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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요한계시록]
14. 어린 양이 인을 떼심
(2)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
(순교한 성도들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시록 6:9~17)
계시록 6장 9절에서 17절까지는 순교한 성도들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세상의 본성과 상태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었고 어떻게 그것들이 진행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은 그 사이에 세상이 그렇게 진행을 하면 당연히 하나님 백성들이 고난을 받기 마련이다. 악한 자가 세상을 지배하면 당연히 선한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강한 자가 지배하게 되면 약한 자가 눌림을 받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계속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싸움이다. 서로 누가 자리를 잡느냐 이래서 서로 싸우고 있고 이 싸움에서 수많은 피가 흘려지고 있는 것이 세상의 형편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핍박을 받기 마련이다.
5장 6장에서는 다섯째 인이 나오는데 순교한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대심판에 대한 예고가 나와 있다. 7장은 삽입부분으로 되어 있다. 대환란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7장에서 다루고 있다.
A. 사망의 행진 중에 (평화 - 전쟁 - 기근 - 사망)
세상의 진행은 사망의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 말, 이 네 가지 말로 상징을 했는데, 이것은 결국 거짓 평화와 전쟁과 기근과 사망의 수순을 밟아가기 마련이다. 내일은 8.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2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이 땅위에는 완전한 평화가 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국제 연합이 결성되어 국제 경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 이 땅위에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국제 연합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생한 것은 우리나라 전쟁 때 한번뿐이다. 그 이후에는 한번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론상으로 보면 UN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데 그 안에 역시 마찬가지로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말이 UN을 지배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이다. UN본부 앞에 있는 구조물(동상이나 표시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옛날 소련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을 일삼던 붉은말이 UN본부 앞에 평화를 상징하는 구조물을 기증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흰말이고 속으로는 붉은 말인 셈이다.
이렇게 세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즉석에서 징벌을 하여 벌을 주고 옳은 사람들은 상을 주어야 할 것 같다. 일본이 대동아의 평화를 부르짖고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 일대를 침략하고 있을 때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런 무도한 사람들을 저대로 나두겠는가. 완전히 벼락을 내려 저주를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미국 본토를 공격할 만큼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에도 세계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의해서 유태인 600만이 학살을 당했다. 그 이외에도 나치가 저지른 죄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승승장구했다. 물론 마지막에 망하기는 했지만 그 망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저 사람들을 망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이것이 궁금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속에서 복음을 전파한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일본을 망하게 했는지 독일을 망하게 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이 일본을 제압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이 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이 승리한 것이므로 구라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 확실히 모르겠는데 확실히 아는 것은 이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 세상이 돌아가고,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싸우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싸우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약한 자 편에 서야 되는가 강한 자 편에 서야 되는가, 좌에 속해야 되느냐 우에 속해야 되느냐 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역시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 가운데에 왔다. 그것도 역시 폭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유태교 사람들은 메시아가 와서 그들과 대항해서 싸워서 이겨줄 것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이 그런 분으로 오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와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러 왔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항상 있다. 우리는 싸움을 하면 누구 편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불의한 것을 보고도 악한 자를 저주하지 않고 징계하지 않고, 약한 자를 보고도 약한 자 편에 들지 않고 있다면 우리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기가 아주 쉽다.
독일에서 일어난 일인데, 나치가 전 세계를 지배하여 광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이다. 완전히 미치광이가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85% 이상이 기독교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소수의 나치에서 정권을 잡아 완전히 독일을 장악했다. 그래서 한 젊은 신학자가 여기에 대해 분개를 하게 되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있었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신학자는 30대의 천재였다. 그 신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독일로 잠입해 들어갔다. 왜냐하면 저런 미친놈에게 자동차를 맡겨놓으면 안된다. 미친놈이 운전을 하고 잇는데 술취한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술취한 사람이 운전을 하는 것을 보고도 왜 기독교인이 가만히 있는가? 85%의 기독교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자신은 과감하게 교수직을 버리고 독일로 들어가서 나치 암살단에 가입을 했고, 지하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죽었다.
나도 젊었을 때 이 사람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 한때 그분의 책이 전 세계를 석권했던 때가 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정말로 독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사무치게 쓰여 있다. 젊은 나에게 그 말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이래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아니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구나.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참 옳은 사람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순수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의롭고 순수하고 옳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같은 문제로 혼동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독교 일부에서 불의한 정권을 타도하는 것에 앞장선 일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태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그리고 죽게 되었다. 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느냐 하면 바나바는 민란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민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지금 같으면 혁명(데모)을 주도했다는 뜻이다. 로마 정부를 엎기 위해서,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어났던 사람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태인들은 그 사람을 놓아달라고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다. 왜? 예수는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메시아도 아니고 무엇을 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병자나 고치고 앉은뱅이나 일으키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략은 사탄의 계략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을 원론적으로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는 자기들끼리 싸우게 된다.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다 한사람이다. 그 안에서 평화주의자도 있고 전쟁주의자도 있지만 오늘은 평화주의자가 내일은 전쟁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은 전쟁주의자가 내일은 평화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 문제로 한참동안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는데 친일파 문제를 드러내어 하다 보니 피장파장이 되어 한방 치려고 했는데 한방 먹고 하여 조용해지고 말았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36년 동안에 처음에는 다 애국자였다. 누가 친일파였겠는가. 시골에 가서 물어보아도 다 애국자이고 다리 밑에 있는 거지에게 물어보아도 다 애국자이다. 그래서 3.1만세 때 다 나온 것이다. 흰옷 입고 태극기 들고 나오면 총칼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하나씩 둘씩 무너져서 마침내는 애국지사라는 사람까지도 전향을 하여 일본에 대해 협력을 하게 되었다. 협력하는 것이 좋아서 했겠는가.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 협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방이 되지 않고 있었다면 우리는 다 일본사람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못하게 했다. 한국말 하는 사람들은 카드를 하나씩 뺏었다. 지금쯤 됐으면 언어말살 정책에 의해서 한국말도 아마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 친일파니 아니니 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 갖다놓으면 오히려 더 친일파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 시대가 아니고 보니까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것이지 그 시대에 같이 있어보면 누가 더럽고 누가 깨끗한지 알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오래가면 다 똑같아 진다. 결국은 같은 것이다.
