)을 자유롭게 다루게 되는 것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 답사 후 조선 수군 전술 관련 자료들을 찾아 탐구하고 해답을 찾으려 하였다. 덕진 포대에서 파생된 의문이 조선 수군 전술의 변화까지 범위가 넓어지게 되어 매우 난감해 하였지만, 이 또한 학문의 즐거움이라 여기고 그 도출된 결과를 답사기에 쓰게 되었다. 일단, 조선 전쟁사의 분기점인 임진왜란(1592년~1597년)을 분기점으로 그 이전을 전기, 이후를 후기라고 정의하고 수군 전술의 변화를 기준으로 강화도 내 포대가 설치된 이유와 경기 수영의 위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볼 예정이다.
<강화도 내 대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이유에 대한 탐구>
조선 전기의 수군 전술은 ‘투사무기를 통한 적 제압’을 원칙으로 하였다. ‘투사무기‘라 하면 강궁을 위주로 하며 ‘적’은 고려 말기부터 창궐하던 왜구였다. 따라서 왜구를 제압하려면 강궁을 잘 쏠 수 있는 궁수가 수군의 전력이 되어야 했다. 세종 원년(1419년), 이종무 장군(1360~1425, 당시 삼군 도체찰사)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는 소규모에 산발적으로 남해안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산발적인 왜구를 강궁을 통한 습사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수군 궁수 양성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파고의 높낮이에 적응하면서 정확한 사격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이들 수군 궁수를 양성하는데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입되어야만 했다. 수영․진에서는 이들을 먹일 식량부터, 훈련 교관을 붙여 함께 전술 습득을 유도해야 했고, 녹봉(1달치의 쌀가마니)까지 주어야 했다. 15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고려 말부터 지속된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 궁수의 훈련과 녹봉을 국가가 나서서 책임지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사이에 정권의 안정과 왜구의 노략질이 감소하는 평화기가 지속되면서 수영부터 예하 진(津)의 잡역까지 수군 궁수들이 도맡아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전술의 중심인 수군 궁수들이 잡역에까지 동원되는 실정이었으며, 당시 조정의 안일한 국방의식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하 왜란) 이전부터 선조 20년 손죽도 패전(1587년)에서 왜구가 아닌 일본 정규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후)의 전술 변화 앞에 조선 수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당시 일본군의 수군 전술은 과거 근접전 위주에서 조총 사격을 통한 원거리 제압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선의 궁수들은 사거리가 비견될 수 없는 조총 앞에서 무력화된 것이다. 일본군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의 노략질의 패인 요인이었던 근접전을 자제하고, 조선 수군의 주 전술이었던 강궁을 통한 원거리 사격을 무력화 한 것이다. 손죽도 패전의 경과를 미루어 볼 때 일본 정규군은 노략질보다 조선 수군 전력에 대한 정탐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단순한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치부하였다. 선조 24년(1591년)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정규 일본군의 선단에 대한 정보를 연구하고, 조선 전기 경시하였던 천자총통을 이용한 함대포 사격 훈련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순신은 휘하 군관 나대용(1556~1612, 일반적으로 거북선 개발자로 알고 있지만, 천자총통 개량에도 큰 공을 세웠다)에게 명하여 포신의 개량과 포탄 화력의 향상을 연구하게 하였다. 1592년 왜란이 발발하고, 해상에서 뿐만 아니라 육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조선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준 옥포해전은, 개량한 천자총통을 이용하여 함대를 원거리 포사격을 하면서 적의 조총을 통한 근접전을 무력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수군 전술은 왜란을 교시로 삼아, 함대포 사격과, 요충 도서 연안에 포를 설치하여 적 선단을 원거리에서 무력화하는데 있었다. 또한 대대적으로 포병을 양성하여 과거 궁수 위주였던 수군 전술이 포병 위주로 바뀌었다. 포병의 훈련은 파고의 시간차에 따라 단체로 포를 장전하는 기술에 주력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시간이 많이 들고 명중까지 신경써야하는 궁술 훈련보다 부담이 덜 했을 것이다. 또한 화약 장전 조, 포 발사 조로 나누어 분담했다는 점도 습사에 치중하는 전술보다 원거리 전술에 적합했다. 수군 전술이 전환하게 된 계기는 왜란이었지만, 궁수 양성에 드는 물자와 비용, 시간도 무시 못했던 것이다. 17C 이후 명(明)․청(淸)의 우수한 대포를 수입하고 이를 연구하고 개량하여 선단에 다수 장착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좁은 해협이나 요충지가 있는 섬에 수진(水津)을 설치하여 대형 화포대를 설치하였다. 현재 덕진진과 초지진에 전시된 홍이포는 215cm의 길이로 꽤 큰 포이며 사정 거리가 약 700m에 달하지만 원거리 포격전에서는 포탄의 위력이 매우 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받아 진 배치용 대함포 중 가장 개량된 형태였다고 한다.
