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갔다가 대단한 고등학교를 봤어요.” 지난달 말 서울 봉천동의 한 식당에서 마주했던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연구위원 김경범(서어서문학) 교수의 말이다. 7년째 서울대 입시안의 실무를 담당해온 입시통. 입학사정관으로 해마다 전국 수십 곳의 고등학교를 둘러보는 그의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나왔다면, 얘기가 된다. 김 교수는 20분 남짓 그 학교의 사정을 들려줬다. 3주 뒤 기자는 대전행 KTX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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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정하면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대전 대신고 이석주 교장(가운데)이 3학년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고 있다. 학생들의 맨발이 힘차게 트랙을 박차고 나갔다. [프리랜서 김성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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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단을 쭉 따라 올라가면 대신고예요.” 택시는 허름한 주택가의 한 고물상 담벼락에서 멈췄다. 대전 대신고는 대전 서쪽 끝자락에 있다. 대전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신도심으로 사교육 환경이 좋은 대전 둔산지구와는 중학생들의 성적 차이가 크게 난다. 택시기사는 “서울로 치면 둔산이 강남이고 이 동네는 강북”이라고 말했다.
대신고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낙후된 지역의 학생들이 들어오지만 졸업할 무렵이면 대전 최상위 수준으로 성적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대전시교육청은 지난해 이 학교를 ‘학력신장 최우수학교’로 표창했다.
“대부분이 사교육을 받을 형편이 아니어서 이렇습니다.” 서구수 진학지도실장이 자료를 건넸다. 2006년 신입생들의 첫 모의고사 성적을 학교별로 비교해 놓은 것이었다. 1등급(상위 4%)에 속하는 학생 수가 둔산지역 학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외국어영역 1등급을 받은 학생은 둔산지역 한 고등학교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해에 입학한 481명 중 8명이 올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지역 명문으로 꼽히는 충남대에도 154명이 진학했다.
성적 역전의 비결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김경범 교수는 “자율학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신고를 보며 느꼈다”고 말했다. 대신고 1, 2학년은 매일 밤 10시, 3학년은 밤 11~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한다. 예외는 없다. 담임·진학지도 교사는 모든 학생을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면담해 자습 진도와 방법을 점검한다. 학생마다 내신·모의고사 성적을 모두 기록해 놓은 카드가 있다. 전용만 교감은 “어떤 과목의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까지 구체적으로 상담한다. 막히는 부분은 좋은 인터넷 강의를 소개하거나 교사가 직접 가르쳐 준다”고 설명했다. 자율학습으로 메울 수 없는 구멍은 수준별 방과후 수업으로 채운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과 떨어지는 학생들을 따로 모아 수준에 맞게 가르친다. 특이한 점은 이 방과후 수업을 맡을 선생님을 사실상 학생들이 선택한다는 것. 진학지도실 교사가 학생들을 면담해 어떤 선생님 수업을 듣고 싶은지 묻는다. 5년 전부터는 일반 학생들도 방과후 수업을 인터넷으로 신청해 골라 듣는다. 이런 교사들의 헌신은 역사가 길다. 대신고는 1973년 개교했다. 비평준화 시대엔 3류 학교로 불렸다. 79년 평준화가 시행되자 교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그해 9월 취임한 안병룡 교장이 앞장서 야간 자율학습과 방과후 수업을 만들었다. 오후 6시면 퇴근하던 교사들이 일주일에 2~4차례씩 밤 11시까지 자습 감독을 했다.
자율학습과 맞춤형 수업의 효과를 교사들은 올 초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교육 한번 받지 않은 3학년 손동원(18)군이 1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상을 받아 온 것이다. 손군은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해 대만에서 열리는 올림피아드 출전을 포기하려 했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렵다. 손군은 “심화반 수업에서 어려운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토론하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성과가 소문 나면서 대신고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이 학교 1지망 경쟁률은 3대1로 대전 지역 사립학교 중에서 가장 높다. 2년 전부터는 해마다 둔산지역 중학생 10여 명이 1지망을 해오기 시작했다.
임미진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