거기서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이나 불의를 행하고 있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입장이 바뀌어지고 환경이 다르므로 다른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뛰어들어 우리가 이편이 되거나 저편이 되면 시간이 지나가면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영원하신 복음을 가진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런 계략에 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이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세상이 어찌되든지 간에,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뭐하는가. 세상이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망하고 안 망하고의 문제는 세상 문제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안 망해야 된다. 우리도 다른 나라와 싸운다면 당연히 우리나라가 이겨야 할 것이다. 즉 그 나라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지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다. 거기에서 해결이 되어야 되지 옳고 그른 것에서 해결이 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누구하고 누구하고 둘이 싸운다고 하자. 이쪽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저쪽이 옳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항상 그래서 문제가 되는데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면 문제가 아닌데 이쪽 말 들으면 이쪽이 맞는 것 같고 저쪽 말 들으면 저쪽이 맞는 것 같아 헷갈리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이쪽 편을 드느냐 저쪽 편을 드느냐는 우리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거기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이 있어야 해결이 된다. 콩 한쪽을 가지고 둘이 싸우고 있는데 콩을 아무리 잘 갈라준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이다. 해결하는 방법은 큰 덩어리의 빵을 하나 가지고 오는 것이다.
복음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오른편에 든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왼편에 든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해방 후에 좌우익이 갈라져서 얼마나 치열한 피흘림을 했는지 모른다. 비참한 싸움을 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사망의 행진 속에 내가 끼어들어간다면 나도 사망의 행진밖에 되지 않는다. 행진 자체가 사망의 행진인데 내가 거기서 옳아도 사망의 행진이고 그르다고 해도 사망의 행진이다. 내가 호남선을 타고 간다고 하자. 그 안에서 잠을 자고 가도 목포에 도착하는 것이고 술먹고 가도 목포에 도착된다. 그 차 안에는 나쁜 사람도 들어있고 좋은 사람도 들어있다. 사람 죽이기 위해 타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다 목포에 도작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말로 이어지는 이 세상이라는 열차를 타면 내가 흰말 속에 들어있는지 붉은말 속에 들어있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결국 사망으로 간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복음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계략에 대해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상황 하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식민지 상황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갔다. 그래서 우리와 관계가 된 것이다. 그때 만일 로마의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고 갔다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바나바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 우리가 미친놈이 안되고 진짜 정신 똑똑한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영원이 복음만 전해야 된다. 어느 상황에서도 그렇다. 두 사람이 싸우는데 어느 편을 들었다고 하자. 그때는 그것이 옳은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것이 또 미친 짓이 된다. 이쪽 사람이 또 더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이쪽 사람 편이 될 때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어느 날은 이쪽 편을 들었다가 어느 날은 저쪽 편이 되는 사람이 되게 된다. 적은 것에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복음만 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것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은 없다. 이래야 두 사람이 다 해결이 된다. 전체가 다 해결이 된다.
1. 복음전파 -> 교회 산출
하나님은 복음을 전파함을 통해 교회를 산출하려고 했다. 복음 전파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을 하여 죄를 씻게 하여 천당에 보내자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산출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마치 죄 지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당에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해결이 안 된다.
복음 전파의 목적은 교회를 산출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왜 이 교회를 산출해야 되는가? 이 교회가 성장하여 새 예루살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목적이 분명하게 한 사회를 산출하는 것임을 알아야 된다. 어떤 개인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죄를 씻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더 큰 문제이다. 죄를 씻거나 사하는 것은 수속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목표는 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이 사회는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말로 이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
씨를 뿌리는 것은 추수하기 위함이다. 추수는 왜 하는가? 생명의 잔치를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씨를 뿌리는 자로 왔다. 비유로 말씀할 때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갔는데 가라지가 나왔다. 그래서 묻기를 분명 밀을 뿌렸는데 왜 가라지가 났읍니까 하고 물으니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그러면 지금 이것을 뽑아버릴까요 하였더니 아니다 가만 두어라 지금 뽑으면 둘 다 상하게 된다.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말한 비유의 말이 있다. 이것은 결국 씨 뿌리는 오신 분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다.
무슨 씨를 뿌리러 왔는가? 교회를 산출하는 씨를 뿌리러 왔다. 세상인간, 평화와 전쟁과 기근과 사망으로 이어지는 인간을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교회인간을 창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연합이 가능한 인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간, 하나가 될 수 있는 그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이 인간을 만들려고 오신 복음 전파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말로 이어지는 이 세상에서 결국 핍박을 받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일단 두 사람이 싸우는데 내가 어느 편에 안들면 상대방이 생각하기에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쪽에 편을 들면 저쪽에서 그럴 것이고 저쪽에 편을 들면 이쪽이 또 그럴 것이다. 그래서 좌에 속한 사람, 우에 속한 사람으로 좌우익이 계속 대립하여, 우리나라는 지금도 해방이후 좌우익의 쓴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 지금도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몇 백년이 가야 없어질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큰 저주의 쓴 뿌리가 되어있다.