<경기 수영이 도서 지역에 위치하게 된 이유에 대한 탐구>
과거 14C초까지만 해도 도서지역에서의 왜구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하는 정책까지 나올 정도로 이들 지역에 대한 방위는 부실하였다. 양란(兩亂 - 임진왜란, 병자호란)이후, 피난민들이 대거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몰려옴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들을 관리 통제할 관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남해 도서지역은 미개척지도 많았지만 비옥한 토지를 지닌 곳이 대부분이어서 물자 생산량이 풍부하였다. 도서 지역의 농토는 양란 이후 피폐해진 육지에서 나오는 세입을 조금이나마 보충하면서 그 주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최적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6C 이후, 일본에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가 전 열도를 통일함에 따라 과거 히데요시 정권과는 달리 조선과의 관계에서 평화적인 방향을 모색하였다. 조선에서는 다시 통신사를 보냈으며 막부에서 자체적으로 왜구에 대해 강력하게 단속함으로써 먹구름이 그칠 날 없었던 서남해 도서지역에 평화의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도서지역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영의 위치를 개편하거나 휘하 진들의 방위력을 제고하고, 군 시설을 증설하기 시작했다. 경기 수영은 내륙인 남양에서 교동도(현재 인천시 강화군)으로 옮겨졌으며,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에 예하 12진을 두어 대규모의 화포대를 다량 설치하였다. 적 선단이 한강 하류를 통하여 수도로 들어오기 전에 우수한 원거리 함포로 일시에 제압하겠다는 작전 방침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조선 후기의 수군 전술은 선단 함포 사격이 주가 되지만, 지형까지 전술에 포함한 것이다. 경기 수영이 위치했던 교동도의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通御營)이 교동 읍성에 있었다. 경기 수사는 삼도수군통어영사의 직책까지 겸했던 것이다. 또한 교동도의 남산항은 전국에서 올라오는 조운선(漕運船 : 세입을 나르던 선박)들이 집결하던 장소였다. 교동 남산항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특산품 시장이 열리던 조선의 대표적인 상권지역이었다. 도서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상권이 번성함에 따라 경기 수영은 상권관리 기능까지 도맡게 된 것이다.
<초지대교를 건너오면서>
유적지를 답사하다가 일어난 단순한 호기심이 많은 자료를 찾게하고, 다시 한번 조선 수군 관련 서적을 읽고 느낀점을 연구하게 된 점에서 이번 답사 레포트는 필자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육지와 섬의 중간 초지대교를 건너면서 해협을 바라보니 어느 순간 많은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막연한 호기심에 대해 너무 깊이 탐구하려는 것은 아닌지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사회와 제도라는 과목의 특성에 맞게, 답사 레포트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판단 아래 탐구 결과를 나열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번 답사와 레포트 쓰기를 통해 새롭게 다가온 조선 수군 관련 주제를 탐구하게되어 매우 기쁘며, 우리 모두가 답사를 통해 이러한 탐구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 고 문 헌>
- 노승석, 2010,『난 중 일 기(이순신 저)』,민음사,
- 서태원, 2007, <조선 후기 충청도 平薪屯의 설치와 경영>, 학술진흥재단 발행도서, p. 28-34
- 한성일, 2011, <16세기 조선 수군의 戰術과 궁수>, 역사와 세계, p. 108-109
- 이재룡, 1998, <朝鮮前期의 水軍 >,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제5호 p. 117-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