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63)가 2017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아름다운 문체로 녹여내온 그는 '영화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2편은 영화로 만들어 졌으며, 이시구로 또한 한 편의 영화제작에 참여했고 2편의 각본을 쓴 바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예술혼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영화 4편을 소개한다.
남아 있는 나날(1993)
가즈오 이시구로의 세번째 소설이자 맨부커상 수상작 '남아 있는 나날'은 1993년 명감독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8년, 영국 시골로 여행을 떠난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는 1930년대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과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을 위해 일해왔던 지난 날을 회고한다. 달링턴 경은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다 나치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20년이 흘러 스티븐스는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점과 켄튼(엠마 톰슨)의 사랑을 외면했던 것을 후회하며 켄튼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사랑을 되찾겠다는 희망은 무산되고 스티븐스는 새 주인에 의해 달링턴 성으로 외롭게 돌아간다. '남아 있는 나날'은 환경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한 개인의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젊은 날의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연기를 감상하는 묘미도 상당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2003)
그가 각본을 집필한 판타지 뮤지컬 로맨스영화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노래(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는 맥주회사 사장 헌틀리 여사가 캐나다 프레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뽑는 대회를 개최하자 우승에 도전하는 실패한 미국 브로드웨이 지휘 장인 체스트 켄트의 이야기다. 가이 매딘이 연출을 하고, 이탈리아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마크 맥키니가 주연을 맡았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작이기도 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하면서 꿈과 판타지가 섞인 작품이다. 대부분이 흑백인데 장례식과 환상신에서만 컬러를 사용했다. 마리아 데 메데이로스, 다시 페어 등이 출연한다.
화이트 카운티스(2005)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맡은 ‘화이트 카운티스’는 1936년 격동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다. 부와 명예를 누렸던 러시아 백작부인 소피아(나타샤 리차드슨)는 러시아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가족들과 상하이로 탈출한 뒤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바에서 호스티스로 일한다. 그러던 중 앞을 못 보는 미국 외교관 토드 잭슨(랄프 파인즈)과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는다. 잭슨은 고급 바 ‘화이트 카운티스’를 오픈해 소피아를 고용하고, 이곳은 정치, 권력 그리고 음모가 한데 어울리는 최고의 클럽이 된다. 명장 제임스 아이버리가 메가폰을 잡아 우아한 로맨스와 잔잔한 드라마를 직조했다. 조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린 레드그레이브, 존 우드, 사나다 히로유키 등 연기파 출연진의 매력적인 연기도 볼거리다.
네버 렛 미 고(2010)
마크 노마넥 감독의 '네버 렛 미 고'는 복제인간을 소재로 슬픈 운명과 사랑,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문을 그린다. 타임에 의해 '100대 영문소설'과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된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1990년대 후반 영국의 기숙학교 헤일셤에 다니는 캐시(캐리 멀리건)와 루스(키이라 나이틀리), 토미(앤드류 가필드)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다.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격리된 헤일셤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는 학생들은 사실 특별한 목적 아래 생산된 클론이다. 사려 깊은 캐시는 감정 표현이 서툰 토미를 돌봐 주고, 토미 역시 그런 캐시를 아낀다. 그러나 적극적인 루스가 토미에게 고백을 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시구로가 제작에 참여해 원작의 가슴 먹먹하고 슬픈 느낌을 잘 살려냈다. 현재 할리우드를 주도하는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캐리 멀리건, 앤드류 가필드의 풋풋한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