2. 복음전파 - 순교를 겪음
복음전파는 세상에서 핍박과 순교를 겪게 되어있다. 우리는 순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순교를 우리가 당해보지 않았고 옛날에는 그런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순교적 상황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a) 하나님의 말씀 때문
여기에 보면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도’이다. 하나님의 도와 세상을 주관하는 도는 서로 방식이 틀린다. 세상은 무엇이 주관하고 있는가? 사탄의 도가 주관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정말 진실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명철하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흰말에서 청황색말로 이어지는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사탄의 고도의 계략 때문이다. 사람은 그 계략을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인간보다 훨씬 높은 것에서 생겨난 계략이기 때문에 사람은 아무리 그것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계시가 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사람은 명철해지려고 철학을 하게 되었다. 철학의 목적은 속지 않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나도 어릴 적에 그런 책의 영향을 받아 안 속으려고 했다. 내가 절대로 연극 무대에서 연극을 하지 않을 것이다. 관객은 되어도 배우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 배우가 되는 것은 판단력이 없다. 관객만이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철저하게 철인이 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가 관조하고 모든 것을 내가 객관자로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나보다 훨씬 고도의 수가 와버리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간단하게 우리가 장기를 두든지 바둑을 두어보면 나보다 조금만 수가 더 높아도 내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리 눈 똑똑히 뜨고 정신 똑똑히 차리고 각성제를 먹고 해보아도 안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를 모른다. 왜 여기에 이 말을 두는지 알 수가 없다. 알면 내가 방어를 한다. 나는 한참 내가 이기는 줄 알고 열심히 하고 기분 좋아하다보면 왕창 다 죽고 왕창 다 죽어버린다. 처음에 바둑을 배워보니 어이가 없었다. 한참 나는 잡으러간다고 갔는데 뒤로 가보니 내 말이 다 죽어 있다. 바둑 하나도 나보다 수가 조금 높으면 그 조금 높은 차이도 그렇다. 아주 큰 차이, 조치원 같은 9단과 바둑을 해서가 아니라 겨우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라도 차이가 있다. 어느 날 친구와 바둑을 두는데 아주 초급 중의 초급이다. 그 친구가 나보다 좀 나았다. 항상 내가 지는데 내가 어디를 가서 한 수를 배웠다. 한 수를 배우 두니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늘 졌다. 그 친구는 자존심이 센 친구라 그 다음부터는 나보고 바둑 두자는 소리를 안했다. 한 수 배워왔는데 꼼짝을 못한다.
조그만 수에도 그러는데 하물며 사람보다 먼저 지어진 천사이다. 사탄은 천사이다. 천사가 타락한 것이 사탄이다. 사람보다 먼저 지어진 자가 나에게 와서 속이는데 내가 그것을 철학을 한다고 알아지겠는가, 과학을 한다고 알아지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이 네 말의 경주장에서 뛰는데 마권을 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다 보면 스파벨리 앞에 경마장이 있어 오늘도 많이 간다. 가다보면 길가에 차가 꽉 차있다. 저녁에 해 넘어 갈 때쯤 나오는데 나올 때보면 얼굴이 다 시커멓게 나온다. 얼굴 환해서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마다 간다. 세상은 결국 이 네 말이 경주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스파벨리에 오고 어떤 사람은 서울의 경마장에 직접 나가고 실감나게 해보려고 그곳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고 화상경마하는 사람도 있고 이 말이 이기겠지 저 말이 이기겠지 하여 돈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저녁때가 되면 다 허무하고 허망한 얼굴로 나오게 된다.
노름판에 가면 돈 땄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잃었다는 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노름을 하고 나면 실제로 노름판에 온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돈이 다 없어진다. 그 돈은 어디로 가는가? 노름 붙이는 사람 집으로 다 들어간다. 닭 한마리에 10만원이다. 백숙 한 마리에 10만원이다. 만원이나 만오천원에 먹을 수 있는 것이 10만원이다. 그래도 내 돈도 아니고 네 돈도 아니니 다 먹는다. 판 돈 뜯어서 먹는 것이므로 자기 돈 내는 것 같으면 만원짜리인지 만오천원짜리인지 따질 텐데 내 돈도 아니고 네 돈도 아니니 먹자하여 두달 먹고 나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노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또 노름을 한다. 이것이 네 말의 경주장의 오묘한 비밀이다. 노름해 본 사람이 있어 알겠지만 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모른다. 다 자기를 위하는 사람 같고 자기 친구 같아 보인다. 마지막에 가면 친구가 아니다.
세상의 도와 하나님의 도는 완전히 다르다. 사탄의 계략과 하나님의 전략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 이 말은 하나님의 도라는 말이다.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탄은 와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했다. 이 두 말이 지금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말씀이, 이 두 도가 전 세계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 쌍두마차처럼 지금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사탄의 도가 지배하고 있다. 흰말에서 청황색말로 가는 그 원리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원리이다. 게임장에 가면 게임의 원리를 만들어 놓았다. 게임하는 사람은 그 게임의 원리에 따라 게임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만들어 놓은 그 게임장에서 게임의 원리에 따라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사망으로 가는 게임이다.
(b) 예수의 증거 때문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의 증거’ 때문이다. 예수의 증거라는 말을 왜 했는가? 하나님의 말씀하면 되는데 또 왜 예수의 증거라고 했는가 하면 이것은 종교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의 증거는 종교의 길과 달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교를 말할 때 유태교라는 배경을 가지고 유태교라는 관념을 가지고 예수를 보았다. 그 거울을 가지고 그 눈을 가지고 예수를 보았다. 그러므로 완전히 틀린 것이다. 종교는 율법이 지배한다. 기독교나 유태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종교이든지 종교라는 말을 할 때는 율법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살고 저렇게 하면 죽는다를 가르치는 것이 종교이다. 이렇게 하면 잘되고 저렇게 하면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면 살고 저렇게 하면 죽는다를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그래서 양식을 주려고 왔지 이렇게 하면 살고 저렇게 하면 죽는다를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예수의 증거. 우리가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면 우리가 누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먹고 살 것을 공급하는 것이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하기가 참 쉽다. 나도 해보면 아이들에게도 눈에 보이므로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해라하기가 참 쉽다. 하고나면 늘 후회를 하면서도 또 안 된다. 참 어렵다. 문제는 어떤 양식을 주어서 배부르게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을 하기가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또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 가르쳐도 안 되는 것을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풍족하게 하려고 온 것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 살을 먹어라, 내 살이 참된 양식이다 그렇게 하고 왔다. 종교가 볼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는데 그것은 놓아두고 네가 뭘 준다고 하고 있나 생각하는 것이다. 둘이 지금 옳고 그르고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해결해야 되고 이편이냐 저편이냐 해야 되는데, 네가 별거라고 보따리 가져온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반율법적이고 반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반율법주의자도 아니고 반종교주의자도 아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을 들을 때는 반율법주의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가면 분명히 율법에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해 놓은 것을 그는 범하고 있다. 그럴 때는 반율법주의자처럼 보인다. 안식일을 파기할 때는 반율법주위자로 보인다. 어떤 때보면 하나님 말씀의 일점일획이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때보면 철저한 율법주의자이다.
그는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반율법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생명을 주려고 온 분이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자기가 사는 세상 속에서 인간 정부의 규율을 반대해서 핍박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 도가 달라서 그런 것이지 세례요한처럼 인간정부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그 핍박이 아니다. 그렇게 핍박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정부(정권)에 항거하여 핍박받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핍박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인 핍박이다.
참 믿는 사람은 그래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다. 도가 틀려서 핍박받는 것이다. 길이 틀려서이다.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은 종교를 대적해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대적해서 율법을 무시해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이것을 갈라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갈라져 나가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잘못하면 반율법주의자가 된다. 우리가 흔히 사람들에게 잘못 부각이 되면 그렇게 부각이 된다. 저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판단받기가 쉽다. 우리는 거기서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율법주의자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파하는 사람이지 율법을 폐하려고 간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폐하라 말라 할 사람이 아니다.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 낡은 것이다 시대가 지난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전혀 없다.
사탄의 도는 하나님 같이 되려는 도이다. 하나님의 도는 너는 먹으면 죽는다. 너는 하나님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이다. 도가 전혀 길이 다르다. 종교의 가르침은 ‘네가 행한 즉 네가 살리라’이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인데 이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르침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배부를 것이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도 그 안에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않는 율법을 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를 두었다고 했다. 단지 먹는 어떤 것을 놓아두었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에 와서 일곱 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맨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되어 있고, 맨 마지막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을 것이라는 먹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가르치는 문제가 아니고 먹는 문제이다. 사실은 내가 몸이 자라고 건강한 것은 가르침을 받아서 자라고 가르침을 받아서 건강한 것이 아니라 먹어서 자란 것이다. 전혀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엄마의 젖을 먹고 죽을 먹고 밥을 먹고 자랐다. 지금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내가 어느 교훈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어서 건강한 것이다. 오늘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도 아침밥을 먹어서 하는 것이지 아침에 무슨 가르침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밥을 안먹었으면 힘이 없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c)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었기 때문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있다. 요한1서 5장 19잘에 보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있다는 말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탄의 계략 속에 처해있다. 사탄에게 처해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흰말과 붉은말과 검은말과 청황색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은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악한 자는 사탄이다. 이 악한 자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한 면으로는 정치적으로 세상을 통해서, 한 면으로는 종교를 통해서 핍박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흰말의 왕국, 검은색말의 왕국, 붉은색말의 왕국, 청황색말의 왕국을 유지하려고 한다. 지금 육자회담을 하고 있는데 줄다리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찌하든지 북한이 완전히 핵을 폐기하고 모든 시설을 완전히 폐기하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우리도 원자로도 필요하고 원자력 발전도 필요하다. 원자력을 평화에 이용하는 것까지 막을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허락하라는 것이 결렬되어 있다. 우리 한국 측에서 말을 거들어주었다 하여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어있다. 물론 우리도 원자력 발전을 통해 발전을 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들도 원자력 발전을 통해 당연히 발전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못 믿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언제 북한 사람들이 폭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폭탄을 만들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만들어놓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말도 옳고 저 사람 말도 옳다. 세상은 다 그렇다. 이 입장을 보면 이 입장이 옳고 저 입장을 보면 저 입장이 옳다. 북한 사람 하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무슨 패전 국가냐는 것이다. 우리를 패전 국가 취급하느냐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패전 국가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그만 나라에서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으면 잘못하면 사고를 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국은 가지고 있고 중국도 가지고 있고 강대국은 다 가지고 있느냐는 논리가 나온다. 강대국은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약소국가는 못 갖게 하느냐. 약소국 입장에서 보면 살아남으려면 약소국도 가져야 되겠다. 강대국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쟁을 안 한다. 테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만하고 내가 편한데 테러를 할 사람은 없다. 테러는 누가 하는가. 자기가 궁지에 몰려야 한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폭탄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테러에 이용된다는 논리이다. 미국은 왜 저렇게 완전하게 북한을 굴복하게 하려는 것인가? 북한은 테러 국가이다. 막판에 이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 사람들, 넉넉한 집 사람들은 큰 싸움을 안 한다. 죽자살자 싸움을 안 한다. 왜 그런가하면 죽자살자 싸움할 필요가 없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죽자살자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다리 밑에 산다고 할 때는 한번 싸움이 났다 하면 죽자살자이다. 죽는 것이나 싸우는 것이나 비슷하므로 목숨이 아까울 것이 없다. 남도초등학교에 처음 가니까 교장선생님이 입학식 날 우리 아이들은 장난은 심해도 싸우지는 않는다고 한다. 남도초등학교가 환경이 상당히 좋은 환경이었다. 비산동에 가면 장난은 안하는데 싸운다. 세계도 그런 원리로 지금 저렇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세상은 세상이라는 방식과 종교라는 방식을 통해서 사탄은 어찌하든지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핍박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핍박의 방식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옛날이 다르고 지금이 다르지만 역시 원리는 같다.
B.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의 호소
그래서 제단 아래에 있는 혼들이 호소하고 있다. “죽임 당한 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부르짖어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 까지 하시려나이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순교자는 누구인가? 의인이다. 어린양이고 그리스도이다. 여기 의인이고 어린양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세상의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도 의인이 많다. 이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창세 이후로, 에덴동산 이후로 두 선이 지금 가고 있다. 하나는 가인의 선이고, 하나는 아벨의 선이다. 아벨의 선에서는 계속 신원하고 있다. 억울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세상이 계속되겠습니까, 언제까지 저런 사람들이 땅을 지배하고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벨의 탄원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탄원도 아벨의 탄원이다.
제단 아래 있다고 했는데 제단 아래는 땅을 말한다. 그 땅은 저주 받은 땅을 의미한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이렇게 되어있다. 땅에 있는 자들은 땅에 있는 혼들인데 제물을 죽이면 그 피가 제단 밑으로 흐르게 된다. 땅에 흐르게 된다. 일부는 소반에 받아서 성소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전부 제단 밑에 쏟게 되어있다. 제단 밑은 바로 땅이다. 이 땅은 어디인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피가 흘려진 그 땅이다. 여기서 땅이라는 의미는 그런 뜻이다.
피는 혼인데 육체의 생명은 혼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육체의 생명은 혼이라는 뜻이다. 육체(사람)의 혼은 피에 있다. 우리는 지금 피가 살아있으므로 생각을 한다. 혼이 있는 것이다. 만약 피가 끊어져버리면 혼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병원에서 말기 환자에게 심전도를 하면 점점 내려가다가 어느 날 화면이 꺼져버린다. 그러면 혼이 떠나가 버리고 만다. 피에 혼이 있기 때문이다. 제단 아래 피라는 말은 땅에 쏟아져버리는 땅에 버림받고 있는 혼들을 말한다. 순교자들은 땅에 버림받고 있는 혼들이다. 순교를 해서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 아니고 순교한 자들은 아직 땅에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순교했으니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면 신원할 필요가 없다. 순교하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억울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왜 신원하고 있는가? 피가 땅에 흘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짖는다고 한다. 저주의 땅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들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가 땅에 흩어져 있음은 저주를 상징한다. 버려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피가 땅에 있으면 누가 죽었구나 한다. 길가에 가다가 피가 있으면 교통사고가 났구나를 금방 안다. 피가 있으면 죽은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혼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버려진 혼들이 신원하고 있다.
분명히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버려져 있다. 그래서 아까 말한 대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 놓아두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 의문이 여기 나온 제단 아래 혼들의 호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사는데 계속 핍박이 왔다면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나, 한 말씀 하시지, 손 좀 쓰시지 하는 생각이 왜 안 나겠는가? 당연히 그런 생각이 난다.
C. 주님의 인정과 응답
1. 흰 두루마기를 주심
그런데 호소를 했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흰 두루마기는 의롭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모르고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인정하고 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2. 잠시 동안 쉬라
그리고 잠시 동안 쉬라고 한다. 왜 잠시라고 하는가? 흘려진 피가 볼 때는 너무너무 긴 세월이고 핍박의 시간은 너무나 긴데 왜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잠시 동안이다. 영원 안에서는 잠시이다. 우리 인생은 밤의 한 경점 같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100살 살고 어떤 사람은 50살 사는데 그 사람 많이 살았네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요절했네 생각하지만 다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하다. 한 경점이므로 오래 살았다 할 것도 없고 오래 못살았다고 억울해 할 것도 없다. 잠시 동안 쉬라는 것은 영원에 비해 잠깐이라는 것이다.
3. 그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그리고 그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한다. 순교의 수가 왜 차야 되는가? 이것은 심판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뜻인데 심판의 때가 차려면 세상이 갈 데까지 가야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갈 데까지 가야 망하게 되지 갈 데까지 가지 않고 망하는 법은 없다. 억지로 망하게 할 수가 없다. 일본도 갈 데까지 가서 망했다. 일본 사람들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여 고무공과 고무신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때는 정말 승승장구하던 때이다. 우리 생각 같으면 그쯤에서 깃발 꽂고 자리를 잡아갔으면 일본은 지금쯤 동양 전체를 통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호노롤루를 공격했는지 모르겠다. 때가 차서이다.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하와이를 공격했는지 이것은 정신이 빠져도 보통 빠진 것이 아니다. 때가 있다. 가다가 적당할 때 머무를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게 안 되게 되어있다. 가는 바퀴는 돌게 되어있다. 왜 저것이 안 망하고 있나 싶지만 망할 것은 결국 망한다. 가다가 멈추는 법이 없다. 그때 멈추고 하와이만 공격을 하지 않았으면 미국이 대들지 않는다. 일본이 저렇게 막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미국은 그 정보를 다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으므로 묵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동양에서는 일본만을 나라로 인정한다. 어쩌면 일본이 통일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주만을 폭격을 했다. 진주만은 미국의 본토이므로 미국사람들이 확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도 진주만에 가면 그때 폭격 당했던 함대가 물속에 그대로 잠겨져있다. 건져내지 않고 한척을 그냥 놔두고 관광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 배에 탔던 죽은 사람 명단을 다 걸어놓고 그 사람들을 기억하도록 해놓고 있다. 그것을 공격하지 않았으면 지금 일본은 아주 잘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 사람 되었을 것이고 잘 됐을 것인데 전쟁이 미친 일본이 폭격을 해버렸다.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의 육군 대장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이 어떻게 생긴 나라이며 그 나라가 얼마나 힘이 있는 나라인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해군제독이라는 사람은 해군이므로 전 세계를 돌아다녀 전쟁을 반대했는데 결정이 되니까 할 수없이 참전을 했다가 미드웨이 전투에서 전사를 했다. 결국 이 사람이 미국을 너무 몰라서 그랬다는 말이 나온다. 너무 모르고 알고 간에 때가 차도록 되어있다. 가다가 멈추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차도록 되어있다. 그냥 거기서 서는 법이 없다. 독일도 마찬가지이고 다 그렇다.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려라. 잠언에 보면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악을 행하고도 잘되네, 망할 줄 알았는데 잘되네 하다보면 나도 이러고 있다가는 안 되겠네 이 생각이 들 것이다. 부동산 투기하여 잘된 것을 보면 처음에는 망하겠지 망하겠지 했는데 잘되네 잘되네 잘되네 계속 하다보면 나도 투자하다 보면 마지막 차 타서 망한다든지, 주식도 주식하면 안돼 주식하면 망해 다 알고 있다. 주식해서 돈 벌었다는 사람은 만명에 한 사람 정도 될까 말까 하고 망했다는 사람이 9999명이다.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네 올라가네 올라가네 망할 텐데 왜 올라가지 하다가 자기가 말려들어 지금 안 넣으면 안 되겠구나 이 생각이 들어와 넣으면 막차 타는 것이다.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다. 지금 형통한다고 해서 잘되네 저래도 잘되네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때가 있고 때가 차면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천자문에 날일(日) 달월(月) 찰영(盈) 기울측(昃)이 있는데, 해가 중천에 있으면 항상 중천에 있을 것 같은데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보름달이 되면 달이 기울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이 오면 기울어진다. 日月盈昃은 차면 기울어진다는 말이다.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 우리는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인이 잘되어가는 것을 보고 지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4. 대 환란의 예고(여섯째인)
여섯째 인에서 대환란의 예고가 나온다. 다섯째 인에서 순교자들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그리고 여섯째 인에서는 대환란의 예고편이다. 서곡이라 할 수 있다.
<초자연적 재앙(땅과 천체군의 흔들림)>
여기서는 초자연적 재앙들이 언급되고 있다. 땅이 진동할 것이고 태양은 검어질 것이고 달은 피같이 될 것이고 별들은 떨어질 것이고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듯이 말려갈 것이고 삼과 섬들이 옮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어떻게 일어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땅(세상의 거점) - 진동함>
의미상으로 생각해보면, 땅은 무엇인가? 땅은 세상의 거점이다. 악한 자의 거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처를 위해 땅을 마련하셨지만 이 땅을 지금은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지금은 사탄이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셨을 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히 하나님의 땅이지만 지금은 사탄이 강점하고 있다. 이 땅은 사탄의 거점이다. 이 사탄의 거점인 땅이 진동할 것이다.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지진이다. 하늘이 흔들리는 것은 눈만 감으면 참을 수 있는데 땅이 흔들리는 것은 눈을 감아도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므로 거점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분명하게 사탄이 견고하게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릴 것이다. 사탄의 거점이 흔들릴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사탄의 거점이 흔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안에 복음이 심어질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칠 때 사탄의 거점인 땅은 진동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셨을 때 사탄의 거점이 진동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땅이 흔들렸다고 한다. 지진이 일어나고 이 말은 사탄의 거점이 흔들렸다는 말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영적으로 보면 그때 사탄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땅이 진동했다.
<태양(세상의 빛) - 검어짐>
태양은 총담같이 검어지고 했는데 총담이라는 말은 검은 천을 이야기한다. 머리털로 짠 천이라고 한다. 새까만 천인데 그 천처럼 검어질 것이라는 말이므로 태양이 빛을 잃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세상은 그 태양의 빛으로 살았다. 세상도 어떤 빛으로 살았다. 말이 경주를 하려고 해도 빛이 있어야 경주를 하지 빛이 없으면 경주를 하겠는가. 그 빛이 총담같이 검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 길로 쫙 가다가 자기 길이 끊어지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올 때 운전하면 제일 위험한 것이 차선이 안보여 어디로 운전해야 될지 모른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는 짐작으로 간다.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빛이 있어야 간다. 세상도 진행하려면 빛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 빛이 검어질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세상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하신 자로 보였지만, 영적으로 하면 사탄이 더 이상 갈 길이 막혔다. 지금까지 모든 방법으로 모든 구실을 잡아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는데 더 이상 사로잡을 길이 없었다. 길이 꽉 막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다.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달빛(세상의 그림자) - 검어짐>
달이 핏빛같이 될 것이다. 달은 언제든지 그림자이다. 태양과 달을 비교하면 하나는 양이고 하나는 음이다. 달은 그림자인데 왜 이 그림자가 필요했는가 하면 사막을 통과할 때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빛이 그 사람들을 인도해 왔다. 이 그림자가 결국 피같이 될 것이라는 말이므로 이 밤의 그림자라는 것은 상당히 정서적이다. 그런데 핏빛같이 된다는 말은 반정서적이다. 피가 보인다는 것은 징그러운 것이다. 정서적이고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포근하다. 어느 달빛아래서 보면 포근하다. 그런 모든 것이 핏빛같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 포근한 안정감이 다 사라지게 된다.
<별들(세상의 영광) - 떨어짐>
하늘의 별들이 설익은 무화과처럼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도 별들은 영광을 상징한다. 장군도 별을 달고 다닌다. 이 별들이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므로 세상의 영광이 설익은 무화과 과일처럼 떨어질 것이다. 결국 언젠가 별들은 떨어진다. 우리는 요즘 세상의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정권이 바뀌면 별들이 떨어지고 또 정권 하나 바뀌면 별들이 떨어진다. 세상의 별들은 떨어졌다가 떨어진 별들이 다시 일어나 요즘은 거짓말을 하여 어느 만평에 보니 평생 원수라고 해놓았다.
<하늘(세상의 지붕) - 없어짐>
하늘이 종이축이 말려지도록 말려가더라. 하늘은 보호막이고 지붕이다. 이것이 종이축처럼 말려들어가듯이 없어지므로 허황해진다. 지붕이 없는 집이 되고 만다.
<산, 섬들(세상의 자랑) - 옮겨짐(땅과 천체군의 흔들림)>
그리고 산과 섬들이 옮겨질 것이다. 산과 섬들은 자랑이다. 산이 있고 섬들이 있다는 말은 땅의 자랑이다. 이 자랑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재앙이라고 하는 이 물질적 사건, 물리적 사건은 꼭 올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니 그 의미가 이것이 바로 대환란이겠구나. 세상에서는 하늘과 땅이 진동한 것이 대환란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들의 거점과 자기들의 빛과 자기들의 그림자와 영광과 지붕과 자랑이 사라지면 그것이 바로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완전히 망하는 것이다.
D. 땅의 거민의 반응
땅의 거민들이 반응을 하고 있는데, 굴과 산과 바위틈에 숨었더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낯과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리워 달라”고 호소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 함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 한다는 뜻인데,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 보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행악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이런 말이 있다. 악을 행한 자는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렇게 되어있다. 하여간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있다. 요나서 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갔다는 말이 나온다. 전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건 간에 자기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 있다. 아주 악하면 그것도 없어지겠지만. 이것은 옳지 못한 자의 반응이다.
2. 어린양의 진노를 두려워함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 쉬운데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워 달라고 한다. 어린양의 진노가 무엇이길래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리워 달라고 하는 것인가? 사자의 진노 같으면 이해가 된다. 왕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다. 왕이 한번 화를 내버리면 당장 사약 내리고 당장 귀양 가고 능지처참한다. 왕의 진노는 누구나 다 무서워하는 것이다. 잠언 20장 2절에 보면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고 한다. 왕이 한번 화내면 누가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어린양의 진노>
어린양의 진노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천만마리가 와서 성질을 내보았자 뭐가 두렵겠는가. 오히려 웃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달라고 할까?
◆ 운명의 진노
어린양의 진노는 우리 인생의 운명의 진노이다.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라고 생각하기 참 쉬운데 우리가 어린양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우리 인생이 사실은 어린양이다. 만물 중에 우리는 어린양이다. 어린양으로 태어난 우리의 운명을 가지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 고통이 온다. 어린양은 어린양대로 살아야 되고 사자는 사자대로 살아야 된다. 어린양의 운명을 가지고 사자처럼 살려면 그처럼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 나는 세상 살기가 참 어렵다, 어디를 가도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운명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넘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렵다. 어린양은 어린양대로 살면 편안한데 사자가 와서 잡아먹고 늑대가 와서 잡아먹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다. 운명이 그런 줄 알고 풀 뜯어먹다가 늑대 오면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잡히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게 풀 먹고 살 수 있다. 사는 날까지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어린양의 운명을 벗어나서 다르게 살려고 생각하면 그날의 풀을 먹을 수가 없다. 자기 앞에 있는 풀도 뜯어먹을 수가 없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어차피 죽을 인생하면 오늘 밥도 못 먹는다. 밤에 죽을지 낮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몇 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이러고 앉아있으면 밥맛이 나겠는가. 죽을 때 되면 죽고 부르시면 가고 이렇게 되면 맛있게 먹고 살다가 오라하면 가면 될 일인데 그것을 자기가 벗어나려고 하면 고통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의 운명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고난이 오게 마련이다. 혹시 사람이 살기가 어려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돌아오면 금방 쉬워진다. 밥 못 먹던 사람이 금방 밥 먹게 되고 잠 못 자던 사람도 금방 잠 잘 잘 수 있게 된다.
어린양은 우리의 운명을 구속하고, 대속한다. 어린양으로 속한다는 말은 어린양으로 우리 운명을 대신한다. 구속하는 운명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어린양의 운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린양의 자리를 벗어나서 다른 자리에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 이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어린양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린양이 제시된 것이다.
이 어린양의 구속. 이것이 인류의 최후의 소망이다. 다른 것이 소망이 아니라 내가 내 원 자리로 돌아와야 되는데, 내 본 위치로 돌아오면 되는데, 본 위치로 돌아오려면 어린양이 있어야 돌아온다는 것이다. 최후의 희망이다. 욥기에 보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뵈오리라”(욥19:25,26)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내가 죽을지라도 이 육체가 썩어서 다 없어질 것이라도 나의 구속자가 있다는 뜻이다. 내 육체는 다 문들어지고 없어질지라도 내 가죽이 다 썩어질지라도 내 구속자가 살아계신다는 그 말이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친구들이 와서 계속 공격을 한다. 네가 죄를 졌으니 그렇지 죄를 안 졌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공격을 계속한다. 더욱 억울해서 하는 말이 죽을지라도 나에게는 나의 구속자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자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최후의 희망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곳에 가서 마치 어린양이 사자되고 싶어서 사자 굴에 가서 사자들과 놀아보려고 춤추고 있는 것과 똑같다. 사자들이 너 춤 좀 춰봐 그러면 살려줄게 그때 어린양이 거기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춤을 추고 있으면 또 살려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면 또 춤추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과 똑같다. 이 얼마나 불안한 인생인가. 우리 인생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필요하다. 나의 참 운명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속자의 진노(어린양)는 마지막 희망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나를 구속할 자가 진노했다는 것은 마지막 나의 희망이 없어졌다는 소리이다. 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건질 자가 없다면 죽은 것이다. 병이 들었는데 약이 전혀 없다면 이 병에는 전혀 약이 없다면 절망이다. 마찬가지로 구속자가 필요한 인생에게 그 구속자가 진노를 했다면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워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들어올 문을 항상 남겨 두어야 한다. 안되더라도 그 문만은 열어놓아야 한다. 모든 문이 막히더라도 하늘로 통하는 문은 열어놓아라. 그러면 살게 된다. 그것을 닫아버리면 살 수가 없다. 왜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을 존중하는가 하면 의사들이 오는 문을 막아버리면 병들면 죽는다. 그래서 아무리 의사가 뭐라고 해도 의사가 들어오는 문은 열어두어야 된다. 또 열어놓아야 내가 아프면 들어온다. 의사가 이러고저러고 한다고 하여 문을 닫아버린다면 내가 아프면 들어올 수가 없다. 의사는 악인이고 선인이건 간에 아프면 들어오는 사람이다. 적이라도 병이 있으면 죽게 되면 의사는 들어온다. 그러니 항상 그 문은 열어두어야 된다. 그래서 적십자사라는 것이 있다. 군대에서 전쟁을 그렇게 하면서도 왜 적십자 마크를 달고 있는가? 그 문을 열어놓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구속자(구원자)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나를 구속할 자가 들어올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화가 나고 뭐가 되더라도 나를 도울 자가 들어올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어야지 나를 도울 자를 쳐버리면 나는 다음에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세상사는 지혜도 그런 것 같다. 자기를 도울 자가 자기를 도울 수 있도록 통로를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어리석게도 그것을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기를 정말 도울 사람인데 그 사람을 미워해 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 안 된다. 자기를 도울 사람을 알아서 그 사람에게만은 꼭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자가 들어올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양에게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평소에는 멸시하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어린양이 나를 구속할 것이므로 그 어린양이 들어올 문을 나는 남겨두어야 된다.
나도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그때그때 꼭 나를 도울 자가 와서 도왔다. 그 도울 자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미 죽었을 것이다. 꼭 그 도울 자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도울 자가 들어올 문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들어오고 싶어도 못들어 온다. 안됐네 하고 생각을 해도 그 문이 안열려 있으면 못들어 온다. 다행히 그것이 열려있었던 것 같다. 내가 신학교를 가게 될 때도 그렇게 되었고, 또 교회에서 나와서 CCC에 들어갈 때도 역시 도울 자가 와서 끌고갔다. 내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내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찾아와서 끌고 갔다. 문이 있었다는 말이다. 여러분도 혹시라도 정말 불나게 화가 나더라도 문 한쪽은 열어놓아야 된다. 하나님께는 꼭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나를 구원할 자의 문은 꼭 열어놓아야 한다. 그것까지 막아놓으면 안된다.
◆ 만유의 진노
그리고 두 번째는 어린양의 진노는 만유의 진노이다. 어린양이 진노할 형편이 된다면 누가 진노를 하지 않겠는가? 어린양이 진노를 할 형편이라면 산천초목이 다 진노할 것이다. 어린양이 진노할 형편이라면 사자의 진노는 만배에 이를 것이다. 어린양이 진노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어린양의 진노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이것이 대 환란의 필연성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사탄은 세상 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고 지금 발버둥치고 있다. 결국은 만국의 진노를 받는, 만유의 진노를 받는 길로 계속 이끌어가고 있다. 마지막에는 어린양이 진노하게 될 것이다. 악한 세상에서의 핍박. 이 핍박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로, 이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복음과 그 어린양의 위력, 보잘 것 없는 것 같은데 꼭 필요한, 아주 작지만 꼭 있어야 되는 것, 어린양은 그렇다. 우리가 논을 갈든지 밭을 갈든지 하려면 큰 황소가 필요하다. 나를 구속하려면 논도 못 갈고 밭도 못가는 어린양이 필요하다. 어린양의 진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
어린양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 그 통로를 우리가 열어놓아야 된다. 그 통로가 막혀진 사람은 자기 갈 길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은 왜 불행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는가? 바로 이 자기의 운명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아담은 이 운명을 무시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다. 가인은 이 운명을 말살시키기 위해 아벨을 죽였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이 속에는 절대로 평화가 없다. 흰말을 아무리 타고 나와도 평화가 없다. 결국은 청황색말로 바꾸어지고 만다. 세상이 아무리 평화를 주장하고 나와도 그 속에는 평화가 아니라 칼이 들어있다. UN본부 앞에 있는 것을 보면 칼을 쳐서 망가뜨린 것을 해 놓았다. 칼을 없애자는 뜻이다. 칼을 없애자고 해놓고 붉은말이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수백만의 사람이 죽었다. 붉은 깃발 아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결국 그 평화 뒤에, 흰말 뒤에 붉은말이 곧장 따라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보면서, 그 안에서의 하나님의 지혜, 복음을 전파하는 지혜를 배워야 되고 우리도 우리 일생이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구나. 복음이신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구나. 이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주님의 곧은 길로 당신의 은밀한 길로 부르셔서 이 복잡하고 사망의 행진 가운데로 끌고 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 길을 열어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생명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말 살아있는 길로 생명의 길로만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또한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길을 밟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